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빠진 유월영을 앞에 두고 박수진은 보란듯이 부회장의 팔짱을 낀채 친밀감을 과시한다.유월영의 머릿속에 문득 윤영훈이 전해준 서류 내용이 떠오른다.부회장은 애 둘까지 딸린 유부남이지만 밖에선 부인 몰래 여자들을 만나고 다닌다던 내용.그러니까 박수진은 SK그룹에서 해고된 뒤 곧바로 호 부회장을 찾아간건가?조금 안타깝다.사실 업무능력은 딱히 흠 잡을데가 없었지만 개인의 선택에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었던 유월영은 아예 박수진을 무시한 채 부회장에게로 다가갔다.“부회장님, 저는 SK그룹 비서 유월영입니다.”그는 이내 유월영을 쭉 훑어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역시 백번 듣는것보단 한번 보는게 낫네요.”악수를 하던 그는 유월영의 손을 놓지 않은채 계속 말했다.“유 비서 해운에 있을때 이름 있었던건 알았어요. 퇴사하고 나서 우리 종신 그룹에 데려오려고 했지만 연 사장이 못하게 하는 바람에 대단한 인재를 잃었었는데 결국은 돌고돌아 SK로 갔던거군요.”유월영이 자연스럽게 손을 빼내며 말했다.“감사합니다 부회장님. 그렇게 따져보면 저희 다 아는 사이인것 같으니 제가 술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룸 예약해 뒀으니 안으로 드시죠.”“그래요 그래.”부회장이 손을 거두자 박수진이 이내 그의 팔짱을 끼고는 함께 안으로 들어간다.앞에서 가던 박수진은 별안간 유월영을 돌아보더니 턱을 쳐들어 보였다.마치 그 날 쫓아냈어도 오늘 다시 들어왔다는 식이랄까.“......”유월영은 당연히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곁엔 두 명의 매니저와 상무팀 직원 한명도 함께다.그 중 한 매니저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말한다.“박수진이 어떻게......”유월영이 묻는다.“저 오기 전에 박수진이 잠깐 비서직 맡았다던데 SK는 그때 이미 종신 그룹과 연이 닿았던건가요? 그때 부회장님도 만났었고요?”“맞아요. 그때 사무실에서 부회장님이 자기랑 메신저도 추가하고 가방 선물도 해줬다고 자랑했었거든요. 근데 진짜 부회장님한테 갈줄은 몰랐어요......좀 거북하네요.”전 직장 동료가
부회장이 놀란 표정을 지어보인다.“유 비서 춤도 잘 추는군요?”박수진이 음침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친다.“그럼요. 심지어 고전무용이에요. 학교 축제때 췄다가 남학생들 혼을 쏙 빼놨더랬죠. 그 덕에 연애편지도 책상 터질만큼 받았어요. 유 비서는 어릴때부터 남자들이 좋아하는건 다 해줬으니까 지금 이렇게 일도 잘 풀리는거예요.”그리고는 술잔 뿐인 텅 빈 테이블을 바라보며 말한다.“마침 주문한 메뉴도 안 올라왔는데 무대 삼아 여기서 춰봐요 한번.”같이 온 매니저들의 표정이 일그러진다.이건 난처하게 하는걸 넘어 모욕 수준 아니던가!테이블 위에서 춤을 춰라? 유월영도 주문하면 올라오는 음식들 중 하나란 말인가?협력을 핑계삼아 말도 안 되는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상대들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그들 뒤엔 SK그룹이 지켜주고 있었다. 허나 오늘같이 금방 회사에서 해고된 전 직원에게 이런 수모를 당할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반대로 유월영은 표정 변화 하나 없다. 여태 겪어온 일들로 면역이 생긴터라 이 정도 일엔 쉽게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다.유월영의 의문은 단 하나. 박수진은 자신이 학창시절 댄스 동아리였던 사실을 어떻게 알며 축제에서 고전무용을 췄던건 또 어떻게 알까?누가 알려줬던거지?부회장은 술도 들어가겠다, 슬슬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한다.“유 비서는 참 팔방미인이네요! 재능 숨기지 말고 좀 춰봐요!”“여기엔 전문적인 무용수들이 제공하는 연출이 따로 있습니다. 부회장님 필요하시면 제가 불러올게요.”유월영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박수진이 또 실실 웃으며 말한다.“부회장님, 유 비서가 부회장님 체면 다 깎아먹네요.”“4:6이면 SK그룹이 종신 그룹에 대한 성의는 충분히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춤 한번 추는것보다 훨씬 더 체면 살려드리는 일이죠.”부회장은 딱히 별 생각도 없었지만 박수진은 되려 또 유월영을 걸고 넘어진다.“부회장님이 유 비서 춤 한번 볼 지위도 안 된다는건가요?”유월영이 쌀쌀맞게 쏘아붙인다.“박수진 씨, 저한테 수석 비서 자리
