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현재는 바로 연재준의 사무실을 나와 주차원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는 기다리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해운그룹의 회사 로고를 돌아보았다. 그는 기억을 떠올렸다. 사실 그날 유월영이 그릇을 깬 후 조각을 하나가 없어진 것을 한눈에 알아챘다. 다만...그의 턱에 힘이 들어갔고 평소와 다르게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주차원 몇 명이 힘겹게 그의 무거운 모터사이클을 밀고 왔다. 그는 한심한 듯 그들을 쳐다보다 성큼성큼 걸어갔다.그는 헬멧을 쓰고 긴 다리로 모터사이클에 올라탄 후 시동을 걸고 빠르게 사라졌다....3월에 들어서자 봄기운이 완연했고 낮도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연재준은 지는 노을을 맞으며 동해안 저택에 도착했다.유월영은 식탁 앞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고 앞에 4개 반찬을 거의 다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연재준이 입을 열었다.“입맛에 괜찮은가 봐. 난 당신이 단식이라도 할 줄 알았어.”유월영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원래를 단식해서 엄마를 보러 가게 해달라고 시위하려고 했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연 대표님에게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요. 내가 굶든 말든 연 대표님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면 나만 고생이잖아요.”가정부가 뜨거운 수건을 가져다주자 연재준은 손을 닦으면서 차갑게 내뱉었다. “잘 아네.”유월영은 수저를 내려놓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재준 씨, 우리 얘기해요.”연재준은 난장판이 된 바닥을 쓱 훑어보고 가정부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정부는 지시를 받고 즉시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는 긴 다리로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가로질러 거실로 향했다.“와서 얘기해.”유월영은 입술을 깨물다 식탁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아직 장부를 못 찾은 걸 알아요. 내가 도와줄게요.”연재준은 소파에 던져진 슬리퍼 한 짝을 치우면서 여유롭게 물었다.“당신 찾을 수 있어?”“전 유현석의 딸이에요. 아버지와 함께 20년 넘게 같이 살았어요. 분명 외부인
두 사람은 모두 성인이니 그가 말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유월영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그녀에게 몸을 밀착하고 있어 그의 모든 반응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두 사람 사이는 이렇게 파국으로 향하는데...그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이런 말들을 하다니. 그이 마음속에 그녀가 어떠한 존재인지 유월영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모든 진실을 알아도, 그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더라도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그녀는 계속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는 원하는 대로 그녀를 대할 수 있었다. 유월영은 화가 치밀어 올라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이거 놔요!”연재준은 그녀의 몸을 누른 채 턱을 잡고 키스해 왔다. 유월영은 주저하지 않고 그의 혀를 있는 힘껏 깨물었다. 연재준은 재빨리 입술을 떼고 유월영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분노와 증오만 남아있었다. 연재준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더니 아예 유월영의 눈을 가렸다. “왜 화가 아직도 안 풀렸어?”그의 말투는 마치 그녀가 철없이 억지를 부리는 듯했다.유월영은 어이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당신 아버지는 내 친아버지를 죽게 했어요. 그리고 당신은 나의 양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갔고. 그러고도 내가 당신 아이를 낳아주기 원해요? 재준 씨, 당신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그럴 수 있어요!”연재준이 냉정하게 말했다. “난 당신 아버지에게 강요한 적 없어. 양아버지는 나 때문에 죽은 게 아니야.”“거짓말!”유월영은 악을 지르다 심장이 빨리 뛰고 위를 짓누르는듯한 통증에 갑자기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욱.유월영은 연재준을 밀치고 소파에 엎드린 채 가만히 있었다. 연재준은 얼굴이 굳은 채로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그렇게 싫어?”유월영은 소파를 꽉 잡은 채 그를 노려봤다.“그래요! 당신이 역겨워요!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게 바로 4년 전 비 오는 날 밤에 당신을 만난 거예요.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때 그 사람들에게 끌려가 그냥 빚 갚을 걸 그
