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혁재는 몇 초간 생각하다 차분하게 말했다.“재준아, 며칠 전에 감기에 걸렸다고 했던 것 같은데 먼저 들어가서 쉬어.”연재준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그런 거 아니야. 그냥 승연 누나를 지키고 싶은 것뿐이야. 이해해 줘.”이혁재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더 이상 누나를 일고 싶지 않아.”연재준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떠났고 서지욱도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병원을 나온 연재준은 실망하거나 화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차 문을 열고 막 차에 오르려 하자 서지욱이 갑자기 그를 붙잡았다.“재준아, 우리 어디 좀 가서 얘기하자. 할 말이 있어...현시우에 관한 일이야.”서지욱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고 뭔가 암시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보고 연재준의 얼굴이 굳어졌다.“우리 집으로 가자.”“그래.”연재준은 아직 산수원에 살고 있었다.두 사람은 집에 들어서 불을 켰다. 서지욱은 집안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집안은 적막했고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원래 다른 사람이 들이는 걸 싫어하던 연재준은 최근 몇 년 동안 더욱 심해진 듯했고 가사도우미만 가끔 집을 청소하러 오곤 했었다.서지욱이 입을 열었다“혼자 이런 곳에 살면 없던 병도 생기겠다. 집이 너무 우중충하잖아.”연재준이 말했다.“아니야. 조용하고 좋아.”두 사람은 발코니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라탄 의자와 테이블 세트가 놓여 있었다.서지욱은 테이블 위에 있던 전기포트에 물을 끓였고 연재준이 티백을 꺼냈다.시간은 이미 새벽 2시가 넘었고 두 사람은 따뜻한 차를 준비하며 얘기를 주고받았다.연재준이 무심코 담배 한 대를 건네자 서지욱은 아예 담뱃갑을 빼앗아 갔다. “폐가 안 좋은 사람이 담배까지 피우고, 빨리 죽고 싶어 안달이 난 거야?”연재준이 담담하게 물었다.“고씨 가문 아들의 행방은 찾았어?”작년 10월, 서지욱이 회사 일로 국내와 해외를 돌아다닌다고 했을 때 연재준은 그에게 고씨 가문 유괴된 아들의 행방을 알아봐 달
차가 다 우려졌다.연재준은 차를 바로 마시지 않고 쌉쌀한 차의 향기를 맡으며 생각에 잠겼다.얇은 찻잔은 이내 뜨거워졌고 그의 손끝은 뜨거운 찻잔에 빨갛게 달아올랐다.서지욱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재준아?”연재준은 찻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시간을 내서 프링스에 한번 다녀와야겠어.”...유월영과 현시우가 병원을 나섰을 때는 이미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심호준이 알려준 소식 덕분에 유월영은 기분이 아주 좋아져 피곤할 줄 몰랐다.그녀는 병원을 나선 후에도 차에 바로 오르지 않고 인적 없는 거리를 걸었다.현시우도 당연히 따라나섰고 운전사는 그들의 뒤에서 천천히 차를 몰며 따라왔다.유월영은 밤바람을 맞으며 두 손을 등 뒤로 하고 현시우를 마주 보며 뒤로 걸었다..다행이 이 시간엔 차가 없었고 길거리는 조용했다.현시우는 연회장을 나오면서 추위를 막기 위해 정장 위에 긴 코트를 걸쳤고 외국에서 오래 생활한 탓인지 그한테서 유럽 신사의 우아함과 로맨틱함이 묻어났다.유월영이 물었다.“시우 씨, 짐은 어디 있어?”현시우가 대답했다.“호텔로 보냈어.”“어느 호텔?”현시우가 미소 지으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녀의 질문이 쓸데없다는 듯 말했다.“당연히 네가 묵는 호텔이겠지.”“아~”유월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내가 깜빡했네, 나 요즘 그 호텔에 없어. 집에서 살고 있거든, 그러니까 시우 씨 이제 호텔에 혼자 있어야겠네~”현시우가 웃으며 말했다.“봉현진에 간 거야? 그럼 나도 가서 네 양부모님께 인사를 드려야지.”“봉현진말고.”유월영이 말했다.“연말 전에 내가 고씨 가문의 오래된 집을 연재준한테서 다시 가져왔잖아. 이미 다 수리되어서 오늘 내 짐을 그 집으로 옮겼어.”현시우는 멈칫하다 이내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네가 말한 집이 그 집이구나.”유월영은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말했다.“걱정하지 마. 시우 씨 방도 준비해 놓았으니까, 지금 바로 호텔에서 짐을 그쪽으로 옮기면 돼.”
