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이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로 이름을 떨쳤던 민여진. 그녀가 어른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수많은 청년들이 청혼을 준비했었다.그러나 결국 그녀의 운명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조인화는 그 기억을 떠올리자 가슴이 먹먹해졌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녀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TV를 켰다.“여진아, TV라도 보면서 기분 좀 풀어. 나는 부엌에서 음식 좀 가져올게.”“네, 이모.”민여진은 더듬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TV에서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고 그녀는 머리를 빗으며 드라마의 대사를 듣고 있었다.그리고 드라마가 끝난 후 화면이 연예 뉴스로 바뀌었다.“보스 그룹 박진성 대표의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박진성 대표는 오랜 연인 고효연 씨와 오는 28일 성대한 약혼식을 올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박 대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양성에서 가장 큰 호텔을 통째로 예약했는데 이번 약혼식은 박 대표의 인생 최고의 사랑을 증명하는 순간이 될 것 같습니다. 모두 함께 축복하는 마음으로 다가올 28일을 기다려봅시다!”그 순간 조인화가 국을 들고 왔고 TV에서 흘러나온 소식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아니, 보스 그룹 대표가 또 결혼을 한다고? 아내가 감옥에 들어간 지 고작 2년밖에 안 됐잖아?”민여진은 머리를 빗다가 동작을 멈추고 담담하게 대답했다.“잘 모르겠어요.”조인화는 여전히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그런데 고효연... 이 이름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왠지 전에 감옥에 갔던 그 여자랑 비슷한 느낌이야.”그렇게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왜냐하면 고효연이라는 이름은 문채연이 밖에서 사용하던 가명이었으니까.그리고 이토록 빠르게 약혼을 진행하는 이유는 이제 세상 사람들에게 ‘민여진’이 이미 죽은 사람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그렇다면 박진성과 그녀의 혼인 역시 법적으로는 더 이상 효력이 없을 터였다.민여진은 문득 떠올렸다. 경찰서에서 풀려나기 전날 밤 어떤 낯선 남자가 그녀를 찾아왔었는데 그 남자가 제안했었다.“내 도움을 받
“그건 그래.”조인화는 민여진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민여진의 그릇에 놓았다.“많이 먹어, 몸 좀 더 회복해야지. 며칠 뒤에 내가 수리공을 불러서 네 집 대문을 열어줄 테니까 그때 들어가서 한번 둘러봐.”“네.”...한편 요 며칠 동안 박진성이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는 밀린 업무를 잔뜩 쌓아두고 며칠 밤을 연속으로 사무실에서 버티고 있었다.보다 못한 비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서류 검토는 모두 끝났고 현재 긴급한 업무도 없습니다. 오늘은 들어가서 좀 쉬시는 게 어떨까요?”비서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의 눈 밑에 다크써클이 길게 내려앉았고 얼굴은 피로에 절어 있었다.박진성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그 순간 그를 짓누르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고 눈앞이 아찔해졌다.“알겠어.”그는 무심하게 대답했다.그러나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민여진의 흔적이 남아 있을 테니까.그 집 곳곳에 묻어 있는 그녀의 향기, 그것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꿈속에서도 그녀를 만났다.그런데 박진성은 이 상태로 더 버티다간 몸이 먼저 무너질 것이 뻔했다.그는 결국 재킷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고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그러나 집에 도착한 순간 뜻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몇몇 사람들이 집 안의 물건들을 나르고 있는 것이다.박진성은 차에서 내렸고 그 순간 한 직원이 들고 있는 상자가 보였다. 상자 안에는 민여진의 옷들이 들어 있었다.순간 폭발한 그는 단숨에 그 상자를 낚아챘다. 그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직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누가 시켰어? 대체 누구 마음대로 집 안 물건을 건드리는 거야?”직원은 겁에 질려 얼어붙었다.그때 거실에서 문채연이 급히 뛰쳐나왔다.“진성 씨, 무슨 일이에요?”그러나 그녀는 시선이 상자로 향하는 순간 무슨 상황인지 알아챘다.당황한 그녀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우리 곧 약혼하잖아요
