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아니에요.”겨우 몇 시간 동안 아니란 말을 벌써 몇십번을 하는지 모르겠다.“전 그런 짓 하지도 않았고 할 사람도 아니에요......진짜 제가 했으면 그런 단서가 될만한건 남기지도 않았고 경찰들이 찾아오게끔 하지도 않았겠죠.”마지막 한 마디에 연재준이 차갑게 콧방귀를 뀐다.믿는지 안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시 안전벨트를 채우는 유월영이다.이내 유월영은 이승연에게 메시지를 남긴다.“승연아, 늦게라도 시간돼? 일이 좀 생겨서 말이야, 연락해서 말할게.”아직은 답장이 없는 이승연이다. 연재준이 하정은에게 덤덤하게 묻는다.“서정희 부모는 알고 있나?”“네, 이미 아십니다. 최근 뉴질랜드에서 휴가 중이셔서 돌아오시라면 시간이 걸리실것 같아 모든걸 윤 사장님께 맡긴듯 하네요.”여전히 사건 경위를 알고 싶어하는 유월영이 앞으로 몸을 기울여 하정은에게 묻는다.“하 비서님 어젯밤에 서정희 찾으러 가시지 않으셨어요?”하정은은 연재준을 힐끔 보더니 눈을 지그시 감는 그를 보고는 그제야 입을 연다.“어젯밤 제가 바에서 서 아가씨를 찾은건 맞습니다. 오늘 생일이셔서 서안에 이틀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되겠냐는 말에 잠시 자리에서 벗어나 사장님께 동의를 구한 사이 자리에서 사라지셨던겁니다. 웨이터가 혼자서 갔다고 하니 화장실에 간줄로만 알고 찾아가봤지만 없었고 한 바퀴 빙 돌아봤지만 여전히 찾지 못했었습니다.”유월영이 묻는다.“그럼 일 생긴건 어떻게 알았어요?”“룸에서 물건 던지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 들어가본 웨이터가 발견한겁니다. 다행히 웨이터가 마침 들어간 덕분에 큰 일은 피할수 있었죠.”“그 말은 결국 그런 짓은 안 당했다는거네요?” “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두 가문 모두 끝까지 진실을 밝혀낼겁니다.”서정희에게 좋은 감정이라곤 전혀 없던 유월영이지만 그런 짓은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이 일이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남기는지 같은 여자로써 충분히 이해가 갔으니 말이다.연재준이 유월영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눈
후끈후끈한 남자의 체온이 손발이 오므라든 이승연이 낮은 소리로 말하며 그를 밀어낸다.“그만해......월영이 일이니까.”“유 비서는 또 왜?”이혁재는 별로 개의치 않은채 이승연의 셔츠 옷깃을 헤쳐 목에 입을 맞춘다.“서안 SK 간거 아니었어? 거기서도 사고 친다고?”야들야들한 목에서 촉촉한 감촉이 닿자 온 몸에 전율이 돋는 이승연이다. 그녀가 이혁재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묻는다.“당신 송도 서씨 가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윤영훈 이모부랑 이모?”“그래.”이혁재가 딱히 관심없다는듯 덤덤하게 말한다.“내 기억에 그 집엔 딸 하나밖에 없을걸. 금이야 옥이야 아낀다던데, 최근엔 재준이 아래서 프로젝트도 맡았고.”이내 이혁재가 뭔가 눈치챈듯 고개를 든다.“왜? 유 비서 이번엔 서씨 가문 건드린거?”이승연은 딱히 대답이 없다.아니, 지금은 뭐라 대답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이혁재는 냅다 이승연을 침대에 누르며 말한다.“그럼 망했네 뭐, 그 집안 좀 독하거든.”일처리가 독하다는건지, 어둠의 세계와 손잡은 독함이라는건지 모르겠는 이승연이다.“월영이만 결백하면 법은 월영이 편이야.”이혁재는 딱히 법이니 뭐니에 관심이 없어보인다.“이번엔 꽤나 오래 가있을것 같은데 차라리 오늘 밤에 자지 말고 몇번 더 하자.”그의 몸에서 일어난 생리적 반응을 눈치챈 이승연이 벌떡 일어나 서랍에서 뭔가를 꺼낸다.“......껴, 이거 끼라고.”이혁재가 그걸 툭 던져버리며 이승연 위에 올라탄다.