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은 예의 바르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줌마, 혼자 오셨어요?”윤미숙은 반가운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너 집에 안 온지 한 달이 넘은 거 알아? 그런데 왜 이렇게 야위었어?”유월영이 미안한 얼굴로 답했다.“요즘 많이 바빴어요.”윤미숙이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그랬구나. 그런데 너 온다고 해도 제대로 반겨줄 수도 없을 것 같아.”“무슨 일 있어요?”“재준이랑 회장님 때문에 그렇지 뭐.”윤미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둘이 백유진이라는 여자애 때문에 대판 싸웠어. 재준이도 요즘 집에 오지를 않아. 연락해도 안 받고.”연재준은 원래 본가로 가기 싫어했다. 몇 달에 한번 집으로 가서 얼굴을 비추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연락까지 차단할 정도면 이번에는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의미했다.유월영은 조심스럽게 윤미숙의 눈치를 살폈다. 연재준과 아버지의 관계가 이 정도로 나빠진데는 윤미숙 때문도 있었다.그렇다고 윤미숙이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계모로서 최선을 다했다.연재준의 아버지와 재혼한 뒤로 그녀는 주동적으로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중에 이복형제끼리 경영권 다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대체 재준이는 그런 애 어디가 좋다고 그렇게 감싸는지 모르겠어. 내 눈에는 월영이 네가 백배 나은데 말이야.”윤미숙이 불만스럽게 말했다.하지만 유월영은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윤미숙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부자지간에 이런 상황까지 왔으니 앞으로 어쩌면 좋아. 대체 백유진 걔가 어디가 예쁘다고 재준이가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어. 능력이나 가정환경 하나만 내세울 게 있었어도 회장님이 이 정도로 반대하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재준이가 좋다니 우리도 뭘 어쩔 수가 없네.”결국 먼저 마음이 약해진 쪽은 윤미숙이었다.이대로 간다면 연재준과 가족들 사이의 냉전이 조금만 길어지면 연 회장도 가업과 가문을 위해서 타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백유진과 연재준이 결혼할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유월영의 부모님 댁은 봉현군에 있었다.최근 재개발 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봉현군은 관광명소로 유명해졌고 수많은 외부 여행객들을 받았다.유월영은 보건품을 들고 3년 만에 집을 찾아갔다.문은 열려 있었다. 이런 시골집들은 낮에는 거의 대문을 열어두는 습관이 있었다.유월영이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던 찰나, 안에서 누군가가 나왔고 그녀는 재빨리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겼다.고개를 내밀고 그쪽을 봤더니 엄마였다.엄마는 대문 앞에서 허브를 씻고 있었다.허브차를 우려서 여름에 마시면 아주 시원할 뿐더러 더위도 예방할 수 있었다.전에는 엄마가 우려준 허브차를 종종 마셨었는데 집을 떠나면서 한 번도 마셔본 적 없었다.유월영이 옛 생각에 정신이 팔린 사이, 안에서 쾅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그녀의 아버지 유현석이 밖으로 나오며 온갖 짜증을 부렸다.“그거 만들어서 어디다 써? 그럴 시간 있으면 돈 벌 방법이나 좀 생각해 봐. 당신 병 치료하려면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몰라?”유월영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엄마가 어디 아프신 걸까?그녀는 엄마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불과 3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엄마의 얼굴은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볼 살도 다 빠지고 너덜너덜한 옷에 눈빛은 퀭했다.이영화는 무덤덤한 얼굴로 허브를 씻으며 대답했다.“그래서 치료 포기하자고 했잖아요. 살만큼 살다가 죽으면 한줌 재가 되면 되지. 그게 뭐가 그렇게 대수라고.”유현석이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냈다.“당신 말은 참 쉽게 해. 당신이야 죽으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겠지만 남은 사람은 평생 죄책감에 살아가야 하는 거 몰라? 당신 사람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그래서 둘째한테 전화해서 좀 도와달라고 하면 얼마나 좋아? 이런 거나 씻고 있지 말고!”그는 허브 바구니를 그대로 발로 걷어찼다.가만히 참고 있던 이영화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언성을 높였다.“둘째한테 어떻게 연락해요? 그때 우리가 걔한테 어떻게 했는지 잊었어요? 걔 아마 지금도 우리를 생각하면 치가 떨릴걸
