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은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까 맑은 날씨 아니었어? 왜 갑자기 해가 사라진 거지?’‘왜 나에게 갑자기 이런 진실을 안겨주는 거야?’‘연재준...사실 그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 게 아니었어’지난 3년 동안, 그녀는 단지 그의 도구일 뿐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의 도구였었다. 어떻게 한 번 당하고 그 고생을 하고도 또다시 그가 짠 판에 들어갈 수 있는지 그녀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자신에 대한 짝사랑 때문에? 아니면 그 어릴 적 연애편지 때문일까.하지만 그녀가 두 눈으로 보고 느낀 감정조차도 거짓인데, 그녀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전한 감정과 의미 모를 말들은 또 얼마나 진실될까?유월영은 반지를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V자는 손가락에 걸린 채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 마디의 살갗은 반지에 긁혀 피가 났지만 여전히 빼낼 수 없었다. 유월영은 이를 악문 채 어떻게든 반지를 빼려고 다시 한번 손에 힘을 주려는 순간, 현시우의 손이 그녀를 말렸다.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그만해. 그 반지 빼낼 수 없을거야.”“...정말로 방법이 없는 거야?”“그건 에로스 반지야. 예전의 주인들은 모두 죽은 후에야 그 반지를 벗을 수 있었어.”세상에 어떻게 이런 막무가내인 반지가 있을 수 있을까? 이 세상에 어떻게 연재준처럼 무정한 남자가 있을 수 있을까? 이 세상에 어떻게 그녀 자신처럼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자가 있을까? 같은 사람에게 또 속다니.‘월영아’, ‘자기야’. 유월영은 연재준이 그녀에게 속삭이던 달콤한 말들이 생각났으며 지금 눈앞의 추악한 진실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토할 것만 같은 마음이 들어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했다. 메스꺼운 느낌이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솟구쳐 올라왔고 그녀는 그렇게 몇 번 더 헛구역질했다. 현시우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더니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월영아, 괜찮아?”유월영은 흐릿한 눈빛
현시우가 담담한 표정으로 한세인을 바라봤다. 한세인이 손뼉을 두 번 치자 어두운 곳에서 그들을 경호하던 사람들이 빠르게 나타나 연재준의 사람들과 대치하였다. 그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고 현시우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수척해 보였지만 훤칠한 모습으로 마침 유월영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저도 전에 연 대표님께 말했을 텐데요. 월영은 이제 두번 다시 당신과 함께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연재준의 눈동자는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럼 한번 해보시던가.”노현재는 킥킥 웃으며 걸어 나왔다. “그 말인즉 당신에 애들이 우리 애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한세인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훈련용 장갑을 끼고 열 손가락을 움켜쥔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현재를 노려봤다. 노현재는 그녀가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천천히 포장을 뜯어 입어 넣었다. 그리고 아주 예의 바르게 포장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난 여자를 안 때려.”그는 현시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 나랑 한판 붙자고.”현시우는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노현재가 안중에 없었다. 노현재는 오랜만에 무시를 당하자 재미있다는 듯 냉소를 지으며 먼저 달려들었다. 그의 주먹은 빠르고 매서웠다. 한세인은 바로 그의 주먹을 막아 내었으며 두 사람은 빠르게 주먹이 오갔다. 보스가 움직이자 나머지 수하들도 당연히 몸을 사리지 않고 잇달아 난투극에 가담했다. 한세인의 실력은 의의로 좋은 편이서 두 사람은 한동안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양쪽 부하들도 서로 엉겨 붙어 싸우느라 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서정희가 소리 지르며 말렸지만 아무도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다. 유월영은 이 난장판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죽일 듯이 싸우고 있는 두 패거리는 마치 숲속에서 만난 두 마리의 짐승처럼, 아무 목적도 없이 상대를 죽음으로 몰고 가려는 듯해 보였다. 현시우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연재준은
