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펌을 나온 이혁재는 차에 올라 연재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재준아, 나 로펌에 왔다가 누구 만났는지 알아?”“누구?”“나 유 비서 만났어.”이혁재가 재미 있다는 듯이 피식거렸다.“무슨 일로 이승연한테 상담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너 계속 남의 앞길 방해하다가 소송 당할지도 몰라. 조심해.”연재준은 싸늘한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고개를 기댔다.이혁재가 계속해서 떠들었다.“다른 변호사면 모르겠는데 이승연 그 여자면 골치 아파질 거야.”연재준은 대답하기도 귀찮아서 듣고만 있었다.이혁재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도 내 친구 일인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귀찮아지면 얘기해. 내가 도와줄게.”연재준이 화제를 돌렸다.“그래서 너희 결혼식은 언제야?”“우리 엄마 성격이 급하셔. 다음 달 5일에 할 거야. 사실 신랑 측 들러리를 너한테 부탁하려 했는데 우리 엄마가 너 모태 솔로라고 마음에 안 든대. 그래서 지욱이를 추천하더라고.”이혁재가 감탄하듯 말을 이었다.“지욱이 걔는 고등학교 때 첫사랑이랑 지금까지 열애 중이잖아. 10년이나 장기 연애를 했는데도 안 헤어진 게 대단해.”그렇게 잡다한 얘기를 나누다가 그들은 전화를 끊었다. 연재준은 조 비서한테 전해 들은 말을 떠올리고 회사를 나섰다.한편, 유월영은 백화점으로 가서 과일바구니와 보건품을 사가지고 병원으로 왔다.그녀는 안내 데스크를 찾아 어제 다친 간호사가 있는 병실을 물었다.지나가던 간호가가 그녀를 알아보고 물었다.“어제 난동 부린 사람 가족이죠?”유월영은 잠깐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말했다.“피해자분께 사과 드리고 싶어서 들렀습니다. 혹시 그 간호사분이 어느 병실에 입원해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진심으로 사과하러 왔는지 형량 낮추려고 수작을 부리는 건지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당신 같은 사람 많이 봤으니까 이만 돌아가세요!”그 간호사가 싸늘하게 말했다.유월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외과 병동으로 찾아갔다.칼끝에 목을 다쳤으니 아마 외과 병동에 입원했을 거라는 생각에
그는 바닥에 뒹구는 과일들을 주워 바구니에 담았다.유월영도 바닥에 쭈그려 앉아 쏟아진 과일들을 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안내 데스크로 찾아가서 나중에 강 간호사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그쪽에서 거부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어쨌든 성의 표시는 꼭 필요했다.유월영은 신연우와 함께 입원 병동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탔다.신연우가 그녀에게 말했다.“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저 괜찮아요. 그분도 딸을 생각하는 마음에 화가 나서 그런 거잖아요. 이해해요. 저였어도 아마 화를 참지 못했을 거예요.”신연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피해자 가족들을 더 이상 찾아가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그래도 만나야죠. 그쪽에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합의서를 받아야 아빠가 재판 때 형량을 적게 받을 수 있어요.”엘리베이터가 일층에 도착하고 둘은 함께 밖으로 나갔다.유월영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힘들 거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여러 번 찾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제 진심이 전달되지 않을까요? 그쪽에서 용서만 해주면 적절한 보상이나 탄원서에 대해 얘기를 꺼내기도 수월해지겠죠.”신연우는 그녀의 처지가 안타까워서 표정을 풀 수가 없었다.“그래서 이제는 뭐 할 거예요?”“병원 관계자를 만나서 병원 측 합의서도 받아내야죠.”신연우가 말했다.“워낙 여론이 좋지 않아서 그쪽에서 만나주지 않을 거예요.”유월영도 그 말에 동의했다.“알아요. 그래도 친구 중에 병원 관계자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만나게 해준다고 했어요. 일단 만나서 얘기는 들어보려고요.”그들은 병원 후문에서 조용히 만나기로 했다.그 병원 관계자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다가와서 말했다.“이미 사건 동영상이 인터넷에 쫙 퍼진 상황이라 병원 측도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이에요. 지금은 뭐라고 확답을 드릴 수 없어요.”그 말인 즉, 여론이 유현석에게 우호적으로 흘러가면 합의를 해줄 의향이 있지만 여론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면 단호하게 책임을 묻겠다는 의미였다.유월영이
