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은 거의 동시에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호수와 붙어있는 창문에 남녀가 기대있다.남자를 바라보니 어딘가 익숙하다. 이게 정말 우연인가?바로 윤영훈이다.그는 신주 사람이 아닌 의성 사람이었으나 종종 신주로 와 연회에 참석하기도 했었다. 허나 때마침 이곳 중식당에서 그를 마주치게 될줄은 상상도 못했던거다.그의 곁에 서있는 처음 보는 앳된 여자는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모가 출중해 보이는 것이 이목구비가 화려한게 누가 봐도 미인이었다.유월영은 잘됐다 싶어 싸움이라도 나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윤 사장님이세요.”“나도 봤어.”연재준은 그녀를 바라보더니 잠시 하려던 말을 접어두고 뱃사공에게 뭍으로 가라고 말했다.창가에 서있던 두 사람도 자리를 떴다.그들이 뭍에 도착했을때 윤영훈도 음식점 밖에 나와 있었다.윤영훈은 슈트, 여자는 롱 원피스를 입고 있다. 유월영의 눈썰미는 정말 괜찮았다. 여자는 과연 아름다웠고 특히나 이목구비가 외국인마냥 이국적이었다.유월영은 예의상 얼른 시선을 거두고 연재준의 뒤를 따랐다.“창 밖 풍경이나 보려고 했는데 연 사장이 보여서요. 배 타는거 재밌나 봐요. 연 사장도 흥미를 갖는걸 보니.””어릴때 애송이네 집에서 못 놀게 하니까 부러워하는것 같아서 소원 이뤄주려는 거였어요.”“......”당황스럽다, 이건 유월영을 말하는걸까?애송이라니. 이 호칭이 연재준 입에서 나오니 역겹기 그지없다.윤영훈과 여자의 시선이 동시에 유월영에게 꽂힌다.불현듯 여자의 눈가가 반짝 빛난다.어딘가 낯이 익다고 여기던 윤영훈은 한참이 지나서야 기억이 난듯 하다.“혹시......연 사장님 비서 아니에요?”동시에 체스를 하던 그 날 일이 떠오른다. 윤영훈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유월영을 슥 훑더니 흥미진진하다는듯 입꼬리를 들어올린다.“연 사장님 직원복지 너무 좋으신것 아니에요? 소원도 들어주시고.”유월영은 눈을 아래로 내리깐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연재준도 안부인사를 전하며 되물었다.“윤 사장님은요? 신주까지 오시고
“......”그제야 유월영은 유람선에서 연재준이 2층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던게 생각났다. 윤영훈은 테이블에 앉아 유월영더러 담배에 불을 붙이라고 지시했었는데.그때는 시키는 대로 하는게 싫었던 유월영이 그의 요구를 거절했었다.그런 윤영훈이 별안간 다 지나간 얘기를 꺼낼줄은 상상도 못했던거다.정신을 차려보니 또다시 그때와 같이 멸시당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에 더해 오늘은 농락같은 느낌까지 든다.울화통이 치민다.허나 다른것도 아니고 고작 불 붙이는것 뿐인데 화를 낼만한 명분도 없었던거다.연재준은 무표정으로 유월영을 쳐다보더니 계속해서 윤영훈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기분 탓인지 방금보다 훨씬 차가운 말투를 하고 있었다.조용히 먹고있던 유월영이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신연우가 데이터에 관해 물어보는 문자에 얼른 답장을 한다.신연우가 자연스레 질문을 이어간다.“어머니는 어떠세요? 아직도 병원에 계신거죠? 제가 큰 어머니 뵈러 갈게요.”천천히 청경채 하나를 씹고 있던 유월영은 뭔가 생각하는듯 싶더니 답장을 보냈다.그리고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식사에 집중하는데.윤영훈은 화는 나지만 말은 못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코웃음 쳤다. 일개 비서가 그렇지 뭐.그리고는 또다시 연재준에게 말을 거는 윤영훈이다.“듣자 하니 앞전 영안에서 큰 프로젝트 하나 맡으셨다던데 맞아요?”“소식 참 빠르시네요.”연재준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소문을 들었거든요. 거기서 알박기 세대주 마주쳤다고 하시던데 처리 잘 안 되시면 제가 도와드릴수도 있어요.”윤영훈이 뽀얀 담배연기를 뱉어내며 말한다.“저희 부동산 종사자들은 허다하게 만나는 사람들이거든요. 대처방법은 저희가 더 잘 알죠.”연재준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다.“별 일도 아닌데요. 윤 사장님께 민폐 끼치고 싶진 않네요. 마음만 받겠습니다.”앉은 자리에서 냅다 담배 세 까치를 피는 윤영훈은 어지간한 담배 중독이 아닌것 같다. 다행히도 고급 담배여서 코를 찌르는 니코틴 냄새가 조금 덜 했지, 그게 아니었더
