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리는 미리 직원들에게 일러두었다. 직원은 문채연의 말을 듣고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문채연 씨. 사장님께서 오늘 중요한 손님을 접대하고 계셔서 지금은 시간을 내기 어려우세요.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사장님께서 일이 끝나시는 대로 바로 오실 겁니다.”“뭐라고?”문채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양성에서 거의 모든 매장의 VIP 고객인 그녀가 이정화 앞에서 이런 굴욕을 당하다니. 그녀는 분을 삭이며 물었다.“중요한 손님? 나보다 더 중요한 손님이 있다는 거야?”직원은 형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바로 박진성 씨입니다.”“진성이?”이정화는 다소 놀란 기색을 보였다. 문채연은 더욱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진성 씨였구나. 그럼 채리를 더 불러야지. 진성 씨 지금 어디 있어? 채리랑 같이 있어?”직원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문채연 씨, 죄송하지만 고객의 개인 정보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문채연의 미소가 굳었다.“내가 진성 씨랑 무슨 사이인지 몰라서 그래? 개인 정보는 무슨! 내 앞에서 그 사람이 숨길 게 뭐 있어?”“그게...”점원은 망설이며 말했다.“하지만 박 대표님께서 오늘 다른 분과 함께 오셨는데, 문채연 씨와 마주치는 건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다른 사람이랑?”문채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곧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누군데?”“여자분입니다.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문채연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누구인지 뻔했다. ‘박진성이 민여진을 데리고 나오다니? 미쳤나? 여기서 아는 사람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큰데? 박진성은 민여진이 자기 눈 버리는 것도 모자라 남들 눈까지 더럽히겠다는 건가?’이정화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진성이가 여자를 데리고 왔다고? 누군데?”문채연은 이정화를 바라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마... 민여진 씨일 거예요. 요즘 진성 씨가 민여진 씨랑 가깝게 지낸다고 하더라고요. 전 진성 씨랑 단둘이 만난 지도 한참됐어요...”“뭐라고?”이정화의 얼굴이 더욱
‘그녀가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이 말은 날카로운 가시처럼 민여진의 가슴에 박혔고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아도 이정화만큼은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이정화의 모든 말, 모든 단어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가슴을 도려냈다.민여진은 몸을 떨었다. 박진성은 그녀를 자신의 뒤로 숨기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어머니, 말씀이 너무 심하세요.”“심하다고?”이정화는 박진성의 굳은 얼굴을 보며 처음으로 아들과 자신 사이에 깊은 골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그녀의 마음은 더욱 차갑게 식었다. “내가 내연녀를 보고 웃으면서 딸처럼 대해야 한다는 거야?”“민여진은 내연녀가 아니에요!”박진성은 이를 악물었다. “민여진과 저는 혼인...”“진성 씨!”그저 구경만 하려던 문채연은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그녀의 눈에는 극심한 불안감과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드러났다.‘박진성은 방금 이정화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려고 했던 걸까? 그녀와 그동안 함께 있어 줬던 여자가 실은 그녀가 말하는 내연녀라고?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이야말로 진짜 부부 사이라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어떤 입장이 된단 말인가? 정말 미쳤어!’문채연은 불안감에 이가 덜덜 떨렸다. 그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박진성에게 애원하며 이정화의 팔을 붙잡았다.“괜찮아요, 어머니. 진성 씨가 민여진 씨를 데려온 건 그냥 옷을 사주려고 그랬을 거예요. 저... 저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 그냥 가요...”가겠다고 말하면서도 억울함을 감추지 못하는 문채연이었다.이정화는 분노와 억울함에 가슴이 답답해져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어머니!”“어머니!”박진성은 황급히 달려가 이정화를 부축했다. 민여진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이정화의 병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정화의 곁으로 달려가 가슴팍의 약병을 찾았다.“만지지 마!”이정화는 그녀의 손을 탁 쳐내며 떨리는 목소리
