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을 꿇으라니!유월영이 고개를 번쩍 든다.저 말은 하부인이 홧김에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일까, 아니면 진심인걸까?순간 거실엔 차가운 정적이 감돈다. 유독 하부인의 이글거리는 눈빛만이 유월영을 압박하고 있는것만 같았다.하이힐은 나른하고 푹신한 카펫위에서 가뜩이나 중심을 잡기 힘든데다 몸상태도 말이 아니니 불편하기 그지없는 유월영이다.입술을 꽉 깨물고 입을 열려는 순간 1인소파 쪽에서 탁하고 컵과 유리 테이블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날카로운 소리는 마치 검을 빼드는 소리와도 흡사했다.연재준 방향에서 나는 소리임을 직감하고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서정희가 먼저 입을 연다.“하 부인님, 일단 진정하시고 이 일은......연 사장님, 얼른 아가씨 도와서 말 좀 해주세요.”“하 사모님, 사건경위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무릎부터 꿇리는게 하씨 가문 규칙입니까?”드디어 연재준이 나섰다.허나 그건 서정희에게 등 떠밀려 나선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유월영이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 와중에까지 연재준에게 기대를 품고 있었던 자신이 한심했으니 말이다.“그건 아니지, 진실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어찌 아가씨를 능욕하겠니.”하 사모님이 그제야 나긋한 말투로 하부인에게 “일침”을 날린다.“정아, 홧김에 그런 소리 하는걸 보니 많이 피곤한 모양이구나. 얼른 올라가서 쉬어, 이 일은 내가 잘 처리할테니.”그리고는 이내 유월영에게 말한다.“아가씨, 앉아서 얘기하시죠.”“감사합니다, 하 사모님.”오래도록 같은 자세로 서있어서인지 유월영은 힘이 풀린 다리를 이끌고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겨우 두걸음도 채 걷지 못하고 엎어지려는걸 간신히 소파로 팔을 뻗어 막아내는 유월영이다.동시에 그런 유월영을 붙잡은건 다름 아닌 연재준의 손이다.유월영과 가장 가까이 있던 소파가 바로 연재준이 앉아있던 1인소파 옆이었으니 말이다.유월영은 무슨 닿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것마냥 재빨리 손을 빼냈고 그 모습에 연재준의 얼굴도 덩달아 차가워진다.하 사모님을 바라
하 사모님은 이내 연재준에게로 다가가더니 한결 나긋해진 목소리로 말했다.“재준아, 너 내가 연락했을때 기차역이었지? 서안 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애들 보러 와줬구나.”“괜찮아요, 별 것도 아닌데요.”“오늘 밤엔 여기서 쉬어, 내가 방 두개 마련해줄게.”연재준도 거절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한다.하 사모님이 허리를 툭툭 두드리시며 한숨을 쉬신다.“하루종일 골치 앓았더니 이 늙어빠진 뼈들이 여기저기 쑤시네.”서정희는 눈치 빠르게 하 사모님 곁으로 다가가 부축해주며 말했다.“사모님 얼른 쉬세요. 저희가 외부인도 아니고 무슨 접대를 받겠어요. 저희가 알아서 잘 할게요.”유월영은 누구도 관심주지 않는 구석진 곳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어지럼증을 회복하고 있다.보이진 않지만 귀가 달렸으니 들리긴 할것 아닌가.서정희의 말엔 뭐랄까, 알게 모르게 연재준과 자신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는것 같았다.“저희가 외부인도 아니고”, “저희가 알아서 잘 하겠다”며 말 끝마다 저희거리는걸 보니.어제 연재준이 서정희를 연회에 데리고 온건 해운 직원 신분으로 데려온거라고 치자, 그럼 오늘 밤은?유월영이 피식 웃는다. 연재준의 여자 바꾸는 속도는 물론 그런 사실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는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었으니 말이다.지난번 산장에서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던 유월영이다.무릇 여자들이란 이성관계에서의 경쟁자나 자신을 그런 경쟁자로 간주하는 사람에겐 예민하고 민첩한 “레이더”를 가지고 있다. 그때 유월영은 벌써 서정희가 연재준에게 마음이 있다는걸 눈치채고 있었다.말 끝마다 연 선배, 연 선배 거리는것만 봐도 뻔했다.지금은 어딜가나 서정희를 데리고 다니는걸 보면 백유진이 또 차인건가, 아니면 연재준이 원래 그런 사람인걸까?전엔 유월영과 백유진이었는데 어느새 서정희와 백유진이 돼버렸다.유월영이 한숨을 푹 내쉰다. 몸상태가 안 좋아서인지 그녀의 두 눈은 촉촉해져 있었다.하 사모님이 서정희를 지그시 쳐다본다. 벌써 두번이나 연재준 곁에서 함께
