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비서?”이혁재가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연재준이 유월영 취직을 방해한 것 때문에 변호사 상담을 받으러 온 줄 알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유 비서도 가만 보면 참 고집 있어. 그냥 재준이 찾아가서 잘못했다고 다시 받아달라고 한마디만 하면 끝나는 걸 일을 왜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어?”유월영은 더 이상 연재준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승연과 간단히 작별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이승연도 이혁재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뒤돌아섰다.이혁재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남자친구가 왔는데 인사도 없어?”이승연이 잠깐 움찔하더니 말했다.“나 지금 일하는 중이야. 의뢰인 만나고 올 테니까 기다려.”이혁재가 손을 풀며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래. 바쁜 사람인데 내가 양보해야지 어쩌겠어.”이승연이 의뢰인 상담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이혁재는 안내데스크 직원과 시시덕거리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여직원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올랐다.이승연이 담담하게 말했다.“이혁재, 들어와.”이혁재가 그녀를 힐끗 보고는 장난스럽게 말했다.“알았어, 고모.”그 말을 끝으로 그는 이승연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안내데스크 여직원이 놀란 표정으로 수군거렸다.“저 사람 이 변호사님 조카였어?”그런데 그들이 조카라고 말했던 남자는 사무실에 들어간 뒤로 맹수로 변하더니 이승연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그가 거침없이 들어오자 이승연은 가쁜 숨을 헐떡이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화장 다 지워져.”이혁재는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맞대고 장난스럽게 말했다.“괜찮아. 립스틱 먹은 게 한두 번도 아니고.”소문난 바람둥이인 이혁재답게 그의 손은 어느새 이승연의 민감한 곳을 지분거리고 있었다.이승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단호한 얼굴로 그를 밀어냈다.이혁재는 약간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그녀를 놓아주고는 소파로 가서 그녀의 물컵에 물을 받아 마셨다.이승연은 옷매무시를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로펌을 나온 이혁재는 차에 올라 연재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재준아, 나 로펌에 왔다가 누구 만났는지 알아?”“누구?”“나 유 비서 만났어.”이혁재가 재미 있다는 듯이 피식거렸다.“무슨 일로 이승연한테 상담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너 계속 남의 앞길 방해하다가 소송 당할지도 몰라. 조심해.”연재준은 싸늘한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고개를 기댔다.이혁재가 계속해서 떠들었다.“다른 변호사면 모르겠는데 이승연 그 여자면 골치 아파질 거야.”연재준은 대답하기도 귀찮아서 듣고만 있었다.이혁재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도 내 친구 일인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귀찮아지면 얘기해. 내가 도와줄게.”연재준이 화제를 돌렸다.“그래서 너희 결혼식은 언제야?”“우리 엄마 성격이 급하셔. 다음 달 5일에 할 거야. 사실 신랑 측 들러리를 너한테 부탁하려 했는데 우리 엄마가 너 모태 솔로라고 마음에 안 든대. 그래서 지욱이를 추천하더라고.”이혁재가 감탄하듯 말을 이었다.“지욱이 걔는 고등학교 때 첫사랑이랑 지금까지 열애 중이잖아. 10년이나 장기 연애를 했는데도 안 헤어진 게 대단해.”그렇게 잡다한 얘기를 나누다가 그들은 전화를 끊었다. 연재준은 조 비서한테 전해 들은 말을 떠올리고 회사를 나섰다.한편, 유월영은 백화점으로 가서 과일바구니와 보건품을 사가지고 병원으로 왔다.그녀는 안내 데스크를 찾아 어제 다친 간호사가 있는 병실을 물었다.지나가던 간호가가 그녀를 알아보고 물었다.“어제 난동 부린 사람 가족이죠?”유월영은 잠깐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말했다.“피해자분께 사과 드리고 싶어서 들렀습니다. 혹시 그 간호사분이 어느 병실에 입원해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진심으로 사과하러 왔는지 형량 낮추려고 수작을 부리는 건지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당신 같은 사람 많이 봤으니까 이만 돌아가세요!”그 간호사가 싸늘하게 말했다.유월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외과 병동으로 찾아갔다.칼끝에 목을 다쳤으니 아마 외과 병동에 입원했을 거라는 생각에