서영희가 입술을 꽉 깨물며 몸을 일으킨다.“오빠 잠시만요.”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룸을 나가는데.......연재준은 회사로, 유월영은 병원으로 가야한다.입구에서 흝어지며 유월영이 형식적인 작별인사를 건넸다.“사장님, 저 먼저 가볼게요.”연재준이 그녀를 흘겨보며 말한다.“신고 네가 한 거야?”유월영이 전혀 티내지 않고 말한다.“진짜 저 아니에요.”연재준은 믿지 않는 눈치로 입꼬리를 슬쩍 올린다.“잘못했다고 말한것도 아닌데 뭘.”그렇게 말한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정도로 바보가 아니다. 세상에 믿을만한건 자신 뿐이었으니.다른 사람은 언제 뒷통수를 칠지 가늠할수가 없다.“정말 제가 한거 아니라니까요.”연재준도 더는 꼬치꼬치 따지기 싫었는지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게슴츠레 바라보며 말했다.“앞으론 나 빼고는 해달라는대로 해주지 마---시키면 시키는대로 다 하지 말고, 그런다고 돈 주는것도 아니잖아?”유월영이 입술을 꽉 깨문다.“네.”연재준이 또 한마디 거든다.“어머니 보고 얼른 와서 짐 챙겨, 주말에 산장 놀러가게.”유월영이 뭐라고 하려 하자 연재준은 그녀의 턱을 흔들며 말했다.“아님 계속 너희 아버지에 대해 의논하고 싶어?”“......”이 주제는 그의 심기를 건드려 엄마를 보러 가는 일에 차질이 생기는것 외엔 그 어떤 의의조차 없었다. 결국 유월영은 산장에 가겠다고 응할수 밖에 없었다.그는 한번 결정한 일엔 절대 말을 바꾸는 일이 없는 사람이다.“알겠어요.”그제야 연재준이 턱을 놔준다.유월영은 택시에 앉아 병원으로 떠난다.운전기사도 연재준을 데리고 왔고 마침 그가 차에 올라타려고 할때 등 뒤에서 웬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연 사장님.”뒤돌아보니 서영희가 서있다.“서 아가씨, 무슨 일이라도?”서영희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가 짙은 갈색의 눈동자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본다.“진짜 저 기억 못 하시는거예요?”연재준이 실눈을 뜬다.뭍에서 처음 그녀를 마주쳤을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으나 누군인지는 생각이
그랬구나.연재준은 어젯밤 백유진의 사고 때문에 동해안 집을 떠났던거다.코트에 밴 핏자국과 소독제 냄새도 전부 백유진 거였구나.밤새 곁에 있어줬다고? 뭐 관심이 많나보네.유월영은 눈앞의 모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난 오늘밤에도 동해안에 있을거야. 내일도 아마 연재준이랑 같이 있을거고. 백유진, 계속 연락해서 불러내도 돼. 연재준이 가고 싶어하면 흔쾌히 보내줄테니까.”넋이 나간 백유진은 허리를 바짝 세우며 소리쳤다.“너! 너!”이내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상처를 여전히 입었는지 말도 못하고 있었다.백유진의 엄마는 딸보다 더 화가 났는지 냅가 유월영을 밀려 든다.“이 년이! 뭐라는거야!”유월영은 가볍게 그녀를 피하고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씨익 올린채 자리를 떴다.백유진 엄마는 유월영의 뒷통수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둘 사이에 끼어든 주제야 감히 어디서 큰 소리야! 뻔뻔한것 같으니라고!”유월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모녀는 유월영의 말을 거의 전쟁선포로 받아들인것 같다.허나 유월영은 정말 진심을 담은 속심말을 그대로 전한것 뿐이다. 정말 누구보다도 백유진이 힘을 내 연재준을 칭칭 감아 자신에게 말 걸 겨를조차 없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유월영이다.중환자실로 가니 놀랍게도 엄마는 이미 의식을 되찾으신 상태다. 호스를 달고 있어 말을 할수는 없으시지만 말이다.중환자실 간호사가 유월영을 알아본다. 늘 걱정을 한가득 안고 며칠 내내 곁을 지키고 있던 유월영을 기억했던 그녀는 엄마의 귀에 대고 몇마디를 한다.그러자 엄마가 겨우겨우 손을 들어 눈꺼풀을 깜빡이신다.유월영은 그게 엄마의 인사임을 알고 있었다.그 순간 만큼은 며칠동안의 인내심이 참 의미있게 느껴졌다.엄마는 정말 하루가 다르게 회복중이셨던거다.전엔 의식이 없으셔서 곁을 떠나기 싫었지만 이젠 의식을 되찾으시니 더우기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는지 유월영은 또다시 병실 유리로 엄마를 들여다봤다.연재준도 밤새 백유진 곁을 지키는데 유월영은 왜 엄마 곁을 지키지