웃기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 유월영은 말문이 막혔다.“애처럼 이러는 거야? 크로노스 씨?”현시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옷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알았어. 이제 늦었으니...집에 가야지.”두 사람은 차에 올랐고 유월영이 묵고 있는 고씨 가문의 옛집으로 향했다.옛집이 위치한 지역은 부자들이 사는 동네가 아니었으며 굳이 분류하자면 일반 주택지였다.길가에는 아직도 밤에만 나오는 야식 노점들이 몇 군데 있었고 장사도 잘되고 있었다.한 우동가게를 지나자 유월영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했다.현시우가 물었다.“배고파?”“조금 배고프네. 이 집 우동이 맛있더라고. 시우 씨도 먹어보면 좋아할 거야. 며칠 전에 주인한테 들었는데 이곳에서 거의 30년 동안 장사했다고 해. 매일 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지지 않고 나온대. 생각해 보니까 그러면 우리 부모님도 여기서 먹었을 거 아냐, 아, 우리 오빠도.”유월영은 그저 현시우에게 우동을 사주고 싶었고 그래서 듣고 있던 현시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유월영은 차창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사장에게 우동 두 그릇을 주문하려고 했다.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현시우가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아챘고 그대로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유월영은 그대로 그의 몸에 넘어졌다.유월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현시우를 올려다보았다.불 꺼진 가로등 아래 그의 얼굴 절반은 어둠에 가려졌고 그의 살짝 긴장된 턱선만 볼 수 있었다. 현시우는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세요.”“잠깐! 아직 사지도 않았는데!.”유월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뭐 하는 거야?”현시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로등의 불빛이 오뚝한 콧날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눈빛은 평소처럼 차분했다.“난 네가 끓여준 국수 먹고 싶어. 집에 가서 끓여줄 수 있지?.”“뭐라고?”유월영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4시였다.“악덕 사장들도 이 정도로 직원 갈아 넣진 않아. 한밤중
유월영이 대답했다.“맞아. 대부분은 원래 집에 있던 물건들이야. 어떤 것들은 너무 오래되어 썩어버려서 전혀 쓸 수 없었어. 그래서 옛날 디자인대로 새로 주문 제작한 거야.”현시우의 목소리가 약간 무거워졌다.“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 인생무상 새옹지마라고 지난 일은 지나간 대로, 망가진 건 망가진 대로 두는 게 좋아. 억지로 남겨두면 슬픔만 더할 뿐이야.”유월영은 현시우의 그 말이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국수를 삶으면서 말했다.“내 생각은 좀 달라.”“난 사실 부모님이 아주 낯설어. 그분들의 성격, 성향, 심지어 키와 외모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어. 그저 다른 사람들한테서 단편적으로 들은 얘기밖에 없지.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우리 부모님이 대단하신 분들이라고 알려줘도 나의 마음에 와닿지 않아.”“하지만 이 집에는 우리 부모님이 살았던 흔적이 있어. 가끔 벽의 흠집이나 탁자 위의 흠집을 무심코 만지면 마치 그들의 체온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아.”“그래서 난 그것들을 보존하는 게 가치 있다고 생각해.”“그래.”현시우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듣고 나서야 대답했다. 그는 오늘 밤 유난히 말이 없었다.그는 다시 생각에 잠긴 듯 창가로 가서 잠시 생각하더니 몸을 낮춰 웅크렸다.국수는 금방 준비되었고 유월영은 두 그릇 담아서 식탁에 올려놓았다.현시우가 아직 창 아래에 웅크리고 있자 유월영은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해서 다가갔다.“뭘 그렇게 보고 있어...”픽.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 안의 불이 갑자기 꺼졌다.유월영은 잠시 멈칫했다.“전기가 나갔나?”오래된 집이라 전압이 불안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곧이어 방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고 검은 그림자가 방안에 언뜻거렸다.유월영은 즉시 경계 태세를 갖추고 현시우를 바라봤다. 자연히 낌새를 알아차린 현시우도 앉은 채로 조용히 단도를 빼냈다.두 사람은 모두 소리를 내지 않고 주위를 살폈다.곧이어 식탁 쪽에서 인기척이 나자 유월영은 재빨리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밖에서 들
