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화는 민여진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이런 여자는 집에 처박아 두기나 해. 다시는 밖에 데리고 나오지 말고.”말을 마친 이정화는 쇼핑할 마음이 사라졌는지 문채연과 함께 매장을 나섰다.민여진의 얼굴은 창백했다. 부끄러움 같은 건 이제 느끼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정화의 ‘내연녀’, ‘이런 여자’라는 말에 그동안 쌓아온 의지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민여진, 괜찮아?”박진성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민여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괜찮아.”민여진은 정신을 차리고 박진성의 손길을 피했다.박진성은 손이 허전해지자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민여진의 손목을 붙잡았다.“화났어? 채연이랑 어머니 사이 알잖아. 어머니가 널 내연녀로 오해해서 심한 말씀을 하신 거야. 기분 나쁜 건 당연하지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어.”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차분하게 대답했다.“난 박 여사의 말이 심해서 기분 나쁜 게 아니야.”“그럼 왜 그래?”박진성은 영문을 몰랐다.민여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돌아가자. 좀 피곤해.”집에 돌아온 민여진은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토라진 게 아니었다. 그냥 이정화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을 뿐이었다.‘그래. 나 같은 여자는 절대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지.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인데 이제 와서 박진성의 말 몇 마디에 흔들리면 안 돼.’민여진은 지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오히려 편해졌다.‘이대로도 괜찮아. 그냥 햇빛도 못 보는 내연녀로 살지 뭐. 엄마가 살아있는 한 나는 괜찮아. 다른 건 생각할 필요 없어. 생각할 자격도 없으니까.’아침까지 잠을 자던 민여진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어제 보일러를 켜지 않은 게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깨어나 보니 방은 따뜻했다.그녀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챙겨 입었다. 오늘 민영미가 온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렜던 것이다. 옷을 입고 문을 열고
예전에도 그녀는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고 이정화의 말처럼 볼품없는 존재였다.박진성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 상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민 여사님을 집 앞까지 모셔왔습니다. 바로 들어가시게 할까요, 아니면...”민여진은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흐릿했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상우가 모시고 들어갈까요라고 말하기 전에 박진성은 그의 말을 끊었다.“잠깐 밖에서 기다리라고 해.”전화를 끊은 박진성이 물었다.“네가 직접 나가서 맞이할래? 데려다줄게.”민여진은 벅찬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비록 얼굴은 추하지만 민영미에게 흉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박진성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내려온 민여진은 곧장 대문으로 향했다.멀리서부터 박진성은 대문에 서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비록 민영미와 목소리만 비슷한 낯선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완전히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전혀 관계없는 타인이었는데 민영미의 옷차림, 행동거지, 그리고 얼굴까지 모든 것이 신기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박진성은 마음속 불안감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엿보았다.그녀는 엄청난 공을 들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과연 완벽하게 민여진을 속일 수 있을까?“여진아? 너니?”민여진이 조금 더 앞으로 다가가자 초췌함 속에 희미한 미소를 담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가슴은 뜨겁게 끓어올랐다.“엄마...”그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손을 뻗었다. 중년 여자는 민여진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네 얼굴은... 그리고 눈은? 괜찮아?”민여진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조금 다친 것뿐이에요. 진성 씨가 치료해 주고 있어서 곧 다시 볼 수 있을 거예요.”민여진의 말은 단순한 핑계였지만 박진성의 눈빛은 어두워졌다. 그 역