상우가 도착했을 때 박진성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2층에서 내려왔다.“대표님.”상우는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문채연 씨의 약혼식 드레스 디자인입니다. 여러 가지 시안을 준비했는데 매장에서 빠르게 결정해달라고 합니다.”“그래.”박진성은 노트를 받아 들었다.그런데 상우가 돌아서려 할 때 박진성이 그를 불러 세웠다.“서원은 요즘 어디에 있어?”상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서원 형님은 아직도 인양팀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사모님의 시신을 먼저 찾고 싶어 하더라고요. 제대로 안치해 드리고 싶다면서요.”박진성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사실 그조차도 이제는 포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서원은 여전히 집착하고 있었다.박진성은 한참을 침묵하다 짧게 말했다.“추운 날씨에 바닷가에 계속 있게 하지 마. 아직 젊잖아.”“네. 저도 몇 번이나 말렸는데 잘 듣질 않네요. 하지만 대표님께서 말씀하시면 이제 포기할지도 모르죠.”상우가 떠난 후 박진성은 노트를 들고 문채연의 방 문을 두드렸다.잠시 후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성 씨, 나 샤워 중이에요. 무슨 일이에요?”박진성은 문을 열고 들어갔고 손에 든 노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업체에서 드레스 디자인을 보내왔어. 상우가 가져다줬는데 빨리 결정하라고 하네.”“네, 침대에 놓아 줘요. 곧 나갈게요.”문채연의 목소리는 왠지 조금 부끄러운 듯 들렸다.사실 그녀는 박진성이 기다려 주기를 바랐지만 박진성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그는 몇 걸음 걸어가 티 테이블 위에 노트를 내려놓았다.그리고 돌아서려는 순간 진동음이 울렸다. 박진성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휴대폰에 꽂혔다.그런데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그때 문채연이 서둘러 나왔다. 그녀는 목욕 가운을 걸치고 있었고 머리는 아직 젖어 있었으며 뺨은 열기로 붉어져 있었다.그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박진성을 본 순간 그녀는 가슴이 뛰었다. 이제야 기회가 왔다. 민여진이 박진성의 마음을 차지한 이유는 아마도 그녀가 그의 ‘첫 여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분노한 박진성은 문채연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그런데 너 왜 이 일을 숨겼어? 나한테 한마디도 하지 않고? 민여진이 감옥에 가게 내버려둔 이유가 네가 살아남기 위해서야? 문채연, 넌 죄책감도 안 느껴?”그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졌고 그는 그녀의 이름을 또렷이 불렀다.문채연은 본능적으로 겁에 질렸고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 했다.“진성 씨! 내 말을 들어봐요!”그러나 박진성은 차갑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그는 순간 깨달았다. 눈앞에 서 있는 이 여자가 더 이상 자신이 알던 그 여자가 아니란 것을.어떻게 이렇게 냉랭해질 수 있을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토록 순수하고 따뜻했던 그녀가 말이다.문채연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불안과 두려움이 뒤섞인 그녀는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진성 씨, 제발... 제발 나를 미워하지 마요.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난 그냥... 너무 무서웠을 뿐이에요...”그녀는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내가 2년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사이에 진성 씨는 민여진 씨와 관계를 이어갔잖아요. 민여진 씨는 이미 진성 씨의 아이까지 가졌고요... 만약 내가 감옥에 가게 된다면 민여진 씨가 아이를 낳고 나서 여전히 내 자리가 있을까요?”“난 진성 씨를 너무 사랑했어요. 그래서 진성 씨를 위해서라면 불 속에도 뛰어들 수 있었어요. 그만큼 내겐 목숨보다 진성 씨가 더 소중해요. 그런데... 그걸 빼앗길까 봐 두려웠어요. 그것뿐이에요.”“나는 알고 있었지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민여진 씨를 해치지도 않았고요. 나의 이기심이 문제라면 그건 인정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나를 미워하지 말아요, 진성 씨...”문채연은 흐느끼며 그를 힘껏 끌어안았고 뜨거운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그러나 박진성은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녀의 팔을 단호하게 밀어냈다.“진성 씨...”문채연의 얼굴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약혼은 미루자
