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은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으로 가야 했기에 말없이 뒤돌아섰다.“아버지랑 새어머니는 너를 참 좋아하더라. 너 때문에 아버지가 직접 회사까지 찾아오셨어.”연재준이 비웃음을 가득 머금고 말했다.“두 분은 우리가 결혼하길 바라는 눈치던데 난 사생활이 문란한 여자는 딱 질색이라서 말이야.”유월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뒤돌아섰다.“그러니까 제발 저 좀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나요? 제가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생활이 힘들어지면 계속 연 회장님이나 사모님을 찾아가서 불쌍한 척할 수밖에 없잖아요.”“어쩌면 지금 제 건강 상태가 안 좋아진 것도 백유진이랑 대표님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그럼 두 분은 더욱 더 백유진 씨를 싫어하게 되겠죠.”연재준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그는 사나운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유월영, 죽고 싶어?”“살고 싶어서 이러는 거예요. 벌레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하물며 저도 인간이잖아요.”말을 마친 유월영은 대답도 듣지 않고 갈 길을 갔다.뒤에서 그의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떠나갔다.유월영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떠나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백유진과 아직 연락하고 있다라….연재준이 사라진 백유진을 찾아낸 건지, 아니면 연 회장이 결국 아들의 고집을 못 이겨 둘의 사이를 인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원인이야 어찌됐건 연재준과 백유진이 다시 연락하고 지낸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었다.연재준은 일부러 유월영을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마침 지나가다가 병원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보고 다가간 것이었다.그는 최근에 서지욱과 같이 진행하는 사업 때문에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약속 장소로 나온 서지욱은 연재준이 저기압인 것을 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그래도 아주머니가 결국엔 걔를 부축해서 집 안으로 데려갔잖아.”연재준이 의아한 얼굴로 친구를 바라봤다.“백유진 씨가 너희 집 찾아갔다가 비 맞아서 쓰러진 것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거 아니었어?”연재준과 유월영이 선박 출장을 떠났을 때,
이영화는 병원에서 5일 입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퇴원하는 날, 유월영은 친구에게서 차를 빌려 그들을 봉현군까지 데려다 주고 집에서 식사를 함께했다.유현석이 요리를 담당하고 식사가 끝난 뒤에 유월영이 설거지를 담당했다.드디어 집에 온 느낌이 들었다.거실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려서 나와 봤더니 큰언니와 형부가 딸을 데리고 찾아왔다.유월영은 병원에서 그들과 한번 마주친 적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서먹한 감이 있었다.하지만 조카가 귀여워서 계속 안고 있었다.저녁이 되어 큰언니와 형부가 떠날 채비를 했고 유월영도 가는 길에 그들을 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밖으로 나오자 아버지가 나와서 그녀에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이건 엄마가 너 준다고 모은 돈이야.”열어보니 안에 현금이 들어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봉투를 다시 아버지에게 건넸다.“나 돈 있어, 아빠.”“이건 네 생일 때마다 주려고 모은 돈이야. 생일 때마다 엄마가 너희들한테 용돈을 줬었잖아. 언젠가 너 돌아오면 준다고 모아뒀어. 사실 너 그렇게 가고 우리 둘 다 마음이 편치 않았어.”유월영은 착잡한 마음으로 봉투를 받았다.아버지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너도 다 혼자 감당하려고 하지마. 여자애가 돈을 벌어봤자 얼마나 벌었겠어? 엄마 수술비는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 볼게. 그 동안 모은 돈도 조금 있고 큰언니도 좀 도와준다고 했어. 우리는 가족이니까 다 같이 감당해야지.”유월영은 차에 올라 봉투에 든 현금을 세어보았다. 고작 오십만 원이었지만 그 무게는 그 어떤 것보다 무거웠다.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형부가 그녀에게 어디서 일하냐고 물었다.유월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퇴사한지 얼마 안 돼서 지금은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어요.”“처제는 똑똑하니까 좋은 직장 구할 수 있을 거야.”형부의 말에 유영은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그들을 데려다주고 친구에게 차를 돌려준 뒤에 그녀는 지하철을 타고 오피스텔로 돌아갔다.늦은 시각, 그녀는 컴퓨터를 열고 이메일에 접속했다. 예상했던
