소욱은 어두운 얼굴로 앞으로 나아갔다.마음속은 온갖 생각들로 가득했다.마치 그가 무엇을 하든, 저 여인은 결코 만족하지 않는 듯했다.단회욱이 구운 생선이 자신이 구운 것보다 맛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갑자기, 그는 뒤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폐하!”걸음을 멈추며 등을 돌리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무슨 일이냐.”“황제 오라버니! 소환 오라버니가 폐하께 사과드리러 왔답니다!”뒤돌아보니 소군주도 함께 있었다.그녀는 봉구안의 곁에 서서 한 손에는 구운 생선을 들고 있었는데, 입가에는 검은 그을음이 한 바퀴 둘러져 있었다.또 다른 손으로 봉구안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맞죠? 오라버니? 황제 오라버니가 생선을 굽느라 얼마나 힘드셨는데요. 그런데 안 드시면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그렇죠? 맞죠?”봉구안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습니다.”소욱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가 곧 표정을 풀며 태연하게 말했다.“짐이 그 정도로 유치한 줄 아느냐. 짐은 정말 배가 고프지 않았다.”소군주는 황제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황제 오라버니, 적당히 하셔야죠! 소환 오라버니가 이렇게 와서 사과까지 하시는데, 왜 자꾸 빼고 그러세요? 어서 가서 구운 생선을 먹으러 가요!”소욱은 여덟 살짜리 꼬마에게 훈계를 받을 줄은 몰랐다.그렇지만,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그러나 셋이 다시 불가로 돌아왔을 때, 그들이 본 것은 생선뼈 더미와 배부른 표정을 짓고 있는 진한길이었다.진한길은 무덤덤하게 말했다.“폐하, 부맹주... 두 분이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하셨으니, 신하가 보기에 이 구운 생선을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먹었습니다.”소군주는 화가 나서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너는 정말 큰 식충이구나! 흥!”소욱 역시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그러나 봉구안은 태연히 말했다.“제가 가서 마른 양식을 가져오겠습니다.”그녀가 돌아서자, 소욱은 차갑게 진한길을 바라보며 물었다.“맛있더냐.”진한길은 진심으로
그날 저녁 소욱 일행은 객잔에 입주했다. 봉구안은 소군주의 방 지붕 위를 지켰다.밤바람이 차가워서 추위가 느껴지자 그녀는 허리춤에서 술 한 병을 꺼냈다.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 객잔에서 소욱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폐하, 서왕 전하의 밀서입니다.”진한길이 다가와서 아뢰었다.그는 황제와 지붕 위의 검은 인영을 보고 당황스러웠다.‘폐하께서 지나치게 소환을 신경 쓰는 것 같은데.’그는 소환이 사내를 좋아한다던 술 취한 동방세의 말이 떠올랐다.진한길은 신속히 고개를 저었다.소환이 그런 취향이 있다고 해도 황제는 아니었다.두 사람 사이에 뭔가 복잡한 감정이 싹틀 리 없었다.소욱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진한길의 손에서 밀서를 받아들었다.서왕은 서신에서 천용회를 언급했다.감옥에서 천용회의 기호를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그렇다는 건 흑포가 감옥을 탈출할 수 있었던 건 천용회의 도움이 있었다는 얘기였다.소욱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일정을 앞당겨야겠군. 속히 황성으로 복귀한다.”“예!”진한길은 공손히 답했다.진작에 이랬어야 할 일이었다.하지만 상황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소군주가 갑자기 앓기 시작한 것이다.그녀는 그날 밤부터 고열에 시달리며 의식을 잃었다.진한길은 현지 의원을 불러왔다.의원은 그녀의 맥박을 확인하고는 아연실색했다.“이건 극한의 병입니다!”밖에서 기다리던 소욱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소군주의 병증에 대해 그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사정을 아는 진한길은 의원을 보낸 후에 조심스레 말했다.“폐하, 군주의 병을 일반 의원은 치료가 힘든 것 같습니다.”소욱은 침상으로 다가가 파리하게 질린 소군주의 입술과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소환을 불러오거라!”“예!”잠시 후, 봉구안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녀는 어두운 곳에 숨어 있었기에 의원이 소군주의 방으로 들어오는 것은 보았지만 그냥 일반 병증이라고만 생각했다.하지만 소녀의 창백하게 질린 안색을 보자 그녀는 불길한 느낌이