“끼긴 무슨. 합법적인 부부 사이에 애까지 가질 생각인데 괜한 쓰레기만 만들잖아?”이때만큼은 의논의 여지를 주지 않고 옷을 꽁꽁 싸매는 이승연이다.“그럼 계약서에 사인이나 해.”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틀어박는 이혁재다.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호흡이 가빠졌지만 이승연은 최후의 마지노선을 굳건히 지킬 생각이다.이혁재는 “젠장” 한 마디를 내뱉으며 이승연을 노려보더니 서랍을 덜컹 열며 말한다.“아! 알았다고! 낀다고 껴!”눈으로 직접 확인한 다음 순간, 집
비서가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서류 봉투를 건네준다.“도련님.”“고생했다, 내년엔 연봉 올려줄게.”이내 봉투를 받아들고 문을 닫는 이혁재다.은은한 거실 조명 아래, 이혁재가 소파에 던져진 이승연의 가방을 찾아낸다.늘 서류들이 든 가방을 서재 금고에 넣어두는 이승연이었지만 오늘은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이혁재에게 붙잡이는 바람에 옷은 물론 가방까지 소파에 내팽개쳐버렸던거다.이혁재가 아무도 없는 2층을 확인하고는 이승연의 가방에서 약 한 통을 꺼내든다.알루미늄판을 확인하니 벌써 두 줄이나 먹어치웠다.참 나 이혁재가 매일 심으면 뭐하나, 이승연이 매일 살충제를 쳐버리는데.이혁재는 방금 받은 봉투에서 약을 꺼내 똑같이 두 줄을 빼낸뒤 이승연의 가방에 있던 약과 바꿔치기를 한다.만족스러운듯 입꼬리를 올린 이혁재는 곳곳에 널린 옷을 바구니에 넣고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가 이승연을 끌어안고 잠에 든다.......한 편 서안.피곤에 찌든 유월영은 아예 욕조에 물을 받고 몸을 푹 담그다 그만 잠이 들어버렸고 다행히 초인종 소리에 눈을 떴다.잠옷으로 갈아입고 슬리퍼를 끌고 인터폰을 확인하니 다름 아닌 연재준이다.열어줘 말아?유월영은 방에서 겉옷을 가져와 목까지 꽁꽁 잠근 뒤에야 문을 빼꼼 연다.“사장님, 무슨 일이세요?”연재준은 조금이라도 어쨌다간 당장 문을 닫아버릴 기세로 문 뒤에 바짝 붙어있는 유월영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린다.그리고는 친히 손에 들린 도시락통을 보여주며 말하는데.“저녁 안 먹었지?”그대로 굳어버리는 유월영이다. 연재준이......유월영에게 밥을?그저 놀라울 따름이다.연재준은 태생이 누구에게 서비스를 받았으면 받았지 절대 누구를 챙겨주는 타입이 아닌데.유월영이 입술을 꽉 깨물고 그제야 문을 활짝 연다.“감사합니다 사장님.”허나 연재준은 손에서 힘을 빼지 않는다. 유월영이 그런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는데.“나도 저녁은 아직이거든.” 그 말인 즉 같이 먹을거라는 말 아닌가.유월영이 즉시 손을 놓는다.“사실 전 배
쓸데없는 오해를 사기 싫었던 유월영이 재빨리 전화를 끊는다.“윤 사장님 귀띔 감사합니다. 저도 다 생각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늦었는데 얼른 쉬세요.”바로 다음 순간, 연재준이 유월영을 방밖으로 끌어내 벽에 콱 밀친다!두 손을 본능적으로 그의 가슴팍에 갖다대 밀어내는 유월영이다.“연재준!”연재준은 한 손으론 벽을, 다른 한 손으론 유월영의 턱을 잡고 쌀쌀맞게 쏘아붙인다.“평소에 이런 말이나 하고 그래? 난 너 도와준적 없어? 하 사모님 별장에서는? 지난번 박수진때는? 너희 엄마 인공심장은? 다 내가 도와준거 아니야?”유월영이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한다.“......윤 사장님이 말한건데 불만 있으면 사장님한테 가서 따져야죠. 저한테 왜 이래요?”연재준은 그런 유월영에게 대답을 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간다.“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빚쟁이들한테 쫓길때 내가 너 안 도와줬어?”