노현재는 소파 등받이를 잡고 바닥에서 일어섰다. 그는 완전히 도둑놈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검은 옷에 검은 바지, 불빛이 없었다면 완벽하게 어둠 속에 녹아들었을 것이다.그는 일부러 여유를 부리며 투덜거렸다.“역시 상류 사회의 배운 사람들이군. 국수도 이렇게 조금 먹더라니. 당신 두 사람 양을 합쳐도 내 위를 채우기엔 모자란 것 같네.”현시우가 그를 쓰러뜨렸을 때 그릇에는 국물이 조금 남아있었고, 그 국물이 노현재의 점퍼에 다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점퍼를 벗어 한쪽에 던지며, 유월영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그래서, 국수 더 있어?”유월영은 처음에 그가 누군가가 보낸 자객인 줄 알고 긴장했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없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올 거면 그냥 오지 왜 이렇게 우리를 놀라게 하는 거예요? 한 비서와 지남 씨가 없어서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노현재는 자부심 가득하게 말했다.“그들이 있어도 날 이기지 못할걸.”“1대1로는 못 이기겠죠.”유월영이 강조했다.“하지만 우리가 바보도 아니고, 둘이 같이 덤비면 되잖아요. 두 명은 이길 수 없을걸요?”노현재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그렇네.”현시우가 그들의 대화를 끊으며 물었다.“현재 씨는 어디서 왔어요?”노현재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대답했다.“산골에서.”현시우는 그가 농담하는 줄 알고 굳어있던 얼굴에 한층 더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노현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유월영은 급히 라는 손짓을 하며 현시우를 말렸다.“재현 씨가 농담하는 게 아니야. 그의 말이 맞아.”현시우는 잠시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셋이 그렇게 어정쩡하게 대치하고 있는 게 좀 이상해서 유월영이 소파를 가리키며 앉아서 말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현시우는 움직이지 않았고 노현재는 바로 가서 소파에 앉았다.그는 탁자 위에 놓인 큐브를 보자 무심코 집어 들었다. 그건 가장 쉬운 3단 큐브였고, 그는
노현재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달려온 터라 피곤하고 졸렸다. 그래서 남은 국수는 없고 먹으려면 다시 끓여야 한다고 하자 귀찮다고 느끼며 결국 잠을 자러 갔다.그는 긴 소파에 자리를 옮겨 베개를 하고는 바로 잠에 빠졌다.유월영은 위층으로 올라가 이불을 가져와 노현재에게 덮어주고 현시우에게 자리를 떠나자고 손짓했다.창문을 지나며 유월영이 물었다.“아까 여기서 뭘 보고 있었어?”현시우는 창문 아래 벽에 있는 긁힌 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어릴 때 나는 딱 이 정도 키였어. 언제쯤 커서 창턱을 넘어 밖의 풍경을 볼 수 있을까 늘 궁금해했지.”그는 다시 지금의 창문 높이를 가리키며 말했다.“그런데 지금 보면 창틀이 이렇게 낮잖아.”유월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내가 아까 한 말이 이해되지? 이런 오래된 물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부모님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는 말.”현시우는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맞아.”2층으로 새벽의 한 줄기 빛이 비쳐 들어왔다. 밤이 끝나고 마침내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멀리 용청에 있는 오성민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그는 병원에 있는 한 간호사를 많은 돈으로 매수해 마침내 이승연의 진료 보고서를 손에 넣었다.진료 보고서의 첫 문장은 “‘밤 11시 32분, 환자의 이름을 부르자 환자가 응답함’이라는 내용이었다. 오성민은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다음 줄에는 “새벽 2시 22분, 환자가 눈을 뜨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 수 있으며, 상하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음. 열 손가락이 모두 움직이며 다리에는 힘이 없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오성민은 그 소식을 보고 걱정해야 할지 아니면 웃어야 할지 몰랐다.그는 그 당시 이승연이 담당하던 사건의 원고를 부추겨 법정에서 이승연을 공격하고 그녀의 아이를 유산시키라고 교사하였다. 하지만 일은 그의 예상을 빗나갔고 이승연은 머리를 계단에 부딪히면서 3년 동안이나 혼수상태에 빠졌다.그 3년 동안 오성민은 매번 신주시에 올 때마다 이승연을 보러 가고 싶었지만 이혁재가 그럴