이정화는 민여진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이런 여자는 집에 처박아 두기나 해. 다시는 밖에 데리고 나오지 말고.”말을 마친 이정화는 쇼핑할 마음이 사라졌는지 문채연과 함께 매장을 나섰다.민여진의 얼굴은 창백했다. 부끄러움 같은 건 이제 느끼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정화의 ‘내연녀’, ‘이런 여자’라는 말에 그동안 쌓아온 의지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민여진, 괜찮아?”박진성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민여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괜찮아.”민여진은 정신을 차리고 박진성의 손길을 피했다.박진성은 손이 허전해지자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민여진의 손목을 붙잡았다.“화났어? 채연이랑 어머니 사이 알잖아. 어머니가 널 내연녀로 오해해서 심한 말씀을 하신 거야. 기분 나쁜 건 당연하지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어.”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차분하게 대답했다.“난 박 여사의 말이 심해서 기분 나쁜 게 아니야.”“그럼 왜 그래?”박진성은 영문을 몰랐다.민여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돌아가자. 좀 피곤해.”집에 돌아온 민여진은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토라진 게 아니었다. 그냥 이정화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을 뿐이었다.‘그래. 나 같은 여자는 절대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지.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인데 이제 와서 박진성의 말 몇 마디에 흔들리면 안 돼.’민여진은 지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오히려 편해졌다.‘이대로도 괜찮아. 그냥 햇빛도 못 보는 내연녀로 살지 뭐. 엄마가 살아있는 한 나는 괜찮아. 다른 건 생각할 필요 없어. 생각할 자격도 없으니까.’아침까지 잠을 자던 민여진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어제 보일러를 켜지 않은 게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깨어나 보니 방은 따뜻했다.그녀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챙겨 입었다. 오늘 민영미가 온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렜던 것이다. 옷을 입고 문을 열고
예전에도 그녀는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고 이정화의 말처럼 볼품없는 존재였다.박진성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 상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민 여사님을 집 앞까지 모셔왔습니다. 바로 들어가시게 할까요, 아니면...”민여진은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흐릿했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상우가 모시고 들어갈까요라고 말하기 전에 박진성은 그의 말을 끊었다.“잠깐 밖에서 기다리라고 해.”전화를 끊은 박진성이 물었다.“네가 직접 나가서 맞이할래? 데려다줄게.”민여진은 벅찬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비록 얼굴은 추하지만 민영미에게 흉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박진성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내려온 민여진은 곧장 대문으로 향했다.멀리서부터 박진성은 대문에 서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비록 민영미와 목소리만 비슷한 낯선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완전히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전혀 관계없는 타인이었는데 민영미의 옷차림, 행동거지, 그리고 얼굴까지 모든 것이 신기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박진성은 마음속 불안감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엿보았다.그녀는 엄청난 공을 들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과연 완벽하게 민여진을 속일 수 있을까?“여진아? 너니?”민여진이 조금 더 앞으로 다가가자 초췌함 속에 희미한 미소를 담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가슴은 뜨겁게 끓어올랐다.“엄마...”그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손을 뻗었다. 중년 여자는 민여진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네 얼굴은... 그리고 눈은? 괜찮아?”민여진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조금 다친 것뿐이에요. 진성 씨가 치료해 주고 있어서 곧 다시 볼 수 있을 거예요.”민여진의 말은 단순한 핑계였지만 박진성의 눈빛은 어두워졌다. 그 역
