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예전부터 그랬는데. 당신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유월영은 문득 그가 갖은 수단을 써서 자신을 굴복시키던 날들이 떠올랐다.굳어지는 유월영의 얼굴을 보며 연재준이 말했다.“좋게 말해도 듣지 않으니 이제 당신이 익숙한 방식으로 대할 수밖에.”유월영이 냉소를 보이며 말했다.“이거 놔요!”“아직 춤이 끝나지 않았는데 고 대표님은 왜 그렇게 급한가요? 중간에 떠나는 건 예의가 아니죠.”연재준은 빠져나가려는 유월영의 손을 잡고 다시 그녀를 빙글 돌렸다.유월영은 이 5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연재준은 긴 벨벳 장갑을 낀 유월영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유월영을 진짜로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바꾸었다.“내가 듣기로는, 당신 설날 며칠 동안 봉현진에서 머물렀다면서. 그리고 매일 꽃집에 들어 백합 세 송이를 샀다고 하던데. 아마 당신 양 부모님 영정 앞에 놓기 위해서였겠지. 그런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처음에는 네 송이를 샀던 걸로 알고 있어. 왜 이번엔 세 송이야?”유월영의 시선이 싸늘하게 변했다.“나를 감시하고 있었어요?.”아니면 이렇게 많은 것들을 이렇게 자세히 알 리가 없었다.연재준은 부인하지 않았다.“처음에는 백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었어. 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아. 그건 우리 네 가문을 의미하는 거지? 윤영훈이 무너졌으니 한 송이가 줄어든 거고.”그는 고개를 숙여 유월영의 눈을 바라보았다.“언젠가는 한 송이도 없는 날이 오겠지?”그도 결국 그녀에게 제거될 것이다.어쩐지 연재준의 말투에는 묘한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유월영은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그의 눈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차갑기 그지없었다.마침 음악이 끝났고 유월영은 다른 하객들이 두 사람 사이에 부는 차가운 공기를 눈치채지 못하게 공손한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녀의 말은 여전히 가시가 가득 돋쳤다.“드디어 끝났네요. 연 대표님은 항상 사람을 괴롭히는 방법을 잘 알죠. 마치 3년 전 악몽으로 돌아
바로 현시우였다.원래 마르세유에 있어야 할 현시우가 연회장에 나타나자 유월영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고 다른 사람들 또한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눈을 떼지 못했다.연재준은 순간적으로 턱에 힘이 들어갔고 눈빛도 싸늘하게 변했다.아까 그 남자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던 다른 하객은 그제야 깨달은 표정을 지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맞아 맞아, 기억났다. 저 남자 현시우잖아. 해외에서 살고 있다는 현 회장님네 막내아들! 3년 전 연회장에서도 그를 본 적 있어!”다른 사람들은 현시우를 본 적은 없었지만 그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현 회장님의 막내아들이라면 바로 레온 그룹을 상속받을 크로노스 씨잖아?”“맞아, 바로 그 사람이야. 근데 그가 왜 또 연 대표랑 저러고 있어? 3년 전 연회장에서도 두 사람 분위기 살벌했었는데. 다행히 현 회장님이 중재해서 넘어갔잖아. 그때도 우리는 저 두 사람이 여자 때문에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닌가 했었지...”주변에 모여든 하객들이 점점 많아지자 유월영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그녀는 그저 신연아의 결혼식에서 큰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주인공인 신랑 신부가 받아야 할 관심이 자신에게 쏠리지 않게 하려고 연재준의 선 넘는 생동도 참아왔다.하지만 결국 그녀가 걱정하는 대로 일은 흘러갔다.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연재준과 고민서라는 이름만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상당했고 거기에 현시우까지 더하니 그 조합 자체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하객으로 참석한 현시우 역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연재준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연재준이 차갑고 무정한 느낌을 준다면 현시우는 마치 그의 가슴에 꽂힌 하얀 동백꽃처럼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주었다.그 역시 차분한 성격이었지만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진 않았다.유월영은 아무리 마음이 복잡해도 그의 차분한 갈색 눈동자를 마주하면 마음이 가라앉았다.현시우가 말했다.“월영아, 내 곁으로 와.”유월영은 망설임 없이 그를 향해 몸을 돌렸
