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훈 역시 유월영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하는 복잡한 심정을 지어보인다.유월영은 개의치 않고 논리정연하게 대답한다.“아가씨, 방금 그 말은 전부 제가 연재준 때문에 아가씨한테 적대심을 품었다는 말로 밖엔 안 들리네요. 허나 저희는 6개월도 훨씬 전에 정식으로 헤어졌고 전 시종일관 재회할 생각은 없습니다.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절대요. 그러니 전 그럴만한 명분이 전혀 없는겁니다.연재준은 하정은과 경찰서로 들어오다 마침 유월영의 그 여지없인 매정한 대답을 듣고는 멈춰서 그녀를 어두운 눈빛으로 쳐다본다.복도 끝에 마주서있던 유월영도 두 사람 뒤로 서있는 연재준과 눈을 마주치고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데.허나 유월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간다.“또한 종신 그룹은 그저 잠시 계약을 미룬것 뿐이지 SK그룹과의 협력을 파기한건 아닙니다. 계약이 성사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거죠. 그러니 아가씨가 제 계약을 망쳤다는 말 역시 틀린 말이거니와 전 거기에 대해 원한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저 기댈곳도 없는 평범한 일개 직원인 전 서씨 가문과 유씨 가문이 아가씨 뒤를 지키고 있다는것 또한 잘 압니다. 제가 얼마나 멍청해야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을까요? 논리와 부합되지 않으니 전 정말 아닙니다.”윤영훈은 사실 유월영에게 의심을 품으며 동생 관리를 잘하라는 말에 은근히 화가 나기도 했지만 지금 그녀의 조리정연한 말을 듣고는 범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허나 서정희의 귀엔 유월영의 말들이 들어갈리가 없다.“빈틈없는 계획이라 절대 들키지 않을거라 생각하니까 무슨 일이든 다 하겠지!”이내 서정희는 윤영훈의 품에 파고들어 통곡하며 소리친다.“오빠! 쟤야, 쟤라고! 유월영이 그 남자들한테 사주했어! 돌아온지 얼마 안 돼서 충동 생긴건 유월영밖에 없다고! 그러니까 쟤가 아니면 누구겠어!”어이없어 말문이 막히는 유월영이다.“정 절 물고 늘어질거라면 법정에서 옳고 그름을 밝혀보죠. 법 앞에선 그 누구든 공평할거니까요.”“재회할 마음 없다면서 요즘엔
“저 아니에요.”겨우 몇 시간 동안 아니란 말을 벌써 몇십번을 하는지 모르겠다.“전 그런 짓 하지도 않았고 할 사람도 아니에요......진짜 제가 했으면 그런 단서가 될만한건 남기지도 않았고 경찰들이 찾아오게끔 하지도 않았겠죠.”마지막 한 마디에 연재준이 차갑게 콧방귀를 뀐다.믿는지 안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시 안전벨트를 채우는 유월영이다.이내 유월영은 이승연에게 메시지를 남긴다.“승연아, 늦게라도 시간돼? 일이 좀 생겨서 말이야, 연락해서 말할게.”아직은 답장이 없는 이승연이다. 연재준이 하정은에게 덤덤하게 묻는다.“서정희 부모는 알고 있나?”“네, 이미 아십니다. 최근 뉴질랜드에서 휴가 중이셔서 돌아오시라면 시간이 걸리실것 같아 모든걸 윤 사장님께 맡긴듯 하네요.”여전히 사건 경위를 알고 싶어하는 유월영이 앞으로 몸을 기울여 하정은에게 묻는다.“하 비서님 어젯밤에 서정희 찾으러 가시지 않으셨어요?”하정은은 연재준을 힐끔 보더니 눈을 지그시 감는 그를 보고는 그제야 입을 연다.“어젯밤 제가 바에서 서 아가씨를 찾은건 맞습니다. 