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연이었다.비록 임신 중이고 플랫 슈즈를 신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눈에 띄였다.이승연은 눈을 깜짝하지 않고 첩들을 바라보았고 두 여자는 그녀의 기에 눌려 입을 다물었다.이혁재도 잠시 멍한 채 이승연을 바라보다 곧바로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갔다.“여보!”오지 않겠다던 아내가 결국 나타나자 이혁재는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얼굴에 웃음이 번졌어요.이승연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자신이 기르던 강아지가 주인을 보고 달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여보.” 이혁재는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여보라고 부르자 이승연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식탁에 있던 사람들도 반응을 보였고 이혁재의 모친 공주연도 기쁜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아가 왔니.”이승연도 사람들에게 인사했다.“어머님, 아버님.”“그래, 그래!”공주연이 직접 그녀를 부축하며 시어머니로서의 사랑과 관심을 드러냈다.이승연은 결혼 후 처음으로 이혁재의 본가에 방문했으며 그녀는 평소처럼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연보라색 네크라인 원피스는 그녀의 피부를 더욱 하얗게 보이게 했고 옷감은 주름이 잡히지 않은 채 그녀의 몸매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흰색 운동화까지 착용하여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다.이승연이 식탁에 다가가자 방금 본처와 첩들의 음울한 기싸움에도 입을 열지 않던 이진화도 예의상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승연이 왔구나. 빨리 앉아서 밥 먹어라. 혁재가 네가 온다는 소리를 안 해서 우리도 기다리지 않았어. 음식도 이제 막 나왔고 우리도 아직 입 대지 않았단다. 네 입맛에 맞는지 보렴. 마음에 안 들면 주방에 다시 해달라고 할게.”“오전에 로펌에서 중요한 고객을 만나야 해서 얼마나 걸릴지 몰라 혁재에게 못 간다고 얘기했어요. 하지만 고객을 만나고 보니 시간이 남아서 혼자 온 거예요.”이승연이 이어 설명했다.“연말에는 서류 정리하고 연초에 사건이 시작되면서 많이 바빠 아버님, 어머님을 찾아뵙지 못했어요. 제 잘못이에요.”이승연은 성격이 차갑고 가끔은 감정지수
이승연은 첫째 첩 구슬아를 향해 물었다.“제가 아까부터 물어봤는데, ‘서모'가 무슨 뜻인지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요.”구슬아는 이승연이 갑자기 주제를 다시 돌리자 당황하면서 우물쭈물했다.이승연은 구슬아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볍게 터치했다.“아, 여기 있네요. 인터넷에 따르면 '서모'는 고대에는 첩을 의미합니다. 첩은 하녀고 현대에서 하녀는 곧 가정부잖아요. 이제 이해했어요. 수고스럽겠지만 제게 국 한 그릇만 떠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이승연이 자신을 가정부 취급하리라는 걸 전혀 예상치 못한 구슬아는 이를 갈며 그녀를 노려봤다.“너!”이승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구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건데요. 저의 가문에서는 제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어요. 다음번에도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저에게 물어보세요. 어디서 주워들었다고 하지 말고.”구슬아는 입술을 깨물고 남편 이진화를 바라봤지만 그는 단지 침묵하며 앉아 있을 뿐 그녀를 도울 의사가 없어 보였다.“그리고, 이것도.”이승연은 핸드폰 화면을 첫째 첩에게 보여주며 법률 조항을 읽어주었다.“서모가 글을 읽을 줄 아는지 모르겠네요? 내가 읽어줄게요.‘허위 사실을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유포하는 것은 비도덕적이며 불법이다. 형법에 따르면, 명예를 훼손하는 허위 사실을 조작하고 유포하면 명예 훼손죄에 해당한다.' 물론 당신은 단지 ‘주워들은' 것일 뿐 아직 허위 사실을 유포한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미리 알려주려고요. 말조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구슬아는 한참 입술을 깨물다가 반격했다.“나도 글을 읽을 줄 알아!”이승연이 미소를 지었다.“그렇다면 내가 오해한 거군요. 당신이 ‘서모’라느니 하면서 여전히 200년 전의 조선시대에 사는 것처럼 말하길래. 그래서 혹시 글자를 모를까 봐 읽어준 거예요.”구슬아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푸르딩딩해져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시어머니 공주연은 기분이 좋아져 싱
