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욱이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SK의 막내딸인가 보네. 며칠 전에 재준이가 새로 고용한 비서야.”연재준이 말했다.“이미 퇴사했어.”SK의 오너 일가를 신변에 둔다는 건 굉장히 예민한 일이었다.그래서 내보낸 건데 신연아는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그를 찾아다니고 있었다.“비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왜 유 비서는 안 보여? 전에는 항상 같이 다녔잖아? 재준이 너만 졸졸 따라다니던 사람인데 갑자기 안 보이니까 이상해서 말이야.”노현재가 당구대로 다가오며 연재준에게 물었다.서지욱이 옆에서 대신 대답했다.“유 비서 퇴사했어.”노현재가 놀랍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유 비서가 퇴사했어?”서지욱이 덤덤히 말했다.“고용 계약이 만료됐잖아. 재준이야 유 비서를 계속 붙잡고 싶었지. 그런데 당사자가 간다는데 무슨 소용이야? 그래서 속 좁은 저 녀석이 각 기업에 유 비서 채용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잖아.”노현재는 가장 힘들었던 때에 연재준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었기에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연재준의 편이었다.“주제를 모르네.”노현재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재준은 태연하게 당구대를 잡으며 덤덤히 말했다.“곧 돌아와서 나한테 잘못했다고 빌 거야.”이런 적이 처음도 아니었다.그녀를 지방에 발령냈을 때도 먼저 다가와서 본사로 돌아가고 싶다면서 안기던 여자였다.그는 시간이 좀 소요될 뿐,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거라고 믿었다.한편, 유월영은 아무런 기대 없이 여러 중소기업들에 이력서를 뿌렸다. 그런데 다음 날에 면접 통지가 날아왔다.첫 면접은 화상 통화로 진행되었다. 면접 담당자는 그녀를 높게 평가하며 2차 면접을 약속했다.KTX를 타고 세 시간 정도 가야 하는 지방에 있는 회사였다.거리가 멀어 조금 고민이 되었지만 유월영은 일단 가보자는 마음으로 KTX에 올랐다.가는 도중에도 다른 회사에서 면접 통지를 받았다. 전화로 얘기가 잘 되었기에 시간을 정해 회사에서 정식 면접을 보기로 했다.그녀가 지금 면접을 보러 가는 회사와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연재준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유월영은 핸드폰을 던지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그리고 감정을 추스른 뒤에 KTX를 타고 신주로 돌아갔다.신주역에 도착해서 출구로 향하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백유진이었다.둘이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백유진도 그녀를 발견했다.유월영이 기침 때문에 마스크로 얼굴을 절반이나 가리고 있었지만 눈매와 체형을 보고 백유진은 그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백유진은 한 중년 여성과 함께 있었다. 외모가 많이 닮은 것으로 보아 엄마인 것 같았다.백유진은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 유월영을 빤히 바라봤다.이때, 유월영의 핸드폰이 울렸다.“여보세요.”“이영화 씨 가족분 되시죠? 여기 병원이에요.”유월영은 당황하며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아까 연락을 받았는데 적합한 기증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영화 씨 바로 수술 가능하실 것 같아요.”유월영은 그 순간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정말요? 심장 기증자가 나타난 건가요?”“네. 내일 당장 병원으로 오셔서 입원하시고 대기하시면 됩니다. 기증자는 서울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수술 준비만 되면 바로 수술 들어갈 수 있습니다.”유월영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내일 엄마 모시고 병원으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그녀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피어났다.최근 있었던 불쾌한 일들이 이 소식 하나로 모두 잊혀진 기분이었다.심장 기증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은 아주 고된 기다림이었다.인터넷으로 알아본 결과 매일 수천 명이 넘는 환자가 기증자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기증자의 가족이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해야지 가능한 일이라서 운이 좋게 새 삶을 얻은 환자는 사실 많지 않았다.그런데 불과 며칠 만에 기증자가 나타났으니 그들은 운이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유월영은 곧바로 집에 전화해서 이 소식을 알렸다. 소식을 전해 들은 유현석도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그래. 난 네 언니랑 형부한테 알려야겠어. 내일 다 같이 병원에 가서 입원 수속을