그녀는 생각도 안 하고 바로 거절했다.“필요 없어.”백유진은 고집스럽게 우산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 말했다.“그래도 쓰고 가요. 이런 날씨에 비까지 맞으면 감기 걸려요.”유월영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백유진을 빤히 바라봤다.백유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감기 몸살 쉽게 보다가 큰일 나요. 우리 아빠도 처음에는 그냥 감기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하도 안 나아서 병원에 갔다가 심장병 진단을 받았잖아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다행히 위급한 상황에서 심장 이식을 받아서 망정이지 다시는 아빠를 못 보는 줄 알았어요.”유월영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심장 이식이라니?”백유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말 그대로예요. 위급한 환자에게 건강한 심장을 이식하는 수술이죠. 기증자가 안 나타나서 고생한다던데 아빠는 행운이었어요. 어제 금방 수술을 받았거든요. 연 대표님이 최고의 흉부외과 의사를 추천해 줘서 아빠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요.”‘그러니까 엄마보다 위급해서 먼저 수술 들어갔다던 환자가 백유진 아버지였어?’유월영은 갑자기 온몸에 피가 얼어붙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게 과연 우연일까?의심은 했지만 그래도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병원 관계자의 말을 들어 보면 그 환자는 이식을 못 받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숨을 마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해하려고 했다.하지만 그 관계자 말이 과연 사실일까?아니면 단지 환자가 백유진 아버지라서 연재준의 입김에 의해 수술 대상자가 바뀐 것일까?연재준은 자신이 이 일과 관련이 없다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이미 싹 트기 시작한 의심의 씨앗은 분노가 되어 활활 타올랐다.백유진이 계속해서 말했다.“그 얘기도 들었어요. 어제 수술 취소된 환자 가족이 병원 관계자들에게 난동을 부렸다면서요? 좀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모든 게 다 운명이고 순서가 있는 게 아니겠어요? 무조건 떼 쓰고 강요한다고 될 일은 아닌 것 같아요.”모든 걸 다 앗아간 주제에 어떻게 저 순진한 얼굴로 저런 뻔뻔한 말을 할 수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유월영이 조서희의 입을 틀어막았다.“서희야, 그만!”뒤돌아선 연재준이 유월영을 빤히 쳐다보았다.마침 차를 입구에 대고 들어오던 신연우도 그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연재준은 백유진을 놓아주고 유월영에게 다가갔다. 백유진도 넋을 잃은 표정으로 유월영을 바라봤다.“아이를 유산했었어?”아무런 감정기복이 느껴지지 않는 무덤덤한 말투였다.“그게 언제야?”유월영은 울컥하며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연재준은 최근 몇 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불신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거짓말도 정도가 있어야지. 유월영 네가 임신하고 유산한 걸 내가 왜 몰랐지?”유월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마음대로 생각하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조서희의 손을 잡고 뒤돌아섰다.연재준이 손을 뻗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말은 똑바로 하고 가. 네 친구도 직장을 잃게 하고 싶어?”유월영이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고 조서희는 굉장히 불쾌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난 거짓말한 적 없어! 나한테 증거가 있어! 연재준 씨 당신이 저 백여시랑 희희낙낙거리고 다닐 때 우리 월영이는 홀로 병원에서 수술을 견뎌야 했다고. 그리고 몸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당신 때문에 지방으로 쫓겨나야 했잖아. 지금 월영이 건강이 나빠진 거, 그거 다 당신 탓이야!”“당신은 항상 월영이가 당신한테 빚을 졌다고 생각하지? 아니, 월영이는 빚진 거 없어! 처음부터 당신이 월영이한테 항상 빚을 지고 있었던 거야!”연재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서희한테 말했다.“증거 가져와.”“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아. 집에 있어.”연재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집으로 가서 확인할 거야. 거짓말인 거 밝혀질 시에 두고 봐.”유월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고 그에게 말했다.“연재준 씨, 나한테는 아무렇게 해도 상관없지만 내 엄마, 그리고 내 친구까지 건드리면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지만 연재준은 단호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내가
결국 조서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방에서 나와 더듬거리며 말했다.“그게… 분명 진단서를 노트에 끼워 보관했는데… 그 노트를 찾지 못하겠어.”너무 황당한 변명이라 조서희 본인도 헛웃음이 나왔다.신연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유월영을 바라봤다. 유월영은 별다른 반응 없이 아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연재준도 마찬가지였다. 조서희는 조급한 마음에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유월영에게 말했다.“월영아, 나한테 있던 파란색 노트 봤어? 표지에 내가 이름을 써놨다고 네가 나 유치하다고 놀렸잖아. 기억 안 나?”유월영은 그 노트를 기억하고 있었다.하지만 둘은 각자 방을 쓰고 있었고 평소에 조서희의 방에 놀러 가는 일도 적었기에 노트가 어디에 있는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연재준의 등 뒤에 숨어 있던 백유진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증거가 없다는 얘기 아닌가요?”