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은 의아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분명 거래를 제안했을 때 신현우는 그녀의 입사를 환영하는 태도를 보였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서로의 약속을 잊지 말라고까지 주의를 주었다.그런데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걸까?그리고 그녀의 고난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유월영은 택시를 타고 오피스텔로 돌아왔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축포가 터지는 소리에 그녀는 움찔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조서희가 두 손 들어 그녀를 환영했다.“드디어 그 악마에게서 벗어난 것을 축하해!”유월영이 실소하며 말했다.“이건 좀 너무 과했어. 축포는 대체 왜 샀어? 난 뭐가 폭발한 줄 알았잖아.”조서희가 웃으며 말했다.“미리 계산했지. 내일은 주말이고 너희 계약기간도 끝나가니까 오늘 축하 파티라도 해야지?”그녀는 손을 내밀어 유월영의 캐리어를 받으며 물었다.“연재준이랑은 얘기가 잘 끝났지? 이제 서로 각자 갈 길을 가면 되는 거지?”“그렇게 된 셈이지 뭐.”유월영은 선박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지 않았다.“거기 욕실 세트 괜찮은 것 같아서 네 몫으로 한 세트 챙겨왔어.”조서희가 활짝 웃었다.“역시 내 친구야! 넌 일단 들어가서 쉬고 있어. 내가 저녁 금방 차릴게.”유월영이 오기 전부터 삼계탕을 끓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식자재는 이미 준비해 두었기에 조서희는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유월영은 캐리어를 정리하고 약을 먹은 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열었다.신연우에게서 약을 제때 챙겨 먹으라는 당부 문자가 와 있었다.유월영은 그러겠다고 답장했다.SNS에 접속했더니 신연우가 갑판에서 찍은 달밤 사진을 자신의 SNS에 게시했다.그녀는 그 사진에 좋아요를 꾹 눌렀다.아래로 내렸더니 정우증권 인사 담당자의 게시글도 보였다.주방에서 나온 조서희가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그럼 정우증권으로 아예 마음을 굳힌 거지?”“그래, 맞아.”유월영은 며칠 전에 정우증권 인사 담당과 거의 협상을 마무리한 단계였다. 그쪽에서도 그녀가 해운과의 계약 기간이 끝나는 즉시 채용하
유월영은 좀 당황스러웠지만 괜찮다고 문자를 보냈다.회사에서 갑자기 일이 생겨 야근하는 경우는 그녀도 많이 겪었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물을 받아서 화분에 물을 주었다.창가에 작은 허브 화분을 기르고 있었는데 은은하고 시원한 향이 나서 맡으면 기분이 좋아졌다.그녀는 기분이 좋아진 김에 인사담당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월요일에 바로 회사로 가면 되나요?]30분이 지났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유월영은 뭔가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점심 때가 되어서도 그녀가 외출할 기미가 없자 조서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너 정우증권 인사담당이랑 밥 먹기로 하지 않았어? 왜 아직도 집에서 안 나가?”유월영은 핸드폰을 꺼내 다시 확인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SNS에 접속했더니 그 인사담당이 어느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 중인 사진이 올라왔다.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도 익숙한 신주시의 한 레스토랑이었다.분명 그녀에게는 일이 있다고 오성시로 급하게 돌아간다고 답장했던 사람이었다.유월영은 담담한 얼굴로 사진 밑에 좋아요를 눌렀다.3분도 되지 않아 그 게시물은 삭제가 되었다. 진짜 삭제한 건지 자신이 차단당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유월영은 담담한 얼굴로 친구의 질문에 대답했다.“다른 약속이 있대.”조서희가 물었다.“그럼 월요일에 바로 입사 수속하는 거야?”유월영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담담히 말했다.“뭔가 사정이 있는 것 같아. 그 회사 안 갈 거야.”조서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왜? 무슨 일인데?”유월영은 대답 대신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신현우가 갑자기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고 정우증권 인사담당에게서 바람을 맞히고 이 모든 게 우연인 것 같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를 채용하지 못하게 압력을 넣은 게 분명했다.그럴 능력을 가진 자, 그리고 그렇게 할 이유가 있는 자는 연재준뿐이었다.계약 기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신연우와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왜 이런 치졸한 짓을 벌였은지도 이해할 수 있었
