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훈은 일주일 내내 별장에 오지 않았었다.하지만 오늘은 별장에 들렀을 뿐만 아니라 평소보다 퇴근 시간도 빨랐다.그가 집에 들어서자 가정부가 그의 외투를 받아주었다.그는 신발을 갈아신고 거실로 들어갔다.거실 카펫 위에서 유모와 놀고 있는 딸을 본 윤영훈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연이야.”여자아이는 낯설지 않은 듯 윤영훈을 보고 거부감 없이 눈을 깜박거렸다.윤영훈은 어린 딸을 안아 들고 자연스럽게 카펫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딸을 무릎 위에 앉히고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달랬다.“아빠라고 해봐. 아빠, 아빠.”딸아이는 아, 아 하는 무의미한 소리만 냈다. 윤영훈은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한 글자씩 말했다. “아빠 해 봐.”연이가 옹알거렸다.“아! 아!”“아니야 아니야, 연이야. 따라 해봐. 아빠.”“엄마! 엄마!”윤영훈은 잠시 멍해졌고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주월향이 다가오고 있었다.여자아이는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주월향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주월향은 딸아이의 분유를 타며 조용히 말했다.“애는 이제 겨우 1살 반이에요. 아직 잘 말할 줄 모르니 너무 다그치지 마세요.”윤영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 그는 다시 예전의 그 방탕하고 가벼운 윤영훈이 된 듯했다.“그럼 당신이‘여보'라고 한 번 해봐.”주월향은 잠시 흠칫하더니 곧 윤영훈의 품에서 아이를 안아가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윤 대표님께서 연이로 나를 협박하지 않았더라면 난 절대 당신 곁에 남아있지 않았을 거예요.”그래서 그녀가 그를 “여보”라고 부를 일은 없었으며 그들 사이에는 그런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윤영훈은 가만히 카펫에 앉아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그녀가 능숙하게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의 시선이 갑자기 애틋해졌다. 그는 눈을 깜빡이기 싫었으며 한 초라도 더 보고 싶었고 이 장면을 마음속에 새기고 싶었다.주월향은 그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 불편해
주월향은 아주 빠르게 윤영훈과 사랑에 빠졌다.그는 그녀의 첫 남자였고 첫사랑이었다. 그녀는 순진하게도 그들의 미래를 그렸으며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부터 함께 백발이 된 모습까지 상상했다.결국, 고작 반년도 채 안 돼서 그녀는 현실의 쓴맛을 알게 되었다.윤영훈이 그녀에게 마음을 쏟았던 이유는 오직 이름에 “월”자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게다가 윤영훈은 이미 그녀를 질려했고 곧 주변에 다른 여자가 생겼다. 그리고 그 여자가 아무렇게나 둘러댄 모함에 윤영훈은 주월향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믿고 자연스럽게 그녀와 헤어졌다.그녀가 믿었던 진정한 사랑은 결국 순진한 꿈에 불과했다.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던 그 시절 그녀가 어떻게 견뎌냈는지는 하늘만이 알고 있었다.주월향의 눈에는 잠깐의 증오가 스쳤지만 곧 그것을 억누르며 감췄다.윤영훈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두 번이나 “영훈 씨”라고 불렀지만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주월향은 할 수 없이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영훈 씨. 영훈 씨?”조용히 자고 있던 남자는 갑자기 주월향의 손목을 잡더니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주월향은 본능적으로 몸부림쳤다.“나 좀 놔줘요!”윤영훈의 쉰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잠깐만 이러고 있게 해줘.”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그 말투를 듣자 주월향의 극도로 거부하던 마음이 왠지 모르게 차분해졌다. 그녀는 그의 셔츠를 잡고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윤영훈은 주월향을 품에 안고 턱을 그녀의 머리 위에 올린 채 조용히 말했다.“당신이 믿든 안 믿든 난 당신을 그 누구의 대체품으로도 여기지 않고 있어. 내가 뭘 하는지 잘 알고 있어.”주월향은 자기도 모르게 울컥해졌다.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는 건 아니야. 결국 우리 사이도 고작 반년이잖아. 내가 지금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해'라고 말해도 당신은 믿지 않을 거잖아.”주월향은 말없이 그의 가슴에 엎드려 그의 심장 소리를
