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연재준이 죽는걸 택하겠다.겨울이고 땀도 안 나니 이틀정도는 괜찮을거다.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것도 아니다. 유월영은 옷가게 사장님에게 연락해 비용을 더 얹어주고 퀵으로 보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이미 퇴근한 늦은 시간이라 내일 일찍이 보내줄수밖에 없다는 거다.그들이 산장에 도착했을때 시간은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친히 배웅을 나온 윤영훈은 유월영을 보더니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유 비서도 데리고 오셨어요? 그래요 뭐, 사람 많으면 더 북적거리고 좋으니까. 잠도 안 오고 해서 카드게임 하고 있었는데 같이 하실래요?”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유월영을 바라봤다.“갈래?”유월영이 거절의 의사를 표한다.“사장님, 전 좀 피곤해서요.”“유 비서는 그럼 돌아가서 쉬어요. 잘 쉬어야 내일 잘 놀죠.”윤영훈이 음침한 웃음을 지어보인다.연재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쉬라고 한다.윤영훈이 하인더러 유월영을 방으로 안내하라고 지시한다.바로크 풍의 인테리어를 뽐내는 산장은 화려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복도 벽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유화들이 걸려있었다. 은은한 조명을 수놓은 마당엔 비너스 조각상까지 자리하고 있다.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유월영의 발 아래엔 꽃무늬로 수놓은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있다.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느낌은 마치 구름 위를 거니는 듯 했고 공기속에서조차 고급 향수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문득 무언가 떠오른 유월영이 하인에게 묻는다.“저 혹시 일회용 속옷이랑 생리대 있나요?”하인이 공손하게 답한다.“욕실 서랍에 있습니다.”유월영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알겠어요.”방에 거의 다다를때쯤 유월영은 마주해 다가오고 있는 서영희를 보고 가볍게 목례를 했다.잠시 주춤하던 서영희도 미소를 띠고 인사를 건넨다.이윽고 유월영은 방에, 서영희는 카드게임을 하러 간다.......이곳 산장은 전부 스위트룸으로 방 두개와, 서재, 거실이 갖춰져 있었다.유월영은 곧장 안방으로 들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연재준은 손을 뻗어 탁상등을 켰다.연속 몇번이나 재채기를 한 유월영은 코끝이 빨개져서는 눈가에마저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연재준이 내려다 보고 있는 와중에도 또다시 재채기를 해대는 그녀다.흥미가 떨어진 연재준은 유월영의 몸 위에서 일어나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추워?”유월영이 코를 훌쩍거리며 대답한다.“아마 사장님 몸이 차서 그런걸거예요.”방금 들어온 연재준은 한겨울 새벽녘의 쌀쌀한 한기를 그대로 머금고 들어왔다.그 말에 몸을 슬쩍 뒤로 빼던 연재준은 잔뜩 웅크리고 있는 유월영의 모습을 보고는 또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청바지 입고 자면 안 불편해?”불편해도 참아야지, 그렇다고 호텔 샤워가운을 입을순 없지 않은가? 누구 좋은 노릇 하려고?“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대충 이러고 있으려고요.”연재준은 셔츠 단추를 풀며 유월영을 덤덤히 바라봤다.“네 옷도 캐리어에 있으니까 직접 가져가.”깜짝 놀라는 유월영이다.“사장님 제 옷도 정리해 주신거예요?”연재준이 콧방귀를 뀌며 웃는다.“아니면 내 옷이 더 입고 싶은건가?’조금은 의외다, 그가 옷을 챙겨줬다니.전엔 출장이든 외출이든지를 막론하고 전부 유월영이 정리해줬는데......지금은 아주머니가 정리해 주시겠지?아무튼 본인이 직접 해준건 절대 아닐거라고 믿는 유월영이다.아주머니더러 자신의 옷을 챙기라고 말한것 자체만으로도 양심은 있어보인다.유월영이 마음을 가다듬고 말한다.“제가 며칠동안 옷도 안 갈아입으면 사장님 체면이 말이 아닐것 같아 그게 걱정이더라고요.”“이렇게 내 생각을 해준다고?”연재준은 그런 유월영을 보며 또다시 흥미를 느끼는듯 했지만 그녀는 다시금 종이를 꺼내 콧물을 닦아냈다.“......”연재준은 바로 안방으로 들어가버린다. 유심히 소리를 듣던 유월영은 욕실 문이 딸깍 닫기는 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그쪽으로 향했다.이미 활짝 열려져있는 연재준의 캐리어는 절반이 유월영 옷으로 가득 차 있었다.유월영은 자신의 옷을 모조리 가지고 오더니
