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훈은 일주일 내내 별장에 오지 않았었다.하지만 오늘은 별장에 들렀을 뿐만 아니라 평소보다 퇴근 시간도 빨랐다.그가 집에 들어서자 가정부가 그의 외투를 받아주었다.그는 신발을 갈아신고 거실로 들어갔다.거실 카펫 위에서 유모와 놀고 있는 딸을 본 윤영훈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연이야.”여자아이는 낯설지 않은 듯 윤영훈을 보고 거부감 없이 눈을 깜박거렸다.윤영훈은 어린 딸을 안아 들고 자연스럽게 카펫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딸을 무릎 위에 앉히고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달랬다.“아빠라고 해봐. 아빠, 아빠.”딸아이는 아, 아 하는 무의미한 소리만 냈다. 윤영훈은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한 글자씩 말했다. “아빠 해 봐.”연이가 옹알거렸다.“아! 아!”“아니야 아니야, 연이야. 따라 해봐. 아빠.”“엄마! 엄마!”윤영훈은 잠시 멍해졌고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주월향이 다가오고 있었다.여자아이는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주월향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주월향은 딸아이의 분유를 타며 조용히 말했다.“애는 이제 겨우 1살 반이에요. 아직 잘 말할 줄 모르니 너무 다그치지 마세요.”윤영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 그는 다시 예전의 그 방탕하고 가벼운 윤영훈이 된 듯했다.“그럼 당신이‘여보'라고 한 번 해봐.”주월향은 잠시 흠칫하더니 곧 윤영훈의 품에서 아이를 안아가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윤 대표님께서 연이로 나를 협박하지 않았더라면 난 절대 당신 곁에 남아있지 않았을 거예요.”그래서 그녀가 그를 “여보”라고 부를 일은 없었으며 그들 사이에는 그런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윤영훈은 가만히 카펫에 앉아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그녀가 능숙하게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의 시선이 갑자기 애틋해졌다. 그는 눈을 깜빡이기 싫었으며 한 초라도 더 보고 싶었고 이 장면을 마음속에 새기고 싶었다.주월향은 그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 불편해
주월향은 아주 빠르게 윤영훈과 사랑에 빠졌다.그는 그녀의 첫 남자였고 첫사랑이었다. 그녀는 순진하게도 그들의 미래를 그렸으며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부터 함께 백발이 된 모습까지 상상했다.결국, 고작 반년도 채 안 돼서 그녀는 현실의 쓴맛을 알게 되었다.윤영훈이 그녀에게 마음을 쏟았던 이유는 오직 이름에 “월”자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게다가 윤영훈은 이미 그녀를 질려했고 곧 주변에 다른 여자가 생겼다. 그리고 그 여자가 아무렇게나 둘러댄 모함에 윤영훈은 주월향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믿고 자연스럽게 그녀와 헤어졌다.그녀가 믿었던 진정한 사랑은 결국 순진한 꿈에 불과했다.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던 그 시절 그녀가 어떻게 견뎌냈는지는 하늘만이 알고 있었다.주월향의 눈에는 잠깐의 증오가 스쳤지만 곧 그것을 억누르며 감췄다.윤영훈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두 번이나 “영훈 씨”라고 불렀지만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주월향은 할 수 없이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영훈 씨. 영훈 씨?”조용히 자고 있던 남자는 갑자기 주월향의 손목을 잡더니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주월향은 본능적으로 몸부림쳤다.“나 좀 놔줘요!”윤영훈의 쉰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잠깐만 이러고 있게 해줘.”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그 말투를 듣자 주월향의 극도로 거부하던 마음이 왠지 모르게 차분해졌다. 그녀는 그의 셔츠를 잡고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윤영훈은 주월향을 품에 안고 턱을 그녀의 머리 위에 올린 채 조용히 말했다.“당신이 믿든 안 믿든 난 당신을 그 누구의 대체품으로도 여기지 않고 있어. 내가 뭘 하는지 잘 알고 있어.”주월향은 자기도 모르게 울컥해졌다.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는 건 아니야. 결국 우리 사이도 고작 반년이잖아. 내가 지금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해'라고 말해도 당신은 믿지 않을 거잖아.”주월향은 말없이 그의 가슴에 엎드려 그의 심장 소리를
