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준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갈비찜을 그녀 앞에 밀어준다.“어제 엄청 잘 먹던데? 그대로 하라고 한거야.”그러니까 이건 그가 먹으려는게 유월영만을 위해 주문했던거다.유월영이 입술을 깨물며 손에 있던 국자를 들었다.“일종의 거래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마워요. 사장님 아니었으면 엄마 수술 순조롭게 못 받으셨을거예요.”연재준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내가 시켜준거로 감사인사를 한다고?”유월영이 생각도 없이 말을 내뱉는다.”이제 제가 대접해드릴게요.”지그시 바라보던 연재준도 국자를 들어올리고 ‘건배’를 한다.“그래, 기억하고 있을게.”......식사를 마친 유월영은 자각적으로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했다.그녀는 설거지를 하는 와중에도 어떻게 그럴만한 이유를 만들어 병원으로 돌아가겠다고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할 말을 다 생각해둔 그녀가 주방에서 나왔을때 연재준은 거실이 아닌 서재에 있었다.말도 없이 가버리기 뭣했던 유월영은 할 수 없이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연재준은 책상에 앉아 이어폰을 끼고 컴퓨터를 마주하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영어가 들리는걸 보니 아마 화장 회의를 하고 있는것 같다.속으로 옳다구나 생각하는 유월영이다.연재준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자 유월영은 얼른 문 쪽을 가리키며 간다는 손짓을 했다.연재준이 이어폰을 빼고 손에 쥐더니 말한다.“먼저 자.”그리고는 다시 이어폰을 낀 채 더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유월영은 몇초동안 서있다가 그제야 천천히 안방으로 걸음을 옮겼다.침대 맡에 앉은 그녀는 일단 큰 언니에게 병원 있냐는 문자를 보냈다.큰 언니에게서 답장이 왔다.“하 비서라는 분이 병원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돌아왔어. 무슨 일 있으면 어차피 의사가 알려준다고 하면서.”큰 언니가 한 마디 더 보탠다.“서우도 나 찾더래.”“알겠어.”큰 언니가 또 문자를 보내왔다.“수술도 무사히 끝났는데 너도 걱정 말고 푹 쉬어.”“언니 잘 자.”홈에 나오자 신연우가 보낸 문자가 보인다.
연재준은 잠시 망설이다 그제야 휴대폰을 집어들었다.백유진의 횡설수설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사장님! 사장님! 제, 제 차가 사람을 친것 같아요. 어떡해요? 어떡해야 돼요?”연재준이 미간을 찌푸린다.“지금 어딘데?”“지금......”백유진이 울먹거리며 위치를 말해준다.“사장님, 저 너무 무서워요......”물을 잠근 그가 침착하게 말한다.“괜찮아, 지금 바로 갈게.”욕실에서 나온 그는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다 다시 고개를 돌려 침대에 누워있는 유월영을 바라보더니 그대로 나가버렸다.문이 닫기는 소리에 유월영이 잠시나마 눈을 뜬다.연재준이 나갔을거라 짐작하긴 했으나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뒤척이다가 다시 잠에 든다.연재준이 자기 발로 나갔다니, 이보다 좋을순 없다.그렇게 유월영은 이튿날 아홉시가 넘어서야 잠에서 깼다.집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고 연재준도 아직 돌아오지 않은듯 하다.간단히 세수를 하고 떠나려고 할때 마침 연재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서재 책상 맨 위에 있는 서류 열어서 봐봐, 마지막 사인한게 누군지. 마침 너 오늘 할 일도 없으니까 서류도 보면서 미리 적응 좀 해두고.”“사장님, 저 한참전에 벌써 나왔는데요.”그러면서 빠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현관으로 이동하는 유월영이다.다음 순간 ‘띠--’하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잠긴다.