윤영훈은 대답이 없이 가만히 있다 2층 아기방으로 올라가 딸아이와 놀기 시작했다.주월향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핸드폰에 신해 그룹을 검색했다.곧 수많은 게시글이 나타났고 모두 윤씨 가문이 이번에 위태롭다는 내용이었다. 부도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이었다.그녀는 몇 개의 글을 대충 훑어보았다. 요약하자면, 자금 흐름에 문제가 생겼고 부도가 멀지 않다는 것이었다.주월향은 핸드폰을 꽉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딸아이는 오후에 내내 낮잠을 잤기에 지금은 전혀 졸리지 않아 까불고 있었다.윤영훈은 아이를 안고 두더지 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12개의 구멍이 있는 장난감 기계에서 작은 다람쥐가 튀어나오면 그는 딸아이의 손에 작은 망치를 쥐여주고 두더지를 때리게 했다.“아야! 못 맞혔네! 다시 해보자, 이거 때려! 맞췄다! 연이 최고네~”여자아이는 즐거워하며 깔깔 웃어댔다.주월향은 그가 자기 자식을 모른척하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가 아이를 이렇게나 좋아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부녀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로 하고 침실로 돌아와 씻으려고 준비했다. 그리고 옷장을 열어 잠옷을 꺼내다가 무심코 아래쪽의 수납함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주월향은 상당히 깔끔한 성격이었고 계절이 지난 옷들은 항상 깔끔하게 접어 수납함에 넣고 방충제를 넣어 뚜껑을 덮은 후 먼지나 벌레가 들어가지 않도록 했었다.그런데 그 수납함은 지금 뚜껑이 비스듬히 되어있었고 누군가 열어본 듯했다.주월향은 몸을 숙여 뚜껑을 열어 확인했고 안에 있는 옷들도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그녀는 곧바로 아래쪽을 뒤져보았고 예상대로 몇 개의 딱딱하고 차가운 물체가 만져졌다.안에 물건을 꺼내 확인하는 순간 주월향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그건 돌이 아닌 금괴였다!벽돌처럼 생긴 커다란 금괴가 손에 묵직하게 느껴졌으며 적어도 3~5kg은 나갈 듯했다.하지만 이 물건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에 주월향은 순간 혼란스러워졌다.그녀는 수납함을 확 젖혔다. 안에는 이런 금괴가 다섯 개나 있
윤영훈은 조사를 받으러 불려 갔고 신해 그룹은 대혼란에 빠졌다. 주가는 폭락하여 예전의 해운 그룹 때보다 더 빠르게 떨어졌다.업계에는 비밀이 없었으며 사람들은 이내 알게 되었다. 윤씨 가문은 빚더미에 올라앉고 곧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을. 신용이 파탄 난 윤씨 가문은 더는 회생할 가능성이 없었다.그러나 사람들은 더 궁금해했다. 네 대 재벌 중 하나였던, 한때 명성을 떨치던 윤씨 가문과 윤영훈은 어쩌다 이렇게까지 몰락하게 되었는지.해성 그룹은 그동안 아주 잘 발전해 왔고 사람들은 아직도 그가 석 달 만에 종을 울리며 상장한 전설을 기억하고 있었다. 해성 그룹이 있는 한 윤씨 가문이 이렇게 갑자기 무너진 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이 문제는 곧 인터넷에서 자칭 전문가들과 유명 블로거들의 분석과 토론을 불러일으켰다.어떤 사람들은 윤영훈이 연속적인 의사결정 실수로 인해 부동산에 투자했으며 결국 부동산 시장이 무너져서 손해를 봤다고 말했다.다른 사람들은 그가 지인들에게 배신당했다고 했고 그 증거로 윤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연씨 가문을 포함한 세 가문에서 그의 해성 그룹의 지분을 헐값에 인수했다고 주장했다.그 밖의 소문들도 가지각색이었다. 경영진들이 경쟁사로 빼돌려졌고 고객도 같이 데려갔다는 둥, 주주들은 자금을 들고 도망갔고 윤영훈은 자산을 해외로 이전했다는 둥그런 내용들이었다...이런 추측들은 그나마 “그럴듯한” 것이었고, 가장 터무니없는 것은 윤영훈이 도박에 빠져 하룻밤에 몇억, 몇십억을 잃었다는 이야기였다.유월영은 그 뜬소문들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니까 생각나네요. 내가 처음 윤영훈을 만난 건 현씨 가문의 유람선에서였는데, 우리 함께 몇 판 카드놀이를 했었죠.”그때 웃음을 띠며 유월영에게 “너도 같이 겸상할 자격이 있냐”고 오만하게 물었던 윤영훈은 아마도 자신이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될 운명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한세인은 서류를 정리하며 물었다.“그럼 아가씨는 그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몰락하게 되었
유월영은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연 대표님께서 저를 그렇게 생각한다니 정말 억울하네요. 저는 오히려 연 대표님이 건강하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인걸요.”진심이었다.유월영은 병든 사자를 쓰러뜨리는 것에 흥미가 없었다. 그는 반드시 건강해야 했고 그래야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일에 대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그녀가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지난 2년간 이렇게 애써 준비한 계획은 재미가 줄어들고 말 것이다.한세인이 전화를 마치고 돌아와 말했다.“아가씨, 구조대가 곧 온다고 합니다.”“알았어요.”유월영은 대답하며 연재준의 옷장을 열어보더니 가장 두꺼운 외투를 하나 꺼내어 그에게 던졌다.“연 대표님, 조금만 더 버티세요.”