하객들 사이를 비집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신현우를 보면서 유월영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신현우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중재하려고 다가왔다.유월영은 아직도 신경전을 하는 두 남자를 번갈아 보다가 화를 참으며 말했다.“내가 물건이에요? 네 것, 내 것이라뇨? 그리고 크로노스 씨, 그런 말 너무 예의 없는 거 아니야?”현시우는 잠시 당황하다가 미소를 지었다.“미안해, 내가 말이 헛나갔어.”하지만 유월영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끝이야? 그냥 못 넘어가겠는데?”“그럼 집에 돌아가서 반성문 쓸게. 화 풀어. 응?”현 회장의 아들, 레온 그룹의 크로노스 씨라는 이 남자는 이 많은 하객들이 보는 데서 약혼녀의 한마디 때문에 고개를 숙였다.그처럼 지위가 높고 잘생기기까지 한 남자가 쩔쩔매는 모습에 여자 하객들의 마음은 모두 녹아내렸다...다른 한 편으로 이런 대단한 인물을 쥐락펴락하는 유월영의 수단에 남자 하객들도 감탄했다.연재준은 두 사람이 통화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다정한 모습을 보자 훨씬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유월영은 한 번도 자신에게 이렇게 애교를 부리거나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한 적이 없었다.그녀는 한 번도 공개적으로 자신에게 이렇게 친밀하게 대해준 적이 없었으며 그때의 두 사람은 결코 드러낼 수 없는 관계였다.유월영은 현시우에 잡힌 자신의 손을 빼면서 마지못해 화가 풀린 듯한 표정으로 살짝 미소 지었다.그리고 연재준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연 대표님께서 춤을 추고 싶으시다면 다른 여성분을 초대하시는 게 어떨까요? 아니면 다음에 기회가 될 때 다시 연 대표님과 춤 한 곡 출게요. 오늘은 제 하이힐이 너무 높아서 불편하거든요. 정말 더는 함께할 수 없네요. 부디 양해해 주세요.”“...”연재준은 몇 초 후 마침내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았다.유월영은 언제나 상황을 원만하게 잘 풀어가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연재준과 현시우가 신연아의 결혼식에서
유월영은 루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아쉽네, 난 시우 씨 고모님이신 줄 알았어. 그러면 전에 묵은 빚까지 다 꺼내서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했는데.”유월영이 말한 묵은 빚이란, 현시우의 고무 엘리자베스 부인이 꾸민 그 교통사고를 말했다.현시우는 유월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서두를 필요 없어.”유월영은 갈비를 한 조각 집어 들고 다른 음식들도 좀 담아서 현시우와 함께 신연우에게 다가갔다.현시우는 이미 신연우와 오랜 친구였고 신연우가 처음 유월영에게 접근한 것도 그의 부탁을 받고서였다.현시우는 가까이 가기도 전에 손을 내밀며 말했다.“연우야.”신연우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안심하며 미소를 지었고 현시우를 반기며 말했다.“와줘서 다행이야.”현시우는 신연우의 다리를 보며 말했다.“의사를 데려왔어. 결혼식이 끝나면 한 번 봐보자.”신연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또 의사야? 우리 집엔 의사가 너무 많아서 축구팀을 만들어도 될 정도야.”하지만 유월영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여러 의사분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좋죠.”신연우는 고개를 숙여 다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그래요. 그렇게 하죠.”세 사람은 이내 담소를 나누며 식사하기 시작했다. 유월영은 갈비가 조금 짠 듯하여 웨이터를 불러 와인을 부탁했다.신연우와 얘기를 나누면서도 현시우는 정확히 포착하고 유월영의 손을 끌어내면서 억지로 과일 주스를 건네주었다.단 걸 좋아하지 않는 유월영은 달갑지 않은 듯 주스를 밀어냈다.현시우는 말 없이 웃으며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 양복 앞주머니에 꽂아둔 하얀 동백꽃을 떼어 그녀의 귀 옆에 꽂아주었다.유월영은 이게 무슨 주책이냐는 듯 그를 흘기다 더 이상 와인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와인잔을 놓았다.현시우는 유월영이 별말을 하지 않자 고개를 돌리다 무심코 맞은편을 한 번 바라보았다.맞은편에는 연재준이 서 있었다.