서지욱이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SK의 막내딸인가 보네. 며칠 전에 재준이가 새로 고용한 비서야.”연재준이 말했다.“이미 퇴사했어.”SK의 오너 일가를 신변에 둔다는 건 굉장히 예민한 일이었다.그래서 내보낸 건데 신연아는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그를 찾아다니고 있었다.“비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왜 유 비서는 안 보여? 전에는 항상 같이 다녔잖아? 재준이 너만 졸졸 따라다니던 사람인데 갑자기 안 보이니까 이상해서 말이야.”노현재가 당구대로 다가오며 연재준에게 물었다.서지욱이 옆에서 대신 대답했다.“유 비서 퇴사했어.”노현재가 놀랍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유 비서가 퇴사했어?”서지욱이 덤덤히 말했다.“고용 계약이 만료됐잖아. 재준이야 유 비서를 계속 붙잡고 싶었지. 그런데 당사자가 간다는데 무슨 소용이야? 그래서 속 좁은 저 녀석이 각 기업에 유 비서 채용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잖아.”노현재는 가장 힘들었던 때에 연재준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었기에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연재준의 편이었다.“주제를 모르네.”노현재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재준은 태연하게 당구대를 잡으며 덤덤히 말했다.“곧 돌아와서 나한테 잘못했다고 빌 거야.”이런 적이 처음도 아니었다.그녀를 지방에 발령냈을 때도 먼저 다가와서 본사로 돌아가고 싶다면서 안기던 여자였다.그는 시간이 좀 소요될 뿐,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거라고 믿었다.한편, 유월영은 아무런 기대 없이 여러 중소기업들에 이력서를 뿌렸다. 그런데 다음 날에 면접 통지가 날아왔다.첫 면접은 화상 통화로 진행되었다. 면접 담당자는 그녀를 높게 평가하며 2차 면접을 약속했다.KTX를 타고 세 시간 정도 가야 하는 지방에 있는 회사였다.거리가 멀어 조금 고민이 되었지만 유월영은 일단 가보자는 마음으로 KTX에 올랐다.가는 도중에도 다른 회사에서 면접 통지를 받았다. 전화로 얘기가 잘 되었기에 시간을 정해 회사에서 정식 면접을 보기로 했다.그녀가 지금 면접을 보러 가는 회사와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연재준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유월영은 핸드폰을 던지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그리고 감정을 추스른 뒤에 KTX를 타고 신주로 돌아갔다.신주역에 도착해서 출구로 향하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백유진이었다.둘이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백유진도 그녀를 발견했다.유월영이 기침 때문에 마스크로 얼굴을 절반이나 가리고 있었지만 눈매와 체형을 보고 백유진은 그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백유진은 한 중년 여성과 함께 있었다. 외모가 많이 닮은 것으로 보아 엄마인 것 같았다.백유진은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 유월영을 빤히 바라봤다.이때, 유월영의 핸드폰이 울렸다.“여보세요.”“이영화 씨 가족분 되시죠? 여기 병원이에요.”유월영은 당황하며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아까 연락을 받았는데 적합한 기증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영화 씨 바로 수술 가능하실 것 같아요.”유월영은 그 순간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정말요? 심장 기증자가 나타난 건가요?”“네. 내일 당장 병원으로 오셔서 입원하시고 대기하시면 됩니다. 기증자는 서울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수술 준비만 되면 바로 수술 들어갈 수 있습니다.”유월영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내일 엄마 모시고 병원으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그녀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피어났다.최근 있었던 불쾌한 일들이 이 소식 하나로 모두 잊혀진 기분이었다.심장 기증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은 아주 고된 기다림이었다.인터넷으로 알아본 결과 매일 수천 명이 넘는 환자가 기증자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기증자의 가족이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해야지 가능한 일이라서 운이 좋게 새 삶을 얻은 환자는 사실 많지 않았다.그런데 불과 며칠 만에 기증자가 나타났으니 그들은 운이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유월영은 곧바로 집에 전화해서 이 소식을 알렸다. 소식을 전해 들은 유현석도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그래. 난 네 언니랑 형부한테 알려야겠어. 내일 다 같이 병원에 가서 입원 수속을
