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안진은 어제 설지의 부하들에게 맞아 오른팔에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이 상태로 비무장에 나간다면 괴두를 쓰러뜨리기는 고사하고 능욕만 당할 것이다.봉구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지금 이 순간에도 봉명헌은 비무장에서 괴두의 주먹에 농락당하고 있었다.승부는 일목요연했다.남제의 관원들의 얼굴에서 생기가 사라졌다.그들은 아무리 그래도 유명한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봉가의 차남이 이렇게 처참히 패배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봉 대인은 존재감을 줄이려고 고개를 푹 숙였다.그는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할 수만 있다면 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쾅! 소리와 함께 봉명헌은 무대에서 굴러떨어져 의식을 잃었다.하지만 떨어지는 순간에도 가면은 그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궁인들이 달려가서 그를 부축했다.봉 대인은 걱정이 되었지만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흥분한 괴두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야수처럼 포효했다.“아직 부족해! 다음 주자 올라와!”남제의 무장들은 분노에 휩싸였다.귀비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폐하, 다음 주자는 봉가의 장남이 나서기로 하지 않았나요?”후르달은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들었다.모두가 봉안진이 겁을 먹고 도망갔다고 생각했다.소욱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봉안진은 어디 있느냐!”잠시 후, 태감 한 명이 다가와서 작게 아뢰었다.“폐하, 봉가의 장남은 몸이 불편한다고 잠시 쉬러 갔습니다.”주변을 둘러보던 귀비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황후가 사라진 것이다.‘봉명헌이 맞는 장면을 보고 겁이 나서 도망간 건가?’‘어쩌면 봉안진이 시간을 끌고 있는 것도 황후의 사주를 받아서일지도 몰라!’귀비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빛났다.“폐하, 무려 봉가의 장남인데 비무를 피한다고 꾀병을 부리진 않을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 볼까요?”하지만 괴두는 인내심이 많은 인간이 아니었다.대결해 줄 사람이 없으니 그는 짜증이 치밀었다.그는 비무장 옆에 있는 나무 기둥에 시선
봉안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무기력한 목소리로 흐느끼듯 말했다.“다 소신의 잘못입니다. 소신이 조금만 더 조심했었다면….”“어제 그자들의 도발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소신이 더 참았어야 했는데…”봉구안은 어떻게 눈앞의 위기를 해결할지만 생각했다.“그들이 원하는 건 오라버니께서 비무에서 참패하는 것이니 아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결과는 같았을 겁니다.”봉안진이 과거 무과장원이었다는 알고 있는 귀비가 준비를 허술하게 했을 리 없었다.그녀가 궁밖의 상황까지 살피지 못했던 것이 실수였다.잠깐의 고민 후에 봉구안이 입을 열었다.“가면을 저에게 주세요. 대역을 제가 찾아보겠습니다.”그 말을 들은 봉안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아니 됩니다. 이는 폐하와 모두를 기만하는 행위잖습니까.”그가 아무리 무능해도 이런 비열한 방식으로 이기고 싶지는 않았다.봉구안은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기회는 한번뿐입니다. 선택은 오라버니에게 달렸어요.”봉안진은 씁쓸한 어조로 그녀에게 물었다.“정녕 과거 사건의 진실을 알아냈나요?”봉구안은 확신에 찬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예.”봉안진은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는지 재차 물었다.“제가 이번 기회를 잡는다면 진실을 밝히고 허무하게 죽은 그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 겁니까?”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주먹을 꽉 쥔 채로 봉구안을 지그시 응시했다.봉구안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예.”그녀는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았다.하지만 확고에 찬 그녀의 눈빛에서 봉안진은 원하던 답을 얻었다.그 순간 봉안진은 오랜 시간 어깨에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 들었다.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그래도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눈앞에 있는데 자존심 따위가 무슨 소용일까?그는 더 이상 의기소침하게 웅크리고 살기 싫었다.여동생과 가문, 그리고 억울하게 죽어야만 했던 부하들을 위해서라도
