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훈은 아직도 연두색 치파오를 입고 유람선에 올랐던 그 날의 유월영을 기억하고 있었다.질끈 묶은 머리에 옥비녀를 하고 계단을 올라오는 모습은 마치 봄날의 강가에서 선들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잎같은 느낌을 줬다.문득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던게 그 날 유람선에서부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유월영이 무미건조하게 말한다.“윤 사장님 주문 잘못 넣으신것 같은데요.”윤영훈은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떠들어댄다.“치파오 진짜 잘 만드는 선생님 아는데 흰색으로 제작해서 보내줄게요. 혹시 사이즈가 어떻게 돼요? 아니면 주말에 직접 가서 치수 재고 제작해도 되고. 그게 훨씬 낫겠죠?”“......”윤영훈은 듣고 싶은것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연재준같이 난폭한 남자도 만나봤고 신연우같이 예의바른 남자도 만나봤지만 이런 막무가내인 사람은 윤영훈이 처음이다.더는 비위를 맞춰주지 못한 유월영이 한 마디 한다.“죄송해요 사장님, 화장실 다녀올게요.”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뜨는데.한참을 걸어 다시 뒤돌아 봤을때 윤영훈은 다른 이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제야 유월영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이내 몸을 돌리려는데 별안간 쟁반을 받쳐든 웨이터가 불과 몇미터를 사이두고 쏜살같이 그녀의 옆을 지나간다!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는 고연화다---행여 부딪히기라도 했으면 쟁반에 있던 술잔의 와인을 전부 유월영이 덮어썼을텐데. 그때 민감한 유월영의 뇌리에 뭔가가 번쩍 스친다. 설마 누군가 일부러?고개를 들어 웨이터를 바라보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누군가 갑자기 뒤에서 목에 맨 리본줄을 풀어버린다!유월영이 오늘 입은 드레스는 겨우 그 리본줄 하나에 의거해 버티고 있는 예복이었는데 별안간 리본줄이 느슨해지며 드레스가 아래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든다!다행히 반응속도가 빠른 유월영이었기에 재빨리 옷이 흘러내리는걸 막을수 있었고 이내 그녀는 몸을 홱 돌렸다.뒤에 있던건 다름아닌 임지연.임지연은 오버스럽게 입을
그 소리에 고개를 홱 돌리는 유월영이다.연재준이 차갑게 읊조린다.“난 유월영이랑 같이 온 것도 아니고 관계도 영......평범하긴 한데 이런 나도 나서서 도와주는거라 생각하진 않겠지.”“저......”평범한 관계긴 무슨! 유월영은 한때 연재준의 여자였거늘!윤영훈에겐 반박을 해도 연재준 앞에선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임지연이다.연재준이 윤영훈보다 신분이 더 높아서가 아니라 윤영훈은 그렇게 말해도 화 내지 않는다는걸 알지만 연재준은 달랐기 때문이었다.저 남자의 분위기는 이미 서있는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저......당신들 왜 나만 괴롭혀!”되려 적반하장으로 억울해하는 임지연이다.유월영이 입꼬리를 씰룩거린다.“잘못한 사람이 고자질이라니! 분명 네가 먼저 하 사모님 괴롭힌거잖아.”“무슨 헛소리야 그게! 내가 언제!”“오늘은 사모님 손자를 위한 연회야. 사모님이 좋은 음식에, 좋은 술 베푸시면서 초대하신건데 넌 무슨 한이 그리도 깊어서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 하필 분위기를 망쳐? 이게 괴롭히는게 아니면 뭔데?”윤영훈이 웃음을 참는다. 입씨름? 그건 유월영이 훨씬 센것 같다. 몇 마디로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드니.그저 망신만 주고 싶었던 임지연은 되려 본인이 망신을 당할 처지에 놓이자 안색이 어두워진다.