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은이 겨우 한숨을 돌리는 찰나 1번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신경세포가 순식간에 조여진 하정은이다.“사장님! 지시사항 말씀하시죠!”“표 끊어, 서안 갈거니까.”“......네.”금방 서안에서 돌아오지 않으셨나?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무실에서 걸어나오는 연재준의 뒤를 급히 따라가는 하정은이다.“서안 지사 점검하러 갈거니까 스케줄 잡아둬.”“네.”머리를 재빨리 굴려 사장님이 서안에서 며칠간은 머무르실거라는 결론을 내온다.“얼른 스케줄 마련하겠습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연재준과 마주친 서정희가 미소를 머금고 말한다.“사장님, 어디 나가시게요? 10분만 시간 내주시면 안 될까요? 업무 보고 드릴게 있어서요.”......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헛생각들을 뒤로 하고 업무에만 몰입하다 보니 어느새 퇴근시간이 됐다.유월영은 매니저와 함께 얘기를 나누며 로비로 내려온다.매니저의 저녁 인사 요청에 승낙하려 했지만 이내 로비 접대구역에 앉아있는 윤영훈을 보고는 멈칫하고 마는 유월영이다.매니저도 윤영훈을 발견한다.“엥? 윤 사장님? 왜 안 올라오셨을까요?”유월영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침착하게 대답한다.“저녁 식사는 나중에요.”매니저는 뭔가 눈치챈 듯 웃어보인다.“윤 사장님은 비서님 퇴근하시길 기다리신거네요?”요즘 거의 매일 꽃다발을 받는 유월영이 준 사람이 누군질 말하지 않는다 해도 그게 어디 숨겨질 일인가?윤영훈이 유월영을 좋아한다는건 모두가 아닌 비밀같은거랄까.매니저는 부러움에 곁에서 유월영을 부추기며 말했다.“윤 사장님 잘 생기셨지, 돈도 많으시지, 저렇게 열심히신걸 보면 진심이실것 같은데 얼른 받아줘요!”“전 윤 사장님이랑 아무 관계도 아니니까 얼른 퇴근이나 해요.”이내 몸을 돌려 자리를 뜨던 매니저는 눈을 희번득인다.아닌 척 하긴! 저런 대단한 사람이 좋아해주니까 떠받들리는 느낌에 도취돼서는 일부러 사람 안달나게 만드는거면서!그러다 놓쳐버리면 어쩔건데!유월영이 윤영훈에게로 다가간다.윤영훈은 깔끔한 정장 위에
윤영훈이 손을 들어올리자 바이올린 연주가 멈췄고 이내 그 곳엔 정적만이 맴돌았다.“욱이는 주명진 사람이에요.”욱이란 바로 유월영 아버지의 다리를 골절시킨 감옥동기였다.간신히 정신을 차린 유월영이 묻는다.“사장님이 욱이를 어떻게 아세요?”“욱이가 주명진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는 눈치네요?”윤영훈은 예리한 촉으로 유월영의 관심 포인트가 어긋났음을 눈치챘다. 이 사실에 대해 몰랐다면 가장 먼저 욱이가 누구냐고 물어봤겠지.딱히 반박하지 않는 유월영이다. 확실히 진작에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당시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유월영이 이승연에게 자신의 추측을 말하니 이승연이 그녀를 도와 교도관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욱이가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나누던 친한 감옥동기가 교도관에게 욱이를 팔며 주명진이 그더러 유월영 아버지의 다리를 다치게 만들었다 했다고 고자질을 했던것이다.“신연우가 주명진 다리를 부러뜨리니 그 앙금을 감히 신연우나 연 사장한테 풀지 못한 주명진이 유 비서를 타겟으로 삼은거예요. 그래도 따지고 보면 신연우가 장본인이죠. 신연우가 유 비서 다치게 한 거랑 마찬가지예요.”유월영은 복잡한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손가락을 꽉 움켜쥔다.이때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든 유월영은 불과 몇미터 밖에 있는 신연우를 보게 된다.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이다.윤영훈은 그가 올걸 알기라도 한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음식도 안 나왔으니 화장실 다녀올게요.”그렇게 그는 유월영과 신연우를 위해 자리를 내줬다.유월영은 멍하니 앉아 다가오는 신연우를 바라본다.여전히 어깨까지 내려오는 안경줄이 달린 금테 안경을 쓴 그는 처음 보던 그 날처럼 지적이고 우아해보였다.유월영은 “심교수님도 식사하러 오셨어요?”같은 형식적인 말 대신 입을 열었다.“.......윤 사장님이 연락하셨어요?”신연우가 자리에 앉으며 말한다.“미안해요.”주명진이 유월영의 아버지에게 보복했다는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신연우다.허나 유월영은 욱이가 주명진