연재준은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이내 휴대폰을 꺼내 하정은에게 전화를 걸었다.“조이 선생님 보조 아직도 유월영 어머니 돌봐주고 계셔?”“네, 내일까지 봐주실거예요.”“법무부더러 계약서 준비하라고 해.”......유월영은 조식을 먹으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 하인에게 묻고 있다.하인은 그런 그녀를 식당으로 데려갔다.라면 한 그릇을 시키고 메뉴판을 돌려주려고 하는 찰나 누군가 반대편에 와 앉는다.편한 옷차림의 연재준이었다.“나도 한 그릇 시켜줘.”어쩔수 없이 한 그릇 더 주문하는 유월영이다.썩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는 연재준을 보고 방금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 유월영은 관심섞인 말투로 물었다.“사장님 왜 더 안 주무세요? 어젯밤에도 늦게 주무셨는데.”“누가 잠 다 깨게 만드는 바람에.”연재준은 깨끗한 컵을 가져와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랐다.“그럼 다 드시고 다시 돌아가 주무셔요, 아님 낮잠이라도.”연재준이 새까만 눈동자를 하고 그녀를 바라본다.“너가 옆에서 같이 자줄래?”유월영이 살살 비위를 맞춰주며 말한다.“졸리면 저도 잘게요.”연재준은 시선을 옮기지 않고 계속 유월영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유월영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그와 눈을 마주쳤다. 연재준이 갑자기 묻는다.“어제 병원 갔을때 어머니 어떠셨어?”“이미 깨셨어요.”깨어난 엄마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유월영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선생님이 잘 호전되고 있다세요. 다 사장님이 모셔온 조이 선생님 덕분이에요.”연재준이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그럼 메일 확인해 봐.”“메일이요? 왜요?”휴대폰을 꺼내 메일에 들어가본다.들어가자마자 떡하니 보이는 제목 하나---해운 그룹 업무 계약서.유월영이 놀라기도 전에 연재준은 물 한 모금을 마시더니 무릎에 잔을 받치고 덤덤하게 말했다.“법무부에서 계약서 보냈을거야. 문제 없으며 사인해.”방금 전까지 좋던 기분이 180도 돌변한다!계약서 사인이라......유월영의 눈이 반짝인다.마주 앉아있던 연재준은 조용히 유월영을 바라보고
유월영이 숨을 고르고 침착하게 대답했다.“아니 전 3년이나 5년일줄 알았지, 10년 일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래서 놀랐던거 뿐이에요. 근데 생각해보면 어디서 하든 다 제 일인데 해운 그룹 위해 10년 헌신하는것도 나쁘진 않죠.“연재준이 대답한다.“그럼 사인해. 전자사인도 똑같이 법적효력 있으니까 내가 보고 있을게.“그가 천천히 유월영의 목을 옥죄어온다.유월영이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당연히 사장님 믿지만 이 10년이라는게……제가 80까지 산다고 가정했을때 인생의 8분의 1을 차지하는 거잖아요. 거기다 이미 지나간 25년까지 빼면 얼마 남지도 않았어요.“연재준이 피식 읏음을 터뜨린다.“계약서 작성하라는데 곧 죽을 사람처럼 말하네.““전부는 아니지만 제 목숨 반 정도는 앗아가는거죠.”유월영이 고개를 숙이고 쓴웃음을 지었다.“스물두살 대학교 졸업하고나서 떠나기 직전까지 사장님 따라다녔어요. 장장 3년동안 병가 한번 빼고는 반차 낸적조차 없고요.“화장품이 없어 민낯인 그녀였지만 도자기같은 피부는 아침햇살 아래서도 전혀 굴욕이 없었다. 립스틱과 블러셔만 없을 뿐이지 피부는 여전히 백옥같이 새하얗다.연재준의 눈빛은 바닥이 보이지 않은 시꺼먼 저수지마냥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반대로 고개를 든 유월영의 눈은 그렁그렁해 보이는것이 불쌍하고 처량해보이는 느낌을 물씬 줬다.“제 자리에서 조금 유명세를 떨친다 한들 퇴사직후엔 그 어느 회사에서도 절 채용할 엄두를 못낼텐데 그것마저 수확의 일종인거라면 분명 제가 먼저 사장님 곁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백유진 모녀에게 삿대질을 당하며 내연녀라는 소리를 듣는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인건가요? 사실 제가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유월영은 약한 티를 낸 적이 드물다.아니, 전혀 티 내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겠지.살집도 없는 약해빠진 몸에 목소리도 가냘픈데다 짜증도 낼줄 모르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도 누굴 욕하는 법이 없었지만 그녀는 사실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다.그래서
