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이 나가 문서를 열어보니 집주인은 다름 아닌 유월영 본인이다.위치 역시 SK그룹과 가까운 고급 아파트 단지였다.“......”머리가 재빨리 돌아가는 유월영이다. 일단 신연우는 제외다, 그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유월영에게 귀띔 한 번 없이 해버릴 사람이 아니다.그렇다면......유월영이 곧장 윤영훈에게 메시지를 보낸다.“윤 사장님, 오늘 회사로 저한테 뭐 보내셨어요?”전에 주구장창 꽃다발을 보내왔으니 그런 합리적인 의심을 해볼수 밖에 없었다.윤영훈은 업무가 바쁜지 한 시간 뒤에야 연락을 해온다.“유 비서 지금 나한테 꽃다발 보내라고 귀띔해 주는거예요? 유 비서 말 듣고 그 돈 아껴서 기부하려던 참인데.”유월영이 미간을 찌푸린다.“그러니까 오늘 저한테 아무것도 보내신 적 없다는 말씀이세요?”윤영훈은 손가락 사이에 펜을 끼고 흥미진진하게 돌리며 묻는다.“듣자 하니 발신인 불명의 택배를 받았나 보네요?”윤영훈이 그럴듯하게 말을 이어나간다.“다치지 말고 있어요. 내가 지금 갈 테니까. 혹시 폭탄이나 무기 같은거여서 우리 베이비 허니 다치면 안 되니까요.”이젠 익숙한 듯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내보내는 유월영이다.“사장님, 전 괜찮으니까 절대 오지 마세요. 업무 방해 안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린다.윤영훈은 입꼬리를 스윽 올리며 비서를 부른다.“조사하라는건 해봤어?”비서가 이내 서류 하나를 그에게 건네준다.윤영훈은 서류를 확인하더니 손가락으로 탁 튕기고는 차 키를 들고 밖을 나선다.“안 따라와도 돼.”......유월영은 아직도 집문서의 출처를 찾기에 여념이 없다.윤영훈도 아니면 이제 남은건......연재준 뿐이다.불가능에 가까운 가설이지만 지금으로썬 다른 후보가 없다.한참을 고민하던 유월영은 집문서 사진과 함께 물음표 하나를 전송한다.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을 해오는 연재준이다.“도대체 몇 사람 거쳐서 이제야 나인거 알아맞춘거야?”진짜로 연재준이었다니! 혼란스러운 유월영이다.“사장
이게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집 사주는건 보상이라 쳐도 꽃다발이 뭘 보상할수 있는거지?카드를 들여다보는 유월영이다. “연”이라고 인쇄한 듯한 글자 밑은 그의 필체로 보이는 듯한 유월영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수도 없이 많은 계약서 사인을 봐온 비서였던 유월영이 그걸 모를리가 없다. 그의 필체는 물 흐르듯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필체였으니 말이다.연재준은 진심으로 좋아했던 그때는 그가 뭘 하든 우러러보며 이따금씩 종이 위에 필체를 본 따 이름을 그의 이름을 끄적이곤 했다......한 획 한 획 어찌나 정성들여 써내려갔던지.한 번은 연재준에게 들켜 그가 흥미진진하게 눈썹을 치켜들며 놀리는 듯한 눈빛을 보내자 너무 창피한 나머지 귀가 터질듯이 빨개지며 고개를 못 들었던 유월영이다.“.......”지금쯤이라면 무감각해지는게 맞겠는데 왜 그 생각에 또 유월영은 마음 속 깊은 어딘가가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파나는걸까.유월영은 카드를 다시 꽃다발에 꽂아넣고는 회사 앞 쓰레기통으로 와 무덤덤하게 던져버렸다.윤영훈 덕분인지 이젠 버리는것도 전혀 개의치 않는 유월영이다.버리자마자 등 뒤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온다.깜짝 놀라 뒤 돌아보니 윤영훈이 입꼬리를 스윽 올리며 걸어온다.“매번 어떤 표정으로 버린건지 이제야 알겠네요.”“......”유월영은 순식간에 업무모드로 변해서는 정중하게 말한다.“윤 사장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무슨 일이라도 날까 봐 와보겠다고 했잖아요?윤영훈이 쓰레기통에 처참히 버려진 꽃다발을 힐끗 쳐다본다.“발신인 불명인 물건이라는게 이 꽃다발이에요?”유월영은 대답은 하지 않은 채 화제를 돌려버린다.“그럼 저 괜찮은거 보셨으니 업무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업무는 다 봤고 유일한 임무라면 여자친구 따라다니는거죠.”음흉하게 웃어보이는 윤영훈이다.유월영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시치미를 뚝 뗀다.“전 업무가 남아서요.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윤영훈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그때까지 기다릴게요.”유월영은 한 치