차 안엔 아무도 없었다박진성이 정신을 차렸을 때 목이 타들어 갈 듯 아팠고 몸은 불덩이처럼 뜨겁다가도 금세 차갑게 가라앉았다.몸이 이렇게 고장 난 건 분명 병 때문이었다.마지막으로 아팠던 게 거의 1년 전이었을까. 그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침대 머리맡 서랍을 열었다.민여진이 약상자를 거기에 뒀던 게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기침을 하며 상자를 꺼내보자 하나하나 약봉지마다 작은 메모지들이 붙어 있었다.‘언제까지 복용’, ‘이 약은 공복에’, ‘열이 나면 복용’, 세세한 설명이 다 적혀 있었다.그 여자는 항상 그랬다. 작은 것 하나까지 철저히 빠뜨리는 법이 없었다.박진성은 메모지를 떼어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아팠다.며칠이 지나도 병은 쉽게 낫지 않았지만 그는 다음 날 아침부터 정상 출근했다.기침을 참아가며 몸살과 어지러움을 무릅쓰고 서류를 넘기고 회의를 소화했다. 하루, 하루, 또 하루.이제는 조금씩 잊히는가 싶었는데 그날 서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대표님! 그 차량 위치를 찾았습니다!”박진성은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걸 놓고 바로 차를 몰았다.남산교에 도착하자 서원이 몇몇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칼바람이 불었지만 벌써 윗옷을 벗고 준비 중인 남자들도 있었다.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서원에게 다가갔다.“어떻게 됐어?”“차량 위치는 확인됐습니다. 지금 두 번째 잠수하러 들어가는 중이에요. 장비를 들고 들어가 유리창을 깨고 사모님을... 데리고 나올 겁니다.”“그래...”박진성은 정신이 아득해졌고 마비됐던 감정이 그 순간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그리고 묵직하고 차가운 통증이 심장을 찔렀다.그는 두려웠다. 정말로 민여진의 시신을 보게 될까 봐.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에선 그녀를 드디어 편히 보내줄 수 있다는 조금의 평온도 느껴졌다. 이 차가운 물속에서 그녀가 더는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잠수팀은 장비를 짊어지고 물 속으로 사라졌다.서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정식으로 시신 수습하
“확실합니다. 백 퍼센트 확실해요. 물속에 그렇게 어렵게 들어갔는데 차 안에 정말 아무도 없지 않았다면 내가 그렇게 쉽게 올라왔겠습니까.”잠수부는 거듭 말했다.“나는 이런 경우 처음 봐요. 차가 바다에 빠졌는데 안에 시신이 하나도 없어요.”“혹시 시신이 다른 데로 떠내려간 건 아닐까요?”누군가 조심스레 물었다.“말도 안 돼요.”남자가 고개를 저었다.“차창은 단단히 닫혀 있었어요. 내가 보기엔 누가 물속에서 문을 열고 나간다는 건 불가능해요. 그러니 가능성은 단 하나예요. 차가 빠질 당시 차 안엔 애초에 아무도 없었던 겁니다.”‘차 안엔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은 마치 벼락처럼 박진성의 가슴 속에 내리꽂혔다.그는 이 감정이 기쁨인지 절망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까매지고 숨조차 가빠왔다.‘민여진이 살아 있어.’그건 거의 본능적으로 떠오른 결론이었다. 이 모든 건 계획된 것이고 그녀의 죽음을 가장해 그를 내려놓게 만들려는 함정이었다.문득 그녀가 경찰서에서 나온 직후 곧장 이 차에 탑승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박진성은 가슴팍을 움켜쥐고 핏발 선 눈으로 서원에게 명령했다.“당장 조사해. 민여진이 경찰서에서 너와 나 말고 누구를 만났는지 전부.”서원은 곧장 움직였고 박진성은 차 안으로 돌아왔다.몸이 차가운 공기에 노출된 탓인지 오한과 열이 번갈아 밀려왔고 손끝까지 떨려왔다. 그는 죽음 끝에서 다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민여진은 죽지 않았다. 그녀는 엄청난 계략을 짰고 세상의 모든 이들을 속였다.정말 잔인한 여자였다. 그가 고통스러워할 것을 몰랐을까? 아니, 알았기에 더욱 철저히 저지른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가 죽기를 바랐으니까.박진성의 온몸이 끓어올랐다. 그 열기에 머리까지 지끈거렸고 결국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자신의 별장 소파 위였고 곁에서 휴대폰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강태화가 곁을 지키고 있었고 박진성은 몸을 가누며 통증을 참아내고 전화를 받았다
“이 못된 놈!”이정화는 오늘 들어 처음으로 분노를 드러냈다. 그녀는 차갑게 눈을 부라리며 박진성을 노려봤다.“너는 네가 지은 죄가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해?”박진성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많죠. 그래서 전 민여진을 찾아야 해요. 제가 저지른 모든 걸 하나하나 갚아야 하니까요.”“네가 갚고 싶다고 그 애가 받아들이기라도 할까?”이정화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박진성은 가슴이 쿡 하고 찢어지는 것 같아 손바닥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그는 낮은 목소리도 단호하게 말했다.“민여진이 거절해도 받아들일 때까지 전 끝까지 빌 거예요.”이정화는 두 손을 모아 불상 앞에 합장을 올리며 말했다.“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 애가 떠난 건 내가 시켜서가 아니야. 그 애가 널 증오했기 때문이지. 