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은 루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아쉽네, 난 시우 씨 고모님이신 줄 알았어. 그러면 전에 묵은 빚까지 다 꺼내서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했는데.”유월영이 말한 묵은 빚이란, 현시우의 고무 엘리자베스 부인이 꾸민 그 교통사고를 말했다.현시우는 유월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서두를 필요 없어.”유월영은 갈비를 한 조각 집어 들고 다른 음식들도 좀 담아서 현시우와 함께 신연우에게 다가갔다.현시우는 이미 신연우와 오랜 친구였고 신연우가 처음 유월영에게 접근한 것도 그의 부탁을 받고서였다.현시우는 가까이 가기도 전에 손을 내밀며 말했다.“연우야.”신연우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안심하며 미소를 지었고 현시우를 반기며 말했다.“와줘서 다행이야.”현시우는 신연우의 다리를 보며 말했다.“의사를 데려왔어. 결혼식이 끝나면 한 번 봐보자.”신연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또 의사야? 우리 집엔 의사가 너무 많아서 축구팀을 만들어도 될 정도야.”하지만 유월영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여러 의사분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좋죠.”신연우는 고개를 숙여 다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그래요. 그렇게 하죠.”세 사람은 이내 담소를 나누며 식사하기 시작했다. 유월영은 갈비가 조금 짠 듯하여 웨이터를 불러 와인을 부탁했다.신연우와 얘기를 나누면서도 현시우는 정확히 포착하고 유월영의 손을 끌어내면서 억지로 과일 주스를 건네주었다.단 걸 좋아하지 않는 유월영은 달갑지 않은 듯 주스를 밀어냈다.현시우는 말 없이 웃으며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 양복 앞주머니에 꽂아둔 하얀 동백꽃을 떼어 그녀의 귀 옆에 꽂아주었다.유월영은 이게 무슨 주책이냐는 듯 그를 흘기다 더 이상 와인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와인잔을 놓았다.현시우는 유월영이 별말을 하지 않자 고개를 돌리다 무심코 맞은편을 한 번 바라보았다.맞은편에는 연재준이 서 있었다.연재준은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로 방금 그 장면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오성민은 바로 신주시에 가서 이승연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비서가 그를 말렸다.“윤 대표님의 교훈을 잊으셨습니까? 바로 유월영이 놓은 덫에 빠져 그렇게 된 거잖아요. 그 여자는 너무 교활해요. 어디에서 함정을 파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고요.”오성민은 순간적으로 이성을 되찾았다.비서가 제안했다.“차라리 연 대표한테 전화를 걸어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분은 이혁재와 절친한 사이이니 이혁재의 지금 상황을 잘 알 겁니다.”일리가 있었다.오성민은 바로 연재준의 번호를 눌렀다.연재준은 서지욱을 데리고 막 병원에 도착한 참이었다. 그는 간단하게 말했다.“지금 제가 알고 있는 것도 오 변호사님과 다를 바 없어요.”오성민이 입을 열었다.“만약 상황을 알게 되면 저에게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부탁드려요..”“알겠습니다.”연재준은 전화를 끊지 않은 채 수술실로 빠르게 걸어갔다.수술실 앞에는 이혁재 외에도 유월영과 현시우가 있었다.유월영은 이미 드레스를 갈아입고 지금은 아주 따뜻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연재준은 그녀를 슬쩍 바라본 뒤 이혁재한테 물었다.“승연 씨 상황이 어떤 것 같아?”이혁재가 중얼거렸다.“아직 의사가 나오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그러다 그는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재준아, 내가 봤어. 방금 승연 누나가 정말로 눈을 떴어. 내가 봤다고. 비록 몇 초였지만 모니터에 있던 데이터도 전이랑 달랐어. 누나가 정말로 깨어나려나 봐. 정말로 깨어나려고...”2년이었다.2년 전, 이승연은 살인사건으로 고소당한 학생을 변호하다 법정에서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고 6개월 된 뱃속의 아이까지 잃고 그 후로 쭉 혼수상태에 빠졌다.이혁재는 깊은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렸다.“승연 누나, 누나가 깨어날 줄 알았어.”서지욱은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연재준의 전화기 너머로 오성민도 모든 걸 듣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고마워요. 연 대표님.”연재준은