연재준은 손을 들어 외투를 받으며 기분 좋은 듯한 유월영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기분이 좋아 보여. 계획이 성공해서 그런가?”“여기에 갇혀서 일도 제대로 못 하는데 무슨 계획이 성공하겠어요?”유월영은 그 말을 인정하지 않았고 여전히 무심하게 말했다.“연 대표님, 이곳에 당신네 사람들이 없나요? 병원에 가면 누군가는 연 대표님을 돌봐줘야 할 텐데요, 안 되면 간병인을 고용해야겠네요. 하지만 이 날씨에 간병인도 구하기 어려울 거예요...”연재준은 기침을 많이 해서 아픈 목을 문지르며 그녀가 따라준 물을 반쯤 마셨다. 목소리는 여전히 쉰 상태였다.“이왕 나를 구해준 거 끝까지 도와주면 안 될까? 시작한 일을 끝까지 해줘야지. 이번엔 나를 좀 도와줘야겠는걸.”유월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폐에 종양이 있으면 기관지에만 영향을 줄 텐데, 연 대표님은 어쩐지 머리까지 잘못된 것 같네요.”‘나보고 당신을 병원에 데려다주고 병원에서 돌보기까지 하라고? 지금 제정신인 건가?’연재준은 1층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며칠 동안 내 집에 머물면서 내가 준비한 식량까지 먹었으니 나한테 보답해야 하지 않겠어?”유월영은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한 비서님, 연 대표
유월영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연재준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는 이를 꽉 물며 물었다.“정말로 누군지 알아요?”연재준이 솔직하게 답했다.“알고 있어.”유월영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현시우는 그 교통사고로 인해 한 달 동안 의식 불명 상태였고 몸도 크게 다쳤었다. 그때 유월영은 그 배후 주동자를 반드시 찾아내 복수하겠다고 맹세했었지만 그녀는 단서가 전혀 없었다.그런데 지금 연재준이 자기가 안다고 말한 것이다.유월영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정보를 교환하는 대가는 그와 함께 병원에 가는 것이었다.유월영은 물었다. “연 대표님은 왜 굳이 저랑 같이 병원에 데려가길 원하는 거죠?”연재준은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 기침했다. 그의 약지에 있는 결혼반지가 눈길을 끌었으나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연재준이 말했다.“병원에 가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당신이랑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유월영은 얌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그의 뚜렷한 눈썹뼈에서부터 높이 솟은 콧날을 따라 내려갔다. 무정하고 냉혹해 보였던 그였지만 지금은 피곤하고 외로워 보였다.“눈도 그쳤고 얼음이 녹으면 곧 길이 열릴 거야. 당신은 신주시로 돌아갈 거고 나는 다시 밤새 기다려도 당신을 보지 못하는 상황으로 돌아가겠지. 당신을 보내기가 싫어.”보내기가 싫다는 그의 말.그래서 그는 유월영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려고 애썼다.참으로 비굴하면서도 가슴을 찌르는 말이었다.그러나 그 말을 듣고도 유월영은 감동하기는커녕 아무런 느낌도 안 들었다.애틋한 듯한 그의 속삭임, 눈앞의 이 남자가 가장 잘하는 수법 중 하나라는 걸 유월영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그녀가 동의한 이유는 단지 그가 현시우를 겨냥한 진짜 배후를 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당신이 정말로 내가 모르는 사실을 말해주는 게 좋을 거예요. 날 속이려 한다면 연 대표님은 빙설에 갇혀 한 푼도 없는 채로 친인척에게도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을 며칠 동안 겪어
유월영은 복도의 벽에 기대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연재준이 나오자 그녀는 벽에 기댄 채 움직이지 않고 물었다.“수술해야 된대요?"연재준이 덤덤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링거 맞으면 돼.”유월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연 대표님을 병원에 모셔다드렸고 검사도 하고 병도 봤으니, 이제 제가 알고 싶은 걸 말해 줄 수 있겠죠.”연재준은 몇 걸음 그녀에게 다가서며 말했다.그는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패딩 코트를 입고 있었고 목 부분에는 검은색 모피가 둘러져 있어 그의 창백한 피부와 얇고 뾰족한 턱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마치 애니메이션 속 미남 뱀파이어처럼.“그 전에, 질문 하나 해도 될까?”“안 돼요.”유월영의 표정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연 대표님, 이리저리 말을 바꾸는 그 버릇은 언제쯤 고칠 건가요?”연재준이 말했다. “얘기 안 해 주겠다는 게 아니야.”유월영이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그럼 중요한 얘기를 먼저 해요.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연재준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이전의 유월영은 거의 화를 내지 않던 사람이었으며 항상 내성적이고 겸손한 유 비서였다.물론 지금의 그녀도 쉽게 화내는 사람은 아니다.