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항상 이런 식일까?매번 그녀는 가장 비참한 모습을 그에게 보였다. 마치 그의 그림자를 벗어나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처럼.연재준은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을 덮었다.남자의 외투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향기에 유월영의 의식은 점점 흐릿해졌다.연재준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곧장 왕 대표에게로 다가갔다.왕덕호는 욕설을 퍼부으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누구야! 누가 감히 내 일을 방해하는 거야? 죽고 싶어? 악!”옆에 있던 노현재가 다리를 들어 왕덕호의 복부를 걷어차며 말했다.“건방지게 누구 안전이라고 욕설이야? 죽고 싶어?”왕덕호는 싸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노현재와 시선이 마주치자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노… 노 사장….”연재준은 담배를 입에 물고 왕덕호에게로 다가갔다.그리고 담뱃재를 왕덕호의 얼굴에 털어냈다.그를 알아본 왕덕호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연 대표님이 왜 여기에….”노현재는 발끝으로 왕덕호의 얼굴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내 가게에서 술을 마시면서 우리 재준이 여자를 건드려 놓고 왜 여기 있냐고 묻는 건 너무 멍청한 질문 아닌가?”왕덕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아… 아닙니다! 연 대표님, 제 말씀 한 번만 들어보세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저도 김우희 그 여자한테 속아서 왔단 말입니다!”“마침 안성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만났는데 김우희가 젊은 여자랑 놀아보지 않겠냐고 해서 나온 거예요.”“유… 유 비서가 해운에서 퇴사했다고 더 이상 해운의 직원이 아니라고 그 여자가 그랬단 말입니다. 그래서 좀 데리고 놀아도 아무 문제 없다고 하길래 한 순간 정신이 나가서 그러겠다고 했어요. 유 비서가 대표님 사람인 줄 알았으면 절대 안 건드렸을 겁니다!”연재준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래서 김우희 그 여자는 지금 어디 있지?”왕 대표는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아까까지도 여기 있었는데….”“도망갔다는 얘기네. 그럼 왕 대표 한 사람 말만 듣고 우리가 그걸 어떻게 믿어? 증거 있어?”노현재가
연재준은 유월영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손을 내밀었다.“일어나.”유월영은 그가 내민 손을 잡지 않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아 다시 주저앉았다.연재준은 거칠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잡아서 일으켰다. 유월영은 일어서자마자 그의 어깨를 밀치며 차갑게 말했다.“연재준,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최악이었어!”연재준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상상력이 너무 풍부한 것도 병이야.”그는 이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었다.“끼리끼리 모인다고 전에는 내가 너무 어려서 사람을 잘못 봤어.”“당신 정말 치졸한 거 알아? 대기업에 압력을 넣어 날 취직 못하게 하고, 중소기업 시켜서 날 면접 보러 오라고 뺑뺑이 돌게 만들고, 백유진이랑 다시 만나면서도 날 놓아줄 생각이 없잖아. 당신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으면 내가 이런 자리에 나올 일도 없었어!”연재준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네가 먼저 날 배신했어.”유월영이 소리쳤다.“내가 언제 배신했어?”“하! 발뺌하는 거야?”연재준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그녀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섰다. 남자에게서 풍기는 싸늘한 기운에 유월영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3년 전에 널 살려준 사람이 누구지? 갈 곳도 없는 너를 거두어 주고 일자리까지 줬어. 내 여자가 되겠다고 한 사람도 너야. 평생 배신하지 않고 내 옆을 지키겠다고 말한 사람도 너야. 우리야 말로 진짜 가족이라고 평생 함께하자고 했잖아!”“그만!”유월영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연재준이 싸늘하게 말했다.“날 먼저 버린 사람도 너야.”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지금도 그에게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생생했다.그날 폭우가 내리던 밤에 연재준은 건달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를 구해주고 차에 태웠다. 지금도 그 따뜻한 온도를 잊을 수 없었다.연재준은 홀딱 젖은 그녀를 보고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에 덮어주었다.“이제 괜찮을 거야. 아무도 너 못 건드려.”그는 떨고 있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따뜻한 품으로 그녀
