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은 점점 창백해져가는 임지연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게 무서웠는지 활을 내려놓는다.소은혜도 그녀의 목덜미를 놓고는 다시 느긋하게 벤치에 자리잡았다.순간 다리에 힘이 탁 풀려 땅에 주저앉아 버릴 뻔한 임지연은 둘을 이글이글 노려보며 말했다.“나......나......현우 씨 돌아오면 꼭 다 말할거야!”유월영과 소은혜가 이구동성으로 대답한다.“그러시든가.”임지연은 뭔가 하고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둘의 말도 안되게 예쁜 얼굴을 보고나니 엄두가 안 났는지 결국 발을 탕탕 구르며 자리를 떠버렸다.이윽고 남자 둘이 다시 돌아왔다.연재준은 뭔가 묘한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유월영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별거 아니에요. 손 아파서 3라운드는 못 쏘겠어요. 두 분이서 하세요.”유월영은 팔을 만지작거렸다. 활 쏘기는 실로 손바닥과 팔뚝 인대에 무리가 가는 스포츠였다.연재준은 강요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직원에게 눈치를 줬다.“뜨거운 수건으로 찜질 좀 해줘요.”이윽고 직원은 뜨거운 수건을 가져와 유월영의 손바닥에 쥐여줬다.소은혜가 웃으며 말한다.“방금 임지연한테 따끔하게 참교육한것도 다 이유가 있었네요. 연 사장님이 이렇게 챙겨주시니. 배경 좋은 집안이라 신씨 가문에서도 신현우 결혼상대로 맺어준거죠.”유월영이 덤덤하게 듣고 있는다. 사실 그녀가 참교육을 한건 전혀 연재준을 믿고 그런게 아니라 단순히 이치를 따지려는것 뿐이었다. ---왜 말도 안되는 욕설과 모욕을 감내하고만 있어야 하는가?하지만 딱히 소은혜에게 구구절절 해명할 필요도 없었다. 친구도 아니거니와 여전히 소은혜에겐 앙금이 남아있었으니 말이다.”소은혜가 대뜸 입을 연다. “사실은 쭉 아가씨한테 사과드리고 싶었어요.”“사과요?”유월영이 그녀를 바라본다.“무슨 사과요?”소은혜가 입술을 깨문다.“듣자하니 그 뒤로도 연안에서 이런저런 일들 많으셨다던데 제가 아가씨를 황무지에 버리고 온게 시발점이 됐을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쇄 반응
“......”연재준은 곁에 딱 붙어 꽤나 많은 골프 스킬들을 가르쳐 줬었다. 그래서인지 골프공은 유월영이 가장 잘 배운 스포츠가 돼버렸다.어쩌면 그건 연재준이 처음으로 유월영을 위해 나서주며 뭐든 다 참을 필요없다는걸 가르쳐줬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수건을 아직도 꽉 쥐고 있는 유월영이다. 그런 그녀의 손가락 끝을 무언가가 똑똑 한방울씩 땅에 떨어진다.눈물같은게 말이다.정말 유월영에게 잘해줬던 연재준이었으니 마음이 변한 지금에 와서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밉상 투성일수 밖에 없었던거다. 소은혜는 그가 유월영을 챙겨준다고 했었는데. 소위 말하는 ‘챙김’이란 지금은 거래이자 협박이고 하룻밤이 보내고 싶어 놔주기 싫은 단순한 소유욕 같은거였다.즉 별거 아니라는거다.소은혜는 더는 바짝 붙어있는 신현우와 임지연을 바라보지 않고 뭔가 생각난듯 유월영에게 물었다.“저랑 사장님은 별 관계 아니고 사실 아가씨가 조심해야 할건 다른 여자예요.”유월영이 수건을 직원에게 건네주며 그녀를 쳐다본다.“임지연이 방금 말한 서정희 말이에요. 어젯밤에 같이 카드 게임하면서 보니까 연 사장님한테 호감 있어 보이더라고요.”소은혜가 진지하게 말한다.서정희? 생각지도 못하긴 했지만 딱히 남은 인상은 없었고 그냥 윤영훈의 누이라는것과 이국적은 외모를 갖고 있다는 정도밖엔 없었다.연재준이 호감이 있는지 없는지는 관심도 없었지만 호의로 귀띔해주는 소은혜에게 예의상 대답했다.“알겠어요.”다섯번째 연장전까지 갔지만 여전히 실력을 가늠할수 없었던 연재준과 신현우는 결국 무승부를 선포했다.연재준은 장갑을 벗으며 유월영에게로 다가온다. 내리쬐는 햇살에 눈쌀을 약간 찌푸린 연재준이 턱을 까딱해 보인다.잠시 주춤하던 유월영은 다가가 그의 체스트 가드를 풀어주며 말했다.“고생하셨어요.”연재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묻는다.“뭘 건것도 아니고 그냥 게임인데 고생은 무슨?”소은혜가 혀를 끌끌 찬다.“무슨 대답이 그렇게 직설적이세요. 아가씨는 걱정돼서 그
