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비서는 백미러를 통해 상사의 찌푸린 얼굴을 확인했다.무릎에 놓인 사내의 손에는 하얀색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순백의 라이터는 명품 브랜드도 아닌 아주 평범한 디자인의 구식 라이터였다.특별한 점이 있다면 밑부분에 붉은색 보석으로 포인트를 주었다는 점이었다.사내가 가지고 다니기엔 너무 저가 브랜드였는데 사내는 줄곧 이 라이터만 몸에 꼭 지니고 다녔다.마스크남은 주변에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가속 페달을 힘껏 밟으며 수림으로 질주했다.수림 입구는 무성한 초목으로 뒤덮여 있어 차량 진입이 쉽지 않았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여 비서의 이름은 한세인, 검은색 가죽바지에 단화를 신고 단발머리가 무척이나 어울리는 전형적인 일개미 스타일의 여자였다. 그녀는 마스크남과 함께 손전등을 챙기고 안으로 들어갔다.앞에서 걷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사내에게 말했다.“대표님, 저랑 지남이가 갈게요. 대표님은 차에서 기다리고 계세요.”하지만 남자는 그 말을 무시하고 그들을 앞질러서 앞으로 걸어갔다.유월영 미행남이었던 지남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상사를 따라 수림 안으로 들어갔다.수림 속 길은 평탄하지 않아서 손전등으로 비추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그럼에도 남자는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었다. 나뭇가지가 그의 옷깃에 흠집을 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여자인 한세인은 뒤처지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그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사내는 성큼성큼 걸으며 그녀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던 때를 떠올렸다.“나 두고 가버리면 나도 오빠에 대한 마음 포기할 거야.”싸늘한 바람이 불어와서 추억에 잠긴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그는 싸늘한 시선으로 전방을 주시했다.유월영이 그곳에 있을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초목이 우거진 수림 속은 달빛도 통과하지 못해 어둡고 음산하기 그지없었다.유월영은 어둠 속을 더듬으며 앞으로 정처 없이 걸었다.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문제는 추위였다.차에서 내릴 때 외투를 챙기지 않아 얇은 니트 한 벌만
유월영은 벌떡 일어서서 나뭇가지로 주변을 휘적거렸지만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었다.바람이 불면서 주변 초목들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춤을 추었다. 어둠 속에서 그것을 지켜보니 마치 사람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오래 보고 있으니 여자의 처참한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예전에 봤던 공포 영화의 장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두려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유월영은 나무를 끌어안으며 혹시 높이 올라가면 나갈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을까 하고 고민했다.하지만 가지가 고공에서부터 뻗어 있어서 타고 올라가기는 쉽지 않았다. 그녀는 나무타기를 시도했지만 얼마 못 가 바닥에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그녀가 헛짓거리를 하고 있을 때, 멀리서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여기, 여기야!”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저편에서 플래시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이 시간에 사람이?’유월영은 기쁜 마음에 도움을 요청하러 가야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이 밤중에 사람이 깊은 수림에는 무슨 일이지?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몸을 숨겼다. 그녀의 작은 움직임을 들은 건지, 그쪽에서 플래시를 이쪽으로 비추었다.“거기 누구야?”유월영은 불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머리 위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응? 여기 여자가 있는데?”유월영이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는 사이 두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키 작고 몸집이 비대한 남자가 유월영을 깐깐히 훑어보더니 말했다.“진짜 여자네? 밤 중에 여기서 길을 잃었나 봐.”유월영은 온몸에 흙을 묻히고 있는 그들의 차림새를 자세히 살폈다. 설마 이 밤중에 땅이라도 팠나?그녀의 머릿속에는 온갖 살인현장의 장면들이 떠오르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만약 추측이 사실이라면 이들의 손에서 살아나갈 가능성은 희박했다.“젠장. 꽤 예쁘잖아?”키 작은 사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관찰하자 옆에 있던 사내가 욕설을 퍼부었다.“또 시작이야?”