유월영은 어쩔 수 없이 임영웅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려줬다. 임영웅은 전화를 끊자마자 차를 끌고 달려왔다.조서희는 그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그렇게 임영웅이 조서희를 데려가고 유월영도 집까지 갈 힘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서덕궁 맞은편에 있는 호텔로 들어갔다.그녀가 카운터로 가서 입주 수속을 마칠 때, 구석진 곳에서 누군가가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방으로 간 유월영은 씻지도 못하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취직이 실패하고 엄마는 중병에, 일주일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면접을 보다 보니 그녀는 많이 지친 상태였다.잠이라도 자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무거운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처럼 갑갑하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녀는 애써 불안을 잠재웠다. 내일은 엄마가 입원하는 날이니 푹 쉬어둬야 했다.그렇게 힘들게 잠이 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이 울렸다.요란한 핸드폰 벨소리에 그녀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너무 급하게 일어나서인지 눈앞이 어지러웠다.그녀는 다급히 핸드폰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발신자는 그녀의 아버지였다.“아빠, 무슨 일이야?”유월영이 물었다.수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월영아, 우리 병원에 도착했는데 이 사람들이 우리한테 돌아가래. 기증자의 심장을 다른 환자가 이식 받을 거라고 수술을 못한대. 월영아, 이를 어쩌면 좋니!”유월영은 순식간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녀는 곧 간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급한 마음에 그녀는 벽을 짚고 힘겹게 다시 몸을 일으켰다.거리로 나온 유월영은 곧바로 택시를 잡았다.“제일 병원으로 가주세요. 빨리요!”병원에 도착했더니 진료실 앞에서 아버지가 의사와 다투고 있었다.그는 손에 과도를 들고 간호사 한 명을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어제 수술할 수 있다고 당신들이 먼저 연락했잖아! 그런데 오늘 갑자기 수술 일정이
유월영은 주먹을 꽉 쥐고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말했다.“아빠, 칼 내려놔요. 일단 칼부터 내려놔요.”유현석도 주변을 포위한 형사들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나도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어서 그런 건데… 월영아, 나 진짜 사람을 죽일 마음은 없었어….”“그 칼 어디서 났어?”유월영이 울며 물었다.“복도에서 한참 기다렸는데 의사가 오지 않는 거야. 그래서 네 엄마 사과 좀 먹인다고 사과를 깎고 있었어. 그런데 간호사가 오더니 수술이 취소됐다고 돌아가라는 거야. 기증자 심장은 다른 사람한테 넘어갔다고.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따지니까 저쪽에서도 자꾸 얼버무리더라고. 그래서 순간 이성이 날아가서 그만….”유월영은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아빠, 칼 내려놔. 그리고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유현석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부들부들 떨며 간호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간호사는 바로 도망가고 형사들이 달려들어 유현석을 제압했다. 유월영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형사들은 유현석의 손목에 수갑을 채워 끌고 갔다. 유월영이 쫓아가려고 하는데 형사 한 명이 그녀를 불러세웠다.“가해자 가족분 되시죠?”유월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저희랑 같이 가시죠.”유월영은 다른 형사와 경찰차를 타고 경찰서로 갔다.하지만 아버지를 만날 수는 없었다. 참고인 조사를 한다고 형사들이 그녀를 조사실로 불렀다.그녀는 형사들의 질문에 최선을 다해 객관적으로 대답했다.“우리 아빠 나쁜 사람 아니에요. 일부러 난동을 부린 건 아니고 엄마 상태가 너무 걱정돼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것 같아요. 학교도 안 나온 분이라 선생님이 설명해 준 복잡한 절차에 대해서 잘 몰라서 오해한 것 같아요. 그 간호사분께는 적절한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여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저희도 병원 관계자에게 상세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유현석 씨의 마음도 이해는 해요. 하지만 병원 의료진을 칼 들고