그 말 한마디에 거실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다.조서희는 자신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유월영은 더 이상 이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처음부터 연재준은 임신했다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조서희가 증거를 내놓지 못했으니 그에게 확신만 심어준 꼴이었다. 아마 그는 그녀와 조서희가 짜고 백유진에게 폭력을 가한 응징을 피해가기 위해 거짓말을 꾸며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조서희가 갑자기 무릎을 탁 치며 소리쳤다.“나 기억 났어! 그날 밤에 고객사 직원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방안을 수정해 다라고 해서 급하게 그 노트 들고 회사에 간 적 있어. 노트 아직 회사에 있을 거야. 아마 월영이 네 진단서도 거기에….”하지만 점점 말할수록 그녀는 확신이 없어졌다.회사에서 그 노트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다른 사람의 손도 거쳤으니 그 찢어진 진단서가 무사히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회사, 우리 회사로 가볼래?”연재준이 싸늘하게 말했다.“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나한테 그 따위 거짓말을 지껄이는 거지?”고저 없는 목소리였지만 그럴수록 더 위험하다는 것을 유월영도,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그녀에게는 이제 보살펴야 할 부모님이 있었다.“당신이 우리 엄마 심장을 빼앗기 때문에 우리 엄마는 새 삶을 얻을 기회를 놓쳤어요. 그래서 난 엄마를 잃게 될지도 모르는데 약간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여기서 그만하는 게 낫지 않나요? 나를 벼랑 끝까지 몰아세워서 연재준 씨에게 좋은 점이 뭐가 있나요?”“하, 사실인 것처럼 말하네.”연재준이 비웃듯이 말했다.“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지.”사실 유월영도 나쁜 쪽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당사자인 백유진의 입에서 그 심장이 백유진 아빠한테 갔다는 것을 들었는데 어떻게 이 일을 이해해야 할까?신연우가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꽉 잡아주며 말했다.“저한테 유월영 씨가 낙태 수술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사람들의 시선이 신연우에게 쏠렸다.신연우가 말했다.“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맥을 짚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신 교수가 진맥을?”연재준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신연우를 노려봤다.그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것도 의심스럽고 또 그가 유월영을 감싸고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신연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형님이 유명 한의사 신현준 박사님이십니다. 연 대표님도 아마 들어보셨을 테죠. 진맥은 형님한테 배웠습니다. 당시 형님은 제가 한의사를 해도 된다고 칭찬도 하셨고요. 비록 한의사로서 일한 경험은 없지만 환자가 낙태 수술을 했는지 안 했는지 정도는 쉽게 분간할 수 있습니다.”연재준의 시선이 유월영의 손목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 닿았다. 그는 말없이 신연우를 노려보기만 했다.신연우가 유월영에게 말했다.“나 믿죠?”유월영은 긴 한숨을 쉬고는 소파에 앉았다.신연우는 그녀의 손목에 손을 가져가고 한참을 조용히 진맥에 집중했다.“어쩐지 오늘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요 며칠 기침을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나요?”조서희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그런 것도 진맥으로 다 나와요? 월영이가 며칠 전에 지방에 면접
“한의학을 못 믿어요?”신연우가 눈썹을 꿈틀하며 되물었다.“서의학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때 조상님들은 한의학으로 환자를 치료했다고요.”“믿어요. 그만큼 깊은 학문이라는 것도 알고요. 단지 전공도 아닌 신 교수님이 굉장히 한의학에 조예가 깊으신 것 같아서 물어봤어요.”맥박의 신호로 그녀의 전반적인 몸 상태를 체크하는 건 천재가 아니고서는 수십 년 한의학에 종사한 의사들만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신연우는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신연우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범히 인정했다.“맞아요. 사실 진맥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어요.”유월영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거짓말을 하셨군요.”신연우가 그녀를 빤히 보며 말했다.“네. 난 월영 씨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었거든요.”유월영의 눈썹이 저도 모르게 꿈틀했다.따지고 보면 알고 지낸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사람도 이렇게까지 자신을 믿어주고 도와주려 하는데 대체 연재준은 왜 그러는 걸까?분명히 가능성이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연재준은 그녀가 위기를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했다고 단언했다.