유월영이 입술을 꽉 깨물고 베이비시터를 바라본다.“실례지만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베이비시터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버린다. 전혀 협조하고픈 생각이 없어보인다.유월영이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할머님이 저에게 독을 먹인 진범을 찾으시라고 할땐 당신 뿐만이 아니라 하씨 가문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도 된다는 뜻이세요. 협조 안 하겠다면 전 당신이 찔리는게 있다고 의심해 할머님께 그 사실을 알려드릴거고 그 뒤 할머님이 어떻게 처리하실진 저도 모르겠네요.”그 말은 베이비시터 뿐만 아닌 다른 하인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그들의 협조를 받아내려면 이 정도 과장은 아무것도 아니었다.확실히 효과가 있어보인다. 그 말에 베이비시터가 순식간에 표정을 싹 바꾸며 공손히 말한다.“저, 저는 조씨에요. 다들 절 조 아주머니라고 부르고요.”연재준은 2층으로 올라가던 길에 벌써부터 조사에 나선 유월영의 모습을 보고는 이내 다시 시선을 거뒀다.그리고는 이내 걸음을 우뚝 멈추는데.“먼저 방은 가지 말지.”길을 안내하던 하인도 덩달아 걸음을 멈춘다.“그럼......”“하부인 방은 어디지?”연재준은 이내 시선을 돌리더니 서정희에게 뭔가를 얘기한다.......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눈이 감기더니 의식을 잃었고 베이비시터에 의해 다시 정신을 차렸다.“저기요, 저기요, 여기서 자면 어떡해요.”잠든게 아니라 정신을 잃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이마를 짚어보니 역시나 열이 나기 시작한다.가쁜 숨을 한번씩 내쉴때마다 펄펄 끓는 용암같은 공기가 입 안을 감쌌지만 몸은 추위에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그 사실을 알리 없는 베이비시터는 연신 중얼거린다.“사모님이 겨우 하룻밤밖에 안 주셨는데 잠이 와요? 팔자려니 그냥 단념하겠다는거예요? 그럼 난 어떡하라고요? 나까지 물고 늘어지진 마요.”진범을 잡지 못한다면 누명을 덮어쓰는건 물론 직장도 잃게 될게 뻔했다.유월영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소파에 앉아있던 하부인은 유월영을 보자마자 불만스러움을 표출해낸다.이 바닥에서 벌써 오랜시간을 버텨온 유월영에게 그 정도 표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하부인님, 진범에 관한 단서를 알아냈으니 허락만 해주신다면......”“월영 씨, 먼저 말하지 말아봐요.”서정희가 냅다 유월영의 말을 끊어버린다. 어안이 벙벙한 유월영이다.서정희는 이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하부인에게 말한다.“정연 씨, 아이들 때문에 많이 힘든건 알겠지만 진범을 잡아야만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잖아요, 제 말이 맞죠?”어느덧 시간은 새벽 한 시를 훌쩍 넘어서 있었고 하부인은 눈가엔 실핏줄이 터진 채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허나 범인을 잡지 못하면 편히 쉬지 못할것 같다는 생각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하부인이다.유월영이 입을 열려는 순간 서정희가 또 한번 앞서 말을 꺼낸다.“연주 씨가 말해봐요.”“......”방금 거실에서까진 “연 사장님”이던것이 이젠 “재준 씨”가 돼버렸다.유월영이 그에게로 다가간다.여긴 안방에 아닌 서재였고 방 안엔 여자들 뿐이었는지라 연재준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에 기대 있었다.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각에 다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지만 유독 연재준만큼은 늘 그렇듯 또렷하고 단정해 보였다.장인의 손에서 탄생한 수제 양복은 그의 훤칠한 키와 어우러져 고급진 우아함을 뽐내는것이 더욱 가까이 다가갈수 없는 아우라를 풍겼다.연재준을 눈을 들자 유월영은 이내 눈을 내리깔았고 귀에는 그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온다.“독을 먹인 사람은 하부인과 연관된 사람일겁니다. 진작에 준비를 끝내고 연회날을 기다리다가 하씨 가문에서 바삐 움직이는 어수선한 틈을 타 범행을 저질렀죠.”유월영의 마음 속에 물결이 일렁인다.짜지도 않았지만 그는 유월영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허나 이상할것도 없었다, 이 일은 원체가 그리 분석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유월영이 생각할 만한걸 연재준이 어찌 모를수 있을까?뭐든 다 알고 다 가지고 싶어하는 연재준이었고 그저 하
