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걱정을 알기에 유월영도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상한 거래는 안 했어요.”“제가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게 해주면 SK로 가서 일하는 조건이었어요. 5년 고용계약서에 사인하고 제 능력으로 별동네 프로젝트보다 더 큰 실적을 따낼 수 있다고 말했어요.”그녀가 퇴사한다는 소문이 돌 때, 그녀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보내온 기업 중에는 SK도 있었다.단지 자신과 어울리는 기업 이미지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쪽이 내민 손을 잡지 않았을 뿐이었다.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결국 신현우를 찾아가서 담판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신현우는 거듭 고민 끝에 그녀의 제안에 동의했다.다만 SK에서 일하는 동안은 기본급만 지급하고 각종 보너스는 지급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더 붙었다.신현우는 철두철미한 사업가였다.밑지는 장사는 절대 안 한다는 주의였다.이번 거래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취한 사람은 연재준이었다. 반면 유월영은 손해가 막심했다.물론 이런 얘기를 신연우 앞에서 할 생각은 없었다.“사실 SK에서 일해 보고 싶기는 했어요.”신연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게 말하니까 안심이 되네요.”유월영이 주문한 세트에는 오징어가 들어간 요리도 있었다. 신연우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오고 해산물이 안 들어간 자신의 요리를 그녀의 앞으로 밀어놓았다.“이거 야채 튀김인데 먹어봐요.”유월영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교수님 많이 드세요.”뒤에서 그들의 모습을 주시하던 연재준의 각도에서는 그들의 이런 소통 방식이 무척 친밀하게 보였다.유월영이 저렇게 환한 얼굴로 웃고 있는 모습만 봐도 속이 뒤틀렸다.SK나 해운이나 사실 직원 대우 방면에서는 비슷비슷했다. 그녀가 그쪽으로 옮겨간 건 어쩌면 그녀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물론 연재준은 그녀의 탄탄대로를 축하해 줄 마음은 없었다.그는 티슈로 손을 닦고 담담한 말투로 소은혜에게 물었다.“다 드셨어요? 다 드셨으면 가요. 데려다줄게요.”“어디로요?”소은
유월영은 의아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분명 거래를 제안했을 때 신현우는 그녀의 입사를 환영하는 태도를 보였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서로의 약속을 잊지 말라고까지 주의를 주었다.그런데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걸까?그리고 그녀의 고난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유월영은 택시를 타고 오피스텔로 돌아왔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축포가 터지는 소리에 그녀는 움찔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조서희가 두 손 들어 그녀를 환영했다.“드디어 그 악마에게서 벗어난 것을 축하해!”유월영이 실소하며 말했다.“이건 좀 너무 과했어. 축포는 대체 왜 샀어? 난 뭐가 폭발한 줄 알았잖아.”조서희가 웃으며 말했다.“미리 계산했지. 내일은 주말이고 너희 계약기간도 끝나가니까 오늘 축하 파티라도 해야지?”그녀는 손을 내밀어 유월영의 캐리어를 받으며 물었다.“연재준이랑은 얘기가 잘 끝났지? 이제 서로 각자 갈 길을 가면 되는 거지?”“그렇게 된 셈이지 뭐.”유월영은 선박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지 않았다.“거기 욕실 세트 괜찮은 것 같아서 네 몫으로 한 세트 챙겨왔어.”조서희가 활짝 웃었다.“역시 내 친구야! 넌 일단 들어가서 쉬고 있어. 내가 저녁 금방 차릴게.”유월영이 오기 전부터 삼계탕을 끓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식자재는 이미 준비해 두었기에 조서희는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유월영은 캐리어를 정리하고 약을 먹은 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열었다.신연우에게서 약을 제때 챙겨 먹으라는 당부 문자가 와 있었다.유월영은 그러겠다고 답장했다.SNS에 접속했더니 신연우가 갑판에서 찍은 달밤 사진을 자신의 SNS에 게시했다.그녀는 그 사진에 좋아요를 꾹 눌렀다.아래로 내렸더니 정우증권 인사 담당자의 게시글도 보였다.주방에서 나온 조서희가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그럼 정우증권으로 아예 마음을 굳힌 거지?”“그래, 맞아.”유월영은 며칠 전에 정우증권 인사 담당과 거의 협상을 마무리한 단계였다. 그쪽에서도 그녀가 해운과의 계약 기간이 끝나는 즉시 채용하