“그건 이미 오래전 일이잖아요.”“괴롭힌것들만 생각하느라 그동안 도와줬던건 싹 다 잊은거야?”연재준은 대답없는 유월영을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휙 가버린다.유월영에게 화라도 난걸까.유월영은 복잡한 심정으로 멀어져가는 연재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직 그의 온기가 남아있는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린다.윤영훈의 성격대로라면 방금 그가 한 말은 연재준이 신연우를 깎아내릴때와 같이 “적수”를 처단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유월영은 미간을 찌푸리고 뒤돌아서다 땅에 놓인 도시락통을 보고 이내 그걸 들어 방으로 들어가는데.배고픔이 극에 달하면 위병이 도진다는걸 안 뒤로 연재준은 유월영의 삼시세끼를 극진히 챙겨주는것 같다.도시락 통을 열어보니 전부 2인분으로 된 음식들이 눈에 띈다.연재준은 진짜 유월영과 같이 저녁 식사를 하려고 했던거다.당연하겠지만 유월영은 그걸 다시 연재준에게 가져다줄 생각이 없다.기분전환이라도 할겸 휴대폰을 들어 집에 연락을 해본다.엄마는 병으로, 아빠는 다리때문에 힘든 상황인데다 딸들도 같이 있어줄 상황이 안 되니 유월영은 부모
“방금 일어나자 마자 확인한거야. 누가 보내온거고.”솔직히 두려움이 앞선다. 이 사진들은 마치 유월영이 사주한 사람들이 일을 끝낸뒤 확인사살용으로 보내는 사진들 같아보였기 때문이다.휴대폰을 들고 있는 유월영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멋도 모르고 있다가 크게 한 방 당할것 같은 두려움이랄까.하지만 두려움은 두려움일뿐 유월영은 당황하지 않고 메시지가 전송된 시간을 확인한다.“새벽 네시에 보낸거야, 다시 연락해보니까 꺼졌더라고.”“허구로 된 연락처가 아니고? 없는 번호가 아니고 진짜 있는 번호라는거야?”“응, 신주시로 뜨던데.”“이상하네. 아무튼 연락처 보내줘봐, 내가 친구한테 물어볼게. 그리고 나 지금 공항갈는 길이야, 요즘엔 서안까지 가는 비행기가 하루에 딱 한번 뿐이더라.”유월영이 연락처를 복사해 이승연에게 보내준다. 그러자 대뜸 이승연이 그녀를 부르는데.“월영아.”“어, 듣고 있어.”“이 사진, 이 일, 전부 너랑은 상관없는거 맞지?”확신이 필요한 이승연이라는걸 알고 있는 유월영이다.“단언컨대 나랑은 절대 아무 관계도 없어.”“그래, 그럼 내가 말한대로 해. 지금 바로 경찰한테 연락해서 사진 보여드려.”조금은 망설여지는 유월영이다.전달이 자 안돼 진짜 용의자로 몰리기라도 하면 어쩌나.허나 이승연이 말한다.“한 적 없는 일은 법이 반드시 결백하도록 만들어줄거야. 누구도 감히 널 해치진 않겠지만 네가 주동적으로 나서서 말하지 않은게 들키기라도 하면 골치 아픈게 한 두가지가 아니지.”그 말에 유월영이 한숨을 푹 내쉰다.“알고 있어.”“그래, 일 있으면 다시 연락하고.”생각하면 할수록 수상쩍어지는 이승연이다. 특히나 허구가 아닌 진짜 연락처를 썼다는 점이 말이다.유월영은 다시금 사진들을 들여다본다. 어젯밤엔 웨이터가 마침 들어가준 덕에 큰 일을 피할수 있었다는 말을 듣고 안도했었는데.사진이 남아 있을줄이야. 이 사진들이 퍼지기라도 할땐 서정희는 더는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지 못할텐데.유월영이 어젯밤 조사실에 만난 경찰관에
경찰서에 도착한 유월영은 더는 사무실이 아닌 조사실로 들어가게 된다.이내 등골이 서늘해지는 두 경찰들과 마주앉는데.“전 그 사람들 알지도 못합니다. 사주는 더더욱 한적 없고요. 함정에 빠뜨려서 누명 씌우려는거라고요.”경찰관이 또다시 어제 보여준 사진을 내밀며 말한다.“그 남자들은 이때 유월영 씨에게 서정희 씨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고 하던데요.”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히는 유월영이다.“거짓말이에요! 이때 저한테 길 묻고 있었다고요!”“가방속에서 현금 500만원 상당의 현금다발도 압수했습니다. 