사람들은 긴장한 얼굴로 눈을 떴지만 그들이 예상했던 피 튀기는 장면은 펼쳐지지 않았고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괴두의 주먹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누군지 몰라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누군가가 사람들 틈에서 소리쳤다.“봉가의 장남 같네요!”또 다른 누군가도 소리쳤다.“입고 있는 옷을 보니 확실해요! 보호대도 차고 있잖아요!”봉가의 아들들을 제외하고 중간에 무대로 올라간 무장들은 준비도 없이 그대로 올라갔기에 아무도 보호대를 장착하지 않았다.너무 멀리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차고 있는 보호대와 옷 색깔을 보고 그들은 봉안진이라고 확신했다.“괴두의 주먹을 받아내다니! 정말 대단하네요.”그 말을 듣고 있던 후르달은 괜히 심통이 나서 콧방귀를 뀌었다.고작 한 주먹을 받아냈을 뿐이다.그는 괴두의 실력을 믿고 있었다.비무장.괴두는 주먹을 거두고 뒤로 한걸음 물러서서 눈앞에 나타난 상대를 빤히 응시했다.상대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그가 지금까지 상대했던 무장들과는 사뭇 달랐다.하지만 상대가 맹성주가 아니라면 자신이 있었다.“이리 와!”괴두는 팔뚝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소리쳤다.“여길 때려!”관망대의 모두가 비무장에 올라간 사람을 봉안진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상 그는 변장하고 올라간 봉구안이었다.귀비가 봉씨 형제를 반 죽이기 위해 준비한 가면이 오히려 그녀가 위장하는데 편의를 주었다.양나라와의 전장에서 봉구안은 괴두와 결투를 벌인 적이 있었다.그랬기에 그녀는 상대의 초식을 빤히 꿰고 있었다.그녀는 쓰러진 무장의 앞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깔고 읊조렸다.“내려가.”그 무장은 진작에 진이 빠진 상태였지만 남제의 존엄을 위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그를 대신할 사람이 올라왔으니 계속 무대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세 사람의 협공도 쓰러뜨리지 못한 괴두였다.과연 봉안진이 혼자 힘으로 가능할까?귀비는 표독스러운 눈빛을 하고 비무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봉안진이 진심으로 대결에 응하
진 장군은 무대의 상황을 유심히 살피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봉안진은 괴두의 체력을 소모하려는 게 아니라 방어를 위장한 공격을 하고 있어!”“그럴 리가. 계속 피하고만 있잖아?”“진 장군이 잘못 본 게 아니야?”진 장군은 고개를 젓고는 무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아니,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봉안진은 방어하는 척하면서 사실 상 공격을 하고 있는 거야!”그럴수록 남은 두 사람은 궁금증에 미칠 것 같았다.“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니까?”진 장군은 자신에 찬 목소리로 그들에게 설명해 주었다.“봉안진은 공격을 피하며 무대 변두리를 돌고 있어. 하지만 자세히 보면 계속 왼쪽 방향으로만 몸을 틀고 있어. 괴두에게는 오른쪽이 되겠지.”“그게 뭐? 봉안진이 한 방향으로 빙빙 돌면서 괴두를 어지럽게 만들려는 건가? 맞아! 그런 방법도 있었네! 괴두가 이미 평형을 잃은 걸 보면 유효한가 본데….”진 장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게 아니야!”그렇게 아둔한 방법일 리가 없었다.진 장군은 계속해서 말했다.“괴두의 움직임을 잘 살펴봐. 오른다리가 좀 이상하지? 봉안진을 봐. 왜 굳이 계속 왼쪽으로만 피하는 걸까? 이상하지 않아?”그러자 다른 두 장군도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네! 봉안진은 주먹을 피하고 이동할 때 꼭 무릎을 구부려서 피하네. 괴두와 봉안진은 키 차이가 심한 편이니까.”“그래서 그게 뭐? 그냥 주먹을 피하기 쉬우려고 그러는 게 아닌가?”진 장군이 정색해서 말했다.“괴두가 무릎을 굽히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거야.”“무릎을 굽혀? 그게 무슨 전술이야?”“잠깐! 나 알 것 같아! 괴두의 오른쪽 무릎이….”“뭐야? 또 뭔데?”유일하게 영문을 모르는 무장이 옆에 있는 사람을 재촉했다.진 장군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이 장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이 장군도 알았지?”이 장군은 무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중얼거렸다.“오른쪽 무릎이 돌파구였다니! 난 왜
거대한 산과도 같았던 괴두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현장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사람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고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두리번거렸다.한편, 연무장.봉구안은 다리를 뻗어 상대의 가슴을 가격했다.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괴두는 오른쪽 무릎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괴두는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고 발버둥을 쳤다.하지만 봉구안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돌려차기로 상대의 목덜미를 가격했다.괴두가 중심을 잃고 무대 한복판으로 쓰러졌다.봉구안은 무르팍으로 상대의 숨통을 압박했다.