널 벗어나고 싶어 했고 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정말 그 애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전부 내려놔. 가볍고 평온한 삶을 살아. 그리고 그냥... 그 애가 죽은 셈 쳐.”“그럴 수 없습니다.”박진성은 망설임 없이 단칼에 잘랐다.그는 창백한 얼굴에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다시 똑같이 물었다.“어머니, 민여진을 어디에 숨기셨습니까?”이정화는 대답하지 않았다.박진성은 격렬하게 기침하며 몸을 떨었고 계단을 비틀비틀 올라가려다 겨우 두 걸음 만에 바닥에 쓰러졌다.“진성 씨!”문채연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달려가 그를 붙들려 했다.그러나 박진성은 차갑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고 표정엔 아무런 온기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그날의 사건을 문채연 탓으로 여기고 있었다.문채연은 이를 꽉 깨물었다. 민여진이 죽지 않았고 그 사실을 박진성이 알아버렸다는 게 그녀는 도저히 용서되지 않았다.박진성은 병 때문에 안색이 형편없었지만 바로 2층으로 올라가 구석구석 모든 방을 다 뒤졌다.그제야 이정화가 못 참겠다는 듯 소리쳤다.“너 정말 미쳤구나! 지금 여기 채연이도 있고 너희는 약혼을 앞두고 있어. 곧 결혼도 할 거고. 그런데 넌 채연이 앞에서 다른 여자를 찾겠다고 이
박진성의 입술은 새하얗게 바랬고 얼굴도 병든 사람처럼 창백했다.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엔 힘이 있었다.“죽기 전엔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고 이어지는 기침에 온몸이 떨렸다.그래도 그는 참고 또 참으며 눈 내리는 바깥으로 나아가려 했다.“그만해!”이정화가 분노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고함을 질렀다.“너 지금 목숨 걸고 나를 협박하는 거야? 내가 그 애가 어디 있는지 말 안 하면 저 추운 밖에 나가 죽을 거란 말이지? 너 그렇게까지 엄마를 몰아붙이고 싶어?”박진성은 문가에 멈춰 섰다.밖에서 미친 듯이 눈이 내렸고 거센 바람이 그의 어깨를 파고들었지만 그의 뒷모습은 단호했다.“어머니, 전 협박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어머니가 저보다 더 후회하는 일을 막고 싶은 겁니다.”“그게 무슨 뜻이야?”“민여진이 죽게 된다면 2년 동안 어머니 곁을 지킨 사람도 같이 사라지게 되는 거죠. 그건 어머니 스스로 만든 일이에요. 정말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이정화의 얼굴이 삽시간에 핏기를 잃었다. 그녀는 멍하니 박진성을 바라보았다.문채연 역시 충격에 휩싸였다.“진성 씨!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그녀는 더 이상 이성을 붙잡지 못했다.박진성이 민여진을 위해 과거의 모든 진실을 밝히려 하다니?‘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하지만 박진성은 차분했다.“원래 민여진의 것들이었던 걸 이젠 돌려줘야죠.”문채연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이정화는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점점 짙어지는 불안을 안고 박진성에게 다그쳤다.“진성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2년 동안 날 곁에서 돌봐준 사람이 민여진이었다는 거야? 그 애가 언제 내 곁에 있었단 말이야?”“어머니, 민여진을 처음 봤을 때 익숙하다는 생각 안 드셨습니까?”그 말에 이정화의 신경이 순간 확 당겨졌다.그녀는 민여진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느낌과 묘한 감정이 들었지만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았
진시우는 말을 이어가며 웃음을 터뜨렸다.“두 사람 정말 하나같이 고집이 세네요. 한 사람은 어떻게든 가겠다고 하고, 한 사람은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으니. 목숨이 무슨 장난인 줄 아세요?”민여진은 낮에 들은 소식이 머릿속을 맴돌았다.박진성이 쓰러져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것과 임재윤의 연락 두절이 너무나도 우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그런 생각을 부정했다.두 남자는 성격부터 행동 방식까지 완전히 달랐다. 박진성은 독선적인 태도로 모든 것을 강제하던 인물이었고, 임재윤은 온화하며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사람이었다.만약 그녀가 조현준에게 전화하는 것을 박진성이 목격했다면, 그는 폭력적으로 핸드폰을 빼앗은 뒤 모욕적인 말을 쏟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임재윤은 그러지 않았다.기분이 상했을지라도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거리를 두며 자신의 기분을 추슬렀다.어쩌면 임재윤은 정말로 어제 전기 배전함을 수리하다 감기에 걸린 것일 수도 있었다.그래서 연락을 할 수 없었던 거였고 깨어나자마자 민여진이 생각나 안진 마을로 오려 했다는 점에서, 그의 진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있던 민여진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물었다.“임재윤 씨는 괜찮아요?”“별로 좋지는 않아요.”