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훈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먹다 남은 포도를 다시 과일 접시에 던졌다.오성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그때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하니까 지금 이 사달이 난 거잖아. 이번에는 깔끔하게 정리해야 해. 아니면 언젠가는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윤영훈이 유월영에 대한 구애와 고백은 비록 장부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는 진심으로 유월영을 좋아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렇게 그녀를 죽이기엔 마음이 망설여지고 있었다. “일단 장부부터 찾고 그거 나중에 다시 보자고.”오성민의 처진 속눈썹이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소나기가 막 멎고 공기는 촉촉하고 차가웠다. 병원에서 나온 연재준은 무표정한 채로 계단을 내려가 차로 향했다. 하늘은 어둑어둑해졌다. 아직 가로등이 아직 켜지지 않아 그의 그림자는 기다랗게 늘어졌으며 그 모습은 마치 끝없는 어둠 속으로 향해가는 듯했다.차에 오르기 전에, 그는 주 비서의 연락을 받았다. “연 대표님, 지금 시간 되시면 집에 들르세요.”하정은은 병원에 남아 이영화를 살리는데 남아있어서 운전기사가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 연재준이 차에 올라타면서 물었다. “아버지가 저를 찾으세요?”“아닙니다. 회장님 요 며칠간 계속 악몽을 꾸고 잠꼬대도 하세요. 계속 고해양과 해양그룹만 되풀이하시는데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마음의 병이니 정신과 의사를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합니다.연재준은 유월영과 장부를 잃어버린 이 두 가지 일이 연민철에게 이렇게 큰 충격을 줄 줄은 몰랐다. 그는 차창으로 밖을 내다봤다. 병원 간판도 밤바람에 싸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그때 그런 일을 할 때 오늘 같은 날이 올 줄 생각했었어야죠.”주 비서는 한숨 쉬면서 대답했다. “그분도 다 해운그룹을 위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우선 정신과 의사를 알아봐 주세요.”연재준은 운전기사에게 출발하라는 손짓을 했다.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지금이 아마 그가 성인이 된 후 가장 부지런히 집에 들리는 듯했다
빗속에서 연재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순간 노현재가 메시지를 보냈다.“재준이 형, 알아냈어. 그 사람들 싱가포르에 갔대.”연재준의 표정이 차가워졌다.“공항으로 가.”...달리던 승용차가 갑자기 흔들리자 유월영은 머리가 차창에 부딪히면서 정신이 들었다!현시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많이 아파?”머리보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심장 위치에 손을 갖다 댔다. 가슴을 누르는 답답함에 그녀는 불편하게 했다. 현시우는 그녀가 부딪히지 않게 손바닥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쳐주었지만 결국에는 차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문질러 주면서 물었다.“어젯밤에 잠을 설친 거야? 오는 길 내내 잠만 잤어.”유월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아로마 오일을 켜준 덕분에 그녀는 어젯밤에 아주 깊이 잠들었었다. 하지만 왜 인지 그녀는 계속 졸린 느낌이 들었다.한참 지나니 가슴 쪽의 불편함은 가라앉았지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은 불안함이 그녀를 덮쳤다.‘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아니야, 재준 씨가 분명히 잘 돌봐주고 있을 거야.’유월영은 진정하려고 해봤지만 불안한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 싹 트기 시작했다. 차는 오랫동안 달리다가 마침내 한 정원 앞에 멈춰 섰다.유월영은 둘러보며 물었다.“여기가 어디야?”현시우가 대답했다.“서씨 가문.”‘서씨 가문?’유월영은 바로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그 서씨 가문이라고?’그녀가 물어보기도 전에 현시우는 마치 그녀의 머릿속을 읽은 듯 안젠벨트를 풀어주며 말했다.“맞아.”“...지금 나 데리고 서정희를 만나러 온 거야?”유월영은 황당해서 물었다.현시우는 그녀를 부드럽게 쳐다보며 말했다.“당신 연재준을 미워하다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게, 서정희가 당신을 모함하고 연재준이 당신을 도와주면서부터일 거야, 맞아?”그랬다. ‘그래서?’유월영은 현시우가 왜 그 얘기를 꺼내는지 몰랐다. 방금 애써 진정시킨 마음이 다시 혼란스러워지자 그녀는 입술을 깨