아까 그녀가 낯선 사람에게 화를 낸 이유는 그 의사가 둘의 관계를 멋대로 추측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유월영으 그와 함께 병원에 가는 걸 내키지 않아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참고 자리를 떠나지 않은 건 그 진실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연재준은 다시 입을 열었으나 여전히 유월영이 듣고 싶어 하던 요점은 아니었다.“그것도 알고 있어. 당신이 SAM 인수를 마치고 정식으로 레온 그룹 가죽 라인의 총책임자가 됐을 때, 화물에서 금지 약물이 발견되어 파리 경찰에게 사흘 밤낮 조사를 받은 적 있지. 그 일을 누가 꾸민 건지도 알아.”유월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듣고 싶은 건 시우 씨의 교통사고의 주범이 누구냐는 거예요.”그러나 연재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그리고 당
연재준은 유월영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를 맡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더 가까이 가져가 그녀의 향기를 탐했다.그의 얼굴에서 두려움이나 공포 같은 감정을 전혀 찾아볼 수 없자 유월영은 옷깃을 잡은 손에 더 힘을 주며 물었다.“왜요? 내가 못 그럴 거 같아요”하지만 다음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고 대표님. 저희 대표님한테 이렇게 무례하게 굴지 마시죠.”유월영이 고개를 돌리자 뜻밖에도 그 자리에 하정은이 서 있었다!‘그녀가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동시에 뒤에서도 무언가 느껴진 유월영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그러자 네 명의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연재준의 사람들이었고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선을 넘는 행동을 한다면 즉시 제지에 나설 태세였다.유월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연재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옷깃을 잡히고 있었고 살짝 몸을 앞으로 숙인 채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채 평온한 표정이었으며 협박당하고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유월영은 웃음기 없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신네 사람들이 계속 청원에 있었어요? 연 대표님, 혼자가 아니었네요?”연재준은 부인하지 않았다.유월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랬다. 연재준과 같은 신분과 위치에있는 사람이 혼자 다닐 리 없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간과한 것이다.유월영이 비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연약한 척하더니 날 방심하게 하려고 꾸민 짓이에요?”“아니, 그냥 당신이 나를 덜 거부하게 하려는 것뿐이야.” 연재준이 부드럽게 말했다.유월영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고 하정은이 다시 경고했다.“고 대표님, 그 손 놓아주시죠.”해운 그룹의 대표가 이런 식으로 옷깃을 잡히는 건 그를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것과 같았다!하정은의 경고에도 유월영이 미동 없이 서 있자 하정은은 참지 못하고 움직이려 했다. 그러다 연재준과 눈이 마주친 하정은은 말없이 손을 내렸다.유월영
부하들은 전전긍긍하며 말했다.“지금 두 사람은 이미 국경 너머로 도망갔고 이렇게 많은 네티즌들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계속 추적해야 할까요?”원칙대로라면 이 상황에서 그들은 손을 떼고 더 이상 움직이지 말아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정체가 드러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엘리자베스 부인은 포기할 수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유월영과 연재준은 지금 옆에 경호원들도 없어 가장 약하고 취약한 순간이었다.“예전에는 그들에게 손을 대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다고...”게다가 엘리자베스 부인은 방금 유월영이 또 다른 정체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만약 유월영의 정체가 정말로 자신이 알고 있는 그것이라면 엘리자베스 부인은 절대로 그녀가 레온 가문으로 돌아가게 놔둘 수 없었다.과거 다니엘 부인이 남긴 유언 대로라면, 유월영은 그 신분으로 돌아간 후 막대한 지분을 바로 얻게 되고 현시우는 세력은 더욱 강력해져 가주의 자리를 확고히 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오성민 역시 연재준이 죽기를 바랬으며 이것이 그들이 협력한 조건 중 하나였다.만약 두 가지 일이 모두 실패하고 유월영과 연재준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면 목숨이 위험해지는 건 오히려 오성민과 자신이었다.“유월영과 연재준은 이번에 반드시 죽어야 해.”“반드시 죽어야 된다고!”엘리자베스 부인은 결정을 내렸다.“계속 따라가.”부하는 다시 설득하려고 했다.“사모님, 만약 정체가 탄로 난다면...”엘리자베스 부인은 유리잔을 집어 던지며 말했다.“조금 조심스럽게 할 수는 없는 거야? 내가 네놈들을 얼마나 오래 데리고 있었는데! 고작 두 사람을 죽이는 방법까지 가르쳐야 해?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처리해!”부하는 겁에 질린 채로 황급히 알겠다고 대답하며 방을 빠져나갔다!엘리자베스 부인은 책상의 가장자리를 양손으로 받치고 컴퓨터 화면 속의 유월영과 연재준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유월영이 죽고 나면 그다음은 크로노스의 차례야.”“난 반드시 레온 가문의 상속