서울에 있는 대학교라......국내 1,2위를 다투는 신주대학에서 이직을 택하는걸 보면 그곳이 훨씬 더 좋겠지.유월영이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건넨다.“탄탄대로만 걸으시실 바래요.”“언제든지 필요하면 나 찾아도 돼요.”신연우가 나긋하게 말한다.“내가 말했죠, 월영 씨 도와주겠다고 한 약속은 유효기간 같은건 없다고요.”“네, 기억하고 있어요.”허나 이건 전혀 그들의 진심이 아니었다.유월영같이 무슨 일이든 혼자 꿋꿋이 해결하려는 사람이, 그가 곁에 있을때도 도움 받기를 꺼려하는 사람이 어찌 멀리 서울로 가는 그에게 도움을 청할수 있단 말인가?신연우는 이내 자리를 떴다.그가 가자마자 윤영훈이 돌아왔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여기 비아그라 먹어봐요. 본연의 맛을 그대로 잘 살렸어.”입맛이 뚝 떨어진 유월영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묻는다.“사장님, 이런 자리 마련하신 의도가 뭐죠?”“신연우가 아버지 다리를 부러뜨린 간접적인 원흉”이라는 사실은 그 둘로 하여금 결국 이런 국면을 맞이하게 했다.윤영훈이 숨김없이 쿨하게 인정한다.“내 적이니까 빨리 쫓아내야 유 비서 독차지하죠.”유월영은 술 한 모금을 꿀꺽 삼키더니 말했다.“신 교수님 쫓아내신다 해도 전 사장님 안 좋아해요.”“괜찮아요, 난 낯 두꺼워서 나 안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니까.”“......”윤영훈이 손가락을 탁 튕기니 또다시 빠른 절주의 바이올린 연주가 울려퍼진다.머릿 속이 윙 울리는 유월영이다.하필 그 때 윤영훈이 또 입을 연다.“주명진 뒷조사하다가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는데 유 비서네 가족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빚더미 안은적 있었죠?”유월영이 고개를 번쩍 든다.“그 일의 장본인 역시 주명진이에요. 허나 그건 주명진 역시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거고요.”“누구 지시요?”윤영훈이 어깨를 으쓱거린다.“주명진이 도망가는 바람에 그건 못 알아냈어요.”“......”눈이 빠르게 굴러가는 유월영이다.아빠가 당시 사채업자의 부하인 욱이를 알아봤을때부터 주명진과
가뜩이나 정신이 흐리멍텅하던 유월영은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더욱 머리가 어지러워났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응가 때문에 울었던것 아닌가? 누가 금방 한달을 넘긴 어린 아이들에게 독을 먹인단 말인가?게다가 어제 아이들 방엔 연재준이 먼저 가 있었는데.더이상 지체할 시간도 없고 구체적인 상황을 잘 몰랐던 유월영이기에 재빨리 택시를 타고 하씨 가문 별자으로 향했다.유월영이 이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신현우가 먼저 그녀를 처리할거다.차에서 내리는 순간, 서늘한 바람에 등골이 오싹해나는 유월영이다.옷을 잔뜩 껴입었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고 유월영은 이를 꽉 악물고 안으로 들어갔다.별장을 감싼 환한 조명 아래, 유월영이 하인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려니 마침 베이비시터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저 아가씨예요! 어젯밤에 잔뜩 쫄아있었잖아요, 언니도 봤죠?”그 말에 상대가 고개를 끄덕인다.쌍둥이 아이들의 어머니인 하씨 부인이 간신히 화를 억누르며 말한다.“엄마, 저 유 아가씨란 사람 대체 어떤 사람이에요?”하씨 사모님이 말하신다.“SK그룹 비서야. 어젯밤엔 임씨 가문 그 애송이한테 하마터면 공개망신 당할 뻔했지.”하씨 부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소리친다.“듣자 하니 일부러 그런거겠네요! 절대 곱게 안 놔줘요 저!”“.......”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거실로 들어가던 유월영이 발걸음을 우뚝 멈춘다.연재준이 있을거라곤 상상도 못했다!신주로 돌아갔었을텐데?게다가 곁에 서정희까지 있는걸 보면 둘이 같이 여기로 온게 뻔했다.어젯밤에 아이들 방에서 같이 있었던 연재준은 누구보다 사실을 잘 알고 있을텐데 베이비시터가 유월영의 탓으로 돌릴때까지 말 한 마디없이 수수방관하고 있었다니.“......”역시 괜히 연재준이 아니다. 보상이랍시고 주는건 한 순간의 양심의 가책때문이었지쌀쌀맞게 대하는 이 모습이 그의 본성이었다.진작에 그에겐 기대를 품고 있지 않았지만 가뜩이나 야밤에 먼길을 달려온것 때문에 불편했는데 그 모습을 보니 속도 배배 꼬