현시우가 담담하게 뒤를 돌아보자, 한세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바로 요점을 물었다.“서정희 씨가 유월영 시를 모함한 그 일, 나중에 혼자 돌이켜보면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셨나요?”서정희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어떤 이상한 점이요?”한세인이 또박또박 말했다.“전반적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한 게, 서정희 씨를 ‘괴롭’혔던 건달들의 증언이었습니다. 그 건달들은 유월영 씨가 자신들을 매수했다고 증언했죠.”그 건달들은 바로 유월영에게 접근하여 길을 묻는 척하는 두 남자였으며 사실은 유월영이 그들과 접촉한 장면을 카메라에 찍히게 하기 위해서였다.서정희가 입을 열었다.“네, 맞아요...”“이렇게 중요한 증인은 가장 먼저 경찰 손에 넘어가야 사건이 빨리 진전이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경찰은 3일 만에 그들을 찾아낸 걸로 기억하는데, 이렇게 진행한 의도는 무엇인가요?”서정희는 그들이 왜 이 일을 묻는지 알지 못한 채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내가 따로 주선한 게 아니에요.”“내 원래 계획은 그들이 그날 밤 경찰에게 잡혀서 약속한 대로 유월영을 대는 거였어요. 나도 왜 그날 밤 경찰이 바로 그들을 잡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그렇게 도망간 줄 알았고, 며칠 후에 경찰에게 잡혔다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그래도 그들이 대본대로 연기를 해서 나도 더 책임을 묻지 않았어요.”현시우는 담담하게 말했다.“그 사람들 그때 도망친 게 아니라 연재준이 보낸 노현재에게 잡힌 거예요.”서정희는 어리둥절해서 말했다.“연...”유월영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 일은 연재준이 그녀에게 얘기한 적이 없었다...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그들을 보며 말했다.“그러면 재준 씨가 그 두 사람을 붙잡아 경찰에 넘긴 거네요. 다행히 그가 붙잡았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내가 언제 혐의를 벗을 수 있을지도 몰랐겠네요.”“다행이라고요?”현시우가 반문했다.“그 두 사람이 당신이 시킨 일이라고 ‘자백’만 하지 않았다면, 구치소에서 하루 꼬박 보내지
서정희는 구경꾼처럼 현시우를 보다가 다시 유월영을 바라보았다.그녀도 사실 머리가 나쁘지 않았으며 심지어 똑똑하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몇 마디 말로 ‘연재준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한다’는 허상을 만들어 유월영이 오해하게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서정희는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된다는 듯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병으로 나른했던 얼굴에는 야릇한 웃음이 피어났다.“내가 그때 짠 판이 완전히 실패한 것도 아닌가 보네. 이렇게 연 대표님을 도와 미인의 마음까지 얻게 도와준 걸 보면...”유월영이 쌀쌀하게 대꾸했다.“재준 씨와 나 사이는 당신이 왈가불가 할 게 아니에요.”“당신은 진실을 알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닌가요? 내가 지금 진실을 알려주고 있는데 당신은 도리어 들을려고 하지 않잖아요. 유 비서님, 왜 이렇게 모순이에요? 아~ 알겠다. 이미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는데 마주할 용기가 안 나는 거죠? 반지까지 낀 상황에서 자신이 잘못된 사람한테 마음을 줬다는 걸 알게 되면 감당 안 될 수도 있겠죠.”서정희는 그녀의 약지에 끼고 있는 에로스 반지를 보았다. 다만 이번에 그녀는 질투가 아닌 어리석은 마음이 들었다. 그건 두 여자의 동병상련 마음이었다. 현시우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서정희가 유월영에 대한 비아냥 때문이었지만 그는 제지하지 않았다. 그는 유월영이 알기를 바랬다. 그녀가 지금까지 연재준이 무고하다고 생각한 게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유월영은 신경이 곤두서있고 안색도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진실을 마주하기 두려워서라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그저 그녀는 그럴 필요가 없으며 여기서 서정희의 빈정거림을 듣고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설득했다. 그녀는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바로 가려고 몸을 돌렸다. “막으세요.”서정희의 한 마디에 하인들이 나타나 유월영 앞을 가로막았다. 유월영은 고개를 돌려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서정희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듣기 싫겠지만 어쩌