“너......”“임 아가씨는 절대 일부러 그런게 아닐거야.”하 사모님의 목소리가 들리자 다들 짜기라도 한 듯 길을 터준다.환갑이 지난 연세에도 여전히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고 계시는 하 사모님은 그들에게 다가와 무덤덤하게 말씀하셨다.“그저 술에 취했을 뿐이지. 자, 어서 아가씨 모셔다 드려.”이게 어디 ‘모셔다 드리는’건가, 그냥 쫓아내시는거지!임지연은 스스로 망신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뒤를 지키고 있던 가문과 부모님의 얼굴에도 먹칠을 해버렸다.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거리는 임지연은 그제야 돌로 자기 발을 내리치는 느낌이 뭔지를 절실히 깨달은것 같다. 그러게 왜 유월영을 건드렸는지......“아가씨,
오늘의 연회는 하 씨 가문 집에서 열린 연회였고 별장 곳곳엔 조명이 반짝이고 있었다.밖에 있는 정원으로 나온 유월영과 신연우다. 신연우는 쌀쌀한 밤바람에 예복만 입은 유월영이 추울까 걱정이 된다.“이미 사모님이랑 인사도 나눴으니까 먼저 가도 돼요.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유월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좀만 더 있다가요. 아직 반도 안 됐잖아요.”지금 간다 한들 누구도 신경 쓸 사람은 없겠지만 유월영은 늘 누군가에게 발목 잡힐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흠집같은걸 남기지 않는 타입이었다.신연우는 유월영에게 덮어준 겉옷을 잘 여미어주더니 바람을 막아주기까지 했다.그는 파운데이션 밑에 가려진 유월영의 안색을 보더니 나지막이 물었다.“힘들어 보이네요. 일 때문에 쉬지도 못했죠?”“금방 입사해서 익숙하지 않아 그래요. 손에 익으면 훨씬 쉽겠죠.”유월영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이 정도 업무 강도라면 받아들일만 했다.“그래도 늘 신경써야죠. 둘째 형이랑 한약재 알려달라고 할게요. 우려마실 시간 없으면 마침 제가 방학이라 집에 있으니까 다려다가 회사로 가져도 줘도 되고요.”“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민폐를 끼치겠어요.”“제가 하고 싶어서 그런거니까 괜찮아요.”“교수님 마음만 잘 받을게요. 제가 덥석 받아버리면 너무 분수를 모르는것 같아서요.”어떤 관계여야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 말에 신연우가 말도 없이 유월영을 쳐다보지만 뭔가를 어필하고 있는것 같았다.유월영이 입술을 살짝 깨문다.연안에서 돌아와 지금까지 온라인을 빼고 다시 얼굴을 마주본건 오늘 밤이 처음이다.앞서 몇번이나 신연우가 식사 약속을 잡았지만 유월영은 늘 바쁘다고만 말하며 거절해왔다. 확실히 바쁜건 맞겠지만 그렇다고 밥 한끼 먹을 시간도 없다는건 말이 안 되지 않나.결국 유월영은 그를 피하고 있는거다.그가 숨기도 다른 모습 때문이 아니다. 그 날 차에서 연재준에게 반박할때 했던 말들은 전부 진심을 담은 말들이었다. 유월영은 신연우의 서로 다른 모습을 개의치 않는다, 필
허나 결국 연재준과 신연우 둘 다 유월영의 대답을 듣지 못한다.바로 그때 신연우의 휴대폰이 울리며 신연아에게서 연락이 왔으니 말이다.“오빠! 오빠 어디야? 나한테 좀 와 줘!”신연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는다.“연아야, 침착하게 말 좀 해봐. 무슨 일인데?”신연아는 겁에 질려 어버버거린다.“내, 내가 운전하다가 잠깐 휴대폰을 본 사이에 누가 길을 건너더라고......”“그래서?”“급히 핸들 꺾어서 피하긴 했는데 차가 가드레일 사이에 끼는 바람에 움직이질 못하고 있어. 오빠 나 어떡해, 무서워. 얼른 와서 나 좀 구해주라......”“다친 사람 없는걸 다행으로 여겨. 누가 너더러 운전대 잡을때 휴대폰 보래? 그러고도 울음이 나와? 큰 형이 너 다리 끊어버리게 만들줄 알아.”신연아가 울먹거린다.“그만 좀 욕하고 나 좀 구해줘......”“일단 차에서 내려서 안전한데 피해 있어. 위치 보내면 내가 얼른 갈테니까.”유월영은 대충 무슨 일인지를 눈치채고 그에게 말한다.