나름의 신경전을 벌인 탓에 힘이 쏙 빠진 유월영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저기 잔디 위에 있는거 과녁 맞죠? 양궁용이에요, 사격용이에요?”웨이터가 아침 식사를 가져다주며 친절히 대답해줬다.“양궁용 과녁입니다. 사격장도 있긴 하나 그건 실내에 있어요.”유월영이 흥미를 보인다.“양궁 표적이구나.”연재준은 버섯새우죽을 한 술 뜨더니 유월영을 보고 말한다.“활 쏘고 싶어? 그럼 내가 너 데리고 갈게.”낮잠과 활쏘기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할거다.아침 식사를 마친 그들은 잔디밭으로 걸음을 옮겼다.둘 뿐인줄 알았던 양궁장엔 신현우와 소은혜, 그리고 처음 보는 여자애가 있었다.여자 둘에 남자 하나라, 꽤나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연재준과 유월영이 다가가자 셋 다 각자 시선을 돌려버린다.신현우가 그들을 바라보며 자연스레 웃었다.“저희만 일찍 나온줄 알았더니 연 사장님과 유 아가씨도 오셨네요?”연재준은 소은혜를 쳐다보더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오늘 날씨가 좋아서 야외 운동하긴 딱이겠더라고요.”신현우가 고개를 끄덕인다.“맞아요, 이틀간 날씨 좋아보여서 영훈씨 제안을 받아들인거죠. 아마 여럿 데리고 왔을겁니다.”말이 나온 김에 그가 곁에 있던 여자애를 소개시켜줬다.“태영건설 따님 임지연이에요.”임지연이 발랄하게 손을 흔들어보인다.“안녕하세요~”연재준이 고개를 까딱한다. 어쨌든 마주쳤으니 그가 신현우에게 묻는다.“신 사장님 같이 하실까요?”신현우가 흔쾌히 수락한다.“마침 그러려던 참인데 잘 됐네요.”소은혜가 별안간 입을 연다.“그럼 팀은 어떻게 정해요? 연 사장님네는 두분이니까 제가 나갈게요.”임지연은 그 말에 반박하며 말한다.“네가 뭔데 나서?”흰색 바탕에 빨간색 포인트를 준 운동복을 맞춰입은 소은혜는 오늘따라 아리땁고 요염해 보였다. 허벅지까지밖에 오지 않는 미니 스커트에도 전혀 추워하지 않는 소은혜가 웃는것 같지도, 웃지 않는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활 쏠줄 아는데 넌
허나 본체 만체 하는 신현우다.임지연은 팔짱을 끼고 기고만장해하며 말했다.“어떤 사람들은 참 비열하단 말이지. 오라는 말도 안했는데 낯짝 두껍게 따라오고는 들러붙어서 떨어지지도 않고 말이야. 받들어 모시는걸 좋아하면 잘 모시기나 할 것이지, 겨우 그만한 가치밖에 없으면서.”이 말은 곁에서 제3자의 입장으로 듣고 있던 유월영마저 거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임지연이 눈을 꿈뻑거리며 말한다.“아이고~ 소대리 오해하지 마, 소대리 말하는거 아니야. 근데 우산 좀 씌워줄래? 소중한 피부 다 타버릴것 같거든~”화장에 가려져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잘 모르겠지만 소은혜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유월영은 이상하게도 소은혜가 임지연의 모욕적인 말을 듣고 감정이 동요한게 아닌 분명 그 말을 듣고도 꼼짝않고 있는 신현우로 인해 더욱 기분이 상한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유월영이 무의식적으로 연재준을 바라본다. 소은혜는 연재준 곁에서도 잠깐 일했었는데 이런 모습을 그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연재준이 미간을 찌푸린다.하지만 그 대상은 소은혜가 아닌 유월영이었다.“너 그 체스트가드 반대로 입은거 아니야?”당황한 유월영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 본다. 정말 반대로 입긴 한것 같다......한 쪽만 있는 체스트 가드는 심장을 보호하기 위해 오른쪽이 아닌 왼쪽에 입어야 했다.“네 심장은 오른쪽에 있나 봐?”연재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가와 도와주려 하자 유월영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치며 말했다.“저 혼자 하면 돼요!”너무 민감한 위치라 안 된다.유월영은 얼른 찍찍이를 떼내 다시 반대로 입는다. 연재준은 체스트가드에 꽉 조여진 굴곡을 바라보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유월영이 갈아입는 사이 소은혜는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은 채 우산을 들고 순순히 임지연 뒤에 서 있었다.유월영은 썩 마음이 좋지 않다. 생각해보면 남자들이란 쉽게 질려하는 동물이라 전엔 아무리 가까운 사이였어도 눈 깜짝할 새에 낯선 사람 취급을 하기도 한다.연재준이 묻는다.“어느 활 고를거