유월영은 예의 바르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줌마, 혼자 오셨어요?”윤미숙은 반가운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너 집에 안 온지 한 달이 넘은 거 알아? 그런데 왜 이렇게 야위었어?”유월영이 미안한 얼굴로 답했다.“요즘 많이 바빴어요.”윤미숙이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그랬구나. 그런데 너 온다고 해도 제대로 반겨줄 수도 없을 것 같아.”“무슨 일 있어요?”“재준이랑 회장님 때문에 그렇지 뭐.”윤미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둘이 백유진이라는 여자애 때문에 대판 싸웠어. 재준이도 요즘 집에 오지를 않아. 연락해도 안 받고.”연재준은 원래 본가로 가기 싫어했다. 몇 달에 한번 집으로 가서 얼굴을 비추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연락까지 차단할 정도면 이번에는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의미했다.유월영은 조심스럽게 윤미숙의 눈치를 살폈다. 연재준과 아버지의 관계가 이 정도로 나빠진데는 윤미숙 때문도 있었다.그렇다고 윤미숙이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계모로서 최선을 다했다.연재준의 아버지와 재혼한 뒤로 그녀는 주동적으로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중에 이복형제끼리 경영권 다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대체 재준이는 그런 애 어디가 좋다고 그렇게 감싸는지 모르겠어. 내 눈에는 월영이 네가 백배 나은데 말이야.”윤미숙이 불만스럽게 말했다.하지만 유월영은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윤미숙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부자지간에 이런 상황까지 왔으니 앞으로 어쩌면 좋아. 대체 백유진 걔가 어디가 예쁘다고 재준이가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어. 능력이나 가정환경 하나만 내세울 게 있었어도 회장님이 이 정도로 반대하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재준이가 좋다니 우리도 뭘 어쩔 수가 없네.”결국 먼저 마음이 약해진 쪽은 윤미숙이었다.이대로 간다면 연재준과 가족들 사이의 냉전이 조금만 길어지면 연 회장도 가업과 가문을 위해서 타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백유진과 연재준이 결혼할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유월영의 부모님 댁은 봉현군에 있었다.최근 재개발 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봉현군은 관광명소로 유명해졌고 수많은 외부 여행객들을 받았다.유월영은 보건품을 들고 3년 만에 집을 찾아갔다.문은 열려 있었다. 이런 시골집들은 낮에는 거의 대문을 열어두는 습관이 있었다.유월영이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던 찰나, 안에서 누군가가 나왔고 그녀는 재빨리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겼다.고개를 내밀고 그쪽을 봤더니 엄마였다.엄마는 대문 앞에서 허브를 씻고 있었다.허브차를 우려서 여름에 마시면 아주 시원할 뿐더러 더위도 예방할 수 있었다.전에는 엄마가 우려준 허브차를 종종 마셨었는데 집을 떠나면서 한 번도 마셔본 적 없었다.유월영이 옛 생각에 정신이 팔린 사이, 안에서 쾅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그녀의 아버지 유현석이 밖으로 나오며 온갖 짜증을 부렸다.“그거 만들어서 어디다 써? 그럴 시간 있으면 돈 벌 방법이나 좀 생각해 봐. 당신 병 치료하려면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몰라?”유월영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엄마가 어디 아프신 걸까?그녀는 엄마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불과 3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엄마의 얼굴은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볼 살도 다 빠지고 너덜너덜한 옷에 눈빛은 퀭했다.이영화는 무덤덤한 얼굴로 허브를 씻으며 대답했다.“그래서 치료 포기하자고 했잖아요. 살만큼 살다가 죽으면 한줌 재가 되면 되지. 그게 뭐가 그렇게 대수라고.”유현석이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냈다.“당신 말은 참 쉽게 해. 당신이야 죽으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겠지만 남은 사람은 평생 죄책감에 살아가야 하는 거 몰라? 당신 사람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그래서 둘째한테 전화해서 좀 도와달라고 하면 얼마나 좋아? 이런 거나 씻고 있지 말고!”그는 허브 바구니를 그대로 발로 걷어찼다.가만히 참고 있던 이영화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언성을 높였다.“둘째한테 어떻게 연락해요? 그때 우리가 걔한테 어떻게 했는지 잊었어요? 걔 아마 지금도 우리를 생각하면 치가 떨릴걸