“얼른 가 봐요. 아가씨 엄청 놀랐을텐데.”동생이 걱정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성큼성큼 걸어가던 그는 뭔가 생각났는지 이내 걸음을 멈추고는 다시 유월영에게로 다가와 말했다.“내일 점심 식사 대접할게요.”“내일 엄청 바빠서 시간 없어요.”“그럼 모레요.”“시간 되면 그때 다시 약속 잡아요.”신연우는 원하는 답변을 얻지 못해 못마땅해했지만 신연아 일때문에 상황이 급박했으니 어쩔수 없이 말했다.“그럼 그것부터 약속해요. 더이상 나 피하지 않겠다고, 네?”유월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네.”어렵게나마 답변을 얻어낸 신연우는 웃어보이더니 그제야 자리를 떴다.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 유월영은 시간을 확인하고 15분만 더 있다가 사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돌아가려고 한다. 이 정도면 무례를 범한건 아닐테니 말이다.그 순간 뭔가가 머리 위로 툭 떨어졌고 아하며 소리를 내는 유월영이다.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주워보니 핑크색 모란꽃 한 송이다.이내 고
유월영은 못 들은척 고개를 돌린다.“네?”보일러 때문에 따뜻한 방 안에서 연재준은 정장 겉옷을 벗고 흰 셔츠와 그레이 조끼만 입은 채 이따금씩 보이는 굴곡으로 섹시함을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대놓고 물어본 질문을 못 들을리가 없겠지만 연재준은 그런 유월영이 말을 섞고 싶어 하지 않은걸 알고는 웃으며 말했다.“아니야.”계속 쌍둥이를 들여다보는 유월영이다.그래, 별로 연재준의 말에 대꾸를 하고 싶지 않다.갑자기 그런 말은 왜 하는거지? 아이는 뜻밖의 유산이 아니었어도 연재준이 절대 낳게 못했을게 뻔하다. 그날 생리통 때문에 힘들어한것도 그는 유산 때문이라 오해하는걸 보면 답이 다 나온거 아닌가.그와 아이니 뭐니 하는 얘길 나누기도 싫었다. 이상하기도 하고 의미도 없으니까.유월영이 몸을 숙이고 쌍둥이들을 바라보려는 찰나 새근새근 잘 자고 있던 한 아이가 와하고 울음을 터뜨렸고 다른 아이도 덩달아 울음보를 터뜨리기 시작했다.자신이 그런줄로 알고 심장이 철렁하는 유월영이다.이때 연재준이 그녀의 손을 잡고 침대에서 멀리 떨어지게 한다.베이비시터가 다급히 다가와 아이를 안아주며 말한다.“왜 갑자기 울까요?”유월영이 입을 열려는 찰나 연재준이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쥔다. 이내 베이비시터가 말한다.“아이고, 응아했네. 우리 공주님, 왕자님은 늘 우는것도 따라서 울어. 죄송해요 두 분, 얼른 씻기고 올게요.”유월영이 고개를 끄덕인다.“네, 다녀오세요.”베이비시터와 하인이 아이들을 안고 욕실로 들어간다.그제야 한숨을 내쉬는 유월영이다. 손톱에 긁힌건줄 알았네.“너가 그런것도 아닌데 뭘 인정하기 급급해.”“인정하는게 아니라 아이들 울기 전 상황을 말씀드려서 왜 우는지 찾기 쉽도록 도와드리려는거죠.”“저 사람들 눈에는 그저 ‘해명’이나 ‘변명’하기엔 급급한 사람으로 보일뿐이야. 가만히 있다가 물어보면 그때 대답해도 늦지 않아.”다른 일이라면 가만히 있겠지만 어린 아이들이니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무서웠을 뿐이다.
뜨거운 손바닥의 온도를 무시할수 없었던 유월영은 몸에 힘을 빠짝 준다. 이내 그녀가 입을 열려는 찰나 연재준은 유월영을 놔주더니 이내 예의를 갖춰 한걸음 뒤로 물러서기까지 한다.마치 진짜 ‘신사’답게 잡아주기만 했을 뿐이라는걸 어필이라도 하듯이 말이다.유월영은 다급히 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더니 손을 내밀며 말했다.“옷 돌려줘요.”연재준이 자신의 팔에 끼고 있던 옷을 건네준다.유월영은 손을 도로 거두며 말한다.“심 교수님 옷 말이에요. 돌려드려야 된다고요.”연재준은 표정으로만 보면 당장이라도 그 옷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릴것 같았지만 어째서인지 잠시 뒤 다시 옷을 돌려준다.유월영은 갑자기 순순히 건네주는 연재준을 의아해하며 재빨리 옷을 받아쥔다.