병원에 도착하여 연재준이 유월영을 의사에게 데려간 후에야 그녀는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ICU에 엄마 보러 가는 거 아니었어요? 여기는 왜...”연재준이 한쪽에 선 채 그녀에게 말했다.“우선 앉아.”유월영은 영문도 모른 채 그가 시킨 대로 앉았다. 그러자 간호사가 쟁반을 들고 다가와 바로 그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유월영은 쟁반을 위에 있는 물건들을 봤다. 고무줄, 소독제, 주삿바늘과 채혈 튜브...연재준이 입을 열었다.“피검사 한 번 해봐.”유월영은 그제야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그를 올려다봤다.“아직도 내가 임신했다고 의심해서 이러는 건가요?”연재준은 사실 오래전부터 유월영이 임신하기를 바랬다. 두 사람은 침대에서도 조치하지 않았기에 임신한다고 해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검사해 보면 알겠지.”“...”유월영은 사실 검사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원래 임신 아닐 거라고 확신했지만 며칠 동안 확실히 잠도 많아지고 식욕이 왕성해졌다. 그리고 자주 헛구역질을 한걸 떠올리면서 갑자기 임신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월영은 자기도 모르게 배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정말로 자신이 임신한 걸까 봐 두려웠고, 연재준이 알까 봐 두려웠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의 손에 잡혀있는 것은 이미 그녀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아이를 임신한거라면 그의 손에 약점이 하나 더 늘고 그녀도 더욱더 벗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유월영은 고개를 들어 연재준을 바라봤다. 마침 그의 시선도 유월영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검고 아름다운 눈동자는 이 순간 평온하면서도 복잡해 보였다. 마치 이 있을지도 모르는 아이에 대해 다른 계획을 꾸미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이미 병원까지 왔으니 유월영은 더 이상 도망갈 수 없었다. 그녀는 할 수 없이 아랫입술을 깨문 채 팔을 내밀었다.간호사가 그녀의 팔에 고무줄을 묶은 후 정맥을 찾아 날카로운 주삿바늘을 찔러넣었다. 순간 유월영의 눈앞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연재준이 자신의 손바닥
한때 수석 비서였던 유월영을 해운그룹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가 1년 만에 연재준의 손을 잡고 다시 회사로 돌아올 거라고 직원들은 생각 못 했다. 주위의 시선을 조금도 꺼리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에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유월영이 해운그룹에 들어선 지 반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소식을 알게 되었고 그 후 3일 동안 직원들의 가장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그 덕분에 연재준과 백유진의 사이도 다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점차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유 비서가 그때 퇴사한 건 연재준이 여우 같은 백유진에게 홀렸기 때문이고, 이제야 연재준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유 비서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증거는 설 전부터 연 대표가 부지런히 지성으로 출장 갔고 이는 유 비서가 지성의 SK그룹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그들의 추측이었다. 이 버전의 소문은 하정은이 문 대표와 유 비서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무심코’ 흘리면서 더욱더 사실로 굳어졌다. 물론, 이건 모두 나중의 일이었다. 유월영은 그런 소문을 신경 쓰지 않고 사무실에 들어갔다. 익숙한 방안을 둘러보니 자기도 모르게 옛날 기억이 떠올라 있는 고개를 흔들어 기억에서 삭제시키고 연재준에게 물었다. “그날 당신들이 현시우네 사람을 잡은 걸 알아요. 그를 어떻게 했나요?”연재준은 정장 단추를 풀어 헤쳤다. “지남이라는 그 사람 말하는 거야?”“맞아요.”“노현재 손에 있어. 당신들이 어디로 갔는지 끝까지 얘기 안 하더군. 그리고 다시 묻지 않았어. 당신이 오늘 말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 있다는 것도 까먹을 뻔했어.”연재준은 정장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그 사람 놔줘요.”유월영이 입을 열었다. “제가 이미 당신의 손에 있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도 이제는 쓸모없을 텐데 그를 놓아주는 것 외에 당신도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설마 당신, 사람을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 아니죠?”연재준은 대답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그 자리에서 바