이승연은 처음으로 이혁재의 본가를 방문하는 날 마침 첫째 첩 구슬아와 둘째 첩 문정인이 이혁재를 비꼬면서 하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이혁재의 아버지는 전혀 아들을 위해 나서지 않았으며 이승연은 이런 일이 평소에도 많이 일어난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그는 집에서 이런 대접을 받는 걸까?’이혁재는 갑자기 이승연의 말을 듣고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뭐라고?”“내가 무시당한다고? 나는 그냥 그런 여자들과 싸우기...”‘그런 여자들과 싸우기 귀찮아서 그렇지, 누가 매일 자기 아버지의 첩들과 싸우겠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이혁재는 말끝을 흐렸다. 그는 문득 이승연이 집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자신을 마음 아파한다는 느낌이 들었다.“...”이혁재는 운전 속도를 늦추고 이승연을 힐끗 보았다. 이승연은 눈썹을 찌푸리고 얼굴이 굳어진 채 분명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으며 목멘 소리로 말했다.“응, 어쩔 수 없어. 아버지는 그 두 여자를 더 좋아하고 그들이 낳은 아들들도 더 좋아하거든. 그들이 나보다 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 나와 엄마는 그 집에서 아무런 지위가 없어.”‘역시 그럴 줄 알았어!’이승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네 엄마야말로 너의 아버지와 혼인신고를 한 사람이고 네가 이씨 가문의 정당한 장남이야. 사생아가 법적으로 동등한 상속권을 가지고 있어도 두 여자와 아버님 사이는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해. 그런데도 너와 네 엄마가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다니!”이혁재는 그녀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거의 웃을 뻔했다. 그러나 목소리를 가다듬고 계속 불쌍한 척했다.“사극 드라마나 막장 드라마 본 적 있지? 총애받는 첩 앞에서는 본처라도 아무런 지위가 없어. 아버지가 첩들을 감싸주니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지금은 그나마 나은 편이야. 어릴 때는 더 끔찍했어. 겨울에는 난방도 틀 수 없고, 여름에는 에어컨도 못 틀고, 점심에 남은 밥을 저녁에 데워 먹었어. 그리고 매일 60만원... 아니, 매일 6천원으로 생활해야
문정인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 회장님도 그 늙은 여자를 싫어해서 큰아들도 좋아하지 않잖아. 비록 혁재가 이승연과 결혼하고 나서 이전보다 혁재에게 더 신경 쓰는 건 맞지만 아직 언니와 나의 아들만큼은 아니야.”“예전에는 회사 일도 작은 아들들에게 맡겼는데 이제는 혁재에게도 맡기기 시작했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구슬아가 표독스럽게 말했다.“안 돼, 우리는 모험할 수 없어. 큰아들 이혁재에게 너무 많은 기회를 주면 안 돼. 그들 모자가 이길 가능성을 너무 크게 만들 수는 없어.”문정인은 구슬아가 뭔가를 마음먹은 듯한 걸 알아채고 불안하게 물었다.“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녀는 변호사야, 법을 잘 알고 있고 그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야.”구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래, 그녀는 유일한 상속자야. 그러니 그 유산을 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어? 그녀는 변호사기도 하지만 피와 살로 만들어진 사람이기도 해. 두고 봐, 어떻게 큰아들이 그 패를 잃게 하는지.”말이 본처와 첩이라고 했지만 사실 내연녀였다.구슬아는 처음부터 진짜 이씨 가문의 큰 사모님이 되어 자기 아들이 이씨 가문을 상속받게 하려는 목적으로 집안에 들어 온 것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런 세상에서 아직 첩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 생각이 없었다.‘첩이라니, 참.’이혁재는 이전에 아버지에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승연과 결혼한 후, 이 회장도 그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이승연은 사회적 지위가 있었으며 이 '지위'는 그녀 자신이 법조계에서의 명성뿐만 아니라 이승연 집안 자체가 법조 명문가였다는 점을 의미했다.이승연의 가문은 4대째 법계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승연의 증조부는 한국에서 첫 번째 변호사 중 한 명으로서 여러 중요한 법률 사무와 협상을 주도했으며 첫 번째 '변호사법'을 제정하는 데 협력하기도 했다.말 그대로 세대를 거듭해 명문가였다.비록 이승연이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그녀의 가문이 한때 몰락했지만 가문의 깊은