깜짝 놀란 유월영이 다급히 손잡이를 흔들어보지만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연재준의 홀가분해하고 조롱 섞인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흘러나온다. “거긴 감시 카메라 없는줄 알아?”“......”유월영이 다급히 말을 바꾼다.“사장님, 전 아직 정식 해운그룹 직원이 아니라서요. 함부로 손대기가 그렇네요.”“내가 방금 한 말 못 들었어?”미리 적응 좀 해두라던 그의 말.“얼른.”유월영이 또다시 손잡이를 들썩이자 그걸 본 연재준이 냉랭하게 말한다.“이미 원격으로 잠겼으니까 넌 오늘 못 나가.”유월영은 한숨을 푹 쉬고 서재로 들어가려 한다.하지만 서재 입구에 도착한 그녀는
계약서를 훑어보던 유월영은 말도 안 되는 갑과 을의 비례를 보더니 저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린다.시세에 한참이나 못 미치는 이 가격을 보고도 윤영훈은 어찌 사인을 했을까?다시 계약일을 확인하니 유람선 이벤트 며칠 뒤다......아마 연재준이 유람선에서 윤영훈을 구슬려 계약을 성사시켰을 가능성이 컸다.그 날 윤영훈은 유월영이라는 이 ‘조건’을 들먹이며 그녀를 가지겠다고 했다. 허나 유월영이 거절했으니 연재준이 다른 방법으로 그를 설득했던 걸까?잠시 멈칫한 유월영은 그제야 연재준이 자신에게 이 일을 맡긴 이유를 눈치챘다.그건 거짓말이고 연재준은 이 계약을 앞세워 다시금 그녀에게 해명을 하고 싶었던 거다, 그 날 자신은 그녀를 윤영훈에게 넘겨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는걸 말이다.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윤영훈에게 제시했던건 모두 그녀와는 무관한 다른 별개의 조건이었던거다.과연 유월영은 이걸 믿을까?믿는다.근데 믿는게 또 어때서?연재준이 자꾸만 이 일에 집착하면서 몇 번이고 해명을 하는걸 보면 그가 처음으로 곁에 돌아오라고 했을때 유월영이 참지 못하고 이 일을 들먹여 모욕감을 줬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허나 그들 사이에 생긴 일이 어디 이것 뿐인가.유월영은 무덤덤하게 계약서를 다시 엎어버렸다.하기 귀찮다.어차피 그는 처음부터 딴 속셈을 가지고 있었을텐데 뭘.유월영이 또다시 연재준에게 문자를 해 나가게 해달라고 한다.답장을 받지 못한 유월영이 그에게 연락을 하자 그는 거절 버튼을 누르고 그제야 세 글자를 보낸다.“회의 중.”짜증이 났다. 나가지도 못하는데 쓴소리는 못하겠고. 적어도 엄마가 안정을 되찾을 72시간 사이에는 고분고분 그의 말에 따라야 했다.큰 언니에게 연락해 엄마 보러 병원에 갔냐고 물으니 언니가 말해준다.“아직 못 갔어, 그럴 시간도 없고. 아빠 나오신건 알아? 아빠 다리도 감옥에서 골절되신거라 거기서 직접 집까지 데려다 주신대. 지금 내려가서 아빠 보려고.”유월영이 넋이 나간다.이윽고 윤미숙이 떠오른다. 아마 그 분이 해
다 유월영 때문이다.갑자기 감시 카메라 얘길 꺼내는 바람에 친히 폴더에 들어가봤더니 역시나 폴더는 자동 리셋 된 채 텅 비어있었고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다.허나 영상은 없어졌다 해도 머릿속 기억이 어찌 지워지겠는가. 그녀와 함께 했던 뜨거웠던 나날들을 떠올리던 연재준은 회의에마저 집중하지 못한 채 딴 생각을 했다.차라리 와서 얼굴이라도 보려고 하니 이 여자는 소파에서 단잠에 빠져있다.한 쪽으로 고개를 젖히고 있으니 우아하고 매끈한 목선이 적나라하게 보인다.피부는 또 어찌나 희고 얇은지 이따끔씩 핏줄이 보이기까지 했다.성에 대한 생각들은 인간이 원시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장 저급한 인식이다. 예전의 그는 이 곳에 그리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지 않은 채 그저 정상적인 욕구만을 해소해 왔었다.허나 유월영과 떨어져 지낸 몇개월 동안에야 자신이 얼마나 보고싶어 하는지를 몸소 깨닫게 된 연재준이다.유월영의 입술을 탐하던 연재준은 손을 뻗더니 그녀의 잠옷을 아래에서 위로 쭉 들어올렸다. “......”그가 갑자기 돌아올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유월영이다. 그녀는 강제로 소파에 속박된 채 도망칠래야 칠 수가 없게 됐다.