봉구안은 결연한 표정을 하고 그들에게 말했다.“강호의 원칙대로 무고한 자들은 건들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자꾸나.”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날이 곧 밝을 무렵, 객잔과 십리 정도 떨어진 수림.봉구안은 한쪽 무릎을 꿇고 검 한자루에 몸을 지탱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바람이 그녀의 머리띠를 흩날리고 있었다.그녀의 주변으로 죽은 시체들이 즐비했다.그들의 붉은 피가 수림을 물들였다.이제 남은 건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뿐.그도 중상을 입고 나무에 몸을 지탱한 채, 손으로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를 부여잡고 있었다. 가면은 이미 부서져서 초췌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소환은 괴물이 따로 없었다.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괴물!봉구안은 검을 짚고 몸을 일으키고는 싸늘한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곧이어 그녀가 검을 휘둘렀다.챙그랑!사내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해서 눈을 감은 순간, 갑자기 날아온 화살이 봉구안을 향했다.그녀는 신속히 몸을 비틀어 화살을 피했다.고개를 돌려 보니 높은 지대에 흰 옷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가면 아래의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봉구안이 남부에 있을 때 흑포와 함께 등장했던 그 사내였다.한숨을 돌린 우두머리가 그 백의청년을 향해 달려갔다.하지만 곧이어 사내의 검이 우두머리를 향했다.슉!검은 순식간에 우두머리의 가슴을 뚫어버렸다.우두머리는 죽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설마 조정에서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것일까?하지만 교주가 아직 출관도 하지 않았는데 대체 척살령은 누가 내렸단 말인가!천용회에 그를 죽일 자격을 가진 자는 몇 없었다.털썩!우두머리는 그렇게 눈도 감지 못하고 쓰러졌다.봉구안은 몸을 솟구쳐 백의 청년에게 손을 뻗었다.사내는 그녀를 향해 화살을 쏘았지만 그녀는 가볍게 몸을 날려 피했다.그녀의 검이 그에게 닿던 순간,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구안아, 내 사랑.”순간 봉구안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고 검은 방향을 틀었다.곧이어 사내의 장풍이
관부에서는 수림에서 열 명이 넘는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밀보를 받았다.천용회는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려 했겠지만 이렇게 대놓고 암살을 시도한 걸 하필 황제에게 들켰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백포를 입은 자들이 누구인지, 천용회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소욱은 끝까지 조사하기로 했다.이틀 후, 소군주의 병세가 호전되자 일행은 다시 길을 나섰다.봉구안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행을 호위했다.일정은 순조로워 3일만에 그들은 황성에 도착했다.봉구안은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성에 도착한 후로 그들과 작별인사를 했다.그녀는 자신이 직접 쓴 책자 하나를 소군주에게 선물로 주었다.“군주, 매일 권법을 연마하면 신체가 건강해질 겁니다.”소군주는 그녀와의 이별이 너무 아쉬운 모양이었다.“오라버니, 황성에 며칠 더 머물면 안 될까요? 황궁 알아요? 엄청 큰 곳이고 뭐나 다 있어요. 저와 황궁에 가시면 매일 기쁘게 해드릴게요. 황제 오라버니도…”소욱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소 부맹주, 나중에 또 보지.”그녀의 마음에는 단회욱뿐이라는 것을 그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그랬기에 더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그녀를 보내주는 것이 그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는 방법이었다.그는 나중에 다시 보지 않기를 바랐다.앞으로 그는 황제의 삶을 살고 그녀는 원하는 대로 강호를 떠돌며 살게 될 것이다.하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말해도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봉구안은 그제야 홀가분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나중에 봅시다.”말을 마친 그녀가 뒤돌아섰다.소군주가 울며 달려가서 그녀를 안았다.“오라버니, 가지 마세요! 저 오라버니가 좋아요. 오라버니랑 노는 게 재밌어요. 더 놀고 싶어요…”소욱은 등을 돌려 진한길을 호출했다.“군주를 모시고 오너라.”말을 마친 그는 홀로 황궁을 향해 걸어가며 절대 뒤돌아보지 말자고 속으로 되뇌었다.봉구안은 소군주의 손을 놓고 뒤돌아서 정중히 말했다.“군주께서 스무 살 생신 때 꼭 돌아와서 생신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맹세하죠.”그러니 잘 살아가라는