오늘 생일이셔서 서안에 이틀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되겠냐는 말에 잠시 자리에서 벗어나 사장님께 동의를 구한 사이 자리에서 사라지셨던겁니다. 웨이터가 혼자서 갔다고 하니 화장실에 간줄로만 알고 찾아가봤지만 없었고 한 바퀴 빙 돌아봤지만 여전히 찾지 못했었습니다.”유월영이 묻는다.“그럼 일 생긴건 어떻게 알았어요?”“룸에서 물건 던지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 들어가본 웨이터가 발견한겁니다. 다행히 웨이터가 마침 들어간 덕분에 큰 일은 피할수 있었죠.”“그 말은 결국 그런 짓은 안 당했다는거네요?” “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두 가문 모두 끝까지 진실을 밝혀낼겁니다.”서정희에게 좋은 감정이라곤 전혀 없던 유월영이지만 그런 짓은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이 일이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남기는지 같은 여자로써 충분히 이해가 갔으니 말이다.연재준이 유월영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눈
후끈후끈한 남자의 체온이 손발이 오므라든 이승연이 낮은 소리로 말하며 그를 밀어낸다.“그만해......월영이 일이니까.”“유 비서는 또 왜?”이혁재는 별로 개의치 않은채 이승연의 셔츠 옷깃을 헤쳐 목에 입을 맞춘다.“서안 SK 간거 아니었어? 거기서도 사고 친다고?”야들야들한 목에서 촉촉한 감촉이 닿자 온 몸에 전율이 돋는 이승연이다. 그녀가 이혁재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묻는다.“당신 송도 서씨 가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윤영훈 이모부랑 이모?”“그래.”이혁재가 딱히 관심없다는듯 덤덤하게 말한다.“내 기억에 그 집엔 딸 하나밖에 없을걸. 금이야 옥이야 아낀다던데, 최근엔 재준이 아래서 프로젝트도 맡았고.”이내 이혁재가 뭔가 눈치챈듯 고개를 든다.“왜? 유 비서 이번엔 서씨 가문 건드린거?”이승연은 딱히 대답이 없다.아니, 지금은 뭐라 대답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이혁재는 냅다 이승연을 침대에 누르며 말한다.“그럼 망했네 뭐, 그 집안 좀 독하거든.”일처리가 독하다는건지, 어둠의 세계와 손잡은 독함이라는건지 모르겠는 이승연이다.“월영이만 결백하면 법은 월영이 편이야.”이혁재는 딱히 법이니 뭐니에 관심이 없어보인다.“이번엔 꽤나 오래 가있을것 같은데 차라리 오늘 밤에 자지 말고 몇번 더 하자.”그의 몸에서 일어난 생리적 반응을 눈치챈 이승연이 벌떡 일어나 서랍에서 뭔가를 꺼낸다.“......껴, 이거 끼라고.”이혁재가 그걸 툭 던져버리며 이승연 위에 올라탄다.“끼긴 무슨. 합법적인 부부 사이에 애까지 가질 생각인데 괜한 쓰레기만 만들잖아?”이때만큼은 의논의 여지를 주지 않고 옷을 꽁꽁 싸매는 이승연이다.“그럼 계약서에 사인이나 해.”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틀어박는 이혁재다.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호흡이 가빠졌지만 이승연은 최후의 마지노선을 굳건히 지킬 생각이다.이혁재는 “젠장” 한 마디를 내뱉으며 이승연을 노려보더니 서랍을 덜컹 열며 말한다.“아! 알았다고! 낀다고 껴!”눈으로 직접 확인한 다음 순간, 집