유월영도 현시우와 같은 생각이었다.한세인은 바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다. “그 남자 오늘 하루 종일 몇 채의 별장 사이를 배회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배후와 만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대낮에 만나는 건 눈에 너무 띄니까, 아마 오늘 밤에 만날 거야.” 노현재는 귤껍질을 벗기며 말했다. “그럼 내가 오늘 밤에 가볼게요.”유월영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나도 같이 갈게요.”노현재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월영 씨도 가겠다고요? 안 그래도 되는데, 날 못 믿는 거예요?”“그게 아니라 일이 좀 재밌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요.”유월영은 기억을 더듬었다. 계향동에는 서른 채 정도의 별장이 있었고 모두 이름이 있는 부자들이 사는 집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납치법의 배후에 도대체 누가 있을지 궁금해졌다.”현시우도 말했다.“재미있다면 나도 갈게.”노현재가 비꼬듯이 말했다.“우리는 이건 뭐 범인 잡으러 가는 건지 워크샵을 하러 가는 건지 모르겠네.”유월영이 현시우를 보며 말했다.“나랑 현재 씨만 가도 돼. 시우 씨 몸이 안 좋잖아.”현시우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 몸 그렇게 허약한 거 아니야. 의사도 내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고 그저 조금만 주의하면 된다고 했어. 2, 3년이면 완전히 회복할 거라 했으니 난 이미 괜찮아.”노현재는 그를 놀리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월영 씨가 자꾸 현 대표님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진짜로 현 대표님 어디가 불구라도 된 것처럼 들리잖아요.”유월영은 지팡이로 그의 종아리를 툭 치며 말했다.“그만해요.”그제야 노현재는 귤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조용해졌다.유월영은 현시우를 보며 말 속에 다른 뜻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이런 작전은 사람이 많으면 안 돼. 사람 많으면 오히려 경계할 거야.”현시우는 바로 알아차리고 말했다. “알았어. 그럼 조심해.”노현재는 유월영과 현시우를 번갈아 보며 그들의 관계가 정말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둘 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
노현재는 즉시 망원경을 들어 그쪽을 보았다.둥근 렌즈 속에 분명히 연재준의 모습이 보였다.그는 신경 써서 변장하거나 모습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평상시처럼 흰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를 입고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마치 식사 후 산책을 하러 나온 것처럼 자연스러웠다.하지만 방금 유월영이 말했듯이 그는 산 정상의 별장에 살지 않았다.게다가 한밤중에 산책을 한다고 해도 산 정상에 있는 사람이 산 중턱까지 내려올 이유는 없었다.망원경을 쥔 노현재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얼굴에 남아있던 느긋한 표정은 사라지고 진지하게 얘기했다.“재준이 형은 그 운전기사의 배후일 리 없어요.”“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그들은 오늘 밤 배후의 주모자를 잡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다. 그리고 마침 연재준이 그 장소에 나타난 이상 그를 의심하는 것이 이상할 이유는 없었다.노현재가 단호하게 말했다.“장담해요. 재준이 형이 월영 씨를 납치하라고 했거나 인신매매되게 했을 리가 절대 없어요.”유월영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망원경 너머의 연재준을 주시했다.연재준은 한 건물 아래에 서서 가만히 서 있었다. 가끔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모습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유월영의 가슴이 쿵쿵거렸다그때 노현재가 갑자기 말했다.“젠장, 저놈 도망가려고 해요.”유월영이 연재준을 주시하느라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이 운전기사가 오토바이에 올라타더니 속도를 내며 산으로 향했다.유월영은 망원경을 내려놓고 짧은 시간 안에 상황을 빠르게 판단한 후 말했다.“따라가요!”노현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즉시 차를 몰아 그를 추격했다.그러나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길이 점점 좁아지고, 나무가 빽빽해지면서 결국 더 이상 차로는 갈 수 없게 되었다.노현재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재빨리 후진하려 했다.하지만 이미 늦었다.차 뒤쪽에 갑자기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나타나 몽둥이를 들고 차의 뒷유리를 세게 내리쳤다!차는 방탄차가 아니어서 한 번의 타격에 유리가 바로 금이 갔다.노현재는 차 뒤의 사람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