한숨을 쉰 연재준도 활을 빼들었다.세사람의 활 쏘기 실력은 막상막하였지만 임지연은 세번 연속 과녁 근처에도 가지 못한채 한 번은 힘없이 땅에 내리꽂히기도 했다.자연스레 1라운드 승자는 연재준과 유월영이었다.마침 이때 연재준의 휴대폰이 울린다. 그가 신현우에게 눈짓을 보내자 신현우도 고개를 끄덕인다.“편히 연락 받으세요. 전 아가씨한테 배우고 있을게요.”유월영이 SK그룹에 입사하려던걸 연재준은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연재준이 유월영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나긋하게 말했다.“그럼 2라운드는 두 분이 겨루세요. 누가 이기든 다 상관없어요. 유 비서, 잘 가르쳐드려.”유월영이 입술을 깨문다.“네.”연재준은 그제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 연락을 받았다.복합활로 바꾼 신현우가 그녀에게로 다가와 말한다.“복합활은 전통활보다 훨씬 힘이 드는데 아가씨같은 약한 몸에서 어찌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네요.”“힘은 쓰면 생기죠. 전통활은 활 받침대가 없어서 조준하기가 어려워요. 두 분 전통활 잘 다루시던데 그게 더 대단하신거죠.”유월영이 진심으로 말했다.“저희는 오히려 받침대가 있는게 더 구속이라고 느껴지던데요.”그러면서 신현우가 활시위를 당긴다.유월영이 눈썹을 치켜든다. ‘그래서 그런거였구나’라는 느낌이 드는 신현우의 말이었다.복합활에 있는 받침대는 활을 어디에 놔야 하는지, 어떻게 쏴야 하는지를 정해주고 있었다.허나 연재준이나 신현우같은 대기업 사장들은 본래가 누군가에게 제한당하고 조종당하는걸 싫어하는데 전통활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 걸까?아마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일거다. 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쏠수 있으니까.이런게 집착성이 강하다는 표현 아니고 뭐란 말인가?신현우가 손을 놓는다. 활은 힘차게 뻗어나가더니 또한번 정중앙에 꽂혔다.저기 멀리 연재준이 돌아온다.“사장님, 이틀째 저 보러 안 오셨어요......”전화너머 처량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연재준은 별다른것 없이 활만 쏘고 있는 둘을 보고 그제야 시선을 거둔다.“일
잔디밭 위엔 여자 세 명만 남아있었다. 별 생각도 없어보이는 임지연은 짜증섞인 목소리로 눈을 희번득거리더니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활 쏘는게 뭐가 재밌다고, 손 아파 죽겠네!”소은혜가 차갑게 쏘아붙인다.“말했잖아, 임 아가씨는 사장님 발목만 잡고 늘어진다고.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지 마구잡이로 낚아채는게 무슨 소용있겠어? 안 되는건 안 되는건지, 어차피 질거면서.”이건 활 쏘기 뿐만 아니라 남자를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말이기도 했다.임지연이 바보도 아니고 그걸 어찌 알아채지 못할까.“너!”임지연이 고개를 홱 돌린다. 한 손으로 우산을 잡고 편한 자세로 아무렇게나 서있는 그녀의 온 몸에 햇살이 내리쬔다. 가뜩이나 흰 두 다리는 햇빛에 반사될 정도로 광이나고 있다.눈이 부시게 아리따운 소은혜더러 우산을 들게 하는게 아니었다. 모욕감을 주려고 한 행동이 오히려 임지연을 더욱 못 생겨 보이게 만들었으니 말이다!늘 소은혜에 대한 불만이 들끓고 있었던 임지연은 비꼬는 듯한 말투에 화가 폭발했는지 소은혜를 콱 밀치며 말했다.“뻔뻔한 년! 감히 너 같은게 내 곁에 서있다니!”손찌검을 할거라는 생각을 꿈에도 못한 소은혜는 갑작스레 밀쳐져 뒷걸음질치다 그만 유월영의 발을 밟아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사과를 건넨다.“죄송해요......”유월영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임지연이 무차별 공격을 퍼붓는다.“교양있는 척하긴! 너희들같은 사람들 내가 모를줄 알아? 번지르르한 얼굴 앞세워서 남자 꼬시고 나니까 뭐 사모님이라도 된줄 아나본데 꿈이나 꾸셔!”“하룻밤 자고 나면 쓰레기마냥 버려질것들이. 이름이 뭔지나 아시겠어?”유월영이 고개를 들어 임지연을 노려본다. 소은혜가 차갑게 경고한다.“임지연 너 미쳤어? 연 사장님 사람이야.”“그게 뭐 어때서? 너도 한때 연 사장 사람 아니었나?”임지연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간다.“내가 모를거라 생각하지 마, 찾아본지 오래니까. 현우 씨가 싫증나니까 너 연 사장한테 보냈겠지. 연 사장도 잠자리하는게 싫증나니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
이승연은 속았다고 느꼈다.이 남자의 따뜻함에 넘어가 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기분 좋겠지? 드디어 내 유산을 손에 넣게 됐으니.”이혁재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유산, 유산, 유산. 왜 항상 이 얘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그는 복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배를 감싸안았다.“여보, 내가 돈이 부족해 보여? 난 돈이 부족하지 않아. 지금 있는 돈으로 다음 생까지 살아도 충분해. 그 많은 돈을 뒀다 뭐 하겠어? 난 당신 돈을 원하지 않아. 그 유산이 당신한테 주는 부담을 덜어주고 싶을 뿐이야. 난 그냥 당신을 돕고 싶어.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믿어줄 거야?”이승연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녀는 그런 시선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충성스러운 강아지를 다독이듯. 