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과 현시우는 거의 동시에 한 명은 뒤로, 한 명은 똑바로 허리를 펴고 서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시선은 다시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을 바라봤다.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몇 초간 침묵했다. 오렌지꽃 향기가 방을 가득 메웠다. 유월영은 현시우의 목젖이 미끄러지는 것을 보자 두 사람 사이에 더욱 야릇한 분위기가 더해졌다.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고등학교 시절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어느 모의고사 전, 유월영은 현시우에게 과외해주기로 약속했고 두 사람은 사람이 없는 음악 교실로 갔다. 그녀는 문제집을 풀었고 현시우는 소설책을 골똘히 읽고 있었다. 가늘게 늘어뜨린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그의 옆모습은 약간 현실감이 없이 잘생겨 보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입술로 다가갔다.입술에 닿자마자 그는 그녀의 턱을 잡고 그녀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그의 시선은 계속 책에 꽂혀있었고 입가에는 알 듯 말 듯한 미소가 걸려있었다.“나랑 같이 공부하자더니, 이런 걸 공부하려고 한 거야?”처음으로 그에게 입 맞췄지만 그가 별 반응이 없이 놀리자 유월영은 바로 책을 집어 들며 화를 냈다.“실수로 닿은 거라고! 내가 지우개를 가져오려다 그런 거잖아! 네가 내 지우개 가져갔잖아!”유월영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다시 소리 질렀다.“그러게 왜 남의 지우개를 가져가고 난리야!”현시우는 책을 내려놓고 웃을 듯 말듯 그녀를 보다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그가 왠지 뽀뽀할 듯한 강렬한 예감이 들어 그만 얼굴이 달아올랐다.그에게 문제집을 던져주고 그녀는 화장실을 핑계로 황급히 자리에서 도망갔다....그때는 정말 고의였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고의가 아니었다.현시우는 먼저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어갔다.“방금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유월영은 아로마 디퓨저를 가리키며 물었다.“이 냄새를 맡은 적 있어. 전에 영안에서 소은혜가 나를 숲에 버린 그날 밤 내가 구조됐을 때 서지욱 씨의 비서가 내가 잠을 못 잘까 봐 아로마 오일 넣은 가습기
유월영이 설명했다.“내가 신주시에 돌아가는 건 재준 씨를 찾기 위해서야. 어쨌든 그 일은 그와도 큰 관계가 없고, 게다가 우리 아직 부부 사이야...”현시우가 바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혼인신고 하러 너 혼자 갔잖아. 혼인신고 됐는지 안 됐는지 모르고 있어?”“안 됐다는 거야? 난 재준 씨가 그렇게 말하니까 다 끝난 줄 알았어.”유월영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채 하지 못했더라고 난 직접 만나서 얘기하려고. 그 일은 연문철이 한 것이지 그가 아니잖아. 게다가 엄마도 아직 신주시에 있는데 엄마를 그렇게 내버려둘 수 없어.”현시우는 그녀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연재준이 현시우 얘기를 들을 때마다 포악해지는 것처럼, 현시우도 연재준이 언급되기만 하면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연재준이 그 일과 연관이 없다고? 연씨 가문의 권리도 누리고 그 집안의 돈도 잘 쓰고 있어. 그 집안 사람인 한 그와도 연관이 있다고.”유월영은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참지 못하고 나지막하게 반박했다.“그도 부모님을 선택할 수 없었잖아.”“게다가, 내가 그의 곁에서 오랫동안 비서로 일했는데, 그는 해양그룹과 관련된 어떤 일도 하지 않았어, 그건 내가 잘 알아. 그가 이 일을 전혀 몰랐을 거야. 모르고 있으면 죄가 없잖아.”현시우는 그녀의 턱에 손을 가져갔다. 차가운 손가락에서 은은한 송백향 향기가 났다. “이제 너의 신분도 알았고 연씨 집안에서 고씨 가문에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알고 있는데, 그러고도 계속 마음 편히 그 자식이랑 같이 살 수 있어?”“...”유월영은 마음이 심란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으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 순간 현시우의 눈동자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고 갑작의 그녀의 턱을 꽉 눌렀다. 그리고 나서 허리를 굽혀 그녀의 입술에 바로 키스하기 시작했다. 유월영은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뜬 후 재빨리 그를 밀쳐냈다. 원래 침대에 앉아 있던 그녀는 옆으로 뒹굴며 둘 사이에 더 거리를 두었다. “현시우!”현시우는 허리를 굽힌 채 자세를