민여진은 민영미에게서 은은한 계수나무 향기를 맡았다. 짙은 향은 아니었지만 민여진은 예민하게 반응했다.빈민가에 살던 시절, 마을 어귀의 계수나무를 지날 때마다 민영미는 코를 막고 기침을 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민영미는 계수나무 알레르기가 있었다. 냄새만 맡아도 온몸이 가렵고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왜 그래?”정수향은 민여진이 갑자기 굳은 것을 눈치채고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야?”“아무것도 아니에요...”민여진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음속은 혼란스러웠다.“그냥 엄마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서요. 무슨 향수인가요?”“아.”정수향은 안심하며 웃었다.“내가 무슨 향수를 뿌리겠어. 호텔 방에 있던 향초 냄새가 옷에 밴 것 같구나.”“계수나무 향이라고요?”“맞아.”정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마 그 냄새 맞을 거야.”민여진은 순간 손끝에 힘을 주었다. 박진성 역시 이상함을 감지하고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야?”“난...”민여진의 머릿속은 텅 비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눈빛은 멍했다.“엄마는 계수나무 알레르기 있잖아요. 어떻게 계수나무 향이 나는 방에 온종일 있을 수 있었어요?”민여진의 질문에 정수향은 굳어진 얼굴로 박진성을 바라보았다. 박진성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민여진이 아니었기에 민영미가 계수나무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는 곧 마음을 가다듬고 물었다.“계수나무 향기에 알레르기가 있는 거야 아니면 꽃가루에 알레르기가 있는 거야?”민여진이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 박진성은 재빨리 말했다.“꽃가루 알레르기겠지.”“맞아.”민영미는 박진성의 말을 받아 대답했다.“계수나무 향 자체는 좀 불편하긴 했지만 알레르기는 없어. 나는 꽃가루에만 알레르기가 있는 거야.”“그래요?”민여진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민영미는 계수나무가 있는 곳에서만 콧물을 흘리고 기침하며 속이 메스꺼워했었다.“그랬
민여진의 눈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붉어진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진성 씨, 고마워요.”그녀는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고 눈빛에서는 자연스럽게 감사의 마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눈빛은 박진성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가슴을 답답해지고 숨이 막히게 했다.민영미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민여진만 모르고 있었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그는 가짜 세상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기에 ‘고맙다'라는 말은 그에겐 견디기 힘든 무게로 다가왔다.“고맙다는 말 싫다고 했잖아.”박진성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두 사람 오랜만에 만났으니 할 이야기가 많겠지. 난 서재에서 일 좀 하고 있을게. 무슨 일 있으면 올라와.”박진성은 계단을 올라 서재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민여진의 미소와 민영미의 비참한 죽음이 그의 머릿속에서 겹쳐지면서 그는 극심한 갈등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똑똑...그때, 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박진성은 고개를 들었다. 민여진이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서재 문을 열고 있었다.“무슨 일이야?”박진성은 의자에 기대앉아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미간을 찌푸렸다.“네 엄마랑 얘기해야지 여기는 왜 왔어?”민여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문을 닫고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진성 씨, 부탁 하나 해도 될까?”민여진이 큰 결심을 하고 온 것이 분명했다. 박진성은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뭔데?”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그게... 엄마를 당분간 이 별장에 머물게 해 주면 안 될까?”그녀는 곧바로 덧붙였다.“걱정하지 마. 그냥 엄마가 오가는 게 불편할까 봐 그래. 조용히 계시도록 할 테니 절대 방해하지 않을게.”“그게 다야?”민여진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박진성은 의자에 기대앉아
민여진은 박진성이 고개를 드는 그 순간,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강렬한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눈앞이 깜깜했지만 그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머물러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민여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마음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박진성은 다시 몸을 숙여 민여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그는 조급해하지 않고 다정하게 속삭이며 마치 평생의 인내심을 쏟아붓듯 공략해 왔다.“진성 씨...”