“......”차라리 연재준이 죽는걸 택하겠다.겨울이고 땀도 안 나니 이틀정도는 괜찮을거다.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것도 아니다. 유월영은 옷가게 사장님에게 연락해 비용을 더 얹어주고 퀵으로 보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이미 퇴근한 늦은 시간이라 내일 일찍이 보내줄수밖에 없다는 거다.그들이 산장에 도착했을때 시간은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친히 배웅을 나온 윤영훈은 유월영을 보더니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유 비서도 데리고 오셨어요? 그래요 뭐, 사람 많으면 더 북적거리고 좋으니까. 잠도 안 오고 해서 카드게임 하고 있었는데 같이 하실래요?”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유월영을 바라봤다.“갈래?”유월영이 거절의 의사를 표한다.“사장님, 전 좀 피곤해서요.”“유 비서는 그럼 돌아가서 쉬어요. 잘 쉬어야 내일 잘 놀죠.”윤영훈이 음침한 웃음을 지어보인다.연재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쉬라고 한다.윤영훈이 하인더러 유월영을 방으로 안내하라고 지시한다.바로크 풍의 인테리어를 뽐내는 산장은 화려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복도 벽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유화들이 걸려있었다. 은은한 조명을 수놓은 마당엔 비너스 조각상까지 자리하고 있다.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유월영의 발 아래엔 꽃무늬로 수놓은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있다.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느낌은 마치 구름 위를 거니는 듯 했고 공기속에서조차 고급 향수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문득 무언가 떠오른 유월영이 하인에게 묻는다.“저 혹시 일회용 속옷이랑 생리대 있나요?”하인이 공손하게 답한다.“욕실 서랍에 있습니다.”유월영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알겠어요.”방에 거의 다다를때쯤 유월영은 마주해 다가오고 있는 서영희를 보고 가볍게 목례를 했다.잠시 주춤하던 서영희도 미소를 띠고 인사를 건넨다.이윽고 유월영은 방에, 서영희는 카드게임을 하러 간다.......이곳 산장은 전부 스위트룸으로 방 두개와, 서재, 거실이 갖춰져 있었다.유월영은 곧장 안방으로 들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연재준은 손을 뻗어 탁상등을 켰다.연속 몇번이나 재채기를 한 유월영은 코끝이 빨개져서는 눈가에마저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연재준이 내려다 보고 있는 와중에도 또다시 재채기를 해대는 그녀다.흥미가 떨어진 연재준은 유월영의 몸 위에서 일어나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추워?”유월영이 코를 훌쩍거리며 대답한다.“아마 사장님 몸이 차서 그런걸거예요.”방금 들어온 연재준은 한겨울 새벽녘의 쌀쌀한 한기를 그대로 머금고 들어왔다.그 말에 몸을 슬쩍 뒤로 빼던 연재준은 잔뜩 웅크리고 있는 유월영의 모습을 보고는 또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청바지 입고 자면 안 불편해?”불편해도 참아야지, 그렇다고 호텔 샤워가운을 입을순 없지 않은가? 누구 좋은 노릇 하려고?“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대충 이러고 있으려고요.”연재준은 셔츠 단추를 풀며 유월영을 덤덤히 바라봤다.“네 옷도 캐리어에 있으니까 직접 가져가.”깜짝 놀라는 유월영이다.“사장님 제 옷도 정리해 주신거예요?”연재준이 콧방귀를 뀌며 웃는다.“아니면 내 옷이 더 입고 싶은건가?’조금은 의외다, 그가 옷을 챙겨줬다니.전엔 출장이든 외출이든지를 막론하고 전부 유월영이 정리해줬는데......지금은 아주머니가 정리해 주시겠지?아무튼 본인이 직접 해준건 절대 아닐거라고 믿는 유월영이다.아주머니더러 자신의 옷을 챙기라고 말한것 자체만으로도 양심은 있어보인다.유월영이 마음을 가다듬고 말한다.“제가 며칠동안 옷도 안 갈아입으면 사장님 체면이 말이 아닐것 같아 그게 걱정이더라고요.”“이렇게 내 생각을 해준다고?”연재준은 그런 유월영을 보며 또다시 흥미를 느끼는듯 했지만 그녀는 다시금 종이를 꺼내 콧물을 닦아냈다.“......”연재준은 바로 안방으로 들어가버린다. 유심히 소리를 듣던 유월영은 욕실 문이 딸깍 닫기는 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그쪽으로 향했다.이미 활짝 열려져있는 연재준의 캐리어는 절반이 유월영 옷으로 가득 차 있었다.유월영은 자신의 옷을 모조리 가지고 오더니