민여진은 민영미에게서 은은한 계수나무 향기를 맡았다. 짙은 향은 아니었지만 민여진은 예민하게 반응했다.빈민가에 살던 시절, 마을 어귀의 계수나무를 지날 때마다 민영미는 코를 막고 기침을 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민영미는 계수나무 알레르기가 있었다. 냄새만 맡아도 온몸이 가렵고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왜 그래?”정수향은 민여진이 갑자기 굳은 것을 눈치채고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야?”“아무것도 아니에요...”민여진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음속은 혼란스러웠다.“그냥 엄마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서요. 무슨 향수인가요?”“아.”정수향은 안심하며 웃었다.“내가 무슨 향수를 뿌리겠어. 호텔 방에 있던 향초 냄새가 옷에 밴 것 같구나.”“계수나무 향이라고요?”“맞아.”정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마 그 냄새 맞을 거야.”민여진은 순간 손끝에 힘을 주었다. 박진성 역시 이상함을 감지하고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야?”“난...”민여진의 머릿속은 텅 비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눈빛은 멍했다.“엄마는 계수나무 알레르기 있잖아요. 어떻게 계수나무 향이 나는 방에 온종일 있을 수 있었어요?”민여진의 질문에 정수향은 굳어진 얼굴로 박진성을 바라보았다. 박진성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민여진이 아니었기에 민영미가 계수나무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는 곧 마음을 가다듬고 물었다.“계수나무 향기에 알레르기가 있는 거야 아니면 꽃가루에 알레르기가 있는 거야?”민여진이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 박진성은 재빨리 말했다.“꽃가루 알레르기겠지.”“맞아.”민영미는 박진성의 말을 받아 대답했다.“계수나무 향 자체는 좀 불편하긴 했지만 알레르기는 없어. 나는 꽃가루에만 알레르기가 있는 거야.”“그래요?”민여진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민영미는 계수나무가 있는 곳에서만 콧물을 흘리고 기침하며 속이 메스꺼워했었다.“그랬
민여진의 눈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붉어진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진성 씨, 고마워요.”그녀는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고 눈빛에서는 자연스럽게 감사의 마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눈빛은 박진성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가슴을 답답해지고 숨이 막히게 했다.민영미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민여진만 모르고 있었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그는 가짜 세상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기에 ‘고맙다'라는 말은 그에겐 견디기 힘든 무게로 다가왔다.“고맙다는 말 싫다고 했잖아.”박진성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두 사람 오랜만에 만났으니 할 이야기가 많겠지. 난 서재에서 일 좀 하고 있을게. 무슨 일 있으면 올라와.”박진성은 계단을 올라 서재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민여진의 미소와 민영미의 비참한 죽음이 그의 머릿속에서 겹쳐지면서 그는 극심한 갈등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똑똑...그때, 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박진성은 고개를 들었다. 민여진이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서재 문을 열고 있었다.“무슨 일이야?”박진성은 의자에 기대앉아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미간을 찌푸렸다.“네 엄마랑 얘기해야지 여기는 왜 왔어?”민여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문을 닫고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진성 씨, 부탁 하나 해도 될까?”민여진이 큰 결심을 하고 온 것이 분명했다. 박진성은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뭔데?”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그게... 엄마를 당분간 이 별장에 머물게 해 주면 안 될까?”그녀는 곧바로 덧붙였다.“걱정하지 마. 그냥 엄마가 오가는 게 불편할까 봐 그래. 조용히 계시도록 할 테니 절대 방해하지 않을게.”“그게 다야?”민여진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박진성은 의자에 기대앉아
민여진은 박진성이 고개를 드는 그 순간,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강렬한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눈앞이 깜깜했지만 그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머물러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민여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마음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박진성은 다시 몸을 숙여 민여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그는 조급해하지 않고 다정하게 속삭이며 마치 평생의 인내심을 쏟아붓듯 공략해 왔다.“진성 씨...”민여진은 그를 밀어냈다. 극도로 어색하고 불편했다.“이러지 마...”“이러지 말라는 게 뭔데?”박진성은 검은 눈동자로 깊숙이 물었다.“이렇게 가까이 있는 거? 키스하는 거? 아니면 방금 전에 했던 말?”민여진은 박진성의 팔을 꽉 붙잡았다. 박진성의 숨결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말해, 민여진. 네 마음속에 있는 생각, 뭐든지 말해. 다 들어줄게. 다 약속할게.”결국 민여진은 서재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벽을 짚고 걸음을 재촉하는 걸 보고 정수향이 계단에서 의아하게 불렀다.“여진아?”민여진은 멈칫 발걸음을 멈추자 정수향이 다가와 소매로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왜 그래? 뭐가 그렇게 급해? 앞도 안 보이는데 조심해야지. 넘어지면 어쩌려고?”“아무것도 아니에요.”민여진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숙였다.민여진의 입술에 남은 흔적을 본 정수향은 바로 눈치를 채고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저 웃으며 말했다.“난 밖에 살아도 괜찮다고 했잖아. 너한테 안 오는 것도 아니고 매일 아침마다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는 사람도 있어.”“하지만...”민여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대답했다.“겨울인데 너무 춥잖아요.”민영미는 겨울을 제일 싫어했다. 겨울이 되면 무릎이 아프고 몸 전체가 쑤셨기 때문이다.젊었을 적 한겨울에 강가에서 남의 빨래를 하다 얻은 병이었다.“참.”민여진은 문득 생각이 난 듯 말했다.“엄마, 무릎은 이제 괜찮으세요? 아직도 아파요?”정수향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말했다.“별로 안 아파. 많이 좋