그는 바닥에 뒹구는 과일들을 주워 바구니에 담았다.유월영도 바닥에 쭈그려 앉아 쏟아진 과일들을 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안내 데스크로 찾아가서 나중에 강 간호사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그쪽에서 거부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어쨌든 성의 표시는 꼭 필요했다.유월영은 신연우와 함께 입원 병동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탔다.신연우가 그녀에게 말했다.“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저 괜찮아요. 그분도 딸을 생각하는 마음에 화가 나서 그런 거잖아요. 이해해요. 저였어도 아마 화를 참지 못했을 거예요.”신연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피해자 가족들을 더 이상 찾아가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그래도 만나야죠. 그쪽에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합의서를 받아야 아빠가 재판 때 형량을 적게 받을 수 있어요.”엘리베이터가 일층에 도착하고 둘은 함께 밖으로 나갔다.유월영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힘들 거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여러 번 찾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제 진심이 전달되지 않을까요? 그쪽에서 용서만 해주면 적절한 보상이나 탄원서에 대해 얘기를 꺼내기도 수월해지겠죠.”신연우는 그녀의 처지가 안타까워서 표정을 풀 수가 없었다.“그래서 이제는 뭐 할 거예요?”“병원 관계자를 만나서 병원 측 합의서도 받아내야죠.”신연우가 말했다.“워낙 여론이 좋지 않아서 그쪽에서 만나주지 않을 거예요.”유월영도 그 말에 동의했다.“알아요. 그래도 친구 중에 병원 관계자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만나게 해준다고 했어요. 일단 만나서 얘기는 들어보려고요.”그들은 병원 후문에서 조용히 만나기로 했다.그 병원 관계자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다가와서 말했다.“이미 사건 동영상이 인터넷에 쫙 퍼진 상황이라 병원 측도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이에요. 지금은 뭐라고 확답을 드릴 수 없어요.”그 말인 즉, 여론이 유현석에게 우호적으로 흘러가면 합의를 해줄 의향이 있지만 여론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면 단호하게 책임을 묻겠다는 의미였다.유월영이
그녀는 생각도 안 하고 바로 거절했다.“필요 없어.”백유진은 고집스럽게 우산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 말했다.“그래도 쓰고 가요. 이런 날씨에 비까지 맞으면 감기 걸려요.”유월영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백유진을 빤히 바라봤다.백유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감기 몸살 쉽게 보다가 큰일 나요. 우리 아빠도 처음에는 그냥 감기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하도 안 나아서 병원에 갔다가 심장병 진단을 받았잖아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다행히 위급한 상황에서 심장 이식을 받아서 망정이지 다시는 아빠를 못 보는 줄 알았어요.”유월영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심장 이식이라니?”백유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말 그대로예요. 위급한 환자에게 건강한 심장을 이식하는 수술이죠. 기증자가 안 나타나서 고생한다던데 아빠는 행운이었어요. 어제 금방 수술을 받았거든요. 연 대표님이 최고의 흉부외과 의사를 추천해 줘서 아빠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요.”‘그러니까 엄마보다 위급해서 먼저 수술 들어갔다던 환자가 백유진 아버지였어?’유월영은 갑자기 온몸에 피가 얼어붙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게 과연 우연일까?의심은 했지만 그래도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병원 관계자의 말을 들어 보면 그 환자는 이식을 못 받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숨을 마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해하려고 했다.하지만 그 관계자 말이 과연 사실일까?아니면 단지 환자가 백유진 아버지라서 연재준의 입김에 의해 수술 대상자가 바뀐 것일까?연재준은 자신이 이 일과 관련이 없다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이미 싹 트기 시작한 의심의 씨앗은 분노가 되어 활활 타올랐다.백유진이 계속해서 말했다.“그 얘기도 들었어요. 어제 수술 취소된 환자 가족이 병원 관계자들에게 난동을 부렸다면서요? 좀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모든 게 다 운명이고 순서가 있는 게 아니겠어요? 무조건 떼 쓰고 강요한다고 될 일은 아닌 것 같아요.”모든 걸 다 앗아간 주제에 어떻게 저 순진한 얼굴로 저런 뻔뻔한 말을 할 수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유월영이 조서희의 입을 틀어막았다.“서희야, 그만!”