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을 꿇으라니!유월영이 고개를 번쩍 든다.저 말은 하부인이 홧김에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일까, 아니면 진심인걸까?순간 거실엔 차가운 정적이 감돈다. 유독 하부인의 이글거리는 눈빛만이 유월영을 압박하고 있는것만 같았다.하이힐은 나른하고 푹신한 카펫위에서 가뜩이나 중심을 잡기 힘든데다 몸상태도 말이 아니니 불편하기 그지없는 유월영이다.입술을 꽉 깨물고 입을 열려는 순간 1인소파 쪽에서 탁하고 컵과 유리 테이블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날카로운 소리는 마치 검을 빼드는 소리와도 흡사했다.연재준 방향에서 나는 소리임을 직감하고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서정희가 먼저 입을 연다.“하 부인님, 일단 진정하시고 이 일은......연 사장님, 얼른 아가씨 도와서 말 좀 해주세요.”“하 사모님, 사건경위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무릎부터 꿇리는게 하씨 가문 규칙입니까?”드디어 연재준이 나섰다.허나 그건 서정희에게 등 떠밀려 나선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유월영이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 와중에까지 연재준에게 기대를 품고 있었던 자신이 한심했으니 말이다.“그건 아니지, 진실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어찌 아가씨를 능욕하겠니.”하 사모님이 그제야 나긋한 말투로 하부인에게 “일침”을 날린다.“정아, 홧김에 그런 소리 하는걸 보니 많이 피곤한 모양이구나. 얼른 올라가서 쉬어, 이 일은 내가 잘 처리할테니.”그리고는 이내 유월영에게 말한다.“아가씨, 앉아서 얘기하시죠.”“감사합니다, 하 사모님.”오래도록 같은 자세로 서있어서인지 유월영은 힘이 풀린 다리를 이끌고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겨우 두걸음도 채 걷지 못하고 엎어지려는걸 간신히 소파로 팔을 뻗어 막아내는 유월영이다.동시에 그런 유월영을 붙잡은건 다름 아닌 연재준의 손이다.유월영과 가장 가까이 있던 소파가 바로 연재준이 앉아있던 1인소파 옆이었으니 말이다.유월영은 무슨 닿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것마냥 재빨리 손을 빼냈고 그 모습에 연재준의 얼굴도 덩달아 차가워진다.하 사모님을 바라
하 사모님은 이내 연재준에게로 다가가더니 한결 나긋해진 목소리로 말했다.“재준아, 너 내가 연락했을때 기차역이었지? 서안 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애들 보러 와줬구나.”“괜찮아요, 별 것도 아닌데요.”“오늘 밤엔 여기서 쉬어, 내가 방 두개 마련해줄게.”연재준도 거절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한다.하 사모님이 허리를 툭툭 두드리시며 한숨을 쉬신다.“하루종일 골치 앓았더니 이 늙어빠진 뼈들이 여기저기 쑤시네.”서정희는 눈치 빠르게 하 사모님 곁으로 다가가 부축해주며 말했다.“사모님 얼른 쉬세요. 저희가 외부인도 아니고 무슨 접대를 받겠어요. 저희가 알아서 잘 할게요.”유월영은 누구도 관심주지 않는 구석진 곳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어지럼증을 회복하고 있다.보이진 않지만 귀가 달렸으니 들리긴 할것 아닌가.서정희의 말엔 뭐랄까, 알게 모르게 연재준과 자신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는것 같았다.“저희가 외부인도 아니고”, “저희가 알아서 잘 하겠다”며 말 끝마다 저희거리는걸 보니.어제 연재준이 서정희를 연회에 데리고 온건 해운 직원 신분으로 데려온거라고 치자, 그럼 오늘 밤은?유월영이 피식 웃는다. 연재준의 여자 바꾸는 속도는 물론 그런 사실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는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었으니 말이다.지난번 산장에서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던 유월영이다.무릇 여자들이란 이성관계에서의 경쟁자나 자신을 그런 경쟁자로 간주하는 사람에겐 예민하고 민첩한 “레이더”를 가지고 있다. 그때 유월영은 벌써 서정희가 연재준에게 마음이 있다는걸 눈치채고 있었다.말 끝마다 연 선배, 연 선배 거리는것만 봐도 뻔했다.지금은 어딜가나 서정희를 데리고 다니는걸 보면 백유진이 또 차인건가, 아니면 연재준이 원래 그런 사람인걸까?전엔 유월영과 백유진이었는데 어느새 서정희와 백유진이 돼버렸다.유월영이 한숨을 푹 내쉰다. 몸상태가 안 좋아서인지 그녀의 두 눈은 촉촉해져 있었다.하 사모님이 서정희를 지그시 쳐다본다. 벌써 두번이나 연재준 곁에서 함께