괴두는 두꺼운 가면 너머로 싸늘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봉구안과 시선이 마주쳤다.마치 죽은 자를 바라보는 것 같은 서늘한 눈빛에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네… 네가 어떻게….”괴두는 단 한번의 공격으로 자신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뒤늦게 왜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봉구안이 자신을 유인하여 무대를 빙빙 돌았는지 알아차렸다.‘내가 오른쪽 무릎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하지만 대체 언제 어떻게 알았는지가 의문이었다.한편, 관망대에서 시합을 지켜보던 후르달도 당황했다.“어떻게 된 거야?”그 역시 괴두의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다른 사신들도 당황했는지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괴두, 일어나!”후르달은 연무장을 향해 고함쳤다.“넌 우리 양나라의 용사야! 이대로 쓰러지면 안 돼!”남제의 관원들도 지지 않고 연무장을 향해 응원을 보냈다.“봉안진! 잘했어!”“계속 공격해!”무려 세 판을 연속 지고 의기소침하던 남제인들은 환호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유일하게 귀비만 표정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었다.‘봉안진이 괴두를 쓰러뜨리다니! 어떻게?’그녀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전개였다!‘봉안진이 이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어? 설지는 대체 뭘 한 거야!’귀비의 싸늘한 시선이 설지에게 닿았다.‘멍청한 자식!’설지도 불안에 떨고 있었다.괴두 같은 괴물을 쓰러뜨린 봉안진인데 차후 그의 보복이 두려웠
위기의 순간에 봉구안은 기둥을 잡고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 뒤로 공중제비를 했다.그녀의 옷깃이 허공에서 휘날리며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곧이어 그녀는 괴두의 앞으로 달려가서 순식간에 상대의 허리띠를 잡아당겼다.관전 중이던 여인들은 재빨리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다시 고개를 돌리자 긴 허리띠가 봉안진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소욱은 순간 미간을 확 찌푸렸다.이게 과연 우연일까?그와 대적했던 그 여자객도 그에게 같은 수를 쓴 적이 있었다.사람들은 봉안진이 왜 상대의 허리띠를 가로챘는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무대 아래에서 관전하던 세 장군들마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단순히 괴두에게 창피를 주기 위함일까? 아니면 괴두가 바지를 올리는 순간을 노리기 위함이었을까?봉구안은 괴두의 후방에 착지했다. 괴두는 바지를 올릴 틈도 없이 나무 기둥을 집어들고 후방을 향해 휘둘렀다.눈 깜짝할 사이에 봉구안은 허리띠를 허공에 집어던지더니 그대로 상대의 손과 기둥을 묶어버렸다.“절묘하네!”진 장군이 맨 먼저 감탄을 터뜨렸다.이 장군도 합세했다.“잘했어! 상대의 손을 나무 기둥에 묶어버렸으니 괴두는 손이 묶인 거와 다름없어!”괴두의 바지는 무릎까지 내려간 상태였고 두 손은 나무기둥에 묶여 있어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그는 초조해하기 시작했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사신들이 불만을 토로했다.“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우리 양나라의 용사에게 이런 모욕감을 선사하다니요!”“남제 폐하, 이 황당한 경기를 당장 그만두게 해야 합니다!”“사내의 바지를 벗기다니! 이게 남제가 손님을 대하는 태도입니까!”남제의 대신들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사신 나리, 진정하시오. 승패는 중요하지 않소. 볼거리가 중요하지. 이 얼마나 역동감 넘치는 대결이오? 무희들의 춤보다 더 재밌지 않소?”“사신 나리, 오해 마시게. 양나라 용사의 바지는 누가 벗긴 게 아니라 저절로 흘러내린 거라오!”“비무는 실력으로 말하는 거지. 귀국의 용사가 나무 기둥을 휘두를 때도 우린 강
소욱은 싸늘한 눈빛으로 방안을 살폈다.탁자 위에는 봉안진이 대결 시 사용했던 가면이 놓여 있었다.소욱은 음침하게 굳은 얼굴로 병풍 뒤에 있는 그림자를 노려보았다.그와 여자객은 수차례 대결을 펼쳤기에 그녀의 초식은 이미 그의 머리에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봉안진이 연무장에서 보여준 동작은 그녀와 무척이나 흡사했다.우연일지라도 그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남자는 긴 다리를 움직여 안으로 향했다.그리고 병풍 안으로 긴 팔을 뻗었다.팔목이 붙잡힌 봉안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소욱을 바라보다가 곧바로 예를 취했다.“폐하를 뵈옵니다.”봉안진은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정리할 여유도 없이 곧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소욱의 싸늘한 눈동자는 그를 꿰뚫어보려는 듯이 노려보았다.“방에 혼자 있었던 게 확실하느냐?”봉안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답했다.“예, 폐하.”