여기서는 대담한 사람이 배불리 먹고 소심한 사람은 굶어 죽기 십상이었다. 만약 경찰서에 잡혀 들어가면 한바탕 두들겨 맞은 후 거액의 벌금과 함께 본국으로 추방될 게 뻔했다.이런 일은 브로커도 전에 겪어 봤었기에 다시 겪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유월영의 제안에 그는 별로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까짓것! 도망가지!”연재준이 유월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아까 말한 계획은 마음에 안 드는 거야?”경찰과 몸값을 잘 협상하면 잠시 경찰서에 남아 있다가 하정은이 그들을 데리러 오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하지만 유월영이 말렸다.“우선 여기서 도망쳐보고 실패하면 다시 연 대표님의 계획을 쓰죠.”연재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굳이 그럴 필요 있어?”연재준의 눈에는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유월영이 입꼬리를 올렸다.“재미있잖아요.” 비록 작은 국경 마을이었지만 인구는 적지 않았고 앞쪽 모퉁이에서 차가 막히기까지 하여 경찰차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유월영이 밀입국 브로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브로커가 갑자기 폭발하듯 경찰차 뒷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경찰들은 자주 이런 불법 입국자들을 잡아야 했기에 익숙해져 있었고 별로 경계하지 않았다.밀입국자들이 감히 탈출할 거라 생각하지 않아 경비는 매우 허술했고 심지어 수갑조차 채우지 않았다.브로커는 차 문을 발로 찬 후 모두에게 외쳤다.“빨리 도망가!”모두가 1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이내 알아채고 경찰차에서 뛰어내렸다!앞쪽에서 운전하던 경찰은 사람들이 다 도망간 후에야 반응하여 급히 차에서 내려 큰 소리로 외쳤다.“거기 서! 서라고!”물론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모두 사방으로 뿔뿔이 도망쳤고 경찰들도 인원이 부족하여 무전기로 사람을 부르며 도망치는 이들을 쫓기 시작했다.번화가에서 벌어진 이 추격전은 금방 혼란을 초래했고 한순간 사람들이 서로 엉키며 혼란에 빠졌다.성격이 급한 경찰이 경고로 공중에 총을 쏴 올렸고 현지 주민들도 겁에 질려 고개를 숙였지만 아무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
“갈 거야 말 거야?”밀입국 브로커가 어눌한 한국말로 물었다.유월영은 그를 한 번 힐끗 보고 말했다.“얼마야?”상대는 손바닥을 펼쳐 보이더니 두 번 흔들었다.유월영이 물었다.“20만 원?”브로커가 고개를 끄덕였다.“20만원, 한 사람당.”연재준이 막 동의하려 하자 유월영이 먼저 말했다.“20만원에 두 사람.”브로커가 흥정하며 말했다.“30만원, 두 사람.”“25만원 두 사람, 아니면 우리끼리 갈 거야.”브로커가 입술을 핥으며 손으로 OK 사인을 보내자 그제야 유월영은 몸을 돌려 돈을 세어 그에게 건넸다.돈을 받은 브로커는 그들에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둘은 뒤를 따라가며 연재준이 물었다. “왜 그렇게 흥정한 거야?”브로커가 한국말을 잘 알지 못해서 그들은 신경 쓰지 않고 서로 대화할 수 있었다.유월영이 찡그리며 말했다.“정말 몰라서 물어요? 밖에서 돈이 많은 티를 내면 눈에 띈다고요.”연재준이 미소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유 비서, 당신 없으면 어쩔뻔했겠어?”국경선은 철조망 하나로 구분되어 있었고 부근에는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브로커는 그들을 데리고 풀숲에 숨었다가 국경 경찰이 교대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이때를 틈타, 그는 바로 뛰어 들어가 이미 손상된 철조망 부분을 벌리고 그들을 부르며 말했다.“빨리 뛰어! 빨리!”유월영은 그의 말대로 생각할 겨를 없이 몸을 움직였지만 머리로는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이게 다야? 무작정 뚫고 가는 거야?”그녀는 순간 아까 준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거라면 그 브로커가 필요도 없고 그냥 연재준과 둘이서도 갈 수 있었다. 비밀 통로도 없고 왜 돈을 줬을까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연재준은 그녀를 잡아끌며 웃음을 참고 말했다. “인터넷에 나오는 농담 안 봤어? 브로커가 돈 받고 알려준‘비밀 통로’라는 게, 사실 줄을 새치기하게 해 주는 거래. 그리고 고객이 새치기해서 들어가면 그가 남아서 뒤에 사람들과 대신 싸워주는 거야. 지극히 간단한 방법이지.”“.