구슬아는 만족스러운 듯 손가락을 들어 부드럽게 말했다.“한 걸음 한 걸음 진행해야 해요. 먼저 아이를 없애고 두 사람 이혼하게 한 다음 그녀가 유산 후 허약할 때 제거하면 딱이죠.”그렇지 않으면 이승연이 ‘이혁재의 아내’라는 신분으로 죽으면 유산이 고스란히 이혁재에게 가게 되니까, 그건 그들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계획에 합의를 본 두 여자는 대나무 의자에 누워 계획이 성공한 후의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한 명은 이혁재의 가문을 얻고 다른 한 명은 조카의 유산을 얻는 것이었다.발마사지사는 청각장애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대화가 유출될 걱정이 없었으며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었다. 마사지가 끝난 후, 두 여자는 함께 식당 안으로 사라졌다.발마사지사는 조용히 도구를 정리하고 전망대로 향했다.산속에 위치한 이 휴양 호텔은 주위에 나무가 무성하고 개울이 흐르고 있었으며 높은 곳에 있는 전망대에서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이 호텔을 찾는 손님들은 항상 시간을 내어 전망대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그러나 지금 이 시간, 전망대에는 두 사람만 있었다.발마사지사는 고개를 숙이고 걸어갔다. 한 마른 남자가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작은 티테이블을 옆에 두고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발마사지사는 남자 뒤로 다가가 말했다.“대표님.”오성민은 작은 찻잔을 들어 향긋한 향기를 음미하다 한 모금 마셨다. 그녀가 발 마사지실에서의 대화를 보고하자 그의 눈에는 어두운 빛이 스쳤다.‘아이를 없애고...이혼이라...할 수 있지.’‘이승연도 같이 없애버린다. 그건 안 돼.’‘그녀들이 스스로 무덤을 파고 꾸미는 일이니, 이 여자들의 손을 빌려 처음 두 개는 성사하게 놔두지.’오성민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발마사지사를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비서에게 명령을 내렸다.“최근 몇 달 동안 이혁재의 집안과 이승연 집안 모두 주시해.”“알겠습니다.”슬리퍼를 끌고 다가오던 윤영훈은 대나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이혁재의 집안과 이승연 집안 모두 주시하라고? 또 이
“응.”이승연은 간단하게 대답하고 오래 앉아 있어서 아픈 허리를 그에게 기대었다. 그녀는 아직 할 일이 많아서 그와 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이혁재는 사건 파일을 가져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읽었다. 그리고는 자기만의 결론을 내렸다.“자업자득이군.”사건은 신주시에 있는 중학교와 상업학교 학생들 사이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두 학교는 한 골목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져 있었다. 그 상업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80% 이상이 학업에 관심이 없는 작은 불량배들이었다.남우진은 상업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고 그는 평소에 친구들과 같이 주위 중학교 학생들의 돈을 갈취하는 것을 좋아했다.작년부터 그들은 중학생 송강우를 노리고 틈틈이 돈을 요구해 왔고 송강우는 성격이 나약하여 반항하지 못하고 돈을 내주었다.그러다 어느 날 그는 여자 동급생과 함께 걷다가 또다시 불량배들에게 걸렸다. 불량배들은 여학생이 예쁘다고 희롱하기 시작했고, 송강우는 여학생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그동안 참아왔던 게 폭발하면서 결국 반항했다.이 4:1의 싸움 속에서 송강우는 벽돌을 집어 들어 남우진의 머리를 내려쳤고 남우진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사건 당사자 양쪽 모두 만 14세가 넘어서 형사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법정으로 넘어갔다.“이건 명백하잖아, 남우진이라는 그 녀석이 자업자득이지. 송강우는 정당방위였는데 뭐가 잘못이야?”이마에 피도 아직 안 마른 녀석들이 벌써 못된 걸 배웠다면서 이혁재는 혀를 찼다.이승연은 서류를 돌려받으며 말했다.“응, 그래서 이 사건은 정당방위를 주장해서 무죄를 받아내야 해. 하지만 상대 변호사는 양쪽이 모두 미성년자이고 당시 상황이 급박하지 않아서 치명타를 가할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어. 그래서 방어가 과도했다고 해서 무죄라고 보기 어렵다는 게 그쪽 주장이야.”이혁재는 턱을 이승연의 어깨에 얹고 물었다.“그 여자애는? 그 여자애도 증인이잖아?”“여자애는 자신이 그때 숨었기 때문에 아무