다시 봤을때 그는 또다시 꿈쩍도 하지 않은채 앉아있었다. 하 사모님이 따끔히 혼을 내신다.“어떻게 된 일인지도 모르면서 손부터 올라가!”하부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엉망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은 실핏줄이 가득 터진것이 딱 봐도 밤을 꼬박 지새운것 같았다.“정확히 물어보기부터 해야지. 그 다음 일은 내가 알아서 해.”이 말은 하부인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유월영을 향한 경고이기도 했다.서정희가 몸을 일으켜 하부인의 어깨를 감싸주며 말했다.“하 부인님, 너무 급해마세요. 아가씨도 오셨으니까 일단 자세히 물어보셔요. 진짜 아가씨가 그런 일이라면 사장님도 가만 있진 않으실거예요.”어떻게 가만 있질 않겠다는건지 문득 궁금해난 유월영이다.하부인이 삿대질을 하며 씩씩거린다.“그래요, 일단 묻기라도 하죠. 저희 가문은 아가씨에게 그 어떤 원한도, 앙금도 없는데 아가씨는 왜 저희 아이들에게 그런 짓을 한 거죠?!”“불만이 있거든 나한테 따지러 와야지. 겨우 한달배기 아이들한테 어떻게!”유월영이 침착하게 대답한다.“하 부인님 말씀대로 저흰 앙금도, 원한도 없는데 제가 무슨 이유로 한달배기 아이들을 해하려 할까요? 그 일은 제가 한게 아닙니다. 게다가 어젯밤 방엔 저 뿐만이 아니라 베이비시터, 하인, 보디가드들까지 전부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제가 그런 짓을 했다면 과연 누구 하나 눈치채지 못했을까요?”유월영은 지금 증인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다.베이비시터, 하인, 보디가드.......그리고?연재준이 입술을 꽉 깨물고 유월영을 빤히 쳐다본다.충분히 해명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하부인은 여전히 울그락 불그락 하는 얼굴로 유월영을 노려보고 있었다.따가운 시선에 정신이 혼미해나는 유월영이다.베이비시터가 다급히 말한다.“근데 침대 옆에서 작은 아가씨 얼굴 만질때 그 각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베이비시터를 홱 돌아보려고 하자 갑자기 어지럼증이 도진 유월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눈꺼풀이 데일 정도로 뜨겁다.엎친 데 덮친 격이
무릎을 꿇으라니!유월영이 고개를 번쩍 든다.저 말은 하부인이 홧김에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일까, 아니면 진심인걸까?순간 거실엔 차가운 정적이 감돈다. 유독 하부인의 이글거리는 눈빛만이 유월영을 압박하고 있는것만 같았다.하이힐은 나른하고 푹신한 카펫위에서 가뜩이나 중심을 잡기 힘든데다 몸상태도 말이 아니니 불편하기 그지없는 유월영이다.입술을 꽉 깨물고 입을 열려는 순간 1인소파 쪽에서 탁하고 컵과 유리 테이블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날카로운 소리는 마치 검을 빼드는 소리와도 흡사했다.연재준 방향에서 나는 소리임을 직감하고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서정희가 먼저 입을 연다.“하 부인님, 일단 진정하시고 이 일은......연 사장님, 얼른 아가씨 도와서 말 좀 해주세요.”“하 사모님, 사건경위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무릎부터 꿇리는게 하씨 가문 규칙입니까?”드디어 연재준이 나섰다.허나 그건 서정희에게 등 떠밀려 나선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유월영이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 와중에까지 연재준에게 기대를 품고 있었던 자신이 한심했으니 말이다.“그건 아니지, 진실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어찌 아가씨를 능욕하겠니.”하 사모님이 그제야 나긋한 말투로 하부인에게 “일침”을 날린다.“정아, 홧김에 그런 소리 하는걸 보니 많이 피곤한 모양이구나. 얼른 올라가서 쉬어, 이 일은 내가 잘 처리할테니.”그리고는 이내 유월영에게 말한다.“아가씨, 앉아서 얘기하시죠.”“감사합니다, 하 사모님.”오래도록 같은 자세로 서있어서인지 유월영은 힘이 풀린 다리를 이끌고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겨우 두걸음도 채 걷지 못하고 엎어지려는걸 간신히 소파로 팔을 뻗어 막아내는 유월영이다.동시에 그런 유월영을 붙잡은건 다름 아닌 연재준의 손이다.유월영과 가장 가까이 있던 소파가 바로 연재준이 앉아있던 1인소파 옆이었으니 말이다.유월영은 무슨 닿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것마냥 재빨리 손을 빼냈고 그 모습에 연재준의 얼굴도 덩달아 차가워진다.하 사모님을 바라
하 사모님은 이내 연재준에게로 다가가더니 한결 나긋해진 목소리로 말했다.“재준아, 너 내가 연락했을때 기차역이었지? 서안 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애들 보러 와줬구나.”“괜찮아요, 별 것도 아닌데요.”“오늘 밤엔 여기서 쉬어, 내가 방 두개 마련해줄게.”연재준도 거절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한다.하 사모님이 허리를 툭툭 두드리시며 한숨을 쉬신다.“하루종일 골치 앓았더니 이 늙어빠진 뼈들이 여기저기 쑤시네.”서정희는 눈치 빠르게 하 사모님 곁으로 다가가 부축해주며 말했다.“사모님 얼른 쉬세요. 저희가 외부인도 아니고 무슨 접대를 받겠어요. 저희가 알아서 잘 할게요.”유월영은 누구도 관심주지 않는 구석진 곳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어지럼증을 회복하고 있다.