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몸에서 나는 익숙한 향기가 오랜만에 유월영의 코를 다시 스쳤다. 그와 살을 맞대고 지냈던 나날들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그녀의 낯빛이 차갑게 돌변했다.유월영이 살기 어린 눈으로 연재준을 바라봤다. “연 대표님. 여기서 저랑 한판 붙으려는 건 아니겠죠?”연재준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당신 격투기 기술도 꽤 괜찮던데. 듣자 하니 지금 하는 모든 걸 현시우가 가르쳐줬다면서? 그가 당신을 가르칠 때도 이렇게 당신을 몸 아래에 눌렀나?”두 사람은 거의 밀착하고 있었으며 연재준이 말할 때마다 그의 숨결은 유월영의 목덜미에 닿았다. 유월영은 참아내며 숨을 죽였다.헤어진 지 3년이 지났어도 유월영은 연재준의 기분을 가장 잘 알아채는 사람이었다. 연재준은 지금 기분 나빠서 빈정거리고 있었다. ‘뭐가 맘에 안 들어 저러는 거지?’다만 유월영은 무엇 때문에 연재준이 심기가 불편해서 이러는지 알지 못했으며 또한 알고 싶지도 않았다.유월영은 그에게 통제되는 느낌이 정말 너무 싫었다. 3년 전 양부모가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던 자신을 떠올리며 유월영은 몸을 떨었다.그녀의 선명한 눈동자는 마치 먹구름이 끼듯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들어 연재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글자 한 글자 경고했다.“이거 놔!”연재준은 놓아주기는커녕 더 세게 잡았다.“자기야.”세 글자만으로 유월영은 몸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핏발이 선 두 눈으로 연재준을 쏘아보았다. 연재준은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말했다.“난 항상 당신이 제멋대로 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건 당신이 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둔 거지.”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무거워졌다.“누가 당신보고 현시우와 함께 있으라고 했어!”유월영은 그제야 그가 무엇 때문에 기분 나빠하는지 알았다.그래서 비웃음 섞인 미소로 비꼬며 말했다.“어쩐지, 연 대표님께서 왜 갑자기 나한테 손대나 했더니 그것 때문에 발작한 거군요.”그의 소유욕이라는 병이 발작한 것이다!유월
유월영과 한세인이 숲을 빠져나왔을 때 경마 대회는 이미 승부가 갈린 상태였다.윤영훈은 결승점에서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고 대표님! 왜 이제 오셨어요? 혹시 우리한테 일부러 양보한 거 아니에요? 아까 보니까 고 대표님 승마 기술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잖아요.”“말이 발을 헛디뎠어요. 사고는 언제나 일어나는 법이죠.”유월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윤 대표님께서 이렇게 기분이 좋으신 걸 보니 윤 대표님 팀의 팀원들이 첫 번째로 숲을 빠져나왔나 보네요.”“맞아요!”윤영훈은 기분이 좋아서 떠들었다.“고 대표님께 또 하나의 ‘나쁜’ 소식을 전해드릴게요. 현재 모금된 금액이 200억 정도 됐어요. 금액이 더 올라간다고 해도 어쨌든 제가 예상했던 숫자에 더 가까우니까 고 대표님은 이번에도 진 거죠!”유월영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정말 오늘은 참패했네요. 그러면 윤 대표님께서 오늘 저녁 사는 거로 하죠. 상처받은 제 마음도 달래줄 겸요.”윤영훈은 시원하게 대답했다.경기가 끝나고, 경품을 나눠주는 시간이 되자 숲에서 첫 번째로 나온 사람이 앞장서서 선물을 선택했다. 우승자는 유월영이 모르는 남자였다.그는 곧장 골동품 선반으로 다가가 모두의 예상대로 에로스 반지를 들어 환호했고, 사람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축하해 줬다.유월영은 그 광경을 그저 담담하게 바라보며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 듯했다.하루 동안의 자선 모금 활동이 끝나고 최종적으로 모금된 금액은 정확히 300억 원이었다. 이 숫자는 윤영훈이 유월영과의 내기에서 예상했던 금액과 딱 맞아떨어졌고 최근 몇 년 동안 신주시에서 열린 단일 자선 모금 행사 중 최고 금액이었다.이 돈은 모두 “비상” 재단 계좌로 이체되었고 계좌 비밀번호도 윤영훈한테 넘겨졌다.경기가 끝나고 유월영은 윤영훈을 포함한 몇몇 자선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식사 자리는 즐거운 분위기가 이어졌고 몇 병의 술이 해치운 후 모임이 끝났을 때는 이미 밤 11시가 넘었다.한세인은 약간 취한 유월영을 부축해