하정은이 겨우 한숨을 돌리는 찰나 1번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신경세포가 순식간에 조여진 하정은이다.“사장님! 지시사항 말씀하시죠!”“표 끊어, 서안 갈거니까.”“......네.”금방 서안에서 돌아오지 않으셨나?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무실에서 걸어나오는 연재준의 뒤를 급히 따라가는 하정은이다.“서안 지사 점검하러 갈거니까 스케줄 잡아둬.”“네.”머리를 재빨리 굴려 사장님이 서안에서 며칠간은 머무르실거라는 결론을 내온다.“얼른 스케줄 마련하겠습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연재준과 마주친 서정희가 미소를 머금고 말한다.“사장님, 어디 나가시게요? 10분만 시간 내주시면 안 될까요? 업무 보고 드릴게 있어서요.”......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헛생각들을 뒤로 하고 업무에만 몰입하다 보니 어느새 퇴근시간이 됐다.유월영은 매니저와 함께 얘기를 나누며 로비로 내려온다.매니저의 저녁 인사 요청에 승낙하려 했지만 이내 로비 접대구역에 앉아있는 윤영훈을 보고는 멈칫하고 마는 유월영이다.매니저도 윤영훈을 발견한다.“엥? 윤 사장님? 왜 안 올라오셨을까요?”유월영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침착하게 대답한다.“저녁 식사는 나중에요.”매니저는 뭔가 눈치챈 듯 웃어보인다.“윤 사장님은 비서님 퇴근하시길 기다리신거네요?”요즘 거의 매일 꽃다발을 받는 유월영이 준 사람이 누군질 말하지 않는다 해도 그게 어디 숨겨질 일인가?윤영훈이 유월영을 좋아한다는건 모두가 아닌 비밀같은거랄까.매니저는 부러움에 곁에서 유월영을 부추기며 말했다.“윤 사장님 잘 생기셨지, 돈도 많으시지, 저렇게 열심히신걸 보면 진심이실것 같은데 얼른 받아줘요!”“전 윤 사장님이랑 아무 관계도 아니니까 얼른 퇴근이나 해요.”이내 몸을 돌려 자리를 뜨던 매니저는 눈을 희번득인다.아닌 척 하긴! 저런 대단한 사람이 좋아해주니까 떠받들리는 느낌에 도취돼서는 일부러 사람 안달나게 만드는거면서!그러다 놓쳐버리면 어쩔건데!유월영이 윤영훈에게로 다가간다.윤영훈은 깔끔한 정장 위에
윤영훈이 손을 들어올리자 바이올린 연주가 멈췄고 이내 그 곳엔 정적만이 맴돌았다.“욱이는 주명진 사람이에요.”욱이란 바로 유월영 아버지의 다리를 골절시킨 감옥동기였다.간신히 정신을 차린 유월영이 묻는다.“사장님이 욱이를 어떻게 아세요?”“욱이가 주명진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는 눈치네요?”윤영훈은 예리한 촉으로 유월영의 관심 포인트가 어긋났음을 눈치챘다. 이 사실에 대해 몰랐다면 가장 먼저 욱이가 누구냐고 물어봤겠지.딱히 반박하지 않는 유월영이다. 확실히 진작에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당시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유월영이 이승연에게 자신의 추측을 말하니 이승연이 그녀를 도와 교도관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욱이가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나누던 친한 감옥동기가 교도관에게 욱이를 팔며 주명진이 그더러 유월영 아버지의 다리를 다치게 만들었다 했다고 고자질을 했던것이다.“신연우가 주명진 다리를 부러뜨리니 그 앙금을 감히 신연우나 연 사장한테 풀지 못한 주명진이 유 비서를 타겟으로 삼은거예요. 그래도 따지고 보면 신연우가 장본인이죠. 신연우가 유 비서 다치게 한 거랑 마찬가지예요.”유월영은 복잡한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손가락을 꽉 움켜쥔다.이때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든 유월영은 불과 몇미터 밖에 있는 신연우를 보게 된다.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이다.윤영훈은 그가 올걸 알기라도 한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음식도 안 나왔으니 화장실 다녀올게요.”그렇게 그는 유월영과 신연우를 위해 자리를 내줬다.유월영은 멍하니 앉아 다가오는 신연우를 바라본다.여전히 어깨까지 내려오는 안경줄이 달린 금테 안경을 쓴 그는 처음 보던 그 날처럼 지적이고 우아해보였다.유월영은 “심교수님도 식사하러 오셨어요?”같은 형식적인 말 대신 입을 열었다.“.......윤 사장님이 연락하셨어요?”신연우가 자리에 앉으며 말한다.“미안해요.”주명진이 유월영의 아버지에게 보복했다는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신연우다.허나 유월영은 욱이가 주명진