보이진 않지만 귀가 달렸으니 들리긴 할것 아닌가.서정희의 말엔 뭐랄까, 알게 모르게 연재준과 자신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는것 같았다.“저희가 외부인도 아니고”, “저희가 알아서 잘 하겠다”며 말 끝마다 저희거리는걸 보니.어제 연재준이 서정희를 연회에 데리고 온건 해운 직원 신분으로 데려온거라고 치자, 그럼 오늘 밤은?유월영이 피식 웃는다. 연재준의 여자 바꾸는 속도는 물론 그런 사실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는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었으니 말이다.지난번 산장에서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던 유월영이다.무릇 여자들이란 이성관계에서의 경쟁자나 자신을 그런 경쟁자로 간주하는 사람에겐 예민하고 민첩한 “레이더”를 가지고 있다. 그때 유월영은 벌써 서정희가 연재준에게 마음이 있다는걸 눈치채고 있었다.말 끝마다 연 선배, 연 선배 거리는것만 봐도 뻔했다.지금은 어딜가나 서정희를 데리고 다니는걸 보면 백유진이 또 차인건가, 아니면 연재준이 원래 그런 사람인걸까?전엔 유월영과 백유진이었는데 어느새 서정희와 백유진이 돼버렸다.유월영이 한숨을 푹 내쉰다. 몸상태가 안 좋아서인지 그녀의 두 눈은 촉촉해져 있었다.하 사모님이 서정희를 지그시 쳐다본다. 벌써 두번이나 연재준 곁에서 함께
유월영이 입술을 꽉 깨물고 베이비시터를 바라본다.“실례지만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베이비시터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버린다. 전혀 협조하고픈 생각이 없어보인다.유월영이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할머님이 저에게 독을 먹인 진범을 찾으시라고 할땐 당신 뿐만이 아니라 하씨 가문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도 된다는 뜻이세요. 협조 안 하겠다면 전 당신이 찔리는게 있다고 의심해 할머님께 그 사실을 알려드릴거고 그 뒤 할머님이 어떻게 처리하실진 저도 모르겠네요.”그 말은 베이비시터 뿐만 아닌 다른 하인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그들의 협조를 받아내려면 이 정도 과장은 아무것도 아니었다.확실히 효과가 있어보인다. 그 말에 베이비시터가 순식간에 표정을 싹 바꾸며 공손히 말한다.“저, 저는 조씨에요. 다들 절 조 아주머니라고 부르고요.”연재준은 2층으로 올라가던 길에 벌써부터 조사에 나선 유월영의 모습을 보고는 이내 다시 시선을 거뒀다.그리고는 이내 걸음을 우뚝 멈추는데.“먼저 방은 가지 말지.”길을 안내하던 하인도 덩달아 걸음을 멈춘다.“그럼......”“하부인 방은 어디지?”연재준은 이내 시선을 돌리더니 서정희에게 뭔가를 얘기한다.......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눈이 감기더니 의식을 잃었고 베이비시터에 의해 다시 정신을 차렸다.“저기요, 저기요, 여기서 자면 어떡해요.”잠든게 아니라 정신을 잃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이마를 짚어보니 역시나 열이 나기 시작한다.가쁜 숨을 한번씩 내쉴때마다 펄펄 끓는 용암같은 공기가 입 안을 감쌌지만 몸은 추위에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그 사실을 알리 없는 베이비시터는 연신 중얼거린다.“사모님이 겨우 하룻밤밖에 안 주셨는데 잠이 와요? 팔자려니 그냥 단념하겠다는거예요? 그럼 난 어떡하라고요? 나까지 물고 늘어지진 마요.”진범을 잡지 못한다면 누명을 덮어쓰는건 물론 직장도 잃게 될게 뻔했다.유월영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
이승연은 속았다고 느꼈다.이 남자의 따뜻함에 넘어가 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기분 좋겠지? 드디어 내 유산을 손에 넣게 됐으니.”이혁재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유산, 유산, 유산. 왜 항상 이 얘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그는 복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배를 감싸안았다.“여보, 내가 돈이 부족해 보여? 난 돈이 부족하지 않아. 지금 있는 돈으로 다음 생까지 살아도 충분해. 그 많은 돈을 뒀다 뭐 하겠어? 난 당신 돈을 원하지 않아. 그 유산이 당신한테 주는 부담을 덜어주고 싶을 뿐이야. 난 그냥 당신을 돕고 싶어.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믿어줄 거야?”이승연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녀는 그런 시선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충성스러운 강아지를 다독이듯. 이혁재는 항상 그녀에게 충실한 강아지처럼 느껴졌다.