이혁재는 몇 초간 생각하다 차분하게 말했다.“재준아, 며칠 전에 감기에 걸렸다고 했던 것 같은데 먼저 들어가서 쉬어.”연재준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그런 거 아니야. 그냥 승연 누나를 지키고 싶은 것뿐이야. 이해해 줘.”이혁재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더 이상 누나를 일고 싶지 않아.”연재준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떠났고 서지욱도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병원을 나온 연재준은 실망하거나 화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차 문을 열고 막 차에 오르려 하자 서지욱이 갑자기 그를 붙잡았다.“재준아, 우리 어디 좀 가서 얘기하자. 할 말이 있어...현시우에 관한 일이야.”서지욱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고 뭔가 암시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보고 연재준의 얼굴이 굳어졌다.“우리 집으로 가자.”“그래.”연재준은 아직 산수원에 살고 있었다.두 사람은 집에 들어서 불을 켰다. 서지욱은 집안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집안은 적막했고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원래 다른 사람이 들이는 걸 싫어하던 연재준은 최근 몇 년 동안 더욱 심해진 듯했고 가사도우미만 가끔 집을 청소하러 오곤 했었다.서지욱이 입을 열었다“혼자 이런 곳에 살면 없던 병도 생기겠다. 집이 너무 우중충하잖아.”연재준이 말했다.“아니야. 조용하고 좋아.”두 사람은 발코니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라탄 의자와 테이블 세트가 놓여 있었다.서지욱은 테이블 위에 있던 전기포트에 물을 끓였고 연재준이 티백을 꺼냈다.시간은 이미 새벽 2시가 넘었고 두 사람은 따뜻한 차를 준비하며 얘기를 주고받았다.연재준이 무심코 담배 한 대를 건네자 서지욱은 아예 담뱃갑을 빼앗아 갔다. “폐가 안 좋은 사람이 담배까지 피우고, 빨리 죽고 싶어 안달이 난 거야?”연재준이 담담하게 물었다.“고씨 가문 아들의 행방은 찾았어?”작년 10월, 서지욱이 회사 일로 국내와 해외를 돌아다닌다고 했을 때 연재준은 그에게 고씨 가문 유괴된 아들의 행방을 알아봐 달
차가 다 우려졌다.연재준은 차를 바로 마시지 않고 쌉쌀한 차의 향기를 맡으며 생각에 잠겼다.얇은 찻잔은 이내 뜨거워졌고 그의 손끝은 뜨거운 찻잔에 빨갛게 달아올랐다.서지욱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재준아?”연재준은 찻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시간을 내서 프링스에 한번 다녀와야겠어.”...유월영과 현시우가 병원을 나섰을 때는 이미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심호준이 알려준 소식 덕분에 유월영은 기분이 아주 좋아져 피곤할 줄 몰랐다.그녀는 병원을 나선 후에도 차에 바로 오르지 않고 인적 없는 거리를 걸었다.현시우도 당연히 따라나섰고 운전사는 그들의 뒤에서 천천히 차를 몰며 따라왔다.유월영은 밤바람을 맞으며 두 손을 등 뒤로 하고 현시우를 마주 보며 뒤로 걸었다..다행이 이 시간엔 차가 없었고 길거리는 조용했다.현시우는 연회장을 나오면서 추위를 막기 위해 정장 위에 긴 코트를 걸쳤고 외국에서 오래 생활한 탓인지 그한테서 유럽 신사의 우아함과 로맨틱함이 묻어났다.유월영이 물었다.“시우 씨, 짐은 어디 있어?”현시우가 대답했다.“호텔로 보냈어.”“어느 호텔?”현시우가 미소 지으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녀의 질문이 쓸데없다는 듯 말했다.“당연히 네가 묵는 호텔이겠지.”“아~”유월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내가 깜빡했네, 나 요즘 그 호텔에 없어. 집에서 살고 있거든, 그러니까 시우 씨 이제 호텔에 혼자 있어야겠네~”현시우가 웃으며 말했다.“봉현진에 간 거야? 그럼 나도 가서 네 양부모님께 인사를 드려야지.”“봉현진말고.”유월영이 말했다.“연말 전에 내가 고씨 가문의 오래된 집을 연재준한테서 다시 가져왔잖아. 이미 다 수리되어서 오늘 내 짐을 그 집으로 옮겼어.”현시우는 멈칫하다 이내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네가 말한 집이 그 집이구나.”유월영은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말했다.“걱정하지 마. 시우 씨 방도 준비해 놓았으니까, 지금 바로 호텔에서 짐을 그쪽으로 옮기면 돼.”