연재준이 덥석 유월영의 손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본 한세인은 바로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그를 제지하려다 꼼짝하지 않고 손을 뺄 생각도 없어 보이는 유월영을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연재준은 유월영이 끼고 있는 장갑의 벨크로를 뜯었다. 그녀는 신주시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사람들 앞에 나타날 때마다 항상 장갑을 끼고 있었다. 다만 겨울이라 날씨가 추웠기 때문에 그녀가 장갑을 끼고 있어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오직 연재준만이 계속해서 신경 쓰고 있었고, 그는 몇 번이나 유월영의 장갑을 벗기고 손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이제 그는 유월영의 장갑을 천천히 벗기며 마침내 그녀가 숨기고 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유월영의 손은 희고 섬세했으며 손등의 혈관이 얇은 피부 아래로 희미하게 보였다. 그녀의 손톱은 모두 보기 좋은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었고 손톱에는 네일아트를 하지 않은 깨끗한 살구색이었다.아주 아름다운 손이었다. 약지에 있는 그 흉터만 아니었다면 쥬얼리 광고 손 모델과 견줄 만했다.유월영의 약지를 가볍게 잡은 연재준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녀의 무명지 손가락 밑에 톱니 모양의 흉터가 있었으며 그건 확연히 봉합 수술을 받은 흔적이었다.연재준은 전부터 속으로 짐작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본 걸 믿고 싶지 않았다. 그는 목이 멘 듯 침을 삼켰다.유월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이래 봬도 레온 그룹의 보석 시리즈를 관리하고 있죠. 그 보석 디자이너들이 에로스의 설계 원리에 대해 나에게 말해 줬어요.”“살아 있는 한 절대 벗을 수 없는 이유는 반지의 특별한 설계 때문이죠. 반지를 끼우면 손가락 관절에 딱 맞게 걸리거든요. 그래서 반지를 낀 사람이 죽은 후에야, 손가락뼈에서 반지를 빼낼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즉, 관절을 통과하지 않으면 살아 있을 때도 반지를 뺄 수 있다는 뜻이죠.”연재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반지를 빼는데 손가락 관절을 지나지 않을 수는 없어.”유월영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저녁 행사에서 술을 유월영보다 더 많이 마신 윤영훈은 취한 채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 순간 부하의 갑작스러운 전화 한 통이 그를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게 했다.“대표님! 주월향을 찾았습니다!”윤영훈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지금 어디에 있지?”부하는 빠르게 말했다.“어선을 매수해 몰래 신주시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부두에서 감시 중이던 우리 쪽 사람들이 그녀를 발견했고 이미 붙잡아 뒀어요!”윤영훈이 바로 물었다.“아이도 같이 있나?”“있습니다!”윤영훈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옷장을 열어 옷을 갈아입으며 지시했다.“그 여자 아주 교활하니까 아이를 따로 가둬둬. 아이가 있으면 주월향도 감히 도망치지 못할 거야! 내가 바로 갈 테니 잘 지켜!”“알겠습니다!”부두 근처의 호텔 방에서 주월향은 우락부락한 경호원들에게 감시당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러 번 강제로 도망치려 했지만 모두 제지당했다.윤영훈이 사람들을 데리고 나타나자마자 주월향은 그에게 달려들어 그의 옷깃을 잡고 다급하게 외쳤다. “연이를 내게 돌려줘요! 돌려달라고요!”윤영훈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당신, 재주가 아주 많더군. 두 남자가 지키고 있는 와중에도 도망치다니.”어선에 숨어 지내던 주월향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옷도 지저분해 완전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를 바라보며 절망과 무력감을 느꼈다.“도대체, 도대체 나한테서 뭘 원하는 거예요?”윤영훈이 입을 열었다.“나한테 그동안 있었던 모든 걸 말해줬으면 좋겠어.”주월향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윤 대표님과 저, 이미 2년 동안이나 연락도 안 하고 지냈잖아요. 우리 사이에는 할 말이 없어요.”“아직도 시치미를 떼려고? 이미 친자 확인까지 했는데 말이야. 연이, 내 딸이잖아.”윤영훈의 말이 떨어지자 그의 옷깃을 잡고 있던 주월향의 손이 느슨해졌고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윤영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가 관계를
