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은 긴 부츠에서 호신용 단도를 꺼내며 그들이 누구의 지시로 온 사람들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추측하기 시작했다.‘내 목숨을 노리는 건가?’유월영은 이내 부정했다. 아직 네 가문과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그녀의 목숨을 노리기엔 너무 일렀다.아마도 그녀에게 약간의 상처를 입혀 경고를 주거나 그녀를 납치해 진짜 목적을 캐물으려는 것일 것이라 유월영은 생각했다.한세인이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아가씨, 조심하세요.”유월영은 고개를 끄덕였고 바로 다음 순간 그 네 명이 일제히 달려들었다!한세인은 실력이 뛰어나 네 명과 싸워도 밀리지 않았다.그녀는 다가오는 한 사람을 발로 차서 날려버렸고 모든 공격은 갈비뼈를 부러뜨릴 만큼 강했다. 복면을 쓴 남자들은 쓰러진 후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 신음하고 있었다.한세인은 말채찍을 휘둘러 그중 한 명의 목을 감아 잡아당겼다!남자는 목이 졸려 얼굴이 파래지자 한세인이 물었다.“누가 보낸 거야! 말해!”그 남자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고 쓰러진 다른 사람들이 휘파람을 불자 숲 속에서 갑자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아마 그들의 한패일 거로 생각하고 한세인이 재빨리 말했다.“아가씨! 먼저 가세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유월영은 자신이 남으면 한시인에게 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주저하지 않았다. “조심하세요.”“걱정하지 마세요!”유월영은 말을 몰아 달리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다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유월영이 뒤돌아보자 서너 마리의 말이 따라오고 있었으며 말 위의 사람들은 모두 복면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이들은 분명 다른 참가자가 아니라 추격해 온 암살자들이었다.그녀는 곧바로 방향을 바꿔 나무가 무성한 쪽으로 말을 몰고 가서 말에서 내려 말채찍으로 말의 엉덩이를 세게 때렸다. 말은 아파서 곧바로 질주하기 시작했다.유월영은 풀숲에 숨어 그 몇 명의 추격자들이 말을 따라가는 것을 지켜본 후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숲을 빠져나가려 했다.그러다
남자의 몸에서 나는 익숙한 향기가 오랜만에 유월영의 코를 다시 스쳤다. 그와 살을 맞대고 지냈던 나날들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그녀의 낯빛이 차갑게 돌변했다.유월영이 살기 어린 눈으로 연재준을 바라봤다. “연 대표님. 여기서 저랑 한판 붙으려는 건 아니겠죠?”연재준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당신 격투기 기술도 꽤 괜찮던데. 듣자 하니 지금 하는 모든 걸 현시우가 가르쳐줬다면서? 그가 당신을 가르칠 때도 이렇게 당신을 몸 아래에 눌렀나?”두 사람은 거의 밀착하고 있었으며 연재준이 말할 때마다 그의 숨결은 유월영의 목덜미에 닿았다. 유월영은 참아내며 숨을 죽였다.헤어진 지 3년이 지났어도 유월영은 연재준의 기분을 가장 잘 알아채는 사람이었다. 연재준은 지금 기분 나빠서 빈정거리고 있었다. ‘뭐가 맘에 안 들어 저러는 거지?’다만 유월영은 무엇 때문에 연재준이 심기가 불편해서 이러는지 알지 못했으며 또한 알고 싶지도 않았다.유월영은 그에게 통제되는 느낌이 정말 너무 싫었다. 3년 전 양부모가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던 자신을 떠올리며 유월영은 몸을 떨었다.그녀의 선명한 눈동자는 마치 먹구름이 끼듯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들어 연재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글자 한 글자 경고했다.“이거 놔!”연재준은 놓아주기는커녕 더 세게 잡았다.“자기야.”세 글자만으로 유월영은 몸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핏발이 선 두 눈으로 연재준을 쏘아보았다. 연재준은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말했다.“난 항상 당신이 제멋대로 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건 당신이 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둔 거지.”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무거워졌다.“누가 당신보고 현시우와 함께 있으라고 했어!”유월영은 그제야 그가 무엇 때문에 기분 나빠하는지 알았다.그래서 비웃음 섞인 미소로 비꼬며 말했다.“어쩐지, 연 대표님께서 왜 갑자기 나한테 손대나 했더니 그것 때문에 발작한 거군요.”그의 소유욕이라는 병이 발작한 것이다!유월