안으로 들어온 유사양은 어깨가 반쯤 드러난 봉안진과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소욱을 보자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폐하….”소욱은 말없이 봉안진을 뿌리치고는 병풍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곧바로 방을 나가는 대신에 다른 사람의 흔적이라도 찾아내려는 듯이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괜한 의심인 걸까?’봉안진은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은 황제의 모습에 조심스레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나가서 정중히 예를 올렸다.“죄 많은 소신, 폐하를 뵈옵니다.”소욱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괴두를 쓰러뜨렸는데 어찌 죄를 말하는 것이더냐.”겸손이 지나치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가식인 것이다.소욱은 그 뒤로 아무 말없이 편전을 나와 대전을 향해 걸었다.그런데 가는 길에 이쪽으로 다가오는 황후와 마주치고 말았다.황후는 공손히 그에게 예를 올렸다.“신첩, 폐하를 뵈옵니다.”소욱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다들 대전으로 옮겼을 것인데 황후는 어딜 가는 길이냐.”봉구안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태연자약하게 답했다.“오라버니가 걱정이 되어 보러 가는 길이었습니다.”소욱은 더 이상 묻지
소욱의 눈빛이 음침하게 굳었다.자고로 후궁이 정치에 간섭하는 것이 금기시된 이유는 후궁과 조정의 대신들이 결탁하여 외척이 과도하게 황제의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또다른 이유는 견식이 짧은 후궁의 여인들이 공식적인 장소에서 말실수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기도 했다.소욱이 어떻게 하면 양나라 사신들을 달랠지 고민하는 사이, 봉구안이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귀비가 실언을 한 것은 사실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은 한 사람의 출중함을 가리키는 말이나, 전장의 공훈은 변방의 천만 장령들이 힘을 합쳐 싸운 결과이지 어느 한 사람이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까도 마찬가지다. 앞서서 여러 장군들이 힘을 합쳐 괴두의 체력을 소모하여 그가 약점을 드러내게 하지 않았더라면 내 오라비도 이 대결에서 쉽게 그를 쓰러뜨리진 못했을 것이다.”“양나라에서는 한 사람만 내보냈으니 이 비무는 우리 남제가 수적으로 유리한 싸움이었다.”“양국의 교전 역시 남제가 십만 병력으로 양나라의 구만 병력을 물리쳤으니 양나라는 패하였지만 부끄러운 전투가 아니었다.”그녀의 말은 양나라의 체면을 살려주었기에 사신들의 표정도 어느 정도 풀어졌다.하지만 후르달은 아니었다.‘결국엔 자기네 남제가 더 잘났다고 강조하는 거잖아!’후르달이 생각하기에 듣기 좋은 말로 포장했을 뿐, 말하고자 하는 뜻은 똑같았다.하지만 워낙에 빈틈이 없는 말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봉구안을 바라보는 소욱의 눈빛도 많이 풀어져 있었다.‘역시 그 세치 혀는 여전하군.’다만 저택에서 곱게 자란 귀족가의 아가씨가 전장의 일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 뜻밖이기도 했다.후르달이 여전히 씩씩거리며 말했다.“예, 양나라는 패배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남제 폐하, 저희와 협상할 마음이 없다고 하신다면…”소욱은 근엄한 목소리로 상대의 말을 잘랐다.“백성을 생각하는 양나라 황제의 마음에 짐도 감탄하였다.”“그리하여 취산골 전역이 끝난 후에 양나라 황제의 바람에 따라 철수를 결정한
양연삭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친딸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거짓말이야.”그는 고개를 저었다.같은 반응을 보이는 이는 염추도 마찬가지였다.“어머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염추는 어머니가 자신을 구하려고 이런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양연삭이 다시 살의를 드러내자, 염 부인은 체면을 잃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과거의 진실을 폭로하기로 했다.“양연삭!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 것입니까… 그때 막 만간성법을 수련하기 시작했을 무렵, 심마에 빠져 정신을 잃은 채 저를… 저를 능용하지 않았습니까! 염추는 그날 밤 생긴 당신 딸입니다!”양연삭은 분노에 차 소리쳤다.“천한 계집! 심마에 빠진 건 너였겠지!”염추는 어머니가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것을 보고 온몸이 얼어붙었다.그녀는 급히 염 부인을 부축했다.“어머니, 그만 말씀하세요.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양연삭은 체내에서 진기가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것을 억누르며 불쾌감을 삼켰다.“천한 계집! 입 닥쳐라! 내 딸이 아니다! 아니야! 내게는 아들 하나밖에 없다! 혹시 소환이 너를 시켜 나를 속이라고 한 것이냐? 내가 너를 죽여버리겠다!”그는 이 말을 끝으로 순식간에 달려들어 염 부인을 정확히 붙잡아 염추와 떼어놓았다.“안 돼!”염추는 놀라 외쳤다.동방세와 범진이 양쪽에서 양연삭의 주의를 끌며 염 부인을 구하려 했지만, 양연삭은 반응이 빨랐다.염 부인을 붙잡은 채 뒤로 물러섰다.염추는 이를 악물며 일어났다.피가 입가에 맺혀 있었지만, 그녀는 상관없었다.어머니가 양연삭의 손에 죽어가는 모습을 보자, 분노가 극에 달했다.“양연삭! 어머니를 놔줘라!”그러나 양연삭은 염 부인을 놓지 않고 집요하게 따져 물었다.“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다! 내 딸이 아니다! 말해라, 내 딸이 넌 아니라고!”염 부인은 처량한 눈빛으로 염추를 바라보았다.“내 딸아… 네 몸에는 네 아버지의 더러운 피가 흐르고 있어. 하지만… 부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라. 그만둬라,