잠들기 전, 민여진은 정수향의 팔을 꼭 껴안고 말했다.“엄마, 살아있어 줘서 고마워요. 아빠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앞으로 내가 엄마 지켜줄게요. 엄마를 위해서라도 나 잘살 거예요.”민여진은 졸음에 못 이겨 잠들었지만 정수향은 눈을 뜬 채 마음이 뭉클했다.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진짜 민영미라면 뭐라고 했을까. 도무지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정수향은 민여진이 잠든 걸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치우고 침대에서 내려왔다.밖으로 나가니 박진성이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바닥에는 담배꽁초가 흩어져 있었다. 그는 검은 눈을 가늘게 뜨고 1층을 바라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민여진이 그쪽을 의심하던가요?”정수향은 고개를 저었다.“전혀요. 민여진 씨는 아주 순진해서 이상한 점이 있으면 바로 말하는 성격이에요. 그럼 제가 해명할 수 있고요. 지금쯤이면 제가 민영미라고 완전히 믿고 있을 거예요.”“그래요.”박진성은 눈을 가늘게 떴다.“하지만 방심은 금물입니다. 민여진은 눈치 빠르고 예민한 사람이에요.”“알겠습니다.”“그리고 내일 민여진이랑 외출하세요. 당신이 옆에 있으면 저도 안심하고 볼일을 볼 수 있으니까. 생필품 같은 걸 사러 가자고 하세요.”...다음 날, 민여진은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다.서원은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꺼운 옷을 입고 내려오는 민여진의 밝은 모습과 얼굴에 감도는 생기는 그를 잠시 놀라게 했다.“민여진 씨, 좋은 아침입니다.”“서원 씨, 좋은 아침이에요.”민여진은 인사를 하고 나서 말했다.“잘 왔어요. 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슈퍼에 가서 벨벳 천이랑 바늘, 실 좀 사다 줄 수 있어요?”“그런 건 뭐에 쓰시려고요?”“쓸 데가 있어요.”서원은 더 묻지 않고 말했다.“같이 가시죠.”“네?”“벨벳 천이 어떤 건지, 저 같은 남자는 잘 모르잖아요. 민여진 씨가 직접 고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다만 날이 너무 추워서 몸이...”“괜찮아요
서원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민여진은 두 걸음쯤 걷다가 옆에 아무도 없는 것을 깨닫고 불렀다.“서원 씨?”“네.”서원은 곧바로 민여진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테라스를 걸었다.민여진이 물었다. “왜 그래요? 갑자기 말도 없고... 무슨 일이에요?”서원은 민여진의 밝은 미소와 다정한 모습을 보며 목이 메었다. 갑자기 박진성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이 거짓말이 계속 이어진다면 민여진에게는 좋은 일이 아닐까?’“아니에요. 아까 길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걸 보고 차가 오는지 살펴봤을 뿐이에요.”“아이들은 다 그렇죠.”민여진의 미소가 잠시 사라졌다 금세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저택은 가까이에 있었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정원에 도착했다.서원이 현관에 거의 다 왔을 때, 저 멀리 큰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박진성은 슬리퍼를 신고 두꺼운 외투 안에는 얇은 셔츠 한 장만 입은 채 매서운 바람 속에 서 있었다.그는 민여진을 보자 잔뜩 긴장했던 얼굴이 풀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성큼성큼 걸어와 민여진을 품에 안았다.“왜 갑자기 나갔어?”박진성은 차갑게 물으며 서원을 노려보았다.“말도 없이 나가면 어머니가 걱정하시는 거 몰라?”“엄마?”민여진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엄마 깨셨어? 미안해. 일찍 일어나서 빨리 다녀오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다들 깨어 있을 줄은 몰랐어.”“어머니는 안 깨셨어. 내가 깬 거지.”박진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긴장한 채 민여진의 팔을 더 세게 잡았다.그는 1층 현관문이 열려 있고 민여진의 신발 한 켤레가 없어진 걸 발견하고서야 민여진이 나갔다는 사실을 알았다.그 순간, 그의 가슴은 끓어올랐고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민여진은 왜 나갔을까? 왜 아무 말도 없이 나갔을까? 도망친 걸까? 정수향의 정체를 알아채고 꾹 참고 있다가 내가 방심한 틈을 타 떠난 걸까?’그런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정말 그렇다면 평생 민여진을 다시는 못 볼지도 몰랐