유월영은 한숨을 내뱉고 다시금 하부인에게 진지하게 묻는다.“그렇다면 하 부인님께선 평소 원한관계에 있는 사람이 계신가요?”하부인이 이마를 감싸쥐고 고뇌에 빠진다.“지금은 머리속이 뒤죽박죽이라 기억이 안 나요 기억이......”유월영이 태블릿을 건네주며 말한다.“어젯밤 감시 카메라에 찍힌 손님들 전부를 캡쳐한 사진들입니다. 이 중에 아이들을 해하거나 부인님께 복수할 만한 누군가가 있을까요?”사진을 넘겨보던 하부인은 7,8번째 사진에서 갑자기 멈추더니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얘요! 얘예요!”태블릿 화면에 앳된 여자아이가 보인다.하부인이 이를 바득바득 갈더니 씩씩대며 말한다.“제 여동생인데 줄곧 제가 하씨 가문에 시집오는걸 질투했거든요. 혼자 엄마를 백 삼아 사랑을 독차지한다면서 볼때마다 시비를 걸었었는데 절대 좋은 마음으로 아이들 보러 갔을리가 없어요!”엄마를 백 삼는다? 그럼 두 자매는 한 엄마 배속에 태어난 친자매가 아니란 말인가?하지만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타깃만 정해졌다면 충분하다.“이런 사람은 겁만 제대로 주면 됩니다. 이미 증거를 확보했으니 인정하지 않으면 경찰에 넘길거다, 경찰에서 지문 같은 증거들만 채취하면 더는 도망갈데가 없다고 하면 될겁니다.”하부인이 태블릿을 꽉 움켜쥔다.“그건 나도 알아요. 우리 아이들을 위해 뭘 해야할지는 나도 안다고!”그렇다면 더이상 유월영은 할 일이 없다......사실은 전혀 상관없는 그녀에게 닥친 뜻밖의 시련이었으니.그러게 누가 지위가 낮으라고 했나.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한바탕 호되게 당해놓고도 할수 있는게 없는데.“사건의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으니 하 부인님이 내일 사모님께 잘 전달해 주십시오. 그럼 전 이만.”연재준이 묻는다.“지금 이 시간에 가겠다는거야?”유월영이 힘겹게 침을 넘기며 말한다.“내일 출근해야 돼서요. 여긴 회사랑 너무 멀거든요.”연재준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서정희가 또 앞서 그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말했다.“재준 씨, 기사라도 보내서 바래다 주게
별다른 해명이 없는 연재준이다.늘 그렇다, 그는 누군가에게 해명하는 법을 모른다.2층 난간을 붙잡고 있는 그의 시선은 활짝 열려있는 대문 뒤로 펼쳐진 칠흙같은 어둠을 바라보고 있다.이내 연재준은 고개를 틀어 서정희에게 말한다.“준비해둔 방으로 가서 쉬어.”“재준 씨는요?”딱히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는 그였지만 서정희는 그가 간섭받기 싫어한다는걸 잘 알고 있었는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제 말은 내일 아침에 사모님이 재준 씨 안 보이는거 알면 어디 갔냐고 물으실텐더 그땐 어쩌냐는거였어요.”“네가 알아서 해.”앞으로 두 발자국 내밀던 연재준이 다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하부인은 아직 상태가 많이 불안정하니 네가 잘 말씀드려. 사모님한테 유월영이 찾은 진범에 대해 잘 말씀드리라고.”유월영이 찾은 진범이라......유월영이 본인의 힘으로 찾아낸건 맞지만 방금 하부인 앞에서 사건에 대해 분석한건 분명 그였는데.허나 그는 특별히 강조하며 유월영이 찾은 진범이라고 콕 집어 말한다.“잘 말씀드릴게요.”연재준이 아래층으로 내려와 밖으로 나왔을때 유월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가 곁에 있던 하인에게 묻는다.“그 사람 택시타고 갔나?”“걸어가셨습니다. 여기는 택시가 잘 안 잡혀서요.”걸어서 갔다?이 늦은 밤에, 그것도 산길을 혼자 걸어 내려간다?연재준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바로 차에 올라탔다.아니나 다를까 100미터쯤 내려오니 비틀거리는 뒷모습이 보인다.그는 냅다 유월영의 옆으로 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추운 밤바람에 정신이 더 혼미해져 자동차 소리도 듣지 못한 유월영이 놀라서 펄쩍 뛴다.차창이 내려오고 연재준의 차가운 얼굴이 보인다.“타 빨리.”한사코 거절하는 유월영이다.“사장님한테 민폐끼치기 싫어요. 제가 알아서 택시타고 갈게요.”“여기서 택시가 잡혀?”그 말은 맞다. 택시는 커녕 위치 서비스도 되지 않는다.올라올때도 돈을 더 얹어줬으니 기사가 산길을 올라와준거지 가장 가까운 지점은 산 아래 뿐이었다.유월영은 차가운 밤
연재준이 쌀쌀맞은 눈빛으로 유월영을 쳐다본다.“네가 준다며?”유월영이 이를 꽉 악문다. 그러나 갑자기 풀악셀을 밟아 코너를 돌아버리는 바람에 유월영은 준비도 없이 차문에 부딪혔다가 다시 안전벨트에 의해 제자리로 돌아왔다.“......”아프진 않았지만 울화통이 치민 유월영이 실핏줄 터진 눈으로 남자를 노려본다.핸들을 쥔 연재준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가더니 이내 속도를 늦추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전엔 한 성깔하는거 왜 몰랐지? 이래도 안 된다 저래도 안 된다.”이런 말이 다른 사람 입에서 나온다면 진짜 “넌 방법이 없다”, “널 어떻게 하면 좋겠냐”, “넌 날 너무 무안하게 만들어”같은 애정표현의 일종으로 여길테지만 그는 연재준이다.그의 말에서 묻어나오는거라곤 짜증 뿐이었다.유월영은 그런 성격이다. 