점심은 그야말로 양고기 파티가 따로 없었다, 양고기를 먹는 108가지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르는 갖가지 부위들은 여러가지 별미들로 만들어졌고 거기에 통구이까지 진수성찬을 이뤘다.다들 센스있는 윤영훈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윤영훈은 기분이 좋은듯 연신 떠들어댄다.“겨울엔 양고기만큼 몸보신되는게 없죠. 아 맞다, 산장에 천연온천도 개방했다던데 여자분들 가서 담궈보세요. 겨울엔 온천도 좋으니까요.“누군가 키득키득 웃으며 놀려댄다.“너무 잘 챙겨주는거 아니야? 하기야 이러니까 엄마같다는 소리 듣지.“다들 술잔을 들고 윤영훈에게 건배를 한다, 분위기는 이루 말할 필요 없이 화기애애했다.연재준은 술 한모금을 홀짝 들이키고는 고개를 숙여 유월영에게 스윽 다가갔다.“오후엔 너도 온천 같이 가. 우린 상의할게 있으니까.“역시 그럴줄 알았다.그가 어디 이틀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놀음에만 낭비할 사람인가. 설사 정말 휴가를 온다 할지라도 이혁재나 서지욱 같은 친한 친구들과 왔겠지 윤영훈과 신현우와 올땐 반드시 공적인 일이 있었던거다.커다랗고 둥근 테이블엔 유월영도 이름을 부를수 있을 정도로 한 자리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윤영훈이 이번 모임자리를 마련한것도 아마 괜찮은 프로젝트가 생겨 그들더러 투자를 하라는 목적인듯 하다.유월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어요.”연재준의 시선이 유월영의 국그릇으로 옮겨가더니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맛있어? 벌써 두그릇째 같던데.”“......”많이 먹었다고 지저당하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유월영은 가볍게 기침을 한번 하고는 나지막이 말했다.“꽤 맛있는데 사장님도 드셔보세요. 근데 어느 부위인진 모르겠네요?”국 안엔 어느 부위인지 모를 양고기와 무, 구기자, 대추 등 갖가지 재료들도 함께 들어있었다. 게다가 주원료인 생강과 후추덕에 한모금 마시는 즉시 온 몸엔 따뜻한 온기가 퍼졌다. 골똘히 생각에 빠진 유월영은 어느 부위인지를 알아내 돌아가면 직접 우려내
생각지도 못한 서영희가 눈 앞에 떡하니 서있다.그녀는 짙은 녹색의 노출은 없지만 스타일 좋은 일체형 래쉬가드를 입고 있었다. 스타일도 스타일이지만 더 놀라운건 백옥같이 흰 피부덕에 저런 컬러를 무난하게 소화해냈다는 것이다. 유월영이 예의를 갖추고 서영희를 향해 살짝 미소 지어보였다.서영희도 유월영이 있는 쪽으로 헤엄쳐오며 물었다.“아가씨 왜 몸 안 담그세요?”“래쉬가드를 안 갖고 와서요. 다리까지가 최선이네요.”“그러셨구나. 전 또 어릴때 물에 빠진적 있으셔서 물 무서워 하시는줄 알았어요. 그래서 못 내려오고 계시는거라면 제가 옆에서 적응시켜 드리려고요.”예고도 없이 튀어나온 말에 조금은 넋이 나간듯한 유월영이다.물에 빠진적이라......고등학교 수영시간에 진짜 물에 빠진적은 있는데 서영희가 그걸 어떻게 알지?유월영은 생각한 그대로 서영희에게 질문을 던진다.서영희의 풀어헤친 새까만 머리카락들은 인어공주마냥 물결에 살랑살랑 움직였다.이내 서영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웃어보인다.“저도 특목고 다닌적 있거든요. 그 날 아가씨 물에 빠졌을때 옆에서 봤었어요.”“아......”반전의 연속이다.“그 날 중식당에서 처음 뵀을때 단번에 알아봤었죠.”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유월영을 본 서영희가 웃으며 말한다.“연 선배랑 사귄다는 말 들었을때 제 표정도 딱 그랬더랬죠.”그저 놀라운 인연에 신기할 따름이다.서영희를 몇번이고 더 쳐다보며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여전히 별달리 떠오르는건 없었다.잠깐의 놀라움을 뒤로하고 다시금 침착함을 되찾은 유월영은 이제는 ‘동창생’을 만난 반가움으로 안부인사를 건넸다.“학교 동창이라니 이런 인연이 다 있네요. 학교 동창 만나기 참 드문데 같은 학년이었겠죠? 전엔 몇반이었어요?”서영희가 욕조 벽에 등을 기댄다. 메이크업을 하지 않았던터라 이국적인 느낌은 조금 줄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였다.“전 8반이었는데 아가씨는 6반이었죠? 전 별 볼일 없었어서 당연히 기억 못하겠지만 그때 아가씨는 전교에 모르는 사
“마침 잘됐잖아요. 학교 동창인 현 선배 회사로 취직하면.”딱히 할 말이 없다.이때 유월영의 휴대폰이 울렸고 그녀는 물에 담그고 있던 두다리를 빼내며 말했다.“연락이 와서 먼저 가봐여 될것 같네요. 아가씨는 더 계세요.”서영희가 고개를 들어 유월영을 바라본다.“지금은 휴대폰이 없어서요.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만나면 연락처 교환해요.”“그래요.”욕조에서 나온 유월영이 요란하게 울리는 벨소리를 끈다---사실 그건 벨소리가 아니라 오후에 맞춰놨던 알람이다.다른 누군가와 현시우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게 불편하고 싫었던 그녀다.근데 회사니 출시니 귀국이니 하는건 다 사실일까?해운 그룹을 떠난 뒤엔 조서희가 유일한 소식통이었는데 그런 그녀마저 지금은 휴가중이니 소식이라곤 알 방법이 없었던 거다.문득 영안 호텔에서 마주쳤던 그 날이 떠오른다.몰카를 찍고 있던 이의 카메라를 던져버린 뒤로는 몰래 찍히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현시우가 그 사람더러 그만하라고 한건지 아니면 몰카 수법이 새로워져 눈에 띄지 않게 된건지도 잘 모르겠다.한참을 서있노라니 쌀쌀한 밤바람에 몸이 부르르 떨려온다. 