유월영이 입술을 꽉 깨물고 베이비시터를 바라본다.“실례지만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베이비시터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버린다. 전혀 협조하고픈 생각이 없어보인다.유월영이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할머님이 저에게 독을 먹인 진범을 찾으시라고 할땐 당신 뿐만이 아니라 하씨 가문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도 된다는 뜻이세요. 협조 안 하겠다면 전 당신이 찔리는게 있다고 의심해 할머님께 그 사실을 알려드릴거고 그 뒤 할머님이 어떻게 처리하실진 저도 모르겠네요.”그 말은 베이비시터 뿐만 아닌 다른 하인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그들의 협조를 받아내려면 이 정도 과장은 아무것도 아니었다.확실히 효과가 있어보인다. 그 말에 베이비시터가 순식간에 표정을 싹 바꾸며 공손히 말한다.“저, 저는 조씨에요. 다들 절 조 아주머니라고 부르고요.”연재준은 2층으로 올라가던 길에 벌써부터 조사에 나선 유월영의 모습을 보고는 이내 다시 시선을 거뒀다.그리고는 이내 걸음을 우뚝 멈추는데.“먼저 방은 가지 말지.”길을 안내하던 하인도 덩달아 걸음을 멈춘다.“그럼......”“하부인 방은 어디지?”연재준은 이내 시선을 돌리더니 서정희에게 뭔가를 얘기한다.......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눈이 감기더니 의식을 잃었고 베이비시터에 의해 다시 정신을 차렸다.“저기요, 저기요, 여기서 자면 어떡해요.”잠든게 아니라 정신을 잃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이마를 짚어보니 역시나 열이 나기 시작한다.가쁜 숨을 한번씩 내쉴때마다 펄펄 끓는 용암같은 공기가 입 안을 감쌌지만 몸은 추위에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그 사실을 알리 없는 베이비시터는 연신 중얼거린다.“사모님이 겨우 하룻밤밖에 안 주셨는데 잠이 와요? 팔자려니 그냥 단념하겠다는거예요? 그럼 난 어떡하라고요? 나까지 물고 늘어지진 마요.”진범을 잡지 못한다면 누명을 덮어쓰는건 물론 직장도 잃게 될게 뻔했다.유월영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소파에 앉아있던 하부인은 유월영을 보자마자 불만스러움을 표출해낸다.이 바닥에서 벌써 오랜시간을 버텨온 유월영에게 그 정도 표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하부인님, 진범에 관한 단서를 알아냈으니 허락만 해주신다면......”“월영 씨, 먼저 말하지 말아봐요.”서정희가 냅다 유월영의 말을 끊어버린다. 어안이 벙벙한 유월영이다.서정희는 이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하부인에게 말한다.“정연 씨, 아이들 때문에 많이 힘든건 알겠지만 진범을 잡아야만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잖아요, 제 말이 맞죠?”어느덧 시간은 새벽 한 시를 훌쩍 넘어서 있었고 하부인은 눈가엔 실핏줄이 터진 채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허나 범인을 잡지 못하면 편히 쉬지 못할것 같다는 생각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하부인이다.유월영이 입을 열려는 순간 서정희가 또 한번 앞서 말을 꺼낸다.“연주 씨가 말해봐요.”“......”방금 거실에서까진 “연 사장님”이던것이 이젠 “재준 씨”가 돼버렸다.유월영이 그에게로 다가간다.여긴 안방에 아닌 서재였고 방 안엔 여자들 뿐이었는지라 연재준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에 기대 있었다.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각에 다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지만 유독 연재준만큼은 늘 그렇듯 또렷하고 단정해 보였다.장인의 손에서 탄생한 수제 양복은 그의 훤칠한 키와 어우러져 고급진 우아함을 뽐내는것이 더욱 가까이 다가갈수 없는 아우라를 풍겼다.연재준을 눈을 들자 유월영은 이내 눈을 내리깔았고 귀에는 그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온다.“독을 먹인 사람은 하부인과 연관된 사람일겁니다. 진작에 준비를 끝내고 연회날을 기다리다가 하씨 가문에서 바삐 움직이는 어수선한 틈을 타 범행을 저질렀죠.”유월영의 마음 속에 물결이 일렁인다.짜지도 않았지만 그는 유월영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허나 이상할것도 없었다, 이 일은 원체가 그리 분석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유월영이 생각할 만한걸 연재준이 어찌 모를수 있을까?뭐든 다 알고 다 가지고 싶어하는 연재준이었고 그저 하