검정색 정장을 쫙 빼입은 연재준이 걸어들어온다. 옆엔 서정희와 하정은에 보디가드들까지 심상치 않은 아우라를 뽐내면서 말이다!다들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연재준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겠나.잠시 넋이 나가있던 부회장은 습관적으로 웃음을 지어보인다.“연 사장님......연 사장님이 여긴 어떻게!”연재준의 시선이 유월영에게로 옮겨간다. 숨이 턱 막힌 유월영은 갑작스런 연재준의 등장에 놀라워하는 눈치다.매서운 서안의 겨울에 검정색 가죽 장갑을 끼고 온 연재준이 장갑을 벗으며 입을 연다.“여기 무용 연출 있다고 해서 와 봤는데 부회장님 괜찮으면 같이 봐도 될까요?”“그럼요! 연 사장님도 보러 오셨어요?”부회장의 머리가 재빨리 굴러간다. 연재준이 유월영을 해고시키고 업계에서 압살시켜버린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 연재준이 여길 온걸 보면 일부러 더 유월영을 무안하게 하려고 온게 아닐까?“테이블 위에서 춤 추는건 본 적이 없어서 흥미가 생겨서요.”부회장이 고개를 돌려 유월영을 바라본다.“연 사장님도 흥미 있으시다는데 유 비서가 안 출 이유가 없지 않나?”서정희가 연재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걱정스럽게 입을 연다.“재준 씨......”연재준은 손을 탁 올리며 서정희더러 말하지 말라는 손짓을 한다.분명 목이 다 나았지만 갑자기 또 찌를듯한 고통이 몰려오는 유월영이다.유월영이 연재준을 바라본다. 연재준은 손에 장갑을 들고는 하정은이 건네준 의자에 앉더니 다리를 꼬고 느긋하게 앉아 연출을 감상할 준비를 하고 있는다.박수진이 비웃어보인다.“유 비서! 얼른 안 추고 뭐해!”연재준이 피식 웃어보인다.“내가 유 비서더러 추라고 했나?”박수진이 그 자리에 굳어버린다.부회장 역시 잘못 들은 사람마냥 경직돼 버리더니 어버버거리며 말한다.“그......그럼 연 사장님은 누가 추셨으면 하세요?”큰 테이블에 둘러앉아있는 열명 남짓한 사람들을 연재준이 쭉 훑어본다.연재준의 시선에 긴장한 사람들이 다들 몸에 힘을 바짝 주고 있는다.“여긴
연재준의 등장으로 두 그룹의 계약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흘러갔고 30분이 채 되지도 않아 계약은 성황리에 종료됐다.유월영이 술잔을 들어올리며 말한다.“연 사장님과 부회장님을 위해 한 잔 바칩니다. 추후 세 그룹이 함께 협력하는 날도 있길 바랍니다.”연재준이 술잔을 가볍게 들어 톡하고 테이블을 친다.이제 유월영이 할 일은 더이상 없다. 부회장은 연재준의 심기를 건드릴까 온갖 방법으로 아첨을 떤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재준은 시종일관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마침 여유가 생긴김에 화장실에 다녀오려는 유월영이다.화장실에서 나오니 거울 앞에 서있는 서정희가 보인다.유월영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씻고는 종이로 물기를 닦아낸뒤 다시 룸으로 걸음을 옮긴다.이때 등 뒤에서 서정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월영 씨, 저한테 고맙다는 인사 안 한것 같은데요.”“네? 어떤 점에 고마워해야 할까요?”“서울에 있을때 재준 씨가 서궁 데려가서 논 적 있었거든요. 서안에도 비슷한 곳 있다면서 오늘 여기 데리고 온거예요. 방금 저희 룸에 왔던 매니저가 우연히 부회장님이랑 SK그룹 사람들도 있다고 하길래 월영 씨인줄 알고 재준 씨도 데리고 갔던거예요.”서정희가 결정적으로 한 마디를 덧붙인다.“우리가 왔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월영 씨 오늘 어쩔 뻔했어요?”유월영은 그들이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서정희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된다는듯 고개를 끄덕인다.왜 나타났는지는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다.여기서 중점은 연재준이 서정희 때문에 여길 왔고 서정희 때문에 유월영의 룸에 왔으며 서정희 때문에 나서서 유월영을 도와줬다는거다.지난번 하 사모님 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이다.“그런거군요. 그럼 아가씨께도 감사인사 드리죠.”잡티 하나 없는 정교한 메이크업의 서정희가 우월감을 뽐내고 있는 모습을 본 유월영이 별안간 웃음을 터뜨린다.“허나 연 사장님더러 절 도와주게 하고 싶었는지, 수모 당하는걸 보게 하고 싶었는진 아가씨 본인이 더 잘 아시겠죠.”“월영 씨, 방금 그 말