유월영이 쉬지 않고 심폐소생술을 진행한 결과, 5분 정도 지나서 이영화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엎드려서 확인해 봤더니 심장박동도 느껴졌다. 유월영은 눈물을 머금고 다급히 엄마를 불렀다.“엄마, 엄마!”하지만 이영화는 의식을 차리지는 못했고 유월영은 구급차가 올 때까지 쉬지 않고 심폐소생술을 했다.잠시 후, 마을 입구에 구급차가 도착했다.의료진이 이영화를 들것에 실어 구급차에 실었다. 이영화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응급실로 실려 들어갔다.유월영과 유현석 부녀는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유현석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유월영은 담담한 얼굴로 다가가서 아버지를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그리고 자판기로 가서 따뜻한 커피를 사다가 아버지에게 건넸다.유현석은 커피를 손에 꽉 쥐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었다.아버지의 기분이 조금 안정되자 유월영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엄마 대체 어디가 아픈 거야? 심장에 문제가 생겼어?”유현석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맞아. 6개월 전에 쓰러져서 병원에 왔다가 발견했어. 너무 늦어서 약물 치료로는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고. 지금 엄마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심장을 이식 받는 거야.”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몰랐다.유월영은 갑자기 목이 타서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유현석은 그녀의 눈치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렸다.하지만 유월영은 지금 수술실로 들어간 엄마 걱정에 그와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그렇게 두 시간이 지나 수술실 문이 열리자 그녀는 재빨리 의사에게 다가갔다.“선생님, 이영화 환자 괜찮은 거죠?”의사가 말했다.“고비는 넘겼습니다만, 지난 번에 남편분께 말씀드렸듯이 이영화 환자 상황으로는 심장 이식수술이 시급합니다. 언제 또 심장이 멈출지 몰라요. 그때는 응급조치도 소용없을 겁니다.”유현석은 고통스럽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아내를 살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수술비가 문제였다.유월영은 아버지를 힐끗 보고는 굳은 목소리로 물
유월영은 말없이 티슈를 꺼내 엄마의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었다.괜찮다는 말은 건성으로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다만 전처럼 부모님이 원망스럽지도 않았다.“지나간 일은 이제 다 잊어.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그 동안 잘 지냈어. 수술비도 걱정하지 마. 나한테 돈이 있어. 적합한 기증자가 나타나면 바로 수술 들어가면 돼.”이영화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잘 지냈다니까 안심이야.”유월영은 엄마랑 아주 오래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을 챙겨주고 엄마가 잠든 뒤에야 병실을 나왔다.병실 밖 의자에 앉아 있던 유현석이 그녀를 보고 다급히 일어섰다.그는 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과거의 일 때문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유월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큰언니랑 막내는?”유현석이 다급히 말했다.“네 언니랑 형부는 청허포에서 일해. 금방 아이를 출산해서 오늘 부르지 않았어. 내일 연락해서 오라고 할게. 막내는 2년 전에 어떤 남자랑 집을 나간 뒤로 연락이 끊겼어.”유월영은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계좌번호 좀 불러줘.”유현석이 미안한 얼굴로 그녀에게 계좌번호를 알려줬다.유월영은 그의 계좌로 2천만 원을 입금했다.“엄마 잘 보살펴. 치료비는 걱정하지 말고. 의사 선생님이 하신 말씀 들었지? 엄마는 현재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해. 그러니까 엄마한테 다시는 짜증 부리지 마.”유현석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병원에 간이침대 파는 게 있을 거야. 이따가 간호사한테 말해서 가져다 달라고 해. 오늘은 아빠가 여기 있어. 내일 간병인 보내줄게.”유월영은 메모지를 꺼내 핸드폰 번호를 적어서 유현석에게 건넸다.“이건 내 연락번호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뒤돌아섰다.그녀가 복도 모퉁이까지 갔을 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월영아, 아빠가 미안해. 앞으로는 집에 자주 들를 거지?”유월영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병
