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야? 고민서가 병석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데 크로노스는 아직도 그 여자를 보러 돌아오지 않았다고?”마르세유의 한 호화 저택에서 엘리자베스 부인은 하얀 공주풍 잠옷을 입고 피아노 앞에 앉아 여유롭게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그녀의 심복이 보고했다.“맞습니다. 신주시에서 크로노스를 감시하던 정보원의 말에 따르면 크로노스는 아직 귀국할 계획이 없다고 합니다.”엘리자베스 부인의 웃음소리가 방안에서 울려 퍼졌다. 그녀는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피아노 건반을 눌렀고 “엘리제를 위하여”가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나왔다.“예전에 둘이 함께 있는 걸 보면 금슬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고. 난 다니엘 부인과 하스 공작처럼 세기의 사랑을 할 줄 알았는데 결국 그 정도에 불과하군.”심복이 웃으며 말했다.“이 세상에 자신의 약혼녀가 전남편과 한 침대에서 뒹구는 걸 견딜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모두 사모님께서 잘 계획하신 덕분에 드디어 둘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겁니다.”“똑똑한 사람 한 명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게 바로 서로 마음이 통하는 연인이야. 그 두 사람이 함께 있다면 한 명이 쓰러져도 다른 한 명이 버티고 있으니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지. 마치 옛날에 내가 크로노스를 중환자실에 보냈을 때, 그때 레온 가문이 드디어 내 손에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고민서가 나타났던 것처럼 말이야.”엘리자베스 부인은 피아노 앞에서 일어나 머리카락을 꼬며 와인 장식장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이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내 공이 아니라 그 오 변호사 덕분이지. 그는 정말 사람의 심리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더군. 이런 계획을 생각해 내다니.”심복이 물었다.“그럼 다음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다니엘 저택에 사람을 보내 고민서를 제거할 기회를 노릴까요?”엘리자베스 부인은 와인 장식장에서 레드 와인을 꺼내 잔에 따르며 천천히 말했다. “말이 나온 김에 협력자의 의견을 존중해야겠지...오 변호사한테 지금 연락해 봐.”“네.”심복은 바로 번호를 눌렀다.엘리자베스
다니엘 저택 2층 침실.한세인은 약을 들고 침대 앞에 가서 아직 혼수 상태에 있는 유월영을 조심스럽게 깨웠다.“...아가씨, 아가씨.”“약 먹을 시간이에요. 의사 선생님께서 4시간마다 복용해야 한다고 당부하셨어요. 약을 드셔야 병이 나을 수 있죠.”유월영은 얼굴이 창백했고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시우 씨는 돌아왔나요?”“대표님은...지금 마르세유로 돌아오는 길에 있습니다.”한세인은 거짓말을 못 하기에 유월영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병이 났는데 보러오고 싶었다면 진작 돌아왔겠죠. 돌아오지 않을 거 알면서 왜 날 속이려 하는 거죠?”유월영이 쓸쓸하게 웃었다.“아가씨, 어쩌다가 대표님이랑 이렇게 되신 건가요?”한세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놀랄 것도 없어요. 이 세상 많은 연인들은 서로 사랑하다가 미워하게 되죠. 우리는 그저 조금 빨랐을 뿐이에요.”유월영은 침대에 몸을 지탱하며 앉았다.한세인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닐 거예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대표님은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유월영이 힘없이 말했다.“자선 승마 대회를 열었던 날, 한 비서님이 노현재 씨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저보고 고려하라고 했던 걸 기억하세요?”“네.”“한 비서님이 그때 저에게 노현재 씨나 신 교수님과 사귄다고 해도 상관없으니 시우 씨만 아니면 괜찮다는 뉘앙스로 말하셨죠. 그래서 저는 한 비서님이 저와 시우 씨가 함께 있는 걸 원치 않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우리가 정말 헤어진다고 하니 아쉬워하는 건 왜죠?”한세인은 줄곧 두 사람은 결혼하면 안 되고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한세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유월영의 침대 곁에 무릎을 꿇었다.“아가씨와 대표님께서 서로 좋게 헤어졌다면 상관없지만 이렇게 헤어진 걸 보니 저도 모르게 그만...”유월영은 지난번부터 궁금했다.“한 비서님은 시우 씨에게 애모의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 사이를 그렇게 반대했었나요?”“그건 아직 말할 수 없