식사 자리가 끝나고 유월영은 동료들, 그리고 연재준 무리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눈치 빠른 매니저가 재빨리 입을 연다.“유 비서님, 저희는 지하철 끊기기 전에 가봐야 해서요. 먼저 가보겠습니다.”유월영이 고개를 끄덕인다.“그래요, 조심해서 들어가고 내일 회사에 봬요.”“내일 뵙겠습니다.”세 사람이 떠난 뒤, 하정은이 연재준의 차를 가지고 온다.보디가드가 연재준에게 문을 열어주려고 할때, 유월영이 한 발 앞서 다가가 문을 열어준다.“사장님.”해운에 있을 당시, 연재준이 외출을 할때마다 차문을 대신 열어주던 그때와 똑같은 동작을 하고 있는 유월영이다.연재준이 알수 없는 짙은 눈빛으로 유월영을 바라본다.방금 화장실에서의 일이 생각난 서정희가 그의 옷깃을 잡아당겨 보지만 연재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이내 서정희는 달려가 유월영을 밀쳐내며 말한다.“아가씨는 왜 동료들이랑 같이 안 가요? 택시 잡아서 갈거면 얼른 가요. 더 늦으면 안 되니까.”“연 사장님 저랑 같은 호텔 아니세요? 태워다 주시면 안 될까요?”서정희가 다급히 연재준을 올려다보며 말한다.“재준 씨, 이틀동안 잘 자지도 못했다면서 차라리 오늘은 저랑 힐튼 가요......”“짐이 다 이 쪽에 있어서.”그 말인 즉 서정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는 소리다.연재준이 보디가드에게 지시를 내린다.“서이사 힐튼까지 데려다 줘.”“서이사님, 가시죠.”“......”지금 소란을 피워봤자 연재준은 함께 가지 않을뿐더러 더우기 자신에게 반감이 생길거라는걸 잘 알고있는 서정희다.서정희는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한다.“그래요, 짐 다 정리하고 내일은 제가 찾아갈게요. 조식 같이 먹어요.”연재준은 그렇다 할 대답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다.이윽고 유월영의 곁을 지날때 서정희는 전엔 보지 못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본다.역시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허나 유월영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연재준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차 문 앞으로 걸어가더니 유월영을 보며 코웃음을 친다.
그럴리가.유월영은 일단 당장이라도 연재준의 무릎에서 내려오고만 싶었다.허나 그는 손을 뻗어 유월영의 허리를 꽉 감싸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주지 않고 있다. 또다시 연재준에게서 나는 익숙한 향기를 맡고 입술을 꽉 깨무는 유월영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그의 무릎에서 일어나려 안간힘을 쓴다. 그렇게 두 사람의 소리없는 힘 겨루기가 계속되는데.이따끔씩 들썩이는 차체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상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한참이나 제자리에 서있는데다 이상하게 움직이기까지 하는 차 때문에 벨보이가 천천히 다가와 창문을 두드린다.“저기요......”썬팅이 안 된 창문으로 인해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였고 거기엔 웬 남녀가 붙어있는게 보인다.연재준이 죽일듯한 눈빛으로 벨보이를 노려보자 그는 이내 뒷걸음질 치며 소리친다.“죄, 죄송합니다!”유월영은 그 틈을 타 연재준의 손을 뿌리치고는 재빨리 옆에 멀찍이 떨어져 앉는다.귀가 빨개진 채 반대편에 바짝 붙어 가쁜 숨을 몰아쉬는 유월영이다.연재준은 콧방귀를 뀌더니 다시 유월영을 붙잡진 않고 옷 매무새를 정리하며 말한다.“출발해.”하정은이 차에 시동을 걸었고 유월영은 안전벨트를 한 뒤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한숨을 푹 내쉰다.“저 사장님 이용한거 아니에요. 방금 아가씨랑 충분히 같이 가시거나 제 동승 거절할수도 있으셨잖아요. 선택은 사장님이 해놓고 책임은 제가 지는건 도리에 어긋나죠.”맞는 말 아닌가?그저 문만 열어주면서 같이 데리고 가줄수 있겠냐고 물었을 뿐인데. 싫다면 얼마든지 거절할수 있었던 연재준이다.누가 거절하지 말랬나?그래놓고는 이용이니 뭐니.연재준이 고개를 돌려 휙휙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는 유월영의 얼굴을 쳐다본다.미인은 이목구비보다도 골격이 더 중요하다고 했던가. 유월영은 바로 그런 타고난 골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마부터 콧대, 다시 콧대부터 턱까지. 그 옆선은 마치 정성들여 빚은 조각상마냥 날렵하고 차가운 느낌을 줬다.“억지 참 잘 부려.”연재준은 섬섬옥수같은