비는 끝없이 추적추적 내리고 일찍이 봄기운이 완연해야 할 신주시는 아직도 쌀쌀한 겨울 날씨였다. 오후 4시가 넘어가자 날이 어두워졌고 비까지 내려 물빛이 더해져 모든 게 안개 속에서 흐릿하게 보였다. 연재준은 해운그룹을 나와 차로 향했고 그 뒤에 하정은이 우산을 펼쳐 비를 가려주었다. “병원으로 가.”이영화는 계속 신주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여전히 연재준이 데려온 의료진들이 진료를 담당했으며 유설영이 돌봐주고 있었다. 다만 그녀와 같은 병실에 있는 소위 환자와 환자의 가족들, 그리고 때때로 병실 밖에서 왔다 갔다 하는 행인들은 모두 연재준이 그녀를 감시하기 위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영화는 아무도 모르게 감금되었다. 연재준의 허락 없이는 병원을 떠날 수 없었으며 외부인도 함부로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그녀 자신만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연재준이 병실 앞에 도착하자 간호사는 핑계를 대고 유설영을 불러냈다.유설영은 나와서 연재준이 온 걸 발견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걸어갔다. 그녀의 남편은 최근에 새 직장을 얻었으며 바로 해운그룹의 자회사에서 매니저직을 맡고 있었다. 연재준은 혼자 병실에 들어섰다. 병상에 있던 이영화는 그가 들어오자 흠칫하다 이내 기뻐하며 시선이 황급히 그의 뒤로 두리번거렸다. “재준 이 왔니... 월영이는 같이 안 왔어? 걔가 며칠 동안 얼굴도 비치지 않고 전화도 꺼져있던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요즘 비 오고 날씨가 쌀쌀하더니 감기 걸린 거 아니야? 아니면 벌써 위성에 돌아가 출근하고 있나...”“아니지, 가면 간다고 말이라도 해주고 가던가...재준아?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어?”연재준의 표정은 차가웠다.이영화는 왠지 모르게 정장 차림의 이 사위가 설날 봉현진에서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그가 낯설었고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딸의 이름만 반복해서 불렀다.“월영아, 우리 월영
“너 어떻게, 어떻게 월영이를 속일 수 있어? 걔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네가 걔한테 준 꽃을, 특별히 꽃병을 사서 놓아두던 애야. 너랑 혼인신고를 하러 가던 날, 그렇게 기뻐했어. 그런데 네가 어떻게 월영에게 그럴 수가 있어!”연재준이 씁쓸하게 웃었다.“그렇게 나를 좋아하면 다른 사람을 따라가지도 않았겠죠.”이영화는 놀라 캐물었다.“따라갔다니? 누구랑 어디로 간 거야?”연재준은 다시 물어왔다.“장부 어디 있어요?”이영화도 한 가지만 되물었다.“우리 월영이 어디 있어!”“장부, 어디 있냐고 물었습니다.”연재준의 감정이 배제된 듯한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 끼치게 했다.이영화는 미쳐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감정이 치솟아 올라 새끼를 보호하는 엄마 사자처럼 딸을 보호하려 했지만 다른 사람들 한테 붙잡힌 채로 연재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연재준은 그렇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그 모습은 마치 감정이 없는 악마처럼 보였다. 이영화는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도록 몸부림치며 외쳤다. “너, 월영이를 어떻게 한 거야! 이 짐승같은 놈들아! 고 회장님을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젠 그의 하나밖에 없는 딸도 해코지하려고 하는 거야!”이영화는 심장 모니터링 장비를 착용하고 있으며 심장 박동이 너무 빨라서 장비에서 '띠띠'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연재준은 입술을 조금 깨물다가 다시 세 번째로 물었다. “장부, 어디 있나요?”이영화는 자책과 슬픔 마음이 들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 이런 놈한테 딸을 흔쾌히 내주었는지 후회가 막심하였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눈물이 눈 앞을 가리더니 이내 머리가 핑핑 도는 듯했다. 기기의 경보음이 갈수록 가빠지고 다급해져서 듣는 쥐위사람들의 간담도 서늘해졌다.하정은은 저도 모르게 연재준을 쳐다봤고 연재준은 미간을 찌푸린듯했지만 이내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영화는 얼굴아 하얗게 질려 있었고 연재준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월영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윤영훈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먹다 남은 포도를 다시 과일 접시에 던졌다.