유월영 씨가 직접 준거라고 하더군요. 게다가 유월영 씨 지문도 검출됐고요.”“.........”음모의 냄새가 코를 심하게 찌른다. 대답이 없는 유월영을 보며 눈을 마주친 두 경찰관 중 한 사람이 종이 한 장을 앞에 내밀며 말한다.“유월영 씨, 지금 이 시간부로 구류에 처하니 여기에 사인하시죠. 휴대폰, 노트북은 바쳐주시고요. 집 압수수색도 함께 진행할 예정입니다.”심장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며 가라앉는것 같은 느낌을 받는 유월영이다.이내 얼마 못 가 사진들까지 들통나버린다.“누군가 저한테 보내준겁니다. 제가 아침에 연락드린것도 그것 때문이고요.”“발신인이 바로 그 두 사람입니다. 아가씨와 관련 없는거라면 왜 그 사람들이 아가씨한테 사진을 보냈을까요?’유월영이 입꼬리를 들썩인다.“그건 그 사람들한테 물어보셔야죠?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건 제가 제지한다고 될 일이 아닌것 같습니다만.”“500만원은 선지급이고 사진 보내면 나머지 돈도 준다고 했다던데요.”“그 사람들이 한 말은 다 믿으시면서 왜 제가 하는 말은 하나도 안 믿으세요?”“유월영 씨! 그게 무슨 태돕니까!” 발버둥칠수록 더욱 깊이 빠져버리는 거미줄같은 상황에 더이상 할말이 없는 유월영이다. “제 변호인 불러주세요.” ......서안에 금방 도착한 이승연에게 경찰서로부터 연락이 왔고 서로 갔을때 유월영은 이미 구금돼 있었다.구금은 최소 1일, 최대 15일까지 거의 경찰
생각만으로도 어이가 없어하며 유월영이 묻는다.“성추행 사주한건, 심지어 두 명이상이랑 공모한건 중형이지?”“증거가 명확하면 3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이야.”유월영이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진다. 그래서 서정희가 그날 반드시 감옥 갈거라고 했던거구나.어젠 쌀쌀한 겨울 바람이 한바탕 휘몰아치며 기온도 급격히 떨어졌다. 창문도 없는 면회실에서도 뼈를 파고드는듯한 한기에 몸서리치는 유월영이다.사건을 맡을땐 늘 직설적인 화법을 고수하던 이승연은 유월영의 상태를 보고는 말투를 유하게 바꾼다.“내 말은 증거가 명확한 상황에서 말이야. 돈다발에서 네 지문나온건 맞지만 증언보단 증거를 중요시하고 불충분한 증거는 입증되지 않는다는게 우리 나라 법률이야. 판사 역시 두 사람의 말을 들어주기야 하겠지만 겨우 증거 하나로 죄를 입증할순 없다는거지. 그러니까 일단은 너무 걱정 안해도 돼.”증거불충분은 혐의가 입증되지 않는다? 유월영이 조금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이승연을 바라본다.“그 사람들도 이걸 잘 알게 아니야. 꼭 경찰한테 소위 ‘증거’라고 할만한것들을 넘길거라고.”이승연이 단번에 유월영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말한다.“그래도 가짜인건 맞잖아. 거짓 증거들이 늘어날수록 틈이 보일 확률도 커.”틈이 점차 커진다는건 유월영의 결백을 주장해주거니와 반대로 그들을 감옥에 처넣을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다.“서씨 가문에서 누르고 있어서 보석으로 데리고 나올수가 없어. 그래도 또 다시 시넝할거니까 넌 안심하고 나한테 맡겨.”“우리 엄마 아빠한텐 말하지 마.”“그래, 알아.”......면회가 끝나고 유월영은 다시 구치소로 들어간다.구치소에서 유월영의 자리는 가장 구석진 안쪽.유월영은 벽을 마주보고 팔로 무릎을 꼭 끌어안고 있는다.이승연의 능력을, 경찰 측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서정희는 반드시 또다른 ‘증거’를 넘길것이고 그들은 꼭 틈을 찾아 유월영을 내보내 줄것이다.허나 믿음과 두려움은 별개의 일 아닌가.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는다.추워서 그런건지는 모르