옆방에 갇혀 있던 여자아이가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목청껏 울기 시작했다.“엄마, 엄마!”윤영훈은 옆방으로 가서 이제 막 한 살 반 된 딸을 안았다.“연이야, 내가 네 아빠야.”연이는 아직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몸부림치며 엄마를 찾았다.“엄마, 엄마!”아이를 달랠 방법이 없자 윤영훈은 얼굴을 찡그리며 비서에게 물었다.“전에 말한 아이 돌볼 줄 아는 보모 두 명 찾았나?”비서는 대답했다.“네 고용했습니다. 이미 별장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윤영훈은 딸을 안고 호텔을 떠났다. 아이는 보면 볼수록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나랑 참 닮았네.”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윤영훈은 아이를 보모에게 맡기고 자신은 방으로 갔다.주월향은 두 명의 가정부에게 강제로 욕조에서 씻겨지고 잠옷을 갈아입힌 채 방에 갇혀 있었다.윤영훈이 들어서자 그녀는 일어나며 따졌다.“우리 연이 어디 있어요!”윤영훈은 지겹다는 듯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며 말했다.“연이는 내 딸이야, 내가 왜 돌려줘야 하지?”주월향이 날카롭게 외쳤다.“연이는 내가 낳았어요!”윤영훈이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없었으면 당신이 낳을 수 있었을까?”“...”주월향은 순간 이 남자가 제멋대로이고 막무가내라는 걸 잊고 있었다.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진정하고 한 마디 한 마디 차분히 말했다.“연이는 내가 낳았어요. 임신부터 출산, 그리고 그녀를 1년 반 동안 키운 것도 모두 나 혼자였어요.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이제 와서 아이 빼앗으려고 하는 거죠?”“윤영훈 씨, 지금 당장 연이를 내게 돌려줘요. 그렇지 않으면 고소할 거예요. 법원은 분명 아이를 나에게 줄 거예요!”“그래?” 윤영훈은 주월향의 위협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주월향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당연하죠! 아이가 세 살이 되기 전에는 법원이 항상 생모 쪽에 유리하게 판결해요!”윤영훈은 시계를 풀어 테이블에 놓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그녀에게 다가갔다.“지난 2년 동안 내 아이를 숨기면서 꽤나 공부
사실 윤영훈은 여자에게 강요하는 취향이 없었으며 그의 곁을 거쳐 간 여자들은 모두 기꺼이 그를 따랐었다. 그러나 주월향한테만은 예전부터 유독 거칠게 대했던 것 같았다.윤영훈은 복잡한 감정이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그때 아이가 생긴 건가?”주월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윤영훈이 다시 물었다. “우린 그때 이미 헤어졌었는데 왜 아이를 낳은 거지?”주월향이 갑자기 냉소하며 말했다.“당신이 생각했던 게 맞아요. 처음엔 몰래 아이를 낳고 나서 당신이나 당신 부모한테 찾아가서 돈을 요구하려고 했었죠.”주월향은 고개를 들며 그를 바라봤다. 속눈썹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싸늘했다.“나를 원했던 건 영훈 씨였고 나를 대체품으로 여긴 것도 당신이었어요. 몇 달이 지나서 나를 질려하더니 새 여자가 생긴 것도 당신이었고. 새 여자 한마디에 내가 배신했다고 믿고 날 내쫓았으면서, 당신이 원할 때는 또 내 집에 제멋대로 쳐들어와 날 강제로 취했어요. 도대체 왜! 당신이 뭔데 이렇게 제멋대로 나를 대하는 거죠!”그녀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난 당신을 잘 알아요. 쓰레기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악랄한 인간은 아니라는걸요. 당신의 피가 흐르는 아이가 생긴다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죠. 그 아이가 내 피를 이어받으면 당신은 평생 나를 잊지 못할 거고, 그게 내가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결국, 그때의 그녀는 막 대학을 졸업한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힘도, 권력도 없었고 특별히 좋은 머리를 가진 것도 아니였다. 그녀가 생각한 복수란 자신의 몸을 해치면서 이 남자가 평생 그녀를 잊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정말 어리석었다.윤영훈은 주월향을 가만히 바라봤다.주월향은 목이 메어 말했다.“하지만 나중에...나중에 연이가 내 뱃속에서 자라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아이가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아이의 심장 소리도 들을 수 있었고 작은 손과 발도 볼 수 있었어. 연이는 내 아이였고 나는 그 아이를 사랑