한 시간 뒤, 회의가 끝나 연재준은 사무실로 돌아갔다.조 비서가 그의 사무실로 찾아왔다.“대표님, 백유진 씨 아버님은 무사히 수술실로 들어가셨습니다. 아직 수술이 진행 중이지만 순조롭게 끝날 것 같아요.”연재준이 오만상을 쓰고 말했다.“유월영한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알아봐.”조 비서는 움찔했지만 이내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경찰서를 나온 유월영은 봉현군으로 돌아갔다.사고가 날 조짐이 보이자 형부는 바로 이영화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안 그래도 상태가 안 좋은데 그런 상황을 눈앞에서 목격하면 병세만 악화될 것 같아서였다.유월영이 집에 들어서자 큰언니 유은영이 다급히 물었다.“월영아, 어떻게 됐어?”“구속됐어.”유은영이 털썩 의자에 주저앉으며 물었다.“그… 그럼 감옥에 가야 하는 거야?”유월영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아마 그럴지도.”유은영이 자책하며 말했다.“다 내 잘못이야. 아빠 성격 알면서 내가 거기 남아 있어야 했는데!”“언지 잘못 아니니까 이상한 생각하지 마. 내가 변호사를 알아볼게. 무슨 방법이 있겠지.”유월영은 물컵에 물을 따라 마신 뒤, 화제를 돌렸다.“엄마는 좀 어때?”유은영은 침실을 가리키며 말했다.“많이 걱정하셨지. 그래도 발작은 안 하셨어. 지금은 침대에서 쉬고 계셔.”유월영은 엄마를 보러 침실로 들어갔다.그녀를 보자 엄마의 두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월영아, 네 아빠는….”유월영은 얼른 다가가서 엄마를 다시 눕혔다.“아빠 걱정은 하지 마. 내가 해결할게. 나 믿어줘.”이영화가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차라리 돌아오지 말지 그랬어. 집이랑 연을 끊겠다고 나갔으면 끝까지 독하게 뒤돌아보지 말았어야지. 우리가 결국 또 네 발목을 잡았구나.”“그런 말을 왜 해? 하늘이 무너져도 벗어날 구멍이 있겠지.”유월영은 담담히 말했다.“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안 되면 어쩔 수 없어. 잘못을 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뭐. 아빠 들어갔다 나오면 우리가 또 반갑게 맞아주면 돼.”이
유월영은 감정을 추스르고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내 괜찮은 변호사나 로펌을 아는지 물어봤다.다행히 해운에서 일하면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에 어려울 때 돕겠다고 나설 지인은 많았다.한 친구가 그녀에게 승형 로펌을 추천했다.“이승연 변호사, 승률이 꽤 높은 실력 있는 변호사야. 형사 사건이든 민사 소송이든 패소를 거의 하지 않아. 지난 주에도 비슷한 사건을 맡아서 담당했는데 형이 가장 낮게 나왔대.”유월영은 그 친구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연락처를 받았다.그날 밤, 그녀는 부모님의 집에서 밤을 보냈다. 그녀가 원래 쓰던 방에 가서 누웠더니 다섯 명이 같이 찍은 가족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유월영은 밤잠을 설치다가 아침 일찍 큰언니에게 엄마를 맡기고 밖으로 나왔다.떠나기 전 그녀는 어제 엄마와 했던 이야기를 큰언니에게 말하며 다른 생각하지 않게 좀 더 신경 쓰라고 부탁했다.큰언니는 엄마 옆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고 장담했다.유월영은 그 길로 택시를 타고 승형 로펌으로 왔다.친구가 미리 연락을 주었기에 이승연 변호사를 바로 만날 수 있었다.“이 변호사님은 지금 의뢰인을 만나고 계시니까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감사합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 문이 열리고 30대 여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반듯한 검은색 정장에 깔끔하게 머리를 위로 묶은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였다.엄청난 미인이었지만 왠지 믿음직하고 지적인 인상마저 주었다.유월영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인사를 건넸다.“이 변호사님이시죠? 유월영이라고 합니다. 신가희가 소개해서 왔어요.”이승연은 그녀와 악수를 나눈 뒤, 자리를 권했다.“이승연입니다. 상황은 대충 가희 씨한테서 전해 들었어요. 자세한 상황은 지금부터 천천히 얘기해 봐요.”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고 유월영도 아는 대로 상황을 다시 진술했다.이승연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런 감정표현도 하지 않았다.이야기를 다 들은 뒤에 그녀가 말했다.“양형의 기준에 범행의 동기나 가해자의 어려운 사정도 많