그 순간 들려온 또 다른 사내의 목소리에 달리던 사내가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었다.유월영은 달리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분명 주변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유월영!”또 다시 들려온 목소리, 그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걸음을 멈춘 유월영은 차량 두 대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차에서 강렬한 불빛이 뿜어져 나와 그녀를 감쌌다.연재준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수림으로 들어오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었다. 누군가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지 않는다면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수림으로 통하는 도로를 발견한 그는 곧장 차를 끌고 유월영과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두 사내는 누군가가 온 것을 보고 서로 눈치를 주고받고는 어둠으로 사라졌다.유월영은 그제야 자신이 도심으로 향하는 길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차에서 내린 연재준은 성큼성큼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앞머리가 흩날리며 찰랑거렸고 코트도 바람 따라 날리고 있었다.누군가 와주기를 기대했지만 맨 먼저 도착한 사람이 그였다는 사실이 약간 믿기지 않았다.유월영은 멍하니 서서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려움 때문에 엉망이 되었던 머릿속이 갑자기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연재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찬 기운이 느껴지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을 감싸주었다.“다친데는 없어?”그가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없어요.”다행히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기 전에 도착해 줘서 다행이었다.연재준은 속을 알 수 없는 담담한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운이 좋았네.”말을 마친 그는 차가 있는 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유월영은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연재준은 그녀를 안아올렸다.유월영은 남자의 청량한 기운이 자신을 감싸자 당황함에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이러실 필요 없어요. 조금만 숨을 고르면 혼자 걸을 수 있어요.”“움직이지 마.”두려움에, 추위에, 배고픔에 기가 다 빨렸던 유월영은 이 순간
마을 주민들이 우르르 달려오며 포위를 좁혀왔다.놀란 하정은이 소리쳤다.“오지 마! 더 다가오면 신고할 거야!”경찰에 신고한다는 말에 마을 주민들의 움직임은 더 빨라졌다.“빨리 저것들 잡아!”놀란 유월영이 품에서 내려오려고 했지만 연재준은 그녀를 꽉 안은 채로 맨 앞에서 달려오는 주민을 발로 걷어찼다.“대표님, 저 좀 내려줘요.”다급한 그녀의 요청에 연재준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내가 널 여기서 못 데리고 나갈 것 같아?”말을 마친 그는 또 다시 달려오는 주민의 공격을 몸을 비틀어 피했다.하지만 압도적인 인원수 앞에 그들도 계속 방어만 할 수는 없었다.유월영은 차 문을 잡으며 그에게 소리쳤다.“빨리 차에 타요!”연재준은 달려오는 주민에게 발길을 날리고 유월영을 안은 채, 뒷좌석 차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하정은도 운전석에 올랐다.연재준이 뒷좌석에 유월영을 내려놓는 사이 등 뒤에서 몽둥이를 든 마을 주민이 그에게 달려들었다.놀란 유월영이 비명을 질렀다.“대표님!”연재준은 결국 주민이 휘두른 방망이에 어깨를 맞고 신음을 흘렸다. 그의 눈에 순간 살기가 스치더니 몸을 돌려 그 주민에게 발길을 날리고 차에 올랐다.그가 차 문을 닫으려는 순간 주민들이 달려들어 문고리를 잡고 매달렸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공포 영화에 나오는 좀비 무리가 떠올랐다.유월영이 소리쳤다.“빨리 가요!”정신을 차린 하정은은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고 반동에 문에 매달렸던 주민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틈을 타서 연재준은 차 문을 힘껏 닫았다.그러자 주민들이 미친 사람처럼 차량의 앞을 막아섰다.그들은 아무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그리고 이때 멀리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놀란 주민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형사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지?”연재준은 그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라고 지시를 내렸다.하정은은 그의 지시대로 운전대를 좌측으로 꺾으며 비좁은 틈을 타서 도로를 빠져나갔다.수림에서 그들이 탈출한