‘내가 결정하라고?’‘이걸 어떻게 내가 선택을 할 수 있어?’‘엄마로 협박하는데 내가 타협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있을까?’유월영은 기가 막힌 듯 웃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빙빙 도는 느낌이 들어 그녀는 비틀거리며 연재준 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유월영의 팔을 잡고 있던 현시우의 손이 내려와 그녀의 손바닥을 잡아 맞댔다. 유월영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많은 걸 말하고 있었다. 연재준은 싸늘한 시선은 두 사람의 애틋한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맞잡은 두 손으로 향했다. 유월영은 주먹을 꼭 쥔 채 연재준을 바라봤다. “당신이랑 다시 돌아가면, 정말로 엄마를 풀어줄 건가요?”연재준은 시선을 거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 나랑 같이 안 가면 누구랑 가고 싶은데?”유월영은 현시우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고 한숨을 쉬면서 정원 밖으로 걸어갔다. 한세인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향했다.“현 대표님...”현시우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유월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연재준은 승리를 만끽하는 표정 대신 차가운 눈빛으로 현시우를 노려보았다. “이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그는 유월영을 따라잡아 그녀의 손을 낚아채고 막무가내로 차에 태웠다. 한세인이 이를 갈며 말했다. “대표님, 이대로 유월영 씨를 그냥 보낼 건가요? 저들이 사람이 많지만 우리가 싸워 이길 수도 있잖아요!”“양어머니가 잡혀 있는 한, 월영이도 어머니를 그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을 거야.”신주시는 연재준이 꽉 잡고 있었고 나머지 세 개의 가문까지 있어서 그들 손에서 이영화를 데려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영화의 몸도 아직 회복되지 않아 무리할 수 없었다. 현시우가 말했다.“지남이도 연재준의 손에 있어...”유월영은 방금 현시우의 손을 잡고 있을 때, 그녀에게 뭔가를 쥐어줬다....노현재가 앞좌석에서 돌아보면서 눈썹을 긁적이었다.
“...”유월영은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의 힘을 당해내지 못했다. 연재준의 다리와 허리, 그리고 가슴은 그녀에게 밀착시켜 왔다. 그의 따뜻한 체온과 익숙한 숨결이 닿자 그녀는 매일 밤 안고 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유현석이 자살한 후 그녀는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그때마다 그는 그녀를 안은 채 다독여 주고 같이 있어 줬으며 그녀에게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의 모든 행동이 단지 연기라는 생각이 들어 털끝 하나 건드리기만 해도 견딜 수가 없었다. 유월영은 젖 먹던 힘까지 써서 발버둥 쳤다. “혼인신고만 안 하면 당신이랑 관계가 없어요!”“오늘 전까지 당신 그런 생각하지 않았었잖아.”연재준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또 현시우 때문이야? 당신 현시우랑 만나기만 하면 모든 걸 다 부정하잖아. 10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그 자식을 못 잊는 거야?”연재준의 질투하는 듯한 말에 유월영은 콧방귀를 끼었다. “나에 대한 모든 행동이 계획된 게 아니라는 점만 해도, 벌써 당신보다 훨씬 나아요.”그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유월영은 반항하기를 멈추고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예쁜 두 눈에는 한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말끝마다 내 남편이라고 강조하지 말아요. 나랑 결혼한 목적이 아버지의 장부를 내놓으라고 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이제는 알았으니까.”연재준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웃음을 터뜨리면서 차갑게 말했다. “알고 있는 게 참 많군.”유월영은 그가 지금 바로 그녀에게 자백한 건지 헷갈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쨌든 그건 사실일 뿐이니까. 유월영도 비웃으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자살하기 전까지도 장부를 나와 엄마에게 맡기지 않았어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우리를 잡아간다고 해도 당신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을 거예요.”연재준이 물었다.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어?”유월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몰라요. 연 대표님의 속을 누가 알겠어
