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은 말없이 티슈를 꺼내 엄마의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었다.괜찮다는 말은 건성으로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다만 전처럼 부모님이 원망스럽지도 않았다.“지나간 일은 이제 다 잊어.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그 동안 잘 지냈어. 수술비도 걱정하지 마. 나한테 돈이 있어. 적합한 기증자가 나타나면 바로 수술 들어가면 돼.”이영화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잘 지냈다니까 안심이야.”유월영은 엄마랑 아주 오래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을 챙겨주고 엄마가 잠든 뒤에야 병실을 나왔다.병실 밖 의자에 앉아 있던 유현석이 그녀를 보고 다급히 일어섰다.그는 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과거의 일 때문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유월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큰언니랑 막내는?”유현석이 다급히 말했다.“네 언니랑 형부는 청허포에서 일해. 금방 아이를 출산해서 오늘 부르지 않았어. 내일 연락해서 오라고 할게. 막내는 2년 전에 어떤 남자랑 집을 나간 뒤로 연락이 끊겼어.”유월영은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계좌번호 좀 불러줘.”유현석이 미안한 얼굴로 그녀에게 계좌번호를 알려줬다.유월영은 그의 계좌로 2천만 원을 입금했다.“엄마 잘 보살펴. 치료비는 걱정하지 말고. 의사 선생님이 하신 말씀 들었지? 엄마는 현재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해. 그러니까 엄마한테 다시는 짜증 부리지 마.”유현석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병원에 간이침대 파는 게 있을 거야. 이따가 간호사한테 말해서 가져다 달라고 해. 오늘은 아빠가 여기 있어. 내일 간병인 보내줄게.”유월영은 메모지를 꺼내 핸드폰 번호를 적어서 유현석에게 건넸다.“이건 내 연락번호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뒤돌아섰다.그녀가 복도 모퉁이까지 갔을 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월영아, 아빠가 미안해. 앞으로는 집에 자주 들를 거지?”유월영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병
윤미숙은 큰 코트를 걸치고 있었기에 배가 나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그녀를 발견한 윤미숙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왔다.“월영이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유월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윤미숙에게 물었다.“아줌마도 어디 아파서 오셨어요?”“나 아니고 친구 병문안 왔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여기까지 왔네.”윤미숙이 웃으며 말했다.유월영이 말했다.“저도 건강검진 받으러 왔어요.”윤미숙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래. 넌 좀 건강검진을 받아야 해.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나이도 어린데 일하느라 끼니도 제대로 안 챙긴 거 아니야? 재준이 그 녀석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아.”“연 대표님이랑은 상관없어요.”유월영이 말했다.병원은 오래 대화를 나누기 적절한 곳이 아니었기에 둘은 얼마 안 지나 헤어졌다.검진 결과가 나오자 유월영은 의사를 찾았다.의사는 검사 결과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나이는 스물 다섯인데 신체 나이는 서른이 넘네요.”유월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많이 안 좋은가요?”“큰 문제는 아니지만 평소에 건강관리에 힘써야겠어요. 나중에 나이 들면 더 힘들 거예요.”유월영이 물었다.“초음파 결과는 어떤가요?”의사가 초음파 결과지를 보며 물었다.“최근에 어디 불편한 곳은 없었어요?”유월영이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몇 달 전에 유산을 했는데 지금은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요?”의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좀 상태가 안 좋긴 하네요. 유산하고 혹시 제대로 쉬지도 않고 몸을 혹사시켰나요?”유산하고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연재준에 의해 지방으로 발령 났으니 몸 조리를 할 시간이 없었다.“자궁벽이 많이 얇아요. 임신이 잘 안 되는 체질인데 유산한 뒤에 더 안 좋아졌어요. 나중에 아이를 가지려면 힘들겠네요.”의사가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마음을 굳게 먹어야겠네요.”유월영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병원을 나왔다.