비서가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서류 봉투를 건네준다.“도련님.”“고생했다, 내년엔 연봉 올려줄게.”이내 봉투를 받아들고 문을 닫는 이혁재다.은은한 거실 조명 아래, 이혁재가 소파에 던져진 이승연의 가방을 찾아낸다.늘 서류들이 든 가방을 서재 금고에 넣어두는 이승연이었지만 오늘은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이혁재에게 붙잡이는 바람에 옷은 물론 가방까지 소파에 내팽개쳐버렸던거다.이혁재가 아무도 없는 2층을 확인하고는 이승연의 가방에서 약 한 통을 꺼내든다.알루미늄판을 확인하니 벌써 두 줄이나 먹어치웠다.참 나 이혁재가 매일 심으면 뭐하나, 이승연이 매일 살충제를 쳐버리는데.이혁재는 방금 받은 봉투에서 약을 꺼내 똑같이 두 줄을 빼낸뒤 이승연의 가방에 있던 약과 바꿔치기를 한다.만족스러운듯 입꼬리를 올린 이혁재는 곳곳에 널린 옷을 바구니에 넣고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가 이승연을 끌어안고 잠에 든다.......한 편 서안.피곤에 찌든 유월영은 아예 욕조에 물을 받고 몸을 푹 담그다 그만 잠이 들어버렸고 다행히 초인종 소리에 눈을 떴다.잠옷으로 갈아입고 슬리퍼를 끌고 인터폰을 확인하니 다름 아닌 연재준이다.열어줘 말아?유월영은 방에서 겉옷을 가져와 목까지 꽁꽁 잠근 뒤에야 문을 빼꼼 연다.“사장님, 무슨 일이세요?”연재준은 조금이라도 어쨌다간 당장 문을 닫아버릴 기세로 문 뒤에 바짝 붙어있는 유월영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린다.그리고는 친히 손에 들린 도시락통을 보여주며 말하는데.“저녁 안 먹었지?”그대로 굳어버리는 유월영이다. 연재준이......유월영에게 밥을?그저 놀라울 따름이다.연재준은 태생이 누구에게 서비스를 받았으면 받았지 절대 누구를 챙겨주는 타입이 아닌데.유월영이 입술을 꽉 깨물고 그제야 문을 활짝 연다.“감사합니다 사장님.”허나 연재준은 손에서 힘을 빼지 않는다. 유월영이 그런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는데.“나도 저녁은 아직이거든.” 그 말인 즉 같이 먹을거라는 말 아닌가.유월영이 즉시 손을 놓는다.“사실 전 배
쓸데없는 오해를 사기 싫었던 유월영이 재빨리 전화를 끊는다.“윤 사장님 귀띔 감사합니다. 저도 다 생각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늦었는데 얼른 쉬세요.”바로 다음 순간, 연재준이 유월영을 방밖으로 끌어내 벽에 콱 밀친다!두 손을 본능적으로 그의 가슴팍에 갖다대 밀어내는 유월영이다.“연재준!”연재준은 한 손으론 벽을, 다른 한 손으론 유월영의 턱을 잡고 쌀쌀맞게 쏘아붙인다.“평소에 이런 말이나 하고 그래? 난 너 도와준적 없어? 하 사모님 별장에서는? 지난번 박수진때는? 너희 엄마 인공심장은? 다 내가 도와준거 아니야?”유월영이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한다.“......윤 사장님이 말한건데 불만 있으면 사장님한테 가서 따져야죠. 저한테 왜 이래요?”연재준은 그런 유월영에게 대답을 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간다.“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빚쟁이들한테 쫓길때 내가 너 안 도와줬어?”“그건 이미 오래전 일이잖아요.”“괴롭힌것들만 생각하느라 그동안 도와줬던건 싹 다 잊은거야?”연재준은 대답없는 유월영을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휙 가버린다.유월영에게 화라도 난걸까.유월영은 복잡한 심정으로 멀어져가는 연재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직 그의 온기가 남아있는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린다.