염추는 만간성법을 수련하며 양연삭의 내력을 흡수했다. 그녀의 공력이 크게 증가한 덕에 두 사람은 땅에서 산으로 옮겨가며 치열하게 싸웠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먼지가 날리고 바위가 사방으로 흩어졌다.멀리서는 제군과 북연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북연군의 부장이 전장에서 희미하게 양연삭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근심에 빠졌다.‘분명 쉽게 제황을 죽일 수 있다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 소식도 없다니. 이쪽은 더 버틸 수 없단 말이다!’제군은 곳곳에 매복병을 숨겨두었다.그들은 북연군이 포위망을 뚫어냈다고 생각하는 순간마다 다시 새로운 병력을 내세워 공격을 개시했다.북연군 부장은 이를 갈았다.“제군 놈들, 정말 비열하기 그지없구나!”북연군 병사들의 사기는 점점 흩어졌다.그때, 제군의 주장인 관 장군이 말을 타고 나와 크게 외쳤다.“북연군이여 들어라! 우리 장군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한다면, 북연군이 안전하게 조유관을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하시겠다고 하셨다!”북연군 부장은 분노하며 외쳤다.“북연군은 절대로 항복하지 않는다!”관 장군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응수했다.“항복해라!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겠느냐! 어차피 북연군은 지난 전투에서 이미 남제에 졌지 않은가. 폐하께서 친필로 쓰신 항복문서를 우리도 읽어봤다!”지난 전투는 연태자가 이끌었으나, 30만 대군을 잃고 말았다.그 후 겨우 모집한 신병들도 전장에서 패배해 대부분 폭사했다.북연군 부장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남제인 놈들, 감히 우리를 모욕하다니!’얼마 지나지 않아 북연군은 포위망을 뚫고 다시 진영을 정비했다.두 군은 서로의 진영을 뚜렷이 구분하며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제군의 장수들이 권고했다.“우리 폐하께서 말씀하시기를, 더는 장병들이 헛되이 죽어나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하셨소. 아마 귀군도 같은 마음일 테지요?”또 다른 장수가 거들었다.“맞습니다! 여기서 물러나는 게 낫소. 병사들마저 폭사했다던데, 북연군이 공격할 용기가
“너희들이 날 또 속이려 드는구나! 소환, 네 놈은 죽어야 마땅하다!”양연삭은 더 이상 그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아무것도 듣지 않고, 동방세의 내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봉구은 즉시 검을 뽑아 몸을 솟구치며, 마치 날렵한 제비처럼 양연삭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양연삭은 귀를 살짝 움직이며 날카로운 검기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더니 몸을 비틀며 공법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덕분에 동방세는 바닥에 떨어져 거친 돌 위에 등을 세게 부딪혔고, 머리카락은 흩날렸다.양연삭은 즉각 대응하며 봉구안을 향해 반격을 개시했다.그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올랐고, 반드시 봉구안을 죽여야겠다는 살의를 품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정면으로 치지 않고, 순간이동하듯 그녀의 등 뒤로 이동했다.그리고 갑작스러운 손바닥 공격으로 그녀의 등을 내리쳤다.“소환! 조심하시오!”동방세가 경고하자, 봉구안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늦었다.퍽!소욱이 그녀의 뒤를 막아 서서 그 공격을 대신 받아냈다!봉구안은 즉시 눈이 커지며 소욱을 부축했다.“폐하!”진한길이 즉시 달려와 호위하려 했으나, 양연삭의 옷자락 휘두름 한 번에 허공으로 튕겨나갔다.뒤에서 다가오던 오백이 간신히 진한길을 받아냈다.동시에, 봉구안은 소욱을 보호하며 후퇴했다.범진과 다른 호위병들이 연달아 도착하여 도움을 주려 했지만, 양연삭의 마공은 너무 강력했다.그는 혼자서도 열 명이 넘는 병사들의 공격을 막아냈으며, 마치 거대한 저항의 벽처럼 그들을 튕겨내며 봉구안을 향해 다가갔다.봉구안은 그의 살기를 읽어내며, 소욱을 안전한 곳으로 밀어냈다.“구안아!”소욱은 즉시 그녀를 향해 달려가 그녀를 보호하려 했지만, 이미 양연삭의 손바닥 공격과 맞닥뜨렸다.손바닥과 손바닥이 맞붙는 순간, 소욱은 강렬한 흡수력을 느꼈다.마치 그의 몸속 깊이 갈고리가 박혀 내력을 강제로 끌어내는 듯했다.그는 벗어날 수 없었다.양연삭의 얼굴은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그는 미친 듯이 웃었다.“정말 강력한 내력이군!”