유월영은 좀 당황스러웠지만 괜찮다고 문자를 보냈다.회사에서 갑자기 일이 생겨 야근하는 경우는 그녀도 많이 겪었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물을 받아서 화분에 물을 주었다.창가에 작은 허브 화분을 기르고 있었는데 은은하고 시원한 향이 나서 맡으면 기분이 좋아졌다.그녀는 기분이 좋아진 김에 인사담당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월요일에 바로 회사로 가면 되나요?]30분이 지났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유월영은 뭔가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점심 때가 되어서도 그녀가 외출할 기미가 없자 조서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너 정우증권 인사담당이랑 밥 먹기로 하지 않았어? 왜 아직도 집에서 안 나가?”유월영은 핸드폰을 꺼내 다시 확인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SNS에 접속했더니 그 인사담당이 어느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 중인 사진이 올라왔다.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도 익숙한 신주시의 한 레스토랑이었다.분명 그녀에게는 일이 있다고 오성시로 급하게 돌아간다고 답장했던 사람이었다.유월영은 담담한 얼굴로 사진 밑에 좋아요를 눌렀다.3분도 되지 않아 그 게시물은 삭제가 되었다. 진짜 삭제한 건지 자신이 차단당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유월영은 담담한 얼굴로 친구의 질문에 대답했다.“다른 약속이 있대.”조서희가 물었다.“그럼 월요일에 바로 입사 수속하는 거야?”유월영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담담히 말했다.“뭔가 사정이 있는 것 같아. 그 회사 안 갈 거야.”조서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왜? 무슨 일인데?”유월영은 대답 대신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신현우가 갑자기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고 정우증권 인사담당에게서 바람을 맞히고 이 모든 게 우연인 것 같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를 채용하지 못하게 압력을 넣은 게 분명했다.그럴 능력을 가진 자, 그리고 그렇게 할 이유가 있는 자는 연재준뿐이었다.계약 기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신연우와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왜 이런 치졸한 짓을 벌였은지도 이해할 수 있었
유월영은 예의 바르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줌마, 혼자 오셨어요?”윤미숙은 반가운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너 집에 안 온지 한 달이 넘은 거 알아? 그런데 왜 이렇게 야위었어?”유월영이 미안한 얼굴로 답했다.“요즘 많이 바빴어요.”윤미숙이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그랬구나. 그런데 너 온다고 해도 제대로 반겨줄 수도 없을 것 같아.”“무슨 일 있어요?”“재준이랑 회장님 때문에 그렇지 뭐.”윤미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둘이 백유진이라는 여자애 때문에 대판 싸웠어. 재준이도 요즘 집에 오지를 않아. 연락해도 안 받고.”연재준은 원래 본가로 가기 싫어했다. 몇 달에 한번 집으로 가서 얼굴을 비추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연락까지 차단할 정도면 이번에는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의미했다.유월영은 조심스럽게 윤미숙의 눈치를 살폈다. 연재준과 아버지의 관계가 이 정도로 나빠진데는 윤미숙 때문도 있었다.그렇다고 윤미숙이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계모로서 최선을 다했다.연재준의 아버지와 재혼한 뒤로 그녀는 주동적으로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중에 이복형제끼리 경영권 다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대체 재준이는 그런 애 어디가 좋다고 그렇게 감싸는지 모르겠어. 내 눈에는 월영이 네가 백배 나은데 말이야.”윤미숙이 불만스럽게 말했다.하지만 유월영은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윤미숙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부자지간에 이런 상황까지 왔으니 앞으로 어쩌면 좋아. 대체 백유진 걔가 어디가 예쁘다고 재준이가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어. 능력이나 가정환경 하나만 내세울 게 있었어도 회장님이 이 정도로 반대하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재준이가 좋다니 우리도 뭘 어쩔 수가 없네.”결국 먼저 마음이 약해진 쪽은 윤미숙이었다.이대로 간다면 연재준과 가족들 사이의 냉전이 조금만 길어지면 연 회장도 가업과 가문을 위해서 타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백유진과 연재준이 결혼할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유월영의 부모님 댁은 봉현군에 있었다.