뒤돌아선 연재준이 유월영을 빤히 쳐다보았다.마침 차를 입구에 대고 들어오던 신연우도 그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연재준은 백유진을 놓아주고 유월영에게 다가갔다. 백유진도 넋을 잃은 표정으로 유월영을 바라봤다.“아이를 유산했었어?”아무런 감정기복이 느껴지지 않는 무덤덤한 말투였다.“그게 언제야?”유월영은 울컥하며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연재준은 최근 몇 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불신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거짓말도 정도가 있어야지. 유월영 네가 임신하고 유산한 걸 내가 왜 몰랐지?”유월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마음대로 생각하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조서희의 손을 잡고 뒤돌아섰다.연재준이 손을 뻗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말은 똑바로 하고 가. 네 친구도 직장을 잃게 하고 싶어?”유월영이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고 조서희는 굉장히 불쾌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난 거짓말한 적 없어! 나한테 증거가 있어! 연재준 씨 당신이 저 백여시랑 희희낙낙거리고 다닐 때 우리 월영이는 홀로 병원에서 수술을 견뎌야 했다고. 그리고 몸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당신 때문에 지방으로 쫓겨나야 했잖아. 지금 월영이 건강이 나빠진 거, 그거 다 당신 탓이야!”“당신은 항상 월영이가 당신한테 빚을 졌다고 생각하지? 아니, 월영이는 빚진 거 없어! 처음부터 당신이 월영이한테 항상 빚을 지고 있었던 거야!”연재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서희한테 말했다.“증거 가져와.”“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아. 집에 있어.”연재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집으로 가서 확인할 거야. 거짓말인 거 밝혀질 시에 두고 봐.”유월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고 그에게 말했다.“연재준 씨, 나한테는 아무렇게 해도 상관없지만 내 엄마, 그리고 내 친구까지 건드리면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지만 연재준은 단호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내가
결국 조서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방에서 나와 더듬거리며 말했다.“그게… 분명 진단서를 노트에 끼워 보관했는데… 그 노트를 찾지 못하겠어.”너무 황당한 변명이라 조서희 본인도 헛웃음이 나왔다.신연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유월영을 바라봤다. 유월영은 별다른 반응 없이 아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연재준도 마찬가지였다. 조서희는 조급한 마음에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유월영에게 말했다.“월영아, 나한테 있던 파란색 노트 봤어? 표지에 내가 이름을 써놨다고 네가 나 유치하다고 놀렸잖아. 기억 안 나?”유월영은 그 노트를 기억하고 있었다.하지만 둘은 각자 방을 쓰고 있었고 평소에 조서희의 방에 놀러 가는 일도 적었기에 노트가 어디에 있는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연재준의 등 뒤에 숨어 있던 백유진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증거가 없다는 얘기 아닌가요?”그 말 한마디에 거실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다.조서희는 자신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유월영은 더 이상 이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처음부터 연재준은 임신했다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조서희가 증거를 내놓지 못했으니 그에게 확신만 심어준 꼴이었다. 아마 그는 그녀와 조서희가 짜고 백유진에게 폭력을 가한 응징을 피해가기 위해 거짓말을 꾸며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조서희가 갑자기 무릎을 탁 치며 소리쳤다.“나 기억 났어! 그날 밤에 고객사 직원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방안을 수정해 다라고 해서 급하게 그 노트 들고 회사에 간 적 있어. 노트 아직 회사에 있을 거야. 아마 월영이 네 진단서도 거기에….”하지만 점점 말할수록 그녀는 확신이 없어졌다.회사에서 그 노트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다른 사람의 손도 거쳤으니 그 찢어진 진단서가 무사히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회사, 우리 회사로 가볼래?”연재준이 싸늘하게 말했다.“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나한테 그 따위 거짓말을 지껄이는 거지?”