유월영이 쉬지 않고 심폐소생술을 진행한 결과, 5분 정도 지나서 이영화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엎드려서 확인해 봤더니 심장박동도 느껴졌다. 유월영은 눈물을 머금고 다급히 엄마를 불렀다.“엄마, 엄마!”하지만 이영화는 의식을 차리지는 못했고 유월영은 구급차가 올 때까지 쉬지 않고 심폐소생술을 했다.잠시 후, 마을 입구에 구급차가 도착했다.의료진이 이영화를 들것에 실어 구급차에 실었다. 이영화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응급실로 실려 들어갔다.유월영과 유현석 부녀는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유현석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유월영은 담담한 얼굴로 다가가서 아버지를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그리고 자판기로 가서 따뜻한 커피를 사다가 아버지에게 건넸다.유현석은 커피를 손에 꽉 쥐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었다.아버지의 기분이 조금 안정되자 유월영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엄마 대체 어디가 아픈 거야? 심장에 문제가 생겼어?”유현석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맞아. 6개월 전에 쓰러져서 병원에 왔다가 발견했어. 너무 늦어서 약물 치료로는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고. 지금 엄마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심장을 이식 받는 거야.”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몰랐다.유월영은 갑자기 목이 타서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유현석은 그녀의 눈치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렸다.하지만 유월영은 지금 수술실로 들어간 엄마 걱정에 그와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그렇게 두 시간이 지나 수술실 문이 열리자 그녀는 재빨리 의사에게 다가갔다.“선생님, 이영화 환자 괜찮은 거죠?”의사가 말했다.“고비는 넘겼습니다만, 지난 번에 남편분께 말씀드렸듯이 이영화 환자 상황으로는 심장 이식수술이 시급합니다. 언제 또 심장이 멈출지 몰라요. 그때는 응급조치도 소용없을 겁니다.”유현석은 고통스럽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아내를 살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수술비가 문제였다.유월영은 아버지를 힐끗 보고는 굳은 목소리로 물
유월영은 말없이 티슈를 꺼내 엄마의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었다.괜찮다는 말은 건성으로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다만 전처럼 부모님이 원망스럽지도 않았다.“지나간 일은 이제 다 잊어.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그 동안 잘 지냈어. 수술비도 걱정하지 마. 나한테 돈이 있어. 적합한 기증자가 나타나면 바로 수술 들어가면 돼.”이영화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잘 지냈다니까 안심이야.”유월영은 엄마랑 아주 오래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을 챙겨주고 엄마가 잠든 뒤에야 병실을 나왔다.병실 밖 의자에 앉아 있던 유현석이 그녀를 보고 다급히 일어섰다.그는 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과거의 일 때문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유월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큰언니랑 막내는?”유현석이 다급히 말했다.“네 언니랑 형부는 청허포에서 일해. 금방 아이를 출산해서 오늘 부르지 않았어. 내일 연락해서 오라고 할게. 막내는 2년 전에 어떤 남자랑 집을 나간 뒤로 연락이 끊겼어.”유월영은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계좌번호 좀 불러줘.”유현석이 미안한 얼굴로 그녀에게 계좌번호를 알려줬다.유월영은 그의 계좌로 2천만 원을 입금했다.“엄마 잘 보살펴. 치료비는 걱정하지 말고. 의사 선생님이 하신 말씀 들었지? 엄마는 현재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해. 그러니까 엄마한테 다시는 짜증 부리지 마.”유현석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병원에 간이침대 파는 게 있을 거야. 이따가 간호사한테 말해서 가져다 달라고 해. 오늘은 아빠가 여기 있어. 내일 간병인 보내줄게.”유월영은 메모지를 꺼내 핸드폰 번호를 적어서 유현석에게 건넸다.“이건 내 연락번호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뒤돌아섰다.그녀가 복도 모퉁이까지 갔을 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월영아, 아빠가 미안해. 앞으로는 집에 자주 들를 거지?”유월영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병
윤미숙은 큰 코트를 걸치고 있었기에 배가 나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그녀를 발견한 윤미숙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왔다.“월영이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유월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윤미숙에게 물었다.“아줌마도 어디 아파서 오셨어요?”“나 아니고 친구 병문안 왔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여기까지 왔네.”윤미숙이 웃으며 말했다.유월영이 말했다.“저도 건강검진 받으러 왔어요.”윤미숙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래. 넌 좀 건강검진을 받아야 해.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나이도 어린데 일하느라 끼니도 제대로 안 챙긴 거 아니야? 