평소엔 조용하고 뭐든 다 억제할수 있는 사람이지만 일단 몸이 불편하기만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감정을 표출해낸다. 그 날 영안에서 몇끼를 굶었을때도 연재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다 반박을 했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랬다.유월영이 입꼬리를 스윽 올린다.“사장님도 재밌더라고요. 하 사모님이 따지고 드실때도 ‘어젯밤에 저랑 쭉 같이 있었고 그런 적 없었다’는 말 한 마디도 하기 싫으셨던걸 보면.”그런 사람이 “아가씨 도와드려야죠”라는 서정희의 말에 구구절절 입을 열다니.“지금은 또 친히 저 쫓아오셨는데 본인 행동에 괴리감이 들지도 않으세요?”“내가 그 말 안 해준것 때문에 내 탓으로 돌리는 거야?”가뜩이나 날카로운 연재준의 옆모습이 더욱 예리하고 차가워진다.“그럼 넌 왜 사모님이 물으실때 나랑 같이 있었다고 말 안 했어?”다른 사람은 다 거론해놓고 자기 이름만 쏙 빼놓고선 이제 와서 자기 탓을 한다니.“말해도 도와주지도 않을건데 뭐하러 힘을 빼요?”연재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진다.“뭐?”유월영이 간크게 또 한번 똑같은 말을 읊조린다.“제가 말해도 도와주지도 않았을거잖아요, 아니에요? 사장님은 신 교수님처럼 아무 이유없이 제 편을 들어줄
누가 누굴 건드려?자길 건드렸다고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다는건가? 그런 법도 또 자기 마음대로 정한거겠지?뭐든 지 마음대로면서!유월영은 울화통이 치민 나머지 말도 못하고 있는다. 연재준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쓱 닦아낸다. 사람 손 못 탄 야생 고양이마냥 입술을 냅다 물어버린다니.“잘 잡아, 또 부딪히고는 내 탓마냥 째려보지 말고.”유월영은 목구멍까지 솟구친 화를 겨우 누르고 자리에 앉아 손잡이를 꽉 잡았다.연재준은 이내 차에 시동을 걸었다.그는 집주소를 묻지 않았고 유월영 역시 말하지 않았다. 그가 알고 있다는걸 알았으니까.겨우 손바닥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나날들은 사실 전부 그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었다.드디어 차가 산 아래로 내려와 도로에 들어서자 연재준은 그제야 조수석에 앉은 유월영을 힐끔 쳐다본다.유월영은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눈을 찔끈 감고 연신 불안정한 호흡을 하고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잔뜩 찌푸린 미간은 어딘가 모르게 생각이 많아보인다.몇 번이고 곁눈질해 보던 연재준은 말 끝마다 신 교수님거리던 그녀의 말이 떠올라 다시 시선을 홱 돌려버린다.유월영은 절대 잠이 든게 아니었다. 추웠다 더웠다를 반복하는 이 느낌은 그 날 유람선에서 정신을 잃었을때와 똑같은 느낌을 줬다.아마 그동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안간힘을 쓰며 쉬지도 못하고 일한 탓이겠지.호텔에 도착하자 눈을 번쩍 뜬 유월영은 영혼없이 한 마디를 했다.“감사합니다 사장님.”극한에 다다랐다고 생각한 유월영은 어기적어기적 휴대폰을 꺼내 구급차를 부르려고 한다.연재준은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유월영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구급대에 주소를 말하며 정신을 판 사이 마주오는 사람과 부딪히고 마는 유월영이다.멀쩡한 사람이라면 잠시 비틀거리다 중심을 잡겠지만 중심이라는게 전혀 없었던 유월영은 그만 뒤로 넘어가고 만다.그래 뭐, 넘어가면 넘어가는거지. 어차피 구급차도 불렀는데......허나 예상했던 통증과는 달리 누군가에 의해 허리가 붙잡히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
이승연은 속았다고 느꼈다.이 남자의 따뜻함에 넘어가 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기분 좋겠지? 드디어 내 유산을 손에 넣게 됐으니.”이혁재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유산, 유산, 유산. 왜 항상 이 얘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그는 복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배를 감싸안았다.“여보, 내가 돈이 부족해 보여? 난 돈이 부족하지 않아. 지금 있는 돈으로 다음 생까지 살아도 충분해. 그 많은 돈을 뒀다 뭐 하겠어? 난 당신 돈을 원하지 않아. 그 유산이 당신한테 주는 부담을 덜어주고 싶을 뿐이야. 난 그냥 당신을 돕고 싶어.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믿어줄 거야?”이승연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녀는 그런 시선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충성스러운 강아지를 다독이듯. 