“양연삭,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군!”상방산 위에 동방세가 강호의 벗들과 함께 진을 치고 있었다.봉구안은 이미 이들과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이 감주에서의 매복은 단순히 북연군을 막기 위함만이 아니라 양연삭을 체포하려는 목적도 있었다.익히 알고 있듯이, 양연삭이 듣는 감각으로 싸움을 이어가려면 시간을 들여 적응해야 한다. 그러나 이 감주는 그에게 낯선 곳이었다.양연삭은 헝클어진 머리칼과 검은 천으로 가린 눈을 한 채, 귀를 곤두세워 소리를 가늠했다.“소욱! 소환! 너희 둘, 당장 나와라!”그의 분노는 깊었다. 복국과 복수를 위해, 반드시 이 둘을 죽여야 했다.아들마저 죽음에 이르게 한 두 사람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높은 곳에서 이를 싸늘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곁에는 소욱이 자리하고 있었다.그 외 장수들은 병사들을 이끌고 북연군과 싸우고 있었고, 이 상방산에는 오천의 정예병력만 배치되어 있었다.이 오천이 바로 오늘, 양연삭의 무덤을 파낼 병력이었다.…북연군은 진영이 어지럽혀지면서 전투력이 급감했다.관 장군은 먼저 기습으로 혼란을 일으킨 뒤 포위 공격으로 말머리를 돌렸다.기병들은 북연군 주위를 돌며 기세를 꺾었고, 말발굽 소리와 흙먼지, 그리고 치열한 함성은 북연군을 더욱 당황하게 했다.그들은 마치 산적에게 길을 막힌 규중 여인들처럼 갈팡질팡했다.부장은 목청껏 외쳤다.“흩어지지 마라! 반격하라! 우리가 북연군의 실력을 보여주자!”병사들은 방패를 들어 올리며 진을 짜기 시작했다. 이는 기병의 돌격을 막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다.동시에 북연군의 기병들은 다른 쪽에서 포위를 뚫으려 고군분투하고 있었다.부장은 속으로 양연삭이 빨리 소욱을 죽이기를 바라고 있었다.그렇다면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을 것이며, 그는 대공을 세운 영웅으로 남을 것이었다.양연삭은 비록 눈이 멀었지만 그의 마공은 전성기 못지않게 강력했다.완부옥이 몸에 지니고 있던 독물조차 그의 ‘만간성법’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고, 그녀는 내력을 상당히 잃은 채 동
북연군이 철수하려 하자, 양연석은 곧장 진 장군을 찾아갔다.“장군, 이것은 남제의 간계일 뿐입니다...”대군이 이미 진영을 떠나고 있었기에, 진 장군은 그의 헛소리를 들을 마음이 없었다.“양연석, 원래 네가 확신을 준 덕분에 황제께서 출병을 결심하신 것이다! 우리 북연은 남제와 제대로 싸울 계획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어찌된 것이냐? 네 일이 실패로 끝나 우리 군대가 반이나 손실되고 말았다.“나는 지금 너와 소욱이 한통속이 되어 우리 북연을 멸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비켜라! 감히 누구를 위해 싸우라고 하는 것이냐?”양연석의 얼굴이 싸늘해졌다.그는 손을 휘저으며 곧바로 진 장군의 목을 움켜쥐었다.진 장군은 놀라움과 분노로 크게 외쳤다.“양연석... 네가...”순간, 진 장군은 자신의 체내 진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양연석은 그의 내력을 흡수하면서 섬뜩한 목소리로 물었다.“장군께선 '만간성법'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진 장군은 눈을 크게 뜨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그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으나 양연석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잠시 후, 양연석은 그의 내력을 모두 흡수한 뒤, 그의 목을 꺾어버렸다.북연의 명장이었던 진 장군은 그렇게 양연석의 손에 생을 마감했다.곁에 있던 부장은 이 광경을 보고 공포에 질려 식은땀을 흘렸다.그는 양연석이 보지 못하고 오직 귀로만 위치를 파악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입과 코를 손으로 막고 자신의 존재를 숨겼다.그러나 그는 움직여 천막 입구에 이르러 막 도망치려던 순간, 앞에서 한 팔이 가로막았다.부장은 등골이 오싹해졌다.그는 양연석의 사술을 이미 목격했기에 겁에 질려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제발 저를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양연석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주군이 죽었으니, 네가 이제부터 주군이다. 곧바로 명령을 내려 조유관을 공격하고 남제의 황제를 죽이도록 해라!”부장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안 됩니다!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그는 죽는 것이 두려