재준이 그 녀석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아.”“연 대표님이랑은 상관없어요.”유월영이 말했다.병원은 오래 대화를 나누기 적절한 곳이 아니었기에 둘은 얼마 안 지나 헤어졌다.검진 결과가 나오자 유월영은 의사를 찾았다.의사는 검사 결과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나이는 스물 다섯인데 신체 나이는 서른이 넘네요.”유월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많이 안 좋은가요?”“큰 문제는 아니지만 평소에 건강관리에 힘써야겠어요. 나중에 나이 들면 더 힘들 거예요.”유월영이 물었다.“초음파 결과는 어떤가요?”의사가 초음파 결과지를 보며 물었다.“최근에 어디 불편한 곳은 없었어요?”유월영이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몇 달 전에 유산을 했는데 지금은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요?”의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좀 상태가 안 좋긴 하네요. 유산하고 혹시 제대로 쉬지도 않고 몸을 혹사시켰나요?”유산하고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연재준에 의해 지방으로 발령 났으니 몸 조리를 할 시간이 없었다.“자궁벽이 많이 얇아요. 임신이 잘 안 되는 체질인데 유산한 뒤에 더 안 좋아졌어요. 나중에 아이를 가지려면 힘들겠네요.”의사가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마음을 굳게 먹어야겠네요.”유월영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병원을 나왔다.그때 낙태 수술이 몸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유월영은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으로 가야 했기에 말없이 뒤돌아섰다.“아버지랑 새어머니는 너를 참 좋아하더라. 너 때문에 아버지가 직접 회사까지 찾아오셨어.”연재준이 비웃음을 가득 머금고 말했다.“두 분은 우리가 결혼하길 바라는 눈치던데 난 사생활이 문란한 여자는 딱 질색이라서 말이야.”유월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뒤돌아섰다.“그러니까 제발 저 좀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나요? 제가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생활이 힘들어지면 계속 연 회장님이나 사모님을 찾아가서 불쌍한 척할 수밖에 없잖아요.”“어쩌면 지금 제 건강 상태가 안 좋아진 것도 백유진이랑 대표님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그럼 두 분은 더욱 더 백유진 씨를 싫어하게 되겠죠.”연재준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그는 사나운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유월영, 죽고 싶어?”“살고 싶어서 이러는 거예요. 벌레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하물며 저도 인간이잖아요.”말을 마친 유월영은 대답도 듣지 않고 갈 길을 갔다.뒤에서 그의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떠나갔다.유월영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떠나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백유진과 아직 연락하고 있다라….연재준이 사라진 백유진을 찾아낸 건지, 아니면 연 회장이 결국 아들의 고집을 못 이겨 둘의 사이를 인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원인이야 어찌됐건 연재준과 백유진이 다시 연락하고 지낸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었다.연재준은 일부러 유월영을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마침 지나가다가 병원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보고 다가간 것이었다.그는 최근에 서지욱과 같이 진행하는 사업 때문에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약속 장소로 나온 서지욱은 연재준이 저기압인 것을 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그래도 아주머니가 결국엔 걔를 부축해서 집 안으로 데려갔잖아.”연재준이 의아한 얼굴로 친구를 바라봤다.“백유진 씨가 너희 집 찾아갔다가 비 맞아서 쓰러진 것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거 아니었어?”연재준과 유월영이 선박 출장을 떠났을 때,
이영화는 병원에서 5일 입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퇴원하는 날, 유월영은 친구에게서 차를 빌려 그들을 봉현군까지 데려다 주고 집에서 식사를 함께했다.유현석이 요리를 담당하고 식사가 끝난 뒤에 유월영이 설거지를 담당했다.드디어 집에 온 느낌이 들었다.거실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려서 나와 봤더니 큰언니와 형부가 딸을 데리고 찾아왔다.유월영은 병원에서 그들과 한번 마주친 적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서먹한 감이 있었다.하지만 조카가 귀여워서 계속 안고 있었다.저녁이 되어 큰언니와 형부가 떠날 채비를 했고 유월영도 가는 길에 그들을 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밖으로 나오자 아버지가 나와서 그녀에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이건 엄마가 너 준다고 모은 돈이야.”