그녀의 눈빛은 부드러웠지만 광기와 집착이 숨겨져 있었다.영화궁.궁인들은 기쁨에 겨워 환호했다.“폐하께서 돌아오시자마자 흔빈마마 처소로 걸음하신대요!”그 시각, 내전.연상은 황제를 마주하는 것이 여전히 두려웠다.그녀는 봉구안이 입던 옷과 썼던 장신구들을 상자에 넣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벌벌 떨고 있었다.그리움을 달랠 모든 것들을 없애버리려는 걸까?하지만 그건 결국 자신을 속이는 경우가 되지 않는가?그가 해야 할 것은 흔빈이라는 칭호를 폐하고 영원히 영화궁에 걸음하지 않는 일이었다.사람을 연모하는 것이 극에 달하면 떼어내기 힘들다고 하는데 소욱은 그것을 강제로 떼어내려 하고 있었다.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그는 갑자기 서랍에서 책자 하나와 옆에 놓여진 봉황 비녀 하나를 발견했다. 그가 선물한 비녀였다.책자를 펼친 그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안에는 봉구안이 쓴 그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그는 한때 그녀에게 매일 어서방으로 그녀를 불러 한 시진을 자리를 지키게 한 적이 있었다.그는 그때도 그녀가 억지로 그곳에 가서 시간만 때운다고 생각했었다.[제왕은 폭력적이지 않고 벌하는 자들은 다 이유가 있다.][제왕은 착한 심성을 가졌지만 해당집은 어울리지 않는다.][몸이 거부하지 않는 자에게 마음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입밖으로 낼 수 없고 확실치도 않으며 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 일찌감치 끊어내는 게 맞다.]소욱은 마음이 착잡해졌다.그는 그녀의 마음에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연상은 황제가 든 것을 보고 순간 당황했다.서랍 안의 물건들은 봉구안이 떠날 때 처리하라고 지시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냥 처리하긴 아쉬워서 몰래 감춰둔 것인데 황제가 그걸 찾아낸 것이다.그녀가 불안에 떨 때, 갑자기 고개를 든 황제가 핏발이 선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짐이 너에게 입맞춤을 하고 강제로 너를 취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겁에 질린 연상은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비녀로 목을 겨누었다.“폐하, 소인을 놓아주십시오
봉구안은 살짝 놀란 눈으로 눈앞의 소욱을 바라보았다.또 무슨 일이지?그가 얼마나 굳센 의지로 따라오고 싶은 충동을 눌렀는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그는 그녀의 마음에 자신만 품기를 바라지 않았다.그냥 자리 하나만 내어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그녀가 마음의 창을 조금이라도 열어준다면 그것을 찢어서라도 비집고 들어갈 것이다.그는 진작에 그 책자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가 되었다.하지만 오늘 발견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녀가 멀리 떠나지 않은 시점이라서.봉구안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폐하…”소욱이 갑자기 말했다.“누군가 짐을 죽이려 하고 있다.”봉구안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워낙 무예가 뛰어난 소욱이고 신변에 호위무사들도 있는데 자객이 나타나더라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소욱이 말을 덧붙였다.“강호 인사였어. 천용회와 유관하단 것만 알고 있고 다른 단서는 없어. 그래서 짐은… 소 부맹주가 짐을 도와 그자들을 찾아주었으면 한다.”봉구안이 주저하며 말했다.“폐하, 소인은 할 일이 있습니다.”천용회의 일은 줄곧 추적하고 있었다.소욱이 말했다.“알고 있다. 짐은 단지 이 일을 자네가 마음에 두었으면 해서…”그는 자신의 안위를 두고 그녀의 관심을 바라고 있었다.지금 보니 효과는 미미했다.그녀가 마음에 그를 품었다고 해도 그를 위해 남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소욱은 자신이 아는 사실을 그녀에게 전하고 싶었다.“감옥에 천용회의 기호가 있었다. 그러니 흑포는 아마 천용회 사람일 것이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예를 행하고 작별인사를 했다.그녀가 그렇게 무심하게 소욱의 옆을 지나치려는데 사내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그리고 축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황궁에 천용회 사람이 있다. 숨어 있는 자를 대비하긴 어려운 법이지.”“만약에… 짐이 목숨을 잃는다면 남제에는 대란이 일어날 것이다. 짐에게는 자식이 없으니 각 지방의 왕들이 황위를 두고 싸우겠지.”“
소욱은 바로 봉구안을 궁으로 부르지는 않았다.그녀는 현재 강호 인사이고 궁을 출입하는 것이 불편했다.그리고 그녀와 궁에서 천용회를 조사하다가 거짓말이 들통날 것도 걱정이 됐다.그래서 그는 친히 여기까지 걸음할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이 만나자마자 봉구안은 일 얘기부터 꺼냈다.“그리하여 흑포와 그 흰옷을 입은 자들 모두 천용회 사람이었습니다. 무림맹을 적대하는 건 강호를 통일하기 위함이지요. 폐하를 암살하려는 것은 손길을 조정까지 뻗치려는 의도일 수 있습니다.”“폐하, 저는 폐하께서 각 지방으로 추방한 왕야들을 조사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그들 중에 천용회와 왕래가 있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소욱은 달싹이는 그녀의 입술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몰론 그녀가 한 말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다.