그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다. 가까이서 보니 미간은 조각한 듯 입체적이고 눈썹 숱은 또 어찌나 많은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의 높은 콧대가 유월영의 얼굴에 닿는다. 가뜩이나 공격적인 이목구비는 지금의 충동적인 행동과 합쳐서 더욱 공격성을 띠고 있었다.두 사람 모두 거친 숨을 몰아쉰다. 둘의 호흡이 얽히고 설키며 분위기는 더욱 후끈 달아올랐다.며칠내내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드디어 하늘이 개이고 햇살이 통유리를 통해 방 안 전체를 따스히 비춰주며 이따끔씩 버들개지 그림자가 아른거린다.무방비 상태로 당하고 있던 유월영의 미간이 들썩거린다. 여기저기 휩쓸고 다니는 그의 손길에 당장이라도 그를 밀쳐내고 싶었다.분위기가 한 층 더 달아오르려는 찰나, 적막을 깨고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다.그를 떼어낼 명분이 생긴 유월영은 얼른 그의 손을
비누와 솔로 손가락을 벅벅 씻어내던 유월영은 고개를 들어 거울을 들여다 보다 문득 목에 선명히 남은 붉은 자국을 발견한다.두 눈을 질끈 감는다.방금 같은 예고도 없었던게 차라리 훨씬 나았을수도 있다. 그렇게 또 한 번 위기를 넘기지 않았는가.유월영은 다시 눈을 뜨고 안정을 되찾았다.몇번이나 손을 헹궈낸 뒤 컨실러로 자국을 가린 유월영은 옷장에서 목폴라를 꺼내 입었다.잠옷을 옷 바구니에 던지려고 하니 안에는 연재준의 옷이 보인다. 어제 입은 옷은 아닌거 같은데......어젯밤 나갈때 입었던 옷인가?다시 한번 옷을 바라봤을땐 흰색 겉옷에 묻은 핏자국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방금 전 연재준의 몸엔 상처가 없어보였는데?호기심이 발동한 유월영은 옷을 꺼내 유심히 살펴본다. 이 핏자국은 누군가 부주의로 묻혔을거라는게 그녀의 추측이다. 이런 비싼 옷감들은 냄새가 배기 마련인데 거기에선 은은한 소독 냄새가 났다.병원에서 묻힌건가?이 정도면 병원에 한참이나 있었던게 아닐까?갑자기 이유도 없이 한밤중에 병원엔 왜 갔지?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방을 나오니 연재준도 새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다. 슈트가 아닌 검은색 울코트는 그의 몸매를 더욱 부각시켰고 마치 꼿꼿하게 뻗은 나무 한 그루를 연상시켰다.차에 올라 유월영은 연재준에게 부탁하듯 말한다.“사장님, 밥 다 먹고 저 병원 가서 엄마 보고 싶어요.”연재준은 앞을 바라보고 있다. 차창에 어렴풋이 비친 그의 옆모습은 우아하고 선명하기 그지 없다.“어머니 봐주시는 분은 조이 선생님 조수셔. 조수라고는 하시지만 교수님 직책을 맡고 계시는 분이시니까 네가 가서 지킬 필요는 없다 이 말이야.”“사장님은 정말 이런 제 심정 이해 못 하세요?”유월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한다.“핏줄과도 같은 가족이 입원하면 할 수 있는게 없다는걸 뻔히 알면서도 곁에 있어주고 싶은게 사람 마음이라고요. 만약에, 정말 만약의 상황이 와도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볼 수 있다며 한 평생 후회하지는 않을거예요.”연재준은 한 손으로 핸들을 돌
유월영이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어젯밤엔 너무 단잠에 빠져서 몰랐네요.”연재준은 그런 유월영을 바라보며 심오한 눈빛을 한다. 그리고는 손을 다 닦은 뒤에야 입을 연다.“그 말 뒤엔 뭐하러 갔었냐는 질문이 따라와야 되는거 아닌가?”유월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예전에도 사장님 사생활엔 간섭한 적 없는데요?”연재준은 수건을 내려놓으며 덤덤하게 말했다.“앞으론 더 물어도 돼.”이해가 안 된다. 고작 도구에 불과한 사람한테 뭔 요구가 이렇게나 많을까?순간 눈 앞에 펼쳐진 경치마저 흥미가 떨어진다.유월영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72시간, 딱 72시간 만큼은 그가 뭘 하든 전부 응해줄수 있는 유월영이었다.연재준이 몸을 일으키더니 유월영에게로 다가온다.“뭐 봐?”아래를 슬쩍 내려다보던 그가 한 마디 한다.“배 타고 싶어?”“아니요, 그냥 보고 있는거예요.”“타고 싶으면 데리고 갈게.”