유월영은 우울한 마음에 신연우의 손에서 맥주캔을 빼앗았다.신연우가 손을 뻗자 그녀는 얼른 몸을 돌려 피하며 말했다.“지금은 술을 마시고 싶네요. 신 교수님도 같이 마셔요.”신연우는 안 된다고 하고 싶었지만 극도로 우울해 보이는 유월영의 눈을 보고 차마 거절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그녀가 지친 눈으로 신연우를 바라보며 말했다.“신 교수님도 의사나 다름없잖아요. 그럼 진짜 내가 쓰러져도 옆에 응급 조치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있는 거네요.”이런 상황에서 농담이라니! 신연우는 헛웃음이 나왔다.“세 캔만 마시는 거에요.”둘은 베란다로 가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애초에 유월영과 조서희가 이 오피스텔을 선택한 이유도 뷰가 좋은 베란다 때문이었다.둘은 베란다에 있는 의자에 마주 앉아 캔맥주를 땄다.유월영은 급하게 마시지는 않았지만 한 모금, 한 모금 계속해서 말없이 술만 마
눈물은 소리 없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누가 먼저 손을 뻗었는지도 모르게 유월영은 신연우의 품에 고개를 기대고 눈물을 쏟고 있었다.남자의 반듯한 셔츠가 어느새 구겨지고 눈물에 젖었다.신연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처음 만났을 때도 울어서 셔츠를 적시더니, 월영 씨 나한테 셔츠 하나 더 물어줘야겠네요.”유월영이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신연우에게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연재준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연재준은 가까이 있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모습은 애처로우면서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신연우가 신사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그가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남자를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건 안 좋은 습관이에요. 키스하고 싶어지잖아요.”유월영은 들었는지 말았는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한 번만 비겁해지기로 마음먹은 신연우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하지만 안경이 먼저 그녀의 코끝에 닫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안경을 벗었다.남자의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유월영이 눈을 감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연재준 씨, 만약 그때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이미 취해버린 그녀는 자신이 뭘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신연우가 뒤로 물러서자 유월영은 그대로 그의 품에 무너졌다.그는 바닥에 가득 널브러진 맥주캔을 바라보았다.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이 정도로 마셔댔으니 취할 수밖에 없었다.신연우는 고개를 흔들고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자요, 월영 씨. 앞으로는 내가 지켜줄게요.”한편, 연재준은 백유진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상처를 다시 소독했다.가벼운 상처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상처가 깊은 것도 아니라서 며칠 약만 발라주면 나을 거라고 의사가 말했다.의사는 바르는 약과 항생제를 처방해 주고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백유진은 상처가 남을까 봐 발을 동
현시우는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그런 거 아니야.”“그럼 뭐야?”유월영이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현시우, 무슨 일이 있든 나한테 말해줘. 너도 그랬잖아 여자친구는 이런 순간에 필요한 존재라고. 내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들어줄 수는 있어. 고민은 혼자 끌어안고 있는 것보다 말로 털어놓는 게 훨씬 나아.”“물론, 네가 정말 혼자 있고 싶다면 내가 시간을 줄게. 하지만 연락을 끊으면 안 돼. 그러면 나도 걱정이 되고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말이야. 정말 힘들어.”그녀의 말에 현시우는 마치 심장에 바늘이 꽂힌 것 같았다.그 바늘은 그의 숨소리를 따라 점점 더 깊이 찔러 들어갔다.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월영아, 그냥 여기까지 하자. 내가 사람을 불러 너를 집에 데려다줄게.”유월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지금 나랑 헤어지자는 거야?”현시우의 목젖이 떨렸다.그는 “그래”라고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차마 “아니야”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그가 침묵하는 동안 유월영의 눈이 파르르 떨려왔다.그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두 줄기의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렸다.유월영의 눈물에 현시우는 한 걸음 다가가 그녀를 달래려 했다.하지만 유월영은 한 걸음 물러서더니 이내 뒤돌아 뛰어갔다.현시우가 본능적으로 뒤따라 가려 했지만 연회 부인이 제때 나타나 그를 막았다.“시우야! 지금은 내버려둬.”어머니의 충고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현씨 가문은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고 유월영은 산길을 따라 뛰면서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계속 흘렀다.가을은 좋은 계절이 아니었다.가을은 모든 것이 시들어가는 계절이었다.유월영은 눈앞이 흐릿해졌고 너무 빨리 뛰다가 발이 엉켜 땅에 넘어졌다.흙투성이가 된 채로 집에 돌아온 그녀는 책상 밑에 몸을 숨겼다.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아래층의 부모님이 들을까 봐 소리를 내지 못한 채 손등에
