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니 서서 뭐 해? 마마 어디 계시냐니까?”최 상궁은 멍하니 서 있는 연상의 어깨를 흔들었다.정신을 차린 연상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렸다.“제가… 찾아볼게요.”최 상궁은 일단 밖으로 나가서 황제를 맞이했다.젊은 황제는 외전의 의자에 앉아 딱딱한 표정으로 최 상궁에게 물었다.“황후는 어쩌고 너 혼자 나왔느냐?”최 상궁은 공손히 차를 올리며 답했다.“폐하, 마마께서는 목욕 중이니 곧 나오실 겁니다.”소욱의 표정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사실 영소전을 나와 자진궁으로 돌아가던 길에 갑자기 조사의 진전이 궁금해 영화궁으로 걸음한 것이었다.그런데 정작 장본인은 한가히 목욕이나 즐기고 있으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한참을 기다렸으나 황후는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소욱의 인내심은 거의 바닥나고 있었다.최 상궁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다급히 내전으로 달려갔다.연상은 멍하니 병풍 안쪽만 바라보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최 상궁은 화가 치밀었다.“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이냐! 마마를 찾아보랬더니 어째 여기서 멍하니 서 있어!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신 걸 몰라?”연상은 애써 침착하게 답했다.“마마께서 갑자기 배가 아프셔서 볼일을 보러 가셨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왜 갑자기 이 밤에 방문한 것일까요?”최 상궁은 다급히 연상의 팔목을 잡고 물었다.“너 오늘따라 이상해! 솔직히 말해봐. 마마 어디 계시냐?”연상의 어설픈 거짓말은 나이 든 최 상궁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최 상궁은 궁중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이니 이 정도 눈치는 있었다.연상은 딱 잘라 말했다.“볼일을 보고 계시니 곧 나오실 겁니다!”“그래. 마마가 있는 곳까지 안내하거라!”“안 됩니다! 마마께서는 볼일 보실 때 누가 방해하는 것을 싫어한단 말입니다!”연상은 최 상궁의 손을 꽉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두 사람이 업치락뒤치락할 때, 병풍 바깥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뭐 하고 있는 게냐!”유사양이었다.두 사람은 황급히 옷매무시를 수습하고 밖으로 나갔다.최 상궁이
소욱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봉구안에게로 다가왔다.봉구안은 담담한 얼굴을 하고 오른손을 소매 안으로 감추었다.“신첩, 폐하를 뵙습니다.”“볼일을 다 보고 돌아온 건가.”소욱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예, 폐하.”봉구안의 담담한 대답에 소욱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피 냄새가 나는군.”봉구안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산적들의 피를 묻히고 목욕도 하지 않았으니 피 냄새가 나는 게 당연했다.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힘없이 답했다.“그날… 이라서요.”소욱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자객이 영화궁 부근에서 출몰한 것이 이번이 두 번째였다.과연 이게 우연일까?사내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고 그녀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폐… 폐하!”그는 손가락으로 지그시 그녀의 손목 안쪽을 눌렀다.내력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봉구안은 몸을 바짝 긴장하고 가만히 있었다.그가 상처가 있는 오른손이 아닌 왼손을 잡아서 다행이었다.잠시 후, 소욱은 그녀를 풀어주었다.겉으로 보기에 황후는 내력이 전혀 없었다.그녀는 아예 무공을 모르거나 너무 강해서 내력을 감췄을 가능성도 있었다.봉구안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소욱을 의아하게 쳐다보며 물었다.“폐하, 왜 그런 눈으로 신첩을 보십니까? 혹시 신첩에게 묻고 싶은 거라도 있나요?”그리고 이때, 바깥에서 시위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폐하, 자객을 발견했는데 자진궁 쪽으로 간 것 같습니다!”소리를 들은 소욱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내 착각이겠지.’한 명은 수십 명의 금위군을 쓰러뜨린 무림고수이고 한 명은 춤이나 추고 시나 읊으며 살아온 세가의 여식이었다.둘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한편, 연상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황후를 바라봤다.봉구안은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가셨으니 이제 괜찮아.”“마마, 조금 전에 나타난 자객은 누구인가요?”“오백이야. 너도 전에 만난 적 있어.”“오 장군이셨군요! 그런데 그분은 본가에