새해가 밝자마자, 남제 대군은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섰다.이번 반격은 본격적인 전투가 아니라 도발 수준에 그쳤다.겉보기엔 큰 피해를 주지 않는 듯했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반복된 도발은 북연군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안겼다.그렇게 보름 정도가 지난 어느 밤, 북연군 대영에서 치명적인 사건이 터졌다.“장군! 장군! 영내 폭동이 일어났습니다!”영내 폭동은 군영 내에서 발생한 대규모 소요 사태를 말한다.이것은 극히 드문 일이지만, 군대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진 장군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어서 장군을 호위하라!”이 폭동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한 병사가 무심코 “적이다!”라고 외친 것이 발단이 되어 전군이 서로를 적으로 착각하며 싸우는 대참사로 번진 것이다.북연군 대영은 한순간에 혼돈에 휩싸였다.병사들은 허둥지둥 일어나 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는 무작정 외쳤다.캄캄한 밤중이라 서로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기에, 적이 이미 진영 안으로 침입했다고 믿은 병사들은 무기를 휘둘렀다.그들 모두는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싸웠고,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진영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다.특히 전쟁에 처음 나서는 신병들은 상황을 이해할 새도 없이 무조건 무기를 휘두르며 서로를 공격했다.순식간에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군영 안에는 시신이 가득했다.조유관 내, 남제 대군 본영.남제 대군 본영의 장막 안, 한 병사가 황급히 달려와 기쁜 얼굴로 외쳤다.“폐하! 북연군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관 장군은 주먹을 꽉 쥐며 외쳤다.“잘됐다!”그는 곧장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맹 소장군, 과연 그대의 예상대로 되었습니다!”다른 장군들 역시 봉구안에게 경의를 표하는 눈길을 보냈다.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지만, 단순한 계략으로 북연군 내부를 서로 물고 뜯게 만들다니, 그야말로 천재적인 발상이었다.영내 폭동은 양군이 정면으로 맞붙는 전투보다 훨씬 참혹하다.병사들은 히스테릭 상태에 빠져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서로 죽였다.
남제에서 내놓은 화룡은 북북연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북연군은 그동안 남제의 죽화총을 모방해 제작한 무기를 통해 천하무적이라 자부했건만, 남제가 이를 역으로 배워 화룡까지 만들어낼 줄 누가 알았겠는가!북연군의 주군인 진 장군은 이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남제군이 허세를 부리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그는 화룡을 가까이에서 확인하고는 기가 찼다. 남제군의 화룡은 북연의 것과 똑같이 생겼던 것이다!남제군은 소규모 병력을 내보내 화룡을 북연군 쪽으로 밀어 보이며 여유롭게 시위를 벌였다. 두 나라의 화룡이 서로 스쳐 지나가는 광경은 보는 이들을 적잖이 당황하게 했다.그러자 남제군 쪽에서 도발을 이어갔다.“우리 폐하께서 말씀하셨소! 북연이 선물한 화룡탄에 깊이 감사드린다고!”진 장군은 그 말을 듣자 손발이 떨리기 시작했다.그 화룡탄은 그가 천룡회 반역자들에게 넘겨줘 혼란을 일으키고 군왕을 죽이는 데 사용하라 한 것이었다.그런데 그 화룡탄이 여기 나타나다니!만약 남제군이 화룡을 진짜로 가지고 있다면 그의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된다.북연군뿐만 아니라 조유관에 있는 남제군 병사들까지도 그 광경에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관 장군 역시 멍하니 입을 벌린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옆에 있던 부장이 기쁨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참 통쾌하군요!”이 느낌은 마치 거지였던 자신이 갑자기 재산을 상속받아 거리에서 어깨를 펴고 다니게 된 듯했다.남제군 병사들은 하나같이 당당한 자세로 북연군을 향해 외쳤다.“와보시지! 누가 겁내는지 보자고!”북연군은 이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즉각 철수를 명령하며 화룡을 회수하기 시작했다.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신할 수 없었으나, 그럴수록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진 장군이 소리를 질렀다.“뭣들 하는 게냐! 빨리 움직이지 못하고!”한편, 후방.양연삭은 찻잔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남제가 화룡을 만들어냈다고? 이건 분명히 거짓말이다!”…남제군 내부에서도 화룡의 진위에