민여진은 그를 밀어냈다. 극도로 어색하고 불편했다.“이러지 마...”“이러지 말라는 게 뭔데?”박진성은 검은 눈동자로 깊숙이 물었다.“이렇게 가까이 있는 거? 키스하는 거? 아니면 방금 전에 했던 말?”민여진은 박진성의 팔을 꽉 붙잡았다. 박진성의 숨결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말해, 민여진. 네 마음속에 있는 생각, 뭐든지 말해. 다 들어줄게. 다 약속할게.”결국 민여진은 서재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벽을 짚고 걸음을 재촉하는 걸 보고 정수향이 계단에서 의아하게 불렀다.“여진아?”민여진은 멈칫 발걸음을 멈추자 정수향이 다가와 소매로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왜 그래? 뭐가 그렇게 급해? 앞도 안 보이는데 조심해야지. 넘어지면 어쩌려고?”“아무것도 아니에요.”민여진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숙였다.민여진의 입술에 남은 흔적을 본 정수향은 바로 눈치를 채고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저 웃으며 말했다.“난 밖에 살아도 괜찮다고 했잖아. 너한테 안 오는 것도 아니고 매일 아침마다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는 사람도 있어.”“하지만...”민여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대답했다.“겨울인데 너무 춥잖아요.”민영미는 겨울을 제일 싫어했다. 겨울이 되면 무릎이 아프고 몸 전체가 쑤셨기 때문이다.젊었을 적 한겨울에 강가에서 남의 빨래를 하다 얻은 병이었다.“참.”민여진은 문득 생각이 난 듯 말했다.“엄마, 무릎은 이제 괜찮으세요? 아직도 아파요?”정수향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말했다.“별로 안 아파. 많이 좋
잠들기 전, 민여진은 정수향의 팔을 꼭 껴안고 말했다.“엄마, 살아있어 줘서 고마워요. 아빠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앞으로 내가 엄마 지켜줄게요. 엄마를 위해서라도 나 잘살 거예요.”민여진은 졸음에 못 이겨 잠들었지만 정수향은 눈을 뜬 채 마음이 뭉클했다.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진짜 민영미라면 뭐라고 했을까. 도무지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정수향은 민여진이 잠든 걸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치우고 침대에서 내려왔다.밖으로 나가니 박진성이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바닥에는 담배꽁초가 흩어져 있었다. 그는 검은 눈을 가늘게 뜨고 1층을 바라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민여진이 그쪽을 의심하던가요?”정수향은 고개를 저었다.“전혀요. 민여진 씨는 아주 순진해서 이상한 점이 있으면 바로 말하는 성격이에요. 그럼 제가 해명할 수 있고요. 지금쯤이면 제가 민영미라고 완전히 믿고 있을 거예요.”“그래요.”박진성은 눈을 가늘게 떴다.“하지만 방심은 금물입니다. 민여진은 눈치 빠르고 예민한 사람이에요.”“알겠습니다.”“그리고 내일 민여진이랑 외출하세요. 당신이 옆에 있으면 저도 안심하고 볼일을 볼 수 있으니까. 생필품 같은 걸 사러 가자고 하세요.”...다음 날, 민여진은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다.서원은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꺼운 옷을 입고 내려오는 민여진의 밝은 모습과 얼굴에 감도는 생기는 그를 잠시 놀라게 했다.“민여진 씨, 좋은 아침입니다.”“서원 씨, 좋은 아침이에요.”민여진은 인사를 하고 나서 말했다.“잘 왔어요. 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슈퍼에 가서 벨벳 천이랑 바늘, 실 좀 사다 줄 수 있어요?”“그런 건 뭐에 쓰시려고요?”“쓸 데가 있어요.”서원은 더 묻지 않고 말했다.“같이 가시죠.”“네?”“벨벳 천이 어떤 건지, 저 같은 남자는 잘 모르잖아요. 민여진 씨가 직접 고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다만 날이 너무 추워서 몸이...”“괜찮아요
차 안엔 아무도 없었다박진성이 정신을 차렸을 때 목이 타들어 갈 듯 아팠고 몸은 불덩이처럼 뜨겁다가도 금세 차갑게 가라앉았다.몸이 이렇게 고장 난 건 분명 병 때문이었다.마지막으로 아팠던 게 거의 1년 전이었을까. 그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침대 머리맡 서랍을 열었다.민여진이 약상자를 거기에 뒀던 게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기침을 하며 상자를 꺼내보자 하나하나 약봉지마다 작은 메모지들이 붙어 있었다.‘언제까지 복용’, ‘이 약은 공복에’, ‘열이 나면 복용’, 세세한 설명이 다 적혀 있었다.그 여자는 항상 그랬다. 작은 것 하나까지 철저히 빠뜨리는 법이 없었다.박진성은 메모지를 떼어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아팠다.며칠이 지나도 병은 쉽게 낫지 않았지만 그는 다음 날 아침부터 정상 출근했다.기침을 참아가며 몸살과 어지러움을 무릅쓰고 서류를 넘기고 회의를 소화했다. 하루, 하루, 또 하루.이제는 조금씩 잊히는가 싶었는데 그날 서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대표님! 그 차량 위치를 찾았습니다!”박진성은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걸 놓고 바로 차를 몰았다.남산교에 도착하자 서원이 몇몇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칼바람이 불었지만 벌써 윗옷을 벗고 준비 중인 남자들도 있었다.