영화궁에 태후와 황제, 그리고 황귀비가 도착했다.황귀비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손수건을 꽉 틀어쥐고 긴장에 떨었다.‘봉구안 이 요사한 년이, 진짜 일을 크게 벌일 줄이야!’봉구안은 사람을 시켜 산적들을 끌고 나오게 했다.인원수가 너무 많아서 주요하게는 두목을 대상으로 심문을 시작했다.봉구안은 담담한 얼굴로 태후와 황제를 바라보며 아뢰었다.“아버지께서 그날 신첩을 잡아간 산적들을 잡아오셨습니다. 워낙 교활한 놈들이라 조사한지 몇 달 만에 겨우 잡았네요.”“폐하께서 허락해 주신 덕분에 신첩은 결백을 증명하고 진범을 지목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심문을 통해 이들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알아냈습니다. 그자는 바로 황귀비 신변의 조검, 조 태감입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봤다.소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그는 그녀가 정말 조사를 통해 얻어낸 결과인지 아니면 영소전의 황귀비를 저격하기 위한 함정인지 고민하고 있었다.황귀비의 얼굴은 충격으로 빨갛게 물들었다.“조검이? 말도 안 됩니다!”하지만 두 눈은 음침하게 봉구안을 노려보고 있었다.‘봉장미 이년이 작정하고 일을 크게 만들었구나!’그리고 그녀가 이 사실을 황제와 태후 앞에서 대놓고 고했다는 것은 이미 산적들을 구슬려서 황후 자신에게 관한 것은 전부 입을 막았다는 것을 의미했다.태후는 딱히 놀라는 표정이 아니었다.조검은 시킨 일을 했을 뿐이고 진짜 주모자가 누구인지는 뻔히 보이는 사실이었다.봉구안은 싸늘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조검을 데려오너라.”곧이어 조검이 끌려왔다.그는 짐짓 어리둥절한 얼굴로 마당에 무릎을 꿇었다.태후는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위엄은 여전했다.태후가 입을 열고 물었다.“조검, 5개월 전 산적에게 황후를 납치하라고 사주한 일이 있느냐!”조검은 억울한 얼굴로 답했다.“소인은 억울합니다, 마마! 소인이 아무리 간덩이가 부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감히 그런 일을 했겠습니까! 소인은 궁중에서 귀비마마를 모시면서
봉구안은 바로 증인을 호출하는 대신, 산적 두목에게 물었다.“넌 조검을 그날 만났다고 하는데 날짜는 기억하느냐?”“기억합니다. 10월10일이었어요.”황귀비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그렇게 확신하느냐? 기억력을 자신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구나.”그녀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황후를 바라보았다.산적이 말했다.“매년 10월10일은 저희가 산신께 제사를 올리는 날입니다. 그날도 제사상을 차리고 한바탕 마시고 있는데 저자가 저희를 찾아왔어요.”조검은 상대의 약점이라도 잡은 것처럼 다급히 말했다.“억울합니다! 소인을 줄곧 궁에만 있었고 산에 갔던 적은 결코 없습니다!”봉구안이 기다렸던 반응이었다.“조검, 그날 네가 궁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있느냐?”조검이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날뿐이 아니고 소인은 줄곧 황귀비 마마를 신변에서 모셨습니다. 마지막 출궁했을 때가 포상 휴가를 나갔을 때였습니다.”“못 믿으시겠으면 출입 기록을 보시면 됩니다. 궁중 관리가 삼엄하니 절대 거짓은 없을 겁니다.”태후는 자신 있게 말하는 조검을 보자 갑자기 확신이 없어졌다.조검의 말이 사실일까?황귀비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황후 마마, 신첩이 내무부에 사람을 보내 10월10일날 입궁 명단을 가져오라고 할까요?”그녀는 은연중에 자신의 지위를 과시했다.금인장이 있었기에 명단을 자유자재로 조회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다.황후가 아무리 고귀해도 금인장이 없다면 명단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봉구안은 담담한 눈으로 황귀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부탁 좀 하지.”잠시 후, 내무부 태감이 명단을 가지고 왔다.10월10일뿐이 아니고 10월 한달분 출입국 기록이 전부 들어 있었다.소욱은 시위대와 시종들을 시켜 명단을 확인하게 했다.그 결과, 조검의 이름은 명단에 없었다.황귀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이를 어쩌나. 조검의 이름이 없네요? 그렇다는 건 산적이 거짓말을 하고 있단 거 아니겠어요?