식사가 끝난 뒤, 유월영은 조서희와 함께 오피스텔로 돌아갔다.그녀는 내일 어머니 병원에 갈 짐을 정리하고 조서희는 편하게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하다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월영아!”유월영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왜 그래?”조서희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너 일자리 찾은 것 같아!”유월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봤다.조서희가 핸드폰을 바라보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SNS보는데 내 옛 상사가 인원 모집 공고를 냈어. 부서 담당을 모집한다는데 너랑 어울릴 것 같아서 네 이력서를 보내드렸었거든. 그쪽에서 아주 만족스럽다는 답변이 왔어.”유월영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너 전에 안성에서 일하지 않았어? 그때 직장 내 괴롭힘 때문에 퇴사했잖아.”“그렇긴 하지. 해운과는 못 비기지만 사실 신주의 대부분 회사들이 다 그렇잖아? 안성 정도면 대우는 괜찮을 거야.”조서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사실 그 인간 한 명 빼고는 다 괜찮았어. 그 인간 아니었으면 회사를 안 나왔을 거야. 퇴사한 뒤에도 계속 이분과는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사람이 정말 괜찮아.”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좀 끌리긴 하네.”조서희의 옛 상사라면 유월영도 만난 적이 있었다. 전에 연재준이 클럽으로 그녀를 불러냈을 때 마침 노현재와 어깨동무를 하고 지나가던 여성을 보았다. 그 여자가 바로 조서희의 옛 상사였다.나중에 둘이 헤어지고 그녀가 많이 힘들어했다는 말을 조서희를 통해 들은 적 있었다.“그분이 그러시는데 저녁이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대.”조서희가 들뜬 얼굴로 친구를 꼬드겼다.“가자. 조건이 안 맞더라도 같은 여자끼리 식사 정도는 괜찮잖아.”친구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유월영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사실 이 시점에 직장까지 구한다면 엄마의 수술 후 관리비용까지 해결할 수 있으니 그녀에게는 괜찮은 제안이었다.유월영은 감기약을 먹은 후,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했
둘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김우희가 다시 둘의 앞길을 막았다.“뭘 그렇게 급하게 가려고 해?”조서희가 인상을 쓰며 그녀에게 물었다.“언니, 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김우희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일자리 소개해 주려고 나온 거잖아.”“일자리가 아니라 우리를 팔아먹으려고 불러낸 것 같은데요?”성질 급한 조서희가 날이 선 말투로 반박했다.왕 대표가 술을 들고 다가오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어린 아가씨가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해? 당장 우희 씨한테 사과해! 사과의 의미로 이 술을 한잔씩 마시면 되겠네! 마시기 전에는 나갈 생각하지 마!”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유월영과 조서희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아마 저 술을 마셔도 이 방을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둘은 김우희의 어깨를 밀치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김우희가 바닥에 넘어지자 뒤에 있던 왕 대표가 소리를 질렀다.“저것들 잡아!”문이 열리고 밖에서 정장을 입은 경호원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들은 다짜고짜 유월영과 조서희의 팔목을 잡으려 했고 그러다 보니 몸싸움이 일어나게 되었다.둘은 핸드백으로 상대의 얼굴을 가격하고 다리를 들어 상대의 중심부를 걷어찼다.순식간에 고급 별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둘은 바깥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사람 살려요! 이 사람들이 저희를 납치하려고 해요!”바깥에는 직원들도 적지 않았지만 어쩐 일인지 힐끗 바라만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돌렸다. 흔히 있는 일이라서 무관심한 건지, 아무도 그들을 구해주려 나서지 않았다.유월영은 경호원 한 명을 밀쳐내고 미친 듯이 도망쳤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조서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별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모양이었다.유월영은 이를 악물고 핸드폰으로 경찰에 신고한 뒤, 별실로 달려갔다.그리고 굳게 닫힌 문을 발로 걷어찼다.느끼남 왕 대표가 조서희를 소파에 깔아뭉개고 있었다. 그녀의 옷은 군데군데 찢겨서 볼품이 없었고 울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왜 항상 이런 식일까?매번 그녀는 가장 비참한 모습을 그에게 보였다. 마치 그의 그림자를 벗어나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처럼.연재준은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을 덮었다.남자의 외투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향기에 유월영의 의식은 점점 흐릿해졌다.연재준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곧장 왕 대표에게로 다가갔다.왕덕호는 욕설을 퍼부으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누구야! 누가 감히 내 일을 방해하는 거야? 죽고 싶어? 악!”옆에 있던 노현재가 다리를 들어 왕덕호의 복부를 걷어차며 말했다.“건방지게 누구 안전이라고 욕설이야? 