끝에 앉는다고 앉긴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마자락은 결국 젖어버리고 말았다.어쩔수 없지,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겠다.하인없이 혼자서 복도 끝 코너로 걸어간 그녀의 눈 앞에 소은혜와 신현우가 보인다.소은혜는 대뜸 까치발을 들더니 이내 그의 목에 입을 맞춘다.유월영이 못 본 척하고 자리를 뜨려기도 전에 신현우가 먼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은혜를 밀어낸다.매정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유월영도 놀랄 정도다.소은혜는 몇번 비틀거리다 벽에 부딪치더니 평소와 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다.“뽀뽀도 안 돼요? 오로지 아가씨 위해서 이렇게까지 지조를 지킨다고요 지금?”허나 유월영의 눈엔 그저 씁쓸하기 그지없는 웃음으로 보인다.유월영을 등지고 있어 표정을 보아낼순 없었지만 그의 말투는 그 어느때보다도 차가웠다.“우린 이미 끝난 관계라고 몇번을
뭐?소은헤가 서영희랑 어쩌고 어째?말도 안 되는 소리에 유월영이 눈쌀을 찌푸린다. 둘은 전혀 안면이 있는 사이도 아닐텐데 도대체 어떻게?저도 모르게 걸음을 재촉하는 유월영이다.......유월영이 떠난 뒤 서영희도 더는 온천에 머무르지 않았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화장을 한 채 식사 장소에 도착했을때 눈 앞에선 나른한건지 흥미가 없는건지 모르겠는 소은혜가 연재준의 곁에 바짝 붙어 손을 잡고는 머리를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이거 내지.”소은혜가 연재준의 손에 들린 카드를 가리켰지만 그는 다른 두 장을 내놓으며 말했다.“카드게임도 같아, 고수는 늘 침묵을 지키지.”소은혜가 포도 한 알을 연재준의 입에 쑤셔넣다 싶이하며 투덜댔다.“말 좀 들어! 목 막히게 해버리기 전에!”서영희가 소은혜를 알아본다. 연안 SK그륩 경영전략팀 부장이저 사교계의 꽃으로 명성이 자자한 신현우의 전 연인……아니, 버려진 전 연인인 그녀를 말이다.게다가 신현우는 곧 임지연과 결실을 맺게 된다는 사실과 앞서 영안에 출장갔을때 연재준과도 스캔들이 있었다는걸 서영희는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신현우한테 버림받고 다시 연재준에게 붙어먹은건가?서영희는 정중한 말투로 말하는듯 보였지만 실상은 별로 예의를 차리지 않아보였다.“소 아가씨, 자리 좀 비켜주실래요?“ 소은혜가 서영희를 올려다 보더니 재밌다는 듯 말한다.“널리고 널린게 자린데 하필 왜 여기죠?”“사장님한테 할 말이 있어서요.”담백한 한 마디였지만 오히려 소은혜에겐 기세등등한 느낌을 준다.소은혜가 콧방귀를 뀌며 연재준을 팔을 끌어안더니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싫다면 어쩔건데요?“서정희는 더는 소은혜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연재준을 바라봤다.“사장님, 잠시만 얘기 좀 할수 있을까요?“불현듯 그 날 중식당에서 고등학교 시절 두 사람이 사귄 얘기를 했던게 떠오른다……연재준은 손에 들린 카드를 곁에 있던 이에게 건네준다.“나 대신 좀 해.”그렇게 연재준이 서영희를 따라나서고 소은혜는 덩그러니
윤영훈은 임지연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다 보는 앞에서 그런것 아닌것 같고 그러면......”그러자 유월영이 바로 그의 말을 잇는다.“그러면 이젠 공평하겠네요.”“......”윤영훈은 그제야 코 앞에 서있던 유월영을 발견하고는 실눈을 뜨며 말했다.“아가씨, 공평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유월영의 말 한마디는 방 안에 있던 모든 이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엔 충분해 보였다.“서 아가씨가 연 사장님 데리고 나가시는건 여기 있는 저에 대한 예의도 아닌것 같아서요.”서정희가 잠시 놀라는 듯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전 그저 할 말이 있었던것 뿐이에요!”“그래요?”삼각관계로 흘러가는 국면은 유월영의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사각관계로 변해버렸다. 어리둥절한 사람들은 서로 눈만 마주치고 있을뿐 누구 하나 입을 열 엄두를 내진 못하고 있다.필경 일을 벌인건 신 사장 사람인데다 피해를 입은건 윤 사장의 누이였고 거기에 끼어든 사람은 연 사장의 떳떳한 파트너 신분인 유월영 아닌가.각자 자신만의 명분이 뚜렷한데다 신분 고귀한 남자 세명까지 거론됐으니 어리석게 끼어들었다간 쓴맛을 볼게 뻔했다.“오해예요.”살얼음판같은 적막을 깨고 연재준이 입을 연다. 그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유월영을 쳐다보더니 와인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오늘은 제 누이가 뭐 모르고 윤 사장님 누이를 괴롭혔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서 아가씨, 윤 사장님, 이 술은 제 사과의 뜻으로 받아주십시오.”