연재준은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이내 휴대폰을 꺼내 하정은에게 전화를 걸었다.“조이 선생님 보조 아직도 유월영 어머니 돌봐주고 계셔?”“네, 내일까지 봐주실거예요.”“법무부더러 계약서 준비하라고 해.”......유월영은 조식을 먹으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 하인에게 묻고 있다.하인은 그런 그녀를 식당으로 데려갔다.라면 한 그릇을 시키고 메뉴판을 돌려주려고 하는 찰나 누군가 반대편에 와 앉는다.편한 옷차림의 연재준이었다.“나도 한 그릇 시켜줘.”어쩔수 없이 한 그릇 더 주문하는 유월영이다.썩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는 연재준을 보고 방금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 유월영은 관심섞인 말투로 물었다.“사장님 왜 더 안 주무세요? 어젯밤에도 늦게 주무셨는데.”“누가 잠 다 깨게 만드는 바람에.”연재준은 깨끗한 컵을 가져와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랐다.“그럼 다 드시고 다시 돌아가 주무셔요, 아님 낮잠이라도.”연재준이 새까만 눈동자를 하고 그녀를 바라본다.“너가 옆에서 같이 자줄래?”유월영이 살살 비위를 맞춰주며 말한다.“졸리면 저도 잘게요.”연재준은 시선을 옮기지 않고 계속 유월영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유월영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그와 눈을 마주쳤다. 연재준이 갑자기 묻는다.“어제 병원 갔을때 어머니 어떠셨어?”“이미 깨셨어요.”깨어난 엄마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유월영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선생님이 잘 호전되고 있다세요. 다 사장님이 모셔온 조이 선생님 덕분이에요.”연재준이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그럼 메일 확인해 봐.”“메일이요? 왜요?”휴대폰을 꺼내 메일에 들어가본다.들어가자마자 떡하니 보이는 제목 하나---해운 그룹 업무 계약서.유월영이 놀라기도 전에 연재준은 물 한 모금을 마시더니 무릎에 잔을 받치고 덤덤하게 말했다.“법무부에서 계약서 보냈을거야. 문제 없으며 사인해.”방금 전까지 좋던 기분이 180도 돌변한다!계약서 사인이라......유월영의 눈이 반짝인다.마주 앉아있던 연재준은 조용히 유월영을 바라보고
유월영이 숨을 고르고 침착하게 대답했다.“아니 전 3년이나 5년일줄 알았지, 10년 일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래서 놀랐던거 뿐이에요. 근데 생각해보면 어디서 하든 다 제 일인데 해운 그룹 위해 10년 헌신하는것도 나쁘진 않죠.“연재준이 대답한다.“그럼 사인해. 전자사인도 똑같이 법적효력 있으니까 내가 보고 있을게.“그가 천천히 유월영의 목을 옥죄어온다.유월영이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당연히 사장님 믿지만 이 10년이라는게……제가 80까지 산다고 가정했을때 인생의 8분의 1을 차지하는 거잖아요. 거기다 이미 지나간 25년까지 빼면 얼마 남지도 않았어요.“연재준이 피식 읏음을 터뜨린다.“계약서 작성하라는데 곧 죽을 사람처럼 말하네.““전부는 아니지만 제 목숨 반 정도는 앗아가는거죠.”유월영이 고개를 숙이고 쓴웃음을 지었다.“스물두살 대학교 졸업하고나서 떠나기 직전까지 사장님 따라다녔어요. 장장 3년동안 병가 한번 빼고는 반차 낸적조차 없고요.“화장품이 없어 민낯인 그녀였지만 도자기같은 피부는 아침햇살 아래서도 전혀 굴욕이 없었다. 립스틱과 블러셔만 없을 뿐이지 피부는 여전히 백옥같이 새하얗다.연재준의 눈빛은 바닥이 보이지 않은 시꺼먼 저수지마냥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반대로 고개를 든 유월영의 눈은 그렁그렁해 보이는것이 불쌍하고 처량해보이는 느낌을 물씬 줬다.“제 자리에서 조금 유명세를 떨친다 한들 퇴사직후엔 그 어느 회사에서도 절 채용할 엄두를 못낼텐데 그것마저 수확의 일종인거라면 분명 제가 먼저 사장님 곁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백유진 모녀에게 삿대질을 당하며 내연녀라는 소리를 듣는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인건가요? 사실 제가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유월영은 약한 티를 낸 적이 드물다.아니, 전혀 티 내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겠지.살집도 없는 약해빠진 몸에 목소리도 가냘픈데다 짜증도 낼줄 모르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도 누굴 욕하는 법이 없었지만 그녀는 사실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다.그래서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