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면서 찾는거예요?”윤영훈이 유월영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별안간 묻는다.유월영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윤영훈은 테이블에 놓인 칵테일 잔을 들어 유월영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연 사장 찾고 있는거면 오늘 꼭 올 거예요.”“신 사장님이 사모님께 축하인사 전하시라고 해서 온건데 제가 연 사장님을 왜 찾아요?”유월영이 침착하게 말하며 술잔을 사양한다.“윤 사장님, 전 괜찮습니다.”윤영훈은 상처 받은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고작 칵테일 한 잔도 싫어요? 대체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거예요? 얼굴이 별론가? 아니면 이 정도 애정공세로는 안 되는건가?”“저도 잘 모르겠네요. 사장님 갑자기 왜 저한테 호감 가지시는거예요?”“그러게요. 꽃다발 안에 친필 편지까지 들어있었는데 그거 읽었더라면 이유를 알았겠죠.”유월영이 잠시 주춤하더니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본다.그 역시 반달처럼 굽은 눈에 높은 콧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늘 웃는 상인 입술에 키도 훤칠하고 다리도 길쭉한것이 슈트핏을 잘 소화해내는 사람이었다.그렇다 한들 어쩌겠나, 인상이 별로인것을.치근덕대며 작업 거는게 별로라는 뜻이다.윤영훈같은 남자는 오히려 클럽이나 술집같은 곳에서 여자들의 환대를 받는 케이스다. 잘 생긴데다 돈도 많으니 술 한 잔을 하든, 하룻밤을 보내든 좋은게 좋은거겠지.허나 그런 곳이 아닌 공적인 장소에서라면 9할은 그를 피하고 싶기 마련이다.딱 봐도 감정으로 장난치는 나쁜 남자 같았으니 말이다.“꽃엔 편지 없었는데요.”던져버리긴 했지만 행여 값비싼 무언가를 보지 못했다가 윤영훈이 갚아내라고 할게 두려워 안을 뒤적여 봤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던 유월영이다.“그럼 내가 깜빡하고 못 넣었나 보네요.”윤영훈이 실실 웃으며 말한다.“내일 보내는 꽃엔 넣을테니까 잊지 말고 꼭 봐요.”그래, 이 남자는 이런 식이다. 진심을 담은 말 한 마디 없는.유월영은 대꾸도 하지 않는다. 아마 공백기라 유월영을 통
유월영이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설명했다.“신 사장님께서 스케줄 때문에 대표로 절 보내신 겁니다. 사모님 쌍둥이 손주 안으신걸 축하드리라고요. 윤 사장님과는 그저 오는 길이 같았을 뿐이에요.”“그럼 아직도 SK에 있는거네.”연재준은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모를 애매한 태도로 손에 들린 와인잔을 흔들거린다.지금 이 순간 유월영의 마음은 마치 그 검붉은색의 와인처럼 연재준에게 꽉 잡혀 이리저리 흔들흔들 요동치고 있었다.그 일이 있고나서 처음 얼굴을 마주한 둘이다.연재준은 과연 간크게 그의 뒤통수를 친 유월영을 어떻게 처리할까?아마 와인을 얼굴에 뿌리는 간단명료한 방법으로 유월영이 얼굴도 못 들게 망신을 주겠지?과연 연재준은 술잔을 유월영에게 들이민다. 그러나 뿌리는게 아닌 살짝 기울이면서 말이다.“그럼 SK그룹에서 탄탄대로만 걷길 기원할게.”지금 기원하다고 했나?잠시 정적이 흐리고 유월영이 대답한다.“감사합니다 사장님.”팅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술잔이 부딪힌다.입만 살짝 대려고 했으나 원샷을 때려버리는 연재준을 보고 어쩔수 없이 전부 마셔버리는 유월영이다.“아유~우리 자기, 공복에 술 너무 많이 마시면 몸에 안 좋아요.”갑작스런 윤영훈의 헛소리에 굳어버리는 사이 그는 유월영의 술잔을 가져가 한 모금 남은 술을 꿀꺽해버린다.유월영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을 하고는 입가에까지 올라온 “미친거 아니야”라는 말을 겨우겨우 삼켜냈다.연재준도 눈을 가느다랗게 뜬다.서정희는 입을 떡 벌리고 말한다.“오빠, 아가씨랑......”윤영훈은 손에 들린 칵테일잔을 지나가는 웨이터의 쟁반에 올려놓고는 웃으며 말했다.“연 사장님이 웃으실진 모르겠지만 요즘 유 비서 쫓아다니고 있거든요. 그래서 적극적으로 표현 좀 하느라고요.”연재준은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무덤덤하게 말한다.“그러시군요.”“연 사장님 개의치 않으시죠?”유월영은 연재준의 사람이었으니 그런 그녀를 좋아하려는것에 개의치 않는지 “예의를 갖춰” 물어보는 윤영훈이다.연재준은
