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준은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이내 휴대폰을 꺼내 하정은에게 전화를 걸었다.“조이 선생님 보조 아직도 유월영 어머니 돌봐주고 계셔?”“네, 내일까지 봐주실거예요.”“법무부더러 계약서 준비하라고 해.”......유월영은 조식을 먹으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 하인에게 묻고 있다.하인은 그런 그녀를 식당으로 데려갔다.라면 한 그릇을 시키고 메뉴판을 돌려주려고 하는 찰나 누군가 반대편에 와 앉는다.편한 옷차림의 연재준이었다.“나도 한 그릇 시켜줘.”어쩔수 없이 한 그릇 더 주문하는 유월영이다.썩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는 연재준을 보고 방금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 유월영은 관심섞인 말투로 물었다.“사장님 왜 더 안 주무세요? 어젯밤에도 늦게 주무셨는데.”“누가 잠 다 깨게 만드는 바람에.”연재준은 깨끗한 컵을 가져와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랐다.“그럼 다 드시고 다시 돌아가 주무셔요, 아님 낮잠이라도.”연재준이 새까만 눈동자를 하고 그녀를 바라본다.“너가 옆에서 같이 자줄래?”유월영이 살살 비위를 맞춰주며 말한다.“졸리면 저도 잘게요.”연재준은 시선을 옮기지 않고 계속 유월영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유월영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그와 눈을 마주쳤다. 연재준이 갑자기 묻는다.“어제 병원 갔을때 어머니 어떠셨어?”“이미 깨셨어요.”깨어난 엄마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유월영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선생님이 잘 호전되고 있다세요. 다 사장님이 모셔온 조이 선생님 덕분이에요.”연재준이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그럼 메일 확인해 봐.”“메일이요? 왜요?”휴대폰을 꺼내 메일에 들어가본다.들어가자마자 떡하니 보이는 제목 하나---해운 그룹 업무 계약서.유월영이 놀라기도 전에 연재준은 물 한 모금을 마시더니 무릎에 잔을 받치고 덤덤하게 말했다.“법무부에서 계약서 보냈을거야. 문제 없으며 사인해.”방금 전까지 좋던 기분이 180도 돌변한다!계약서 사인이라......유월영의 눈이 반짝인다.마주 앉아있던 연재준은 조용히 유월영을 바라보고
유월영이 숨을 고르고 침착하게 대답했다.“아니 전 3년이나 5년일줄 알았지, 10년 일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래서 놀랐던거 뿐이에요. 근데 생각해보면 어디서 하든 다 제 일인데 해운 그룹 위해 10년 헌신하는것도 나쁘진 않죠.“연재준이 대답한다.“그럼 사인해. 전자사인도 똑같이 법적효력 있으니까 내가 보고 있을게.“그가 천천히 유월영의 목을 옥죄어온다.유월영이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당연히 사장님 믿지만 이 10년이라는게……제가 80까지 산다고 가정했을때 인생의 8분의 1을 차지하는 거잖아요. 거기다 이미 지나간 25년까지 빼면 얼마 남지도 않았어요.“연재준이 피식 읏음을 터뜨린다.“계약서 작성하라는데 곧 죽을 사람처럼 말하네.““전부는 아니지만 제 목숨 반 정도는 앗아가는거죠.”유월영이 고개를 숙이고 쓴웃음을 지었다.“스물두살 대학교 졸업하고나서 떠나기 직전까지 사장님 따라다녔어요. 장장 3년동안 병가 한번 빼고는 반차 낸적조차 없고요.“화장품이 없어 민낯인 그녀였지만 도자기같은 피부는 아침햇살 아래서도 전혀 굴욕이 없었다. 