이혁재는 항상 그녀에게 충실한 강아지처럼 느껴졌다.그 후로 두 사람은 함께 평생을 보내기로 결심했고 아이가 태어나면 행복한 세 식구가 될 거라고 믿었다.그러나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법정에서 사고가 발생하며 아이를 잃었고 이승연은 깊은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처음 한 달 동안 이혁재는 살이 빠져 송장처럼 변해갔다. 그는 며칠씩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으며 잠조차 자지 않았다. 생존 본능에 이끌려 겨우 물 한 모금을 마시곤 했지만 결국 집에서 쓰러지고 말았다.공주연이 아들을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들은 그가 극심한 기아 상태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거의 굶어 죽을 뻔했다.이혁재가 깨어났을 때 공주연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뺨을 내리쳤다.“넌 네 엄마도 필요 없니? 네 아빠는 이미 날 버렸어. 세상에선 네가 전부야! 그런데 너마저 날 버리려 해?”하지만 이혁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공주연은 울면서 말했다.“승연이 아직 죽지 않았어! 곧 깨어날 거야. 그런데
이혁재의 시점사실, 두 사람의 불화와 이별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갈등이 발생했다.이혁재의 어머니인 공주연이 이승연에게 출산을 재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공주연은 겉으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승연의 유산을 노리고 있었다.그녀의 계산은 간단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씨 성을 가진 그 아이가 이승연의 유산을 당당히 상속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이혁재 역시 어머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아이에게 상속자가 생기면 이승연의 친척들도, 우리 가족도 유산에 대한 욕심을 접고 물러나겠지. 그러면 그녀의 부담도 줄어들 거야.”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이승연에게 가서 아이를 갖자고 제안했다.그러나 이 말을 들은 이승연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가 지금 따로 살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갖자고?”그리고 이내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결혼 전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여기에 사인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이승연은 이미 이혁재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그녀의 유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혁재는 말로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치사한 방법을 선택했다.그녀가 복용하는 피임약을 엽산제와 임신 보조제로 몰래 바꿔치기한 것이다. 결국 이승연은 그의 의도대로 임신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이승연은 약을 바꿔치기한 사실에 격분했고 심지어 이혁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반면, 이혁재는 호텔에서 이승연과 오성민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오성민과 다시 만나고 있다고 오해했다.그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크게 다퉜고 이혁재는 한강에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너 정말 적당히 좀 해라.”연재준이 기가 막혀 혀를 찼다.“뭘 적당히 하라고!”이혁재는 술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내 첫사랑은 이제 날 원하지 않는데, 내가 살아서 뭐 하겠어!”서지욱이 나서서 말렸다.“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그냥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필요한 걸 얻는 공정한 거래일 뿐이야. 누구도 누구에게 빚지지 않아. 하지만 네가 이 결혼이 억울하고 원하지 않는다면 난 다른 사람을 찾으면 돼. 상관없어.”이승연의 단호한 말에 이혁재는 심장이 벌집처럼 무너져 내렸다.하지만 그는 자신을 위로했다. 적어도 그녀가 애초에 다른 사람을 찾지 않고 자신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자신이 그녀의 눈에 들어올 만큼의 가치는 있었다고 믿으려 했다.