시위대가 김낭자의 손에서 금화를 받아 자세히 관찰했고 황후가 진술한 것과 같은 결론이 나왔다.산적이 받은 금화와 김낭자의 금화는 출처가 같았다.조검은 이를 악물고 마지막 발악을 했다.“출처가 같다고 하여 뭔가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마침 우연히 소인에게 그 금화가 있었고 소인이 그것을 사용했다면요.”봉구안은 그의 말을 자르고 침착하게 말했다.“재물을 사랑하는 산적은 금화를 애지중지하지요. 은표로 교환하지 않고 바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조검은 산적을 매수하기 위해 많은 금화를 지출해야 했을 겁니다. 가지고 다니는 금은 조각으로는 당연히 부족했을 거고 그 많은 금화를 지니고 출궁할 수도 없었을 테니 은표를 지니고 궁 밖에 있는 전장에 가서 금화로 교환하였을 것입니다.”“전장에서 한꺼번에 그 많은 금화를 꺼냈으니 일련번호도 당연히 연결된 번호겠지요.”태후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니까 황후가 하고 싶은 말은 그 금화가 전부 전장에서 인출하여 사용되었다는 말이 아니더냐?”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예, 어마마마.”조검은 눈알을 부라리며 반박했다.“하지만 소인은 단지 그 전장에서 금화 한 개만 인출하였습니다.”봉구안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하고 싶은 말은 그 많은 금화를 네가 인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냐?”조검이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그녀는 말을 이었다.“풍융전장 주인을 데려오너라!”순간 조검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분명 나가기 전에 변장을 하고 나갔고 5개월이나 지난 일인데 황후가 어떻게 전장까지 조사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하지만 주인장을 데려와도 매일 출입하는 사람이 많으니 자신의 모습을 기억할 것 같지는 않았다.“소인, 폐하를 뵙습니다.”전장 주인은 공손히 예를 취했다.황귀비가 비웃는듯 말했다.“너도 조 태감의 얼굴을 기억한다는 말은 아니겠지?”주인장은 고개를 숙이고 침착하게 대답했다.“전장은 매일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니 당연히 얼굴을 다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다
“황후, 짐의 결정에 의심을 품는 것이냐!”소욱이 위협적인 눈빛으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소리쳤다.봉구안 역시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이 사람이 바로 그녀를 비롯한 천만 병사들이 충성을 맹세한 군왕이란 말인가!회의감이 들었다.그는 폭군일 뿐만 아니라 우매한 군왕이었다!그녀는 정색해서 말했다.“조검이 지은 죄는 산적을 사주해서 무고한 사람을 납치한 것에 끝나지 않습니다.”“또 뭐가 있지?”태후가 다급히 물었다.봉구안은 차게 식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신첩이 조금 전에 조검에게 물었을 때 그는 확신에 차서 10월10일 궁중에서 당직을 섰다고 고하였습니다. 일지를 확인하였을 때도 아무런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았고요. 그렇다는 것은….”봉구안은 손가락으로 황귀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황귀비는 금인장을 갖고 후궁을 관리하였지만 그 와중에 궁중에 출입 기록을 조작한 상황이 드러났으니 이는 명백한 직무 유기입니다!”“평소에 폐하를 매혹하는 것에만 신경 쓰느라 아랫사람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다는 것을 뜻하니 이게 요부가 아니고 뭡니까! 마땅히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황귀비는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않았다.그 말을 들은 그녀는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지금 나한테 요부라고?’태후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봉구안이 대신 해주자 기분이 좋아졌다.“황상, 황후 말에 틀린 것이 없어요. 조검이 자유롭게 궁을 출입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황귀비의 실책입니다.”황귀비는 고개를 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소욱을 바라보았다.“폐하, 신첩은… 신첩이 잘못이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소욱은 자신이 총애하는 귀비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고는 말했다.“황귀비는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영소전에서 반성하도록 한다!”연상은 황제의 편협한 판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황후는 애초에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일년 녹봉을 몰수하고 금족령까지 내려졌었다.황귀비는 직무 유기라는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반성에 불과