립스틱과 블러셔만 없을 뿐이지 피부는 여전히 백옥같이 새하얗다.연재준의 눈빛은 바닥이 보이지 않은 시꺼먼 저수지마냥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반대로 고개를 든 유월영의 눈은 그렁그렁해 보이는것이 불쌍하고 처량해보이는 느낌을 물씬 줬다.“제 자리에서 조금 유명세를 떨친다 한들 퇴사직후엔 그 어느 회사에서도 절 채용할 엄두를 못낼텐데 그것마저 수확의 일종인거라면 분명 제가 먼저 사장님 곁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백유진 모녀에게 삿대질을 당하며 내연녀라는 소리를 듣는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인건가요? 사실 제가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유월영은 약한 티를 낸 적이 드물다.아니, 전혀 티 내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겠지.살집도 없는 약해빠진 몸에 목소리도 가냘픈데다 짜증도 낼줄 모르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도 누굴 욕하는 법이 없었지만 그녀는 사실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다.그래서
나름의 신경전을 벌인 탓에 힘이 쏙 빠진 유월영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저기 잔디 위에 있는거 과녁 맞죠? 양궁용이에요, 사격용이에요?”웨이터가 아침 식사를 가져다주며 친절히 대답해줬다.“양궁용 과녁입니다. 사격장도 있긴 하나 그건 실내에 있어요.”유월영이 흥미를 보인다.“양궁 표적이구나.”연재준은 버섯새우죽을 한 술 뜨더니 유월영을 보고 말한다.“활 쏘고 싶어? 그럼 내가 너 데리고 갈게.”낮잠과 활쏘기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할거다.아침 식사를 마친 그들은 잔디밭으로 걸음을 옮겼다.둘 뿐인줄 알았던 양궁장엔 신현우와 소은혜, 그리고 처음 보는 여자애가 있었다.여자 둘에 남자 하나라, 꽤나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연재준과 유월영이 다가가자 셋 다 각자 시선을 돌려버린다.신현우가 그들을 바라보며 자연스레 웃었다.“저희만 일찍 나온줄 알았더니 연 사장님과 유 아가씨도 오셨네요?”연재준은 소은혜를 쳐다보더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오늘 날씨가 좋아서 야외 운동하긴 딱이겠더라고요.”신현우가 고개를 끄덕인다.“맞아요, 이틀간 날씨 좋아보여서 영훈씨 제안을 받아들인거죠. 아마 여럿 데리고 왔을겁니다.”말이 나온 김에 그가 곁에 있던 여자애를 소개시켜줬다.“태영건설 따님 임지연이에요.”임지연이 발랄하게 손을 흔들어보인다.“안녕하세요~”연재준이 고개를 까딱한다. 어쨌든 마주쳤으니 그가 신현우에게 묻는다.“신 사장님 같이 하실까요?”신현우가 흔쾌히 수락한다.“마침 그러려던 참인데 잘 됐네요.”소은혜가 별안간 입을 연다.“그럼 팀은 어떻게 정해요? 연 사장님네는 두분이니까 제가 나갈게요.”임지연은 그 말에 반박하며 말한다.“네가 뭔데 나서?”흰색 바탕에 빨간색 포인트를 준 운동복을 맞춰입은 소은혜는 오늘따라 아리땁고 요염해 보였다. 허벅지까지밖에 오지 않는 미니 스커트에도 전혀 추워하지 않는 소은혜가 웃는것 같지도, 웃지 않는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활 쏠줄 아는데 넌