진시우는 숨길 이유가 없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임재윤은 원래 몸이 약해서 병원 신세를 자주 졌어요. 게다가 고열에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상태가 더 나빠 진 거죠. 오늘 쓰러지지 않았다면 여기 온 사람은 제가 아니라 임재윤이였겠죠.”진시우의 말에 민여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주저 없이 옷을 벗어 자신에게 걸쳐주던 임재윤의 모습이 떠올랐다.그 추운 날, 눈보라를 맞으며 추위를 버텼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여진 씨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제때 왔으니 다행이지. 이 추운 날씨에 계속 밖에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말 안 해도 알죠?”진시우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제가 집에 데려다줄 테니...”“진시우 씨
민여진은 임재윤이 비록 자신의 전화번호를 몰랐다고는 하지만, 마을 이장이나 주민들에게 전화할 수도 있었고 진시우의 인맥을 생각하면 연락처를 못 구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 게 아니라면, 오는 길에 눈 때문에 길이 막혀 늦어지는 거로 생각하며 민여진은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마음먹었다.잠시 후 휴게실 문이 열렸다. 민여진이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들자, 들어온 건 마을 사람이었다.“여진아, 9시야.”“늦게까지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민여진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채 약봉지를 들고 나섰다.밖에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고 발목까지 차오를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마을 사람이 말했다.“같은 길이니 내가 데려다줄게. 이런 날씨에 혼자 가기 힘들 거야.”민여진은 잠시 망설이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먼저 가세요.”“너 설마 더 기다릴 생각인 거야?”마을 사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너 오후 1시부터 9시까지 기다렸어. 오겠다고 했던 사람이 안 오면 그건 분명히 바람맞힌 거야. 아무리 날씨가 이렇다고는 해도, 계속 기다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온다고 했으니 꼭 올 거예요. 그 사람은 빈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민여진은 임재윤이 했던 행동들을 떠올리며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그녀는 추운 날 옷까지 벗어준 그 사람을 위해 조금 더 기다리는 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안 오는 줄 알고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면 어떡해?’민여진은 이런 추운 날에 임재윤이 헛걸음이라 할까 봐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알겠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눈이 점점 더 심하게 오고 있고 날도 추우니까 길어도 30분만 더 기다려. 그 이상은 위험해.”“네. 걱정하지 마세요. 10분만, 정말 10분만 더 기다릴게요.”마을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떠났다.민여진은 문 앞에 웅크려 앉았다. 처마가 눈은 많이 막아주었지만, 차가운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져 그녀는 고개를 가슴에 묻고 있었다.‘조금만 더, 조
“아이고.”조인화가 죽을 마시며 의아한 듯 말했다.“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다쳤다고? 무슨 일이야? 저런 사람들은 항상 경호원들이 붙어 다니지 않나? 설마 암 같은 건 아니겠지?”민여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아파져 오는 마음에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며 고개를 숙인 채 죽을 마셨다.이 화제는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로 덮어졌고 조인화는 오락프로에 빠져 웃음꽃을 피웠다.아침 식사를 마친 민여진은 얼굴을 씻은 뒤 도구를 들고 말했다.“마당에 잠깐 다녀올게요.”눈이 내린 마당에는 정리할 게 별로 없을 터였지만, 민지연은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무언가에 몰두해야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의 이런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조인화는 만류하지 못하고 그저 안전에 유의하라고 재삼 당부했다.“정말 할 일이 없으면 이내 들어와. 밖이 너무 추워서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 오늘 일기예보 보니까 하루 종일 눈 온다던데.”“네, 조심할게요.”민여진은 특히 조심하며 마당으로 나갔다. 먼저 쌓인 눈을 치우고, 마당에 놓인 물건들을 가능한 한 모두 집 안으로 들여놓았다.