그 후로 두 사람은 함께 평생을 보내기로 결심했고 아이가 태어나면 행복한 세 식구가 될 거라고 믿었다.그러나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법정에서 사고가 발생하며 아이를 잃었고 이승연은 깊은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처음 한 달 동안 이혁재는 살이 빠져 송장처럼 변해갔다. 그는 며칠씩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으며 잠조차 자지 않았다. 생존 본능에 이끌려 겨우 물 한 모금을 마시곤 했지만 결국 집에서 쓰러지고 말았다.공주연이 아들을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들은 그가 극심한 기아 상태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거의 굶어 죽을 뻔했다.이혁재가 깨어났을 때 공주연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뺨을 내리쳤다.“넌 네 엄마도 필요 없니? 네 아빠는 이미 날 버렸어. 세상에선 네가 전부야! 그런데 너마저 날 버리려 해?”하지만 이혁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공주연은 울면서 말했다.“승연이 아직 죽지 않았어! 곧 깨어날 거야. 그런데
이혁재의 시점사실, 두 사람의 불화와 이별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갈등이 발생했다.이혁재의 어머니인 공주연이 이승연에게 출산을 재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공주연은 겉으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승연의 유산을 노리고 있었다.그녀의 계산은 간단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씨 성을 가진 그 아이가 이승연의 유산을 당당히 상속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이혁재 역시 어머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아이에게 상속자가 생기면 이승연의 친척들도, 우리 가족도 유산에 대한 욕심을 접고 물러나겠지. 그러면 그녀의 부담도 줄어들 거야.”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이승연에게 가서 아이를 갖자고 제안했다.그러나 이 말을 들은 이승연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가 지금 따로 살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갖자고?”그리고 이내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결혼 전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여기에 사인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이승연은 이미 이혁재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그녀의 유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혁재는 말로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치사한 방법을 선택했다.그녀가 복용하는 피임약을 엽산제와 임신 보조제로 몰래 바꿔치기한 것이다. 결국 이승연은 그의 의도대로 임신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이승연은 약을 바꿔치기한 사실에 격분했고 심지어 이혁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반면, 이혁재는 호텔에서 이승연과 오성민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오성민과 다시 만나고 있다고 오해했다.그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크게 다퉜고 이혁재는 한강에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너 정말 적당히 좀 해라.”연재준이 기가 막혀 혀를 찼다.“뭘 적당히 하라고!”이혁재는 술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내 첫사랑은 이제 날 원하지 않는데, 내가 살아서 뭐 하겠어!”서지욱이 나서서 말렸다.“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그냥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필요한 걸 얻는 공정한 거래일 뿐이야. 누구도 누구에게 빚지지 않아. 하지만 네가 이 결혼이 억울하고 원하지 않는다면 난 다른 사람을 찾으면 돼. 상관없어.”이승연의 단호한 말에 이혁재는 심장이 벌집처럼 무너져 내렸다.하지만 그는 자신을 위로했다. 적어도 그녀가 애초에 다른 사람을 찾지 않고 자신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자신이 그녀의 눈에 들어올 만큼의 가치는 있었다고 믿으려 했다.