제왕의 분노에 봉구안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신첩이 무례하다 하셨나이까.”“폐하, 신첩은 납치당하였다가 구조되어 돌아온 후로 아무도 신첩의 결백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주변 사람들마저 신첩에게 입을 다물라고, 소문에 일일이 대응하지 말라고 권고하였지요. 소문은 지나가면 사람들은 이 일을 잊을 거라고요.”“하지만 과연 그럴까요?”“신첩은 매일 고통과 두려움 속에 살면서 스스로 자신의 결백을 의심하게 되겠지요. 여자의 결백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신첩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도 없이 납치 당하고 명성마저 잃은 신첩이 분명 피해자인데 사람들은 방탕한 요부라고 신첩을 비난하고 있습니다!”“신첩이 조금만 덜 뻔뻔했더라면 이미 그 유언비어에 숨이 막혀 죽었을 것입니다. 감히 황후의 예복을 입고 황궁으로 시집오지도 못했겠지요.”“신첩이 조금만 덜 뻔뻔했더라면 폐하께 먼저 진실을 밝혀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을 겁니다.”“이렇게 뻔뻔하고 무례한 저를 폐후로 만들어 주십시오! 조금만 더 무례한 짓을 저지르겠습니다. 이 사건의 진실을 모두에게 알리고 신첩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것을 만 천하에 알리게 해주세요!”소욱은 그녀의 구구절절한 말을 들으며 생모를 떠올렸다.하지만 곧이어 조금이나마 흔들렸던 마음은 차게 식었다.이렇게 날카로운 여자는 처음이었다.아니, 한 명 더 있었다. 그날 만났던 여자객이 그랬다.그들 중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객기였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위협적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폐후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짐이 황귀비를 엄벌하기를 바라는 거겠지.”제왕인 그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지 못할 리 없었다.봉구안은 부인하지 않았다.“조검은 시키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진짜 주모자가 누군지 폐하께서 정말 모르실 리 없지요.”소욱은 부인하지 않고 그녀를 풀어주었다.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얼마전에 유언비어를 퍼뜨린 주모자도 영소전에서 나왔습니다. 산적을 사주한 조검도 영소전 사람이지요. 과연 이게 우연일까요?”
“성지 납시오! 황귀비는 명을 받으시오!”춘화는 황귀비를 부축해서 외전으로 가서 예를 취했다.곧이어 궁인이 성지를 낭독하기 시작했다.“조검이 궁중 재물을 횡령한 증거가 확실한 바, 이는 황귀비의 불찰로 판단하여 금일부터 금인장을 제출하고 황후마마께서 후궁을 관리할 것을….”황귀비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황제가 그녀에게 금인장을 제출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궁인이 계속해서 낭독했다.“그리하여 황귀비를 귀비로 좌천한다!”능소전 궁인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조검이 잘못을 하였는데 황귀비가 이렇게 엄한 벌을 받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황귀비가 황제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날부터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춘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둘러 귀비를 부축했다.능연은 애써 침착한 척하고 있었지만 손발이 저리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신첩, 명을 받들겠습니다.”성지를 낭독하러 온 궁인이 떠난 후, 능연은 공허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그 모습을 본 춘화도 말없이 궁인들을 물렸다.능연의 예쁜 얼굴은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었다.“봉장미 이 간사한 년! 대체 폐하께 뭐라고 했길래 폐하께서 나한테 이런 명을 내린단 말이냐!”“마마, 고정하세요. 그래도 폐하께서 마마를 아끼는 마음은….”“꺼져! 다 꺼지라고!”능연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당장 봉장미를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녀가 입궁한 뒤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자녕궁.태후는 화가 나서 차도 목에 안 넘어가고 자포자기에 빠졌다.“내가 황상께 대체 뭘 그렇게 잘못을 했다고.”“능연 걔가 어디가 그렇게 예뻐서 이 정도로 편애하시는 거지?”“조검이 누구 사주를 받았는지 눈이 있으면 다 아는 일 아니더냐!”“이렇게 여색에 빠져 시비조차 가리지 않을 줄이야! 남제의 강산은 결국엔….”계 상궁은 다급히 태후를 말렸다.“마마, 듣는 귀가 많습니다.”이때, 태감 한 명이 들어와서 보고했다.“마마, 능소전 쪽에서 새로운 소
정희가 태연하게 말하는 동안, 유영의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갔다.뭔가 이상했다.특히, 갑자기 사라진 사신들이 계속 신경 쓰였다.그때…쾅!시녀가 차를 올리던 순간, 정희가 팔을 과하게 휘두르는 바람에 찻잔이 기울었고, 뜨거운 차가 그녀의 손등을 덮쳤다.정희는 서여국 궁에서 늘 귀하게 자라며 극진한 대접을 받아왔다.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절대 참지 않는 성격이었다.이번에도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시녀의 뺨을 후려쳤다.“짝!”순식간에 시녀의 뺨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시녀는 겁에 질려 고개를 깊이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사죄했다.“소첩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그러나 정희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차가운 시선으로 시녀를 노려보았다.“이게 시중 드는 태도냐? 