유월영의 망연자실한 모습은 연재준조차 알아차릴 수 있었다.쉬는 시간, 그는 일부러 유월영이 있는 반을 지나가며 텀블러에 물을 담고 있던 유월영을 보고 이름을 불렀다.하지만 그녀는 마치 듣지 못한 듯 돌아보지 않았다.“...”연재준은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생각했다.‘현시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봐야 하나? 설령 죽었다고 해도 최소한 죽었다는 소식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그러나 현씨 가문의 입단속은 철저했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더구나 현시우와 연회 부인의 대화는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다만 현시우는 최근 병원에 드나들고 시골로 내려가는 등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분주하다는 소문만 들렸다.연재준은 손에 동전을 굴리며 고민했다.‘이 틈을 타서 슬쩍 끼어들어 볼까?’보름이 지나도 현시우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결국 유월영은 참지 못하고 생애 가장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그녀는 직접 현씨 가문을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유월영은 경비원에게 자신이 현시우의 학교 친구이며 그가 너무 오래 학교에 나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러 왔다고 말했다.경비원은 그녀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고하겠다고 했다.10분 후, 유월영은 등 뒤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월영아.”그녀가 돌아보자, 나온 사람은 바로 현시우였다.처음에는 기뻤지만 이내 화가 치밀어 올라 유월영은 달려가며 따졌다.“너 요즘 왜 그래? 왜 내 전화를 받지 않는 거야?”그녀는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휴대폰 부모님이 뺏어갔어? 아니면 벌이라도 받은 거야? 혹시 맞기라도 한 거야? 아픈 건 아니지? 얼굴빛이 안 좋아 보이는데 병원은 갔어?”“월영아.”현시우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깊게 꺼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그의 모습은 지치고 초췌해 보였다.불과 보름 만에 그는 한층 더 야위었고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듯 보였
현시우는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는 차분하면서도 냉정한 태도로 어머니를 추궁했다.“단순히 유용우를 봤다는 이유로 유월영이 그의 친여동생이라고 단정 짓는 건 말이 안 돼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러시는데요?”그가 아는 바로는 유월영의 집에는 세 자매가 있었다. 왜 꼭 유월영이어야 하는 걸까?“나이대가 맞지 않아서요?”그는 계속해서 반박했다.“다른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 유월영의 집은 부유한 가정이 아니에요. 자식을 여러 명 키우는 건 부담스럽고, 게다가 고씨 가문의 딸을 키우는 건 위험 부담도 크잖아요. 여동생이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 않나요?”이 모든 시간 동안 그들은 늘 긴장 속에서 살아왔다.연회 부인은 외출조차 하지 못했고, 유용우네 가까이 지내는 것도 두려워했다.그래서 유용우네 부부가 시내로 이사한 것도 몰랐고, 그들의 세부 사항도 알 수 없었다.현시우는 어머니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이유를 수십 가지나 가지고 있었다.연회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그러면 유전자 검사를 직접 해보렴.”“...”만약 그녀가 확신이 없다면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현시우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거미줄처럼 얽힌 핏줄은 그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연회 부인은 그가 이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그를 위로하려고 애썼다.“아마 너는 처음부터 네 감정을 잘못 알았던 것 같아. 너의 마음속에서 유월영에 대한 감정은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 어쩌면 혈연관계가 작용해서 너를 혼란스럽게 만든 걸지도 몰라.”“그렇지 않다면 너의 성격으로 그렇게 쉽게 누군가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네 주변에 훌륭하고 예쁜 여자애들이 많았잖아? 그런데 너는 그들에게 아무 감정도 없었잖아. 그런데 유월영을 알게 된 지 몇 달 만에 이렇게 깊이 좋아하게 된다니, 말이 안 되지 않니?”“그래서 내 생각엔 이건 사랑이 아니라 운명이 장난을 친 거야.