열어보니 안에 현금이 들어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봉투를 다시 아버지에게 건넸다.“나 돈 있어, 아빠.”“이건 네 생일 때마다 주려고 모은 돈이야. 생일 때마다 엄마가 너희들한테 용돈을 줬었잖아. 언젠가 너 돌아오면 준다고 모아뒀어. 사실 너 그렇게 가고 우리 둘 다 마음이 편치 않았어.”유월영은 착잡한 마음으로 봉투를 받았다.아버지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너도 다 혼자 감당하려고 하지마. 여자애가 돈을 벌어봤자 얼마나 벌었겠어? 엄마 수술비는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 볼게. 그 동안 모은 돈도 조금 있고 큰언니도 좀 도와준다고 했어. 우리는 가족이니까 다 같이 감당해야지.”유월영은 차에 올라 봉투에 든 현금을 세어보았다. 고작 오십만 원이었지만 그 무게는 그 어떤 것보다 무거웠다.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형부가 그녀에게 어디서 일하냐고 물었다.유월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퇴사한지 얼마 안 돼서 지금은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어요.”“처제는 똑똑하니까 좋은 직장 구할 수 있을 거야.”형부의 말에 유영은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그들을 데려다주고 친구에게 차를 돌려준 뒤에 그녀는 지하철을 타고 오피스텔로 돌아갔다.늦은 시각, 그녀는 컴퓨터를 열고 이메일에 접속했다. 예상했던
서지욱이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SK의 막내딸인가 보네. 며칠 전에 재준이가 새로 고용한 비서야.”연재준이 말했다.“이미 퇴사했어.”SK의 오너 일가를 신변에 둔다는 건 굉장히 예민한 일이었다.그래서 내보낸 건데 신연아는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그를 찾아다니고 있었다.“비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왜 유 비서는 안 보여? 전에는 항상 같이 다녔잖아? 재준이 너만 졸졸 따라다니던 사람인데 갑자기 안 보이니까 이상해서 말이야.”노현재가 당구대로 다가오며 연재준에게 물었다.서지욱이 옆에서 대신 대답했다.“유 비서 퇴사했어.”노현재가 놀랍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유 비서가 퇴사했어?”서지욱이 덤덤히 말했다.“고용 계약이 만료됐잖아. 재준이야 유 비서를 계속 붙잡고 싶었지. 그런데 당사자가 간다는데 무슨 소용이야? 그래서 속 좁은 저 녀석이 각 기업에 유 비서 채용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잖아.”노현재는 가장 힘들었던 때에 연재준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었기에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연재준의 편이었다.“주제를 모르네.”노현재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재준은 태연하게 당구대를 잡으며 덤덤히 말했다.“곧 돌아와서 나한테 잘못했다고 빌 거야.”이런 적이 처음도 아니었다.그녀를 지방에 발령냈을 때도 먼저 다가와서 본사로 돌아가고 싶다면서 안기던 여자였다.그는 시간이 좀 소요될 뿐,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거라고 믿었다.한편, 유월영은 아무런 기대 없이 여러 중소기업들에 이력서를 뿌렸다. 그런데 다음 날에 면접 통지가 날아왔다.첫 면접은 화상 통화로 진행되었다. 면접 담당자는 그녀를 높게 평가하며 2차 면접을 약속했다.KTX를 타고 세 시간 정도 가야 하는 지방에 있는 회사였다.거리가 멀어 조금 고민이 되었지만 유월영은 일단 가보자는 마음으로 KTX에 올랐다.가는 도중에도 다른 회사에서 면접 통지를 받았다. 전화로 얘기가 잘 되었기에 시간을 정해 회사에서 정식 면접을 보기로 했다.그녀가 지금 면접을 보러 가는 회사와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현시우는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그런 거 아니야.”“그럼 뭐야?”유월영이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현시우, 무슨 일이 있든 나한테 말해줘. 너도 그랬잖아 여자친구는 이런 순간에 필요한 존재라고. 내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들어줄 수는 있어. 고민은 혼자 끌어안고 있는 것보다 말로 털어놓는 게 훨씬 나아.”“물론, 네가 정말 혼자 있고 싶다면 내가 시간을 줄게. 하지만 연락을 끊으면 안 돼. 그러면 나도 걱정이 되고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말이야. 정말 힘들어.”그녀의 말에 현시우는 마치 심장에 바늘이 꽂힌 것 같았다.그 바늘은 그의 숨소리를 따라 점점 더 깊이 찔러 들어갔다.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월영아, 그냥 여기까지 하자. 내가 사람을 불러 너를 집에 데려다줄게.”유월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지금 나랑 헤어지자는 거야?”현시우의 목젖이 떨렸다.그는 “그래”라고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차마 “아니야”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그가 침묵하는 동안 유월영의 눈이 파르르 떨려왔다.그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두 줄기의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렸다.유월영의 눈물에 현시우는 한 걸음 다가가 그녀를 달래려 했다.하지만 유월영은 한 걸음 물러서더니 이내 뒤돌아 뛰어갔다.현시우가 본능적으로 뒤따라 가려 했지만 연회 부인이 제때 나타나 그를 막았다.“시우야! 지금은 내버려둬.”어머니의 충고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현씨 가문은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고 유월영은 산길을 따라 뛰면서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계속 흘렀다.가을은 좋은 계절이 아니었다.가을은 모든 것이 시들어가는 계절이었다.유월영은 눈앞이 흐릿해졌고 너무 빨리 뛰다가 발이 엉켜 땅에 넘어졌다.흙투성이가 된 채로 집에 돌아온 그녀는 책상 밑에 몸을 숨겼다.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아래층의 부모님이 들을까 봐 소리를 내지 못한 채 손등에