내 누이가 당신 누이를 괴롭혔다.....그 말인 즉 소은혜가 연재준의 누이라는 말인가?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눈이 휘둥그래진다.다들 소은혜가 SK그룹 경영전략팀 부장에 “서안 사교계의 꽃”이라는 명성을 지닌, 심지어는 신현우와 연재준 두 사람과 스캔들까지 터졌던 사람이란건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연재준의 누이인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유월영은 뭔가에 맞아 머리가 띵해지는 느낌이다. 이런 관계여서 그런거구나. 오전 내내 가지고 있던 호기심이 그제야 말끔히 해소된다.연재
잘못을 시인하고 처사까지 완벽히 했으니 당사자도 딱히 할 말이 없다.“다들 친구니까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 지읍시다. 연회 준비도 다 됐으니 내려가서 식사나 하시죠.”다들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으로 향한다.소은혜는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은 채 홀로 자리를 떠버리는데.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유월영이 소은혜를 따라가려 하지만 이내 연재준에 의해 손목을 붙잡이고 만다.”어디 가? 오후 내내 못 봤는데 보고싶지도 않았나 보지?“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추파를 던지는줄 알겠다.허나 정작 유월영 본인은 방금 전 자신의 말로 인해 화가 난 연재준이 또다시 이런 방법으로 훈육을 하려는거라 생각할수 밖에 없었다.소은혜를 구해주려고 윤영훈의 누이를 궁지를 빠트린데다 사과도 없이 지나간다면 협력관계인 연재준의 일에 차질이 생길수도 있다.연재준은 여자로 인해 차질을 빗게 되는 상황을 가장 혐오하는 사람이었다.지난 3년간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지켜오던 유월영이었기에 유산이라는 큰 일마저 그에게 알리지 않았던것 아닌가.유월영이 목청을 가다듬고 말한다.“사장님, 소은혜 씨힌테 가보려고요. 술 많에 마신것 같던데.“”너랑 비슷비슷해.“위스키 한 잔 정도로는 끄떡도 없다는 뜻이다.친누이었기에 마음이 쓰이긴 했는지 연재준이 유월영의 손을 놓아주며 말했다.”방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나 찾으러 와.“고개를 끄덕인 유월영은 소은혜가 나간 방향으로 향했다.아래층으로 내려가려던 연재준의 눈에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는 서정희가 보인다.서정희는 그의 시선을 기다리기도 한듯 곧장 물었다.“사장님, 아가씨가 저희 오해한것 같은데 설명 안 해 드려도 될까요?”연재준은 잠시 주춤하더니 의도가 븐명하지 않은 질문을 한다.“듣기론 온천에서 만났다던데?”“아 네, 근데 저희 고등학교 때 일에 대해선 말 안 했어요.”연재준은 관심도 없는 마냥 물었다.“고등학교 때 무슨 일?”입술을 깨물던 서정희는 더이상 격식을 갖춘 사장님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재준 씨, 그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
이승연은 속았다고 느꼈다.이 남자의 따뜻함에 넘어가 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기분 좋겠지? 드디어 내 유산을 손에 넣게 됐으니.”이혁재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유산, 유산, 유산. 왜 항상 이 얘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그는 복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배를 감싸안았다.“여보, 내가 돈이 부족해 보여? 난 돈이 부족하지 않아. 지금 있는 돈으로 다음 생까지 살아도 충분해. 그 많은 돈을 뒀다 뭐 하겠어? 난 당신 돈을 원하지 않아. 그 유산이 당신한테 주는 부담을 덜어주고 싶을 뿐이야. 난 그냥 당신을 돕고 싶어.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믿어줄 거야?”이승연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녀는 그런 시선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충성스러운 강아지를 다독이듯. 이혁재는 항상 그녀에게 충실한 강아지처럼 느껴졌다.그 후로 두 사람은 함께 평생을 보내기로 결심했고 아이가 태어나면 행복한 세 식구가 될 거라고 믿었다.