“남자가 무슨 향수야, 여자처럼.”신연우의 옷에서는 은은한 계피 향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허나 신연우에게 꽤나 잘 어울리는 향 같았고 연재준이 말한것 같이 이상해 보이지도 않았다. 유월영이 나지막이 중얼거린다.“이건 일종의 예의같은 거라고요.”연재준이 향수를 쓰지 않는다고 그게 비정상이라는게 아니라 갑자기 이유도 없이 누구를 공격한다는게 어이없었을 뿐이다.허나 오늘 밤, 그는 벌써 세 번이나 유월영에게 ‘양보’를 해줬다.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옷을 다시 어깨에 걸치지 않고 팔목에 올린 유월영의 모습에 얼굴이 핀 연재준이다.“전에 은혜한테 빌려준 옷, 은혜가 나더러 너한테 돌려주래.”유월영이 고개를 끄덕인다.“퀵으로 보내주시면 돼요.”“그래, 지금 주소 보내줘 봐.”연재준의 말에 멈칫하는 유월영이다. 딱히 지금 서안에서의 거처를 알려주고 싶진 않았다.“SK그룹으로 보내주세요.”“내가 너 어디 사는지 알까봐?”연재준이 피식 웃어보인다.“진짜 알고 싶었으면 굳이 너한테 물어봤을까?”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찾아낼수 있는 연재준이다.유월영이 눈을 내리깔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한다.“그런 뜻은 아니었어요.”“그럼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마침 가도 되
“사장님, 저흰 이미 끝난 관계예요. 제가 갑자기 가 버리는게 못마땅하신건 이해하지만 이젠 현실을 직시하셔야죠. 더는 저같이......너무 자서 싫증나버린 낡아빠진 신발엔 미련 갖지 마세요.”너무 자서 싫증나버린 낡아빠진 신발이라, 그건 연재준이 했던 말이다.연재준이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온다.가뜩이나 어두운 주차장인 탓에 그의 얼굴은 물론 감정변화조차도 보아내기가 어렵다.“말해, 계속 말해 봐. 또 뭔데, 내가 또 뭐라고 했었는데.”나열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다.“저 같은건 싫다, 어울리지도 않는다, 가정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다, 너무 지 마음대로다......”이미 들은 말들을 다시 한번 입 밖에 꺼내는것 만으로도 유월영은 심장이 도려내는듯이 저려왔다.세상에 어느 여자가 이런 모욕 섞인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수 있단 말인가.“사장님은 손만 까딱해도 원하는 여자 마음껏 골라 만나실수 있겠지만 전 이미 가족들 먹여 살리는것 만으로도 힘이 딸려요. 진짜 이젠 더는 못 하겠어요.”유월영은 고개를 숙인 채 연재준의 모습을 올려다 보지도, 자신의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지도 않았다.시간은 마치 그들 사이에서 멈춰버린듯 했고 바람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를 뿐이었다.마침내 연재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옷을 돌려주고는 쌩하고 가버렸다.유월영은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손을 들어 눈가를 닦아냈다.촉촉하게 젖은 손가락을 보며 어이가 없는지 웃는 유월영이다.뭘 또 진짜 울어버리고 이러냐......신세 한탄을 한건 연재준의 동정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겨우 얼마 남지 않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신을 놓아주기를 바랬던 것이다.산장에서도 느꼈지만 무뚝뚝한 연재준이 불쌍한 척하는 모습에 약하다는걸 발견했던 유월영이다.그러니까 백유진이 백전백승하는거다, 백유진은 늘 그런 “불쌍하고 가여워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택시를 예약한 유월영은 기다리는 사이 강소영에게 옷을 받았다는 메시지를 보낸다.몇 초도 안 지나 답장하는 강소영이다.