다른 이들의 눈엔 그저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것 같은 네 사람이었지만 그 사이에 낀 유월영은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마침 그때 서정희가 연재준에게 귀띔해준다.“사모님 내려오셨대요. 저희 가서 인사 드려요.”연재준은 마지막으로 유월영을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목례를 하며 말했다.“그럼 이만.”그리고는 서정희의 어깨를 감싼 채 자리를 떠버리는 연재준이다.“......”유월영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그 일 이후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한 자리에서 그는 살벌한 복수도, 악의적으로 비꼬는것도 없이 탄탄대로를 기원하고는 떠나가 버렸다......강박이 먹히지 않으니 이젠 놔주겠다는 건가?예고도 없이 찾아온 자유에 유월영은 습관적으로 연재준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다. 갑자기 왜 성격이 한풀 꺾인거지?빠질듯이 쳐다보는 유월영을 보더니 윤영훈이 말한다.“현 남친이 여기있는데 자꾸 연 사장만 보면 내 체면이 뭐가 돼요?”“윤 사장님, 전 사귄다고 동의한 적 없습니다만?”“남자친구, 여자친구를 말하는게 아니라 전엔 연 사장이랑 연회 참여했다가 이젠 나랑 같이 온다는거죠. 굳이 남녀 관계로만 특정지어 생각하는걸 보니 아하, 유 비서도 사실 나한테 마음 있는거죠?”할 말을 잃은 유월영이다.“윤 사장님, 입씨름하는게 재밌으시면 차라리 스탠딩 코미디 배우를 섭외하세요.”윤영훈은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숙이고 꽤나 진심을 다해 말했다.“사실 입씨름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앞으로 차차 알아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런 말은 유 비서한테 함부로 할 말은 아닌거 같아서요. 난 진짜 유 비서한테 진심이거든. 잘못 말했다간 유 비서가 오해할까봐.”“......”열 살 정도 어린 여자애였다면 이 말에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렸겠지.허나 유월영은 아니다.“말씀하기 싫으시다면서 이미 말씀하셨잖아요?”희롱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말을 하고도 자기 합리화를 시전한다니, 대단한 사람이다.윤영훈이 억울해하며 말한다.“아, 미안해요. 누굴 좋아해보는게 처음이라서 어리숙한거
윤영훈은 아직도 연두색 치파오를 입고 유람선에 올랐던 그 날의 유월영을 기억하고 있었다.질끈 묶은 머리에 옥비녀를 하고 계단을 올라오는 모습은 마치 봄날의 강가에서 선들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잎같은 느낌을 줬다.문득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던게 그 날 유람선에서부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유월영이 무미건조하게 말한다.“윤 사장님 주문 잘못 넣으신것 같은데요.”윤영훈은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떠들어댄다.“치파오 진짜 잘 만드는 선생님 아는데 흰색으로 제작해서 보내줄게요. 혹시 사이즈가 어떻게 돼요? 아니면 주말에 직접 가서 치수 재고 제작해도 되고. 그게 훨씬 낫겠죠?”“......”윤영훈은 듣고 싶은것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연재준같이 난폭한 남자도 만나봤고 신연우같이 예의바른 남자도 만나봤지만 이런 막무가내인 사람은 윤영훈이 처음이다.더는 비위를 맞춰주지 못한 유월영이 한 마디 한다.“죄송해요 사장님, 화장실 다녀올게요.”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뜨는데.한참을 걸어 다시 뒤돌아 봤을때 윤영훈은 다른 이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제야 유월영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이내 몸을 돌리려는데 별안간 쟁반을 받쳐든 웨이터가 불과 몇미터를 사이두고 쏜살같이 그녀의 옆을 지나간다!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는 고연화다---행여 부딪히기라도 했으면 쟁반에 있던 술잔의 와인을 전부 유월영이 덮어썼을텐데. 그때 민감한 유월영의 뇌리에 뭔가가 번쩍 스친다. 설마 누군가 일부러?고개를 들어 웨이터를 바라보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누군가 갑자기 뒤에서 목에 맨 리본줄을 풀어버린다!유월영이 오늘 입은 드레스는 겨우 그 리본줄 하나에 의거해 버티고 있는 예복이었는데 별안간 리본줄이 느슨해지며 드레스가 아래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든다!다행히 반응속도가 빠른 유월영이었기에 재빨리 옷이 흘러내리는걸 막을수 있었고 이내 그녀는 몸을 홱 돌렸다.뒤에 있던건 다름아닌 임지연.임지연은 오버스럽게 입을