일을 하다 보니 정말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차츰 몸에서 땀이 나기까지 했다.점심을 먹고 난 후, 민여진은 조인화가 준비해 준 약을 가지고 교회로 향했다.교회 안에는 마을 사람들만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사람을 설득해 휴게실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소파에 앉아 두 시간을 기다리다 몸이 찌뿌둥해 일어나서 스트레칭하고 다시 앉아 기다렸다.그러던 중 누군가 문을 열고 물었다.“여진아, 누구 기다리니? 진시우 씨 일행은 눈 오는 날엔 오지 않아.”민여진은 어색해하며 말했다.“알아요.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거예요.”“다른 사람?”마을 사람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너무 오래 기다리지 마. 우리도 저녁이면 문 닫고 가야 해.”“네, 너무 늦지는 않을 거예요.”민여진은 임재윤이 말한 오후는 어쩌면 네시나 다섯 시일 수
민여진은 마당 왼쪽에 있는 물탱크 쪽으로 가서 벽을 더듬으며 말했다.“여기 있을 거예요.”임재윤이 휴대전화 불빛을 비추자 바로 전기 배전함이 보였다.전기 배전함을 열어 살펴보던 임재윤은 단순한 누전이 아니라 조금 복잡한 상태임을 깨달았다. 다행히 공구 상자가 근처에 놓여 있었다.“휴대전화 좀 들어줄 수 있나요?”그는 불빛을 비춰줄 사람이 필요했다.“네.”민여진이 휴대전화를 받아 들자, 임재윤이 적당한 위치로 조정해 주었다.마당에는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았지만, 추위는 여전히 그녀를 떨게 했다. 갑자기 임재윤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남자의 체온이 배어 있는 외투가 그녀의 몸을 감싸자, 순간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하지만 민여진은 임재윤도 옷을 얼마 입지 않은 것 같아 머뭇거리며 말했다.“임재윤 씨, 이럴 거 없어요.”임재윤은 고집스럽게 단추까지 채워준 뒤에야 작업을 계속했다.그의 옷에서 풍겨오는 향기에 민여진은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백화점에서 끝내지 못한 대화가 떠올랐다.‘그때 임재윤은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걸까? 아니면, 무언가를 하려고 했던 걸까?’앞이 보이지 않았던 민여진은 당시 임재윤이 일부러 다가온 건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착각인 건지 알 수 없어 참지 못하고 물었다.“백화점에서 임재윤 씨가 다가오셨죠?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거예요?”그 순간, 공구를 다루는 소리가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졌다.조인화가 문을 열며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고 외치자, 임재윤은 작업을 마치고 민여진의 휴대전화를 돌려받아 글을 입력했다.“내일 오후, 교회 휴게실에서 만나요. 그때 말할게요.”침대에 누운 민여진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었길래 내일이 되어야만 말할 수 있는 건지 너무 궁금했다.마치 큰 결심을 내리기라도 하듯, 그 말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뒤숭숭한 마음을 뒤로한 채 민여진은 자기도 모르게 잠들었고, 깨어났을 때는 이미 아침 8시였다.민여진이 새로 산 옷을
임재윤은 길을 바라보며 휴대전화로 ‘알겠습니다’라는 음성을 재생했다.집에 도착하자, 눈이 점점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민여진이 차 문을 열자 날카로운 바람이 칼날처럼 그녀의 손목을 스쳤다.세 사람은 나란히 집 안으로 들어간 뒤 조인화는 숯을 가져다 임재윤의 방에 화로를 먼저 설치했고, 민여진은 이불을 가져와 임재윤의 침대를 정리하며 이불 커버를 씌웠다.그녀는 눈에 젖은 외투를 벗어 던진 후 분주히 이리저리 움직였다.임재윤은 주변을 둘러보던 중 책상 위에 놓인 사진액자를 집어 들었다. 사진 속에는 네 사람이 있었는데, 두 명의 젊은 여자와 한 명의 소년, 한 명의 소녀가 있었다.카메라를 향해 브이 사인을 하며 환하게 웃는 소녀는 사진 속 모든 빛을 독차지한 듯 눈부셨다. 그 옆의 소년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하지 못한 감정을 눈가에 묻어두고 있었다.임재윤은 손가락 끝으로 소녀가 있는 위치를 살며시 만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임재윤 씨, 잠깐 도와주실 수 있나요? 이 이불 모서리 좀 잡아주세요.”민여진이 부르는 소리에 임재윤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액자를 내려놓고 이불 모서리를 잡아주러 갔지만, 민여진은 그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무슨 일 있으세요?”“아니에요.”임재윤은 글을 입력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민여진 씨의 열일곱, 여덟 살 때 사진을 봤어요. 그땐 잘 웃었네요.”“사진이요?”민여진은 기억이 나지 않아 되물었다.“무슨 사진이요?”임재윤이 설명했다.“가족사진 같은 거예요. 한 여자는 젊은 시절의 조인화 씨로 보이고, 소녀는 민여진 씨, 소년은 조현준 씨인 것 같아요. 그리고 다른 한 분은 민여진 씨의 어머니인 것 같던데요. 많이 닮았더군요.”조현준의 방에 그런 사진이 남아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민여진은 멍하니 있다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어디 있어요?”임재윤이 사진을 건네주자, 민여진은 손가락으로 사진을 세게 문지르며 두 눈을 크게 떠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래도