하정은이 움직이지 않는 앞차에 클락션을 울리는 동시에 연재준도 정신을 차린다.유월영은 아직도 쌀쌀맞은 목소리로 항변한다.“일부러 연애편지 얘기 꺼내서 사생활 문란한 사람으로 만든거잖아요.”연재준이 터무니없는 얘길 꺼낸다.“진짜 연애편지 책상 넘치게 받았어?”“그럼 뭐 어때서요. 걔네들이 저 학교 오기도 전에 책상에 집어넣어서 거절할 방법도 없었다고요.”이것도 잘못한건가?“열어는 봤어?”“아니요.”“그럼 버렸어?”알 수 없는 연재준의 의도에 유월영이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아니요. 보지도 버리지도 않았어요.”내용이 뭔지는 흥미도 없었지만 상대가 건네준 성의를 버리는건 너무 무례한 행동 아닌가.유월영은 자신이 편지들을 전부 봉투 하나에 싸서 보관해뒀던 기억이 난다.쇼핑몰을 지나가는 사이 연재준의 표정이 전광판 조명에 비쳐 흐릿해진다.“어떻게 처리했는데.”“집 갖고 갔었는데 어디다 뒀는진 기억 안 나요.”빚더미에 나앉게 됐을때 시골로 이사를 하면서 언제 잊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연재준은 한참을 유월영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내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려버린다.왜 갑자기 연애편지에는 관심 주는거지? 포인트는 서정희가 박수진을 총알받이로 앞세워 유월영에게 함정을 팠다는건데.설마 서정희를 뭐라고 하는게 싫어 일부러 화제를 전환시키는걸까?그 생각에 유월영이 입꼬리를 씰룩거린다.“그래도 서 아가씨가 사장님 데리고 와서 저 도와준건 여전히 감사히 여겨야죠.”물론 서정희는 의도는 도와주려는게 전혀 아니었지만 말이다.연재준은 유월영을 흘겨보며 넥타이를 풀어헤친다.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이다.연재준의 기분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마음대로 해라지 뭐.하정은은 두 사람의 대화를 유심히 듣더니 더는 보기 불편한 장면이 없을거라고 여겼는지 가림막을 내리며 물었다.“사장님, 호텔로 모실까요?”유월영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입을 연다.“비서님, 제가 위치 보내드릴테니까 거기고 가주세요.”하정은은 백미러를 통해 딱히
유월영이 눈쌀을 찌푸린다. 고등학교때부터 빚졌다니? 저게 무슨 헛소리지?같은 고등학교는 맞지만 유월영은 연재준의 이름만 들어봤을뿐 얼굴도 몇번 보지 못했는데 뭘 빚졌다는거지?또 시작이다. 저 말 끝마다 빚졌다는 소리.유월영이 생각하는 그대로 연재준에게 물으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본다.버드나무잎같이 얇고 날카로운 입꼬리를 스윽 올리던 연재준은 이내 유월영의 손을 놓아주고는 옆 차문으로 내려버린다.이윽고 유월영을 거들떠 보지도 않은채 음식점 안으로 들어가는데.“......”이상하다 참.한숨을 푹 쉬고 뒤따라가는 유월영이다.밤 열시가 넘는 시간인지라 음식점엔 손님이 별로 없었고 연재준이 구석 자리에 잡자 웨이터가 바로 메뉴판을 가져다 준다.연재준은 메뉴판을 들여다 보지도 않고 말한다.“다 올려요.”메뉴 전부 다 주문하겠다는 뜻이다.뒤따라오던 유월영이 그 소리를 듣고는 이내 미간을 찌푸린다.“이런 식으로 복수하는거에요?”“왜? 아까워?”“너무 낭비인것 같아서 그래요.”셋이서 전 메뉴를 어찌 다 먹는단 말인가.연재준이 따뜻한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웨이터에게 말한다.“몇개만 올리고 남은건 청소부 분들한테 줘요.”연재준에게 저런 선한 구석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 유월영이다.일부러 유월영을 골탕 먹이려는거겠지.더이상 싸울 힘도 없는 유월영이다. 하고 싶은대로 하라지 뭐.정산 깨끗이 하기 싫은건 본인 일이고 어차피 유월영이 그를 여기로 데리고 와 대접하는건 빚지기 싫어서다.연재준은 유월영이 미간에 감추고 있는 귀찮음과 짜증을 읽어냈는지 별안간 입을 연다.“서정희 때문에 도와준건지, 너 때문에 도와준건지 곁에 3년이나 있었으면서도 눈치 못 채?”경직된 유월영이 고개를 번쩍 든다. 남자의 어둡고 싸늘한 두 눈은 유월영을 매서운 기세로 추궁하고 있다.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유월영이다.그러니까 저 말은......별장에서든 룸에서든을 막론하고 전부 유월영을 도와주고 싶어 직접 나선거다?유월영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이내 그날 밤 별장에서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
이승연은 속았다고 느꼈다.이 남자의 따뜻함에 넘어가 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기분 좋겠지? 드디어 내 유산을 손에 넣게 됐으니.”이혁재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유산, 유산, 유산. 왜 항상 이 얘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그는 복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배를 감싸안았다.“여보, 내가 돈이 부족해 보여? 난 돈이 부족하지 않아. 지금 있는 돈으로 다음 생까지 살아도 충분해. 그 많은 돈을 뒀다 뭐 하겠어? 난 당신 돈을 원하지 않아. 그 유산이 당신한테 주는 부담을 덜어주고 싶을 뿐이야. 난 그냥 당신을 돕고 싶어.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믿어줄 거야?”