“짐의 형제들이 불경한 마음을 품고 천용회와 결탁하여 짐을 제거하려 한다는 말이냐?”그러고 보면 일리가 있었다.궁 안에 천용회 암살자가 나타난 일은 그의 거짓말이지만 과거 천용회 흑포의 매복과 그에게 천수독을 쓴 것을 생각하면 분명 왕래가 있을 것이다.소욱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과거 무림맹은 천용회를 소탕하였고 교주와 그의 심복들은 각지로 도망쳤죠. 그 동안 그들은 줄곧 재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폐하께서 먼 지방으로 추방한 왕야들 중에 누군가는 천용회와 왕래를 했을 것입니다.”“천용회가 그를 도와 폐하의 목숨을 취하면 그는 관부의 힘을 이용해 천용회의 천하통일을 도와준다고 했겠지요.”“선성의 반란 중에 왕수인은 그들의 꼭두각시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폐하를 선성으로 불러 담판을 요청한 것도 폐하의 목숨을 노린 수작이 분명해요.”소욱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그러면서도 그의 눈빛은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곧이어 그는 화제를 돌렸다.“다시 계획을 세워야겠군. 조정과 무림맹은 연합하여 천용회를 완전히 뿌리뽑아야 한다. 소 부맹주, 저녁은 먹었느냐?”봉구안은 일 얘기만 나오면 시간이
봉구안은 술을 입에 대면 실수할까 봐 술이 달갑지 않았다.하지만 한잔 한잔 비우는 소욱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옆에서 거들 수밖에 없었다.“짐은 소싯적 검을 들고 천하를 누비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어마마마께서 돌아가신 후 선황께선 짐을 궁 밖으로 보내 무예를 수련하게 했지.”“황궁을 나간 후에야 천하가 이리도 큰 줄을 알았다. 황궁에서 귀한 신분을 갖고 살아가지만 사실 상 우물 안 개구리와 다름이 없었지.”“소환 네가 어릴 때부터 강호를 누비고 다닌 것을 알고 있다. 분명 너는 짐과 넌 다른 부류라 생각할 테지.”“짐의 신분 때문에 속에도 없는 말을…”봉구안이 담담히 말했다.“폐하, 취하셨습니다.”“짐은 멀쩡해.”소욱은 그녀를 집요하게 응시했다.“짐은 이 황위에 오른 후로 친우가 없었다. 소환 네가 첫사람이야.”“선성의 난에서 난 너의 뛰어난 능력이 마음에 들었다. 강호에 너와 같이 정의로운 자가 없어서는 안 되지.”“이 술은 짐이 너를 위해 들지.”그 시각, 만수궁.태황태후는 한숨만 쉬고 있었다.“폐하께서 궁으로 돌아오신 후에 영화궁에 한번 걸음하시고는 다른 비빈들의 처소에는 들르지도 않고 계시니…”“영비, 폐하께서 나랏일에만 몰두하시니 네가 주동적으로 나설 때야. 폐하께서 널 잊게 하면 안 된다.”영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할마마마, 신첩은 폐하께서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이 뜻대로 되신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폐하께서 흔빈을 마음에 품으신 건 그 아이의 능력이지요.”“신첩은 그 아이가 하루라도 빨리 폐하를 위해 황자를 잉태하였으면 합니다.”태황태후는 그런 그녀를 보고 나무라듯 말했다.“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황궁의 여인들은 자식을 등에 업고서 강해지는 것이다.”“지금은 다들 사이가 좋아 보이지만 나중은 어떨까?”“멀리 볼 것도 없이 태후만 봐도 알지 않느냐. 태후 역시 과거엔 총애도 못 받는 비빈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아 지금의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지.”“선황후를 보거라. 일국의 황후
선성 밖에서는 매서운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수십만 남제 장병이 다양한 무기를 들고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그 소리는 선성 위를 울려 퍼지며, 마치 갇혀 있던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위압감을 주었다.성 안에서도 그 소리가 선성을 흔들 만큼 강렬하게 울렸다.봉구안은 전마를 타고 성벽을 응시하고 있었다.갑옷 아래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대단한 힘이 느껴졌다.성문은 이미 단단히 닫혀 있었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도망칠 수 없는 상태였다.성루 위에서는 단춘이 놀란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그 옆의 부장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장군, 저건 동방군입니다. 대체 어떻게 선성에 나타난 걸까요?! 분명 감주에 있어야 할 자들인데…”하늘에서 날아온 것도 아닐 텐데,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북연의 황제는 성 밖 동방군의 존재에 크게 분노했다.그는 단춘의 옷깃을 움켜잡고 호통을 쳤다.“감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그런데 이게 대체 뭐냐! 단춘, 정말 잘도 해냈구나!”단춘은 당혹스러웠다.본인도 전혀 모르고 있던 일이었기에 황제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그때 수화부 연합군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남제가 당신들을 속인 게 확실하군!”황제는 점점 격분하며 단춘을 더욱 매섭게 쏘아봤다.“동방군이 너희 뒤를 따라왔는데도 모르다니, 이런 실력으로 남제를 우리 북연과 나누겠다고? 정말 가소롭구나!”단춘은 황제의 손을 뿌리치며 반박했다.“폐하, 성 밖에 있는 건 일부 동방군에 불과합니다.”“게다가 우리 동부 연합군만 속은 것도 아닙니다.”“남부 연합군인 수화부는 어땠습니까? 그들이 남제군을 알아챘습니까? 똑같이 속았으면서 왜 저희에게만 책임을 묻습니까?”동부 연합군의 장수들도 이에 동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남제의 계략은 워낙 교묘합니다. 감주를 언제 빠져나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습니다.”“폐하, 북부 연합군이라고 해서 뒤따라오는 남제군을 완벽히 파악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그만들 하십시오.