그렇다면 사진 속의 그 남자가 누구든 문채연은 상관없었다. 그녀가 신경 쓰는 건 오직 민여진이었다.그전까지 박진성의 입에서 정보를 캐내려 온갖 수를 다 썼지만 소용없었는데, 민여진이 안진에 있다니.문채연은 살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밖으로 나가 라미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을 부르는 건 싫어요.”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머리는 하얘졌다. 조현준에 대한 그의 반감은 차가운 기계음 너머로도 느껴질 정도였다.민여진은 마음이 조여와 입술을 깨물었다.“왜... 왜요? 현준 오빠를 아직 못 봐서 그래요. 나중에 한 번 만나보시면 좋을 거예요. 정말 좋은 사람인데...”“아니요.”임재윤은 민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민여진 씨는 그 이유를 알고 싶지 않을 텐데요.”‘알고 싶지 않을 거라고?’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임재윤의 말에 그녀는 순간 답을 알 것도 같았지만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설마, 아닐 거야.’조현준이 그녀를 좋아하는 건 과거의 그녀를 알았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라지만 임재윤은 달랐다. 그들은 고작 며칠 안 된 친구 사이일 뿐,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건 너무 황당했다.생각을 접은 민여진은 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죠? 제가 알고 싶지 않을 거라고?”임재윤이 글을 쳤다.“그럼 알고 싶어요?”그의 시선은 민여진의 얼굴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민여진은 멈칫하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네.”그녀의 대답을 듣고도 임재윤은 즉각적인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그가 다가왔다.뜨거운 숨결이 민여진의 속눈썹에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입술이 떨렸고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하지만 임재윤은 마치 처음부터 다가온 적도, 그런 생각도 없었던 사람처럼 미련 없이 물러섰다.“여진아, 임재윤 씨, 너무 오래 기다렸죠? 미안해요. 안에서 이것저것 고르느라 시간
라미연이 이렇게까지 확신하자, 문채연도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제 분명히 박진성을 봤고, 양성에서 안진까지는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어떻게 된 거지?’라미연은 문채연이 아무 반응이 없자 또 불을 지폈다.“채연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 네가 사랑하는 남자를 그 여자에게 내줄 셈이야? 민여진은 그저 너랑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박씨 가문의 며느리가 됐고, 널 공식 석상에 나오지도 못하게 했어. 이제는 네 남자까지 빼앗으려 하는데 계속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야? 너 이러다 다 빼앗길 수도 있다고!”힘들게 지내던 과거가 떠오르자, 문채연의 눈에는 살기가 스쳐 지났다. 그녀는 두 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알았어. 미연아, 고마워.”문채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올해 신상으로 나온 핸드백, 사람을 시켜 보내줄게.”라미연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사양했다.“됐어. 친구 사이에 뭘 이런 것 가지고.”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던 문채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혹한의 추위마저 얼어붙게 할 만큼 차갑게 변했다.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두 손에 힘을 주더니, 다시금 사진을 열었다.사진 속, 그 여자의 환한 미소는 마치 칼날처럼 문채연의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왜? 넌 왜 이렇게까지 망가진 꼴을 하고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는 건데?’반면 문채연은 이정화가 그 두 해 동안 함께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란 사실을 안 후로, 완전히 연락을 끊어버렸고 몇 번을 찾아가도 문전박대만 당할 뿐이었다.‘이정화와의 관계도 끝났는데 박진성마저 잃는다면...’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문채연은 이를 악물더니 벌떡 일어나 옷을 걸치고 나갔다.박진성의 병세는 도저히 나아지지 않았다. 복부의 상처가 자꾸만 벌어지며 악화하여 며칠 내내 별장에서 요양 중이었다. 게다가 민여진의 일까지 더해져 그는 식사 시간 외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문채연이 찾아가자, 서원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께서