유월영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물었다.“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연재준은 창백한 유월영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불과 며칠 만에 그녀는 많이 수척해졌다.그는 숨을 내쉬며 가슴에 약간의 통증을 느껴 손을 가슴에 가져갔다.“당신이 이 모양인데도 혼자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거 보면 내가 들어온 것도 이상할 게 없지.”유월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날 찾으러 마르세유까지 온 거예요?”연재준이 말했다“소문에 당신이 방에 감금된 채 병원에도 못 가게 한다고 해서 말이야. 믿을 수가 있어야지.”“믿지 않으면서도 왔어요?”“만에 하나 정말일까 봐 두렵기도 하고.”유월영은 벽에 등을 기대고 그를 바라보았다.“연 대표님은 오면 안 됐어요. 요즘 저랑 너무 가까워지는 바람에 파트너들이 연 대표님이 배신할까 봐 의심하고 목숨을 노리게 될 수도 있는데, 두렵지 않나요?”“이렇게 홀로 생소한 마르세유에 무모하게 들어온 건 그 사람들에게 공격할 기회를 준 셈이에요.”연재준은 오히려 웃음을 지었다.“내가 당신의 편이라서 그 사람들이 나를 쫓아오는 거라고 걱정하고 있나 보네. 그러면 당신도 내가 당신 편이라는 걸 인정하는 거야?”유월영은 기가 차서 싸늘하게 비웃었다.“유언장부터 쓰세요. 연 대표가 정말 객지에서 죽기라도 하면 연씨 가문 사람들이 그 죄를 내게 물을 테니까요.”연재준은 자기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는 알 것 같았다. 유월영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할 때 항상 차가운 말로 그의 화를 돋우곤 했다.그는 주위를 둘러본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난 죽지 않을 거야. 당신이 안전하기만 하면 나도 안전할 거니까.”연재준은 유월영앞에 서서 지켜줄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다해 살아남을 것이다.“아무도 없어.”그는 손을 내밀어 유월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내가 여기서 데려갈게. 약속해.”다니엘 저택은 매우 컸다.저택 내의 가정부들은 낮잠 시간이라 들어가 쉬고 있었지만 외부 경비원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
정원사는 이상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고 가위로 몇 번 꽃가지를 잘라낸 후 돌아섰다.“...”꽃밭 아래에서 유월영은 연재준의 위에 엎드려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연재준의 얼굴은 꽃잎의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유독 그의 새까만 눈만은 선명하게 유월영을 바라보고 있었다.“당신과 현시우, 이 모든 걸 짜고 사람들을 속인 거지?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졌다고 말이야.”유월영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연재준이 조용히 말했다.“당신은 항상 진심으로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었어. 절대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좋은 말을 하지 않지. 나와 헤어진 뒤에 당신은 나에 대한 나쁜 기억만 기억했듯이.”“그러니 당신이 이렇게 현시우를 위해 변명한다는 것은, 이번 일로 두 사람이 이렇게 난리를 피우는 게 모두 연극이라는 뜻이지. 왜 그런 거야? 이번에 목표는 누구지?”유월영은 연재준이 똑똑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가끔은 그가 지나치게 예리하게 꿰뚫어 본다고 생각했다.“현시우가 당신을 마르세유로 보낸 건 두 사람의 목표 인물이 마르세유에 있다는 거고. 현시우의 그 친척 엘리자베스 부인인가?”“내가 전에 말했잖아. 현시우의 사고가 그 여자의 짓이라고. 이번에는 그 여자가 신현우와 손을 잡고 당신네 놀이공원 사고를 일으켰으니 마침내 그 여자를 찾아 결판내려고 하는 거네?”유월영이 차갑게 말했다.“때로는 너무 많이 아는 것도 꼭 좋지만은 않아요. 연 대표님, 너무 똑똑한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하는 법이죠.”연재준이 그녀의 입을 가볍게 막았다.“내게 저주를 걸지 마. 나는 오래 살아야겠으니까.”그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니까 내 추측이 맞는 거야?”유월영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해요. 똑똑한 척하는 사람은 예외라고요.”너무 똑똑한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하지만 똑똑한 척하는 사람은 예외라.“그러니까 내가 틀렸다는 뜻이야?”유월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밖에 있