오성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그때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하니까 지금 이 사달이 난 거잖아. 이번에는 깔끔하게 정리해야 해. 아니면 언젠가는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윤영훈이 유월영에 대한 구애와 고백은 비록 장부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는 진심으로 유월영을 좋아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렇게 그녀를 죽이기엔 마음이 망설여지고 있었다. “일단 장부부터 찾고 그거 나중에 다시 보자고.”오성민의 처진 속눈썹이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소나기가 막 멎고 공기는 촉촉하고 차가웠다. 병원에서 나온 연재준은 무표정한 채로 계단을 내려가 차로 향했다. 하늘은 어둑어둑해졌다. 아직 가로등이 아직 켜지지 않아 그의 그림자는 기다랗게 늘어졌으며 그 모습은 마치 끝없는 어둠 속으로 향해가는 듯했다.차에 오르기 전에, 그는 주 비서의 연락을 받았다. “연 대표님, 지금 시간 되시면 집에 들르세요.”하정은은 병원에 남아 이영화를 살리는데 남아있어서 운전기사가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 연재준이 차에 올라타면서 물었다. “아버지가 저를 찾으세요?”“아닙니다. 회장님 요 며칠간 계속 악몽을 꾸고 잠꼬대도 하세요. 계속 고해양과 해양그룹만 되풀이하시는데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마음의 병이니 정신과 의사를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합니다.연재준은 유월영과 장부를 잃어버린 이 두 가지 일이 연민철에게 이렇게 큰 충격을 줄 줄은 몰랐다. 그는 차창으로 밖을 내다봤다. 병원 간판도 밤바람에 싸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그때 그런 일을 할 때 오늘 같은 날이 올 줄 생각했었어야죠.”주 비서는 한숨 쉬면서 대답했다. “그분도 다 해운그룹을 위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우선 정신과 의사를 알아봐 주세요.”연재준은 운전기사에게 출발하라는 손짓을 했다.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지금이 아마 그가 성인이 된 후 가장 부지런히 집에 들리는 듯했다
빗속에서 연재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순간 노현재가 메시지를 보냈다.“재준이 형, 알아냈어. 그 사람들 싱가포르에 갔대.”연재준의 표정이 차가워졌다.“공항으로 가.”...달리던 승용차가 갑자기 흔들리자 유월영은 머리가 차창에 부딪히면서 정신이 들었다!현시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많이 아파?”머리보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심장 위치에 손을 갖다 댔다. 가슴을 누르는 답답함에 그녀는 불편하게 했다. 현시우는 그녀가 부딪히지 않게 손바닥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쳐주었지만 결국에는 차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문질러 주면서 물었다.“어젯밤에 잠을 설친 거야? 오는 길 내내 잠만 잤어.”유월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아로마 오일을 켜준 덕분에 그녀는 어젯밤에 아주 깊이 잠들었었다. 하지만 왜 인지 그녀는 계속 졸린 느낌이 들었다.한참 지나니 가슴 쪽의 불편함은 가라앉았지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은 불안함이 그녀를 덮쳤다.‘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아니야, 재준 씨가 분명히 잘 돌봐주고 있을 거야.’유월영은 진정하려고 해봤지만 불안한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 싹 트기 시작했다. 차는 오랫동안 달리다가 마침내 한 정원 앞에 멈춰 섰다.유월영은 둘러보며 물었다.“여기가 어디야?”현시우가 대답했다.“서씨 가문.”‘서씨 가문?’유월영은 바로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그 서씨 가문이라고?’그녀가 물어보기도 전에 현시우는 마치 그녀의 머릿속을 읽은 듯 안젠벨트를 풀어주며 말했다.“맞아.”“...지금 나 데리고 서정희를 만나러 온 거야?”유월영은 황당해서 물었다.현시우는 그녀를 부드럽게 쳐다보며 말했다.“당신 연재준을 미워하다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게, 서정희가 당신을 모함하고 연재준이 당신을 도와주면서부터일 거야, 맞아?”그랬다. ‘그래서?’유월영은 현시우가 왜 그 얘기를 꺼내는지 몰랐다. 방금 애써 진정시킨 마음이 다시 혼란스러워지자 그녀는 입술을 깨