그러나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법정에서 사고가 발생하며 아이를 잃었고 이승연은 깊은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처음 한 달 동안 이혁재는 살이 빠져 송장처럼 변해갔다. 그는 며칠씩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으며 잠조차 자지 않았다. 생존 본능에 이끌려 겨우 물 한 모금을 마시곤 했지만 결국 집에서 쓰러지고 말았다.공주연이 아들을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들은 그가 극심한 기아 상태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거의 굶어 죽을 뻔했다.이혁재가 깨어났을 때 공주연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뺨을 내리쳤다.“넌 네 엄마도 필요 없니? 네 아빠는 이미 날 버렸어. 세상에선 네가 전부야! 그런데 너마저 날 버리려 해?”하지만 이혁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공주연은 울면서 말했다.“승연이 아직 죽지 않았어! 곧 깨어날 거야. 그런데
이혁재의 시점사실, 두 사람의 불화와 이별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갈등이 발생했다.이혁재의 어머니인 공주연이 이승연에게 출산을 재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공주연은 겉으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승연의 유산을 노리고 있었다.그녀의 계산은 간단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씨 성을 가진 그 아이가 이승연의 유산을 당당히 상속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이혁재 역시 어머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아이에게 상속자가 생기면 이승연의 친척들도, 우리 가족도 유산에 대한 욕심을 접고 물러나겠지. 그러면 그녀의 부담도 줄어들 거야.”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이승연에게 가서 아이를 갖자고 제안했다.그러나 이 말을 들은 이승연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가 지금 따로 살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갖자고?”그리고 이내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결혼 전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여기에 사인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이승연은 이미 이혁재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그녀의 유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혁재는 말로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치사한 방법을 선택했다.그녀가 복용하는 피임약을 엽산제와 임신 보조제로 몰래 바꿔치기한 것이다. 결국 이승연은 그의 의도대로 임신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이승연은 약을 바꿔치기한 사실에 격분했고 심지어 이혁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반면, 이혁재는 호텔에서 이승연과 오성민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오성민과 다시 만나고 있다고 오해했다.그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크게 다퉜고 이혁재는 한강에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너 정말 적당히 좀 해라.”연재준이 기가 막혀 혀를 찼다.“뭘 적당히 하라고!”이혁재는 술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내 첫사랑은 이제 날 원하지 않는데, 내가 살아서 뭐 하겠어!”서지욱이 나서서 말렸다.“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그냥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필요한 걸 얻는 공정한 거래일 뿐이야. 누구도 누구에게 빚지지 않아. 하지만 네가 이 결혼이 억울하고 원하지 않는다면 난 다른 사람을 찾으면 돼. 상관없어.”이승연의 단호한 말에 이혁재는 심장이 벌집처럼 무너져 내렸다.하지만 그는 자신을 위로했다. 적어도 그녀가 애초에 다른 사람을 찾지 않고 자신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자신이 그녀의 눈에 들어올 만큼의 가치는 있었다고 믿으려 했다.이혁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물론 난 이 결혼을 원하지. 