허나 본체 만체 하는 신현우다.임지연은 팔짱을 끼고 기고만장해하며 말했다.“어떤 사람들은 참 비열하단 말이지. 오라는 말도 안했는데 낯짝 두껍게 따라오고는 들러붙어서 떨어지지도 않고 말이야. 받들어 모시는걸 좋아하면 잘 모시기나 할 것이지, 겨우 그만한 가치밖에 없으면서.”이 말은 곁에서 제3자의 입장으로 듣고 있던 유월영마저 거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임지연이 눈을 꿈뻑거리며 말한다.“아이고~ 소대리 오해하지 마, 소대리 말하는거 아니야. 근데 우산 좀 씌워줄래? 소중한 피부 다 타버릴것 같거든~”화장에 가려져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잘 모르겠지만 소은혜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유월영은 이상하게도 소은혜가 임지연의 모욕적인 말을 듣고 감정이 동요한게 아닌 분명 그 말을 듣고도 꼼짝않고 있는 신현우로 인해 더욱 기분이 상한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유월영이 무의식적으로 연재준을 바라본다. 소은혜는 연재준 곁에서도 잠깐 일했었는데 이런 모습을 그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연재준이 미간을 찌푸린다.하지만 그 대상은 소은혜가 아닌 유월영이었다.“너 그 체스트가드 반대로 입은거 아니야?”당황한 유월영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 본다. 정말 반대로 입긴 한것 같다......한 쪽만 있는 체스트 가드는 심장을 보호하기 위해 오른쪽이 아닌 왼쪽에 입어야 했다.“네 심장은 오른쪽에 있나 봐?”연재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가와 도와주려 하자 유월영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치며 말했다.“저 혼자 하면 돼요!”너무 민감한 위치라 안 된다.유월영은 얼른 찍찍이를 떼내 다시 반대로 입는다. 연재준은 체스트가드에 꽉 조여진 굴곡을 바라보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유월영이 갈아입는 사이 소은혜는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은 채 우산을 들고 순순히 임지연 뒤에 서 있었다.유월영은 썩 마음이 좋지 않다. 생각해보면 남자들이란 쉽게 질려하는 동물이라 전엔 아무리 가까운 사이였어도 눈 깜짝할 새에 낯선 사람 취급을 하기도 한다.연재준이 묻는다.“어느 활 고를거
한숨을 쉰 연재준도 활을 빼들었다.세사람의 활 쏘기 실력은 막상막하였지만 임지연은 세번 연속 과녁 근처에도 가지 못한채 한 번은 힘없이 땅에 내리꽂히기도 했다.자연스레 1라운드 승자는 연재준과 유월영이었다.마침 이때 연재준의 휴대폰이 울린다. 그가 신현우에게 눈짓을 보내자 신현우도 고개를 끄덕인다.“편히 연락 받으세요. 전 아가씨한테 배우고 있을게요.”유월영이 SK그룹에 입사하려던걸 연재준은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연재준이 유월영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나긋하게 말했다.“그럼 2라운드는 두 분이 겨루세요. 누가 이기든 다 상관없어요. 유 비서, 잘 가르쳐드려.”유월영이 입술을 깨문다.“네.”연재준은 그제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 연락을 받았다.복합활로 바꾼 신현우가 그녀에게로 다가와 말한다.“복합활은 전통활보다 훨씬 힘이 드는데 아가씨같은 약한 몸에서 어찌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네요.”“힘은 쓰면 생기죠. 전통활은 활 받침대가 없어서 조준하기가 어려워요. 두 분 전통활 잘 다루시던데 그게 더 대단하신거죠.”유월영이 진심으로 말했다.“저희는 오히려 받침대가 있는게 더 구속이라고 느껴지던데요.”그러면서 신현우가 활시위를 당긴다.유월영이 눈썹을 치켜든다. ‘그래서 그런거였구나’라는 느낌이 드는 신현우의 말이었다.