그의 적나라한 도발에 유월영은 담담한 어투로 답했다.“저는 의사가 아니에요. 상처를 확인해도 치료해 줄 수 없으니 차라리 의사를 따로 부르세요.”원했던 반응이 아니었기에 연재준은 싸늘한 미소를 짓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불빛이 반사되어 차창에 그녀의 초라한 모습이 언뜻언뜻 비쳤다.머리는 이미 산발이 되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3년 전 비오던 밤에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네.”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그의 속도 모르는 유월영이 덤덤하게 말했다.“소 팀장이 일부러 산속에 저를 버리고 갔어요.”“그래서? 내가 나서서 소 팀장을 처벌하기를 바라나?”연재준은 싸늘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어찌 그런 걸 바라겠어요. 그냥 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소은혜와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아마 낯선 사람이 그녀를 위험에 빠뜨렸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을 사람이었다.유월영은 단지 사실만 전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유월영이 물었다.“이번 일 혹시 대표님이랑 소 팀장이 짜고 일부러 저를 위험에 빠뜨린 건 아니죠?”합리적인 의심이었다.연재준이 정확히 그녀가 유기된 위치를 알고 찾아온 것도 아마 소은혜가 그에게 사실을 말했을 가능성이 컸다.연재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지금 뭐라고 했어?”유월영은 잠깐 스치는 생각이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판단하고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그가 굳이 이런 수고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연재준이 냉소를 터뜨리며 말했다.“왜? 내가 소 팀장 시켜서 널 일부러 산속에 유기하고 짠하고 나타나서 영웅행세를 한 것 같아?”소은혜의 의도는 그게 맞지만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만약 소은혜가 먼저 그에게 상의했더라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내가 뭐 때문에 시간과 공을 들여서 이딴 일을 설계했다고 생각해? 너한테 고맙다는 인사 한번 받으려고? 유월영, 네가 뭔데? 내가 네 감동을 바라고 이런 황당한 짓을 꾸몄다고 생각해?”유월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바깥으로 쏠린 가운데 소은혜가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그녀를 본 순간 유월영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소은혜는 유월영에게 다가가 진솔한 표정으로 사과했다.“월영 씨, 미안해요. 오늘 내가 장난이 지나쳤던 거 같아요. 대표님한테 이미 한소리 들었어요. 그래도 월영 씨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유월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되물었다.“무사해서 다행이라고 했나요?”무사했던 게 아니라 사고가 생기기 전에 연재준이 나타나 주었기에 안전하게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유월영이 마을 주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고 해서 단순히 장난으로 치부할 수 있는 일은 절대 아니었다.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은혜가 갑자기 자신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그녀의 돌발 행동에 유월영도 놀라서 연재준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소은혜를 바라보고 있었다.소은혜의 얼굴은 금세 빨갛게 부어 올랐다.“정말 미안해요, 월영 씨. 내가 가끔 경솔한 행동을 할 때가 있어요. 내가 어떻게 해야 용서해 주실 건가요?”“사과는 받을게요. 하지만 용서는 별개의 문제예요.”유월영이 말했다.“변호사한테 자문을 구했고 이 일을 가볍게 넘길 생각도 없어요. 난 소은혜 씨에게 형사책임을 물을 생각이에요.”당사자가 아닌 이상 아무도 유월영의 처사가 과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소은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잘못을 인정할게요. 그리고 사적으로 합의를 봤으면 해요. 손해배상을 원한다면 액수만 말해줘요.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협조할게요. 바쁜 사람들끼리 법적 싸움으로 시간 낭비하지 않았으면 해요. 월영 씨는 어떻게 생각하나요?”유월영도 질질 끌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합의서 써주는 조건으로 천만 원에 끝내요.”소은혜는 흔쾌히 동의했다.“알겠어요.”“이 일은 SK상부에 전달할 거예요. 앞으로 난 소은혜 씨와 더 이상 같이 일할 수 없으니 회사의 결정에 맡겨야죠. 이제 얘기 끝났으니 이만 나가보세요.”소은혜