고저 없는 목소리였지만 그럴수록 더 위험하다는 것을 유월영도,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그녀에게는 이제 보살펴야 할 부모님이 있었다.“당신이 우리 엄마 심장을 빼앗기 때문에 우리 엄마는 새 삶을 얻을 기회를 놓쳤어요. 그래서 난 엄마를 잃게 될지도 모르는데 약간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여기서 그만하는 게 낫지 않나요? 나를 벼랑 끝까지 몰아세워서 연재준 씨에게 좋은 점이 뭐가 있나요?”“하, 사실인 것처럼 말하네.”연재준이 비웃듯이 말했다.“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지.”사실 유월영도 나쁜 쪽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당사자인 백유진의 입에서 그 심장이 백유진 아빠한테 갔다는 것을 들었는데 어떻게 이 일을 이해해야 할까?신연우가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꽉 잡아주며 말했다.“저한테 유월영 씨가 낙태 수술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사람들의 시선이 신연우에게 쏠렸다.신연우가 말했다.“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맥을 짚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신 교수가 진맥을?”연재준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신연우를 노려봤다.그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것도 의심스럽고 또 그가 유월영을 감싸고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신연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형님이 유명 한의사 신현준 박사님이십니다. 연 대표님도 아마 들어보셨을 테죠. 진맥은 형님한테 배웠습니다. 당시 형님은 제가 한의사를 해도 된다고 칭찬도 하셨고요. 비록 한의사로서 일한 경험은 없지만 환자가 낙태 수술을 했는지 안 했는지 정도는 쉽게 분간할 수 있습니다.”연재준의 시선이 유월영의 손목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 닿았다. 그는 말없이 신연우를 노려보기만 했다.신연우가 유월영에게 말했다.“나 믿죠?”유월영은 긴 한숨을 쉬고는 소파에 앉았다.신연우는 그녀의 손목에 손을 가져가고 한참을 조용히 진맥에 집중했다.“어쩐지 오늘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요 며칠 기침을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나요?”조서희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그런 것도 진맥으로 다 나와요? 월영이가 며칠 전에 지방에 면접
“한의학을 못 믿어요?”신연우가 눈썹을 꿈틀하며 되물었다.“서의학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때 조상님들은 한의학으로 환자를 치료했다고요.”“믿어요. 그만큼 깊은 학문이라는 것도 알고요. 단지 전공도 아닌 신 교수님이 굉장히 한의학에 조예가 깊으신 것 같아서 물어봤어요.”맥박의 신호로 그녀의 전반적인 몸 상태를 체크하는 건 천재가 아니고서는 수십 년 한의학에 종사한 의사들만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신연우는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신연우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범히 인정했다.“맞아요. 사실 진맥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어요.”유월영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거짓말을 하셨군요.”신연우가 그녀를 빤히 보며 말했다.“네. 난 월영 씨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었거든요.”유월영의 눈썹이 저도 모르게 꿈틀했다.따지고 보면 알고 지낸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사람도 이렇게까지 자신을 믿어주고 도와주려 하는데 대체 연재준은 왜 그러는 걸까?분명히 가능성이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연재준은 그녀가 위기를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했다고 단언했다.유월영은 우울한 마음에 신연우의 손에서 맥주캔을 빼앗았다.신연우가 손을 뻗자 그녀는 얼른 몸을 돌려 피하며 말했다.“지금은 술을 마시고 싶네요. 신 교수님도 같이 마셔요.”신연우는 안 된다고 하고 싶었지만 극도로 우울해 보이는 유월영의 눈을 보고 차마 거절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그녀가 지친 눈으로 신연우를 바라보며 말했다.“신 교수님도 의사나 다름없잖아요. 그럼 진짜 내가 쓰러져도 옆에 응급 조치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있는 거네요.”이런 상황에서 농담이라니! 신연우는 헛웃음이 나왔다.“세 캔만 마시는 거에요.”둘은 베란다로 가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애초에 유월영과 조서희가 이 오피스텔을 선택한 이유도 뷰가 좋은 베란다 때문이었다.둘은 베란다에 있는 의자에 마주 앉아 캔맥주를 땄다.유월영은 급하게 마시지는 않았지만 한 모금, 한 모금 계속해서 말없이 술만 마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