비몽사몽 여러 생각들을 하는 사이, 구치소 문이 열리며 교도관이 소리친다.“다 일어나!”다들 손에 들린 밥그릇을 내려놓고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난다. 유월영 역시 이 곳 규정에 관해 듣고는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두 다리가 땅에 닿는 순간, 위가 꼬일듯이 아파오며 다리에 힘이 턱 풀려버린다. 거의 무릎을 꿇기 직전, 어디선가 팔이 쭉 뻗어져오며 유월영을 잡아주는데.상대의 가슴팍에 부딪치니 익숙한 향기가 코를 자극한다. 순간 뭐라 설명할수 없는 설움이 북받쳐 오른다.함정에 빠진 설움, 두끼나 굶은 설움과 위병이 도진 설움에 “왜 이제 왔냐”는 말을 내뱉을 뻔하지만 겨우 목구멍으로 넘기는 유월영이다.연재준의 목소리가 정수리에서 들려온다.“못 걷겠어?”유월영이 겨우겨우 한 마디 내뱉는다.“위 아파요......”“그러게 왜 이승연더러 나 찾아갈가고 말 안했어? 넌 아파도 싸.”무기력하게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하자 연재준은 아예 유월영을 가로로 번쩍 들어올린다.순간 중심을 잃은 유월영은 눈 앞이 빙글빙글 도는 어지러움에 그의 옷깃을 꽈악 잡아끈다.연재준은 빨개지다 못해 실핏줄까지 터진 유월영의 눈가를 보고는 덩달아 마음이 찢겨지는듯한 느낌을 받고 미간을 찌푸린다.유월영이 중얼거리며 묻는다.“......저 이제 나가도 돼요?”“응. 보석 신청 통과됐어.”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면서 연재준이 말한다.아, 이승연이 못 한다고 연재준도 못한다는 법은 없구나.유월영이 고통과 피곤함에 눈을 질끈 감는다.구치소를 나오자 하정은이 곧바로 담요를 유월영에게 덮어준다.유월영은 170이나 되는 큰 키임에도 불구하고 애벌레마냥 꽁꽁 싸진채 연재준에게 폭 안겨있는다.경찰서를 나와 유월영을 차에 앉히는 연재준이다.히터를 빵빵하게 튼 차 안 공기와 찬 바깥 공기에 유월영이 몸을 부르르 떤다.이내 입가에 뭔가가 닿는 느낌을 받는 유월영이다.본능적으로 입을 떼지만 달콤한 맛이 느껴진다.“포도당이니까 마셔.”기력회복엔 포도당 만한게 없다.유월영이 팔 하나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
이승연은 속았다고 느꼈다.이 남자의 따뜻함에 넘어가 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기분 좋겠지? 드디어 내 유산을 손에 넣게 됐으니.”이혁재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유산, 유산, 유산. 왜 항상 이 얘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그는 복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배를 감싸안았다.“여보, 내가 돈이 부족해 보여? 난 돈이 부족하지 않아. 지금 있는 돈으로 다음 생까지 살아도 충분해. 그 많은 돈을 뒀다 뭐 하겠어? 난 당신 돈을 원하지 않아. 그 유산이 당신한테 주는 부담을 덜어주고 싶을 뿐이야. 난 그냥 당신을 돕고 싶어.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믿어줄 거야?”이승연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녀는 그런 시선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충성스러운 강아지를 다독이듯. 이혁재는 항상 그녀에게 충실한 강아지처럼 느껴졌다.그 후로 두 사람은 함께 평생을 보내기로 결심했고 아이가 태어나면 행복한 세 식구가 될 거라고 믿었다.그러나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법정에서 사고가 발생하며 아이를 잃었고 이승연은 깊은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처음 한 달 동안 이혁재는 살이 빠져 송장처럼 변해갔다. 그는 며칠씩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으며 잠조차 자지 않았다. 생존 본능에 이끌려 겨우 물 한 모금을 마시곤 했지만 결국 집에서 쓰러지고 말았다.