“손님, 이 케이크는 당일 제조된 거라 유통기한이 짧아요. 냉장고에 넣어도 최대 3일밖에 보관할 수 없으신데, 이렇게 많이 사가시면 다 드실 수 있으신가요?”유월영이 조심스레 물었다.연회 부인은 선글라스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일 제조된 거라면 학생이 직접 만든 거예요?”“제가 아니고 저희 가게에서 직접 만든 거예요. 한번 맛보신 후에 마음에 드시면 구매하셔도 돼요. 다만 가족 인원이 많지 않으시면 한 번에 다 사는 건 추천해 드리지 않아요.”유월영이 케이크 한 조각을 잘라 그녀에게 건넸다.“우리 집은 식구가 많아서 다 먹을 수 있어요.”연회 부인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학생, 교복을 보니 신주시 고등학교 학생인 것 같은데 우리 아들도 그 학교 다녀요.”유월영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아, 그러신가요.”“학생, 참 예쁘게 생겼네.”연회 부인은 그녀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고 유월영은 조금 쑥스러워하며 말했다.“아니에요. 손님께서 훨씬 멋지고 품격 있어 보이세요.”“말도 참 예쁘게 하네요.”연회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케이크 맛있네요. 이거 전부 살게요. 계산해 주세요.유월영은 계산하며 말했다.“총 3만 6백 원인데, 3만 원만 받을게요. 맛있으시면 또 오세요.”“그럼 그럴게요.”계산을 마친 연회 부인이 케이크 포장을 들려고 했지만 그녀의 네일아트를 본 유월영이 주저하며 물었다.“차로 오셨나요? 제가 차까지 들어다 드릴게요.”“그래요, 그러면 저야 고맙죠.”연회 부인은 그녀를 차로 데려갔고 유월영은 케이크를 차에 실은 후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연회 부인이 출발하려는 찰나 중년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 옆에 멈췄다.“아빠!”유월영이 그를 부르는 소리에 연회 부인은 본능적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유월영이 아버지라고 부르던 사람은 고해양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이었고 그녀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갑작스러운 만남에 연회 부인은 몸은 얼어붙었고 혼란에
“아니.”현시우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남자들끼리의 문제일 뿐이야.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유월영이 화를 내며 말했다.“별거 아니긴 개뿔!”현시우는 예상밖의 반응에 잠시 멍해졌다.유월영이 이렇게 거친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비록 심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위해 그랬다는 사실에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월영아, 욕은 하지 마.”“할 거야! 너도 싸움질을 했으면서 내가 욕하는 걸 뭐라고 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유월영은 그의 상처를 가까이서 살펴보며 점점 더 화가 났다.“도대체 너랑 싸운 사람이 누구야? 왜 싸운 건데?”현시우는 말하고 싶지 않아 아픈 팔다리를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월영아, 와서 안아줘.”“꿈 깨!”옆방에서 의무실 선생이 연재준의 얼굴에 멍이 든 곳에 약을 바르려고 했지만 그는 무표정하게 이를 피하며 말했다.“필요 없어요. 그냥 나가세요.”의무실 선생은 잠시 망설였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료 상자를 챙겨 방을 나갔다.두 소년의 부상은 비슷했다. 뼈나 근육에는 이상이 없었고 학교 보안요원이 빠르게 싸움을 말려 모두 표면적인 상처에 불과했다.방문이 닫히지 않았기 때문에 옆방에서 들리는 대화가 연재준의 귀에 고스란히 들려왔다.유월영이 현시우를 걱정하며 하는 말들이 하나하나 그의 귀에 들어왔다.연재준은 그 말을 들으며 살을 도려내는 고통이 있다면 이와 같을 거라고 느꼈다.학교는 싸움에 대해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고 다만 두 학생의 부모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다.연민철은 이미 아들 연재준을 신경 쓰지 않았고 반면 현시우의 가족은 이 소식에 크게 놀랐다.현시우는 어릴 때부터 감정 기복이 별로 없고 차분한 성격으로 한 번도 싸움을 하거나 심지어 다툰 적도 없었다.그런 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것도 학교 안에서 참지 못하고 싸움을 벌인 건지 현씨 가문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당시, 현시우의 어머니인 연회 부인은 현씨 가문에서 사모님으로 은둔하며 지냈다.하지