차가운 대답에 화가 안 났다는 건 거짓말이었다.민여진은 소파에 어색하게 앉아 있다가 박진성에게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라 주었다.“손 좀 녹여. 밖에 오래 서 있었으니 엄청 추웠겠다.”박진성은 민여진을 봤다. 빨갛게 언 코와 손을 보니 화가 반쯤 풀렸다.그는 찻잔을 받아들고 물었다.“내가 왜 화났는지 알아?”민여진은 고개를 저었다.“나가더라도 나한테 먼저 말을 하고 나가야지. 같이 가면 되는데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가면 네 어머니가 걱정하잖아. 그럼 난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건데?”민여진은 고개를 숙였다.“당신이 그렇게 일찍 일어날 줄 몰랐어.”“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있으면 내 방에 와서 노크해.”그는 더 이상 민여진이 서원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서원이 아무리 착실하다고 해도 그의 눈에는 모래알 하나도 용납되지 않았다.“알았어.”민여진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진성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는 화제를 돌리며 테이블 위에 놓인 짐들을 바라보았다.“뭘 샀어?”그 말에 민여진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가방에서 천을 꺼내며 말했다.“겨울에 쓸 천을 샀어.”“이걸로 뭐 하려고?”민여진은 2층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어머니가 몸이 안 좋으셔. 젊었을 때 돈 벌려고 몸을 돌보지 않으셔서 병이 생겼거든. 겨울에는 눈만 오면 무릎이 아프고 추울 때도 아프다고 했어.”“이제 곧 겨울이니까 눈이 올 것 같아서 어머니 다리에 감싸 드릴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드리려고 천을 샀어. 그럼 밖에 나가실 때 따뜻하실 테니까.”딸로서의 따뜻한 마음과 걱정이 담긴 말이었지만 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렸다.정수향에게 그런 건 필요 없다는 것을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무릎이 시리면 가게에서도 전용 무릎 보호대를 파니까 굳이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아니야. 엄마는 그런 거 안 좋아해.”민여진은 화를 내는 대신 미소를 지으며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엄마는 예전부터 직접 무릎 보호대를 만들어 쓰셨어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
“그들한테 친구는 서로 사탕을 나눠 먹으면서 웃어주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태어날 때부터 인맥을 쌓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지. 만약 임재윤이 아무런 신분도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진시우와 함께 할 수 있겠어? 네가 말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씨 가문 막내아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재력가 아니면 권력가일 텐데, 둘이 함께 다닌다면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어. 너, 혹시 속은 거 아니야?”조현준은 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그러고 무엇보다 동진에는 임씨 성을 가진 재력가가 없어.”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민여진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분명 진시우는 임재윤이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오던 친구라고 했는데, 조현준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니. 그는 마치 공중에서 나타난 사람 같았다.도대체 임재윤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인지 그의 모든 것이 민여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한참 생각하던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그런데 현준 오빠, 만약 저를 속인 거라면 도대체 진시우와 임재윤은 왜 저를 속이는 걸까요?”조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이해가 안 가. 네게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들이 가짜 신분까지 만들어가며 속이려 드는지. 아니면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현준 오빠, 일단 쉬세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게요.”“그래.”조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무슨 일이 있든 나와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민여진은 웃음을 지었지만, 마음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전화를 끊고 병실로 들어간 그녀의 모습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이상함을 눈치챈 임재윤은 민여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무슨 일이에요? 왜 매번 조현준이랑 통화할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는 거예요? 조현준이 무슨 말을 했어요?”“아니요.”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의자
임재윤이 헐떡거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민여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검사 다 끝났어요?”임재윤은 말없이 다가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속에 꽉 끌어안았다.그의 옷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그의 숨결에 왠지 마음이 안정된 민여진은 농담을 건넸다.“전면 검사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요? 혹시 잠들었던 거 아니에요?”그제야 임재윤은 민여진을 품에서 놓고 휴대전화를 꺼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기계에 문제가 생겨서 좀 기다리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진시우 한테서 민여진 씨가 병실에 와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왔는데.”