봉구안은 갑옷을 입고 나타났다. 소욱은 그녀를 보자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이게 무슨 짓이냐? 내가 너한테 상처부터 회복하는 게 우선이라고 했던 거 기억 못 하느냐.”봉구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제 상처는 별일 아닙니다. 계속 여기 안에만 있으면 오히려 몸이 더 불편합니다.”“적군을 몰아내는 게 급선무입니다. 게다가 양연삭도 그들 편에 있으니, 그들을 빨리 처치하는 것이 우선입니다.”소욱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가로막았다. 그의 눈빛은 결연했다.“안 된다. 네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았으니 또 다치게 할 수는 없다.”봉구안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제 몸을 잘 지킬 수 있습니다.”“구안아, 너…”소욱은 그녀를 더 설득하려 했지만, 그 순간 밖에서 보고가 들어왔다.“폐하, 적군이 소환을 내놓지 않으면 당장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습니다!”동부 변경조유관 성벽 바깥. 적군이 검은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붉은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며 전장을 압도했다.양측이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북연군의 진 장군은 기세등등했다.그의 뒤에는 ‘화룡’과 새롭게 개발된 죽화총이 줄지어 있었다.남제에 있는 것은 북연에도 있었고, 남제에 없는 것조차 북연은 가지고 있었다.전력 차는 명확했다.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는 데 이유가 필요 없었다. 그러나 큰 나라끼리의 전쟁이라면 명분이 필요했다.북연군은 소환이라는 대마두를 내놓지 않으면 ‘화룡’을 발사해 강공하겠다고 협박했다.오랜 기다림에도 남제 측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점차 북연군은 참을성이 바닥났다.많은 병사가 소리쳤다.“공격하라!”“공격하라!”그들에게는 장거리용 화룡과 근접전을 위한 죽화총이 있었다.남제 따위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반면, 남제군은 화룡을 보자 심장이 내려앉았다.그 위력을 익히 들어온 터였다.그러나 소환은 맹 소장군이란 신분이자 미래에 황후가 될 자였다.그런 그녀를 적군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장군들은 성벽 위에 서서 북연의 대군을
소욱은 품 안에 있는 사람을 껴안고 자신의 통제되지 않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젠장!”남자는 눈물을 쉽게 흘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자기가 이렇게 울고 있다니! 정말 체면이 없었다. 하지만... 매우 만족스러웠다.봉구안이 드디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으니까 말이다.소욱의 마음은 수없이 흔들리며 설레었고, 그는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뭐라 했느냐? 듣지 못했다.”봉구안은 진지하게 말했다.“안 들리셨다면, 그냥 넘어가시지요.”소욱은 즉시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말했다.“구안아, 일부러 그러는 것이냐? 난 그저 다시 한 번 듣고 싶은 건데, 그것도 안 되겠느냐?”봉구안은 그의 손을 떼어내고는 고개를 들고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예, 제가 폐하를 좋아합니다...”소욱의 머릿속에서는 불꽃놀이 터지듯 화려하고 찬란하게 빛났다. 그는 봉구안을 꼭 껴안고 마치 꿀을 들이킨 듯 달달한 마음에 젖었다.“구안아, 정말 기쁘구나. 네가 이렇게 말해 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그녀가 겪은 이야기를 들으니 그의 마음은 아프고도 놀라웠다.눈사태가 닥쳤을 때, 상식적으로라면 측면으로 달려야 한다. 하지만 당시 눈사태는 너무 빠르고, 그녀는 부상당해 경공을 펼치기 어려웠다. 눈사태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 곳에는 봉구안을 죽이기 위해 달려온 살수들도 있었다.그녀는 달아나는 척하며 결사적으로 싸웠다. 실상은 눈사태가 발 밑에 닥치기 직전, 한 산돌을 찾아 몸을 숨겼다. 그녀는 몸에 있던 채찍으로 몸을 돌과 묶어 눈사태의 충격을 피했다.그 돌은 그녀가 눈사태에 휩쓸리지 않고 묻히지 않도록 막아줬다.눈사태가 중반부에 이르렀을 때 속도가 느려졌고, 그녀는 최대한 수영하듯 몸을 떠올려 눈 위로 나오려 애썼다. 머리를 밖으로 내밀어 구조대가 그녀를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하지만 그녀는 체력을 모두 소진하여 결국 기절하고 말았다.눈을 떴을 때는 늙은 의원이 그녀를 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