그 소리에 고개를 홱 돌리는 유월영이다.연재준이 차갑게 읊조린다.“난 유월영이랑 같이 온 것도 아니고 관계도 영......평범하긴 한데 이런 나도 나서서 도와주는거라 생각하진 않겠지.”“저......”평범한 관계긴 무슨! 유월영은 한때 연재준의 여자였거늘!윤영훈에겐 반박을 해도 연재준 앞에선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임지연이다.연재준이 윤영훈보다 신분이 더 높아서가 아니라 윤영훈은 그렇게 말해도 화 내지 않는다는걸 알지만 연재준은 달랐기 때문이었다.저 남자의 분위기는 이미 서있는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저......당신들 왜 나만 괴롭혀!”되려 적반하장으로 억울해하는 임지연이다.유월영이 입꼬리를 씰룩거린다.“잘못한 사람이 고자질이라니! 분명 네가 먼저 하 사모님 괴롭힌거잖아.”“무슨 헛소리야 그게! 내가 언제!”“오늘은 사모님 손자를 위한 연회야. 사모님이 좋은 음식에, 좋은 술 베푸시면서 초대하신건데 넌 무슨 한이 그리도 깊어서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 하필 분위기를 망쳐? 이게 괴롭히는게 아니면 뭔데?”윤영훈이 웃음을 참는다. 입씨름? 그건 유월영이 훨씬 센것 같다. 몇 마디로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드니.그저 망신만 주고 싶었던 임지연은 되려 본인이 망신을 당할 처지에 놓이자 안색이 어두워진다.“너......”“임 아가씨는 절대 일부러 그런게 아닐거야.”하 사모님의 목소리가 들리자 다들 짜기라도 한 듯 길을 터준다.환갑이 지난 연세에도 여전히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고 계시는 하 사모님은 그들에게 다가와 무덤덤하게 말씀하셨다.“그저 술에 취했을 뿐이지. 자, 어서 아가씨 모셔다 드려.”이게 어디 ‘모셔다 드리는’건가, 그냥 쫓아내시는거지!임지연은 스스로 망신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뒤를 지키고 있던 가문과 부모님의 얼굴에도 먹칠을 해버렸다.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거리는 임지연은 그제야 돌로 자기 발을 내리치는 느낌이 뭔지를 절실히 깨달은것 같다. 그러게 왜 유월영을 건드렸는지......“아가씨,
오늘의 연회는 하 씨 가문 집에서 열린 연회였고 별장 곳곳엔 조명이 반짝이고 있었다.밖에 있는 정원으로 나온 유월영과 신연우다. 신연우는 쌀쌀한 밤바람에 예복만 입은 유월영이 추울까 걱정이 된다.“이미 사모님이랑 인사도 나눴으니까 먼저 가도 돼요.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유월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좀만 더 있다가요. 아직 반도 안 됐잖아요.”지금 간다 한들 누구도 신경 쓸 사람은 없겠지만 유월영은 늘 누군가에게 발목 잡힐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흠집같은걸 남기지 않는 타입이었다.신연우는 유월영에게 덮어준 겉옷을 잘 여미어주더니 바람을 막아주기까지 했다.그는 파운데이션 밑에 가려진 유월영의 안색을 보더니 나지막이 물었다.“힘들어 보이네요. 일 때문에 쉬지도 못했죠?”“금방 입사해서 익숙하지 않아 그래요. 손에 익으면 훨씬 쉽겠죠.”유월영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이 정도 업무 강도라면 받아들일만 했다.“그래도 늘 신경써야죠. 둘째 형이랑 한약재 알려달라고 할게요. 우려마실 시간 없으면 마침 제가 방학이라 집에 있으니까 다려다가 회사로 가져도 줘도 되고요.”“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민폐를 끼치겠어요.”“제가 하고 싶어서 그런거니까 괜찮아요.”“교수님 마음만 잘 받을게요. 제가 덥석 받아버리면 너무 분수를 모르는것 같아서요.”어떤 관계여야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 말에 신연우가 말도 없이 유월영을 쳐다보지만 뭔가를 어필하고 있는것 같았다.유월영이 입술을 살짝 깨문다.연안에서 돌아와 지금까지 온라인을 빼고 다시 얼굴을 마주본건 오늘 밤이 처음이다.앞서 몇번이나 신연우가 식사 약속을 잡았지만 유월영은 늘 바쁘다고만 말하며 거절해왔다. 확실히 바쁜건 맞겠지만 그렇다고 밥 한끼 먹을 시간도 없다는건 말이 안 되지 않나.결국 유월영은 그를 피하고 있는거다.그가 숨기도 다른 모습 때문이 아니다. 그 날 차에서 연재준에게 반박할때 했던 말들은 전부 진심을 담은 말들이었다. 유월영은 신연우의 서로 다른 모습을 개의치 않는다, 필