“유 비서?”이혁재가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연재준이 유월영 취직을 방해한 것 때문에 변호사 상담을 받으러 온 줄 알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유 비서도 가만 보면 참 고집 있어. 그냥 재준이 찾아가서 잘못했다고 다시 받아달라고 한마디만 하면 끝나는 걸 일을 왜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어?”유월영은 더 이상 연재준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승연과 간단히 작별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이승연도 이혁재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뒤돌아섰다.이혁재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남자친구가 왔는데 인사도 없어?”이승연이 잠깐 움찔하더니 말했다.“나 지금 일하는 중이야. 의뢰인 만나고 올 테니까 기다려.”이혁재가 손을 풀며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래. 바쁜 사람인데 내가 양보해야지 어쩌겠어.”이승연이 의뢰인 상담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이혁재는 안내데스크 직원과 시시덕거리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여직원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올랐다.이승연이 담담하게 말했다.“이혁재, 들어와.”이혁재가 그녀를 힐끗 보고는 장난스럽게 말했다.“알았어, 고모.”그 말을 끝으로 그는 이승연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안내데스크 여직원이 놀란 표정으로 수군거렸다.“저 사람 이 변호사님 조카였어?”그런데 그들이 조카라고 말했던 남자는 사무실에 들어간 뒤로 맹수로 변하더니 이승연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그가 거침없이 들어오자 이승연은 가쁜 숨을 헐떡이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화장 다 지워져.”이혁재는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맞대고 장난스럽게 말했다.“괜찮아. 립스틱 먹은 게 한두 번도 아니고.”소문난 바람둥이인 이혁재답게 그의 손은 어느새 이승연의 민감한 곳을 지분거리고 있었다.이승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단호한 얼굴로 그를 밀어냈다.이혁재는 약간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그녀를 놓아주고는 소파로 가서 그녀의 물컵에 물을 받아 마셨다.이승연은 옷매무시를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로펌을 나온 이혁재는 차에 올라 연재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재준아, 나 로펌에 왔다가 누구 만났는지 알아?”“누구?”“나 유 비서 만났어.”이혁재가 재미 있다는 듯이 피식거렸다.“무슨 일로 이승연한테 상담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너 계속 남의 앞길 방해하다가 소송 당할지도 몰라. 조심해.”연재준은 싸늘한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고개를 기댔다.이혁재가 계속해서 떠들었다.“다른 변호사면 모르겠는데 이승연 그 여자면 골치 아파질 거야.”연재준은 대답하기도 귀찮아서 듣고만 있었다.이혁재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도 내 친구 일인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귀찮아지면 얘기해. 내가 도와줄게.”연재준이 화제를 돌렸다.“그래서 너희 결혼식은 언제야?”“우리 엄마 성격이 급하셔. 다음 달 5일에 할 거야. 사실 신랑 측 들러리를 너한테 부탁하려 했는데 우리 엄마가 너 모태 솔로라고 마음에 안 든대. 그래서 지욱이를 추천하더라고.”이혁재가 감탄하듯 말을 이었다.“지욱이 걔는 고등학교 때 첫사랑이랑 지금까지 열애 중이잖아. 10년이나 장기 연애를 했는데도 안 헤어진 게 대단해.”그렇게 잡다한 얘기를 나누다가 그들은 전화를 끊었다. 연재준은 조 비서한테 전해 들은 말을 떠올리고 회사를 나섰다.한편, 유월영은 백화점으로 가서 과일바구니와 보건품을 사가지고 병원으로 왔다.그녀는 안내 데스크를 찾아 어제 다친 간호사가 있는 병실을 물었다.지나가던 간호가가 그녀를 알아보고 물었다.“어제 난동 부린 사람 가족이죠?”유월영은 잠깐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말했다.“피해자분께 사과 드리고 싶어서 들렀습니다. 혹시 그 간호사분이 어느 병실에 입원해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진심으로 사과하러 왔는지 형량 낮추려고 수작을 부리는 건지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당신 같은 사람 많이 봤으니까 이만 돌아가세요!”그 간호사가 싸늘하게 말했다.유월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외과 병동으로 찾아갔다.칼끝에 목을 다쳤으니 아마 외과 병동에 입원했을 거라는 생각에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