이승연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녀는 그런 시선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충성스러운 강아지를 다독이듯. 이혁재는 항상 그녀에게 충실한 강아지처럼 느껴졌다.그 후로 두 사람은 함께 평생을 보내기로 결심했고 아이가 태어나면 행복한 세 식구가 될 거라고 믿었다.그러나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법정에서 사고가 발생하며 아이를 잃었고 이승연은 깊은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처음 한 달 동안 이혁재는 살이 빠져 송장처럼 변해갔다. 그는 며칠씩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으며 잠조차 자지 않았다. 생존 본능에 이끌려 겨우 물 한 모금을 마시곤 했지만 결국 집에서 쓰러지고 말았다.공주연이 아들을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들은 그가 극심한 기아 상태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거의 굶어 죽을 뻔했다.이혁재가 깨어났을 때 공주연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뺨을 내리쳤다.“넌 네 엄마도 필요 없니? 네 아빠는 이미 날 버렸어. 세상에선 네가 전부야! 그런데 너마저 날 버리려 해?”하지만 이혁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공주연은 울면서 말했다.“승연이 아직 죽지 않았어! 곧 깨어날 거야. 그런데
이혁재의 시점사실, 두 사람의 불화와 이별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갈등이 발생했다.이혁재의 어머니인 공주연이 이승연에게 출산을 재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공주연은 겉으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승연의 유산을 노리고 있었다.그녀의 계산은 간단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씨 성을 가진 그 아이가 이승연의 유산을 당당히 상속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이혁재 역시 어머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아이에게 상속자가 생기면 이승연의 친척들도, 우리 가족도 유산에 대한 욕심을 접고 물러나겠지. 그러면 그녀의 부담도 줄어들 거야.”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이승연에게 가서 아이를 갖자고 제안했다.그러나 이 말을 들은 이승연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가 지금 따로 살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갖자고?”그리고 이내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결혼 전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여기에 사인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이승연은 이미 이혁재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그녀의 유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혁재는 말로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치사한 방법을 선택했다.그녀가 복용하는 피임약을 엽산제와 임신 보조제로 몰래 바꿔치기한 것이다. 결국 이승연은 그의 의도대로 임신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이승연은 약을 바꿔치기한 사실에 격분했고 심지어 이혁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반면, 이혁재는 호텔에서 이승연과 오성민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오성민과 다시 만나고 있다고 오해했다.그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크게 다퉜고 이혁재는 한강에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너 정말 적당히 좀 해라.”연재준이 기가 막혀 혀를 찼다.“뭘 적당히 하라고!”이혁재는 술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내 첫사랑은 이제 날 원하지 않는데, 내가 살아서 뭐 하겠어!”서지욱이 나서서 말렸다.“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