유월영과 한세인이 숲을 빠져나왔을 때 경마 대회는 이미 승부가 갈린 상태였다.윤영훈은 결승점에서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고 대표님! 왜 이제 오셨어요? 혹시 우리한테 일부러 양보한 거 아니에요? 아까 보니까 고 대표님 승마 기술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잖아요.”“말이 발을 헛디뎠어요. 사고는 언제나 일어나는 법이죠.”유월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윤 대표님께서 이렇게 기분이 좋으신 걸 보니 윤 대표님 팀의 팀원들이 첫 번째로 숲을 빠져나왔나 보네요.”“맞아요!”윤영훈은 기분이 좋아서 떠들었다.“고 대표님께 또 하나의 ‘나쁜’ 소식을 전해드릴게요. 현재 모금된 금액이 200억 정도 됐어요. 금액이 더 올라간다고 해도 어쨌든 제가 예상했던 숫자에 더 가까우니까 고 대표님은 이번에도 진 거죠!”유월영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정말 오늘은 참패했네요. 그러면 윤 대표님께서 오늘 저녁 사는 거로 하죠. 상처받은 제 마음도 달래줄 겸요.”윤영훈은 시원하게 대답했다.경기가 끝나고, 경품을 나눠주는 시간이 되자 숲에서 첫 번째로 나온 사람이 앞장서서 선물을 선택했다. 우승자는 유월영이 모르는 남자였다.그는 곧장 골동품 선반으로 다가가 모두의 예상대로 에로스 반지를 들어 환호했고, 사람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축하해 줬다.유월영은 그 광경을 그저 담담하게 바라보며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 듯했다.하루 동안의 자선 모금 활동이 끝나고 최종적으로 모금된 금액은 정확히 300억 원이었다. 이 숫자는 윤영훈이 유월영과의 내기에서 예상했던 금액과 딱 맞아떨어졌고 최근 몇 년 동안 신주시에서 열린 단일 자선 모금 행사 중 최고 금액이었다.이 돈은 모두 “비상” 재단 계좌로 이체되었고 계좌 비밀번호도 윤영훈한테 넘겨졌다.경기가 끝나고 유월영은 윤영훈을 포함한 몇몇 자선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식사 자리는 즐거운 분위기가 이어졌고 몇 병의 술이 해치운 후 모임이 끝났을 때는 이미 밤 11시가 넘었다.한세인은 약간 취한 유월영을 부축해
연재준이 덥석 유월영의 손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본 한세인은 바로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그를 제지하려다 꼼짝하지 않고 손을 뺄 생각도 없어 보이는 유월영을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연재준은 유월영이 끼고 있는 장갑의 벨크로를 뜯었다. 그녀는 신주시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사람들 앞에 나타날 때마다 항상 장갑을 끼고 있었다. 다만 겨울이라 날씨가 추웠기 때문에 그녀가 장갑을 끼고 있어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오직 연재준만이 계속해서 신경 쓰고 있었고, 그는 몇 번이나 유월영의 장갑을 벗기고 손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이제 그는 유월영의 장갑을 천천히 벗기며 마침내 그녀가 숨기고 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유월영의 손은 희고 섬세했으며 손등의 혈관이 얇은 피부 아래로 희미하게 보였다. 그녀의 손톱은 모두 보기 좋은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었고 손톱에는 네일아트를 하지 않은 깨끗한 살구색이었다.아주 아름다운 손이었다. 약지에 있는 그 흉터만 아니었다면 쥬얼리 광고 손 모델과 견줄 만했다.유월영의 약지를 가볍게 잡은 연재준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녀의 무명지 손가락 밑에 톱니 모양의 흉터가 있었으며 그건 확연히 봉합 수술을 받은 흔적이었다.연재준은 전부터 속으로 짐작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본 걸 믿고 싶지 않았다. 그는 목이 멘 듯 침을 삼켰다.유월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이래 봬도 레온 그룹의 보석 시리즈를 관리하고 있죠. 그 보석 디자이너들이 에로스의 설계 원리에 대해 나에게 말해 줬어요.”“살아 있는 한 절대 벗을 수 없는 이유는 반지의 특별한 설계 때문이죠. 반지를 끼우면 손가락 관절에 딱 맞게 걸리거든요. 그래서 반지를 낀 사람이 죽은 후에야, 손가락뼈에서 반지를 빼낼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즉, 관절을 통과하지 않으면 살아 있을 때도 반지를 뺄 수 있다는 뜻이죠.”연재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반지를 빼는데 손가락 관절을 지나지 않을 수는 없어.”