웃기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 유월영은 말문이 막혔다.“애처럼 이러는 거야? 크로노스 씨?”현시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옷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알았어. 이제 늦었으니...집에 가야지.”두 사람은 차에 올랐고 유월영이 묵고 있는 고씨 가문의 옛집으로 향했다.옛집이 위치한 지역은 부자들이 사는 동네가 아니었으며 굳이 분류하자면 일반 주택지였다.길가에는 아직도 밤에만 나오는 야식 노점들이 몇 군데 있었고 장사도 잘되고 있었다.한 우동가게를 지나자 유월영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했다.현시우가 물었다.“배고파?”“조금 배고프네. 이 집 우동이 맛있더라고. 시우 씨도 먹어보면 좋아할 거야. 며칠 전에 주인한테 들었는데 이곳에서 거의 30년 동안 장사했다고 해. 매일 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지지 않고 나온대. 생각해 보니까 그러면 우리 부모님도 여기서 먹었을 거 아냐, 아, 우리 오빠도.”유월영은 그저 현시우에게 우동을 사주고 싶었고 그래서 듣고 있던 현시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유월영은 차창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사장에게 우동 두 그릇을 주문하려고 했다.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현시우가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아챘고 그대로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유월영은 그대로 그의 몸에 넘어졌다.유월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현시우를 올려다보았다.불 꺼진 가로등 아래 그의 얼굴 절반은 어둠에 가려졌고 그의 살짝 긴장된 턱선만 볼 수 있었다. 현시우는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세요.”“잠깐! 아직 사지도 않았는데!.”유월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뭐 하는 거야?”현시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로등의 불빛이 오뚝한 콧날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눈빛은 평소처럼 차분했다.“난 네가 끓여준 국수 먹고 싶어. 집에 가서 끓여줄 수 있지?.”“뭐라고?”유월영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4시였다.“악덕 사장들도 이 정도로 직원 갈아 넣진 않아. 한밤중
유월영이 대답했다.“맞아. 대부분은 원래 집에 있던 물건들이야. 어떤 것들은 너무 오래되어 썩어버려서 전혀 쓸 수 없었어. 그래서 옛날 디자인대로 새로 주문 제작한 거야.”현시우의 목소리가 약간 무거워졌다.“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 인생무상 새옹지마라고 지난 일은 지나간 대로, 망가진 건 망가진 대로 두는 게 좋아. 억지로 남겨두면 슬픔만 더할 뿐이야.”유월영은 현시우의 그 말이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국수를 삶으면서 말했다.“내 생각은 좀 달라.”“난 사실 부모님이 아주 낯설어. 그분들의 성격, 성향, 심지어 키와 외모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어. 그저 다른 사람들한테서 단편적으로 들은 얘기밖에 없지.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우리 부모님이 대단하신 분들이라고 알려줘도 나의 마음에 와닿지 않아.”“하지만 이 집에는 우리 부모님이 살았던 흔적이 있어. 가끔 벽의 흠집이나 탁자 위의 흠집을 무심코 만지면 마치 그들의 체온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아.”“그래서 난 그것들을 보존하는 게 가치 있다고 생각해.”“그래.”현시우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듣고 나서야 대답했다. 그는 오늘 밤 유난히 말이 없었다.그는 다시 생각에 잠긴 듯 창가로 가서 잠시 생각하더니 몸을 낮춰 웅크렸다.국수는 금방 준비되었고 유월영은 두 그릇 담아서 식탁에 올려놓았다.현시우가 아직 창 아래에 웅크리고 있자 유월영은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해서 다가갔다.“뭘 그렇게 보고 있어...”픽.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 안의 불이 갑자기 꺼졌다.유월영은 잠시 멈칫했다.“전기가 나갔나?”오래된 집이라 전압이 불안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곧이어 방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고 검은 그림자가 방안에 언뜻거렸다.유월영은 즉시 경계 태세를 갖추고 현시우를 바라봤다. 자연히 낌새를 알아차린 현시우도 앉은 채로 조용히 단도를 빼냈다.두 사람은 모두 소리를 내지 않고 주위를 살폈다.곧이어 식탁 쪽에서 인기척이 나자 유월영은 재빨리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밖에서 들