민여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던 임재윤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망설임 없이 자기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민여진은 깜짝 놀라 외투를 밀어내며 말했다.“안 돼요. 임재윤 씨! 지난번에도 나한테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감기까지 걸리고 이제는 수술까지 하게 생겼잖아요. 이번에 또 이러다가 몸이 더 나빠지면 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해요.”임재윤은 저항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저는 방금 뛰어오느라 땀나서 괜찮아요. 민여진 씨는 계속 소파에만 있었을 거 아니에요. 민여진 씨까지 감기 걸리면 머리 아픈 건 진시우예요. 그러니까 그냥 걸치고 있어요.”타자를 끝낸 뒤 임재윤은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지고 민여진에게 옷을 걸쳐준 뒤 창문을 꼭 닫았다.따뜻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민여진은 가만히 있다가, 문득 뭔가 생각나 소파에서 일어섰다.“아, 맞다. 식사는 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레스토랑에서 포장해 온 디저트가 있는데 이거라도 드세요.”임재윤이 소파에서 봉투를 집어 들자, 포장이 찌그러져 크림이 새어 나와 있었다.민여진은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마도 아까 박진성을 피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케이크가 망가진 모양이었다.“혹시 케이크가 망가졌어요? 그러면 드
“채연 씨는...”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비에서 하이힐 소리가 급하게 울려 퍼졌다. 긴장과 걱정이 묻어나는 발걸음이었다.“진성 씨!”문채연이 핸드백을 들고 달려왔다.“왜 나와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은 수술 후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요?”박진성은 변함없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병실에만 있으면 몸이 굳어 버릴 것 같아.”“그래도 저한테는 말했어야죠. 그리고 옷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으셨네요. 감기라도 다시 걸리면 어쩌려고요?”문채연은 핸드백을 비서에게 건네고 예쁜 손가락으로 박진성의 옷 단추를 하나씩 채워줬다. 단추를 모두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오히려 잘됐네요. 진성 씨가 다친 뒤로 우리 오랫동안 데이트도 못 했잖아요. 좀 움직이는 것도 좋아요. 오늘 나랑 같이 저 앞에 있는 레스토랑의 커플 메뉴를 먹으러 가요.”공포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던 민여진은 구석에 웅크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나마 압박감은 사라졌지만 얼굴은 여전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박진성과 문채연의 대화를 들어보니 두 사람의 관계는 꽤 가까워 보였다. 만약 박진성이 다치지 않았다면, 아마 결혼 계획까지 세워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안정적이라면, 민여진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갈 터였다. 그렇다면 설령 박진성이 나중에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 생각에 민여진은 비록 안도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억울함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녀의 눈가에는 고통이 서려 있었다.하지만 조현준이 말했듯, 권력과 배경을 전부 가진 사람들 앞에서 아무 힘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여진 씨? 왜 여기 웅크리고 계세요?”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시우는 창백한 얼굴로 화분 뒤에 웅크려 앉은 민여진을 발견했다.“무슨 일 있었어요?”“아니에요.”민여진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아
“그런 사이 아니라고?”조현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깜짝 놀랐잖아.”조현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여진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절대로 상류 사회의 다툼에 끼어들어선 안 돼. 권력도 배경도 없는 우리는 그들한테 아무 위협도 안 되는 사람들이야.”조현준의 말에 민여진은 이 충고를 조금 일찍 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어요. 현준 오빠, 진시우 씨는 안진에 리조트를 건설한다고 자주 다녀서 알게 된 거예요.”“리조트를 건설한다는 사람이 그 사람이었구나.”조현준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안진에 리조트를 세운다면 물론 수익은 있을 수 있지만, 진시우를 좀 과소평가한 일 아닌가?”“동진에서는 형이 모든 사업을 독차지해서 따로 나와 독립하는 거라고 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며 계속 말했다.“현준 오빠, 한 사람만 더 조사해 주셨으면 하는데요.”“임재윤?”민여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어떻게 아셨어요?”조현준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조사할 생각이었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너하고도 접촉이 많은 사람 같아서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불안하거든.”“고마워요. 현준 오빠, 이 신세를 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여진아, 우리는 이웃이기 전에 친구라는 사실을 잊지 마. 너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러는 건 아니야.”조현준은 주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넌 일단 쉬어. 나한테 기자인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한테 부탁하면 돼. 조사가 끝나면 다시 연락할게.”“네, 수고해 줘요.”통화를 마치고 민여진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탓인지 마음이 놓이자 이내 눈꺼풀이 무거워졌다.다시 눈을 뜨자 휴대전화 시계는 이미 저녁을 가리키고 있었다.민여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호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 씨, 깨셨나요?”“네. 잠시만