넋이 나가 문서를 열어보니 집주인은 다름 아닌 유월영 본인이다.위치 역시 SK그룹과 가까운 고급 아파트 단지였다.“......”머리가 재빨리 돌아가는 유월영이다. 일단 신연우는 제외다, 그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유월영에게 귀띔 한 번 없이 해버릴 사람이 아니다.그렇다면......유월영이 곧장 윤영훈에게 메시지를 보낸다.“윤 사장님, 오늘 회사로 저한테 뭐 보내셨어요?”전에 주구장창 꽃다발을 보내왔으니 그런 합리적인 의심을 해볼수 밖에 없었다.윤영훈은 업무가 바쁜지 한 시간 뒤에야 연락을 해온다.“유 비서 지금 나한테 꽃다발 보내라고 귀띔해 주는거예요? 유 비서 말 듣고 그 돈 아껴서 기부하려던 참인데.”유월영이 미간을 찌푸린다.“그러니까 오늘 저한테 아무것도 보내신 적 없다는 말씀이세요?”윤영훈은 손가락 사이에 펜을 끼고 흥미진진하게 돌리며 묻는다.“듣자 하니 발신인 불명의 택배를 받았나 보네요?”윤영훈이 그럴듯하게 말을 이어나간다.“다치지 말고 있어요. 내가 지금 갈 테니까. 혹시 폭탄이나 무기 같은거여서 우리 베이비 허니 다치면 안 되니까요.”이젠 익숙한 듯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내보내는 유월영이다.“사장님, 전 괜찮으니까 절대 오지 마세요. 업무 방해 안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린다.윤영훈은 입꼬리를 스윽 올리며 비서를 부른다.“조사하라는건 해봤어?”비서가 이내 서류 하나를 그에게 건네준다.윤영훈은 서류를 확인하더니 손가락으로 탁 튕기고는 차 키를 들고 밖을 나선다.“안 따라와도 돼.”......유월영은 아직도 집문서의 출처를 찾기에 여념이 없다.윤영훈도 아니면 이제 남은건......연재준 뿐이다.불가능에 가까운 가설이지만 지금으로썬 다른 후보가 없다.한참을 고민하던 유월영은 집문서 사진과 함께 물음표 하나를 전송한다.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을 해오는 연재준이다.“도대체 몇 사람 거쳐서 이제야 나인거 알아맞춘거야?”진짜로 연재준이었다니! 혼란스러운 유월영이다.“사장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
이승연은 속았다고 느꼈다.이 남자의 따뜻함에 넘어가 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기분 좋겠지? 드디어 내 유산을 손에 넣게 됐으니.”이혁재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유산, 유산, 유산. 왜 항상 이 얘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그는 복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배를 감싸안았다.“여보, 내가 돈이 부족해 보여? 난 돈이 부족하지 않아. 지금 있는 돈으로 다음 생까지 살아도 충분해. 그 많은 돈을 뒀다 뭐 하겠어? 난 당신 돈을 원하지 않아. 그 유산이 당신한테 주는 부담을 덜어주고 싶을 뿐이야. 난 그냥 당신을 돕고 싶어.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믿어줄 거야?”이승연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녀는 그런 시선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충성스러운 강아지를 다독이듯. 이혁재는 항상 그녀에게 충실한 강아지처럼 느껴졌다.그 후로 두 사람은 함께 평생을 보내기로 결심했고 아이가 태어나면 행복한 세 식구가 될 거라고 믿었다.그러나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법정에서 사고가 발생하며 아이를 잃었고 이승연은 깊은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처음 한 달 동안 이혁재는 살이 빠져 송장처럼 변해갔다. 그는 며칠씩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으며 잠조차 자지 않았다. 생존 본능에 이끌려 겨우 물 한 모금을 마시곤 했지만 결국 집에서 쓰러지고 말았다.공주연이 아들을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들은 그가 극심한 기아 상태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거의 굶어 죽을 뻔했다.이혁재가 깨어났을 때 공주연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뺨을 내리쳤다.“넌 네 엄마도 필요 없니? 네 아빠는 이미 날 버렸어. 세상에선 네가 전부야! 그런데 너마저 날 버리려 해?”하지만 이혁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공주연은 울면서 말했다.“승연이 아직 죽지 않았어! 곧 깨어날 거야. 그런데
이혁재의 시점사실, 두 사람의 불화와 이별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갈등이 발생했다.이혁재의 어머니인 공주연이 이승연에게 출산을 재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공주연은 겉으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승연의 유산을 노리고 있었다.그녀의 계산은 간단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씨 성을 가진 그 아이가 이승연의 유산을 당당히 상속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이혁재 역시 어머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아이에게 상속자가 생기면 이승연의 친척들도, 우리 가족도 유산에 대한 욕심을 접고 물러나겠지. 그러면 그녀의 부담도 줄어들 거야.”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이승연에게 가서 아이를 갖자고 제안했다.그러나 이 말을 들은 이승연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가 지금 따로 살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갖자고?”그리고 이내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결혼 전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여기에 사인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이승연은 이미 이혁재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그녀의 유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혁재는 말로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치사한 방법을 선택했다.