그때 낙태 수술이 몸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유월영은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으로 가야 했기에 말없이 뒤돌아섰다.“아버지랑 새어머니는 너를 참 좋아하더라. 너 때문에 아버지가 직접 회사까지 찾아오셨어.”연재준이 비웃음을 가득 머금고 말했다.“두 분은 우리가 결혼하길 바라는 눈치던데 난 사생활이 문란한 여자는 딱 질색이라서 말이야.”유월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뒤돌아섰다.“그러니까 제발 저 좀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나요? 제가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생활이 힘들어지면 계속 연 회장님이나 사모님을 찾아가서 불쌍한 척할 수밖에 없잖아요.”“어쩌면 지금 제 건강 상태가 안 좋아진 것도 백유진이랑 대표님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그럼 두 분은 더욱 더 백유진 씨를 싫어하게 되겠죠.”연재준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그는 사나운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유월영, 죽고 싶어?”“살고 싶어서 이러는 거예요. 벌레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하물며 저도 인간이잖아요.”말을 마친 유월영은 대답도 듣지 않고 갈 길을 갔다.뒤에서 그의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떠나갔다.유월영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떠나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백유진과 아직 연락하고 있다라….연재준이 사라진 백유진을 찾아낸 건지, 아니면 연 회장이 결국 아들의 고집을 못 이겨 둘의 사이를 인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원인이야 어찌됐건 연재준과 백유진이 다시 연락하고 지낸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었다.연재준은 일부러 유월영을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마침 지나가다가 병원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보고 다가간 것이었다.그는 최근에 서지욱과 같이 진행하는 사업 때문에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약속 장소로 나온 서지욱은 연재준이 저기압인 것을 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그래도 아주머니가 결국엔 걔를 부축해서 집 안으로 데려갔잖아.”연재준이 의아한 얼굴로 친구를 바라봤다.“백유진 씨가 너희 집 찾아갔다가 비 맞아서 쓰러진 것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거 아니었어?”연재준과 유월영이 선박 출장을 떠났을 때,
이영화는 병원에서 5일 입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퇴원하는 날, 유월영은 친구에게서 차를 빌려 그들을 봉현군까지 데려다 주고 집에서 식사를 함께했다.유현석이 요리를 담당하고 식사가 끝난 뒤에 유월영이 설거지를 담당했다.드디어 집에 온 느낌이 들었다.거실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려서 나와 봤더니 큰언니와 형부가 딸을 데리고 찾아왔다.유월영은 병원에서 그들과 한번 마주친 적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서먹한 감이 있었다.하지만 조카가 귀여워서 계속 안고 있었다.저녁이 되어 큰언니와 형부가 떠날 채비를 했고 유월영도 가는 길에 그들을 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밖으로 나오자 아버지가 나와서 그녀에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이건 엄마가 너 준다고 모은 돈이야.”열어보니 안에 현금이 들어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봉투를 다시 아버지에게 건넸다.“나 돈 있어, 아빠.”“이건 네 생일 때마다 주려고 모은 돈이야. 생일 때마다 엄마가 너희들한테 용돈을 줬었잖아. 언젠가 너 돌아오면 준다고 모아뒀어. 사실 너 그렇게 가고 우리 둘 다 마음이 편치 않았어.”유월영은 착잡한 마음으로 봉투를 받았다.아버지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너도 다 혼자 감당하려고 하지마. 여자애가 돈을 벌어봤자 얼마나 벌었겠어? 엄마 수술비는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 볼게. 그 동안 모은 돈도 조금 있고 큰언니도 좀 도와준다고 했어. 우리는 가족이니까 다 같이 감당해야지.”유월영은 차에 올라 봉투에 든 현금을 세어보았다. 고작 오십만 원이었지만 그 무게는 그 어떤 것보다 무거웠다.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형부가 그녀에게 어디서 일하냐고 물었다.유월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퇴사한지 얼마 안 돼서 지금은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어요.”“처제는 똑똑하니까 좋은 직장 구할 수 있을 거야.”형부의 말에 유영은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그들을 데려다주고 친구에게 차를 돌려준 뒤에 그녀는 지하철을 타고 오피스텔로 돌아갔다.늦은 시각, 그녀는 컴퓨터를 열고 이메일에 접속했다. 예상했던