유월영의 망연자실한 모습은 연재준조차 알아차릴 수 있었다.쉬는 시간, 그는 일부러 유월영이 있는 반을 지나가며 텀블러에 물을 담고 있던 유월영을 보고 이름을 불렀다.하지만 그녀는 마치 듣지 못한 듯 돌아보지 않았다.“...”연재준은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생각했다.‘현시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봐야 하나? 설령 죽었다고 해도 최소한 죽었다는 소식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그러나 현씨 가문의 입단속은 철저했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더구나 현시우와 연회 부인의 대화는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다만 현시우는 최근 병원에 드나들고 시골로 내려가는 등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분주하다는 소문만 들렸다.연재준은 손에 동전을 굴리며 고민했다.‘이 틈을 타서 슬쩍 끼어들어 볼까?’보름이 지나도 현시우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결국 유월영은 참지 못하고 생애 가장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그녀는 직접 현씨 가문을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유월영은 경비원에게 자신이 현시우의 학교 친구이며 그가 너무 오래 학교에 나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러 왔다고 말했다.경비원은 그녀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고하겠다고 했다.10분 후, 유월영은 등 뒤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월영아.”그녀가 돌아보자, 나온 사람은 바로 현시우였다.처음에는 기뻤지만 이내 화가 치밀어 올라 유월영은 달려가며 따졌다.“너 요즘 왜 그래? 왜 내 전화를 받지 않는 거야?”그녀는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휴대폰 부모님이 뺏어갔어? 아니면 벌이라도 받은 거야? 혹시 맞기라도 한 거야? 아픈 건 아니지? 얼굴빛이 안 좋아 보이는데 병원은 갔어?”“월영아.”현시우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깊게 꺼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그의 모습은 지치고 초췌해 보였다.불과 보름 만에 그는 한층 더 야위었고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듯 보였
현시우는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는 차분하면서도 냉정한 태도로 어머니를 추궁했다.“단순히 유용우를 봤다는 이유로 유월영이 그의 친여동생이라고 단정 짓는 건 말이 안 돼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러시는데요?”그가 아는 바로는 유월영의 집에는 세 자매가 있었다. 왜 꼭 유월영이어야 하는 걸까?“나이대가 맞지 않아서요?”그는 계속해서 반박했다.“다른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 유월영의 집은 부유한 가정이 아니에요. 자식을 여러 명 키우는 건 부담스럽고, 게다가 고씨 가문의 딸을 키우는 건 위험 부담도 크잖아요. 여동생이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 않나요?”이 모든 시간 동안 그들은 늘 긴장 속에서 살아왔다.연회 부인은 외출조차 하지 못했고, 유용우네 가까이 지내는 것도 두려워했다.그래서 유용우네 부부가 시내로 이사한 것도 몰랐고, 그들의 세부 사항도 알 수 없었다.현시우는 어머니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이유를 수십 가지나 가지고 있었다.연회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그러면 유전자 검사를 직접 해보렴.”“...”만약 그녀가 확신이 없다면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현시우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거미줄처럼 얽힌 핏줄은 그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연회 부인은 그가 이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그를 위로하려고 애썼다.“아마 너는 처음부터 네 감정을 잘못 알았던 것 같아. 너의 마음속에서 유월영에 대한 감정은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 어쩌면 혈연관계가 작용해서 너를 혼란스럽게 만든 걸지도 몰라.”“그렇지 않다면 너의 성격으로 그렇게 쉽게 누군가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네 주변에 훌륭하고 예쁜 여자애들이 많았잖아? 그런데 너는 그들에게 아무 감정도 없었잖아. 그런데 유월영을 알게 된 지 몇 달 만에 이렇게 깊이 좋아하게 된다니, 말이 안 되지 않니?”“그래서 내 생각엔 이건 사랑이 아니라 운명이 장난을 친 거야.