유월영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떤 일이요?”서정희가 입을 열었다. “당시 인터넷 여론이요. 네티즌들이 모두 당신이 나를 해친 거라고 욕했었잖아요.”유월영은 생각이 난 듯 화나서 소리 질렀다.“그건 당신이 일부러 그렇게 여론을 조성한 거잖아요!”서정희는 억울하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내가 아니에요. 이승연 씨가 제가 여론을 부추겼다고 대신 고소했는데, 법원은 나중에 내가 그랬다는 사실 증거가 없다고 판결까지 했으니 이건 정말 내가 아니에요.”“...”유월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서정희는 이어 말했다.“그래요, 당신을 모함하려고 더 한 짓도 할 수 있지만, 인터넷에 나의 사진을 올려서 사람들이 다 볼 수 있게 할 정도는 아니에요. 나도 여전히 이 바닥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아요. 게다가 누군가 일부로 이 일에 불을 지핀 게 아니라면, 이 정도로 일이 크게 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그래서 이것도 연재준이 한거라고 추측해요. 뭐 목적은 당연히 당신의 심리 방어선을 더 무너뜨려 당신이 사면초가를 느끼고 그에게 더욱 의지하게 하는 거죠.”유월영은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고 눈은 쉴 새 없이 깜빡이었다. 서정희는 그녀 앞으로 다가가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네티즌이 보낸 피 묻은 택배를 받은 걸로 기억하는데, 네티즌이 보낸 건지 아니면 연 대표가 보낸 것인지 이제는 답을 알았나요?”...아니야!그럴 리 없어!재준 씨가 그럴 리가 없잖아!유월영은 생각에 잠긴 듯했지만 이내 차가운 눈빛으로 고소해하고 있는 서정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그녀의 말에 반박했다. “모든 걸 재준 씨 탓으로 돌리지 말아요!”“당신이 나를 모함하기 위해서 뭔들 못했겠어요! 내가 다 잊은 줄로 알고 있나 본데, 여론의 시작은 당신이 병원 옥상에 올라가서 자살소동 일으켰기 때문이잖아요. 그 때문에 소방관과 경찰이 출동했고 일이 온라인에 더 거세게 퍼진 거 아닌가요? 당신이 그
하정은은 너무 놀라서 가만히 있다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월영 씨, 정말 유월영이에요?”그녀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사모님’이라든가 존칭을 쓰는 걸 잊었다. “왜 서정희 씨 핸드폰으로 하신 건가요? 지금 어디 계세요? 연 대표님께서 지금 여기저기서 찾고 계십니다!”유월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재준 씨랑 같이 있어요?”“아니요. 대표님 오늘 회사 안 나오셨어요. 지금 어디 계시는지 알려주시면 제가 대표님께 연락해서 바로 모시러 갈게요.”“정은 씨, 우리 3년 동안 동료로 지냈고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내가 서정희에게 모함을 당했을 때 왜 정은 씨도 뒤에서 여론조작하고 나를 공격했었나요?”서정희는 뒤에서 재밌는 구경이라도 하는 듯 웃었다. ‘질문이 훌륭한데.’하정은은 잠시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월영 씨, 무슨 말 하는 거예요? 난 그런 적이 없...”유월영은 더 듣지도 않은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기를 움켜쥔 그녀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고 서정희는 깔깔거리며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웃고 있었다.“하하하, 난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려 하다니, 정말 한 적이 없으면 당신이 물어봤을 때 즉각 반박했겠지. 왜 중간에 그렇게 뜸을 들여요? 안 그래요? 하 비서도 놀랐겠죠, 유월영씨가 그렇게 물어보니. 하하하!”보통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가장 먼저 본능적으로 바로 부인하기 마련이다. “난 아니야. 그런 일 한 적이 없어. 누구한테 들은 거야?”이런 정상적인 반응이야 한다. 그렇게 오래 침묵하는 게 아니라.하정은의 침묵은 분명히 유월영의 단호한 질문에 속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마도 유월영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그녀의 질문을 인정해야 할지, 인정해도 되는지를 고민했을 것이며, 그래서 서정희는 유월영의 질문 방식이 대단하다고 한 것이었다. ‘역시 유 비서야.’서정희는 웃음을 거두고 박수를 쳤다. 정말 통쾌한 진실 게임이었다. “이제 믿으시죠? 그래서 제가 이번