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서원에게 다가갔다.“어떻게 됐어?”“차량 위치는 확인됐습니다. 지금 두 번째 잠수하러 들어가는 중이에요. 장비를 들고 들어가 유리창을 깨고 사모님을... 데리고 나올 겁니다.”“그래...”박진성은 정신이 아득해졌고 마비됐던 감정이 그 순간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그리고 묵직하고 차가운 통증이 심장을 찔렀다.그는 두려웠다. 정말로 민여진의 시신을 보게 될까 봐.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에선 그녀를 드디어 편히 보내줄 수 있다는 조금의 평온도 느껴졌다. 이 차가운 물속에서 그녀가 더는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잠수팀은 장비를 짊어지고 물 속으로 사라졌다.서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정식으로 시신 수습하
분노한 박진성은 문채연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그런데 너 왜 이 일을 숨겼어? 나한테 한마디도 하지 않고? 민여진이 감옥에 가게 내버려둔 이유가 네가 살아남기 위해서야? 문채연, 넌 죄책감도 안 느껴?”그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졌고 그는 그녀의 이름을 또렷이 불렀다.문채연은 본능적으로 겁에 질렸고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 했다.“진성 씨! 내 말을 들어봐요!”그러나 박진성은 차갑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그는 순간 깨달았다. 눈앞에 서 있는 이 여자가 더 이상 자신이 알던 그 여자가 아니란 것을.어떻게 이렇게 냉랭해질 수 있을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토록 순수하고 따뜻했던 그녀가 말이다.문채연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불안과 두려움이 뒤섞인 그녀는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진성 씨, 제발... 제발 나를 미워하지 마요.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난 그냥... 너무 무서웠을 뿐이에요...”그녀는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내가 2년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사이에 진성 씨는 민여진 씨와 관계를 이어갔잖아요. 민여진 씨는 이미 진성 씨의 아이까지 가졌고요... 만약 내가 감옥에 가게 된다면 민여진 씨가 아이를 낳고 나서 여전히 내 자리가 있을까요?”“난 진성 씨를 너무 사랑했어요. 그래서 진성 씨를 위해서라면 불 속에도 뛰어들 수 있었어요. 그만큼 내겐 목숨보다 진성 씨가 더 소중해요. 그런데... 그걸 빼앗길까 봐 두려웠어요. 그것뿐이에요.”“나는 알고 있었지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민여진 씨를 해치지도 않았고요. 나의 이기심이 문제라면 그건 인정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나를 미워하지 말아요, 진성 씨...”문채연은 흐느끼며 그를 힘껏 끌어안았고 뜨거운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그러나 박진성은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녀의 팔을 단호하게 밀어냈다.“진성 씨...”문채연의 얼굴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약혼은 미루자
상우가 도착했을 때 박진성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2층에서 내려왔다.“대표님.”상우는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문채연 씨의 약혼식 드레스 디자인입니다. 여러 가지 시안을 준비했는데 매장에서 빠르게 결정해달라고 합니다.”“그래.”박진성은 노트를 받아 들었다.그런데 상우가 돌아서려 할 때 박진성이 그를 불러 세웠다.“서원은 요즘 어디에 있어?”상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서원 형님은 아직도 인양팀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사모님의 시신을 먼저 찾고 싶어 하더라고요. 제대로 안치해 드리고 싶다면서요.”박진성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사실 그조차도 이제는 포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서원은 여전히 집착하고 있었다.박진성은 한참을 침묵하다 짧게 말했다.“추운 날씨에 바닷가에 계속 있게 하지 마. 아직 젊잖아.”“네. 저도 몇 번이나 말렸는데 잘 듣질 않네요. 하지만 대표님께서 말씀하시면 이제 포기할지도 모르죠.”상우가 떠난 후 박진성은 노트를 들고 문채연의 방 문을 두드렸다.잠시 후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성 씨, 나 샤워 중이에요. 무슨 일이에요?”박진성은 문을 열고 들어갔고 손에 든 노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업체에서 드레스 디자인을 보내왔어. 상우가 가져다줬는데 빨리 결정하라고 하네.”“네, 침대에 놓아 줘요. 곧 나갈게요.”문채연의 목소리는 왠지 조금 부끄러운 듯 들렸다.사실 그녀는 박진성이 기다려 주기를 바랐지만 박진성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그는 몇 걸음 걸어가 티 테이블 위에 노트를 내려놓았다.그리고 돌아서려는 순간 진동음이 울렸다. 박진성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휴대폰에 꽂혔다.