“손님, 이 케이크는 당일 제조된 거라 유통기한이 짧아요. 냉장고에 넣어도 최대 3일밖에 보관할 수 없으신데, 이렇게 많이 사가시면 다 드실 수 있으신가요?”유월영이 조심스레 물었다.연회 부인은 선글라스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일 제조된 거라면 학생이 직접 만든 거예요?”“제가 아니고 저희 가게에서 직접 만든 거예요. 한번 맛보신 후에 마음에 드시면 구매하셔도 돼요. 다만 가족 인원이 많지 않으시면 한 번에 다 사는 건 추천해 드리지 않아요.”유월영이 케이크 한 조각을 잘라 그녀에게 건넸다.“우리 집은 식구가 많아서 다 먹을 수 있어요.”연회 부인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학생, 교복을 보니 신주시 고등학교 학생인 것 같은데 우리 아들도 그 학교 다녀요.”유월영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아, 그러신가요.”“학생, 참 예쁘게 생겼네.”연회 부인은 그녀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고 유월영은 조금 쑥스러워하며 말했다.“아니에요. 손님께서 훨씬 멋지고 품격 있어 보이세요.”“말도 참 예쁘게 하네요.”연회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케이크 맛있네요. 이거 전부 살게요. 계산해 주세요.유월영은 계산하며 말했다.“총 3만 6백 원인데, 3만 원만 받을게요. 맛있으시면 또 오세요.”“그럼 그럴게요.”계산을 마친 연회 부인이 케이크 포장을 들려고 했지만 그녀의 네일아트를 본 유월영이 주저하며 물었다.“차로 오셨나요? 제가 차까지 들어다 드릴게요.”“그래요, 그러면 저야 고맙죠.”연회 부인은 그녀를 차로 데려갔고 유월영은 케이크를 차에 실은 후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연회 부인이 출발하려는 찰나 중년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 옆에 멈췄다.“아빠!”유월영이 그를 부르는 소리에 연회 부인은 본능적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유월영이 아버지라고 부르던 사람은 고해양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이었고 그녀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갑작스러운 만남에 연회 부인은 몸은 얼어붙었고 혼란에
“아니.”현시우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남자들끼리의 문제일 뿐이야.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유월영이 화를 내며 말했다.“별거 아니긴 개뿔!”현시우는 예상밖의 반응에 잠시 멍해졌다.유월영이 이렇게 거친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비록 심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위해 그랬다는 사실에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월영아, 욕은 하지 마.”“할 거야! 너도 싸움질을 했으면서 내가 욕하는 걸 뭐라고 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유월영은 그의 상처를 가까이서 살펴보며 점점 더 화가 났다.“도대체 너랑 싸운 사람이 누구야? 왜 싸운 건데?”현시우는 말하고 싶지 않아 아픈 팔다리를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월영아, 와서 안아줘.”“꿈 깨!”옆방에서 의무실 선생이 연재준의 얼굴에 멍이 든 곳에 약을 바르려고 했지만 그는 무표정하게 이를 피하며 말했다.“필요 없어요. 그냥 나가세요.”의무실 선생은 잠시 망설였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료 상자를 챙겨 방을 나갔다.두 소년의 부상은 비슷했다. 뼈나 근육에는 이상이 없었고 학교 보안요원이 빠르게 싸움을 말려 모두 표면적인 상처에 불과했다.방문이 닫히지 않았기 때문에 옆방에서 들리는 대화가 연재준의 귀에 고스란히 들려왔다.유월영이 현시우를 걱정하며 하는 말들이 하나하나 그의 귀에 들어왔다.연재준은 그 말을 들으며 살을 도려내는 고통이 있다면 이와 같을 거라고 느꼈다.학교는 싸움에 대해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고 다만 두 학생의 부모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다.연민철은 이미 아들 연재준을 신경 쓰지 않았고 반면 현시우의 가족은 이 소식에 크게 놀랐다.현시우는 어릴 때부터 감정 기복이 별로 없고 차분한 성격으로 한 번도 싸움을 하거나 심지어 다툰 적도 없었다.그런 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것도 학교 안에서 참지 못하고 싸움을 벌인 건지 현씨 가문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당시, 현시우의 어머니인 연회 부인은 현씨 가문에서 사모님으로 은둔하며 지냈다.하지