유월영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평소에 냉정하고 이성적이던 그녀는 지금 이렇게 모든 걸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서정희가 자초지종을 분명하게 말한다고 해도, 하정은의 침묵이 모든 걸 얘기하고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이건 모든 당신의 억측이야!”그녀의 고집스러운 모습은 서정희도 더 이상 눈 뜨고 볼 수 없어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월영아, 그놈은 네가 믿기에 아까운 놈이야.”그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으며 담담하고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던 현시우였다.그 장미 꽃잎들은 모두 바람에 실려 그의 발 쪽으로 날아갔고, 붉은 꽃잎은 마치 선혈 같았다.그의 말을 듣자마자 유월영은 몸 안의 장기들이 뒤틀리면서 숨이 막힐 듯한 통증을 느꼈다.현시우의 갈색 눈동자에 유월영의 모습이 비쳤다. 그의 눈은 분명 온천처럼 따뜻했지만 입에서 내뱉은 말은 마치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처럼 날카로웠다. “그가 먼저 당신과 재결합을 계획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당신 집에 가서 결혼 승낙을 받아내고 당신과 결혼할 수 있었겠어? 그리고 당신과의 관계를 이용해서 양아버지에게 장부를 내놓으라고 강요할 수 있었겠어?”유월영은 마치 누가 숨통을 조여오는 듯 숨을 쉴 수 없었다. 현시우가 이어 말했다. “월영아, 그 자식은 모두 계획이 있었다고, 아직도 이해가 안 돼?”...하정은은 유월영이 그렇게 전화를 끊자 다시 걸어봤지만 이미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이상하다고 생각되어 바로 연재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야?”“대표님, 방금 사모님이 서정희 씨 핸드폰으로 저에게 전화하셨습니다.”연재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월영이 뭐라고 했어?”하정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이 서정희 씨 그때 그 사건, 내가 뒤에서 여론을 조종했냐고 물으셨어요. 제가 바로 대답을 못 하고 가만히 있었더니 사모님께서 그냥 전화 끊으셨어요...제가 생각엔 믿지 않으시는 눈치였어
유월영은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까 맑은 날씨 아니었어? 왜 갑자기 해가 사라진 거지?’‘왜 나에게 갑자기 이런 진실을 안겨주는 거야?’‘연재준...사실 그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 게 아니었어’지난 3년 동안, 그녀는 단지 그의 도구일 뿐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의 도구였었다. 어떻게 한 번 당하고 그 고생을 하고도 또다시 그가 짠 판에 들어갈 수 있는지 그녀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자신에 대한 짝사랑 때문에? 아니면 그 어릴 적 연애편지 때문일까.하지만 그녀가 두 눈으로 보고 느낀 감정조차도 거짓인데, 그녀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전한 감정과 의미 모를 말들은 또 얼마나 진실될까?유월영은 반지를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V자는 손가락에 걸린 채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 마디의 살갗은 반지에 긁혀 피가 났지만 여전히 빼낼 수 없었다. 유월영은 이를 악문 채 어떻게든 반지를 빼려고 다시 한번 손에 힘을 주려는 순간, 현시우의 손이 그녀를 말렸다.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그만해. 그 반지 빼낼 수 없을거야.”“...정말로 방법이 없는 거야?”“그건 에로스 반지야. 예전의 주인들은 모두 죽은 후에야 그 반지를 벗을 수 있었어.”세상에 어떻게 이런 막무가내인 반지가 있을 수 있을까? 이 세상에 어떻게 연재준처럼 무정한 남자가 있을 수 있을까? 이 세상에 어떻게 그녀 자신처럼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자가 있을까? 같은 사람에게 또 속다니.‘월영아’, ‘자기야’. 유월영은 연재준이 그녀에게 속삭이던 달콤한 말들이 생각났으며 지금 눈앞의 추악한 진실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토할 것만 같은 마음이 들어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했다. 메스꺼운 느낌이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솟구쳐 올라왔고 그녀는 그렇게 몇 번 더 헛구역질했다. 현시우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더니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월영아, 괜찮아?”유월영은 흐릿한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