서지욱이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SK의 막내딸인가 보네. 며칠 전에 재준이가 새로 고용한 비서야.”연재준이 말했다.“이미 퇴사했어.”SK의 오너 일가를 신변에 둔다는 건 굉장히 예민한 일이었다.그래서 내보낸 건데 신연아는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그를 찾아다니고 있었다.“비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왜 유 비서는 안 보여? 전에는 항상 같이 다녔잖아? 재준이 너만 졸졸 따라다니던 사람인데 갑자기 안 보이니까 이상해서 말이야.”노현재가 당구대로 다가오며 연재준에게 물었다.서지욱이 옆에서 대신 대답했다.“유 비서 퇴사했어.”노현재가 놀랍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유 비서가 퇴사했어?”서지욱이 덤덤히 말했다.“고용 계약이 만료됐잖아. 재준이야 유 비서를 계속 붙잡고 싶었지. 그런데 당사자가 간다는데 무슨 소용이야? 그래서 속 좁은 저 녀석이 각 기업에 유 비서 채용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잖아.”노현재는 가장 힘들었던 때에 연재준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었기에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연재준의 편이었다.“주제를 모르네.”노현재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재준은 태연하게 당구대를 잡으며 덤덤히 말했다.“곧 돌아와서 나한테 잘못했다고 빌 거야.”이런 적이 처음도 아니었다.그녀를 지방에 발령냈을 때도 먼저 다가와서 본사로 돌아가고 싶다면서 안기던 여자였다.그는 시간이 좀 소요될 뿐,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거라고 믿었다.한편, 유월영은 아무런 기대 없이 여러 중소기업들에 이력서를 뿌렸다. 그런데 다음 날에 면접 통지가 날아왔다.첫 면접은 화상 통화로 진행되었다. 면접 담당자는 그녀를 높게 평가하며 2차 면접을 약속했다.KTX를 타고 세 시간 정도 가야 하는 지방에 있는 회사였다.거리가 멀어 조금 고민이 되었지만 유월영은 일단 가보자는 마음으로 KTX에 올랐다.가는 도중에도 다른 회사에서 면접 통지를 받았다. 전화로 얘기가 잘 되었기에 시간을 정해 회사에서 정식 면접을 보기로 했다.그녀가 지금 면접을 보러 가는 회사와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연재준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유월영은 핸드폰을 던지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그리고 감정을 추스른 뒤에 KTX를 타고 신주로 돌아갔다.신주역에 도착해서 출구로 향하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백유진이었다.둘이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백유진도 그녀를 발견했다.유월영이 기침 때문에 마스크로 얼굴을 절반이나 가리고 있었지만 눈매와 체형을 보고 백유진은 그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백유진은 한 중년 여성과 함께 있었다. 외모가 많이 닮은 것으로 보아 엄마인 것 같았다.백유진은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 유월영을 빤히 바라봤다.이때, 유월영의 핸드폰이 울렸다.“여보세요.”“이영화 씨 가족분 되시죠? 여기 병원이에요.”유월영은 당황하며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아까 연락을 받았는데 적합한 기증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영화 씨 바로 수술 가능하실 것 같아요.”유월영은 그 순간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정말요? 심장 기증자가 나타난 건가요?”“네. 내일 당장 병원으로 오셔서 입원하시고 대기하시면 됩니다. 기증자는 서울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수술 준비만 되면 바로 수술 들어갈 수 있습니다.”유월영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내일 엄마 모시고 병원으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그녀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피어났다.최근 있었던 불쾌한 일들이 이 소식 하나로 모두 잊혀진 기분이었다.심장 기증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은 아주 고된 기다림이었다.인터넷으로 알아본 결과 매일 수천 명이 넘는 환자가 기증자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기증자의 가족이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해야지 가능한 일이라서 운이 좋게 새 삶을 얻은 환자는 사실 많지 않았다.그런데 불과 며칠 만에 기증자가 나타났으니 그들은 운이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유월영은 곧바로 집에 전화해서 이 소식을 알렸다. 소식을 전해 들은 유현석도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그래. 난 네 언니랑 형부한테 알려야겠어. 내일 다 같이 병원에 가서 입원 수속을