복합활에 있는 받침대는 활을 어디에 놔야 하는지, 어떻게 쏴야 하는지를 정해주고 있었다.허나 연재준이나 신현우같은 대기업 사장들은 본래가 누군가에게 제한당하고 조종당하는걸 싫어하는데 전통활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 걸까?아마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일거다. 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쏠수 있으니까.이런게 집착성이 강하다는 표현 아니고 뭐란 말인가?신현우가 손을 놓는다. 활은 힘차게 뻗어나가더니 또한번 정중앙에 꽂혔다.저기 멀리 연재준이 돌아온다.“사장님, 이틀째 저 보러 안 오셨어요......”전화너머 처량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연재준은 별다른것 없이 활만 쏘고 있는 둘을 보고 그제야 시선을 거둔다.“일
잔디밭 위엔 여자 세 명만 남아있었다. 별 생각도 없어보이는 임지연은 짜증섞인 목소리로 눈을 희번득거리더니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활 쏘는게 뭐가 재밌다고, 손 아파 죽겠네!”소은혜가 차갑게 쏘아붙인다.“말했잖아, 임 아가씨는 사장님 발목만 잡고 늘어진다고.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지 마구잡이로 낚아채는게 무슨 소용있겠어? 안 되는건 안 되는건지, 어차피 질거면서.”이건 활 쏘기 뿐만 아니라 남자를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말이기도 했다.임지연이 바보도 아니고 그걸 어찌 알아채지 못할까.“너!”임지연이 고개를 홱 돌린다. 한 손으로 우산을 잡고 편한 자세로 아무렇게나 서있는 그녀의 온 몸에 햇살이 내리쬔다. 가뜩이나 흰 두 다리는 햇빛에 반사될 정도로 광이나고 있다.눈이 부시게 아리따운 소은혜더러 우산을 들게 하는게 아니었다. 모욕감을 주려고 한 행동이 오히려 임지연을 더욱 못 생겨 보이게 만들었으니 말이다!늘 소은혜에 대한 불만이 들끓고 있었던 임지연은 비꼬는 듯한 말투에 화가 폭발했는지 소은혜를 콱 밀치며 말했다.“뻔뻔한 년! 감히 너 같은게 내 곁에 서있다니!”손찌검을 할거라는 생각을 꿈에도 못한 소은혜는 갑작스레 밀쳐져 뒷걸음질치다 그만 유월영의 발을 밟아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사과를 건넨다.“죄송해요......”유월영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임지연이 무차별 공격을 퍼붓는다.“교양있는 척하긴! 너희들같은 사람들 내가 모를줄 알아? 번지르르한 얼굴 앞세워서 남자 꼬시고 나니까 뭐 사모님이라도 된줄 아나본데 꿈이나 꾸셔!”“하룻밤 자고 나면 쓰레기마냥 버려질것들이. 이름이 뭔지나 아시겠어?”유월영이 고개를 들어 임지연을 노려본다. 소은혜가 차갑게 경고한다.“임지연 너 미쳤어? 연 사장님 사람이야.”“그게 뭐 어때서? 너도 한때 연 사장 사람 아니었나?”임지연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간다.“내가 모를거라 생각하지 마, 찾아본지 오래니까. 현우 씨가 싫증나니까 너 연 사장한테 보냈겠지. 연 사장도 잠자리하는게 싫증나니
유월영은 점점 창백해져가는 임지연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게 무서웠는지 활을 내려놓는다.소은혜도 그녀의 목덜미를 놓고는 다시 느긋하게 벤치에 자리잡았다.순간 다리에 힘이 탁 풀려 땅에 주저앉아 버릴 뻔한 임지연은 둘을 이글이글 노려보며 말했다.“나......나......현우 씨 돌아오면 꼭 다 말할거야!”유월영과 소은혜가 이구동성으로 대답한다.“그러시든가.”임지연은 뭔가 하고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둘의 말도 안되게 예쁜 얼굴을 보고나니 엄두가 안 났는지 결국 발을 탕탕 구르며 자리를 떠버렸다.