이혁재는 항상 그녀에게 충실한 강아지처럼 느껴졌다.그 후로 두 사람은 함께 평생을 보내기로 결심했고 아이가 태어나면 행복한 세 식구가 될 거라고 믿었다.그러나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법정에서 사고가 발생하며 아이를 잃었고 이승연은 깊은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처음 한 달 동안 이혁재는 살이 빠져 송장처럼 변해갔다. 그는 며칠씩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으며 잠조차 자지 않았다. 생존 본능에 이끌려 겨우 물 한 모금을 마시곤 했지만 결국 집에서 쓰러지고 말았다.공주연이 아들을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들은 그가 극심한 기아 상태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거의 굶어 죽을 뻔했다.이혁재가 깨어났을 때 공주연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뺨을 내리쳤다.“넌 네 엄마도 필요 없니? 네 아빠는 이미 날 버렸어. 세상에선 네가 전부야! 그런데 너마저 날 버리려 해?”하지만 이혁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공주연은 울면서 말했다.“승연이 아직 죽지 않았어! 곧 깨어날 거야. 그런데
이혁재의 시점사실, 두 사람의 불화와 이별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갈등이 발생했다.이혁재의 어머니인 공주연이 이승연에게 출산을 재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공주연은 겉으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승연의 유산을 노리고 있었다.그녀의 계산은 간단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씨 성을 가진 그 아이가 이승연의 유산을 당당히 상속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이혁재 역시 어머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아이에게 상속자가 생기면 이승연의 친척들도, 우리 가족도 유산에 대한 욕심을 접고 물러나겠지. 그러면 그녀의 부담도 줄어들 거야.”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이승연에게 가서 아이를 갖자고 제안했다.그러나 이 말을 들은 이승연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가 지금 따로 살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갖자고?”그리고 이내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결혼 전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여기에 사인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이승연은 이미 이혁재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그녀의 유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혁재는 말로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치사한 방법을 선택했다.그녀가 복용하는 피임약을 엽산제와 임신 보조제로 몰래 바꿔치기한 것이다. 결국 이승연은 그의 의도대로 임신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이승연은 약을 바꿔치기한 사실에 격분했고 심지어 이혁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반면, 이혁재는 호텔에서 이승연과 오성민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오성민과 다시 만나고 있다고 오해했다.그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크게 다퉜고 이혁재는 한강에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너 정말 적당히 좀 해라.”연재준이 기가 막혀 혀를 찼다.“뭘 적당히 하라고!”이혁재는 술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내 첫사랑은 이제 날 원하지 않는데, 내가 살아서 뭐 하겠어!”서지욱이 나서서 말렸다.“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그냥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필요한 걸 얻는 공정한 거래일 뿐이야. 누구도 누구에게 빚지지 않아. 하지만 네가 이 결혼이 억울하고 원하지 않는다면 난 다른 사람을 찾으면 돼. 상관없어.”이승연의 단호한 말에 이혁재는 심장이 벌집처럼 무너져 내렸다.하지만 그는 자신을 위로했다. 적어도 그녀가 애초에 다른 사람을 찾지 않고 자신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자신이 그녀의 눈에 들어올 만큼의 가치는 있었다고 믿으려 했다.