“...그래서 내가 쪽지를 남겨두었잖아요?”유월영은 연재준의 품에서 벗어나며 말했다.“놈들은 따돌렸고 나도 괜찮아요...수액은 다 맞았어요?”“응.”연재준은 대답하면서도 시선은 유월영에게 고정되어 한순간도 떼지 않았다.마치 한눈을 팔면 그녀가 바람에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유월영은 모자를 눌러쓰며 말했다.“국경으로 가는 방법도 알아냈어요. 여기서 ‘시골 버스’라는 게 있는데 신분 확인 없이 바로 탑승해서 돈만 내면 된대요. 그걸 타고 국경선까지 가면 여기를 뜰 수 있어요.”“어디서 타면 돼?”“이런 번화가에서는 아닐 테고...가시죠.”유월영은 이미 길을 다 물어놓았다.이런 버스를 타고 국경선까지 가려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불법 입국자들이었다.사람들은 서로 암묵적으로 이해한 채 차에 올라 요금을 지불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차에 올라서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차 안에는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공통점이라면 모두 옷이 더럽고 얼굴에도 먼지가 잔뜩 묻은 채 짐 가방을 멘 가난한 막노동자들은 듯했다.별안간 한 남자가 자신은 깡패 두목이라며 하루에 몇 명까지 죽여봤는지 떠벌리고 있었다.유월영과 연재준은 눈길을 주지 않은 채 그저 흘려듣고 넘겼다.여기서 국경선까지는 몇 시간이 걸렸고 차는 도중에 거의 멈추지 않았다. 결국 앞에 남자는 참지 못하고 그냥 생수병을 사용했다.유월영은 불편한 듯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조금 구역질이 났다.그러자 문득, 따뜻한 손이 그녀의 두 귀를 살며시 막아주었다.유월영은 순간 당황하여 연재준을 쳐다보았다.연재준은 몸을 살짝 돌려 그녀의 시야를 가리며 창밖을 계속 바라보라는 신호를 보냈고 유월영은 입을 다물고 밖을 내다보았다.잠시 후, 연재준은 그녀의 귀에서 손을 떼고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정말 초라하네요, 우리 재벌 집 아가씨가.”유월영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나도 재벌 집 아가씨로 산 건 얼마 안 됐어요. 연 대표님이야말로 정말 초라한 모
유월영에게 교복 외투를 덮어준 사람도 연재준이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봤지만 결국 그를 잊어버렸다.유월영은 시선을 돌리며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왜 자꾸만 떠오르는 거지?”“이제 와서 기억이 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이미 너무 늦었다.유월영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놈들이 너무 늦게 쫓아오는 것 같아 이상한 생각이 들던 찰나, 1층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나타나 간호사에게 사진을 보여주면서 본 적이 있는지 묻고 있었다.간호사는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고 그들은 병실을 하나씩 찾아다니기 시작했다.유월영은 연재준의 수액 병을 확인했다. 아직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그녀는 그를 깨우지 않고 메모 하나를 남긴 뒤 혼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럽에서는 보통 가정 의사한테 예약을 먼저 하므로 병원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았다.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3층까지 올라오던 중 갑자기 누군가가 불어로 외쳤다.“이봐! 바보들!”그들이 곧바로 고개를 돌리자 유월영이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남자는 바로 사진을 확인하며 말했다.“맞아! 저 여자야!”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유월영은 돌아서 도망쳤다.순식간에 병원에서 한차례의 추격전이 벌어졌다.한편 연재준은 사실 잠들어 있던 것이 아니라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어느 순간 연재준은 손을 움찔하더니 이내 눈을 번쩍 떴다.그때는 이미 사건이 발생한 지 40분이 지난 후였고 간호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결국 총까지 쏘다니! 병원 전체가 엉망이 됐고 아직도 정리가 안 됐대요.”“그러게요. 무슨 사람들이 그렇게 무서워요? 그 한국 여성분을 잡으려고 한 거라던데?”“아마도 갱단이겠죠...”연재준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고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유월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수액을 맞고 나서 원래 돌아왔던 안색은 그 순간 얼굴이 다시 하얗게 질렸다.