최근 재개발 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봉현군은 관광명소로 유명해졌고 수많은 외부 여행객들을 받았다.유월영은 보건품을 들고 3년 만에 집을 찾아갔다.문은 열려 있었다. 이런 시골집들은 낮에는 거의 대문을 열어두는 습관이 있었다.유월영이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던 찰나, 안에서 누군가가 나왔고 그녀는 재빨리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겼다.고개를 내밀고 그쪽을 봤더니 엄마였다.엄마는 대문 앞에서 허브를 씻고 있었다.허브차를 우려서 여름에 마시면 아주 시원할 뿐더러 더위도 예방할 수 있었다.전에는 엄마가 우려준 허브차를 종종 마셨었는데 집을 떠나면서 한 번도 마셔본 적 없었다.유월영이 옛 생각에 정신이 팔린 사이, 안에서 쾅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그녀의 아버지 유현석이 밖으로 나오며 온갖 짜증을 부렸다.“그거 만들어서 어디다 써? 그럴 시간 있으면 돈 벌 방법이나 좀 생각해 봐. 당신 병 치료하려면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몰라?”유월영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엄마가 어디 아프신 걸까?그녀는 엄마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불과 3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엄마의 얼굴은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볼 살도 다 빠지고 너덜너덜한 옷에 눈빛은 퀭했다.이영화는 무덤덤한 얼굴로 허브를 씻으며 대답했다.“그래서 치료 포기하자고 했잖아요. 살만큼 살다가 죽으면 한줌 재가 되면 되지. 그게 뭐가 그렇게 대수라고.”유현석이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냈다.“당신 말은 참 쉽게 해. 당신이야 죽으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겠지만 남은 사람은 평생 죄책감에 살아가야 하는 거 몰라? 당신 사람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그래서 둘째한테 전화해서 좀 도와달라고 하면 얼마나 좋아? 이런 거나 씻고 있지 말고!”그는 허브 바구니를 그대로 발로 걷어찼다.가만히 참고 있던 이영화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언성을 높였다.“둘째한테 어떻게 연락해요? 그때 우리가 걔한테 어떻게 했는지 잊었어요? 걔 아마 지금도 우리를 생각하면 치가 떨릴걸
유월영이 쉬지 않고 심폐소생술을 진행한 결과, 5분 정도 지나서 이영화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엎드려서 확인해 봤더니 심장박동도 느껴졌다. 유월영은 눈물을 머금고 다급히 엄마를 불렀다.“엄마, 엄마!”하지만 이영화는 의식을 차리지는 못했고 유월영은 구급차가 올 때까지 쉬지 않고 심폐소생술을 했다.잠시 후, 마을 입구에 구급차가 도착했다.의료진이 이영화를 들것에 실어 구급차에 실었다. 이영화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응급실로 실려 들어갔다.유월영과 유현석 부녀는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유현석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유월영은 담담한 얼굴로 다가가서 아버지를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그리고 자판기로 가서 따뜻한 커피를 사다가 아버지에게 건넸다.유현석은 커피를 손에 꽉 쥐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었다.아버지의 기분이 조금 안정되자 유월영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엄마 대체 어디가 아픈 거야? 심장에 문제가 생겼어?”유현석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맞아. 6개월 전에 쓰러져서 병원에 왔다가 발견했어. 너무 늦어서 약물 치료로는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고. 지금 엄마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심장을 이식 받는 거야.”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몰랐다.유월영은 갑자기 목이 타서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유현석은 그녀의 눈치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렸다.하지만 유월영은 지금 수술실로 들어간 엄마 걱정에 그와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그렇게 두 시간이 지나 수술실 문이 열리자 그녀는 재빨리 의사에게 다가갔다.“선생님, 이영화 환자 괜찮은 거죠?”의사가 말했다.“고비는 넘겼습니다만, 지난 번에 남편분께 말씀드렸듯이 이영화 환자 상황으로는 심장 이식수술이 시급합니다. 언제 또 심장이 멈출지 몰라요. 그때는 응급조치도 소용없을 겁니다.”유현석은 고통스럽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아내를 살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수술비가 문제였다.유월영은 아버지를 힐끗 보고는 굳은 목소리로 물