감히 본 귀인을 데이게 하다니! 어서 약을 가져오지 못할까!”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영은 짜증스럽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나직이 말했다.“그만해라. 고작 이런 일로 소란 피울 필요 없다.”이곳은 장공주의 저택이었다.불필요한 소란이 화를 부를 수도 있었다.하지만 정희는 억울하다는 듯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며 볼멘소리를 했다.“어머니, 이게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요? 손이 이렇게 망가졌잖아요! 곧 황제 폐하를 뵈어야 하는데, 이대로라면 폐하께서 날 탐탁지 않게 여기시면 어쩌죠?”손은 여자의 두 번째 얼굴이라 하지 않던가.시녀는 더욱 당황하여 그대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소첩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그러나 정희의 눈빛은 더욱 매서워졌다.“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기는 하느냐? 당장 약을 가져오지 않고 뭐 하고 있느냐!”“예! 예! 소첩이 바로 다녀오겠습니다!”시녀는 몸을 떨며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러나 정희는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눈을 굴리며 불만을 토로했다.“어머니, 공주부의 하인들은 정말 형편없어요. 이렇게 어설프게 일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어떻게 생활하는
남제, 황성.유영은 여전히 사라진 사신들의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점점 초조함에 휩싸였다.그녀는 며칠째 서왕부를 드나들며 사신들의 행방을 묻고 있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아직 찾고 있습니다.”그녀는 처음엔 서왕이 정말로 사신들을 찾아줄 것이라 믿었다.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단순히 자신을 적당히 무마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역관.유영이 피곤한 얼굴로 돌아오자, 딸 정희가 기다렸다는 듯 다그쳤다.“어머니, 황제 폐하께서 이미 환궁하셨다고 합니다. 저흰 언제 입궁할 수 있습니까?”그러나 유영은 피곤한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사신들의 행방뿐이었다.정희는 초조한 듯 다시 물었다.“이모님께서는 아직도 회신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새로운 국서를 보내주셨다는 소식은 없나요? 어머니?”그제야 정신을 차린 유영은, 갑자기 딸의 손을 세게 움켜잡았다.“너의 이모께서 우리를 내버려 두실 리 없다! 나는 서여국 황제의 친여동생이란 말이다!”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지금 당장 입궁하여 직접 황제를 알현할 것이다!”이제 직접 황제를 만나 황제의 마음을 움직일 때였다.황궁에서의 냉대.그날, 황제 소욱은 갓 환궁하여 어전에서 상소문을 검토하고 있었다.그때, 한 호위가 조용히 다가와 보고했다.“폐하, 서여국의 사신을 자처하는 유영이 알현을 요청하고 있습니다.”순간, 소욱의 손이 멈칫했다.그는 이미 봉구안으로부터 서여국에서의 모든 상황을 보고받은 상태였다.유영이 서여국 황제에게 철저히 농락당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아직도 자신이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며 황궁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이 가관이었다.더욱 우스운 것은, 그녀가 자신의 딸을 후궁으로 들이려 한다는 점이었다.소욱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그는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지르더니, 차갑게 명령을 내렸다.“돌려보내거라.”목소리는 냉랭했다.봉구안이 없는 지금, 그는
임 대인은 봉구안의 정체를 알게 되자 본능적으로 그녀와 친척 관계를 강조하려 했다.그러나 그녀가 던진 단 한마디에,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진짜 가족이 아니라고?”누가 가족이 아니라는 것이냐?임 대인의 시선이 흔들렸다.그녀의 차가운 목소리가 감옥에 울려 퍼졌다.“유 씨 가문의 둘째 딸, 태어나자마자 너희가 데려가 키운 것이 맞느냐?”임 대인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설마 그녀가 묻는 것이 그때의 일일 줄이야…그는 태연한 척하며 고개를 숙였다.“그렇습니다! 제 누이가 둘째 딸을 낳은 후, 저희에게 맡겼습니다!”그녀가 자신의 표정을 읽지 못하도록.그는 필사적으로 침착한 척하며 말을 이었다.“황후마마, 이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하지만 봉구안은 여전히 형구를 손에 쥔 채, 냉정한 시선으로 그를 꿰뚫어보았다.“확실하느냐? 너희가 데려갔을 때, 그 아이가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았다는 것이?”임 대인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당연합니다! 아이는 태어나고 며칠 지나지도 않아 저희 손에 맡겨졌습니다!”그러자 봉구안이 단호하게 쏘아붙였다.“거짓말이다.”임 대인의 어깨가 움찔했다.봉구안의 눈빛이 더욱 날카롭게 번뜩였다.“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너희가 데려간 그 아이는 태어난 지 이미 세 살이었을 것이다. 내 말이 맞느냐?”그 순간, 임 대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애써 웃음을 지으며 그는 반박했다.“황후마마, 이건 말이 안 됩니다. 태어난 아이가 갑자기 세 살이 된다니, 그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그러나 봉구안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너에게 한 번의 기회만 줄 것이다.”“한 촉의 시간이 지나면, 너는 형장으로 끌려갈 것이다.”그녀는 단호하게 말한 후, 감옥을 나갔다.임 대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형장?”그녀가 정말로 자신에게 형벌을 가하겠다고?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어떻게 그녀가 이 일을 알게 된 것이지?무사히 넘긴 지 사십 년이 넘