강력한 적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어리석은 동맹이었다.단춘은 선성의 옥석비를 손에 넣고 싶었지만,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그는 정정당당히 조유관을 공략하며 남제에 진입했다.그런데 수화부 연합군은 도대체 뭘 하는가?공격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동부 연합군의 성과를 가로채려는 것은 아닐까?그들의 이런 태도는 단춘을 화나게 했다.그렇다고 이미 도착한 연합군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결국 단춘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모두 들어라. 먹을 것도 쉬는 것도 뒤로 미뤄라.”“다른 나라보다 앞서 선성에 도달해야 한다!”“예!”……감주.대하국 연합군은 성 밖에서 남제 동부군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남제 황후 봉구안이 이미 거미줄이라 불리는 비밀 통로를 통해 대군을 이끌고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말이다.그녀는 소수의 병력을 남겨 감주에 대규모 병력이 주둔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이 계책에 말려든 동부 연합군은 발이 묶이고 말았다.그 사이, 봉구안의 동부군은 비밀 통로를 통해 이미 묵성에 도착해 있었다.그곳에서 그녀는 동방세를 만났다.동방세는 거미줄 비밀 통로의 마지막 관문을 개조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그는 고된 작업 중에도 농담을 잊지 않았다.“이번 거미줄 개조를 위해 황제께서 이 장군의 10만 대군을 내게 맡기셨소.”“덕분에 난 한동안 대장처럼 군림하며 유세를 떨었네.”황제가 보낸 인력 덕분에 그는 북부와 동부의 거미줄 비밀 통로를 효율적으로 개조할 수 있었다.이제 마지막 관문만 마무리하면 되는 상황이었다.봉구안은 그의 쇠약해진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동방세, 남제 장병들을 대신해 깊이 감사의 뜻을 전하네.”“선성으로 갈 계획이오?”동방세가 웃으며 물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소.”동방세는 들고 있던 망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여기 작업만 끝내면 범진과 함께 선성에서 보도록 하세.”그는 선성에서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을 직감
남강.서왕은 수화부 연합군의 갑작스러운 철수가 단순한 계략일 것이라 의심했다.하지만 밤중에 직접 확인한 결과, 그들의 철수는 패주와 다름없었다.식기조차 챙기지 못하고 떠난 흔적이 역력했으며, 모닥불조차 꺼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조사를 거듭한 끝에, 수화부 연합군이 선성의 보물 이야기를 듣고 급히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서왕은 당황스러웠다.적군이 사라졌으니, 그는 계속 방어를 유지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한편, 수화부 연합군은 선성을 향해 급히 북진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병사들은 강추위를 뚫고 말을 달리며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선두에서 말을 탄 장수가 외쳤다.“장군의 명령이다! 속도를 더 내라!”병사들은 지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우리가 가봤자 보물이 우리 손에 들어올 것도 아닌데, 이렇게 서둘러야 하나?”“그러게! 선성 보물 얘기를 듣자마자 진지를 철수했지만, 보물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잖아. 그 유명한 옥석비도 하나뿐인데, 그게 우리 차지가 되겠어?”“명령이 내려왔으니 따를 수밖에. 우리가 무슨 선택권이 있겠어?”……동산국 황궁.동산국 황제는 어마장에서 여전히 기력이 넘쳤다.오십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이어 과녁 중심을 명중시켰다.곁에 있던 신하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폐하, 수화부 연합군이 남강 공격을 포기하고 북상하여 조유관으로 향했다고 합니다.”조유관은 대하국 연합군이 최초로 돌파한 약점이었다.더 많은 연합군이 조유관으로 몰려드는 상황은 연합군에게 유리했다.그러나 그로 인해 남부 방면의 공격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황제는 활을 내려놓았다.머리칼에는 은빛이 드리워졌지만, 여전히 강인한 모습이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담대연의 소식은 알아왔느냐?”“담대연은 여전히 남제에 억류되어 천옥에 갇혀 있습니다.”황제는 다시 활을 들어 두 개의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한 번의 발사로 과녁을 뚫자, 곁에 있던 신하가 찬사를 보냈다.“폐하, 화살로 만물을