현시우가 유월영을 집까지 데려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내일 내가 대신 병가를 낼 테니까 너는 집에서 푹 쉬어. 책도 보지 말고 문제도 풀지 마.”유월영은 그의 강압적인 태도에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다.“괜찮아. 나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의사 말 못 들었어? 네가 과로로 쓰러진 거라고. 시간이 부족하면 중요하지 않은 일부터 줄여야 해. 월영아, 모든 걸 다 해내려고 하지 마. 그리고 모든 걸 완벽하게 하려고도 하지 마.”현시우는 그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유월영은 항상 모든 일을 포기하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집착과 강박은 결국 그녀를 지치게 만들고 말았다.사람의 몸은 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유월영은 신중히 고민한 끝에 어머니에게 댄스 수업을 그만두겠다고 말했고 학교의 댄스 동아리도 탈퇴하기로 결정했다.춤은 그녀에게 단순한 취미였지만 이제는 정상적인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었기에 잠시 내려놓는 것이 맞았다. 대학에 가거나 졸업 후 여유가 생기면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주말과 월요일까지 3일이 지나고 유월영은 학교로 돌아왔다. 몸 상태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감기도 거의 나아 약간의 콧물만 남아 있었다.유월영이 등교한 날, 연재준은 유월영의 교실 앞을 지나쳤다. 친구들과 웃으며 대화하는 그녀의 얼굴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병원에서 그는 원래 깨어난 유월영에게 잃어버린 옥불을 따질 계획이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온 전화로 인해 급히 돌아가야 했다. 부모님의 이혼 문제 논의에 꼭 참석해야 했던 것이다.그리고 익명의 영웅이 될 생각이 없었던 그는 방과 후 그녀를 찾아갈 계획이었다.연재준이 유월영의 반으로 향하던 중, 현시우와 마주쳤다. 연재준은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치려 했지만 현시우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그날 월영이를 병원으로 데려다줘서 고마워.”연재준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고맙다면 네가 아니라 본인이 와서 말해야지. 넌 대리인이야?”현시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담담히
운전기사는 연재준의 상태를 걱정하며 우산을 들어주었지만 연재준은 비에 젖은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그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고 병실에 도착했을 때 유월영은 링거를 다 맞고도 여전히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연재준은 침대 옆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그의 몸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한참을 서 있던 그는 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유월영, 이제 너는 나한테 빚졌어.”그녀 때문에 잃어버린 것은 그녀가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이었다.얼마 후, 유월영이 천천히 눈을 떴다. 침대 앞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물웅덩이와 함께 현시우가 앉아 있었다.“...”유월영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병원이었지만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이 쉬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목 아파? 편도선염이야. 당분간 말하지 마.”현시우는 탁자에 있던 따뜻한 물을 들고 한 팔로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을 한 모금씩 먹이며 부드럽게 상황을 설명했다.“너 열이 나서 길에서 쓰러졌어. 다행히 누군가 널 병원으로 데려왔어.”“기절했다고?”유월영은 놀란 눈으로 현시우를 바라봤다. 폭우 속에서 길을 헤매던 기억은 있었지만 쓰러졌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따뜻한 물이 목을 적시니 조금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목이 아팠다.유월영이 억지로 몇 마디를 이어갔다.“누가...날 병원에 데려왔어?”현시우는 물컵을 내려놓고 그녀가 좀 더 편히 누울 수 있도록 베개를 정리했다.“간호사 말로는 너랑 같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었는데 이름을 남기지 않았대.”“시험 끝나고 널 찾으러 갔는데 네 짝꿍이 네가 집에 갔다고 했어. 근데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걱정돼서 네 집으로 갔거든. 근데 네가 없더라.”유월영의 가족조차 그녀가 어디 갔는지 몰랐고 현시우가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위험에 빠진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가족들과 함께 학교에서 집까지의 길을 수색했다. 그러다 편