유월영은 말없이 티슈를 꺼내 엄마의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었다.괜찮다는 말은 건성으로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다만 전처럼 부모님이 원망스럽지도 않았다.“지나간 일은 이제 다 잊어.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그 동안 잘 지냈어. 수술비도 걱정하지 마. 나한테 돈이 있어. 적합한 기증자가 나타나면 바로 수술 들어가면 돼.”이영화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잘 지냈다니까 안심이야.”유월영은 엄마랑 아주 오래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을 챙겨주고 엄마가 잠든 뒤에야 병실을 나왔다.병실 밖 의자에 앉아 있던 유현석이 그녀를 보고 다급히 일어섰다.그는 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과거의 일 때문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유월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큰언니랑 막내는?”유현석이 다급히 말했다.“네 언니랑 형부는 청허포에서 일해. 금방 아이를 출산해서 오늘 부르지 않았어. 내일 연락해서 오라고 할게. 막내는 2년 전에 어떤 남자랑 집을 나간 뒤로 연락이 끊겼어.”유월영은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계좌번호 좀 불러줘.”유현석이 미안한 얼굴로 그녀에게 계좌번호를 알려줬다.유월영은 그의 계좌로 2천만 원을 입금했다.“엄마 잘 보살펴. 치료비는 걱정하지 말고. 의사 선생님이 하신 말씀 들었지? 엄마는 현재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해. 그러니까 엄마한테 다시는 짜증 부리지 마.”유현석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병원에 간이침대 파는 게 있을 거야. 이따가 간호사한테 말해서 가져다 달라고 해. 오늘은 아빠가 여기 있어. 내일 간병인 보내줄게.”유월영은 메모지를 꺼내 핸드폰 번호를 적어서 유현석에게 건넸다.“이건 내 연락번호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뒤돌아섰다.그녀가 복도 모퉁이까지 갔을 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월영아, 아빠가 미안해. 앞으로는 집에 자주 들를 거지?”유월영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병
윤미숙은 큰 코트를 걸치고 있었기에 배가 나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그녀를 발견한 윤미숙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왔다.“월영이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유월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윤미숙에게 물었다.“아줌마도 어디 아파서 오셨어요?”“나 아니고 친구 병문안 왔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여기까지 왔네.”윤미숙이 웃으며 말했다.유월영이 말했다.“저도 건강검진 받으러 왔어요.”윤미숙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래. 넌 좀 건강검진을 받아야 해.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나이도 어린데 일하느라 끼니도 제대로 안 챙긴 거 아니야? 재준이 그 녀석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아.”“연 대표님이랑은 상관없어요.”유월영이 말했다.병원은 오래 대화를 나누기 적절한 곳이 아니었기에 둘은 얼마 안 지나 헤어졌다.검진 결과가 나오자 유월영은 의사를 찾았다.의사는 검사 결과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나이는 스물 다섯인데 신체 나이는 서른이 넘네요.”유월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많이 안 좋은가요?”“큰 문제는 아니지만 평소에 건강관리에 힘써야겠어요. 나중에 나이 들면 더 힘들 거예요.”유월영이 물었다.“초음파 결과는 어떤가요?”의사가 초음파 결과지를 보며 물었다.“최근에 어디 불편한 곳은 없었어요?”유월영이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몇 달 전에 유산을 했는데 지금은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요?”의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좀 상태가 안 좋긴 하네요. 유산하고 혹시 제대로 쉬지도 않고 몸을 혹사시켰나요?”유산하고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연재준에 의해 지방으로 발령 났으니 몸 조리를 할 시간이 없었다.“자궁벽이 많이 얇아요. 임신이 잘 안 되는 체질인데 유산한 뒤에 더 안 좋아졌어요. 나중에 아이를 가지려면 힘들겠네요.”의사가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마음을 굳게 먹어야겠네요.”유월영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병원을 나왔다.그때 낙태 수술이 몸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