순찰 중인 경비원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창고의 작업자가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아가씨, 가주님께서 저택을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라고 하셨습니다. 제발 저희를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유월영은 그들과 더 할 말이 없었다.연재준의 등에 업힌 채 유월영의 머리카락이 그의 가슴 쪽으로 흘러내렸고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연 대표님 몸 상태도 나보다 나아 보이진 않는데 날 데리고 갈 수 있겠어요?”“당연하지. 만약 못나간다면...”유월영은 그가 또 자신한테 유리한 헛소리를 할까 봐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 우리가 도망치지 못한다면 여기서 죽어서 각자 다른 곳에 묻히는 거예요.”연재준이 낮게 웃었다. 바람에 유월영의 머리카락이 그의 입술에 닿자 그는 고개를 돌려 살짝 입을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그런 잔인한 결말을 맞을 수 없지. 반드시 당신을 데려갈 거야!”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연재준은 유월영을 잡으러 달려든 작업자를 발로 차서 날려버렸다!작업자들은 한 명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따질 새도 없이 세 명이 일제히 달려들었다.연재준은 유월영을 업고 있어 두 팔을 자유롭게 쓸 수 없었다.유월영은 이러다가 승산이 없을거라 생각했다.“우선 나를 내려놔요.”“기억나? 전에 영안에서 당신이 수영이한테 버려져 외딴 산속에 남겨졌었잖아?”유월영은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그날 밤, 마을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고 시신을 묻은 일이 탄로날까 두려워 두 사람을 에워싸고 해코지하려 했다.“그때도 난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어. 지금은 더더욱 그래.”하지만 유월영은 그가 그때 자신을 내려놓지 않아서 몽둥이로 맞았던 것을 기억했다쿵!마치 그 옛날의 일이 반복되는 것처럼, 이번에도 연재준은 작업자가 휘두른 몽둥이에 허벅지를 맞고 휘청거렸다. 그 바람에 유월영도 하마터면 그의 등에서 떨어질 뻔했다.연재준은 즉시 평형을 잡고 또 다른 작업자를 발로 차서 밀어냈지만 그의 숨소리는 확연히 거칠어졌다.유월영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말했다.“연 대표님, 지금
그 대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농구공이 그 남학생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자신의 오만함에 걸맞게 상대 팀 선수들이 앞을 가로막아 숨통을 죄어오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농구공을 손에서 튕기고 있었다. 그는 능숙하게 드리블하다 몸을 회전하여 상대를 따돌렸다. 그가 회전할 때, 허리에 걸친 교복 상의가 휘날리며 곡선을 그렸다.유월영은 “우아함”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이렇게 스피드와 힘 대결이 가득한 농구 경기를 보면서“우아함”을 떠올리게 하다니 놀라웠다.남학생은 길쭉한 팔다리에 신체 비율이 뛰어났다. 앞을 주시하는 눈빛은 마치 한 마리 표범처럼 강렬했고 누가 그를 막아도 결국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살벌한 기세가 느껴졌다.그는 공을 잡고 점프하여 골대에 슛을 던졌다.여학생들은 환호하며 소리 질렀고 모두 그 공이 들어갈 거라고 확신했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상대 팀에도 실력이 뛰어난 선수가 있었으며 상대방은 점프하여 공을 막아냈다. 공은 반대쪽 농구장까지 날아가며 관중석을 향해 덮쳐왔다!여학생들은 꺅 소리 지르며 피했고 유월영도 피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학생들의 당황한 손길에 밀려 땅에 넘어졌다.농구공이 곧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유월영은 눈을 감고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의 뒤통수와 허리를 누군가가 감싸안는 느낌이 들었고 이내 그녀를 안고 옆으로 구르며 피했다.풀잎 내음과 시원한 향기가 유월영의 코끝에 닿았다. 그 나이 때 남학생들과 달리 땀 냄새 없이 깨끗한 느낌이었고 그녀는 그 향을 더 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살며시 고개를 든 유월영은 한 쌍의 까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는 외꺼풀에 약간의 주름이 있어 그녀를 묘하게 끌어당겼다.유월영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구르면서 잔디밭의 자동 살 수 장치에 부딪히는 바람에 물이 흩뿌려지면서 그녀의 얼굴을 흠뻑 적셨다.유월영은 급히 눈을 감았다.“바보.”남자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왔다.유월영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수술이 끝나 병실로 옮겨질 때까지도 유월영은 자신이 유산으로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그녀를 병실로 데려간 간호사는 인적 사항을 등록하기 위해 그녀에게 물었다.“유월영 환자분, 가족들은 어디 계신가요?”