식사가 끝난 뒤, 유월영은 조서희와 함께 오피스텔로 돌아갔다.그녀는 내일 어머니 병원에 갈 짐을 정리하고 조서희는 편하게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하다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월영아!”유월영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왜 그래?”조서희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너 일자리 찾은 것 같아!”유월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봤다.조서희가 핸드폰을 바라보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SNS보는데 내 옛 상사가 인원 모집 공고를 냈어. 부서 담당을 모집한다는데 너랑 어울릴 것 같아서 네 이력서를 보내드렸었거든. 그쪽에서 아주 만족스럽다는 답변이 왔어.”유월영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너 전에 안성에서 일하지 않았어? 그때 직장 내 괴롭힘 때문에 퇴사했잖아.”“그렇긴 하지. 해운과는 못 비기지만 사실 신주의 대부분 회사들이 다 그렇잖아? 안성 정도면 대우는 괜찮을 거야.”조서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사실 그 인간 한 명 빼고는 다 괜찮았어. 그 인간 아니었으면 회사를 안 나왔을 거야. 퇴사한 뒤에도 계속 이분과는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사람이 정말 괜찮아.”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좀 끌리긴 하네.”조서희의 옛 상사라면 유월영도 만난 적이 있었다. 전에 연재준이 클럽으로 그녀를 불러냈을 때 마침 노현재와 어깨동무를 하고 지나가던 여성을 보았다. 그 여자가 바로 조서희의 옛 상사였다.나중에 둘이 헤어지고 그녀가 많이 힘들어했다는 말을 조서희를 통해 들은 적 있었다.“그분이 그러시는데 저녁이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대.”조서희가 들뜬 얼굴로 친구를 꼬드겼다.“가자. 조건이 안 맞더라도 같은 여자끼리 식사 정도는 괜찮잖아.”친구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유월영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사실 이 시점에 직장까지 구한다면 엄마의 수술 후 관리비용까지 해결할 수 있으니 그녀에게는 괜찮은 제안이었다.유월영은 감기약을 먹은 후,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했
둘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김우희가 다시 둘의 앞길을 막았다.“뭘 그렇게 급하게 가려고 해?”조서희가 인상을 쓰며 그녀에게 물었다.“언니, 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김우희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일자리 소개해 주려고 나온 거잖아.”“일자리가 아니라 우리를 팔아먹으려고 불러낸 것 같은데요?”성질 급한 조서희가 날이 선 말투로 반박했다.왕 대표가 술을 들고 다가오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어린 아가씨가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해? 당장 우희 씨한테 사과해! 사과의 의미로 이 술을 한잔씩 마시면 되겠네! 마시기 전에는 나갈 생각하지 마!”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유월영과 조서희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아마 저 술을 마셔도 이 방을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둘은 김우희의 어깨를 밀치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김우희가 바닥에 넘어지자 뒤에 있던 왕 대표가 소리를 질렀다.“저것들 잡아!”문이 열리고 밖에서 정장을 입은 경호원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들은 다짜고짜 유월영과 조서희의 팔목을 잡으려 했고 그러다 보니 몸싸움이 일어나게 되었다.둘은 핸드백으로 상대의 얼굴을 가격하고 다리를 들어 상대의 중심부를 걷어찼다.순식간에 고급 별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둘은 바깥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사람 살려요! 이 사람들이 저희를 납치하려고 해요!”바깥에는 직원들도 적지 않았지만 어쩐 일인지 힐끗 바라만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돌렸다. 흔히 있는 일이라서 무관심한 건지, 아무도 그들을 구해주려 나서지 않았다.유월영은 경호원 한 명을 밀쳐내고 미친 듯이 도망쳤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조서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별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모양이었다.유월영은 이를 악물고 핸드폰으로 경찰에 신고한 뒤, 별실로 달려갔다.그리고 굳게 닫힌 문을 발로 걷어찼다.느끼남 왕 대표가 조서희를 소파에 깔아뭉개고 있었다. 그녀의 옷은 군데군데 찢겨서 볼품이 없었고 울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왜 항상 이런 식일까?매번 그녀는 가장 비참한 모습을 그에게 보였다. 