죽고 싶어?”왕덕호는 싸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노현재와 시선이 마주치자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노… 노 사장….”연재준은 담배를 입에 물고 왕덕호에게로 다가갔다.그리고 담뱃재를 왕덕호의 얼굴에 털어냈다.그를 알아본 왕덕호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연 대표님이 왜 여기에….”노현재는 발끝으로 왕덕호의 얼굴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내 가게에서 술을 마시면서 우리 재준이 여자를 건드려 놓고 왜 여기 있냐고 묻는 건 너무 멍청한 질문 아닌가?”왕덕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아… 아닙니다! 연 대표님, 제 말씀 한 번만 들어보세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저도 김우희 그 여자한테 속아서 왔단 말입니다!”“마침 안성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만났는데 김우희가 젊은 여자랑 놀아보지 않겠냐고 해서 나온 거예요.”“유… 유 비서가 해운에서 퇴사했다고 더 이상 해운의 직원이 아니라고 그 여자가 그랬단 말입니다. 그래서 좀 데리고 놀아도 아무 문제 없다고 하길래 한 순간 정신이 나가서 그러겠다고 했어요. 유 비서가 대표님 사람인 줄 알았으면 절대 안 건드렸을 겁니다!”연재준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래서 김우희 그 여자는 지금 어디 있지?”왕 대표는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아까까지도 여기 있었는데….”“도망갔다는 얘기네. 그럼 왕 대표 한 사람 말만 듣고 우리가 그걸 어떻게 믿어? 증거 있어?”노현재가
연재준은 유월영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손을 내밀었다.“일어나.”유월영은 그가 내민 손을 잡지 않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아 다시 주저앉았다.연재준은 거칠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잡아서 일으켰다. 유월영은 일어서자마자 그의 어깨를 밀치며 차갑게 말했다.“연재준,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최악이었어!”연재준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상상력이 너무 풍부한 것도 병이야.”그는 이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었다.“끼리끼리 모인다고 전에는 내가 너무 어려서 사람을 잘못 봤어.”“당신 정말 치졸한 거 알아? 대기업에 압력을 넣어 날 취직 못하게 하고, 중소기업 시켜서 날 면접 보러 오라고 뺑뺑이 돌게 만들고, 백유진이랑 다시 만나면서도 날 놓아줄 생각이 없잖아. 당신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으면 내가 이런 자리에 나올 일도 없었어!”연재준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네가 먼저 날 배신했어.”유월영이 소리쳤다.“내가 언제 배신했어?”“하! 발뺌하는 거야?”연재준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그녀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섰다. 남자에게서 풍기는 싸늘한 기운에 유월영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3년 전에 널 살려준 사람이 누구지? 갈 곳도 없는 너를 거두어 주고 일자리까지 줬어. 내 여자가 되겠다고 한 사람도 너야. 평생 배신하지 않고 내 옆을 지키겠다고 말한 사람도 너야. 우리야 말로 진짜 가족이라고 평생 함께하자고 했잖아!”“그만!”유월영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연재준이 싸늘하게 말했다.“날 먼저 버린 사람도 너야.”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지금도 그에게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생생했다.그날 폭우가 내리던 밤에 연재준은 건달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를 구해주고 차에 태웠다. 지금도 그 따뜻한 온도를 잊을 수 없었다.연재준은 홀딱 젖은 그녀를 보고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에 덮어주었다.“이제 괜찮을 거야. 아무도 너 못 건드려.”그는 떨고 있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따뜻한 품으로 그녀
유월영은 어쩔 수 없이 임영웅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려줬다. 임영웅은 전화를 끊자마자 차를 끌고 달려왔다.조서희는 그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그렇게 임영웅이 조서희를 데려가고 유월영도 집까지 갈 힘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서덕궁 맞은편에 있는 호텔로 들어갔다.그녀가 카운터로 가서 입주 수속을 마칠 때, 구석진 곳에서 누군가가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방으로 간 유월영은 씻지도 못하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취직이 실패하고 엄마는 중병에, 일주일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면접을 보다 보니 그녀는 많이 지친 상태였다.잠이라도 자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무거운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처럼 갑갑하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녀는 애써 불안을 잠재웠다. 