공주연이 아들을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들은 그가 극심한 기아 상태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거의 굶어 죽을 뻔했다.이혁재가 깨어났을 때 공주연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뺨을 내리쳤다.“넌 네 엄마도 필요 없니? 네 아빠는 이미 날 버렸어. 세상에선 네가 전부야! 그런데 너마저 날 버리려 해?”하지만 이혁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공주연은 울면서 말했다.“승연이 아직 죽지 않았어! 곧 깨어날 거야. 그런데
이혁재의 시점사실, 두 사람의 불화와 이별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갈등이 발생했다.이혁재의 어머니인 공주연이 이승연에게 출산을 재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공주연은 겉으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승연의 유산을 노리고 있었다.그녀의 계산은 간단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씨 성을 가진 그 아이가 이승연의 유산을 당당히 상속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이혁재 역시 어머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아이에게 상속자가 생기면 이승연의 친척들도, 우리 가족도 유산에 대한 욕심을 접고 물러나겠지. 그러면 그녀의 부담도 줄어들 거야.”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이승연에게 가서 아이를 갖자고 제안했다.그러나 이 말을 들은 이승연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가 지금 따로 살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갖자고?”그리고 이내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결혼 전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여기에 사인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이승연은 이미 이혁재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그녀의 유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혁재는 말로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치사한 방법을 선택했다.그녀가 복용하는 피임약을 엽산제와 임신 보조제로 몰래 바꿔치기한 것이다. 결국 이승연은 그의 의도대로 임신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이승연은 약을 바꿔치기한 사실에 격분했고 심지어 이혁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반면, 이혁재는 호텔에서 이승연과 오성민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오성민과 다시 만나고 있다고 오해했다.그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크게 다퉜고 이혁재는 한강에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너 정말 적당히 좀 해라.”연재준이 기가 막혀 혀를 찼다.“뭘 적당히 하라고!”이혁재는 술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내 첫사랑은 이제 날 원하지 않는데, 내가 살아서 뭐 하겠어!”서지욱이 나서서 말렸다.“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