현시우가 유월영을 집까지 데려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내일 내가 대신 병가를 낼 테니까 너는 집에서 푹 쉬어. 책도 보지 말고 문제도 풀지 마.”유월영은 그의 강압적인 태도에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다.“괜찮아. 나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의사 말 못 들었어? 네가 과로로 쓰러진 거라고. 시간이 부족하면 중요하지 않은 일부터 줄여야 해. 월영아, 모든 걸 다 해내려고 하지 마. 그리고 모든 걸 완벽하게 하려고도 하지 마.”현시우는 그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유월영은 항상 모든 일을 포기하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집착과 강박은 결국 그녀를 지치게 만들고 말았다.사람의 몸은 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유월영은 신중히 고민한 끝에 어머니에게 댄스 수업을 그만두겠다고 말했고 학교의 댄스 동아리도 탈퇴하기로 결정했다.춤은 그녀에게 단순한 취미였지만 이제는 정상적인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었기에 잠시 내려놓는 것이 맞았다. 대학에 가거나 졸업 후 여유가 생기면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주말과 월요일까지 3일이 지나고 유월영은 학교로 돌아왔다. 몸 상태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감기도 거의 나아 약간의 콧물만 남아 있었다.유월영이 등교한 날, 연재준은 유월영의 교실 앞을 지나쳤다. 친구들과 웃으며 대화하는 그녀의 얼굴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병원에서 그는 원래 깨어난 유월영에게 잃어버린 옥불을 따질 계획이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온 전화로 인해 급히 돌아가야 했다. 부모님의 이혼 문제 논의에 꼭 참석해야 했던 것이다.그리고 익명의 영웅이 될 생각이 없었던 그는 방과 후 그녀를 찾아갈 계획이었다.연재준이 유월영의 반으로 향하던 중, 현시우와 마주쳤다. 연재준은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치려 했지만 현시우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그날 월영이를 병원으로 데려다줘서 고마워.”연재준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고맙다면 네가 아니라 본인이 와서 말해야지. 넌 대리인이야?”현시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담담히
운전기사는 연재준의 상태를 걱정하며 우산을 들어주었지만 연재준은 비에 젖은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그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고 병실에 도착했을 때 유월영은 링거를 다 맞고도 여전히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연재준은 침대 옆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그의 몸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한참을 서 있던 그는 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유월영, 이제 너는 나한테 빚졌어.”그녀 때문에 잃어버린 것은 그녀가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이었다.얼마 후, 유월영이 천천히 눈을 떴다. 침대 앞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물웅덩이와 함께 현시우가 앉아 있었다.“...”유월영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병원이었지만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이 쉬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목 아파? 편도선염이야. 당분간 말하지 마.”현시우는 탁자에 있던 따뜻한 물을 들고 한 팔로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을 한 모금씩 먹이며 부드럽게 상황을 설명했다.“너 열이 나서 길에서 쓰러졌어. 다행히 누군가 널 병원으로 데려왔어.”“기절했다고?”유월영은 놀란 눈으로 현시우를 바라봤다. 폭우 속에서 길을 헤매던 기억은 있었지만 쓰러졌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따뜻한 물이 목을 적시니 조금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목이 아팠다.유월영이 억지로 몇 마디를 이어갔다.“누가...날 병원에 데려왔어?”현시우는 물컵을 내려놓고 그녀가 좀 더 편히 누울 수 있도록 베개를 정리했다.“간호사 말로는 너랑 같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었는데 이름을 남기지 않았대.”“시험 끝나고 널 찾으러 갔는데 네 짝꿍이 네가 집에 갔다고 했어. 근데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걱정돼서 네 집으로 갔거든. 근데 네가 없더라.”유월영의 가족조차 그녀가 어디 갔는지 몰랐고 현시우가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위험에 빠진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가족들과 함께 학교에서 집까지의 길을 수색했다. 그러다 편