유월영은 한숨을 내뱉고 다시금 하부인에게 진지하게 묻는다.“그렇다면 하 부인님께선 평소 원한관계에 있는 사람이 계신가요?”하부인이 이마를 감싸쥐고 고뇌에 빠진다.“지금은 머리속이 뒤죽박죽이라 기억이 안 나요 기억이......”유월영이 태블릿을 건네주며 말한다.“어젯밤 감시 카메라에 찍힌 손님들 전부를 캡쳐한 사진들입니다. 이 중에 아이들을 해하거나 부인님께 복수할 만한 누군가가 있을까요?”사진을 넘겨보던 하부인은 7,8번째 사진에서 갑자기 멈추더니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얘요! 얘예요!”태블릿 화면에 앳된 여자아이가 보인다.하부인이 이를 바득바득 갈더니 씩씩대며 말한다.“제 여동생인데 줄곧 제가 하씨 가문에 시집오는걸 질투했거든요. 혼자 엄마를 백 삼아 사랑을 독차지한다면서 볼때마다 시비를 걸었었는데 절대 좋은 마음으로 아이들 보러 갔을리가 없어요!”엄마를 백 삼는다? 그럼 두 자매는 한 엄마 배속에 태어난 친자매가 아니란 말인가?하지만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타깃만 정해졌다면 충분하다.“이런 사람은 겁만 제대로 주면 됩니다. 이미 증거를 확보했으니 인정하지 않으면 경찰에 넘길거다, 경찰에서 지문 같은 증거들만 채취하면 더는 도망갈데가 없다고 하면 될겁니다.”하부인이 태블릿을 꽉 움켜쥔다.“그건 나도 알아요. 우리 아이들을 위해 뭘 해야할지는 나도 안다고!”그렇다면 더이상 유월영은 할 일이 없다......사실은 전혀 상관없는 그녀에게 닥친 뜻밖의 시련이었으니.그러게 누가 지위가 낮으라고 했나.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한바탕 호되게 당해놓고도 할수 있는게 없는데.“사건의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으니 하 부인님이 내일 사모님께 잘 전달해 주십시오. 그럼 전 이만.”연재준이 묻는다.“지금 이 시간에 가겠다는거야?”유월영이 힘겹게 침을 넘기며 말한다.“내일 출근해야 돼서요. 여긴 회사랑 너무 멀거든요.”연재준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서정희가 또 앞서 그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말했다.“재준 씨, 기사라도 보내서 바래다 주게
별다른 해명이 없는 연재준이다.늘 그렇다, 그는 누군가에게 해명하는 법을 모른다.2층 난간을 붙잡고 있는 그의 시선은 활짝 열려있는 대문 뒤로 펼쳐진 칠흙같은 어둠을 바라보고 있다.이내 연재준은 고개를 틀어 서정희에게 말한다.“준비해둔 방으로 가서 쉬어.”“재준 씨는요?”딱히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는 그였지만 서정희는 그가 간섭받기 싫어한다는걸 잘 알고 있었는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제 말은 내일 아침에 사모님이 재준 씨 안 보이는거 알면 어디 갔냐고 물으실텐더 그땐 어쩌냐는거였어요.”“네가 알아서 해.”앞으로 두 발자국 내밀던 연재준이 다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하부인은 아직 상태가 많이 불안정하니 네가 잘 말씀드려. 사모님한테 유월영이 찾은 진범에 대해 잘 말씀드리라고.”유월영이 찾은 진범이라......유월영이 본인의 힘으로 찾아낸건 맞지만 방금 하부인 앞에서 사건에 대해 분석한건 분명 그였는데.허나 그는 특별히 강조하며 유월영이 찾은 진범이라고 콕 집어 말한다.“잘 말씀드릴게요.”연재준이 아래층으로 내려와 밖으로 나왔을때 유월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가 곁에 있던 하인에게 묻는다.“그 사람 택시타고 갔나?”“걸어가셨습니다. 여기는 택시가 잘 안 잡혀서요.”걸어서 갔다?이 늦은 밤에, 그것도 산길을 혼자 걸어 내려간다?연재준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바로 차에 올라탔다.아니나 다를까 100미터쯤 내려오니 비틀거리는 뒷모습이 보인다.그는 냅다 유월영의 옆으로 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추운 밤바람에 정신이 더 혼미해져 자동차 소리도 듣지 못한 유월영이 놀라서 펄쩍 뛴다.차창이 내려오고 연재준의 차가운 얼굴이 보인다.“타 빨리.”한사코 거절하는 유월영이다.“사장님한테 민폐끼치기 싫어요. 제가 알아서 택시타고 갈게요.”“여기서 택시가 잡혀?”그 말은 맞다. 택시는 커녕 위치 서비스도 되지 않는다.올라올때도 돈을 더 얹어줬으니 기사가 산길을 올라와준거지 가장 가까운 지점은 산 아래 뿐이었다.유월영은 차가운 밤