민여진의 머리가 임재윤의 넓은 가슴에 닿았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향기는 묘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특정할 수 없는 향수 냄새였지만, 오히려 민여진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다만 애매한 이 자세가 불편했다.두 사람의 행동에 여자는 눈이 빨개진 채 말했다.“뭐야? 사귀는 사이였어? 요즘 세상에 왜 잘생긴 남자는 다 못생긴 여자랑 붙는지 모르겠네!”여자는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고는 자리를 떠났다.여자의 말에 임재윤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낀 민여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익숙해요.”민여진은 임재윤이 자신의 마음이 다친 건 아닌지 신경 쓸까 봐 걱정스러웠다.임재윤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손을 뻗어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더니 그녀의 손바닥에 천천히 글씨를 썼다.[민여진 씨가 저 여자보다 훨씬 아름다워요.]한 글자 한 글자 강한 압력으로 글을 쓰는 그의 태도는 단호하고 진심이 어려 보였다.어쩌면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민여진은 웃음을 터뜨렸다.“왜 현준 오빠랑 똑같이 그래요? 현준 오빠는 원래 사람을 잘 달래주는 사람이라 이해가 가는데, 임재윤 씨는 예쁜 여자를 너무 많이 봐서 제 얼굴이 신기한 건가요?”임재윤은 침묵하다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그리고.”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타자를 했다.“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 부르는 건 싫어요.”다른 한편.엘리베이터를 타려던 라미연은 민여진과 임재윤의 모습을 보고 흠칫하며 멈춰 섰다.‘저거 민여진 아니야?’깜짝 놀란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민여진을 찍은 뒤, 엘리베이터에 올라 바로 문채연에게 사진과 함께 음성을 보냈다.“채연아, 방금 너한테 사진 보냈는데 봤어? 이 여자 민여진 아니야?”음성을 보내고 다시 한번 사진을 찬찬히 훑어보던 라미연은 그제야 민여진 옆에 한 남자가 희미하게 찍혀 있는 걸 발견했다.너무 멀리 떨어져 있던 터라 남자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등만 찍혀 있었는데 체형으로 보니 박진성인
“하지만...”민여진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짧은 시간 안에는 갚기 어려울 거예요.”민여진에게는 자립할 능력도, 돈을 벌 방법도 없었다.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한, 그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짐이 될 뿐이었다.“그냥 돈을 받아주세요. 현준 오빠한테 빚진 건 언제든 갚을 수 있지만, 임재윤 씨는 휴양지 건설이 끝나면 떠나실 거잖아요. 기간이 너무 짧아요.”민여진은 임재윤이 평생 안진 마을에 머무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집은 여기가 아니었고,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임재윤은 받지 않고 물었다.“민여진 씨의 뜻은 나더러 안진 마을에 좀 더 머물러 달라는 건가요?”차가운 기계음 소리는 임재윤이 지금 농담하는 건지 아니면 진지하게 말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게 만들었다.민여진이 잠깐 멈칫하자, 임재윤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일단 가지고 계세요. 제가 떠나기 전에 갚을 수 있을 거예요.”결국 민여진은 그 돈을 임재윤한테 주지 못한 채 다시 조인화에게 가져갔다.“왜 다시 갖고 왔어? 임재윤 씨가 뭐라고 했는데?”“빌려주는 거래요. 돈이 생기면 갚으라고.”조인화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건 앞으로 다시 만날 계기를 만드는 거나 다름없었다. 오직 순진한 민여진만이 자신에게 매력이 없다고 여기며 그런 쪽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뿐이었다.“갚지 못하면 어쩌려고?”민여진도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임재윤 씨의 말로는, 떠나기 전에 내가 갚을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몸으로 갚으라는 거야?”민여진은 흠칫하더니 순간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다.“이모, 장난치지 마세요.”조인화는 웃으며 그녀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아이고, 이 바보.”잠시 후, 포장 되어있는 봉투는 아까 전보다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임재윤이 봉투를 받아 든 뒤, 세 사람은 가계를 나왔다.밖으로 나가던 중 다른 한 가계에서 조인화는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