그 말에 서지욱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마침 엘리베이터가 아래층에 도착하여 문이 열렸다.서지욱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그런데 1층은 왜 오자고 한 거야?”연재준은 엘리베이터를 나서며 담담히 대꾸했다.“카운터에 뭐 좀 가지러 가는 길이야.”서지욱은 곧 돌아올 줄 알고 엘리베이터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후 돌아온 연재준의 손에는 의약품 박스가 들려 있었다.“너 다쳤어?”연재준은 말없이 17층 버튼을 꾹 눌렀다. 서지욱이 웃으며 물었다.“유 비서가 다친 거야? 그래서 상처 소독해 주려고?”연재준은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서지욱이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유 비서 방에는 신연우 씨가 있잖아. 아마 네가 가면 안 반겨줄 것 같은데?”“그러니까 네가 걔 좀 다른데로 유인해 봐.”서지욱은 황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17층에 도착하자 서지욱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충고했다.“사람의 마음을 되돌리고 싶으면 네 태도부터 바꿔야 해.”연재준이 담담히 대꾸했다.“난 너처럼 한 여자랑 일편단심 평생 함께할 인내심이 없어.”서지욱은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그러고 보면 연재준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처음에는 백유진에게 진심인가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연재준은 백유진을 총애하지만 뭔가 억지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오히려 총애라면 과거 유월영을 데려왔을 때 더 애정을 쏟았던 것 같았다.유월영이 밥 한 그릇을 다 비운 뒤에야 신연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소은혜 씨한테 형사책임을 묻고 싶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아무리 그래도 SK의 경영사업팀 팀장이에요.”이 일이 밖에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는 얘기였다.신연우는 그녀에게 티슈를 챙겨주며 말했다.“그건 월영 씨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나도 그런 걸 따지고 싶지 않고요.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한 거죠.”유월영은 진지하게 고민하고 고개를 저었다.“됐어요. 이미 사과도 받았고 스스로
연재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고는 소독약을 솜에 묻혀 손바닥에 발라주었다.알싸한 느낌에 유월영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연재준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보고는 연고를 발라주었다.아까 나무를 타다가 떨어지면서 생긴 상처였다.심하지 않은 찰과상이라 그녀 본인도 모르고 있었는데 이건 또 언제 본 걸까?신연우도 방에 오래 머물렀지만 전혀 그녀가 다친 것을 모르고 있었다.“다쳤으면 밴드라도 붙였어야지.”“심각하지도 않고 그냥 둬도 나을 상처예요.”연재준은 연고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싸늘하게 대꾸했다.“그러다 파상풍 걸려서 죽을 때가 되어서야 후회하겠지.”저주에 가까운 말에 유월영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한쪽 손을 마무리한 그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유월영은 소독약을 솜에 묻히며 담담히 말했다.“이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연재준도 덤덤히 손을 닦으며 말했다.“얌전히 구조를 기다렸으면 얼마나 좋아.”“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그러니까 친구가 없는 거야.”고까운 소리에 유월영이 인상을 찌푸렸다.“굳이 누구한테 기대지 않아도 되니까요.”그 말에 연재준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유월영은 약을 바르는데 집중하느라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상처 소독을 마친 그녀는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신경 써 주셔서 감사했어요. 이제 괜찮으니 이만 돌아가 보세요.”연재준이 셔츠 단추를 풀며 말했다.“넌 치료 끝났는데 난 아직 안 끝났어.”그녀는 싸늘한 얼굴로 거절했다.“아까 차 안에서 병원에 가자고 했을 때 거절한 건 대표님이세요. 이제 와서 이런 일을 저한테 시키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요? 차라리 서 대표님이나 신 교수님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하세요.”연재준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내가 서지욱이나 신 교수 구하다가 다쳤어?”“정확히 말하면 저 때문에 다쳤다고 할 수는 없죠.”유월영이 싸늘하게 말했다.“그 사람이 저를 겨냥하고 몽둥이 휘두른 것도 아니고 대표님이 제때 피하지 못해서 맞은 거잖아요. 제가 그때