이윽고 남자 둘이 다시 돌아왔다.연재준은 뭔가 묘한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유월영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별거 아니에요. 손 아파서 3라운드는 못 쏘겠어요. 두 분이서 하세요.”유월영은 팔을 만지작거렸다. 활 쏘기는 실로 손바닥과 팔뚝 인대에 무리가 가는 스포츠였다.연재준은 강요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직원에게 눈치를 줬다.“뜨거운 수건으로 찜질 좀 해줘요.”이윽고 직원은 뜨거운 수건을 가져와 유월영의 손바닥에 쥐여줬다.소은혜가 웃으며 말한다.“방금 임지연한테 따끔하게 참교육한것도 다 이유가 있었네요. 연 사장님이 이렇게 챙겨주시니. 배경 좋은 집안이라 신씨 가문에서도 신현우 결혼상대로 맺어준거죠.”유월영이 덤덤하게 듣고 있는다. 사실 그녀가 참교육을 한건 전혀 연재준을 믿고 그런게 아니라 단순히 이치를 따지려는것 뿐이었다. ---왜 말도 안되는 욕설과 모욕을 감내하고만 있어야 하는가?하지만 딱히 소은혜에게 구구절절 해명할 필요도 없었다. 친구도 아니거니와 여전히 소은혜에겐 앙금이 남아있었으니 말이다.”소은혜가 대뜸 입을 연다. “사실은 쭉 아가씨한테 사과드리고 싶었어요.”“사과요?”유월영이 그녀를 바라본다.“무슨 사과요?”소은혜가 입술을 깨문다.“듣자하니 그 뒤로도 연안에서 이런저런 일들 많으셨다던데 제가 아가씨를 황무지에 버리고 온게 시발점이 됐을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쇄 반응
“......”연재준은 곁에 딱 붙어 꽤나 많은 골프 스킬들을 가르쳐 줬었다. 그래서인지 골프공은 유월영이 가장 잘 배운 스포츠가 돼버렸다.어쩌면 그건 연재준이 처음으로 유월영을 위해 나서주며 뭐든 다 참을 필요없다는걸 가르쳐줬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수건을 아직도 꽉 쥐고 있는 유월영이다. 그런 그녀의 손가락 끝을 무언가가 똑똑 한방울씩 땅에 떨어진다.눈물같은게 말이다.정말 유월영에게 잘해줬던 연재준이었으니 마음이 변한 지금에 와서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밉상 투성일수 밖에 없었던거다. 소은혜는 그가 유월영을 챙겨준다고 했었는데. 소위 말하는 ‘챙김’이란 지금은 거래이자 협박이고 하룻밤이 보내고 싶어 놔주기 싫은 단순한 소유욕 같은거였다.즉 별거 아니라는거다.소은혜는 더는 바짝 붙어있는 신현우와 임지연을 바라보지 않고 뭔가 생각난듯 유월영에게 물었다.“저랑 사장님은 별 관계 아니고 사실 아가씨가 조심해야 할건 다른 여자예요.”유월영이 수건을 직원에게 건네주며 그녀를 쳐다본다.“임지연이 방금 말한 서정희 말이에요. 어젯밤에 같이 카드 게임하면서 보니까 연 사장님한테 호감 있어 보이더라고요.”소은혜가 진지하게 말한다.서정희? 생각지도 못하긴 했지만 딱히 남은 인상은 없었고 그냥 윤영훈의 누이라는것과 이국적은 외모를 갖고 있다는 정도밖엔 없었다.연재준이 호감이 있는지 없는지는 관심도 없었지만 호의로 귀띔해주는 소은혜에게 예의상 대답했다.“알겠어요.”다섯번째 연장전까지 갔지만 여전히 실력을 가늠할수 없었던 연재준과 신현우는 결국 무승부를 선포했다.연재준은 장갑을 벗으며 유월영에게로 다가온다. 내리쬐는 햇살에 눈쌀을 약간 찌푸린 연재준이 턱을 까딱해 보인다.잠시 주춤하던 유월영은 다가가 그의 체스트 가드를 풀어주며 말했다.“고생하셨어요.”연재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묻는다.“뭘 건것도 아니고 그냥 게임인데 고생은 무슨?”소은혜가 혀를 끌끌 찬다.“무슨 대답이 그렇게 직설적이세요. 아가씨는 걱정돼서 그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