윤영훈은 대답이 없이 가만히 있다 2층 아기방으로 올라가 딸아이와 놀기 시작했다.주월향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핸드폰에 신해 그룹을 검색했다.곧 수많은 게시글이 나타났고 모두 윤씨 가문이 이번에 위태롭다는 내용이었다. 부도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이었다.그녀는 몇 개의 글을 대충 훑어보았다. 요약하자면, 자금 흐름에 문제가 생겼고 부도가 멀지 않다는 것이었다.주월향은 핸드폰을 꽉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딸아이는 오후에 내내 낮잠을 잤기에 지금은 전혀 졸리지 않아 까불고 있었다.윤영훈은 아이를 안고 두더지 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12개의 구멍이 있는 장난감 기계에서 작은 다람쥐가 튀어나오면 그는 딸아이의 손에 작은 망치를 쥐여주고 두더지를 때리게 했다.“아야! 못 맞혔네! 다시 해보자, 이거 때려! 맞췄다! 연이 최고네~”여자아이는 즐거워하며 깔깔 웃어댔다.주월향은 그가 자기 자식을 모른척하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가 아이를 이렇게나 좋아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부녀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로 하고 침실로 돌아와 씻으려고 준비했다. 그리고 옷장을 열어 잠옷을 꺼내다가 무심코 아래쪽의 수납함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주월향은 상당히 깔끔한 성격이었고 계절이 지난 옷들은 항상 깔끔하게 접어 수납함에 넣고 방충제를 넣어 뚜껑을 덮은 후 먼지나 벌레가 들어가지 않도록 했었다.그런데 그 수납함은 지금 뚜껑이 비스듬히 되어있었고 누군가 열어본 듯했다.주월향은 몸을 숙여 뚜껑을 열어 확인했고 안에 있는 옷들도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그녀는 곧바로 아래쪽을 뒤져보았고 예상대로 몇 개의 딱딱하고 차가운 물체가 만져졌다.안에 물건을 꺼내 확인하는 순간 주월향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그건 돌이 아닌 금괴였다!벽돌처럼 생긴 커다란 금괴가 손에 묵직하게 느껴졌으며 적어도 3~5kg은 나갈 듯했다.하지만 이 물건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에 주월향은 순간 혼란스러워졌다.그녀는 수납함을 확 젖혔다. 안에는 이런 금괴가 다섯 개나 있
윤영훈은 조사를 받으러 불려 갔고 신해 그룹은 대혼란에 빠졌다. 주가는 폭락하여 예전의 해운 그룹 때보다 더 빠르게 떨어졌다.업계에는 비밀이 없었으며 사람들은 이내 알게 되었다. 윤씨 가문은 빚더미에 올라앉고 곧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을. 신용이 파탄 난 윤씨 가문은 더는 회생할 가능성이 없었다.그러나 사람들은 더 궁금해했다. 네 대 재벌 중 하나였던, 한때 명성을 떨치던 윤씨 가문과 윤영훈은 어쩌다 이렇게까지 몰락하게 되었는지.해성 그룹은 그동안 아주 잘 발전해 왔고 사람들은 아직도 그가 석 달 만에 종을 울리며 상장한 전설을 기억하고 있었다. 해성 그룹이 있는 한 윤씨 가문이 이렇게 갑자기 무너진 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이 문제는 곧 인터넷에서 자칭 전문가들과 유명 블로거들의 분석과 토론을 불러일으켰다.어떤 사람들은 윤영훈이 연속적인 의사결정 실수로 인해 부동산에 투자했으며 결국 부동산 시장이 무너져서 손해를 봤다고 말했다.다른 사람들은 그가 지인들에게 배신당했다고 했고 그 증거로 윤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연씨 가문을 포함한 세 가문에서 그의 해성 그룹의 지분을 헐값에 인수했다고 주장했다.그 밖의 소문들도 가지각색이었다. 경영진들이 경쟁사로 빼돌려졌고 고객도 같이 데려갔다는 둥, 주주들은 자금을 들고 도망갔고 윤영훈은 자산을 해외로 이전했다는 둥그런 내용들이었다...이런 추측들은 그나마 “그럴듯한” 것이었고, 가장 터무니없는 것은 윤영훈이 도박에 빠져 하룻밤에 몇억, 몇십억을 잃었다는 이야기였다.유월영은 그 뜬소문들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니까 생각나네요. 내가 처음 윤영훈을 만난 건 현씨 가문의 유람선에서였는데, 우리 함께 몇 판 카드놀이를 했었죠.”그때 웃음을 띠며 유월영에게 “너도 같이 겸상할 자격이 있냐”고 오만하게 물었던 윤영훈은 아마도 자신이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될 운명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한세인은 서류를 정리하며 물었다.“그럼 아가씨는 그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몰락하게 되었