내일은 엄마가 입원하는 날이니 푹 쉬어둬야 했다.그렇게 힘들게 잠이 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이 울렸다.요란한 핸드폰 벨소리에 그녀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너무 급하게 일어나서인지 눈앞이 어지러웠다.그녀는 다급히 핸드폰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발신자는 그녀의 아버지였다.“아빠, 무슨 일이야?”유월영이 물었다.수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월영아, 우리 병원에 도착했는데 이 사람들이 우리한테 돌아가래. 기증자의 심장을 다른 환자가 이식 받을 거라고 수술을 못한대. 월영아, 이를 어쩌면 좋니!”유월영은 순식간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녀는 곧 간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급한 마음에 그녀는 벽을 짚고 힘겹게 다시 몸을 일으켰다.거리로 나온 유월영은 곧바로 택시를 잡았다.“제일 병원으로 가주세요. 빨리요!”병원에 도착했더니 진료실 앞에서 아버지가 의사와 다투고 있었다.그는 손에 과도를 들고 간호사 한 명을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어제 수술할 수 있다고 당신들이 먼저 연락했잖아! 그런데 오늘 갑자기 수술 일정이
유월영은 주먹을 꽉 쥐고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말했다.“아빠, 칼 내려놔요. 일단 칼부터 내려놔요.”유현석도 주변을 포위한 형사들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나도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어서 그런 건데… 월영아, 나 진짜 사람을 죽일 마음은 없었어….”“그 칼 어디서 났어?”유월영이 울며 물었다.“복도에서 한참 기다렸는데 의사가 오지 않는 거야. 그래서 네 엄마 사과 좀 먹인다고 사과를 깎고 있었어. 그런데 간호사가 오더니 수술이 취소됐다고 돌아가라는 거야. 기증자 심장은 다른 사람한테 넘어갔다고.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따지니까 저쪽에서도 자꾸 얼버무리더라고. 그래서 순간 이성이 날아가서 그만….”유월영은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아빠, 칼 내려놔. 그리고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유현석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부들부들 떨며 간호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간호사는 바로 도망가고 형사들이 달려들어 유현석을 제압했다. 유월영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형사들은 유현석의 손목에 수갑을 채워 끌고 갔다. 유월영이 쫓아가려고 하는데 형사 한 명이 그녀를 불러세웠다.“가해자 가족분 되시죠?”유월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저희랑 같이 가시죠.”유월영은 다른 형사와 경찰차를 타고 경찰서로 갔다.하지만 아버지를 만날 수는 없었다. 참고인 조사를 한다고 형사들이 그녀를 조사실로 불렀다.그녀는 형사들의 질문에 최선을 다해 객관적으로 대답했다.“우리 아빠 나쁜 사람 아니에요. 일부러 난동을 부린 건 아니고 엄마 상태가 너무 걱정돼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것 같아요. 학교도 안 나온 분이라 선생님이 설명해 준 복잡한 절차에 대해서 잘 몰라서 오해한 것 같아요. 그 간호사분께는 적절한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여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저희도 병원 관계자에게 상세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유현석 씨의 마음도 이해는 해요. 하지만 병원 의료진을 칼 들고
현시우는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그런 거 아니야.”“그럼 뭐야?”유월영이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현시우, 무슨 일이 있든 나한테 말해줘. 너도 그랬잖아 여자친구는 이런 순간에 필요한 존재라고. 내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들어줄 수는 있어. 고민은 혼자 끌어안고 있는 것보다 말로 털어놓는 게 훨씬 나아.”“물론, 네가 정말 혼자 있고 싶다면 내가 시간을 줄게. 하지만 연락을 끊으면 안 돼. 그러면 나도 걱정이 되고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말이야. 정말 힘들어.”그녀의 말에 현시우는 마치 심장에 바늘이 꽂힌 것 같았다.그 바늘은 그의 숨소리를 따라 점점 더 깊이 찔러 들어갔다.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월영아, 그냥 여기까지 하자. 내가 사람을 불러 너를 집에 데려다줄게.”유월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지금 나랑 헤어지자는 거야?”현시우의 목젖이 떨렸다.그는 “그래”라고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차마 “아니야”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그가 침묵하는 동안 유월영의 눈이 파르르 떨려왔다.그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두 줄기의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렸다.유월영의 눈물에 현시우는 한 걸음 다가가 그녀를 달래려 했다.하지만 유월영은 한 걸음 물러서더니 이내 뒤돌아 뛰어갔다.현시우가 본능적으로 뒤따라 가려 했지만 연회 부인이 제때 나타나 그를 막았다.“시우야! 지금은 내버려둬.”어머니의 충고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현씨 가문은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고 유월영은 산길을 따라 뛰면서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계속 흘렀다.가을은 좋은 계절이 아니었다.가을은 모든 것이 시들어가는 계절이었다.유월영은 눈앞이 흐릿해졌고 너무 빨리 뛰다가 발이 엉켜 땅에 넘어졌다.흙투성이가 된 채로 집에 돌아온 그녀는 책상 밑에 몸을 숨겼다.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아래층의 부모님이 들을까 봐 소리를 내지 못한 채 손등에