연재준이 쌀쌀맞은 눈빛으로 유월영을 쳐다본다.“네가 준다며?”유월영이 이를 꽉 악문다. 그러나 갑자기 풀악셀을 밟아 코너를 돌아버리는 바람에 유월영은 준비도 없이 차문에 부딪혔다가 다시 안전벨트에 의해 제자리로 돌아왔다.“......”아프진 않았지만 울화통이 치민 유월영이 실핏줄 터진 눈으로 남자를 노려본다.핸들을 쥔 연재준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가더니 이내 속도를 늦추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전엔 한 성깔하는거 왜 몰랐지? 이래도 안 된다 저래도 안 된다.”이런 말이 다른 사람 입에서 나온다면 진짜 “넌 방법이 없다”, “널 어떻게 하면 좋겠냐”, “넌 날 너무 무안하게 만들어”같은 애정표현의 일종으로 여길테지만 그는 연재준이다.그의 말에서 묻어나오는거라곤 짜증 뿐이었다.유월영은 그런 성격이다. 평소엔 조용하고 뭐든 다 억제할수 있는 사람이지만 일단 몸이 불편하기만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감정을 표출해낸다. 그 날 영안에서 몇끼를 굶었을때도 연재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다 반박을 했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랬다.유월영이 입꼬리를 스윽 올린다.“사장님도 재밌더라고요. 하 사모님이 따지고 드실때도 ‘어젯밤에 저랑 쭉 같이 있었고 그런 적 없었다’는 말 한 마디도 하기 싫으셨던걸 보면.”그런 사람이 “아가씨 도와드려야죠”라는 서정희의 말에 구구절절 입을 열다니.“지금은 또 친히 저 쫓아오셨는데 본인 행동에 괴리감이 들지도 않으세요?”“내가 그 말 안 해준것 때문에 내 탓으로 돌리는 거야?”가뜩이나 날카로운 연재준의 옆모습이 더욱 예리하고 차가워진다.“그럼 넌 왜 사모님이 물으실때 나랑 같이 있었다고 말 안 했어?”다른 사람은 다 거론해놓고 자기 이름만 쏙 빼놓고선 이제 와서 자기 탓을 한다니.“말해도 도와주지도 않을건데 뭐하러 힘을 빼요?”연재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진다.“뭐?”유월영이 간크게 또 한번 똑같은 말을 읊조린다.“제가 말해도 도와주지도 않았을거잖아요, 아니에요? 사장님은 신 교수님처럼 아무 이유없이 제 편을 들어줄
누가 누굴 건드려?자길 건드렸다고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다는건가? 그런 법도 또 자기 마음대로 정한거겠지?뭐든 지 마음대로면서!유월영은 울화통이 치민 나머지 말도 못하고 있는다. 연재준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쓱 닦아낸다. 사람 손 못 탄 야생 고양이마냥 입술을 냅다 물어버린다니.“잘 잡아, 또 부딪히고는 내 탓마냥 째려보지 말고.”유월영은 목구멍까지 솟구친 화를 겨우 누르고 자리에 앉아 손잡이를 꽉 잡았다.연재준은 이내 차에 시동을 걸었다.그는 집주소를 묻지 않았고 유월영 역시 말하지 않았다. 그가 알고 있다는걸 알았으니까.겨우 손바닥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나날들은 사실 전부 그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었다.드디어 차가 산 아래로 내려와 도로에 들어서자 연재준은 그제야 조수석에 앉은 유월영을 힐끔 쳐다본다.유월영은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눈을 찔끈 감고 연신 불안정한 호흡을 하고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잔뜩 찌푸린 미간은 어딘가 모르게 생각이 많아보인다.몇 번이고 곁눈질해 보던 연재준은 말 끝마다 신 교수님거리던 그녀의 말이 떠올라 다시 시선을 홱 돌려버린다.유월영은 절대 잠이 든게 아니었다. 추웠다 더웠다를 반복하는 이 느낌은 그 날 유람선에서 정신을 잃었을때와 똑같은 느낌을 줬다.아마 그동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안간힘을 쓰며 쉬지도 못하고 일한 탓이겠지.호텔에 도착하자 눈을 번쩍 뜬 유월영은 영혼없이 한 마디를 했다.“감사합니다 사장님.”극한에 다다랐다고 생각한 유월영은 어기적어기적 휴대폰을 꺼내 구급차를 부르려고 한다.연재준은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유월영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구급대에 주소를 말하며 정신을 판 사이 마주오는 사람과 부딪히고 마는 유월영이다.멀쩡한 사람이라면 잠시 비틀거리다 중심을 잡겠지만 중심이라는게 전혀 없었던 유월영은 그만 뒤로 넘어가고 만다.그래 뭐, 넘어가면 넘어가는거지. 어차피 구급차도 불렀는데......허나 예상했던 통증과는 달리 누군가에 의해 허리가 붙잡히는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