연재준은 냅다 룸 밖으로 나가버린다. 진짜로 그냥 보고만 있었던것 뿐인데......결국 어쩔수 없이 따라나선 그녀다.연재준 그는 늘 이렇게 독단적인 사람이었다.간단히 몇마디 주고 받더니 이윽고 매니저가 바로 사공을 데려와 배를 뭍에 대라고 한다.그는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배가 가까워지길 기다리더니 훌쩍 올라탔다. 그리고는 유월영에게로 손을 뻗었다.유월영은 멍하니 그의 손금을 바라보다가 그가 시선을 자신에게로 옮기려 하자 그제야 손을 잡았고 폴짝 배 위로 올라탔다.이윽고 배 끄트머리에 서있던 뱃사공이 호수로 노를 젓기 시작했다.두 사람을 실은 작은 나룻배는 조금 흔들거리며 나아갔지만 호수 한복판에서 바라보는 뭍의 풍경은 실로 달랐다.둘은 선실로 들어가지 않은채 뱃머리에 서있었다. 넘실거리는 호숫물에 두 사람의 모습이 투영되지만 그들은 좌우 양쪽에 갈라져 같은 프레임 안에 들어와 있진 않았다.“고향엔 이런 이벤트 없나?”그의 기억속, 오래된 마을이라고 할 만한 곳엔 거의 대부분 이런 이벤트가 있어 많은 여행객들의 환상을 실현시
둘은 거의 동시에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호수와 붙어있는 창문에 남녀가 기대있다.남자를 바라보니 어딘가 익숙하다. 이게 정말 우연인가?바로 윤영훈이다.그는 신주 사람이 아닌 의성 사람이었으나 종종 신주로 와 연회에 참석하기도 했었다. 허나 때마침 이곳 중식당에서 그를 마주치게 될줄은 상상도 못했던거다.그의 곁에 서있는 처음 보는 앳된 여자는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모가 출중해 보이는 것이 이목구비가 화려한게 누가 봐도 미인이었다.유월영은 잘됐다 싶어 싸움이라도 나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윤 사장님이세요.”“나도 봤어.”연재준은 그녀를 바라보더니 잠시 하려던 말을 접어두고 뱃사공에게 뭍으로 가라고 말했다.창가에 서있던 두 사람도 자리를 떴다.그들이 뭍에 도착했을때 윤영훈도 음식점 밖에 나와 있었다.윤영훈은 슈트, 여자는 롱 원피스를 입고 있다. 유월영의 눈썰미는 정말 괜찮았다. 여자는 과연 아름다웠고 특히나 이목구비가 외국인마냥 이국적이었다.유월영은 예의상 얼른 시선을 거두고 연재준의 뒤를 따랐다.“창 밖 풍경이나 보려고 했는데 연 사장이 보여서요. 배 타는거 재밌나 봐요. 연 사장도 흥미를 갖는걸 보니.””어릴때 애송이네 집에서 못 놀게 하니까 부러워하는것 같아서 소원 이뤄주려는 거였어요.”“......”당황스럽다, 이건 유월영을 말하는걸까?애송이라니. 이 호칭이 연재준 입에서 나오니 역겹기 그지없다.윤영훈과 여자의 시선이 동시에 유월영에게 꽂힌다.불현듯 여자의 눈가가 반짝 빛난다.어딘가 낯이 익다고 여기던 윤영훈은 한참이 지나서야 기억이 난듯 하다.“혹시......연 사장님 비서 아니에요?”동시에 체스를 하던 그 날 일이 떠오른다. 윤영훈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유월영을 슥 훑더니 흥미진진하다는듯 입꼬리를 들어올린다.“연 사장님 직원복지 너무 좋으신것 아니에요? 소원도 들어주시고.”유월영은 눈을 아래로 내리깐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연재준도 안부인사를 전하며 되물었다.“윤 사장님은요? 신주까지 오시고
“......”그제야 유월영은 유람선에서 연재준이 2층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던게 생각났다. 윤영훈은 테이블에 앉아 유월영더러 담배에 불을 붙이라고 지시했었는데.그때는 시키는 대로 하는게 싫었던 유월영이 그의 요구를 거절했었다.그런 윤영훈이 별안간 다 지나간 얘기를 꺼낼줄은 상상도 못했던거다.정신을 차려보니 또다시 그때와 같이 멸시당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에 더해 오늘은 농락같은 느낌까지 든다.울화통이 치민다.허나 다른것도 아니고 고작 불 붙이는것 뿐인데 화를 낼만한 명분도 없었던거다.연재준은 무표정으로 유월영을 쳐다보더니 계속해서 윤영훈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기분 탓인지 방금보다 훨씬 차가운 말투를 하고 있었다.조용히 먹고있던 유월영이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신연우가 데이터에 관해 물어보는 문자에 얼른 답장을 한다.신연우가 자연스레 질문을 이어간다.