유월영의 망연자실한 모습은 연재준조차 알아차릴 수 있었다.쉬는 시간, 그는 일부러 유월영이 있는 반을 지나가며 텀블러에 물을 담고 있던 유월영을 보고 이름을 불렀다.하지만 그녀는 마치 듣지 못한 듯 돌아보지 않았다.“...”연재준은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생각했다.‘현시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봐야 하나? 설령 죽었다고 해도 최소한 죽었다는 소식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그러나 현씨 가문의 입단속은 철저했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더구나 현시우와 연회 부인의 대화는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다만 현시우는 최근 병원에 드나들고 시골로 내려가는 등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분주하다는 소문만 들렸다.연재준은 손에 동전을 굴리며 고민했다.‘이 틈을 타서 슬쩍 끼어들어 볼까?’보름이 지나도 현시우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결국 유월영은 참지 못하고 생애 가장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그녀는 직접 현씨 가문을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유월영은 경비원에게 자신이 현시우의 학교 친구이며 그가 너무 오래 학교에 나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러 왔다고 말했다.경비원은 그녀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고하겠다고 했다.10분 후, 유월영은 등 뒤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월영아.”그녀가 돌아보자, 나온 사람은 바로 현시우였다.처음에는 기뻤지만 이내 화가 치밀어 올라 유월영은 달려가며 따졌다.“너 요즘 왜 그래? 왜 내 전화를 받지 않는 거야?”그녀는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휴대폰 부모님이 뺏어갔어? 아니면 벌이라도 받은 거야? 혹시 맞기라도 한 거야? 아픈 건 아니지? 얼굴빛이 안 좋아 보이는데 병원은 갔어?”“월영아.”현시우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깊게 꺼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그의 모습은 지치고 초췌해 보였다.불과 보름 만에 그는 한층 더 야위었고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듯 보였
현시우는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는 차분하면서도 냉정한 태도로 어머니를 추궁했다.“단순히 유용우를 봤다는 이유로 유월영이 그의 친여동생이라고 단정 짓는 건 말이 안 돼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러시는데요?”그가 아는 바로는 유월영의 집에는 세 자매가 있었다. 왜 꼭 유월영이어야 하는 걸까?“나이대가 맞지 않아서요?”그는 계속해서 반박했다.“다른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 유월영의 집은 부유한 가정이 아니에요. 자식을 여러 명 키우는 건 부담스럽고, 게다가 고씨 가문의 딸을 키우는 건 위험 부담도 크잖아요. 여동생이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 않나요?”이 모든 시간 동안 그들은 늘 긴장 속에서 살아왔다.연회 부인은 외출조차 하지 못했고, 유용우네 가까이 지내는 것도 두려워했다.그래서 유용우네 부부가 시내로 이사한 것도 몰랐고, 그들의 세부 사항도 알 수 없었다.현시우는 어머니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이유를 수십 가지나 가지고 있었다.연회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그러면 유전자 검사를 직접 해보렴.”“...”만약 그녀가 확신이 없다면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현시우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거미줄처럼 얽힌 핏줄은 그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연회 부인은 그가 이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그를 위로하려고 애썼다.“아마 너는 처음부터 네 감정을 잘못 알았던 것 같아. 너의 마음속에서 유월영에 대한 감정은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 어쩌면 혈연관계가 작용해서 너를 혼란스럽게 만든 걸지도 몰라.”“그렇지 않다면 너의 성격으로 그렇게 쉽게 누군가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네 주변에 훌륭하고 예쁜 여자애들이 많았잖아? 그런데 너는 그들에게 아무 감정도 없었잖아. 그런데 유월영을 알게 된 지 몇 달 만에 이렇게 깊이 좋아하게 된다니, 말이 안 되지 않니?”“그래서 내 생각엔 이건 사랑이 아니라 운명이 장난을 친 거야.