윤영훈의 성격대로라면 방금 그가 한 말은 연재준이 신연우를 깎아내릴때와 같이 “적수”를 처단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유월영은 미간을 찌푸리고 뒤돌아서다 땅에 놓인 도시락통을 보고 이내 그걸 들어 방으로 들어가는데.배고픔이 극에 달하면 위병이 도진다는걸 안 뒤로 연재준은 유월영의 삼시세끼를 극진히 챙겨주는것 같다.도시락 통을 열어보니 전부 2인분으로 된 음식들이 눈에 띈다.연재준은 진짜 유월영과 같이 저녁 식사를 하려고 했던거다.당연하겠지만 유월영은 그걸 다시 연재준에게 가져다줄 생각이 없다.기분전환이라도 할겸 휴대폰을 들어 집에 연락을 해본다.엄마는 병으로, 아빠는 다리때문에 힘든 상황인데다 딸들도 같이 있어줄 상황이 안 되니 유월영은 부모
“방금 일어나자 마자 확인한거야. 누가 보내온거고.”솔직히 두려움이 앞선다. 이 사진들은 마치 유월영이 사주한 사람들이 일을 끝낸뒤 확인사살용으로 보내는 사진들 같아보였기 때문이다.휴대폰을 들고 있는 유월영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멋도 모르고 있다가 크게 한 방 당할것 같은 두려움이랄까.하지만 두려움은 두려움일뿐 유월영은 당황하지 않고 메시지가 전송된 시간을 확인한다.“새벽 네시에 보낸거야, 다시 연락해보니까 꺼졌더라고.”“허구로 된 연락처가 아니고? 없는 번호가 아니고 진짜 있는 번호라는거야?”“응, 신주시로 뜨던데.”“이상하네. 아무튼 연락처 보내줘봐, 내가 친구한테 물어볼게. 그리고 나 지금 공항갈는 길이야, 요즘엔 서안까지 가는 비행기가 하루에 딱 한번 뿐이더라.”유월영이 연락처를 복사해 이승연에게 보내준다. 그러자 대뜸 이승연이 그녀를 부르는데.“월영아.”“어, 듣고 있어.”“이 사진, 이 일, 전부 너랑은 상관없는거 맞지?”확신이 필요한 이승연이라는걸 알고 있는 유월영이다.“단언컨대 나랑은 절대 아무 관계도 없어.”“그래, 그럼 내가 말한대로 해. 지금 바로 경찰한테 연락해서 사진 보여드려.”조금은 망설여지는 유월영이다.전달이 자 안돼 진짜 용의자로 몰리기라도 하면 어쩌나.허나 이승연이 말한다.“한 적 없는 일은 법이 반드시 결백하도록 만들어줄거야. 누구도 감히 널 해치진 않겠지만 네가 주동적으로 나서서 말하지 않은게 들키기라도 하면 골치 아픈게 한 두가지가 아니지.”그 말에 유월영이 한숨을 푹 내쉰다.“알고 있어.”“그래, 일 있으면 다시 연락하고.”생각하면 할수록 수상쩍어지는 이승연이다. 특히나 허구가 아닌 진짜 연락처를 썼다는 점이 말이다.유월영은 다시금 사진들을 들여다본다. 어젯밤엔 웨이터가 마침 들어가준 덕에 큰 일을 피할수 있었다는 말을 듣고 안도했었는데.사진이 남아 있을줄이야. 이 사진들이 퍼지기라도 할땐 서정희는 더는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지 못할텐데.유월영이 어젯밤 조사실에 만난 경찰관에
경찰서에 도착한 유월영은 더는 사무실이 아닌 조사실로 들어가게 된다.이내 등골이 서늘해지는 두 경찰들과 마주앉는데.“전 그 사람들 알지도 못합니다. 사주는 더더욱 한적 없고요. 함정에 빠뜨려서 누명 씌우려는거라고요.”경찰관이 또다시 어제 보여준 사진을 내밀며 말한다.“그 남자들은 이때 유월영 씨에게 서정희 씨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고 하던데요.”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히는 유월영이다.“거짓말이에요! 이때 저한테 길 묻고 있었다고요!”“가방속에서 현금 500만원 상당의 현금다발도 압수했습니다. 유월영 씨가 직접 준거라고 하더군요. 게다가 유월영 씨 지문도 검출됐고요.”“.........”음모의 냄새가 코를 심하게 찌른다. 대답이 없는 유월영을 보며 눈을 마주친 두 경찰관 중 한 사람이 종이 한 장을 앞에 내밀며 말한다.