“...”조서희의 말은 황당했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이승연은 전문 변호사로서 논리적인 관점에서 의견을 제시했다.“우선, 너의 신분증과 호적에는 여전히 ‘유월영’으로 기록되어 있잖아. ‘고민서’라는 이름은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름이지.”“그러니까 너의 아이가 너의 재산을 상속받으려면 유씨 성을 따르는 게 더 안전한 선택이야. 예를 들어, 현시우처럼 다른 성씨로 인해 가문에서 배척받는 일을 막을 수 있지.”그녀는 말을 이어갔다.“지금 너의 가문에서 상속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 같지만 만약을 대비해 문제의 소지를 없애는 게 좋아. 그래서 나는 유씨 성에 한 표야.”“게다가, 유씨 성을 따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어? 너의 이름처럼 유씨 성 여자 이름이든 남자 이름이든 독특한 멋이 있잖아. ‘유월영’, 달빛에 가려진 그림자 같은 운치 있는 이름이잖아.”이승연의 말에 유월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말은 감정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있었다.그러나 유씨와 고씨 모두 한 표씩 얻으면서 결국 2 대 2,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유월영은 고민 끝에 투표 범위를 더 넓혀 이혁재, 서지욱 부부와 노현재, 심지어 현시우에게까지 의견을 물었다. 다섯 사람의 투표 결과는 유씨와 고씨에 각각 두 표씩으로 또다시 동점이었다.결정적인 한 표는 서지욱에게 달려 있었다. 서지욱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내 생각엔, 너희 아이의 성씨를 제비뽑기로 정하는 게 어때? 딸이면 유씨, 아들이면 고씨로 하는 거야.”하지만 이 말에 모두가 반대했다.“왜 딸이면 꼭 유씨여야 해? 딸도 고씨 성을 따를 수 있어.”“왜 아들이면 꼭 고씨여야 해? 아들도 유씨 성을 따를 수 있잖아.”서지욱은 이내 두 손을 들며 물러섰다.“알겠어. 내가 헛소리했네. 기권할게.”결국 성씨 문제는 출산 직전까지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유월영의 출산은 최고의 의료팀이 관리하며 그녀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의사들은 그녀의 상태를 판단한 후 제왕절개를 결정했다.
수술 후, 이영화는 ICU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렀다.의사들은 혈관 마비 증후군 등 합병증이 발생하지 않는지 자세히 관찰했고 이상이 없다고 판단된 후 일반 병실로 옮겼다.일반 병실에서 약 한 달간 신체 기능 회복을 위한 치료를 받은 후 의사의 허가를 받아 퇴원했으며 유월영은 일상생활이 가능해진 어머니를 보며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하지만 출산 예정일까지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유월영은 출산 준비에 집중하기로 했다. 사실 그녀는 이번 귀국의 목적이 출산 준비라는 것을 잠시 잊을 뻔했다.현재 신주시는 10월에 접어들어 선선한 가을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창가에 앉아 있던 유월영은 마당의 나무를 흔드는 상쾌한 가을바람과 맑은 사각거리는 소리에 잠시 사색에 잠겼다. 이 소리는 마치 자장가처럼 그녀를 졸리게 만들었다.유월영은 과일을 먹으며 연재준이 출산 준비물을 정리하는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중요한 생각이 떠올랐다.“재준 씨, 우리 중요한 걸 아직 논의 안 한 것 같아요.”“뭔데?”“아이 이름 말이에요.”연재준은 웃으며 말했다.“아직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잖아. 태어난 후에 정하자고 했잖아.”두 사람은 아이의 성별을 ‘뽑기'처럼 남겨두기로 했다. 해외에서 산전 검사를 받을 때도 의사에게 성별을 묻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아기의 성별은 알지 못한 채 기대를 품고 있었다.유월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하지만 아기의 성씨랑 애칭 정도는 미리 정할 수 있잖아요.”연재준이 그녀의 잠옷을 접어 여행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그건 당신이 더 고민스러워할 것 같은데.”“왜요?”“아이 성을 유씨로 할지 고씨로 할지 정해야 하잖아.”유월영이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연씨 가문의 성은 생각 안 해봤어요?”“우리 가문은 자격이 없어.” 연재준은 평소처럼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결혼 후 부인의 성을 따를 수 있었다면 나도 당신의 성을 따르고 싶어.”유월영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재준 씨, 이혁재 씨랑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마세요. 괜