그는 급히 주삿바늘을 빼려고 하다 손등에 붙은 메모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충격을 받은 유월영은 숨을 쉬기조차 어려워졌다.그녀의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오늘에도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의지 덕분이었다.유월영은 급히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몇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그리고 일어나 자판기에서 찬물을 받아 들고 목을 축였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그녀는 조금씩 차분해졌다.“아니야...”“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 리가 없어.”그녀를 죽인 것도, 사체를 버리라고 지시한 것도 연재준이었다. 그러니 그는 세상에서 가장 확신을 가지고 그녀가 죽었다고 믿는 사람이었어야 했다.이 사진들이 몰래 찍힌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연재준이 직접 찍었다는 증거도 없었다.아마 레온 가문 사람들이 찍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들은 유월영이 “고민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순간부터 그녀를 감시해 온 건 분명했고 그녀의 약점을 잡으려 했을지도 모른다.연재준이 사진들을 갖고 있는 건 그녀가 나타난 후에 그것들을 수집했기 때문일 것이다.“분명히 그렇게 된 걸 거야.”이 합리적인 이유를 찾은 후 유월영은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그녀는 숨을 내쉬며 무심코 사진을 뒤로 넘겼다. 전부 그녀의 일상 사진으로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하지만 사진을 넘기다 보니 마지막 사진들만은 앞의 사진들과는 전혀 달랐다.유월영은 얼굴을 찡그리며 자세히 들여다보았고 그 사진들은 오래전에 그녀가 고등학교 축제에서 춤추던 모습임을 알아차렸다.흐릿한 화질은 딱 봐도 십여 년 전 폴드폰으로 찍힌 것이었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옷과 장소가 아니었다면 유월영 자신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이 사진은 아마도 그가 직접 찍은 것일 터였다.유월영은 폴더를 끄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연재준의 잠이 든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그때 현시우는 수능도 치르지 않고 유학을 떠났다.유월영이 그에게 가장 의지할 때 그는 갑자기 떠나버렸고 그
유월영이 돈을 찾고 돌아오자 연재준도 마침 진료실에서 나왔다.그가 말했다.“됐어, 이제 가자.”유월영이 눈살을 찌푸렸다.“이렇게 빨리 끝났어요?”연재준이 대답했다.“주사를 오래 맞으면 지체될 것 같아서, 의사에게 약을 받았어.”“약을 먹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유월영은 그의 팔을 잡아 의사 사무실로 다시 끌고 들어가며 불어로 말했다. “의사 선생님, 이 사람한테 수액을 처방해 주세요.”연재준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아가씨, 우리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안 돼. 그놈들이 언제 따라올지 몰라. 매번 운이 좋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유월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길에서 자꾸 피를 토하고 쓰러지면 오히려 더 지체돼요. 차라리 지금 끝내는 게 나아요. 의사 선생님, 수액 부탁드립니다.”연재준은 간호사의 안내로 의자에 앉았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지만, 이내 무언가 떠올라 기분이 좋아졌다.“당신, 정말 날 걱정해 주는구나.”“당연하죠.”연재준의 눈에 살짝 빛이 들었다.유월영이 냉정하게 말했다.“나를 구하려다가 이렇게 된 거니까요. 내가 그 정도로 시비를 못 가리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한테 빚을 져도 당신한텐 빚을 안 져요.”“그런데 내가 당신에게 진 빚을 생각하면 당신이 백 번 나를 버려도 전혀 과하지 않지.”가슴이 저리는 듯한 느낌에 유월영은 고개를 숙여 그를 바라보았다.예전의 연재준의 두 눈에는 항상 어둠이 드리워져 있어 그의 감정 변화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는 결코 누구한테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었다.병원 밖은 환한 봄날이었고 그의 얼굴도 햇빛 아래 선명히 드러났다. 그의 눈에는 깊은 사랑이 깃들어 있어 유월영의 가슴이 두근거렸다.의사가 약을 준비하고 간호사가 수액을 놓기 위해 다가오자 유월영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저...혹시 핸드폰 충전 케이블이 있나요? 제 핸드폰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아서요.”간호사는 있다고 말하며 연재준에게 수액을 놔주고 충전 케이블을 가져다주었다