이혁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물론 난 이 결혼을 원하지. 누나랑 결혼하고 싶어서 얼마나 애타는지 모를 거야. 게다가 누나 가문의 그 거대한 유산에 누가 눈독을 들이지 않겠어?”사실 이혁재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녀의 유산을 탐내는 사람들로부터 지켜줄 강력한 방패가 되어주겠다는 뜻이었다.그러나 그는 또다시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이승연은 “역시 너도 내 유산 때문에 결혼하려는 거구나”라는 뜻이 담긴 냉소적인 눈빛을 보냈다.그 눈빛을 마주한 이혁재는 차라리 땅속으로 숨고 싶었다. 그는 평소 말을 잘하는 사람인데 왜 이승연 앞에만 서면 이렇게 서툴러지는지 알 수 없었다.그는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더 나쁜 인상을 주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결국 두 사람은 서로 기분이 상한 채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다.그나마 유일한 희소식은, 이혁재가 열일곱 살 때부터 꿈꿔왔던 첫사랑과 결혼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혼례를 치렀고 첫날밤을 함께 보냈다.이승연의 시점이승연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나며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유산을 남겼다.그 유산은 주변 사람들을 질투와 광기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생전에 친절하고 따뜻했던 삼촌과 고모 같은 친척들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단 하룻밤 사이에 괴물로 변했다.그녀는 영화에서 좀비로 변하는 인간들을 떠올렸다.정상이던 사람들이 물리면 금세 인간성을 잃고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괴물로 변하는 것처럼 그녀의 친척들도 오로지 그녀의 유산을 탐하는 괴물이 되어버렸다.하지만 이승연은 변호사로서 법을 잘 알고 말재
이혁재의 시점이승연과 오성민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은 이혁재였다. 그래서 이승연이 자신의 청혼을 거절했을 때 그는 그녀가 아직도 오성민을 잊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화가 난 그는 집 안에서 폭주하기 시작했다.그는 첫사랑이란 게 원래 잊기 어렵고 학창 시절부터 이어진 감정에, 그리고 7년이라는 긴 시간을 하루아침에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성민이 완전한 쓰레기라는 것이었다.오성민은 자기 인턴과 바람을 피웠다. 이런 사람은 인간 이하의 짐승에 불과했고 이승연은 왜 그런 사람을 잊지 못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대체 그런 짐승만도 못한 놈보다 어디가 부족하다고!”분노에 찬 이혁재는 다음 날도 2만 보를 걸으며 화를 삭였다. 그러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 다시 한번 가보세요! 어제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승연이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룻밤 생각했으면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을 거예요.”그는 자신이 오성민보다 못할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 아들의 말대로 공주연은 다시 한번 이승연을 찾아갔고,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돌아와 말했다.“여전히 거절하더구나.”이혁재는 소파에 쓰러져 한쪽 다리와 팔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원한에 사로잡힌 시체처럼 어두운 기운이 그를 감쌌다.그러다 그는 벌떡 일어나 이승연을 직접 찾아갔다.“누나한테 직접 물어봐야겠어. 왜 나랑 결혼하지 않으려는지!”사무실에서 문서를 검토하던 이승연은 담담히 말했다.“너는 나보다 너무 어려.”“그게 이유라고?”그러자 이혁재는 불쑥 다가가 이승연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이승연은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붙잡으며 외쳤다.“지금 뭐 하는 거야!”이혁재는 그녀를 안고 빙글빙글 돌며 깡충깡충 뛰었다.“너 미쳤어? 빨리 내려놔!”이승연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며 말했다.“내가 단지 누나보다 나이가 어린 것뿐이지. 다른 모든 면에서는 누나 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