관아의 지하 감옥.임 대인은 벽에 기대어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지긋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태연한 척했으나, 그를 뒤덮은 식은땀과 흔들리는 눈빛은 그의 불안을 여실히 드러냈다.그는 필사적으로 관아의 포졸들을 노려보며 외쳤다.“너희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나를 잡아가는 것이냐! 나는 결백하다!”그러나 그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포졸들이 일제히 양옆으로 길을 내주었다.그 길 너머에서, 봉구안이 들어왔다.높게 묶은 머리카락, 날카로운 눈빛, 강렬한 기세가 단숨에 대옥 안을 장악했다.“모두 물러가라.”단 한 마디. 그 한마디에 모든 포졸들이 지체 없이 대옥 밖으로 나갔다.오백만이 문을 닫고 바깥에서 경계를 섰다.어둠이 깔린 감옥 안.남은 사람은 봉구안과 임 대인뿐이었다.임 대인은 봉구안을 처음 보는 듯했다.그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너는 누구냐?”처음엔 관리인 줄 알았으나, 목소리를 듣고 보니 여자였다.관청에 여자가 올 리 없는데… 봉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리고 무심하게 옆에 놓인 형구를 집어 들었다.그녀의 손끝이 가볍게 그것을 매만지는 것만으로도, 임 대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건조함, 커진 눈동자, 땀에 젖은 손.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나, 나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소! 너희 관아에서도 멋대로 형벌을 가할 순 없는 것이오! 내가 말해 두겠소! 내 조카딸은 현 황제의 장모요! 나는 황실과 연줄이 있는 사람이오!”그의 목소리는 떨렸으나, 어떻게든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 위협하고자 했다.그러나 봉구안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입술은 냉혹한 곡선을 그렸다.“그럼, 나에 대해선 알고 있느냐?”임 대인은 당황한 듯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도무지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았다.하지만, 황제보다 높은 사람은 없을 터.그는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내가 왜 네 정체까지 알아야 하느냐! 어서 나를
서왕은 곧장 완부옥이 원하는 여자를 불러들였다. 그녀는 서왕부에서 일하는 여종이었다.그는 방 밖에서 한참 동안 떠나지 못했다.한 시진 후.안에서 물을 가져오라는 소리가 들렸다.이내 문이 열리고, 여종이 조심스레 나왔다.서왕은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가 들고 나온 것은 커다란 대야, 그 안에는 새빨간 핏물이 가득했다.서왕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부인은 괜찮느냐?”정충을 해독하려면 사람과 동침하는 것이 전부일 터.그런데, 이 많은 피는 대체…?여종은 겁에 질린 듯 몸을 떨며 대답했다.“부인께서… 너무 많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소첩은 부인의 옷을 갈아입히고, 목욕을 도와드렸을 뿐입니다…”서왕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이 여종은… 어디까지가 진실을 말하는 것인가.“정말로 목욕만 시킨 것이냐?”여종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습니다.”서왕의 미간이 깊이 찌푸려졌다.완부옥이 ‘여자를 데려오라’고 했던 말이… 해독과는 다른 의미였던 것인가?그 순간,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방 안에는 강렬한 피비린내가 가득했다.그리고 욕조 안,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앉아 있는 완부옥이 있었다.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그러나 서왕의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촉촉한 눈동자가 가볍게 일렁였다.“무슨 일이세요? 제가 죽었는지 확인하러 오신 건가요?”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힘없는 목소리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오히려 유령처럼 보였다.서왕은 차갑게 말했다.“대체 여종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완부옥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그저… 저를 도와 몸 속 독들을 빼달라고 했을 뿐이예요.”서왕의 미간이 더욱 깊이 찌푸려졌다.정충의 모충이 죽으면, 즉시 독이 온몸으로 퍼진다.이를 막으려면, 온몸의 혈을 돌려 독을 모두 빼내야만 했다.하지만 이 과정은 극심한 고통을 동반하며,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그게 전부냐?”완부옥은 피식 웃었다.“아니면 뭐가 더 있어야 하죠?