남강.서왕의 어깨는 부상으로 아파왔고, 완부옥은 표면적으로는 화목한 부부처럼 행동하며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러나 막상 군막 안에 들어가면 두 사람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뉜 듯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완부옥은 저녁을 지나치게 많이 먹고 배가 부른 상태였다. 갑작스런 복통에 허리를 구부린 그녀를 보자, 서왕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유화! 군의를 데려오라!”그는 완부옥의 뱃속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했다. 하지만 완부옥은 그저 체한 것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필요 없습니다!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마십시오.”내심 불안했던 그녀는 거짓 임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벌레가 최근에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 태아의 상태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군의가 와서 진찰을 하면, 모든 게 드러날 위험이 컸다.서왕은 그녀의 상태가 진정되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다. 그녀를 침대에 앉힌 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아이는 괜찮은가?”그의 시선은 그녀의 배로 향했다. 완부옥은 워낙 마른 체형이라 배가 불러도 잘 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느슨한 옷을 입고 그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서왕은 그녀의 진짜 상태를 전혀 알지 못했다.일반적인 임산부라면 나타날 만한 불편함이 완부옥에게는 전혀 없었다. 이런 점들이 서왕에게 의심을 품게 했다.그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다.“우리 아이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드디어 이 남자가 의심하기 시작한 걸까? 완부옥은 식은땀을 흘리며 속으로 초조해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어머,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이는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제가 어미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겠어요?”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옷깃을 살짝 건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마지막 기회를 줄 테니 솔직히 말해라.”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완부옥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평소에는 성격이 부드럽던 이
대하 연합군은 묵성을 함락한 뒤, 곧바로 선성을 향해 진격했다.장수들 중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 말했다.“단 장군, 지금까지의 남제 원정이 너무 순조롭습니다.”“선성에서 매복을 준비한 건 아닌지 염려됩니다.”단춘 역시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지만, 알려진 바에 따르면 동부군은 현재 감주에 주둔 중이었다.그는 전력을 선성으로 보내면서도 일부 병력을 감주로 보내 허위 공격을 감행하고, 동부군을 묶어두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만약 선성에 매복이 있다 해도, 우리의 10만 대군에 북부 연합군까지 합하면 수십만 병력인데, 선성 하나를 못 뚫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그럼에도 신중한 장수는 여전히 망설였다.“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남제의 전략은 적을 깊이 유인하려는 술책 같습니다.”“단 장군, 처음 계획대로 동부군을 견제하며 진격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단춘은 인내심이 바닥난 듯 짜증을 드러냈다.“유인이라니? 남제가 그렇게 어리석어 감주를 내놓고 선성에 매복을 펼친다는 말인가?”“만약 남제가 유인책을 쓴다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감주로 끌어들이는 것이겠지!”“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둬라. 만약 북연이 먼저 선성에 도달해 옥석비를 차지한다면, 우리는 북연의 손발 노릇을 하게 될 거야!”“북연이 동부를 맡으라고 한 것은 그들이 다 해먹으려는 술책일 뿐이다.”“기다릴 테면 기다려 봐. 하지만 대하는 그렇게 바보처럼 속지 않는다!”선성은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북연 황제 역시 선성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그들은 남하하는 도중 남제 잔병들에게 여러 차례 매복 공격을 받았으나, 모두 격퇴시키며 계속해서 진격했다.남제군이 계속 후퇴하면서, 연합군의 사기는 높아졌다.그러다 어느덧 설날 전야가 되었다.하지만 그날은 평소와 달리 정적이 감돌았다.백성들은 해가 지자마자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설날을 맞이하기보다는 다가오는 전란을 피해 숨으려는 모습이었다.황성.궁궐 안, 후궁들은 한자리에 모여 서로를 의지하며 밤을 지새웠다.그들은 한 손에 작은