연재준은 밀리지 않고 오히려 유월영을 더 세게 눌러왔다. “내가 그깟 수단을 써서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은 게 뭐가 잘못된 거야? 당신도 말했었잖아, 성인들 사이 약간의 수단과 방법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왜 그때의 신연우는 되고, 내가 그러는 건 안 된다고 하는 거야?”유월영은 그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그만 억지 부려요! 이게 어디 같은 일인가요?”“왜 아니야?”연재준의 선명한 아래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당신도 그날 말했었잖아. 반지를 끼면 그전에 있었던 일들은 다 용서하고 없던 일로 하겠다고. 그러면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유월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없던 일로 하겠다고.’‘어떻게 저렇게 당당하게 입 밖에 낼 수 있지?’그의 논리대로라면 본성을 숨기고 착한 척한 건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였다. 압력을 넣어 여론을 조작한 것도, 아버지를 협박하고 어머니를 납치한 것도, 모두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한 작은 수단과 방법일 뿐이며 도리에 어긋나더라도 모두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고 모두 그녀가 반지를 받기 전에 일어난 일이니 그녀의 약속대로 더 이상 그를 탓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그의 변명이었다. 유월영은 그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고 창자가 꼬이는 듯한 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녀가 반박할 수 없다는 걸 단정하는 듯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유월영은 그를 밀쳐냈다. “...이거 놔! 연재준! 이거 놓으라고!”유월영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연재준은 그녀가 하루 종일 굶어 위병이 도진 줄 알고 그녀의 팔목을 잡아끌고 강제로 선실 밖으로 향했다. “밥 먹어.”유월영은 다른 한 손으로 문틀을 잡은 채 나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다 문에 부딪치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가 선실 밖으로 울려 퍼졌고 소란을 들은 노현재는 재빨리 다가와 상황을 살피다 문에서 실랑
연재준은 멍하니 있다가 그녀가 한 말을 이해하고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당신 눈에는 내가...”그는 갑자기 숨이 막혀오고 가슴이 답답해져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유월영의 말은 모두 비수가 되어 그에 가슴에 박혔다. 노현재는 상황이 치닫자 이러다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급하게 끼어들었다.“재준이 형, 기장이 형을 찾던데, 잠깐 가서 뭔 일인가 보지 그래?” 연재준의 잘생긴 얼굴은 기침 때문에 점점 창백해졌다. 그의 눈은 한밤중처럼 새카맣고, 표정은 굳어진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에야 그는 숨을 고르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잘 살아 있는 게 좋을 거야. 당신이 죽으면 어머님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당신 따라 죽기를 바라는 거야? 그리고 당신 언니랑 조카, 조카를 그렇게 예뻐하잖아. 매번 조카선물도 잊지 않고 사주던데. 당신이 정말 죽으면 우리는 그들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고.”‘연재준, 당신 정말 대단해.’유월영은 입술을 깨문 채 그를 노려봤다. 그녀는 더 이상 그와 말을 섞기 싫어 선실로 돌아가 힘껏 문을 닫았다. 연재준도 더 이상 그녀를 쫓아가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그녀는 심지어 그가 자신이 죽기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들 사이에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으랴.연재준은 가슴을 움켜쥐고 노현재의 곁을 지나면서 한마디 던졌다. “월영이 방에 먹을 것 좀 가져다줘.”...기진맥진 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소파에 주저앉아 한참 쉬고 나서야 복통이 점차 멎었다. 그녀는 두 다리를 껴안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저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잠시 후 이성을 찾은 유월영은 갑자기 두려워졌다. 이렇게 그와 얼굴을 붉혔는데 연재준이 엄마를 만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방문이 다시 열리고 유월영은 차가운 시선으로 문 쪽을 노려보았다. 노현재였다.그녀는 역시나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입가에 슬쩍 미소가 어린 채 손에 있는