노현재는 소파 등받이를 잡고 바닥에서 일어섰다. 그는 완전히 도둑놈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검은 옷에 검은 바지, 불빛이 없었다면 완벽하게 어둠 속에 녹아들었을 것이다.그는 일부러 여유를 부리며 투덜거렸다.“역시 상류 사회의 배운 사람들이군. 국수도 이렇게 조금 먹더라니. 당신 두 사람 양을 합쳐도 내 위를 채우기엔 모자란 것 같네.”현시우가 그를 쓰러뜨렸을 때 그릇에는 국물이 조금 남아있었고, 그 국물이 노현재의 점퍼에 다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점퍼를 벗어 한쪽에 던지며, 유월영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그래서, 국수 더 있어?”유월영은 처음에 그가 누군가가 보낸 자객인 줄 알고 긴장했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없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올 거면 그냥 오지 왜 이렇게 우리를 놀라게 하는 거예요? 한 비서와 지남 씨가 없어서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노현재는 자부심 가득하게 말했다.“그들이 있어도 날 이기지 못할걸.”“1대1로는 못 이기겠죠.”유월영이 강조했다.“하지만 우리가 바보도 아니고, 둘이 같이 덤비면 되잖아요. 두 명은 이길 수 없을걸요?”노현재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그렇네.”현시우가 그들의 대화를 끊으며 물었다.“현재 씨는 어디서 왔어요?”노현재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대답했다.“산골에서.”현시우는 그가 농담하는 줄 알고 굳어있던 얼굴에 한층 더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노현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유월영은 급히 라는 손짓을 하며 현시우를 말렸다.“재현 씨가 농담하는 게 아니야. 그의 말이 맞아.”현시우는 잠시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셋이 그렇게 어정쩡하게 대치하고 있는 게 좀 이상해서 유월영이 소파를 가리키며 앉아서 말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현시우는 움직이지 않았고 노현재는 바로 가서 소파에 앉았다.그는 탁자 위에 놓인 큐브를 보자 무심코 집어 들었다. 그건 가장 쉬운 3단 큐브였고, 그는
노현재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달려온 터라 피곤하고 졸렸다. 그래서 남은 국수는 없고 먹으려면 다시 끓여야 한다고 하자 귀찮다고 느끼며 결국 잠을 자러 갔다.그는 긴 소파에 자리를 옮겨 베개를 하고는 바로 잠에 빠졌다.유월영은 위층으로 올라가 이불을 가져와 노현재에게 덮어주고 현시우에게 자리를 떠나자고 손짓했다.창문을 지나며 유월영이 물었다.“아까 여기서 뭘 보고 있었어?”현시우는 창문 아래 벽에 있는 긁힌 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어릴 때 나는 딱 이 정도 키였어. 언제쯤 커서 창턱을 넘어 밖의 풍경을 볼 수 있을까 늘 궁금해했지.”그는 다시 지금의 창문 높이를 가리키며 말했다.“그런데 지금 보면 창틀이 이렇게 낮잖아.”유월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내가 아까 한 말이 이해되지? 이런 오래된 물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부모님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는 말.”현시우는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맞아.”2층으로 새벽의 한 줄기 빛이 비쳐 들어왔다. 밤이 끝나고 마침내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멀리 용청에 있는 오성민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그는 병원에 있는 한 간호사를 많은 돈으로 매수해 마침내 이승연의 진료 보고서를 손에 넣었다.진료 보고서의 첫 문장은 “‘밤 11시 32분, 환자의 이름을 부르자 환자가 응답함’이라는 내용이었다. 오성민은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다음 줄에는 “새벽 2시 22분, 환자가 눈을 뜨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 수 있으며, 상하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음. 열 손가락이 모두 움직이며 다리에는 힘이 없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오성민은 그 소식을 보고 걱정해야 할지 아니면 웃어야 할지 몰랐다.그는 그 당시 이승연이 담당하던 사건의 원고를 부추겨 법정에서 이승연을 공격하고 그녀의 아이를 유산시키라고 교사하였다. 하지만 일은 그의 예상을 빗나갔고 이승연은 머리를 계단에 부딪히면서 3년 동안이나 혼수상태에 빠졌다.그 3년 동안 오성민은 매번 신주시에 올 때마다 이승연을 보러 가고 싶었지만 이혁재가 그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