누나랑 결혼하고 싶어서 얼마나 애타는지 모를 거야. 게다가 누나 가문의 그 거대한 유산에 누가 눈독을 들이지 않겠어?”사실 이혁재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녀의 유산을 탐내는 사람들로부터 지켜줄 강력한 방패가 되어주겠다는 뜻이었다.그러나 그는 또다시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이승연은 “역시 너도 내 유산 때문에 결혼하려는 거구나”라는 뜻이 담긴 냉소적인 눈빛을 보냈다.그 눈빛을 마주한 이혁재는 차라리 땅속으로 숨고 싶었다. 그는 평소 말을 잘하는 사람인데 왜 이승연 앞에만 서면 이렇게 서툴러지는지 알 수 없었다.그는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더 나쁜 인상을 주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결국 두 사람은 서로 기분이 상한 채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다.그나마 유일한 희소식은, 이혁재가 열일곱 살 때부터 꿈꿔왔던 첫사랑과 결혼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혼례를 치렀고 첫날밤을 함께 보냈다.이승연의 시점이승연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나며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유산을 남겼다.그 유산은 주변 사람들을 질투와 광기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생전에 친절하고 따뜻했던 삼촌과 고모 같은 친척들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단 하룻밤 사이에 괴물로 변했다.그녀는 영화에서 좀비로 변하는 인간들을 떠올렸다.정상이던 사람들이 물리면 금세 인간성을 잃고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괴물로 변하는 것처럼 그녀의 친척들도 오로지 그녀의 유산을 탐하는 괴물이 되어버렸다.하지만 이승연은 변호사로서 법을 잘 알고 말재
이혁재의 시점이승연과 오성민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은 이혁재였다. 그래서 이승연이 자신의 청혼을 거절했을 때 그는 그녀가 아직도 오성민을 잊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화가 난 그는 집 안에서 폭주하기 시작했다.그는 첫사랑이란 게 원래 잊기 어렵고 학창 시절부터 이어진 감정에, 그리고 7년이라는 긴 시간을 하루아침에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성민이 완전한 쓰레기라는 것이었다.오성민은 자기 인턴과 바람을 피웠다. 이런 사람은 인간 이하의 짐승에 불과했고 이승연은 왜 그런 사람을 잊지 못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대체 그런 짐승만도 못한 놈보다 어디가 부족하다고!”분노에 찬 이혁재는 다음 날도 2만 보를 걸으며 화를 삭였다. 그러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 다시 한번 가보세요! 어제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승연이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룻밤 생각했으면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을 거예요.”그는 자신이 오성민보다 못할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 아들의 말대로 공주연은 다시 한번 이승연을 찾아갔고,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돌아와 말했다.“여전히 거절하더구나.”이혁재는 소파에 쓰러져 한쪽 다리와 팔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원한에 사로잡힌 시체처럼 어두운 기운이 그를 감쌌다.그러다 그는 벌떡 일어나 이승연을 직접 찾아갔다.“누나한테 직접 물어봐야겠어. 왜 나랑 결혼하지 않으려는지!”사무실에서 문서를 검토하던 이승연은 담담히 말했다.“너는 나보다 너무 어려.”“그게 이유라고?”그러자 이혁재는 불쑥 다가가 이승연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이승연은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붙잡으며 외쳤다.“지금 뭐 하는 거야!”이혁재는 그녀를 안고 빙글빙글 돌며 깡충깡충 뛰었다.“너 미쳤어? 빨리 내려놔!”이승연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며 말했다.“내가 단지 누나보다 나이가 어린 것뿐이지. 다른 모든 면에서는 누나 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