“손님, 이 케이크는 당일 제조된 거라 유통기한이 짧아요. 냉장고에 넣어도 최대 3일밖에 보관할 수 없으신데, 이렇게 많이 사가시면 다 드실 수 있으신가요?”유월영이 조심스레 물었다.연회 부인은 선글라스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일 제조된 거라면 학생이 직접 만든 거예요?”“제가 아니고 저희 가게에서 직접 만든 거예요. 한번 맛보신 후에 마음에 드시면 구매하셔도 돼요. 다만 가족 인원이 많지 않으시면 한 번에 다 사는 건 추천해 드리지 않아요.”유월영이 케이크 한 조각을 잘라 그녀에게 건넸다.“우리 집은 식구가 많아서 다 먹을 수 있어요.”연회 부인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학생, 교복을 보니 신주시 고등학교 학생인 것 같은데 우리 아들도 그 학교 다녀요.”유월영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아, 그러신가요.”“학생, 참 예쁘게 생겼네.”연회 부인은 그녀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고 유월영은 조금 쑥스러워하며 말했다.“아니에요. 손님께서 훨씬 멋지고 품격 있어 보이세요.”“말도 참 예쁘게 하네요.”연회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케이크 맛있네요. 이거 전부 살게요. 계산해 주세요.유월영은 계산하며 말했다.“총 3만 6백 원인데, 3만 원만 받을게요. 맛있으시면 또 오세요.”“그럼 그럴게요.”계산을 마친 연회 부인이 케이크 포장을 들려고 했지만 그녀의 네일아트를 본 유월영이 주저하며 물었다.“차로 오셨나요? 제가 차까지 들어다 드릴게요.”“그래요, 그러면 저야 고맙죠.”연회 부인은 그녀를 차로 데려갔고 유월영은 케이크를 차에 실은 후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연회 부인이 출발하려는 찰나 중년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 옆에 멈췄다.“아빠!”유월영이 그를 부르는 소리에 연회 부인은 본능적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유월영이 아버지라고 부르던 사람은 고해양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이었고 그녀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갑작스러운 만남에 연회 부인은 몸은 얼어붙었고 혼란에
“아니.”현시우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남자들끼리의 문제일 뿐이야.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유월영이 화를 내며 말했다.“별거 아니긴 개뿔!”현시우는 예상밖의 반응에 잠시 멍해졌다.유월영이 이렇게 거친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비록 심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위해 그랬다는 사실에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월영아, 욕은 하지 마.”“할 거야! 너도 싸움질을 했으면서 내가 욕하는 걸 뭐라고 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유월영은 그의 상처를 가까이서 살펴보며 점점 더 화가 났다.“도대체 너랑 싸운 사람이 누구야? 왜 싸운 건데?”현시우는 말하고 싶지 않아 아픈 팔다리를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월영아, 와서 안아줘.”“꿈 깨!”옆방에서 의무실 선생이 연재준의 얼굴에 멍이 든 곳에 약을 바르려고 했지만 그는 무표정하게 이를 피하며 말했다.“필요 없어요. 그냥 나가세요.”의무실 선생은 잠시 망설였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료 상자를 챙겨 방을 나갔다.두 소년의 부상은 비슷했다. 뼈나 근육에는 이상이 없었고 학교 보안요원이 빠르게 싸움을 말려 모두 표면적인 상처에 불과했다.방문이 닫히지 않았기 때문에 옆방에서 들리는 대화가 연재준의 귀에 고스란히 들려왔다.유월영이 현시우를 걱정하며 하는 말들이 하나하나 그의 귀에 들어왔다.연재준은 그 말을 들으며 살을 도려내는 고통이 있다면 이와 같을 거라고 느꼈다.학교는 싸움에 대해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고 다만 두 학생의 부모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다.연민철은 이미 아들 연재준을 신경 쓰지 않았고 반면 현시우의 가족은 이 소식에 크게 놀랐다.현시우는 어릴 때부터 감정 기복이 별로 없고 차분한 성격으로 한 번도 싸움을 하거나 심지어 다툰 적도 없었다.그런 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것도 학교 안에서 참지 못하고 싸움을 벌인 건지 현씨 가문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당시, 현시우의 어머니인 연회 부인은 현씨 가문에서 사모님으로 은둔하며 지냈다.하지