“유월영 씨, 지금 이 시간부로 구류에 처하니 여기에 사인하시죠. 휴대폰, 노트북은 바쳐주시고요. 집 압수수색도 함께 진행할 예정입니다.”심장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며 가라앉는것 같은 느낌을 받는 유월영이다.이내 얼마 못 가 사진들까지 들통나버린다.“누군가 저한테 보내준겁니다. 제가 아침에 연락드린것도 그것 때문이고요.”“발신인이 바로 그 두 사람입니다. 아가씨와 관련 없는거라면 왜 그 사람들이 아가씨한테 사진을 보냈을까요?’유월영이 입꼬리를 들썩인다.“그건 그 사람들한테 물어보셔야죠?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건 제가 제지한다고 될 일이 아닌것 같습니다만.”“500만원은 선지급이고 사진 보내면 나머지 돈도 준다고 했다던데요.”“그 사람들이 한 말은 다 믿으시면서 왜 제가 하는 말은 하나도 안 믿으세요?”“유월영 씨! 그게 무슨 태돕니까!” 발버둥칠수록 더욱 깊이 빠져버리는 거미줄같은 상황에 더이상 할말이 없는 유월영이다. “제 변호인 불러주세요.” ......서안에 금방 도착한 이승연에게 경찰서로부터 연락이 왔고 서로 갔을때 유월영은 이미 구금돼 있었다.구금은 최소 1일, 최대 15일까지 거의 경찰
생각만으로도 어이가 없어하며 유월영이 묻는다.“성추행 사주한건, 심지어 두 명이상이랑 공모한건 중형이지?”“증거가 명확하면 3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이야.”유월영이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진다. 그래서 서정희가 그날 반드시 감옥 갈거라고 했던거구나.어젠 쌀쌀한 겨울 바람이 한바탕 휘몰아치며 기온도 급격히 떨어졌다. 창문도 없는 면회실에서도 뼈를 파고드는듯한 한기에 몸서리치는 유월영이다.사건을 맡을땐 늘 직설적인 화법을 고수하던 이승연은 유월영의 상태를 보고는 말투를 유하게 바꾼다.“내 말은 증거가 명확한 상황에서 말이야. 돈다발에서 네 지문나온건 맞지만 증언보단 증거를 중요시하고 불충분한 증거는 입증되지 않는다는게 우리 나라 법률이야. 판사 역시 두 사람의 말을 들어주기야 하겠지만 겨우 증거 하나로 죄를 입증할순 없다는거지. 그러니까 일단은 너무 걱정 안해도 돼.”증거불충분은 혐의가 입증되지 않는다? 유월영이 조금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이승연을 바라본다.“그 사람들도 이걸 잘 알게 아니야. 꼭 경찰한테 소위 ‘증거’라고 할만한것들을 넘길거라고.”이승연이 단번에 유월영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말한다.“그래도 가짜인건 맞잖아. 거짓 증거들이 늘어날수록 틈이 보일 확률도 커.”틈이 점차 커진다는건 유월영의 결백을 주장해주거니와 반대로 그들을 감옥에 처넣을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다.“서씨 가문에서 누르고 있어서 보석으로 데리고 나올수가 없어. 그래도 또 다시 시넝할거니까 넌 안심하고 나한테 맡겨.”“우리 엄마 아빠한텐 말하지 마.”“그래, 알아.”......면회가 끝나고 유월영은 다시 구치소로 들어간다.구치소에서 유월영의 자리는 가장 구석진 안쪽.유월영은 벽을 마주보고 팔로 무릎을 꼭 끌어안고 있는다.이승연의 능력을, 경찰 측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서정희는 반드시 또다른 ‘증거’를 넘길것이고 그들은 꼭 틈을 찾아 유월영을 내보내 줄것이다.허나 믿음과 두려움은 별개의 일 아닌가.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는다.추워서 그런건지는 모르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