다섯 시간 후 비행기가 신주시에 착륙했고 하정은은 차량을 이끌고 공항으로 그들을 마중 나왔다. 유월영은 곧장 그중 차 한 대로 향했다. 그녀는 앞좌석에 앉아 연재준과 같이 나란히 앉을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했다. 하지만 차 문을 열고 올라타기도 전에 연재준은 그녀의 팔을 잡고 뒷좌석으로 밀어 넣었다. 더 실랑이 해도 허사라는 걸 깨닫고 그녀는 아무런 반항 없이 뒷좌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하정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우선 동해안 저택으로 가시겠어요?”연재준이 대답했다.“응.”유월영은 즉시 반박했다.“엄마 만나서 병원에 갈 거예요.”연재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지금 ICU에 계셔서 당신 들어갈 수 없어. 그리고 가서 만난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당신이 병원에서 먹고 자고 하는 건 동의할 수 없어.”“내가 곁에 같이 있든 말든 내 일이에요. 더 이상 날 어떻게 할 생각하지 말아요.”“그럼 내가 할 수 있나 없나 한 번 보지.”연재준이 다시 말했다.“동해안 저택으로 가.”유월영도 지지 않고 소리 질렀다.“병원으로 가라고요!”운전기사는 당연히 연재준의 말에 따랐고,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동해안으로 설정했다. 유월영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날 내려줘요. 나 혼자 병원에 갈 거예요.”운전기사는 백미러로 연재준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아무런 지시가 없자 운전기사는 그대로 속도를 줄이지 않고 길을 달렸다. 자기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자 유월영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바로 앞 좌석으로 몸을 일으켜 운전기사의 운전대를 낚아챘다.“차 세우라고!”갑작스러운 행동에 운전기사는 핸들을 놓치고 차는 길에서 방향을 잃고 휘청거렸다. 다행히 주위에 차가 없어서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다. 연재준은 재빨리 그녀를 끌어당겼다. “당신 미쳤어?”유월영은 연재준의 손을 뿌리쳤다. 다음 순간, 그녀는 손에 유리 조각을 쥐고 연재준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하정은이 놀라 소리 질렀다.“대표님! 사모님! 진정하세요!
차는 곧 신주병원 입구에 도착했다. 유월영은 차에서 내려 바로 병원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이내 연재준이 그녀를 잡아끌었다. “재준 씨!”유월영이 빠져나오려 하자 연재준이 담담하게 말했다.“어머님 보고 싶으면 나한테 맞춰줘.”‘뭘?’유월영은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봤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이끌고 병원 안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계단을 오르자 뒤따라오던 승용차 한 대가 입구에서 천천히 멈춰 섰다. 뒷좌석 차창이 천천히 내려지고 윤영훈과 오성민이 얼굴을 드러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옆으로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다 병원 안으로 사라지자 비로소 눈길을 돌렸다. “연 대표 정말로 유 비서를 데려왔네.”윤영훈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난 또 유 비서가 현시우 따라가 버리고 다시는 안 돌아올 줄 알았지. 현시우가 첫사랑이라고 하지 않았어? 첫사랑도 별거 없고 연재준이 더 좋다 이건가?”오성민은 손에 있는 염주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자기 엄마를 위해 돌아왔을 거야. 그래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달려온 거고.”“그건 모르는 거야. 당신이 유 비서를 몰라서 그래. 내가 애초에 그녀를 얼마나 열심히 쫓아다녔는데. 내게 웃는 얼굴도 안 보여줬어. 이 아가씨 아주 냉정하고 똑똑하다고. 연재준과 결혼까지 한 걸 보면 정말로 연재준을 좋아하는 걸 거야.”오성민은 윤영훈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챘다.“그 말은 그녀가 정말로 연재준을 위해서 유용우하고 고해양 그리고 고씨 집안의 복수를 포기할 거라는 뜻이야?”윤영훈이 표정 변화 없이 대꾸했다.“불가능한 건 아니잖아. 똑똑한 여자일수록 사람에 빠지면 답이 없다고.”오성민은 안전벨트를 풀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도 사랑에 빠지면 답이 없어 보이는데?”윤영훈은 오성민이 그가 했던 말처럼 뿌리를 뽑을까 봐, 유월영이 해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애써 설명하고 있었다. 오성민은 차 문을 열고 내렸다.“내 눈으로 봐야겠어.”그는 병원으로 들어가 ICU 병실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