현시우가 유월영을 집까지 데려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내일 내가 대신 병가를 낼 테니까 너는 집에서 푹 쉬어. 책도 보지 말고 문제도 풀지 마.”유월영은 그의 강압적인 태도에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다.“괜찮아. 나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의사 말 못 들었어? 네가 과로로 쓰러진 거라고. 시간이 부족하면 중요하지 않은 일부터 줄여야 해. 월영아, 모든 걸 다 해내려고 하지 마. 그리고 모든 걸 완벽하게 하려고도 하지 마.”현시우는 그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유월영은 항상 모든 일을 포기하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집착과 강박은 결국 그녀를 지치게 만들고 말았다.사람의 몸은 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유월영은 신중히 고민한 끝에 어머니에게 댄스 수업을 그만두겠다고 말했고 학교의 댄스 동아리도 탈퇴하기로 결정했다.춤은 그녀에게 단순한 취미였지만 이제는 정상적인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었기에 잠시 내려놓는 것이 맞았다. 대학에 가거나 졸업 후 여유가 생기면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주말과 월요일까지 3일이 지나고 유월영은 학교로 돌아왔다. 몸 상태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감기도 거의 나아 약간의 콧물만 남아 있었다.유월영이 등교한 날, 연재준은 유월영의 교실 앞을 지나쳤다. 친구들과 웃으며 대화하는 그녀의 얼굴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병원에서 그는 원래 깨어난 유월영에게 잃어버린 옥불을 따질 계획이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온 전화로 인해 급히 돌아가야 했다. 부모님의 이혼 문제 논의에 꼭 참석해야 했던 것이다.그리고 익명의 영웅이 될 생각이 없었던 그는 방과 후 그녀를 찾아갈 계획이었다.연재준이 유월영의 반으로 향하던 중, 현시우와 마주쳤다. 연재준은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치려 했지만 현시우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그날 월영이를 병원으로 데려다줘서 고마워.”연재준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고맙다면 네가 아니라 본인이 와서 말해야지. 넌 대리인이야?”현시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담담히
운전기사는 연재준의 상태를 걱정하며 우산을 들어주었지만 연재준은 비에 젖은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그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고 병실에 도착했을 때 유월영은 링거를 다 맞고도 여전히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연재준은 침대 옆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그의 몸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한참을 서 있던 그는 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유월영, 이제 너는 나한테 빚졌어.”그녀 때문에 잃어버린 것은 그녀가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이었다.얼마 후, 유월영이 천천히 눈을 떴다. 침대 앞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물웅덩이와 함께 현시우가 앉아 있었다.“...”유월영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병원이었지만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이 쉬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목 아파? 편도선염이야. 당분간 말하지 마.”현시우는 탁자에 있던 따뜻한 물을 들고 한 팔로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을 한 모금씩 먹이며 부드럽게 상황을 설명했다.“너 열이 나서 길에서 쓰러졌어. 다행히 누군가 널 병원으로 데려왔어.”“기절했다고?”유월영은 놀란 눈으로 현시우를 바라봤다. 폭우 속에서 길을 헤매던 기억은 있었지만 쓰러졌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따뜻한 물이 목을 적시니 조금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목이 아팠다.유월영이 억지로 몇 마디를 이어갔다.“누가...날 병원에 데려왔어?”현시우는 물컵을 내려놓고 그녀가 좀 더 편히 누울 수 있도록 베개를 정리했다.“간호사 말로는 너랑 같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었는데 이름을 남기지 않았대.”“시험 끝나고 널 찾으러 갔는데 네 짝꿍이 네가 집에 갔다고 했어. 근데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걱정돼서 네 집으로 갔거든. 근데 네가 없더라.”유월영의 가족조차 그녀가 어디 갔는지 몰랐고 현시우가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위험에 빠진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가족들과 함께 학교에서 집까지의 길을 수색했다. 그러다 편