연재준의 화난 표정은 유월영을 바라보며 점점 누그러졌다.그녀는 너무 말랐고 얼굴이 창백했다.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으며 온몸이 빗물로 흥건해져 안쓰럽기 그지없었다.게다가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건 드문 일이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수건을 들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과 목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다 부드러운 피부에 손이 닿자 순간적으로 손을 홱 뒤로 뺐다.소년의 얼굴에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귓불은 점점 붉어졌다.연재준은 숨을 멈추고 다시 유월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고 그는 그제야 살짝 안도했다.그녀가 자신을 기회를 노리는 이상한 변태라고 생각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연재준도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다.지난 18년간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던 자신이 왜 교내 축제에서 춤추는 그녀를 보고 이렇게 빠져들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유월영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너 그렇게 예쁘지도 않아. 사람 보는 눈도 별로고.”“왜 하필 현시우 같은 놈을 좋아하는 거야? 사람들은 항상 나랑 현시우를 비교하잖아. 그러니 너도 내 이름을 들어봤을 텐데...내가 너 대신 농구공도 막아줬고 도서관에서 햇빛도 가려줬잖아. 다 잊은 거야?”그는 자신의 기억을 곱씹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우리 함께 변태 선생을 잡은 적도 있잖아.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거지...왜 한 번도 날 찾지 않았어?”“내가 너 앞을 그렇게 여러 번 지나갔는데 넌 왜 나한테 아는 척도 안 했어? 현시우가 나랑 친해지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거야? 너 그렇게 말을 잘 듣는 아이였어?”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중얼거렸다.“나도 나름 괜찮게 생겼잖아. 남자 친구를 바꿔보는 게 어때? 내가 현시우보다 너한테 더 잘해줄 자신 있는데. 유월영, 내 말 들려?”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그는 이렇게 많은 말을 했지만 유월영은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연재준은 그녀가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
유월영은 줄곧 모범생이었다. 지각이나 조퇴는커녕 항상 성적도 우수했기에 선생님들은 항상 그녀를 신뢰했다. 그래서 그녀가 조퇴를 요청하자 선생님은 별다른 질문 없이 허락해 주었다.다만 유월영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자 선생님은 부모님께 연락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유월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그녀는 어머니가 자전거를 탈 줄 모르고 아버지는 성격이 급했기에 아버지와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게다가 선생님은 그녀와 현시우가 가까운 사이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사적인 문제에 간섭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이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발언권이 크지 않았다.선생님은 현시우가 차량을 보내줄 것이라고 짐작하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조퇴 허가서를 작성해 주었다.“비가 많이 올 수도 있으니 밖에 오래 머물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렴. 내일도 몸이 안 좋으면 꼭 병가를 내고 쉬어.”“감사합니다, 선생님.”갑작스러운 폭우가 내렸지만 유월영은 현시우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그녀는 어젯밤 이미 그가 오늘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고작 20분 거리인데 그를 찾는다 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비가 온다고 해도 우산을 가지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 여겼다.그러나 유월영은 집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힘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갑작스러운 폭우가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쏟아졌고 강풍과 빗물 때문에 숨쉬기조차 어려웠다.유월영은 허둥지둥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지만 강한 바람에 우산이 뒤집히고 순식간에 옷이 젖어버렸다.앞이 점점 보이지 않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휘청였다.그때 멀리서 날카로운 경적이 들렸다.빠르게 달려오는 트럭을 발견한 유월영이 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발밑에서 미끄러운 무언가를 밟아 넘어질 뻔했다.그 순간 강한 손길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그 사람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유월영은 그의 가슴에 부딪히며 싸한 솔잎 향이 풍겨왔다.본능적으로 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