그녀가 복용하는 피임약을 엽산제와 임신 보조제로 몰래 바꿔치기한 것이다. 결국 이승연은 그의 의도대로 임신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이승연은 약을 바꿔치기한 사실에 격분했고 심지어 이혁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반면, 이혁재는 호텔에서 이승연과 오성민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오성민과 다시 만나고 있다고 오해했다.그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크게 다퉜고 이혁재는 한강에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너 정말 적당히 좀 해라.”연재준이 기가 막혀 혀를 찼다.“뭘 적당히 하라고!”이혁재는 술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내 첫사랑은 이제 날 원하지 않는데, 내가 살아서 뭐 하겠어!”서지욱이 나서서 말렸다.“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그냥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필요한 걸 얻는 공정한 거래일 뿐이야. 누구도 누구에게 빚지지 않아. 하지만 네가 이 결혼이 억울하고 원하지 않는다면 난 다른 사람을 찾으면 돼. 상관없어.”이승연의 단호한 말에 이혁재는 심장이 벌집처럼 무너져 내렸다.하지만 그는 자신을 위로했다. 적어도 그녀가 애초에 다른 사람을 찾지 않고 자신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자신이 그녀의 눈에 들어올 만큼의 가치는 있었다고 믿으려 했다.이혁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물론 난 이 결혼을 원하지. 누나랑 결혼하고 싶어서 얼마나 애타는지 모를 거야. 게다가 누나 가문의 그 거대한 유산에 누가 눈독을 들이지 않겠어?”사실 이혁재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녀의 유산을 탐내는 사람들로부터 지켜줄 강력한 방패가 되어주겠다는 뜻이었다.그러나 그는 또다시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이승연은 “역시 너도 내 유산 때문에 결혼하려는 거구나”라는 뜻이 담긴 냉소적인 눈빛을 보냈다.그 눈빛을 마주한 이혁재는 차라리 땅속으로 숨고 싶었다. 그는 평소 말을 잘하는 사람인데 왜 이승연 앞에만 서면 이렇게 서툴러지는지 알 수 없었다.그는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더 나쁜 인상을 주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결국 두 사람은 서로 기분이 상한 채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다.그나마 유일한 희소식은, 이혁재가 열일곱 살 때부터 꿈꿔왔던 첫사랑과 결혼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혼례를 치렀고 첫날밤을 함께 보냈다.이승연의 시점이승연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나며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유산을 남겼다.그 유산은 주변 사람들을 질투와 광기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생전에 친절하고 따뜻했던 삼촌과 고모 같은 친척들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단 하룻밤 사이에 괴물로 변했다.그녀는 영화에서 좀비로 변하는 인간들을 떠올렸다.정상이던 사람들이 물리면 금세 인간성을 잃고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괴물로 변하는 것처럼 그녀의 친척들도 오로지 그녀의 유산을 탐하는 괴물이 되어버렸다.하지만 이승연은 변호사로서 법을 잘 알고 말재
이혁재의 시점이승연과 오성민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은 이혁재였다. 그래서 이승연이 자신의 청혼을 거절했을 때 그는 그녀가 아직도 오성민을 잊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화가 난 그는 집 안에서 폭주하기 시작했다.그는 첫사랑이란 게 원래 잊기 어렵고 학창 시절부터 이어진 감정에, 그리고 7년이라는 긴 시간을 하루아침에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성민이 완전한 쓰레기라는 것이었다.오성민은 자기 인턴과 바람을 피웠다. 이런 사람은 인간 이하의 짐승에 불과했고 이승연은 왜 그런 사람을 잊지 못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대체 그런 짐승만도 못한 놈보다 어디가 부족하다고!”분노에 찬 이혁재는 다음 날도 2만 보를 걸으며 화를 삭였다. 그러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 다시 한번 가보세요! 어제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승연이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룻밤 생각했으면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을 거예요.”그는 자신이 오성민보다 못할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 아들의 말대로 공주연은 다시 한번 이승연을 찾아갔고,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돌아와 말했다.“여전히 거절하더구나.”이혁재는 소파에 쓰러져 한쪽 다리와 팔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원한에 사로잡힌 시체처럼 어두운 기운이 그를 감쌌다.그러다 그는 벌떡 일어나 이승연을 직접 찾아갔다.“누나한테 직접 물어봐야겠어. 왜 나랑 결혼하지 않으려는지!”사무실에서 문서를 검토하던 이승연은 담담히 말했다.“너는 나보다 너무 어려.”“그게 이유라고?”그러자 이혁재는 불쑥 다가가 이승연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이승연은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붙잡으며 외쳤다.“지금 뭐 하는 거야!”이혁재는 그녀를 안고 빙글빙글 돌며 깡충깡충 뛰었다.“너 미쳤어? 빨리 내려놔!”이승연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며 말했다.“내가 단지 누나보다 나이가 어린 것뿐이지. 다른 모든 면에서는 누나 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