유월영은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연 대표님께서 저를 그렇게 생각한다니 정말 억울하네요. 저는 오히려 연 대표님이 건강하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인걸요.”진심이었다.유월영은 병든 사자를 쓰러뜨리는 것에 흥미가 없었다. 그는 반드시 건강해야 했고 그래야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일에 대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그녀가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지난 2년간 이렇게 애써 준비한 계획은 재미가 줄어들고 말 것이다.한세인이 전화를 마치고 돌아와 말했다.“아가씨, 구조대가 곧 온다고 합니다.”“알았어요.”유월영은 대답하며 연재준의 옷장을 열어보더니 가장 두꺼운 외투를 하나 꺼내어 그에게 던졌다.“연 대표님, 조금만 더 버티세요.”연재준은 손을 들어 외투를 받으며 기분 좋은 듯한 유월영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기분이 좋아 보여. 계획이 성공해서 그런가?”“여기에 갇혀서 일도 제대로 못 하는데 무슨 계획이 성공하겠어요?”유월영은 그 말을 인정하지 않았고 여전히 무심하게 말했다.“연 대표님, 이곳에 당신네 사람들이 없나요? 병원에 가면 누군가는 연 대표님을 돌봐줘야 할 텐데요, 안 되면 간병인을 고용해야겠네요. 하지만 이 날씨에 간병인도 구하기 어려울 거예요...”연재준은 기침을 많이 해서 아픈 목을 문지르며 그녀가 따라준 물을 반쯤 마셨다. 목소리는 여전히 쉰 상태였다.“이왕 나를 구해준 거 끝까지 도와주면 안 될까? 시작한 일을 끝까지 해줘야지. 이번엔 나를 좀 도와줘야겠는걸.”유월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폐에 종양이 있으면 기관지에만 영향을 줄 텐데, 연 대표님은 어쩐지 머리까지 잘못된 것 같네요.”‘나보고 당신을 병원에 데려다주고 병원에서 돌보기까지 하라고? 지금 제정신인 건가?’연재준은 1층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며칠 동안 내 집에 머물면서 내가 준비한 식량까지 먹었으니 나한테 보답해야 하지 않겠어?”유월영은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한 비서님, 연 대표
유월영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연재준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는 이를 꽉 물며 물었다.“정말로 누군지 알아요?”연재준이 솔직하게 답했다.“알고 있어.”유월영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현시우는 그 교통사고로 인해 한 달 동안 의식 불명 상태였고 몸도 크게 다쳤었다. 그때 유월영은 그 배후 주동자를 반드시 찾아내 복수하겠다고 맹세했었지만 그녀는 단서가 전혀 없었다.그런데 지금 연재준이 자기가 안다고 말한 것이다.유월영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정보를 교환하는 대가는 그와 함께 병원에 가는 것이었다.유월영은 물었다. “연 대표님은 왜 굳이 저랑 같이 병원에 데려가길 원하는 거죠?”연재준은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 기침했다. 그의 약지에 있는 결혼반지가 눈길을 끌었으나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연재준이 말했다.“병원에 가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당신이랑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유월영은 얌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그의 뚜렷한 눈썹뼈에서부터 높이 솟은 콧날을 따라 내려갔다. 무정하고 냉혹해 보였던 그였지만 지금은 피곤하고 외로워 보였다.“눈도 그쳤고 얼음이 녹으면 곧 길이 열릴 거야. 당신은 신주시로 돌아갈 거고 나는 다시 밤새 기다려도 당신을 보지 못하는 상황으로 돌아가겠지. 당신을 보내기가 싫어.”보내기가 싫다는 그의 말.그래서 그는 유월영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려고 애썼다.참으로 비굴하면서도 가슴을 찌르는 말이었다.그러나 그 말을 듣고도 유월영은 감동하기는커녕 아무런 느낌도 안 들었다.애틋한 듯한 그의 속삭임, 눈앞의 이 남자가 가장 잘하는 수법 중 하나라는 걸 유월영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그녀가 동의한 이유는 단지 그가 현시우를 겨냥한 진짜 배후를 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당신이 정말로 내가 모르는 사실을 말해주는 게 좋을 거예요. 날 속이려 한다면 연 대표님은 빙설에 갇혀 한 푼도 없는 채로 친인척에게도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을 며칠 동안 겪어