연재준의 화난 표정은 유월영을 바라보며 점점 누그러졌다.그녀는 너무 말랐고 얼굴이 창백했다.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으며 온몸이 빗물로 흥건해져 안쓰럽기 그지없었다.게다가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건 드문 일이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수건을 들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과 목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다 부드러운 피부에 손이 닿자 순간적으로 손을 홱 뒤로 뺐다.소년의 얼굴에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귓불은 점점 붉어졌다.연재준은 숨을 멈추고 다시 유월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고 그는 그제야 살짝 안도했다.그녀가 자신을 기회를 노리는 이상한 변태라고 생각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연재준도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다.지난 18년간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던 자신이 왜 교내 축제에서 춤추는 그녀를 보고 이렇게 빠져들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유월영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너 그렇게 예쁘지도 않아. 사람 보는 눈도 별로고.”“왜 하필 현시우 같은 놈을 좋아하는 거야? 사람들은 항상 나랑 현시우를 비교하잖아. 그러니 너도 내 이름을 들어봤을 텐데...내가 너 대신 농구공도 막아줬고 도서관에서 햇빛도 가려줬잖아. 다 잊은 거야?”그는 자신의 기억을 곱씹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우리 함께 변태 선생을 잡은 적도 있잖아.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거지...왜 한 번도 날 찾지 않았어?”“내가 너 앞을 그렇게 여러 번 지나갔는데 넌 왜 나한테 아는 척도 안 했어? 현시우가 나랑 친해지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거야? 너 그렇게 말을 잘 듣는 아이였어?”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중얼거렸다.“나도 나름 괜찮게 생겼잖아. 남자 친구를 바꿔보는 게 어때? 내가 현시우보다 너한테 더 잘해줄 자신 있는데. 유월영, 내 말 들려?”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그는 이렇게 많은 말을 했지만 유월영은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연재준은 그녀가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
유월영은 줄곧 모범생이었다. 지각이나 조퇴는커녕 항상 성적도 우수했기에 선생님들은 항상 그녀를 신뢰했다. 그래서 그녀가 조퇴를 요청하자 선생님은 별다른 질문 없이 허락해 주었다.다만 유월영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자 선생님은 부모님께 연락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유월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그녀는 어머니가 자전거를 탈 줄 모르고 아버지는 성격이 급했기에 아버지와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게다가 선생님은 그녀와 현시우가 가까운 사이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사적인 문제에 간섭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이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발언권이 크지 않았다.선생님은 현시우가 차량을 보내줄 것이라고 짐작하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조퇴 허가서를 작성해 주었다.“비가 많이 올 수도 있으니 밖에 오래 머물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렴. 내일도 몸이 안 좋으면 꼭 병가를 내고 쉬어.”“감사합니다, 선생님.”갑작스러운 폭우가 내렸지만 유월영은 현시우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그녀는 어젯밤 이미 그가 오늘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고작 20분 거리인데 그를 찾는다 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비가 온다고 해도 우산을 가지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 여겼다.그러나 유월영은 집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힘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갑작스러운 폭우가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쏟아졌고 강풍과 빗물 때문에 숨쉬기조차 어려웠다.유월영은 허둥지둥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지만 강한 바람에 우산이 뒤집히고 순식간에 옷이 젖어버렸다.앞이 점점 보이지 않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휘청였다.그때 멀리서 날카로운 경적이 들렸다.빠르게 달려오는 트럭을 발견한 유월영이 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발밑에서 미끄러운 무언가를 밟아 넘어질 뻔했다.그 순간 강한 손길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그 사람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유월영은 그의 가슴에 부딪히며 싸한 솔잎 향이 풍겨왔다.본능적으로 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