“콱!”완부옥의 바늘이 서왕의 몸을 찌르는 순간, 그의 몸속에 있던 정충이 폭발하였다. 곧바로 서왕의 몸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서왕은 순간적으로 극심한 고통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마치 몇 달 동안 짓눌려 있던 무거운 짐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한 해방감이 밀려왔다.정충이… 드디어 사라졌다.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그토록 자신을 괴롭히던 독이 이렇게 쉽게…그러나 바로 그때, 눈앞에서 완부옥이 마른 낙엽처럼 휘청이더니 앞으로 쓰러졌다.서왕은 즉시 그녀를 부축하며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냐?”방금 전까지 멀쩡하지 않았던가?그녀를 내려다보니 얼굴이 창백했고, 입술 사이로 아픈 신음이 새어 나왔다.그제야 서왕은 깨달았다. 부작용이었다.정충을 심으려면 반드시 자신의 몸에도 ‘모충’을 함께 심어야 한다.그런데 이제 그의 몸속에 있던 ‘자충’이 사라졌으니, 그녀가 무사할 리가 없었다.하지만 서왕은 정충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녀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목숨에 지장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는 주저 없이 명을 내렸다.“유화! 어의를 불러...”“그럴 필요 없어요.”서왕이 의사를 부르려 하자, 완부옥이 힘겹게 그를 저지했다.여전히 그의 품에 기대어,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고통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그냥… 저를 눕혀 주세요. 잠깐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서왕은 마지못해 그녀의 뜻을 따랐다.완부옥은 자리에 눕자,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그녀는 서왕을 올려다보더니,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아직도 옷 안 입으셨어요? 저를 유혹하려고 그러시는 건 아니죠?”“…!”순간, 그의 몸이 굳었다.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빠르게 장막 밖으로 나가, 옆에 걸려 있던 옷을 주워들었다. 한 겹 한 겹 옷을 입는 손길이 빠르면서도 능숙했지만, 귓불이 살짝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그가 옷을 정리하는 동안, 완부옥은 아픈 감각을 잊으려는 듯 흐릿한 눈빛으로 과거를 떠올렸다.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어머니
유영은 서여국 사신 자격으로 입궁해 황제를 알현하고자 했다.그러나 황제와 황후는 외출 중이었고, 아직 궁으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궁인들은 즉시 이를 상부에 보고했다.궁 안.황후가 부재한 궁에서는 녕비가 후궁의 대소사를 총괄하고 있었다.“서여국 사신이 찾아왔다고?”소식을 들은 그녀의 표정이 단숨에 굳어졌다.그녀는 후궁의 일만 맡을 뿐, 국사에는 개입한 적이 없었다.‘이런 큰 상황을 내가 처리할 수는 없어.’ “당장 서왕 전화를 모셔오거라!”그녀는 최근 며칠간 겨우 여유를 찾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사신이 찾아오다니.또다시 궁중 연회를 준비하고 사신을 접대해야 한단 말인가?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었다.이럴 때 황후가 없다는 게 원망스러웠다.‘이 궁궐이란 곳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구나!’서왕 역시 서여국에서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그는 직접 나서서 유영을 접견했다.유영은 초조한 얼굴로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했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주장일 뿐,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그럼에도 서왕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즉시 사람을 보내 실종된 사신단을 찾도록 명령했다.그제야 유영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그녀가 애타게 찾고 있는 사신들은 이미 이른 새벽에 성을 빠져나갔으며, 빠르게 말을 달려 이제는 황성에서 이백 리나 떨어진 곳까지 달아났다는 사실을 말이다.……밤이 깊어가고 있었다.서왕부완부옥은 대문 앞에 서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서왕이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걸음을 멈추며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그 단아하고 정숙하던 여인이 정말 완부옥이 맞단 말인가?"전하~”완부옥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마치 사람의 혼을 빼앗을 듯한 요녀와도 같았다.방심한 순간, 그녀에게 푹 빠져 모든 걸 잃어버릴 것만 같은 기이한 매력이 있었다.서왕은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품었다.더군다나 그는 정충에 걸려 있었기에 그녀와 거리를 유지해야만 했다.하지만 완부옥은 더욱 매혹적인