“어머니는 어떠세요? 아직도 병원에 계신거죠? 제가 큰 어머니 뵈러 갈게요.”천천히 청경채 하나를 씹고 있던 유월영은 뭔가 생각하는듯 싶더니 답장을 보냈다.그리고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식사에 집중하는데.윤영훈은 화는 나지만 말은 못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코웃음 쳤다. 일개 비서가 그렇지 뭐.그리고는 또다시 연재준에게 말을 거는 윤영훈이다.“듣자 하니 앞전 영안에서 큰 프로젝트 하나 맡으셨다던데 맞아요?”“소식 참 빠르시네요.”연재준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소문을 들었거든요. 거기서 알박기 세대주 마주쳤다고 하시던데 처리 잘 안 되시면 제가 도와드릴수도 있어요.”윤영훈이 뽀얀 담배연기를 뱉어내며 말한다.“저희 부동산 종사자들은 허다하게 만나는 사람들이거든요. 대처방법은 저희가 더 잘 알죠.”연재준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다.“별 일도 아닌데요. 윤 사장님께 민폐 끼치고 싶진 않네요. 마음만 받겠습니다.”앉은 자리에서 냅다 담배 세 까치를 피는 윤영훈은 어지간한 담배 중독이 아닌것 같다. 다행히도 고급 담배여서 코를 찌르는 니코틴 냄새가 조금 덜 했지, 그게 아니었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
이승연은 속았다고 느꼈다.이 남자의 따뜻함에 넘어가 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기분 좋겠지? 드디어 내 유산을 손에 넣게 됐으니.”이혁재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유산, 유산, 유산. 왜 항상 이 얘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그는 복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배를 감싸안았다.“여보, 내가 돈이 부족해 보여? 난 돈이 부족하지 않아. 지금 있는 돈으로 다음 생까지 살아도 충분해. 그 많은 돈을 뒀다 뭐 하겠어? 난 당신 돈을 원하지 않아. 그 유산이 당신한테 주는 부담을 덜어주고 싶을 뿐이야. 난 그냥 당신을 돕고 싶어.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믿어줄 거야?”이승연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녀는 그런 시선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충성스러운 강아지를 다독이듯. 이혁재는 항상 그녀에게 충실한 강아지처럼 느껴졌다.그 후로 두 사람은 함께 평생을 보내기로 결심했고 아이가 태어나면 행복한 세 식구가 될 거라고 믿었다.그러나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법정에서 사고가 발생하며 아이를 잃었고 이승연은 깊은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처음 한 달 동안 이혁재는 살이 빠져 송장처럼 변해갔다. 그는 며칠씩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으며 잠조차 자지 않았다. 생존 본능에 이끌려 겨우 물 한 모금을 마시곤 했지만 결국 집에서 쓰러지고 말았다.공주연이 아들을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들은 그가 극심한 기아 상태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거의 굶어 죽을 뻔했다.이혁재가 깨어났을 때 공주연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뺨을 내리쳤다.“넌 네 엄마도 필요 없니? 네 아빠는 이미 날 버렸어. 세상에선 네가 전부야! 그런데 너마저 날 버리려 해?”하지만 이혁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공주연은 울면서 말했다.“승연이 아직 죽지 않았어! 곧 깨어날 거야. 그런데