이혁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물론 난 이 결혼을 원하지. 누나랑 결혼하고 싶어서 얼마나 애타는지 모를 거야. 게다가 누나 가문의 그 거대한 유산에 누가 눈독을 들이지 않겠어?”사실 이혁재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녀의 유산을 탐내는 사람들로부터 지켜줄 강력한 방패가 되어주겠다는 뜻이었다.그러나 그는 또다시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이승연은 “역시 너도 내 유산 때문에 결혼하려는 거구나”라는 뜻이 담긴 냉소적인 눈빛을 보냈다.그 눈빛을 마주한 이혁재는 차라리 땅속으로 숨고 싶었다. 그는 평소 말을 잘하는 사람인데 왜 이승연 앞에만 서면 이렇게 서툴러지는지 알 수 없었다.그는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더 나쁜 인상을 주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결국 두 사람은 서로 기분이 상한 채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다.그나마 유일한 희소식은, 이혁재가 열일곱 살 때부터 꿈꿔왔던 첫사랑과 결혼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혼례를 치렀고 첫날밤을 함께 보냈다.이승연의 시점이승연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나며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유산을 남겼다.그 유산은 주변 사람들을 질투와 광기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생전에 친절하고 따뜻했던 삼촌과 고모 같은 친척들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단 하룻밤 사이에 괴물로 변했다.그녀는 영화에서 좀비로 변하는 인간들을 떠올렸다.정상이던 사람들이 물리면 금세 인간성을 잃고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괴물로 변하는 것처럼 그녀의 친척들도 오로지 그녀의 유산을 탐하는 괴물이 되어버렸다.하지만 이승연은 변호사로서 법을 잘 알고 말재
이혁재의 시점이승연과 오성민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은 이혁재였다. 그래서 이승연이 자신의 청혼을 거절했을 때 그는 그녀가 아직도 오성민을 잊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화가 난 그는 집 안에서 폭주하기 시작했다.그는 첫사랑이란 게 원래 잊기 어렵고 학창 시절부터 이어진 감정에, 그리고 7년이라는 긴 시간을 하루아침에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성민이 완전한 쓰레기라는 것이었다.오성민은 자기 인턴과 바람을 피웠다. 이런 사람은 인간 이하의 짐승에 불과했고 이승연은 왜 그런 사람을 잊지 못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대체 그런 짐승만도 못한 놈보다 어디가 부족하다고!”분노에 찬 이혁재는 다음 날도 2만 보를 걸으며 화를 삭였다. 그러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 다시 한번 가보세요! 어제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승연이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룻밤 생각했으면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을 거예요.”그는 자신이 오성민보다 못할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 아들의 말대로 공주연은 다시 한번 이승연을 찾아갔고,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돌아와 말했다.“여전히 거절하더구나.”이혁재는 소파에 쓰러져 한쪽 다리와 팔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원한에 사로잡힌 시체처럼 어두운 기운이 그를 감쌌다.그러다 그는 벌떡 일어나 이승연을 직접 찾아갔다.“누나한테 직접 물어봐야겠어. 왜 나랑 결혼하지 않으려는지!”사무실에서 문서를 검토하던 이승연은 담담히 말했다.“너는 나보다 너무 어려.”“그게 이유라고?”그러자 이혁재는 불쑥 다가가 이승연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이승연은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붙잡으며 외쳤다.“지금 뭐 하는 거야!”이혁재는 그녀를 안고 빙글빙글 돌며 깡충깡충 뛰었다.“너 미쳤어? 빨리 내려놔!”이승연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며 말했다.“내가 단지 누나보다 나이가 어린 것뿐이지. 다른 모든 면에서는 누나 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