연재준은 재빨리 손을 빼고 강가로 가서 깨끗이 씻었다.손바닥의 핏자국은 강물에 씻기자마자 바로 사라졌다.유월영은 연재준의 뒤로 다가가 기침을 참으며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뒷모습을 보았다.연재준은 지난번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수척해진 듯했다.3월 말이라 날씨는 이미 따뜻해졌지만 그는 여전히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다. 코트를 벗으니 검은색 스웨터 위로 등뼈가 선명하게 드러났다.유월영은 그의 건강 상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폐에 있는 그 종양은 3년 넘게 있었지만 그간 수술할 정도로 악화되지 않았다. 그러다 작년 말에 상태가 더 나빠져 이제는 수술이 가능해졌지만 그는 여전히 수술을 받지 않고 있었다.연재준과 같은 이기적인 사람이 여태까지 수술하지 않는 것을 보고 유월영은 그의 상태가 아직 별로 심각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그의 상태를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유월영이 물었다. “몸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뭐 한 거예요?”연재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그냥 너무 빨리 뛰어서 그래...내가 건강이 뭐가 어때서? 아까 1대 3으로 싸우는 걸 당신도 봤잖아? 제발 나 좀 그만 저주해.”유월영은 그의 창백한 입술을 몇 초 동안 응시하다가 단호하게 말했다.“병원에 가요.”“지금? 지금은 빨리 귀국하는 게 우선이야. 다른 건 귀국하고 나서 얘기해.”유월영이 차갑게 말했다.“이러다가 연 대표님 유골을 들고 귀국하게 생겼다고요. 지금 당장 병원에 가요.”그녀는 이미 결심을 굳혔고 당장 병원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곳은 외진 시골이라 표지판도 없었다.유월영이 물었다. “핸드폰 가져왔어요?”연재준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핸드폰을 건넸다.“비밀번호는 당신 생일이야.”유월영은 그를 한 번 쳐다보며 핸드폰을 켰다. 배터리는 20% 이하였고 유월영은 이내 절전 모드로 설정한 후 지도 앱을 열어 가장 가까운 병원을 검색했다.병원까지 8킬로미터.교통수단이 없어 걸어가야 했고 두 사람 모두 “노약자” 상태라 한
연재준의 무릎에 누워있던 유월영이 일어나려 했지만 연재준은 그녀를 눌러 앉히며 고개를 저었다.앞뒤 좌석 사이에 차단 판이 올라가 있었고 방금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소곤거리듯 작게 말해서 앞좌석에서 들을 수 없었다.그러나 연재준은 조수석에 앉은 경호원이 차 문 옆에 있는 백미러로 그들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그래서 연재준이 입을 열면 주목을 받기 쉬웠으나 유월영이 계속 누워 있으면 보이지 않을 터였다.이번에 연재준은 신주시에서 너무 급하게 출발하는 바람에 데려온 경호원들은 평소에 믿고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임시로 데려온 사람들이었다.그의 심복인 하정은과 조형욱은 신주시에 남아 현시우를 감시하고 있었고 연이어 사고가 발생한 해성 그룹을 안정시키고 있었다.준비가 충분하지 않으면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었으며 현재 상황은 그들에게 매우 불리했다.경호원 네 명 모두가 매수되었을 가능성이 높았고 유월영의 몸 상태도 좋지 않아 연재준은 그들과 싸우는 한편 그녀를 신경 써야 했다.정면으로 맞서기에는 거의 승산이 없었고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면 탈출 확률은 훨씬 더 낮아지고 반대로 도중에 탈출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판단된 연재준은 가만히 유월영의 몸을 흔들었다.그리고 주먹을 꼭진 유월영의 손을 펼쳐 깍지 끼고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당신과 현시우.]유월영은 눈빛을 반짝이며 그의 뜻을 바로 알아챘다. 그는 마지막으로 유월영에게 모든 게 현시우와의 연기하는 게 아는지 확인하고 있었다.유월영이 짧게 대답했다.“우린 도망쳐야 해요.”연재준은 이해하고 다시 글자를 썼다.[멀미.]이 길은 비포장도로로 울퉁불퉁했기 때문에 차가 덜컹거리며 흔들렸다.유월영은 갑자기 연재준의 무릎에서 일어나 입과 코를 가리고 앞에 있는 차단 판을 세게 두드렸다.“차를 빨리 세워주세요. 토할 것 같아요!”운전자는 망설이며 말했다.“하지만...레온 그룹 사람들이 언제든 따라올 수 있어서 여기서 멈추는 건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