윤미숙은 큰 코트를 걸치고 있었기에 배가 나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그녀를 발견한 윤미숙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왔다.“월영이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유월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윤미숙에게 물었다.“아줌마도 어디 아파서 오셨어요?”“나 아니고 친구 병문안 왔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여기까지 왔네.”윤미숙이 웃으며 말했다.유월영이 말했다.“저도 건강검진 받으러 왔어요.”윤미숙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래. 넌 좀 건강검진을 받아야 해.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나이도 어린데 일하느라 끼니도 제대로 안 챙긴 거 아니야? 재준이 그 녀석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아.”“연 대표님이랑은 상관없어요.”유월영이 말했다.병원은 오래 대화를 나누기 적절한 곳이 아니었기에 둘은 얼마 안 지나 헤어졌다.검진 결과가 나오자 유월영은 의사를 찾았다.의사는 검사 결과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나이는 스물 다섯인데 신체 나이는 서른이 넘네요.”유월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많이 안 좋은가요?”“큰 문제는 아니지만 평소에 건강관리에 힘써야겠어요. 나중에 나이 들면 더 힘들 거예요.”유월영이 물었다.“초음파 결과는 어떤가요?”의사가 초음파 결과지를 보며 물었다.“최근에 어디 불편한 곳은 없었어요?”유월영이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몇 달 전에 유산을 했는데 지금은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요?”의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좀 상태가 안 좋긴 하네요. 유산하고 혹시 제대로 쉬지도 않고 몸을 혹사시켰나요?”유산하고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연재준에 의해 지방으로 발령 났으니 몸 조리를 할 시간이 없었다.“자궁벽이 많이 얇아요. 임신이 잘 안 되는 체질인데 유산한 뒤에 더 안 좋아졌어요. 나중에 아이를 가지려면 힘들겠네요.”의사가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마음을 굳게 먹어야겠네요.”유월영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병원을 나왔다.그때 낙태 수술이 몸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유월영은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으로 가야 했기에 말없이 뒤돌아섰다.“아버지랑 새어머니는 너를 참 좋아하더라. 너 때문에 아버지가 직접 회사까지 찾아오셨어.”연재준이 비웃음을 가득 머금고 말했다.“두 분은 우리가 결혼하길 바라는 눈치던데 난 사생활이 문란한 여자는 딱 질색이라서 말이야.”유월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뒤돌아섰다.“그러니까 제발 저 좀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나요? 제가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생활이 힘들어지면 계속 연 회장님이나 사모님을 찾아가서 불쌍한 척할 수밖에 없잖아요.”“어쩌면 지금 제 건강 상태가 안 좋아진 것도 백유진이랑 대표님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그럼 두 분은 더욱 더 백유진 씨를 싫어하게 되겠죠.”연재준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그는 사나운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유월영, 죽고 싶어?”“살고 싶어서 이러는 거예요. 벌레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하물며 저도 인간이잖아요.”말을 마친 유월영은 대답도 듣지 않고 갈 길을 갔다.뒤에서 그의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떠나갔다.유월영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떠나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백유진과 아직 연락하고 있다라….연재준이 사라진 백유진을 찾아낸 건지, 아니면 연 회장이 결국 아들의 고집을 못 이겨 둘의 사이를 인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원인이야 어찌됐건 연재준과 백유진이 다시 연락하고 지낸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었다.연재준은 일부러 유월영을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마침 지나가다가 병원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보고 다가간 것이었다.그는 최근에 서지욱과 같이 진행하는 사업 때문에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약속 장소로 나온 서지욱은 연재준이 저기압인 것을 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그래도 아주머니가 결국엔 걔를 부축해서 집 안으로 데려갔잖아.”연재준이 의아한 얼굴로 친구를 바라봤다.“백유진 씨가 너희 집 찾아갔다가 비 맞아서 쓰러진 것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거 아니었어?”연재준과 유월영이 선박 출장을 떠났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