“그래. 조금 늦게 돌아오는 것도 좋겠어.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길이 다 막혔거든. 진시우 씨와 임재윤 씨가 거기 있어서 나도 걱정은 안 해.”조인화는 민여진더러 안전에 신경 쓰고 사람 많은 데서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한참 동안 잔소리를 늘어놓은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민여진은 침대에 앉아 한참을 망설이다 조현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여보세요, 여진아.”너무 빠른 응답에 민여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현준 오빠, 왜 이렇게 빨리 받아요? 쉬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조현준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대답했다.“몇 시간 자고 지금은 회사로 들어가는 중이야.”민여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죄송해요. 나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도 바쁜데 피곤하겠어요.”조현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여진아, 전화한 이유가 단지 사과하려는 거라면, 차라리 이 전화를 받지 말 걸 그랬어.”민여진도 함께 웃었다. 그녀는 조현준의 친절함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먹먹해졌다.“여진아, 무슨 일이 있어서 전화한 거지?”조현준이 물었다.“내가 뭐 도와줄 거라도 있어?”“역시 현준 오빠는 못 속이겠네요.”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워져 있었다.비록 오늘의 오해는 풀렸지만, 민여진은 임재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임재윤이라는 이름과 말을 못 한다는 것 외에 가족 상황은 어떠한지, 집은 어디에 있는지, 형제자매가 있는지 등등 임재윤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심지어 민여진은 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은 매번 그녀한테 불리한 입장을 안겨주었다.“현준 오빠, 사실 두 사람에 관해 물어보고 싶어서요.”민여진은 긴장하며 휴대전화를 꽉 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말했다.“오빠도 동진 출신이시잖아요. 진시우라는 사람을 알아요?”“진시우?”조현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잠시만, 동료에게 물어볼게.”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잇는 조현
박진성의 이름과 그와의 관계에 관한 질문에 민여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버렸다.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진시우는 다행히 더 캐묻지 않았다.“됐어요. 말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억지로 말하진 마세요.”“고마워요.”민여진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때 간호사실의 한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까 문채연 씨가 오셨을 때 제가 임재윤 씨 병실을 알려드렸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직접 가서 말씀드릴까요?”간호 실장이 답했다.“괜찮아요. 위층 간호사에게 알려주면 돼요.”“알겠어요.”목소리들이 점차 사그라들자, 민여진은 문채연이 있을 것 같아 다시 임재윤의 병실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입술을 깨물고 고민했다.이때, 진시우가 말을 꺼냈다.“민여진 씨, 호텔에서 좀 쉬다가 저녁에 오는 게 어때요?”민여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좋아요.”의도치 않게 진시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민여진은 차 안에서 문득 의문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진시우 씨는 동진 사람이에요?”“그렇죠.”진시우는 태연하게 핸들을 돌리며 대답했다.“그런데 왜 안진까지 와서 리조트를 지을 생각을 하신 거예요? 너무 멀지 않아요?”“물론 멀긴 하죠. 하지만 저는 외동도 아니고 가족들 사이에서도 특별히 대우를 받는 위치도 아니에요. 동진의 사업은 대부분 형이 쥐고 있으니, 생계를 위해서라면 새로운 길을 찾아야죠.”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복잡한 사정이 있었구나.’그녀는 입술을 깨물다가 또 물었다.“그럼, 임재윤 씨는요?”진시우는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웃으며 말했다.“민여진 씨, 혹시 임재윤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렇게 돌려서 물어보는 건 아니죠?”진시우의 말에 당황한 민여진은 허둥지둥 손을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그냥 무심코 여쭤본 거예요.”진시우는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임재윤도 동진 사람이에요. 우리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고 제가 회사를 나와 독립한다고 그러니까 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