유월영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저녁 행사에서 술을 유월영보다 더 많이 마신 윤영훈은 취한 채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 순간 부하의 갑작스러운 전화 한 통이 그를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게 했다.“대표님! 주월향을 찾았습니다!”윤영훈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지금 어디에 있지?”부하는 빠르게 말했다.“어선을 매수해 몰래 신주시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부두에서 감시 중이던 우리 쪽 사람들이 그녀를 발견했고 이미 붙잡아 뒀어요!”윤영훈이 바로 물었다.“아이도 같이 있나?”“있습니다!”윤영훈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옷장을 열어 옷을 갈아입으며 지시했다.“그 여자 아주 교활하니까 아이를 따로 가둬둬. 아이가 있으면 주월향도 감히 도망치지 못할 거야! 내가 바로 갈 테니 잘 지켜!”“알겠습니다!”부두 근처의 호텔 방에서 주월향은 우락부락한 경호원들에게 감시당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러 번 강제로 도망치려 했지만 모두 제지당했다.윤영훈이 사람들을 데리고 나타나자마자 주월향은 그에게 달려들어 그의 옷깃을 잡고 다급하게 외쳤다. “연이를 내게 돌려줘요! 돌려달라고요!”윤영훈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당신, 재주가 아주 많더군. 두 남자가 지키고 있는 와중에도 도망치다니.”어선에 숨어 지내던 주월향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옷도 지저분해 완전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를 바라보며 절망과 무력감을 느꼈다.“도대체, 도대체 나한테서 뭘 원하는 거예요?”윤영훈이 입을 열었다.“나한테 그동안 있었던 모든 걸 말해줬으면 좋겠어.”주월향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윤 대표님과 저, 이미 2년 동안이나 연락도 안 하고 지냈잖아요. 우리 사이에는 할 말이 없어요.”“아직도 시치미를 떼려고? 이미 친자 확인까지 했는데 말이야. 연이, 내 딸이잖아.”윤영훈의 말이 떨어지자 그의 옷깃을 잡고 있던 주월향의 손이 느슨해졌고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윤영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가 관계를
옆방에 갇혀 있던 여자아이가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목청껏 울기 시작했다.“엄마, 엄마!”윤영훈은 옆방으로 가서 이제 막 한 살 반 된 딸을 안았다.“연이야, 내가 네 아빠야.”연이는 아직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몸부림치며 엄마를 찾았다.“엄마, 엄마!”아이를 달랠 방법이 없자 윤영훈은 얼굴을 찡그리며 비서에게 물었다.“전에 말한 아이 돌볼 줄 아는 보모 두 명 찾았나?”비서는 대답했다.“네 고용했습니다. 이미 별장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윤영훈은 딸을 안고 호텔을 떠났다. 아이는 보면 볼수록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나랑 참 닮았네.”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윤영훈은 아이를 보모에게 맡기고 자신은 방으로 갔다.주월향은 두 명의 가정부에게 강제로 욕조에서 씻겨지고 잠옷을 갈아입힌 채 방에 갇혀 있었다.윤영훈이 들어서자 그녀는 일어나며 따졌다.“우리 연이 어디 있어요!”윤영훈은 지겹다는 듯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며 말했다.“연이는 내 딸이야, 내가 왜 돌려줘야 하지?”주월향이 날카롭게 외쳤다.“연이는 내가 낳았어요!”윤영훈이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없었으면 당신이 낳을 수 있었을까?”“...”주월향은 순간 이 남자가 제멋대로이고 막무가내라는 걸 잊고 있었다.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진정하고 한 마디 한 마디 차분히 말했다.“연이는 내가 낳았어요. 임신부터 출산, 그리고 그녀를 1년 반 동안 키운 것도 모두 나 혼자였어요.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이제 와서 아이 빼앗으려고 하는 거죠?”“윤영훈 씨, 지금 당장 연이를 내게 돌려줘요. 그렇지 않으면 고소할 거예요. 법원은 분명 아이를 나에게 줄 거예요!”“그래?” 윤영훈은 주월향의 위협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주월향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당연하죠! 아이가 세 살이 되기 전에는 법원이 항상 생모 쪽에 유리하게 판결해요!”윤영훈은 시계를 풀어 테이블에 놓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그녀에게 다가갔다.“지난 2년 동안 내 아이를 숨기면서 꽤나 공부