이혁재의 시점사실, 두 사람의 불화와 이별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갈등이 발생했다.이혁재의 어머니인 공주연이 이승연에게 출산을 재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공주연은 겉으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승연의 유산을 노리고 있었다.그녀의 계산은 간단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씨 성을 가진 그 아이가 이승연의 유산을 당당히 상속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이혁재 역시 어머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아이에게 상속자가 생기면 이승연의 친척들도, 우리 가족도 유산에 대한 욕심을 접고 물러나겠지. 그러면 그녀의 부담도 줄어들 거야.”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이승연에게 가서 아이를 갖자고 제안했다.그러나 이 말을 들은 이승연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가 지금 따로 살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갖자고?”그리고 이내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결혼 전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여기에 사인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이승연은 이미 이혁재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그녀의 유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혁재는 말로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치사한 방법을 선택했다.그녀가 복용하는 피임약을 엽산제와 임신 보조제로 몰래 바꿔치기한 것이다. 결국 이승연은 그의 의도대로 임신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이승연은 약을 바꿔치기한 사실에 격분했고 심지어 이혁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반면, 이혁재는 호텔에서 이승연과 오성민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오성민과 다시 만나고 있다고 오해했다.그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크게 다퉜고 이혁재는 한강에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너 정말 적당히 좀 해라.”연재준이 기가 막혀 혀를 찼다.“뭘 적당히 하라고!”이혁재는 술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내 첫사랑은 이제 날 원하지 않는데, 내가 살아서 뭐 하겠어!”서지욱이 나서서 말렸다.“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그냥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필요한 걸 얻는 공정한 거래일 뿐이야. 누구도 누구에게 빚지지 않아. 하지만 네가 이 결혼이 억울하고 원하지 않는다면 난 다른 사람을 찾으면 돼. 상관없어.”이승연의 단호한 말에 이혁재는 심장이 벌집처럼 무너져 내렸다.하지만 그는 자신을 위로했다. 적어도 그녀가 애초에 다른 사람을 찾지 않고 자신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자신이 그녀의 눈에 들어올 만큼의 가치는 있었다고 믿으려 했다.이혁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물론 난 이 결혼을 원하지. 누나랑 결혼하고 싶어서 얼마나 애타는지 모를 거야. 게다가 누나 가문의 그 거대한 유산에 누가 눈독을 들이지 않겠어?”사실 이혁재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녀의 유산을 탐내는 사람들로부터 지켜줄 강력한 방패가 되어주겠다는 뜻이었다.그러나 그는 또다시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이승연은 “역시 너도 내 유산 때문에 결혼하려는 거구나”라는 뜻이 담긴 냉소적인 눈빛을 보냈다.그 눈빛을 마주한 이혁재는 차라리 땅속으로 숨고 싶었다. 