그런데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그때 문채연이 서둘러 나왔다. 그녀는 목욕 가운을 걸치고 있었고 머리는 아직 젖어 있었으며 뺨은 열기로 붉어져 있었다.그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박진성을 본 순간 그녀는 가슴이 뛰었다. 이제야 기회가 왔다. 민여진이 박진성의 마음을 차지한 이유는 아마도 그녀가 그의 ‘첫 여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그래.”조인화는 민여진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민여진의 그릇에 놓았다.“많이 먹어, 몸 좀 더 회복해야지. 며칠 뒤에 내가 수리공을 불러서 네 집 대문을 열어줄 테니까 그때 들어가서 한번 둘러봐.”“네.”...한편 요 며칠 동안 박진성이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는 밀린 업무를 잔뜩 쌓아두고 며칠 밤을 연속으로 사무실에서 버티고 있었다.보다 못한 비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서류 검토는 모두 끝났고 현재 긴급한 업무도 없습니다. 오늘은 들어가서 좀 쉬시는 게 어떨까요?”비서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의 눈 밑에 다크써클이 길게 내려앉았고 얼굴은 피로에 절어 있었다.박진성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그 순간 그를 짓누르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고 눈앞이 아찔해졌다.“알겠어.”그는 무심하게 대답했다.그러나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민여진의 흔적이 남아 있을 테니까.그 집 곳곳에 묻어 있는 그녀의 향기, 그것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꿈속에서도 그녀를 만났다.그런데 박진성은 이 상태로 더 버티다간 몸이 먼저 무너질 것이 뻔했다.그는 결국 재킷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고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그러나 집에 도착한 순간 뜻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몇몇 사람들이 집 안의 물건들을 나르고 있는 것이다.박진성은 차에서 내렸고 그 순간 한 직원이 들고 있는 상자가 보였다. 상자 안에는 민여진의 옷들이 들어 있었다.순간 폭발한 그는 단숨에 그 상자를 낚아챘다. 그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직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누가 시켰어? 대체 누구 마음대로 집 안 물건을 건드리는 거야?”직원은 겁에 질려 얼어붙었다.그때 거실에서 문채연이 급히 뛰쳐나왔다.“진성 씨, 무슨 일이에요?”그러나 그녀는 시선이 상자로 향하는 순간 무슨 상황인지 알아챘다.당황한 그녀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우리 곧 약혼하잖아요
한때 이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로 이름을 떨쳤던 민여진. 그녀가 어른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수많은 청년들이 청혼을 준비했었다.그러나 결국 그녀의 운명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조인화는 그 기억을 떠올리자 가슴이 먹먹해졌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녀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TV를 켰다.“여진아, TV라도 보면서 기분 좀 풀어. 나는 부엌에서 음식 좀 가져올게.”“네, 이모.”민여진은 더듬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TV에서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고 그녀는 머리를 빗으며 드라마의 대사를 듣고 있었다.그리고 드라마가 끝난 후 화면이 연예 뉴스로 바뀌었다.“보스 그룹 박진성 대표의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박진성 대표는 오랜 연인 고효연 씨와 오는 28일 성대한 약혼식을 올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박 대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양성에서 가장 큰 호텔을 통째로 예약했는데 이번 약혼식은 박 대표의 인생 최고의 사랑을 증명하는 순간이 될 것 같습니다. 모두 함께 축복하는 마음으로 다가올 28일을 기다려봅시다!”그 순간 조인화가 국을 들고 왔고 TV에서 흘러나온 소식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아니, 보스 그룹 대표가 또 결혼을 한다고? 아내가 감옥에 들어간 지 고작 2년밖에 안 됐잖아?”민여진은 머리를 빗다가 동작을 멈추고 담담하게 대답했다.“잘 모르겠어요.”조인화는 여전히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그런데 고효연... 이 이름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왠지 전에 감옥에 갔던 그 여자랑 비슷한 느낌이야.”그렇게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왜냐하면 고효연이라는 이름은 문채연이 밖에서 사용하던 가명이었으니까.그리고 이토록 빠르게 약혼을 진행하는 이유는 이제 세상 사람들에게 ‘민여진’이 이미 죽은 사람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그렇다면 박진성과 그녀의 혼인 역시 법적으로는 더 이상 효력이 없을 터였다.민여진은 문득 떠올렸다. 경찰서에서 풀려나기 전날 밤 어떤 낯선 남자가 그녀를 찾아왔었는데 그 남자가 제안했었다.“내 도움을 받