연재준은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로 방금 그 장면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오성민은 바로 신주시에 가서 이승연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비서가 그를 말렸다.“윤 대표님의 교훈을 잊으셨습니까? 바로 유월영이 놓은 덫에 빠져 그렇게 된 거잖아요. 그 여자는 너무 교활해요. 어디에서 함정을 파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고요.”오성민은 순간적으로 이성을 되찾았다.비서가 제안했다.“차라리 연 대표한테 전화를 걸어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분은 이혁재와 절친한 사이이니 이혁재의 지금 상황을 잘 알 겁니다.”일리가 있었다.오성민은 바로 연재준의 번호를 눌렀다.연재준은 서지욱을 데리고 막 병원에 도착한 참이었다. 그는 간단하게 말했다.“지금 제가 알고 있는 것도 오 변호사님과 다를 바 없어요.”오성민이 입을 열었다.“만약 상황을 알게 되면 저에게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부탁드려요..”“알겠습니다.”연재준은 전화를 끊지 않은 채 수술실로 빠르게 걸어갔다.수술실 앞에는 이혁재 외에도 유월영과 현시우가 있었다.유월영은 이미 드레스를 갈아입고 지금은 아주 따뜻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연재준은 그녀를 슬쩍 바라본 뒤 이혁재한테 물었다.“승연 씨 상황이 어떤 것 같아?”이혁재가 중얼거렸다.“아직 의사가 나오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그러다 그는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재준아, 내가 봤어. 방금 승연 누나가 정말로 눈을 떴어. 내가 봤다고. 비록 몇 초였지만 모니터에 있던 데이터도 전이랑 달랐어. 누나가 정말로 깨어나려나 봐. 정말로 깨어나려고...”2년이었다.2년 전, 이승연은 살인사건으로 고소당한 학생을 변호하다 법정에서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고 6개월 된 뱃속의 아이까지 잃고 그 후로 쭉 혼수상태에 빠졌다.이혁재는 깊은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렸다.“승연 누나, 누나가 깨어날 줄 알았어.”서지욱은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연재준의 전화기 너머로 오성민도 모든 걸 듣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고마워요. 연 대표님.”연재준은
이혁재는 몇 초간 생각하다 차분하게 말했다.“재준아, 며칠 전에 감기에 걸렸다고 했던 것 같은데 먼저 들어가서 쉬어.”연재준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그런 거 아니야. 그냥 승연 누나를 지키고 싶은 것뿐이야. 이해해 줘.”이혁재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더 이상 누나를 일고 싶지 않아.”연재준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떠났고 서지욱도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병원을 나온 연재준은 실망하거나 화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차 문을 열고 막 차에 오르려 하자 서지욱이 갑자기 그를 붙잡았다.“재준아, 우리 어디 좀 가서 얘기하자. 할 말이 있어...현시우에 관한 일이야.”서지욱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고 뭔가 암시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보고 연재준의 얼굴이 굳어졌다.“우리 집으로 가자.”“그래.”연재준은 아직 산수원에 살고 있었다.두 사람은 집에 들어서 불을 켰다. 서지욱은 집안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집안은 적막했고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원래 다른 사람이 들이는 걸 싫어하던 연재준은 최근 몇 년 동안 더욱 심해진 듯했고 가사도우미만 가끔 집을 청소하러 오곤 했었다.서지욱이 입을 열었다“혼자 이런 곳에 살면 없던 병도 생기겠다. 집이 너무 우중충하잖아.”연재준이 말했다.“아니야. 조용하고 좋아.”두 사람은 발코니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라탄 의자와 테이블 세트가 놓여 있었다.서지욱은 테이블 위에 있던 전기포트에 물을 끓였고 연재준이 티백을 꺼냈다.시간은 이미 새벽 2시가 넘었고 두 사람은 따뜻한 차를 준비하며 얘기를 주고받았다.연재준이 무심코 담배 한 대를 건네자 서지욱은 아예 담뱃갑을 빼앗아 갔다. “폐가 안 좋은 사람이 담배까지 피우고, 빨리 죽고 싶어 안달이 난 거야?”연재준이 담담하게 물었다.“고씨 가문 아들의 행방은 찾았어?”작년 10월, 서지욱이 회사 일로 국내와 해외를 돌아다닌다고 했을 때 연재준은 그에게 고씨 가문 유괴된 아들의 행방을 알아봐 달