허나 결국 연재준과 신연우 둘 다 유월영의 대답을 듣지 못한다.바로 그때 신연우의 휴대폰이 울리며 신연아에게서 연락이 왔으니 말이다.“오빠! 오빠 어디야? 나한테 좀 와 줘!”신연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는다.“연아야, 침착하게 말 좀 해봐. 무슨 일인데?”신연아는 겁에 질려 어버버거린다.“내, 내가 운전하다가 잠깐 휴대폰을 본 사이에 누가 길을 건너더라고......”“그래서?”“급히 핸들 꺾어서 피하긴 했는데 차가 가드레일 사이에 끼는 바람에 움직이질 못하고 있어. 오빠 나 어떡해, 무서워. 얼른 와서 나 좀 구해주라......”“다친 사람 없는걸 다행으로 여겨. 누가 너더러 운전대 잡을때 휴대폰 보래? 그러고도 울음이 나와? 큰 형이 너 다리 끊어버리게 만들줄 알아.”신연아가 울먹거린다.“그만 좀 욕하고 나 좀 구해줘......”“일단 차에서 내려서 안전한데 피해 있어. 위치 보내면 내가 얼른 갈테니까.”유월영은 대충 무슨 일인지를 눈치채고 그에게 말한다.“얼른 가 봐요. 아가씨 엄청 놀랐을텐데.”동생이 걱정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성큼성큼 걸어가던 그는 뭔가 생각났는지 이내 걸음을 멈추고는 다시 유월영에게로 다가와 말했다.“내일 점심 식사 대접할게요.”“내일 엄청 바빠서 시간 없어요.”“그럼 모레요.”“시간 되면 그때 다시 약속 잡아요.”신연우는 원하는 답변을 얻지 못해 못마땅해했지만 신연아 일때문에 상황이 급박했으니 어쩔수 없이 말했다.“그럼 그것부터 약속해요. 더이상 나 피하지 않겠다고, 네?”유월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네.”어렵게나마 답변을 얻어낸 신연우는 웃어보이더니 그제야 자리를 떴다.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 유월영은 시간을 확인하고 15분만 더 있다가 사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돌아가려고 한다. 이 정도면 무례를 범한건 아닐테니 말이다.그 순간 뭔가가 머리 위로 툭 떨어졌고 아하며 소리를 내는 유월영이다.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주워보니 핑크색 모란꽃 한 송이다.이내 고
유월영은 못 들은척 고개를 돌린다.“네?”보일러 때문에 따뜻한 방 안에서 연재준은 정장 겉옷을 벗고 흰 셔츠와 그레이 조끼만 입은 채 이따금씩 보이는 굴곡으로 섹시함을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대놓고 물어본 질문을 못 들을리가 없겠지만 연재준은 그런 유월영이 말을 섞고 싶어 하지 않은걸 알고는 웃으며 말했다.“아니야.”계속 쌍둥이를 들여다보는 유월영이다.그래, 별로 연재준의 말에 대꾸를 하고 싶지 않다.갑자기 그런 말은 왜 하는거지? 아이는 뜻밖의 유산이 아니었어도 연재준이 절대 낳게 못했을게 뻔하다. 그날 생리통 때문에 힘들어한것도 그는 유산 때문이라 오해하는걸 보면 답이 다 나온거 아닌가.그와 아이니 뭐니 하는 얘길 나누기도 싫었다. 이상하기도 하고 의미도 없으니까.유월영이 몸을 숙이고 쌍둥이들을 바라보려는 찰나 새근새근 잘 자고 있던 한 아이가 와하고 울음을 터뜨렸고 다른 아이도 덩달아 울음보를 터뜨리기 시작했다.자신이 그런줄로 알고 심장이 철렁하는 유월영이다.이때 연재준이 그녀의 손을 잡고 침대에서 멀리 떨어지게 한다.베이비시터가 다급히 다가와 아이를 안아주며 말한다.“왜 갑자기 울까요?”유월영이 입을 열려는 찰나 연재준이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쥔다. 이내 베이비시터가 말한다.“아이고, 응아했네. 우리 공주님, 왕자님은 늘 우는것도 따라서 울어. 죄송해요 두 분, 얼른 씻기고 올게요.”유월영이 고개를 끄덕인다.“네, 다녀오세요.”베이비시터와 하인이 아이들을 안고 욕실로 들어간다.그제야 한숨을 내쉬는 유월영이다. 손톱에 긁힌건줄 알았네.“너가 그런것도 아닌데 뭘 인정하기 급급해.”“인정하는게 아니라 아이들 울기 전 상황을 말씀드려서 왜 우는지 찾기 쉽도록 도와드리려는거죠.”“저 사람들 눈에는 그저 ‘해명’이나 ‘변명’하기엔 급급한 사람으로 보일뿐이야. 가만히 있다가 물어보면 그때 대답해도 늦지 않아.”다른 일이라면 가만히 있겠지만 어린 아이들이니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무서웠을 뿐이다.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