그는 평소 말을 잘하는 사람인데 왜 이승연 앞에만 서면 이렇게 서툴러지는지 알 수 없었다.그는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더 나쁜 인상을 주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결국 두 사람은 서로 기분이 상한 채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다.그나마 유일한 희소식은, 이혁재가 열일곱 살 때부터 꿈꿔왔던 첫사랑과 결혼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혼례를 치렀고 첫날밤을 함께 보냈다.이승연의 시점이승연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나며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유산을 남겼다.그 유산은 주변 사람들을 질투와 광기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생전에 친절하고 따뜻했던 삼촌과 고모 같은 친척들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단 하룻밤 사이에 괴물로 변했다.그녀는 영화에서 좀비로 변하는 인간들을 떠올렸다.정상이던 사람들이 물리면 금세 인간성을 잃고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괴물로 변하는 것처럼 그녀의 친척들도 오로지 그녀의 유산을 탐하는 괴물이 되어버렸다.하지만 이승연은 변호사로서 법을 잘 알고 말재
이혁재의 시점이승연과 오성민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은 이혁재였다. 그래서 이승연이 자신의 청혼을 거절했을 때 그는 그녀가 아직도 오성민을 잊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화가 난 그는 집 안에서 폭주하기 시작했다.그는 첫사랑이란 게 원래 잊기 어렵고 학창 시절부터 이어진 감정에, 그리고 7년이라는 긴 시간을 하루아침에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성민이 완전한 쓰레기라는 것이었다.오성민은 자기 인턴과 바람을 피웠다. 이런 사람은 인간 이하의 짐승에 불과했고 이승연은 왜 그런 사람을 잊지 못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대체 그런 짐승만도 못한 놈보다 어디가 부족하다고!”분노에 찬 이혁재는 다음 날도 2만 보를 걸으며 화를 삭였다. 그러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 다시 한번 가보세요! 어제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승연이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룻밤 생각했으면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을 거예요.”그는 자신이 오성민보다 못할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 아들의 말대로 공주연은 다시 한번 이승연을 찾아갔고,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돌아와 말했다.“여전히 거절하더구나.”이혁재는 소파에 쓰러져 한쪽 다리와 팔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원한에 사로잡힌 시체처럼 어두운 기운이 그를 감쌌다.그러다 그는 벌떡 일어나 이승연을 직접 찾아갔다.“누나한테 직접 물어봐야겠어. 왜 나랑 결혼하지 않으려는지!”사무실에서 문서를 검토하던 이승연은 담담히 말했다.“너는 나보다 너무 어려.”“그게 이유라고?”그러자 이혁재는 불쑥 다가가 이승연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이승연은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붙잡으며 외쳤다.“지금 뭐 하는 거야!”이혁재는 그녀를 안고 빙글빙글 돌며 깡충깡충 뛰었다.“너 미쳤어? 빨리 내려놔!”이승연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며 말했다.“내가 단지 누나보다 나이가 어린 것뿐이지. 다른 모든 면에서는 누나 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