군막 안.서왕은 한쪽 어깨를 드러낸 채 앉아 있었고, 군의가 그의 상처에서 독을 빼내고 있었다.예리한 단검을 손에 쥔 군의가 상처를 살피자, 서왕은 입에 물고 있던 두꺼운 수건을 꽉 깨물었다.그 모습을 본 완부옥이 눈썹을 찌푸렸다.“이미 독화살을 뽑아냈는데, 왜 또 칼을 드는 거죠?”호위 유화가 대신 답했다.“군의께서 남아 있는 독을 빼려면 살을 도려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완부옥은 소리 내어 웃었다.“살을 도려낸다고? 군의가 혹시 적국에서 온 첩자가 아닐까요?”그녀의 말에, 군의의 손이 떨렸다.“부인, 어찌 그런 망언을!”서왕은 입에 물고 있던 수건을 깨물며 눈빛으로 완부옥에게 조용히 하라는 경고를 보냈다.그러나 그녀는 군의를 밀어내고 서왕의 상처를 살폈다.피부가 갈라지고, 독이 퍼지며 상처 주변이 검게 변해 있었다.흔한 여인이라면 얼굴을 돌리며 기겁했을 터였다.그러나 완부옥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다.그녀는 머리를 갸우뚱하며 무심하게 말했다.“이게 그렇게 심각한 건가? 별거 아니네.”그 말에 유화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부인, 아직 독이 남아 있습니다! 군의께서 말하길 어서 전하의 몸을 도려내 독을 빼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완부옥은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독을 빼는 방법이 꼭 살을 도려내는 것뿐인가?”그녀는 품 속에서 작은 항아리를 꺼냈다.군의는 그것을 보며 해독약이라고 생각했다.유화 또한 그럴 것이라 짐작했다.그러나 항아리가 열리자, 그들이 본 것은 해독약이 아니었다.완부옥은 맨손으로 뚱뚱하고 하얀 벌레 하나를 꺼내더니, 서왕의 상처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군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전하! 조심하십시오! 저것은 독충입니다!”유화도 경악하며 외쳤다.“부인, 대체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시끄럽다!”완부옥은 눈살을 찌푸리며 꾸짖었다.“한번만 더 내 아이에게 소리를 지른다면 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군의는 이성을 잃고 외쳤다.“남강의 독충은 맹독입니다! 부
대하 사국 연합군이 묵성을 함락시키려 진격했을 때, 그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마주했다.묵성은 조유관과 똑같이, 텅 비어 있었다."말도 안 돼!"단춘은 차마 현실을 믿지 못했다.이 짧은 시간 동안, 도시 전체의 사람들이 대체 어디로 간 것이란 말인가?그들이 모두 감주로 이동한 것일까?그때, 정찰병이 헐레벌떡 뛰어왔다."보고 드립니다! 장군! 묵성에 적군이 없습니다!"연합군은 도시 곳곳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단 한 명의 인간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심지어 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니..."묵성은 한때 인구가 많은 번화한 도시였다.그런데 지금은 마치 유령 도시가 되어 버린 듯했다.연합군은 묵성에 주둔했지만, 밤이 되자 몰아치는 한파와 함께 불길한 분위기가 마을 전체를 감쌌다.캄캄한 어둠 속에서, 차가운 바람이 기괴한 신음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병사들은 모닥불을 피워 음식을 끓이려 했지만, 그제야 그들은 깨달았다.‘군량이 얼마 남지 않았어.’주군이 모여 있는 대장막 안.장수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단춘을 바라보았다."단 장군, 이건 분명 남제의 계략입니다!""우리가 이미 두 번이나 빈 성을 마주하면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습니다.""더욱이, 우리는 전쟁을 통해 식량을 보충하려 했으나, 기대와 달리 얻은 것은 없습니다!""장군! 이곳에서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내일도 계속 진군하시겠습니까?"단춘의 표정은 냉랭했다.눈빛은 날카롭게 빛났고, 깊은 고민이 느껴졌다."묵성이 비어있다면, 사람들은 모두 감주로 이동했을 것이다.""그러나 감주에 적의 매복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섣불리 공격할 수 없다."그는 고개를 들어 정찰병을 바라보았다."북연은 어떤가? 북부 연합군은 어디까지 진격했지?"정찰병이 빠르게 답했다."장군! 북부 연합군은 이미 풍양까지 진격했습니다.""풍양은 작은 군현으로, 바로 인근에 있는 박주를 넘어가면, 그다음은 곧바로 선성입니다!"회의실은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북연군의 속도는