수술이 끝나 병실로 옮겨질 때까지도 유월영은 자신이 유산으로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그녀를 병실로 데려간 간호사는 인적 사항을 등록하기 위해 그녀에게 물었다.“유월영 환자분, 가족들은 어디 계신가요?”유월영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천장만 올려다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간호사가 재차 물었다.“유월영 씨, 가족들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이때, 약품을 정리하던 다른 간호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한테 줘. 그거 내가 입력할게. 환자가 구급차에 실려올 때 신분증이랑 카드 나한테 줬었어. 바로 등록하고 비용 결제하면 된다고. 아마 이 환자는….”유월영은 그제야 입술을 달싹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저는 가족이 없어요.”진한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점점 더 진실되게 다가왔다. 그녀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었다.깊은 절망감이 찾아왔다.수술을 마친 유월영은 홀로 병원에서 사흘간 입원해 있었다.그 동안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나흘 째 되던 날, 드디어 연재준에게서 전화가 왔다.“유 비서, 무단 결근 3일이면 충분히 휴식하지 않았어? 지금 옷 입고 서덕궁으로 와.”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배경 음악과 여자들의 웃음소리까지 같이 전해져 왔다. 유월영은 지금 입원 중이라고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유 비서.”낮게 깔린 중저음 목소리가 재차 전해졌다.화가 많이 났다는 증거였다.유월영은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키고 그대로 병원을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부랴부랴 서덕궁으로 향했다. 그녀는 가는 길에 차 안에서 화장을 했다.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녀는 대충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고 카운터로 직행했다.“해운그룹 연 대표님이 계신 방이 어디죠?”고개를 든 어린 남직원은 눈앞의 미모의 연인을 보고 수줍게 웃으며 다급히 길을 안내했다.“연 대표님은 1번 룸에 계십니다. 제가 안내할게
술자리가 끝나고 유월영은 고객사 직원들을 한 명씩 차에 태워 보냈다. 모든 일이 끝난 뒤,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길가 가로등에 등을 기댔다. 이미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듯이 아팠다.립스틱은 이미 지워진지 오래고 파리한 입술에는 핏기 한 점 없었다.그녀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연재준의 운전기사가 다급히 다가오며 그녀에게 말했다.“유 비서님, 먼저 차에 타실래요?”유월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힘겹게 뒷좌석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 문이 열리더니 밖에 연재준과 여자애가 서 있었다. 같이 타려고 했는데 유월영이 먼저 타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연재준이 그녀를 보고 인상을 확 찌푸렸다.여자는 다급히 달려가서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대표님, 제가 앞에 탈게요.”연재준은 짜증스럽게 문을 쾅 닫고 차에 오르며 말했다.“유진이 먼저 데려다줘.”유월영은 고통스럽게 두 눈을 감았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유산하고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술을 마시니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차는 한 낡은 아파트 구역으로 들어섰다. 유월영이 잠깐 눈을 붙이고 있는데 연재준이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골목이 어두워서 위험해. 유 비서가 유진이 집까지 좀 데려다줘.”백유진이 흑수정 같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말했다.“괜찮아요, 대표님. 언니도 피곤할 텐데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어요. 조금만 더 걸으면 도착해요. 혼자 올라갈게요.”차에서 내린 그녀는 뒷좌석 차창에 대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대표님은 월영 언니 바래다줘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좋은 꿈 꿔요.”차갑기만 하던 연재준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그래, 좋은 꿈 꿔.”유월영은 차에 오르고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운전기사는 유월영을 집에 데려다주는 대신, 연재준의 동해안 별장으로 차를 돌렸다. 그는 연재준의 가까운 심복 중 한 명으로써 눈빛 하나로도 연재준의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집 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