서울에 있는 대학교라......국내 1,2위를 다투는 신주대학에서 이직을 택하는걸 보면 그곳이 훨씬 더 좋겠지.유월영이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건넨다.“탄탄대로만 걸으시실 바래요.”“언제든지 필요하면 나 찾아도 돼요.”신연우가 나긋하게 말한다.“내가 말했죠, 월영 씨 도와주겠다고 한 약속은 유효기간 같은건 없다고요.”“네, 기억하고 있어요.”허나 이건 전혀 그들의 진심이 아니었다.유월영같이 무슨 일이든 혼자 꿋꿋이 해결하려는 사람이, 그가 곁에 있을때도 도움 받기를 꺼려하는 사람이 어찌 멀리 서울로 가는 그에게 도움을 청할수 있단 말인가?신연우는 이내 자리를 떴다.그가 가자마자 윤영훈이 돌아왔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여기 비아그라 먹어봐요. 본연의 맛을 그대로 잘 살렸어.”입맛이 뚝 떨어진 유월영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묻는다.“사장님, 이런 자리 마련하신 의도가 뭐죠?”“신연우가 아버지 다리를 부러뜨린 간접적인 원흉”이라는 사실은 그 둘로 하여금 결국 이런 국면을 맞이하게 했다.윤영훈이 숨김없이 쿨하게 인정한다.“내 적이니까 빨리 쫓아내야 유 비서 독차지하죠.”유월영은 술 한 모금을 꿀꺽 삼키더니 말했다.“신 교수님 쫓아내신다 해도 전 사장님 안 좋아해요.”“괜찮아요, 난 낯 두꺼워서 나 안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니까.”“......”윤영훈이 손가락을 탁 튕기니 또다시 빠른 절주의 바이올린 연주가 울려퍼진다.머릿 속이 윙 울리는 유월영이다.하필 그 때 윤영훈이 또 입을 연다.“주명진 뒷조사하다가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는데 유 비서네 가족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빚더미 안은적 있었죠?”유월영이 고개를 번쩍 든다.“그 일의 장본인 역시 주명진이에요. 허나 그건 주명진 역시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거고요.”“누구 지시요?”윤영훈이 어깨를 으쓱거린다.“주명진이 도망가는 바람에 그건 못 알아냈어요.”“......”눈이 빠르게 굴러가는 유월영이다.아빠가 당시 사채업자의 부하인 욱이를 알아봤을때부터 주명진과
가뜩이나 정신이 흐리멍텅하던 유월영은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더욱 머리가 어지러워났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응가 때문에 울었던것 아닌가? 누가 금방 한달을 넘긴 어린 아이들에게 독을 먹인단 말인가?게다가 어제 아이들 방엔 연재준이 먼저 가 있었는데.더이상 지체할 시간도 없고 구체적인 상황을 잘 몰랐던 유월영이기에 재빨리 택시를 타고 하씨 가문 별자으로 향했다.유월영이 이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신현우가 먼저 그녀를 처리할거다.차에서 내리는 순간, 서늘한 바람에 등골이 오싹해나는 유월영이다.옷을 잔뜩 껴입었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고 유월영은 이를 꽉 악물고 안으로 들어갔다.별장을 감싼 환한 조명 아래, 유월영이 하인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려니 마침 베이비시터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저 아가씨예요! 어젯밤에 잔뜩 쫄아있었잖아요, 언니도 봤죠?”그 말에 상대가 고개를 끄덕인다.쌍둥이 아이들의 어머니인 하씨 부인이 간신히 화를 억누르며 말한다.“엄마, 저 유 아가씨란 사람 대체 어떤 사람이에요?”하씨 사모님이 말하신다.“SK그룹 비서야. 어젯밤엔 임씨 가문 그 애송이한테 하마터면 공개망신 당할 뻔했지.”하씨 부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소리친다.“듣자 하니 일부러 그런거겠네요! 절대 곱게 안 놔줘요 저!”“.......”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거실로 들어가던 유월영이 발걸음을 우뚝 멈춘다.연재준이 있을거라곤 상상도 못했다!신주로 돌아갔었을텐데?게다가 곁에 서정희까지 있는걸 보면 둘이 같이 여기로 온게 뻔했다.어젯밤에 아이들 방에서 같이 있었던 연재준은 누구보다 사실을 잘 알고 있을텐데 베이비시터가 유월영의 탓으로 돌릴때까지 말 한 마디없이 수수방관하고 있었다니.“......”역시 괜히 연재준이 아니다. 보상이랍시고 주는건 한 순간의 양심의 가책때문이었지쌀쌀맞게 대하는 이 모습이 그의 본성이었다.진작에 그에겐 기대를 품고 있지 않았지만 가뜩이나 야밤에 먼길을 달려온것 때문에 불편했는데 그 모습을 보니 속도 배배 꼬