이촌은 그야말로 유령 마을이 되어 있었다.사람의 흔적조차 없었다.연합군은 황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고, 북연 황제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마지막 생존자를 끌어오라 명령했다.화살에 맞은 병사는 상처를 끌어안은 채 끌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폐하, 분명 이곳입니다! 바로 이 마을에서 기습을 당했습니다!”하지만 북연 황제는 차가운 시선으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귀신조차 보이지 않는구나.”조사에 나섰던 정찰병들도 나섰다.“폐하, 틀림없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는 백성들이 있었습니다!”북연 황제의 손이 힘껏 말고삐를 쥐었다.“찾아라.”병사들은 마을 곳곳을 수색했지만, 백성은커녕 전날 죽은 병사들의 시신조차 사라져 있었다.그 순간, 눈보라가 더욱 거세졌다.쌓인 눈이 빠르게 대지를 덮으며 모든 흔적을 삼켰다.북연 황제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행군을 계속한다.”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남제의 백성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심지어 임현에 도착했을 때도 상황은 같았다.원래라면 사람이 넘쳐나야 할 곳, 그러나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병사들 사이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졌다.“이건 이상하다. 아무리 전쟁이 나도, 이렇게까지 흔적 없이 사라질 리가…”“설마, 남제 황실이 모든 백성을 대피시킨 건가?”전쟁이 벌어지면, 백성들은 피난길에 오르기 마련이었다.이는 그리 드문 광경이 아니었다.그러나 이번은 달랐다.정찰병들이 조사한 결과, 십 리 안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그것은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북연 황제는 손을 들어 병사들을 조용히 시켰다.“정찰병을 보내라.”이튿날 새벽.한 정찰병이 중대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폐하, 확인된 바에 따르면 남제 황실은 일찍이 백성들을 남쪽으로 대피시켰습니다!”“그들이 향하는 곳은… 선성입니다!”선성.남제의 전략 요충지이자, 철벽 방어를 자랑하는 도시.이곳만 함락하면, 남제 황궁까지 진격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북연 황제는
동방이 함락된 데 이어, 이번에는 북방까지 무너졌다.끝없는 위기였다.조정 대신들은 안색이 창백해졌고, 궁중 곳곳에서는 남제가 정말 끝장나는 것이냐는 말이 오갔다.그러나 용상에 앉은 소욱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그는 남제의 황제,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이었다.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질 수 없었다.조정이 파한 후, 문무백관들은 삼삼오오 모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어찌 된 일인가! 북방이 무너졌다니!”“연합군은 어디까지 쳐들어온 것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방이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는가!”“황후마마께서 그토록 신중하게 군을 이끌었음에도 동부를 지키지 못했으니, 서부와 남부도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겠군.”혼자의 힘으로 십여 개국의 연합군을 막는 것은 결국 무리였던 것일까.많은 대신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황궁 안.궁궐 안에도 불안감이 퍼졌다.후궁들은 벌써부터 눈물을 흘리며 두려워했다.그들은 조묘의 난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성이 무너지고 적군이 들어오면… 우리는 가축과 다를 바 없어요.”“북연은 호랑이 같은 나라라더니… 그들에게 잡히면 끝장입니다.”그녀들은 북연과 대하의 야만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포로가 된다면, 그들에겐 지옥보다 더한 운명이 기다릴 터였다.자녕궁.자녕궁에서도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녕비는 잔뜩 겁에 질린 채 태후에게 물었다.“고모님… 남제는 정말 망하는 겁니까?”태후는 이미 곳곳의 정보를 통해 전황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태평성대에는 꽃이 피지만, 난세에서는 한낱 들풀에 불과하구나…”“내가 널 지키지 못할 날이 올 수도 있다. 어서 이 병을 받거라… 들고 있다가 꼭 필요할 때 사용하거라.”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작은 약병을 녕비의 손에 쥐어주었다.그 의미는 더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녕비의 손이 떨렸다.그녀는 약병을 쥔 채, 눈을 뗄 수 없었다.“고모님…”태후는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애처롭게 미소 지었다.“내가 너를 궁에 들인 것은 잘못된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