이혁재의 키스는 언제나 유혹적이었고 그는 고의로 이승연을 뜨거워지게 했다.혀끝이 엉켜 그녀의 숨을 앗아갔고 그녀가 숨이 막혀 본능적으로 그의 옷깃을 붙잡자 이혁재는 이승연을 놓아주고 그녀의 턱, 목, 가슴으로 내려가며 키스를 이어갔다.마치 사랑스러워 놓을 수 없다는 듯이.이승연은 반쯤 밀어내듯 그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육체적인 욕구를 참을 수 있었지만 아직 법적으로 부부 사이이고 그가 남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상 굳이 참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이 순간에 집중하려고 했다.이승연은 남자가 사랑과 욕망을 분리할 수 있다면 여자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이혁재의 이런 애정 행위를 받아들이는 게 그를 사랑해서가 아닌 단지 욕구 해결이라고 자신을 설득했다.‘그냥 하는 거지 뭐.’이혁재는 이승연의 배에 키스를 하자 이승연은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 임신 6개월 차라 배가 더 불러 있었으며 그들의 아이를 생각하며 그는 마음이 부드러워져 몇 번 더 키스했다가 문득 멈췄다.이혁재가 갑자기 움직임이 없자 이승연은 이상함을 느끼며 물었다.“...왜 그래?”이혁재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들며 말했다.“아이가 나를 찼어.”이승연은 순간 멍해졌다가 태동이라는 걸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네가 너무 밝히니까.” 이혁재는 그녀가 웃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턱을 잡고 그 미소를 삼켜버렸다....운동 후에는 확실히 졸음이 몰려왔다. 이승연은 눈을 거의 뜰 수 없었고 이혁재는 그녀의 몸을 따뜻한 수건으로 닦아주고 잠옷으로 갈아입혔다.이승연은 움직이기 싫어 이불을 끌어당겨 덮은 채 잠들었다.이혁재는 샤워하고 침대에 올라 그녀를 뒤에서 안았다. 그가 붙어오자 이승연은 더운 느낌에 그의 손을 밀어냈지만, 이혁재는 다시 다가왔다. 그녀가 다시 밀어냈지만, 그는 끈질기게 안아왔다.이승연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더워. 떨어져.”이혁재는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이승연은 그가 더 이상 옆에 오지
“입 닥쳐!”이혁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꾸짖자 남철우는 그의 기세에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다시 한번 더 로펌에 와서 소란을 피우면, 그땐 며칠 동안 감옥에 있게 될 줄 알아.”이혁재가 그의 손을 내던지자 이승연이 담담하게 말했다.“다음번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돼. 경찰이 곧 올 거야.”남철우는 그 말을 듣고 푹 주저앉아 무릎을 꿇었다.“이 변호사님, 제발 저를 잡아가지 말아 주세요. 변호사님도 지금 임신 중이잖아요. 아버지로서의 제 마음을 조금만 이해해 주세요!”이승연은 마음 약한 여자가 아니었다.“당신이 소란 피운 게 벌써 몇 번째에요? 내가 기회도 주고 지난번에 경고했을 텐데요. 다시 한번 더 그러면 후회할 거라고. 탄원하고 싶으면 경찰에게 말해요.”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그를 지나 사무실로 들어갔다. 남철우는 다시 분노하여 그녀의 등 뒤에서 악담을 퍼부었다. 이혁재가 돌아서서 탁자를 발로 차자 쾅 하는 큰 소리가 났다!남철우는 그의 행동에 놀라 다시 얌전해졌다.이혁재의 온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로펌에서 폭력을 휘둘러 이승연이 곤란해질까 봐 이혁재는 온 힘을 다해 참고 있었다. 아니면 오늘 남철우는 사지 멀쩡하게 이곳을 나가지 못했을 것이었다.다행히 경찰이 곧 도착해 남철우를 데리고 갔다.이혁재는 그제야 한숨을 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는 아직도 화가 수그러들지 않아 넥타이를 풀며 씩씩거렸다.“경호원 몇몇 더 보내서 로펌 대문에서 지키라고 할게, 다시는 이런 놈들이 너를 귀찮게 하지 못하게.”이승연은 그의 행동을 보면서 아무리 꾸며도 타고난 기질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분명히 가장 얌전한 정장이었지만 그에게서는 오히려 양아치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양복을 입은 양아치, 야성적이어서 결코 사무실에 어울리지 않았다.이승연은 가방을 옷걸이에 걸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했다.‘나이가 어리다는 게 아마도 이런 거겠지. 온몸에 끝없는 힘이 넘치는군.’그녀는 컴퓨터를 켜면서 물었다.“왜 돌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