박진성은 손으로 문채연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마음이 흔들린 그는 복잡한 감정을 꾹 눌러 삼키며 입을 열었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네가 깨어나 준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기뻐.”“정말요?”문채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그럼 진성 씨 마음속에 아직도 나 있어요?”박진성은 순간 멍해졌다.마음속에 문채연이 있는지는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민여진의 죽음뿐이었다.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저릿하게 아파왔다.박진성은 쉽게 대답할 수 없어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그가 침묵하는 사이 문채연은 눈빛에 떠오르는 증오를 삼키고는 슬며시 화제를 돌렸다.“그럼 예전에 약속했던 거 있잖아요... 나와 결혼하겠다고 했던 말, 아직 유효해요? 이제 민여진 씨는 떠났고 두 사람의 결혼 생활도 끝났잖아요. 그러니 이제 나한테 대답해 줘야 해요.”그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박진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시선이 그의 가슴을 옥죄었고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빚진 것은 언젠가 갚아야만 한다는 것을.그는 이미 한 사람을 파괴해 버렸으니 더 이상 또 다른 누군가를 망가뜨릴 순 없었다....몇 날 동안 쉼 없이 달려온 차가 드디어 멈춰 섰다.트럭 안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있던 민여진은 작은 기척에도 긴장해하며 귀를 기울였다.그러다 문이 덜컥 열렸다.“다 왔어요.”운전사가 무심하게 말했고 민여진은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려왔다.그러나 땅을 딛는 순간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하지만 운전사는 돕기는커녕 문을 쾅 닫아버렸다.“여기가 안진 마을이에요. 난 약속한 대로 도와줬으니까 이제부터는 그쪽이 알아서 해요. 나는 더 이상 신경 안 써요.”민여진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고 먼지를 툭툭 털고는 말했다.“고마워요.”그 한마디에 운전수는 그녀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여기 길 알아요? 눈도 안 보이는데 괜히 어디 빠지지 말고요. 그러다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길
“괜찮아.”박진성은 차라리 이 상처가 영원히 아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계속 아파야 한다. 그래야 그가 얼마나 잔인하게 한 사람을 망가뜨렸는지 잊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박진성은 떨리는 눈을 감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떴다.“돌아가자.”서원이 차를 몰아 박진성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런데 차에서 내리려던 순간 문 앞에 서 있는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박진성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흐려졌고 눈앞이 아득해졌다.‘민여진인가? 민여진이 날 찾아온 건가?’그는 본능적으로 차에서 내려 몇 걸음 성급하게 내디뎠다.그러나 가까이 다가가고서야 깨달았다.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문채연이었다.“진성 씨!”그녀가 다가왔는데 손을 꼭 쥔 채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박진성이 양경호를 찾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었다.문채연은 조심스럽게 박진성을 살폈다. 다행히 양경호가 입을 다물고 있었던 모양이다.박진성은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물었다.“왜 왔어? 날씨도 추운데 그냥 돌아가.”“내가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요? 민여진 씨 때문에 진성 씨까지 망가져 가는 걸 두고 볼 순 없었어요!”문채연의 입술이 바짝 말라붙었다.그리고 박진성도 표정이 굳어졌다.그녀의 입에서 ‘민여진’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의 심장이 강하게 조여왔다. 그 고통에 박진성은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그러나 문채연은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팔을 더욱 세게 붙잡으며 말했다.“진성 씨 벌써 일주일째 회사에도 안 나가고 있잖아요. 아무리 민여진 씨의 일이 충격적이라도 이건 아니에요. 진성 씨는 보스 그룹의 대표예요! 한 사람 때문에 이렇게 모든 걸 내팽개쳐도 돼요?”박진성은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고 숨을 가다듬으며 차갑게 말했다.“나도 알아. 회사가 언제 내 도움이 필요한지.”“그런데도 진성 씨는 이렇게 무너지고 있잖아요! 민여진 씨는 이미 떠났어요! 계속 찾는다고 돌아올 사람