이혁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물론 난 이 결혼을 원하지. 누나랑 결혼하고 싶어서 얼마나 애타는지 모를 거야. 게다가 누나 가문의 그 거대한 유산에 누가 눈독을 들이지 않겠어?”사실 이혁재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녀의 유산을 탐내는 사람들로부터 지켜줄 강력한 방패가 되어주겠다는 뜻이었다.그러나 그는 또다시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이승연은 “역시 너도 내 유산 때문에 결혼하려는 거구나”라는 뜻이 담긴 냉소적인 눈빛을 보냈다.그 눈빛을 마주한 이혁재는 차라리 땅속으로 숨고 싶었다. 그는 평소 말을 잘하는 사람인데 왜 이승연 앞에만 서면 이렇게 서툴러지는지 알 수 없었다.그는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더 나쁜 인상을 주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결국 두 사람은 서로 기분이 상한 채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다.그나마 유일한 희소식은, 이혁재가 열일곱 살 때부터 꿈꿔왔던 첫사랑과 결혼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혼례를 치렀고 첫날밤을 함께 보냈다.이승연의 시점이승연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나며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유산을 남겼다.그 유산은 주변 사람들을 질투와 광기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생전에 친절하고 따뜻했던 삼촌과 고모 같은 친척들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단 하룻밤 사이에 괴물로 변했다.그녀는 영화에서 좀비로 변하는 인간들을 떠올렸다.정상이던 사람들이 물리면 금세 인간성을 잃고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괴물로 변하는 것처럼 그녀의 친척들도 오로지 그녀의 유산을 탐하는 괴물이 되어버렸다.하지만 이승연은 변호사로서 법을 잘 알고 말재
이혁재의 시점이승연과 오성민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은 이혁재였다. 그래서 이승연이 자신의 청혼을 거절했을 때 그는 그녀가 아직도 오성민을 잊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화가 난 그는 집 안에서 폭주하기 시작했다.그는 첫사랑이란 게 원래 잊기 어렵고 학창 시절부터 이어진 감정에, 그리고 7년이라는 긴 시간을 하루아침에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성민이 완전한 쓰레기라는 것이었다.오성민은 자기 인턴과 바람을 피웠다. 이런 사람은 인간 이하의 짐승에 불과했고 이승연은 왜 그런 사람을 잊지 못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대체 그런 짐승만도 못한 놈보다 어디가 부족하다고!”분노에 찬 이혁재는 다음 날도 2만 보를 걸으며 화를 삭였다. 그러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 다시 한번 가보세요! 어제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승연이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룻밤 생각했으면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을 거예요.”그는 자신이 오성민보다 못할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 아들의 말대로 공주연은 다시 한번 이승연을 찾아갔고,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돌아와 말했다.“여전히 거절하더구나.”이혁재는 소파에 쓰러져 한쪽 다리와 팔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원한에 사로잡힌 시체처럼 어두운 기운이 그를 감쌌다.그러다 그는 벌떡 일어나 이승연을 직접 찾아갔다.“누나한테 직접 물어봐야겠어. 왜 나랑 결혼하지 않으려는지!”사무실에서 문서를 검토하던 이승연은 담담히 말했다.“너는 나보다 너무 어려.”“그게 이유라고?”그러자 이혁재는 불쑥 다가가 이승연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이승연은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붙잡으며 외쳤다.“지금 뭐 하는 거야!”이혁재는 그녀를 안고 빙글빙글 돌며 깡충깡충 뛰었다.“너 미쳤어? 빨리 내려놔!”이승연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며 말했다.“내가 단지 누나보다 나이가 어린 것뿐이지. 다른 모든 면에서는 누나 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