차가 다 우려졌다.연재준은 차를 바로 마시지 않고 쌉쌀한 차의 향기를 맡으며 생각에 잠겼다.얇은 찻잔은 이내 뜨거워졌고 그의 손끝은 뜨거운 찻잔에 빨갛게 달아올랐다.서지욱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재준아?”연재준은 찻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시간을 내서 프링스에 한번 다녀와야겠어.”...유월영과 현시우가 병원을 나섰을 때는 이미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심호준이 알려준 소식 덕분에 유월영은 기분이 아주 좋아져 피곤할 줄 몰랐다.그녀는 병원을 나선 후에도 차에 바로 오르지 않고 인적 없는 거리를 걸었다.현시우도 당연히 따라나섰고 운전사는 그들의 뒤에서 천천히 차를 몰며 따라왔다.유월영은 밤바람을 맞으며 두 손을 등 뒤로 하고 현시우를 마주 보며 뒤로 걸었다..다행이 이 시간엔 차가 없었고 길거리는 조용했다.현시우는 연회장을 나오면서 추위를 막기 위해 정장 위에 긴 코트를 걸쳤고 외국에서 오래 생활한 탓인지 그한테서 유럽 신사의 우아함과 로맨틱함이 묻어났다.유월영이 물었다.“시우 씨, 짐은 어디 있어?”현시우가 대답했다.“호텔로 보냈어.”“어느 호텔?”현시우가 미소 지으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녀의 질문이 쓸데없다는 듯 말했다.“당연히 네가 묵는 호텔이겠지.”“아~”유월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내가 깜빡했네, 나 요즘 그 호텔에 없어. 집에서 살고 있거든, 그러니까 시우 씨 이제 호텔에 혼자 있어야겠네~”현시우가 웃으며 말했다.“봉현진에 간 거야? 그럼 나도 가서 네 양부모님께 인사를 드려야지.”“봉현진말고.”유월영이 말했다.“연말 전에 내가 고씨 가문의 오래된 집을 연재준한테서 다시 가져왔잖아. 이미 다 수리되어서 오늘 내 짐을 그 집으로 옮겼어.”현시우는 멈칫하다 이내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네가 말한 집이 그 집이구나.”유월영은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말했다.“걱정하지 마. 시우 씨 방도 준비해 놓았으니까, 지금 바로 호텔에서 짐을 그쪽으로 옮기면 돼.”
웃기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 유월영은 말문이 막혔다.“애처럼 이러는 거야? 크로노스 씨?”현시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옷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알았어. 이제 늦었으니...집에 가야지.”두 사람은 차에 올랐고 유월영이 묵고 있는 고씨 가문의 옛집으로 향했다.옛집이 위치한 지역은 부자들이 사는 동네가 아니었으며 굳이 분류하자면 일반 주택지였다.길가에는 아직도 밤에만 나오는 야식 노점들이 몇 군데 있었고 장사도 잘되고 있었다.한 우동가게를 지나자 유월영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했다.현시우가 물었다.“배고파?”“조금 배고프네. 이 집 우동이 맛있더라고. 시우 씨도 먹어보면 좋아할 거야. 며칠 전에 주인한테 들었는데 이곳에서 거의 30년 동안 장사했다고 해. 매일 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지지 않고 나온대. 생각해 보니까 그러면 우리 부모님도 여기서 먹었을 거 아냐, 아, 우리 오빠도.”유월영은 그저 현시우에게 우동을 사주고 싶었고 그래서 듣고 있던 현시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유월영은 차창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사장에게 우동 두 그릇을 주문하려고 했다.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현시우가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아챘고 그대로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유월영은 그대로 그의 몸에 넘어졌다.유월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현시우를 올려다보았다.불 꺼진 가로등 아래 그의 얼굴 절반은 어둠에 가려졌고 그의 살짝 긴장된 턱선만 볼 수 있었다. 현시우는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세요.”“잠깐! 아직 사지도 않았는데!.”유월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뭐 하는 거야?”현시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로등의 불빛이 오뚝한 콧날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눈빛은 평소처럼 차분했다.“난 네가 끓여준 국수 먹고 싶어. 집에 가서 끓여줄 수 있지?.”“뭐라고?”유월영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4시였다.“악덕 사장들도 이 정도로 직원 갈아 넣진 않아. 한밤중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