사실 윤영훈은 여자에게 강요하는 취향이 없었으며 그의 곁을 거쳐 간 여자들은 모두 기꺼이 그를 따랐었다. 그러나 주월향한테만은 예전부터 유독 거칠게 대했던 것 같았다.윤영훈은 복잡한 감정이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그때 아이가 생긴 건가?”주월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윤영훈이 다시 물었다. “우린 그때 이미 헤어졌었는데 왜 아이를 낳은 거지?”주월향이 갑자기 냉소하며 말했다.“당신이 생각했던 게 맞아요. 처음엔 몰래 아이를 낳고 나서 당신이나 당신 부모한테 찾아가서 돈을 요구하려고 했었죠.”주월향은 고개를 들며 그를 바라봤다. 속눈썹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싸늘했다.“나를 원했던 건 영훈 씨였고 나를 대체품으로 여긴 것도 당신이었어요. 몇 달이 지나서 나를 질려하더니 새 여자가 생긴 것도 당신이었고. 새 여자 한마디에 내가 배신했다고 믿고 날 내쫓았으면서, 당신이 원할 때는 또 내 집에 제멋대로 쳐들어와 날 강제로 취했어요. 도대체 왜! 당신이 뭔데 이렇게 제멋대로 나를 대하는 거죠!”그녀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난 당신을 잘 알아요. 쓰레기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악랄한 인간은 아니라는걸요. 당신의 피가 흐르는 아이가 생긴다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죠. 그 아이가 내 피를 이어받으면 당신은 평생 나를 잊지 못할 거고, 그게 내가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결국, 그때의 그녀는 막 대학을 졸업한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힘도, 권력도 없었고 특별히 좋은 머리를 가진 것도 아니였다. 그녀가 생각한 복수란 자신의 몸을 해치면서 이 남자가 평생 그녀를 잊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정말 어리석었다.윤영훈은 주월향을 가만히 바라봤다.주월향은 목이 메어 말했다.“하지만 나중에...나중에 연이가 내 뱃속에서 자라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아이가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아이의 심장 소리도 들을 수 있었고 작은 손과 발도 볼 수 있었어. 연이는 내 아이였고 나는 그 아이를 사랑
윤영훈은 약간 혼란스러웠다. 유월영이 지금 이 시간에 왜 자신을 찾아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는 침대에서 자고 있는 주월향을 돌아봤다. 어젯밤 같은 방에서 지냈지만 그는 소파에서 자고 침대는 주월향에게 내어줬었다.“연이가 옆방에 있으니 보러 가봐.”그리고 그는 비서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거실에서 유월영을 만났다.유월영은 벽에 걸린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감상하고 있었다.“고 대표님, 미리 말도 없이 오셨네요. 실례지만 제가 이제 막 일어나서요.”윤영훈은 계단을 내려가며 유월영을 바라봤다. 그녀는 라즈베리 색의 긴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고, 짙은 보라색으로 그라데이션이 된 옷은 몸매에 딱 맞았다. 허리에는 가죽 벨트를 매어 얇은 허리가 돋보였고 짧은 부츠를 신어 세련돼 보였다. 윤영훈은 어젯밤 주월향이 자기를 유월영의 대체품으로 삼았다고 비난하던 일을 떠올랐다. 확실히 당시 유월영이 갑자기 “죽었을” 때, 그는 그녀를 잊지 못했었다.하지만 그와 유월영 사이에 깊은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유월영에 대한 감정도 사라졌다. 이제 그는 오히려 주월향을 더 많이 떠올리고 있었다.유월영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공항에 가는 길이었어요. 마침 윤 대표님 집 근처를 지나게 돼서 찾아뵈어 인사드리려고 했죠. 그런데 이 그림, 진품은 아니겠죠?”“물론 아니죠. 진품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걸려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그림도 아주 고급 복제품이에요. 몇천만 원 주고 샀거든요.”윤영훈은 유월영 옆에 다가가며 궁금한 듯 물었다.“공항에요?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유월영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말했다.“윤 대표님, 잊으셨나요? 레온 그룹이 해성 그룹과 협력한 후, 신재생에너지 프로젝트에도 레온 그룹의 참여하고 있잖아요. 이미 완성된 실험실을 점검하고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요.”“아, 맞아요.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지금 머리가 잘 안 돌아가네요.”윤영훈은 이마를 치며 말했다.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