“누가 한 짓이야? 언제 벌어진 거야?”서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민여진 씨가 수감되기 전날입니다. 그리고 그날이 바로 민영미 씨가 대표님께 쫓겨난 날이기도 합니다. 민영미 씨가 병원에서 쫓겨난 직후 한 대의 차가 민영미 씨를 데려갔고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켰습니다. 영상도 그날 유출되었고요... 어쩌면 민여진 씨도 이미 봤을지 모릅니다.”박진성의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그리고 민여진이 전화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그녀는 미친 듯이 울부짖었고 절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박진성, 네가 날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어.”그러나 그때 그는 코웃음을 쳤고 민여진이 동정심을 사려고 쇼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에게 줬던 모든 것을 도로 가져온 것뿐인데.민여진은 마치 세상을 잃은 사람처럼 울부짖었고 감옥에 가겠다고 했다. 박진성은 그 이유가 그녀가 누리던 풍족한 삶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고 어머니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때 민여진은 이미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었다는 것을.그 순간 박진성의 뺨을 세게 후려치는 듯한 충격이 몰려왔고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던 자신의 태도가,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던 그녀의 모습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너무 아팠다.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그런데 민여진은 얼마나 더 아팠을까? 사랑했던 사람에게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내몰렸던 그녀가 그를 보고 왜 그렇게 두려워했는지, 왜 그렇게 절박하게 도망치려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박진성은 주먹을 꽉 쥐었다.그리고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누가 한 짓이야?”“양경호 씨입니다.”서원이 그 이름을 말하자 박진성은 정신이 혼미해졌다.“그 자식이 왜?”“아마 대표님을 위해서겠죠. 아니면 문채연 씨를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양경호 씨는 대표님을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대표님이 직접 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대신 처리해 줄 사람입니다.”서원의 주먹이 떨렸
아무리 가능성이 희박해도 박진성은 포기할 수 없었다.하지만 이미 사흘이 지났고 아무리 찾아도 민여진의 흔적은 없었다. 경찰도 수색을 중단했다.민여진에게 남은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1년 전 그녀의 유일한 혈육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그녀와 법적으로 연결된 사람은 오직 남편인 박진성뿐이었다.경찰이 찾아와 사망 확인서에 서명하라고 했다.그 순간 박진성은 손에 쥔 펜을 바닥에 내던졌다.“말도 안 돼요!”그의 태도는 단호했다.“죽었으면 시신이라도 확인 시켜줘요! 민여진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무슨 근거로 사망했다고 단정 짓는 거예요? 어쩌면 아예 그 차에 타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조사가 잘못된 거라고요!”경찰은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고 한숨을 쉬었다.“목격자도 있고 CCTV에도 분명히 찍혔습니다. 민여진 씨는 차 안에 있었습니다.”“중간에 내렸을 가능성은요?”박진성은 핏발 선 눈으로 경찰을 향해 번뜩였다.“시신을 직접 보기 전까지 서명하지 않을 거예요!”그는 결국 서명하지 않았고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사고 현장인 남산교로 향했다.가드레일은 부서져 있었고 차가 돌진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그 앞에 서자 싸늘한 겨울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박진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그는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민여진이 정말 여기서 떨어졌다고?’믿을 수 없는 그는 이를 악물고 두 주먹을 쥐었다.박진성은 다시 힘을 내어 몸을 일으키고 철제 가드레일이 없는 바위 절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그만해!”이정화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그녀는 그를 있는 힘껏 붙잡았다.“이제 됐잖아! 언제까지 이렇게 미쳐 있을 거야! 여기서 떨어지면 끝이야. 사람이 이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민여진은 죽지 않았어요.”박진성은 이를 악물었다.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그는 그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민여진은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자신을 벌주려고 숨어 있는 것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