신주시에서 가장 유명한 유흥 장소, 서덕궁. 룸 안은 어둑어둑하고, 술과 낭만이 가득하며 야릇한 옷차림의 여자가 병풍 뒤에서 은밀한 춤을 추며 밤의 열기를 고조시켰다.하지만 윤영훈은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고 있었다.발밑 카펫에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앉아 있으며, 그의 무릎에 엎드려 가끔 술을 따르고 과일을 입에 넣어주었다.겉보기에는 친밀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이상의 행위는 없었다. 그는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옆에 던졌다. 여자는 곧바로 그에게 포도를 먹여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윤 대표님~”“착하지.” 윤영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강아지 머리를 쓰다듬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로 그때 오성민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물었다. “누구한테 전화했어?”“우리 연 대표님이지.” 윤영훈은 포도가 꽤 단 듯 입맛을 다셨다.“병원에 심어둔 사람이 하는 말이 연재준이 유 비서를 데리고 혈액 검사를 받으러 갔는데, 임신한 것 같대.”오성민은 임신이라는 두 글자를 듣자 표정이 어두워지며 소파에 앉았다. 다른 여자가 다가와 시중을 들려고 했지만, 그는 바로 밀어냈다. 윤영훈이 그를 힐끗 쳐다봤다. “유 비서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보다 더 기분이 나빠 보이네.” 오성민은 술 한 잔을 들고 조용히 한 모금 마셨다. “어떤 사람의 임신은 확실히 기뻐할 일이 아니야. 없애버릴 수만 있으면 좋겠어.”윤영훈은 웃으며 여자의 턱을 잡았다. “어이 여동생, 빨리 우리 오 변호사님한테 법을 어기지 않고도 태아를 없앨 방법을 좀 알려줘.”여자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사향이요~” 오성민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윤영훈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그게 뭐야?”“윤 대표님, 사극 드라마에서 못 봤어요? 후궁들이 누가 임신하는 걸 원치 않으면 사향으로 태아를 떨어뜨리잖아요."여자는 나풀거리며 일어나 윤영훈 옆에 앉아 그의 팔을 감싸안으며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그에게 문질러 왔다. 오늘 밤 그가 머물도록 하려는 심산이었다. “
오성민은 얼굴이 굳은 채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윤영훈이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새우, 방금 나왔는데 꽤 신선해. 너도 먹어봐.”오성민은 소파에 놓인 외투를 집어 들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나중에 유월영이 임신인지 아닌지 나오면 나에게 알려줘.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윤영훈은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핸드폰을 들어 아무렇게나 만지다 마침 오는 전화를 받았다. “말해.”전화 건너편 사람이 말했다. “윤 대표님, ICU에 누워 있는 사람의 데이터가 방금 한 번 큰 움직임이 있었습니다.”윤영훈이 즉시 눈을 가늘게 떴다. “깨어났어?”“아직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우연히 ICU를 지나가다가 본 건데요, 주치의는 아무 말이 없더라고요. 제 경험으로 볼 때, 그분의 의식이 깨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윤영훈은 유월영을 보호하면서도, 이영화가 가지고 있는 장부를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다.“계속 지켜봐.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보고해.”“알겠습니다!”...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어느덧 저녁 7시가 되었다.해운그룹은 퇴근 시간이 지났고, 건물 전체에 몇몇 창문에만 불이 켜져 있을 뿐 대부분은 어둠 속에 빠져있었다.유월영은 그렇게 누운 채 진짜로 잠들었고, 깨어났을 때 방은 깜깜하였다. 설명할 수 없는 쓸쓸한 감정이 그녀의 마음에서 솟구쳤다.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굴을 씻고 나서 휴게실을 나왔다.마침 하정은이 들어와 연재준에게 보고하고 있었다.“대표님, 병원에서 보낸 검사 결과입니다.”연재준은 보고서를 받아 마지막 장으로 넘겼다. 결과를 확인한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으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고서의 내용을 짐작할 수 없게 했다. 유월영은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라 마시며 그를 힐끗 보았다. 연재준이 물었다. “궁금해?”유월영은 물잔을 들고 말했다. “궁금하지 않아요. 내 몸은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임신이 아니라는 걸 확신해요. 검사 결과도 그렇게 나올 거예요.”연재준은 팔꿈치를 책