봉구안은 황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숙연과 관련된 진실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소욱 역시 국사를 돌봐야 했기에,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갈라섰다.황성그날, 유영 모녀는 사신 자격으로 황성에 도착했다.객잔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던 그들은 다음 날, 뜻밖의 사건을 맞닥뜨렸다.이른 아침, 정희가 황급히 뛰어와 다급하게 외쳤다.“어머니! 어머니! 사람들이 다 사라졌어요!”유영은 눈을 크게 떴다.그들과 함께 온 사신단에는 남제의 대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그런데 어떻게 한순간에 모두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유영은 급히 숙소 곳곳을 살폈다.그러나 방문을 열어볼 때마다 마주하는 건 텅 빈 방뿐이었다.정희의 얼굴이 새파래졌다.“어머니, 혹시 우리가 간첩으로 몰려 잡혀간 건 아닐까요?”유영은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다잡았다.“그럴 리 없다.”서여국과 남제는 동맹을 맺은 나라였다.남제가 사신단을 함부로 대할 이유는 없었다.그러나 그녀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관청에 가야겠다. 당장 신고하러 가자.”관청관청의 아전은 유영 모녀를 이당으로 안내했다.이당은 심문을 벌이는 대당과 달리, 관리가 일반적인 업무를 보거나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다.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사적인 곳이기에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했다.관원들은 유영이 서여국의 특사라고 하자, 급히 응대하면서도 속으로 의아해했다.‘서여국에서 사신이 온다고 한 적이 없는데…?’관청 측은 그녀에게 국서와 통관 문서를 제출해 신분을 증명하라고 요구했다.그러자 유영은 답답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제게 그런 것이 있었다면, 애초에 이곳까지 오지 않았겠죠! 국서와 문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습니다!”서여국에서 출발할 때, 대신들이 국서를 잃어버릴까 염려해 그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보관했던 것이다.이 순간, 유영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혹시… 그들이 서여국을 위협하려는 간첩이었던 건 아닐까?’관청 측은 그녀가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 없자 즉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이 일은 상부에
봉구안은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유영이야말로 원래 유씨 가문의 장녀, 유녕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저의 추측일 뿐, 완벽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그녀의 가설은 ‘압명’이라는 미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그러나 서여국 황제는 확신하고 있었다.이제야 나이가 맞지 않다는 문제도 해결된 것이다.황제는 봉 부인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전과 달리 한층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너야말로 내 여동생이다. 유씨 부부는 너를 ‘대신 희생될 아이’로 삼아 유녕의 신분을 대신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끊어진 비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자매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단서다.”봉 부인은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더 이상 분간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조용히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말했다.“남제로 돌아가면, 저는 이 사실을 더욱 철저히 조사할 것입니다.”그러자 황제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녀는 봉 부인이 남제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불안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때, 봉구안이 어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어머니께서 선택하셔야 합니다. 저와 함께 남제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서여국에 남으시겠습니까?”봉 부인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갈등했다.지금까지 그녀는 남제로 돌아가기만을 간절히 원했다.하지만 봉구안이 말한 모든 이야기가 그녀의 머릿속을 온통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렸다.만약 정말 자신이 숙연이라면?그렇다면 서여국 황제는 그녀의 친언니였다.지금 황제는 위독한 상태였다.그녀가 떠나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만약 이후에 신원이 확실하게 밝혀진다면?그때 후회해도 이미 늦을 터였다.황제는 묵묵히 봉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은 조용하지만 간절했다.그녀에게 있어 봉 부인은 이미 숙연이었다.이 순간만으로도 평생을 기다려온 동생을 만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