연재준의 화난 표정은 유월영을 바라보며 점점 누그러졌다.그녀는 너무 말랐고 얼굴이 창백했다.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으며 온몸이 빗물로 흥건해져 안쓰럽기 그지없었다.게다가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건 드문 일이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수건을 들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과 목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다 부드러운 피부에 손이 닿자 순간적으로 손을 홱 뒤로 뺐다.소년의 얼굴에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귓불은 점점 붉어졌다.연재준은 숨을 멈추고 다시 유월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고 그는 그제야 살짝 안도했다.그녀가 자신을 기회를 노리는 이상한 변태라고 생각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연재준도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다.지난 18년간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던 자신이 왜 교내 축제에서 춤추는 그녀를 보고 이렇게 빠져들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유월영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너 그렇게 예쁘지도 않아. 사람 보는 눈도 별로고.”“왜 하필 현시우 같은 놈을 좋아하는 거야? 사람들은 항상 나랑 현시우를 비교하잖아. 그러니 너도 내 이름을 들어봤을 텐데...내가 너 대신 농구공도 막아줬고 도서관에서 햇빛도 가려줬잖아. 다 잊은 거야?”그는 자신의 기억을 곱씹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우리 함께 변태 선생을 잡은 적도 있잖아.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거지...왜 한 번도 날 찾지 않았어?”“내가 너 앞을 그렇게 여러 번 지나갔는데 넌 왜 나한테 아는 척도 안 했어? 현시우가 나랑 친해지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거야? 너 그렇게 말을 잘 듣는 아이였어?”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중얼거렸다.“나도 나름 괜찮게 생겼잖아. 남자 친구를 바꿔보는 게 어때? 내가 현시우보다 너한테 더 잘해줄 자신 있는데. 유월영, 내 말 들려?”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그는 이렇게 많은 말을 했지만 유월영은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연재준은 그녀가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
유월영은 줄곧 모범생이었다. 지각이나 조퇴는커녕 항상 성적도 우수했기에 선생님들은 항상 그녀를 신뢰했다. 그래서 그녀가 조퇴를 요청하자 선생님은 별다른 질문 없이 허락해 주었다.다만 유월영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자 선생님은 부모님께 연락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유월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그녀는 어머니가 자전거를 탈 줄 모르고 아버지는 성격이 급했기에 아버지와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게다가 선생님은 그녀와 현시우가 가까운 사이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사적인 문제에 간섭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이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발언권이 크지 않았다.선생님은 현시우가 차량을 보내줄 것이라고 짐작하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조퇴 허가서를 작성해 주었다.“비가 많이 올 수도 있으니 밖에 오래 머물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렴. 내일도 몸이 안 좋으면 꼭 병가를 내고 쉬어.”“감사합니다, 선생님.”갑작스러운 폭우가 내렸지만 유월영은 현시우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그녀는 어젯밤 이미 그가 오늘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고작 20분 거리인데 그를 찾는다 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비가 온다고 해도 우산을 가지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 여겼다.그러나 유월영은 집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힘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갑작스러운 폭우가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쏟아졌고 강풍과 빗물 때문에 숨쉬기조차 어려웠다.유월영은 허둥지둥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지만 강한 바람에 우산이 뒤집히고 순식간에 옷이 젖어버렸다.앞이 점점 보이지 않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휘청였다.그때 멀리서 날카로운 경적이 들렸다.빠르게 달려오는 트럭을 발견한 유월영이 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발밑에서 미끄러운 무언가를 밟아 넘어질 뻔했다.그 순간 강한 손길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그 사람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유월영은 그의 가슴에 부딪히며 싸한 솔잎 향이 풍겨왔다.본능적으로 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