유월영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천장만 올려다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간호사가 재차 물었다.“유월영 씨, 가족들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이때, 약품을 정리하던 다른 간호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한테 줘. 그거 내가 입력할게. 환자가 구급차에 실려올 때 신분증이랑 카드 나한테 줬었어. 바로 등록하고 비용 결제하면 된다고. 아마 이 환자는….”유월영은 그제야 입술을 달싹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저는 가족이 없어요.”진한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점점 더 진실되게 다가왔다. 그녀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었다.깊은 절망감이 찾아왔다.수술을 마친 유월영은 홀로 병원에서 사흘간 입원해 있었다.그 동안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나흘 째 되던 날, 드디어 연재준에게서 전화가 왔다.“유 비서, 무단 결근 3일이면 충분히 휴식하지 않았어? 지금 옷 입고 서덕궁으로 와.”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배경 음악과 여자들의 웃음소리까지 같이 전해져 왔다. 유월영은 지금 입원 중이라고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유 비서.”낮게 깔린 중저음 목소리가 재차 전해졌다.화가 많이 났다는 증거였다.유월영은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키고 그대로 병원을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부랴부랴 서덕궁으로 향했다. 그녀는 가는 길에 차 안에서 화장을 했다.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녀는 대충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고 카운터로 직행했다.“해운그룹 연 대표님이 계신 방이 어디죠?”고개를 든 어린 남직원은 눈앞의 미모의 연인을 보고 수줍게 웃으며 다급히 길을 안내했다.“연 대표님은 1번 룸에 계십니다. 제가 안내할게
술자리가 끝나고 유월영은 고객사 직원들을 한 명씩 차에 태워 보냈다. 모든 일이 끝난 뒤,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길가 가로등에 등을 기댔다. 이미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듯이 아팠다.립스틱은 이미 지워진지 오래고 파리한 입술에는 핏기 한 점 없었다.그녀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연재준의 운전기사가 다급히 다가오며 그녀에게 말했다.“유 비서님, 먼저 차에 타실래요?”유월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힘겹게 뒷좌석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 문이 열리더니 밖에 연재준과 여자애가 서 있었다. 같이 타려고 했는데 유월영이 먼저 타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연재준이 그녀를 보고 인상을 확 찌푸렸다.여자는 다급히 달려가서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대표님, 제가 앞에 탈게요.”연재준은 짜증스럽게 문을 쾅 닫고 차에 오르며 말했다.“유진이 먼저 데려다줘.”유월영은 고통스럽게 두 눈을 감았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유산하고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술을 마시니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차는 한 낡은 아파트 구역으로 들어섰다. 유월영이 잠깐 눈을 붙이고 있는데 연재준이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골목이 어두워서 위험해. 유 비서가 유진이 집까지 좀 데려다줘.”백유진이 흑수정 같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말했다.“괜찮아요, 대표님. 언니도 피곤할 텐데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어요. 조금만 더 걸으면 도착해요. 혼자 올라갈게요.”차에서 내린 그녀는 뒷좌석 차창에 대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대표님은 월영 언니 바래다줘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좋은 꿈 꿔요.”차갑기만 하던 연재준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그래, 좋은 꿈 꿔.”유월영은 차에 오르고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운전기사는 유월영을 집에 데려다주는 대신, 연재준의 동해안 별장으로 차를 돌렸다. 그는 연재준의 가까운 심복 중 한 명으로써 눈빛 하나로도 연재준의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집 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