식사가 끝난 뒤, 유월영은 조서희와 함께 오피스텔로 돌아갔다.그녀는 내일 어머니 병원에 갈 짐을 정리하고 조서희는 편하게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하다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월영아!”유월영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왜 그래?”조서희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너 일자리 찾은 것 같아!”유월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봤다.조서희가 핸드폰을 바라보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SNS보는데 내 옛 상사가 인원 모집 공고를 냈어. 부서 담당을 모집한다는데 너랑 어울릴 것 같아서 네 이력서를 보내드렸었거든. 그쪽에서 아주 만족스럽다는 답변이 왔어.”유월영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너 전에 안성에서 일하지 않았어? 그때 직장 내 괴롭힘 때문에 퇴사했잖아.”“그렇긴 하지. 해운과는 못 비기지만 사실 신주의 대부분 회사들이 다 그렇잖아? 안성 정도면 대우는 괜찮을 거야.”조서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사실 그 인간 한 명 빼고는 다 괜찮았어. 그 인간 아니었으면 회사를 안 나왔을 거야. 퇴사한 뒤에도 계속 이분과는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사람이 정말 괜찮아.”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좀 끌리긴 하네.”조서희의 옛 상사라면 유월영도 만난 적이 있었다. 전에 연재준이 클럽으로 그녀를 불러냈을 때 마침 노현재와 어깨동무를 하고 지나가던 여성을 보았다. 그 여자가 바로 조서희의 옛 상사였다.나중에 둘이 헤어지고 그녀가 많이 힘들어했다는 말을 조서희를 통해 들은 적 있었다.“그분이 그러시는데 저녁이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대.”조서희가 들뜬 얼굴로 친구를 꼬드겼다.“가자. 조건이 안 맞더라도 같은 여자끼리 식사 정도는 괜찮잖아.”친구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유월영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사실 이 시점에 직장까지 구한다면 엄마의 수술 후 관리비용까지 해결할 수 있으니 그녀에게는 괜찮은 제안이었다.유월영은 감기약을 먹은 후,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했
둘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김우희가 다시 둘의 앞길을 막았다.“뭘 그렇게 급하게 가려고 해?”조서희가 인상을 쓰며 그녀에게 물었다.“언니, 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김우희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일자리 소개해 주려고 나온 거잖아.”“일자리가 아니라 우리를 팔아먹으려고 불러낸 것 같은데요?”성질 급한 조서희가 날이 선 말투로 반박했다.왕 대표가 술을 들고 다가오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어린 아가씨가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해? 당장 우희 씨한테 사과해! 사과의 의미로 이 술을 한잔씩 마시면 되겠네! 마시기 전에는 나갈 생각하지 마!”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유월영과 조서희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아마 저 술을 마셔도 이 방을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둘은 김우희의 어깨를 밀치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김우희가 바닥에 넘어지자 뒤에 있던 왕 대표가 소리를 질렀다.“저것들 잡아!”문이 열리고 밖에서 정장을 입은 경호원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들은 다짜고짜 유월영과 조서희의 팔목을 잡으려 했고 그러다 보니 몸싸움이 일어나게 되었다.둘은 핸드백으로 상대의 얼굴을 가격하고 다리를 들어 상대의 중심부를 걷어찼다.순식간에 고급 별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둘은 바깥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사람 살려요! 이 사람들이 저희를 납치하려고 해요!”바깥에는 직원들도 적지 않았지만 어쩐 일인지 힐끗 바라만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돌렸다. 흔히 있는 일이라서 무관심한 건지, 아무도 그들을 구해주려 나서지 않았다.유월영은 경호원 한 명을 밀쳐내고 미친 듯이 도망쳤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조서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별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모양이었다.유월영은 이를 악물고 핸드폰으로 경찰에 신고한 뒤, 별실로 달려갔다.그리고 굳게 닫힌 문을 발로 걷어찼다.느끼남 왕 대표가 조서희를 소파에 깔아뭉개고 있었다. 그녀의 옷은 군데군데 찢겨서 볼품이 없었고 울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