다시 봤을때 그는 또다시 꿈쩍도 하지 않은채 앉아있었다. 하 사모님이 따끔히 혼을 내신다.“어떻게 된 일인지도 모르면서 손부터 올라가!”하부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엉망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은 실핏줄이 가득 터진것이 딱 봐도 밤을 꼬박 지새운것 같았다.“정확히 물어보기부터 해야지. 그 다음 일은 내가 알아서 해.”이 말은 하부인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유월영을 향한 경고이기도 했다.서정희가 몸을 일으켜 하부인의 어깨를 감싸주며 말했다.“하 부인님, 너무 급해마세요. 아가씨도 오셨으니까 일단 자세히 물어보셔요. 진짜 아가씨가 그런 일이라면 사장님도 가만 있진 않으실거예요.”어떻게 가만 있질 않겠다는건지 문득 궁금해난 유월영이다.하부인이 삿대질을 하며 씩씩거린다.“그래요, 일단 묻기라도 하죠. 저희 가문은 아가씨에게 그 어떤 원한도, 앙금도 없는데 아가씨는 왜 저희 아이들에게 그런 짓을 한 거죠?!”“불만이 있거든 나한테 따지러 와야지. 겨우 한달배기 아이들한테 어떻게!”유월영이 침착하게 대답한다.“하 부인님 말씀대로 저흰 앙금도, 원한도 없는데 제가 무슨 이유로 한달배기 아이들을 해하려 할까요? 그 일은 제가 한게 아닙니다. 게다가 어젯밤 방엔 저 뿐만이 아니라 베이비시터, 하인, 보디가드들까지 전부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제가 그런 짓을 했다면 과연 누구 하나 눈치채지 못했을까요?”유월영은 지금 증인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다.베이비시터, 하인, 보디가드.......그리고?연재준이 입술을 꽉 깨물고 유월영을 빤히 쳐다본다.충분히 해명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하부인은 여전히 울그락 불그락 하는 얼굴로 유월영을 노려보고 있었다.따가운 시선에 정신이 혼미해나는 유월영이다.베이비시터가 다급히 말한다.“근데 침대 옆에서 작은 아가씨 얼굴 만질때 그 각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베이비시터를 홱 돌아보려고 하자 갑자기 어지럼증이 도진 유월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눈꺼풀이 데일 정도로 뜨겁다.엎친 데 덮친 격이
무릎을 꿇으라니!유월영이 고개를 번쩍 든다.저 말은 하부인이 홧김에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일까, 아니면 진심인걸까?순간 거실엔 차가운 정적이 감돈다. 유독 하부인의 이글거리는 눈빛만이 유월영을 압박하고 있는것만 같았다.하이힐은 나른하고 푹신한 카펫위에서 가뜩이나 중심을 잡기 힘든데다 몸상태도 말이 아니니 불편하기 그지없는 유월영이다.입술을 꽉 깨물고 입을 열려는 순간 1인소파 쪽에서 탁하고 컵과 유리 테이블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날카로운 소리는 마치 검을 빼드는 소리와도 흡사했다.연재준 방향에서 나는 소리임을 직감하고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서정희가 먼저 입을 연다.“하 부인님, 일단 진정하시고 이 일은......연 사장님, 얼른 아가씨 도와서 말 좀 해주세요.”“하 사모님, 사건경위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무릎부터 꿇리는게 하씨 가문 규칙입니까?”드디어 연재준이 나섰다.허나 그건 서정희에게 등 떠밀려 나선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유월영이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 와중에까지 연재준에게 기대를 품고 있었던 자신이 한심했으니 말이다.“그건 아니지, 진실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어찌 아가씨를 능욕하겠니.”하 사모님이 그제야 나긋한 말투로 하부인에게 “일침”을 날린다.“정아, 홧김에 그런 소리 하는걸 보니 많이 피곤한 모양이구나. 얼른 올라가서 쉬어, 이 일은 내가 잘 처리할테니.”그리고는 이내 유월영에게 말한다.“아가씨, 앉아서 얘기하시죠.”“감사합니다, 하 사모님.”오래도록 같은 자세로 서있어서인지 유월영은 힘이 풀린 다리를 이끌고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겨우 두걸음도 채 걷지 못하고 엎어지려는걸 간신히 소파로 팔을 뻗어 막아내는 유월영이다.동시에 그런 유월영을 붙잡은건 다름 아닌 연재준의 손이다.유월영과 가장 가까이 있던 소파가 바로 연재준이 앉아있던 1인소파 옆이었으니 말이다.유월영은 무슨 닿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것마냥 재빨리 손을 빼냈고 그 모습에 연재준의 얼굴도 덩달아 차가워진다.하 사모님을 바라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