유월영은 TV를 보면서 그의 말을 들은척하지 않았다. 연재준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곧바로 집을 나섰다.집을 나서자마자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는 냉랭하게 하정은에게 물었다.“혹시 오늘 내가 월영을 회사에 데려간 일을 누가 아버지에게 말했어?”그렇지 않고서야 연민철이 이렇게 급하게 그를 집으로 부를 리가 없었다.하정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마도 큰 사모님인 것 같습니다.”밤이 되니 연씨 가문은 검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연재준의 자동차가 뜰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한 줄기 빛이 집을 비추었다.하인이 달려와 차 문을 열어주자 연재준이 차에서 내렸다.“왜 불을 안 켰어요?”하인이 대답했다.“사모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요즘 회장님께서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셔서 너무 밝아서 그런 걸 수 있다고 하면서 불을 다 끄라고 하셨습니다."지금의 아버지는 더 이상 그를 만날 때마다 꾸짖거나 책상을 치면서 호통치던 연 회장이 아니었다.유월영이 고씨 집안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 불과 반달 만에 연민철의 혈압은 급상승하고 매일 악몽을 꾸다 결국 거의 침대에 누워 지내게 되었다. 이제는 완전한 문장조차 말할 수 없게 되었다.연재준이 그의 침대 앞에 섰다.“아버지.”연민철이 중얼거렸다.“장부, 장부...”연재준이 말했다.“유현석 아내는 아마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거예요. 아무도 장부의 행방을 모릅니다. 그러니 이젠 누구도 장부를 꺼내 과거의 사건을 들추어낼 수 없을 거예요.”연민철은 얼굴이 굳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유, 유월영...”“월영은 장부를 본 적도 없고 과거의 일들을 들춰볼 생각도 없어요. 월영이는 내 아내이며 지금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어요. 그녀는 내 편에 서 있습니다.”연민철은 계속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못 믿겠어...”연재준이 담담하게 말했다.“월영이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버지도 알고 있었잖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왜 우리 둘을 그렇게 이어주려고 애쓰셨나요?”“믿지 못해...”연민철은 장부가 그렇게
팍—!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위층과 아래층의 하인들이 놀라 고개를 내밀었고 연재준이 윤미숙의 목을 조른 채 벽에 밀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달려왔다.“도련님, 도련님, 제발 그 손 놔주세요. 이러시면 안 돼요...”그들은 이 계모와 의붓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 채, 그저 연재준의 얼굴에 날서린 표정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며 그를 말렸다.연재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한번 해 보세요.”윤미숙은 목을 졸린 채 숨을 쉴 수 없었지만,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런 말이 있잖아.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고. 누구든 내 딸을 건드리면, 나도 똑같은 방법을 써서...갚아줄 것이야!”오랫동안 자비로운 어머니 연기를 해왔지만, 연 회장이 이제 막 위독해지자마자 그녀는 가면을 벗어 던졌다.연재준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처음으로 이 여자가 생각보다 깊은 계략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동해안 저택.연재준이 떠난 후, 유월영도 TV에 집중할 수 없었다.그녀는 다리를 소파 위로 올리고 한 손으로 무릎을 껴안고 다른 손은 무의식적으로 배를 어루만졌다.검사 결과에서는 임신하지 않았다고 나왔지만, 그건 현시우가 혈액 샘플을 바꿔치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 결과는 당연히 임신으로 나오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실제로 임신했는지는 아닌지 그녀조차 확신이 없었다.잠이 많아지고, 식욕이 늘고, 자주 헛구역질하는 등의 반응을 보면 임신한 것 같았다. 그리고 작년에 연재준과의 몇 번의 관계에서 그녀는 피임하지 않았다...아니, 그녀는 피임약을 먹었었다.그건 이승연이 준 약이었다. 그들은 그 당시 농담으로 피임약을 공유하는 자세가 너무 익숙하다고 했었다.오직 마지막 한 번, 바로 유현석이 그녀와 연재준의 결혼을 반대하다 감정이 격해져 그녀의 뺨을 때렸던 그날 밤이었다. 그날 밤, 유월영은 연재준과 함께 동해안으로 왔었다.그때 두 사람은 피임을 하지 않았고, 이승연이 사후 피임약을 주었지만, 연재준의 ‘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