마치 그의 그림자를 벗어나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처럼.연재준은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을 덮었다.남자의 외투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향기에 유월영의 의식은 점점 흐릿해졌다.연재준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곧장 왕 대표에게로 다가갔다.왕덕호는 욕설을 퍼부으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누구야! 누가 감히 내 일을 방해하는 거야? 죽고 싶어? 악!”옆에 있던 노현재가 다리를 들어 왕덕호의 복부를 걷어차며 말했다.“건방지게 누구 안전이라고 욕설이야? 죽고 싶어?”왕덕호는 싸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노현재와 시선이 마주치자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노… 노 사장….”연재준은 담배를 입에 물고 왕덕호에게로 다가갔다.그리고 담뱃재를 왕덕호의 얼굴에 털어냈다.그를 알아본 왕덕호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연 대표님이 왜 여기에….”노현재는 발끝으로 왕덕호의 얼굴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내 가게에서 술을 마시면서 우리 재준이 여자를 건드려 놓고 왜 여기 있냐고 묻는 건 너무 멍청한 질문 아닌가?”왕덕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아… 아닙니다! 연 대표님, 제 말씀 한 번만 들어보세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저도 김우희 그 여자한테 속아서 왔단 말입니다!”“마침 안성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만났는데 김우희가 젊은 여자랑 놀아보지 않겠냐고 해서 나온 거예요.”“유… 유 비서가 해운에서 퇴사했다고 더 이상 해운의 직원이 아니라고 그 여자가 그랬단 말입니다. 그래서 좀 데리고 놀아도 아무 문제 없다고 하길래 한 순간 정신이 나가서 그러겠다고 했어요. 유 비서가 대표님 사람인 줄 알았으면 절대 안 건드렸을 겁니다!”연재준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래서 김우희 그 여자는 지금 어디 있지?”왕 대표는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아까까지도 여기 있었는데….”“도망갔다는 얘기네. 그럼 왕 대표 한 사람 말만 듣고 우리가 그걸 어떻게 믿어? 증거 있어?”노현재가
연재준은 유월영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손을 내밀었다.“일어나.”유월영은 그가 내민 손을 잡지 않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아 다시 주저앉았다.연재준은 거칠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잡아서 일으켰다. 유월영은 일어서자마자 그의 어깨를 밀치며 차갑게 말했다.“연재준,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최악이었어!”연재준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상상력이 너무 풍부한 것도 병이야.”그는 이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었다.“끼리끼리 모인다고 전에는 내가 너무 어려서 사람을 잘못 봤어.”“당신 정말 치졸한 거 알아? 대기업에 압력을 넣어 날 취직 못하게 하고, 중소기업 시켜서 날 면접 보러 오라고 뺑뺑이 돌게 만들고, 백유진이랑 다시 만나면서도 날 놓아줄 생각이 없잖아. 당신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으면 내가 이런 자리에 나올 일도 없었어!”연재준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네가 먼저 날 배신했어.”유월영이 소리쳤다.“내가 언제 배신했어?”“하! 발뺌하는 거야?”연재준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그녀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섰다. 남자에게서 풍기는 싸늘한 기운에 유월영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3년 전에 널 살려준 사람이 누구지? 갈 곳도 없는 너를 거두어 주고 일자리까지 줬어. 내 여자가 되겠다고 한 사람도 너야. 평생 배신하지 않고 내 옆을 지키겠다고 말한 사람도 너야. 우리야 말로 진짜 가족이라고 평생 함께하자고 했잖아!”“그만!”유월영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연재준이 싸늘하게 말했다.“날 먼저 버린 사람도 너야.”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지금도 그에게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생생했다.그날 폭우가 내리던 밤에 연재준은 건달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를 구해주고 차에 태웠다. 지금도 그 따뜻한 온도를 잊을 수 없었다.연재준은 홀딱 젖은 그녀를 보고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에 덮어주었다.“이제 괜찮을 거야. 아무도 너 못 건드려.”그는 떨고 있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따뜻한 품으로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