윤영훈은 약간 혼란스러웠다. 유월영이 지금 이 시간에 왜 자신을 찾아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는 침대에서 자고 있는 주월향을 돌아봤다. 어젯밤 같은 방에서 지냈지만 그는 소파에서 자고 침대는 주월향에게 내어줬었다.“연이가 옆방에 있으니 보러 가봐.”그리고 그는 비서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거실에서 유월영을 만났다.유월영은 벽에 걸린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감상하고 있었다.“고 대표님, 미리 말도 없이 오셨네요. 실례지만 제가 이제 막 일어나서요.”윤영훈은 계단을 내려가며 유월영을 바라봤다. 그녀는 라즈베리 색의 긴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고, 짙은 보라색으로 그라데이션이 된 옷은 몸매에 딱 맞았다. 허리에는 가죽 벨트를 매어 얇은 허리가 돋보였고 짧은 부츠를 신어 세련돼 보였다. 윤영훈은 어젯밤 주월향이 자기를 유월영의 대체품으로 삼았다고 비난하던 일을 떠올랐다. 확실히 당시 유월영이 갑자기 “죽었을” 때, 그는 그녀를 잊지 못했었다.하지만 그와 유월영 사이에 깊은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유월영에 대한 감정도 사라졌다. 이제 그는 오히려 주월향을 더 많이 떠올리고 있었다.유월영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공항에 가는 길이었어요. 마침 윤 대표님 집 근처를 지나게 돼서 찾아뵈어 인사드리려고 했죠. 그런데 이 그림, 진품은 아니겠죠?”“물론 아니죠. 진품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걸려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그림도 아주 고급 복제품이에요. 몇천만 원 주고 샀거든요.”윤영훈은 유월영 옆에 다가가며 궁금한 듯 물었다.“공항에요?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유월영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말했다.“윤 대표님, 잊으셨나요? 레온 그룹이 해성 그룹과 협력한 후, 신재생에너지 프로젝트에도 레온 그룹의 참여하고 있잖아요. 이미 완성된 실험실을 점검하고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요.”“아, 맞아요.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지금 머리가 잘 안 돌아가네요.”윤영훈은 이마를 치며 말했다.
유월영은 손에 든 핸드폰을 꽉 쥐었다. 몇 초 후, 그녀는 차분하게 운전기사에게 말했다.“뒤에 있는 차를 따라가세요.”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차가 있었기에 유월영의 차량 대열은 눈보라 속에서 서서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세 대의 차는 천천히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5~6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앞뒤로 정원이 딸린 2층 복층 주택에 도착했다.연재준은 차를 그 집 앞에 세웠고, 모두 차에서 내린 후에야 유월영은 그가 비서도 경호원도 없이 혼자임을 발견했다. 그는 검은색 패딩을 입고 있었고 숨을 쉴 때마다 입과 코에서 흰 김이 나왔다. 이 눈 내리는 한겨울 속에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선명해 보였다.연재준은 먼저 유월영을 살피며 그녀가 무사한지 확인한 후 집 대문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유월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이 집이 그의 집이라고? 그는 어째서 이런 곳에 집을 가지고 있지?’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라도 한 듯 연재준은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이 집은 내가 지난번 실험실을 보러 왔을 때 길을 지나다 경치가 좋아서 샀어. 나중에 당신이랑 휴가를 오려고 말이야.”유월영은 그의 말을 한쪽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려보낸 채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실험실은 지난 3년 동안 건설된 것이고, 그녀는 3년 전에 이미 ‘죽은' 상태였다. ‘그는 그때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나랑 같이 휴가를 오려고 했다는 것일까?’‘뭐, 내 영정사진이라도 데려와서 휴가를 즐길 생각이었나?’연재준은 문을 열고, 이어서 메인 전기 스위치와 수도 밸브를 켰다.집은 유럽식 스타일로 꾸며져 있었고, 거실에는 밀폐된 장작 벽난로가 있었다.연재준이 유월영의 경호원에게 벽난로에 불을 붙이라고 하자 유월영의 지시만을 따르던 경호원은 그녀의 동의를 구하는 듯 바라보았다. 유월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경호원은 그제야 연료실로 갔다.곧 벽난로안의 불은 타오르기 시작했고, 따뜻한 온기는 대설 속에 얼어붙었던 사람들의 몸에 다시 피가 돌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