현시우가 담담하게 뒤를 돌아보자, 한세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바로 요점을 물었다.“서정희 씨가 유월영 시를 모함한 그 일, 나중에 혼자 돌이켜보면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셨나요?”서정희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어떤 이상한 점이요?”한세인이 또박또박 말했다.“전반적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한 게, 서정희 씨를 ‘괴롭’혔던 건달들의 증언이었습니다. 그 건달들은 유월영 씨가 자신들을 매수했다고 증언했죠.”그 건달들은 바로 유월영에게 접근하여 길을 묻는 척하는 두 남자였으며 사실은 유월영이 그들과 접촉한 장면을 카메라에 찍히게 하기 위해서였다.서정희가 입을 열었다.“네, 맞아요...”“이렇게 중요한 증인은 가장 먼저 경찰 손에 넘어가야 사건이 빨리 진전이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경찰은 3일 만에 그들을 찾아낸 걸로 기억하는데, 이렇게 진행한 의도는 무엇인가요?”서정희는 그들이 왜 이 일을 묻는지 알지 못한 채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내가 따로 주선한 게 아니에요.”“내 원래 계획은 그들이 그날 밤 경찰에게 잡혀서 약속한 대로 유월영을 대는 거였어요. 나도 왜 그날 밤 경찰이 바로 그들을 잡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그렇게 도망간 줄 알았고, 며칠 후에 경찰에게 잡혔다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그래도 그들이 대본대로 연기를 해서 나도 더 책임을 묻지 않았어요.”현시우는 담담하게 말했다.“그 사람들 그때 도망친 게 아니라 연재준이 보낸 노현재에게 잡힌 거예요.”서정희는 어리둥절해서 말했다.“연...”유월영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 일은 연재준이 그녀에게 얘기한 적이 없었다...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그들을 보며 말했다.“그러면 재준 씨가 그 두 사람을 붙잡아 경찰에 넘긴 거네요. 다행히 그가 붙잡았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내가 언제 혐의를 벗을 수 있을지도 몰랐겠네요.”“다행이라고요?”현시우가 반문했다.“그 두 사람이 당신이 시킨 일이라고 ‘자백’만 하지 않았다면, 구치소에서 하루 꼬박 보내지
서정희는 구경꾼처럼 현시우를 보다가 다시 유월영을 바라보았다.그녀도 사실 머리가 나쁘지 않았으며 심지어 똑똑하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몇 마디 말로 ‘연재준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한다’는 허상을 만들어 유월영이 오해하게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서정희는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된다는 듯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병으로 나른했던 얼굴에는 야릇한 웃음이 피어났다.“내가 그때 짠 판이 완전히 실패한 것도 아닌가 보네. 이렇게 연 대표님을 도와 미인의 마음까지 얻게 도와준 걸 보면...”유월영이 쌀쌀하게 대꾸했다.“재준 씨와 나 사이는 당신이 왈가불가 할 게 아니에요.”“당신은 진실을 알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닌가요? 내가 지금 진실을 알려주고 있는데 당신은 도리어 들을려고 하지 않잖아요. 유 비서님, 왜 이렇게 모순이에요? 아~ 알겠다. 이미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는데 마주할 용기가 안 나는 거죠? 반지까지 낀 상황에서 자신이 잘못된 사람한테 마음을 줬다는 걸 알게 되면 감당 안 될 수도 있겠죠.”서정희는 그녀의 약지에 끼고 있는 에로스 반지를 보았다. 다만 이번에 그녀는 질투가 아닌 어리석은 마음이 들었다. 그건 두 여자의 동병상련 마음이었다. 현시우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서정희가 유월영에 대한 비아냥 때문이었지만 그는 제지하지 않았다. 그는 유월영이 알기를 바랬다. 그녀가 지금까지 연재준이 무고하다고 생각한 게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유월영은 신경이 곤두서있고 안색도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진실을 마주하기 두려워서라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그저 그녀는 그럴 필요가 없으며 여기서 서정희의 빈정거림을 듣고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설득했다. 그녀는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바로 가려고 몸을 돌렸다. “막으세요.”서정희의 한 마디에 하인들이 나타나 유월영 앞을 가로막았다. 유월영은 고개를 돌려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서정희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듣기 싫겠지만 어쩌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