공항을 나서기도 전에 유월영은 연회 부인의 전화를 받았다.그녀의 목소리는 들뜬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월영아! 우리가 방금 어떤 좋은 소식을 들었는지 알아?”“무슨 소식인데 이렇게 신나셨나요?”유월영은 웃으며 물었다.“네 엄마의 심장이식 공여자가 나왔어! 적합 검사도 성공했어!”유월영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정말이에요?”“정말이야! 공여 심장은 지금 국내에 있어. 나랑 네 엄마는 짐을 싸고 바로 귀국할 준비를 하고 있어! 이제 네 엄마도 인공 심장 없이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되었어!”유월영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정말 좋은 소식이에요. 너무 다행이에요.”옆에서 상황을 몰랐던 연재준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이야?”유월영은 눈물을 글썽이며 답했다.“엄마가 드디어 심장이식을 할 수 있다고 해요!”연재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처음으로 적합 검사에 성공했던 심장은 백유진 아버지가 먼저 받아 갔고 그들은 무려 5년을 기다려야 했다. 인공 심장은 보통 7~10년 정도 지속되지만 심장이식이 성공하면 이영화는 평생 건강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이번 공여자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과도 같았다.전화를 끊은 유월영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재준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사실 그녀는 어머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려 왔다. 연재준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수술 준비는 내가 다 맡을게. 걱정 마, 반드시 성공할 거야.”유월영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월영의 어머니를 위해 연재준은 최고 수준의 의료팀을 초청해 모든 것을 직접 관리했다. 귀국 후 이영화는 정밀 검사를 받고 거부 반응 억제제를 복용하며 수치를 안정시켰다. 며칠 후, 수술이 진행되었다.수술 당일, 마취 직전 이영화는 의사를 통해 딸에게 전했다.“월영아, 집에 가서 쉬렴. 병원에서 기다리다가는 네 몸이 상할 거야. 네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어떻게 견디겠니?”동생 유수영도 수화로 말했다.“언니, 집
유월영은 최근 여유 시간이 많아지면서 인터넷에서 ‘빈정거리는 말투’를 배우게 되었다.“내가 뛰어가서 구해줄 줄 몰랐다고요?”유월영의 놀림에 연재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당신을 과소평가했어. 전부 내 잘못이야.”유월영은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은 본래 선하다고 믿고 있었다. 예전에 그들이 함께 영안으로 출장 갔을 때, 강수영이 자신이 연재준의 사촌 여동생임을 숨긴 채 의도적으로 애매한 태도를 보여 그녀를 불편하게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공사장에서 철근이 떨어질 뻔하자 강수영은 주저 없이 유월영을 밀어내 구해주었다.연재준은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내가 정말 여대생을 좋아한다면 대학 때 왜 연애하지 않았겠어? 여보, 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해서 날 나쁘게 몰아가지 마.”이때 승무원이 음식을 가져왔다. 그는 갈비 한 조각을 집어 뼈를 발라내고 고기를 그녀의 그릇에 넣어주며 말했다.“내가 좋아하는 건 오직 당신뿐이야.”유월영은 미소를 지으며 갈비를 입에 가져갔다. 기내식은 의외로 맛이 좋았고 그녀는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쳤다. 식사가 끝난 후, 두 사람은 창밖 구름을 보며 담소를 나누었다.그때 서정희가 다가왔다.“고민서 씨,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정말 우연이네요. 결혼하셨다고 들었어요. 신혼 축하드려요.”유월영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고맙습니다.”하지만 연재준은 서정희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유월영은 서정희가 자신을 ‘고민서’라고 부르는 걸 듣고 그녀가 자신의 소식을 계속 지켜봐 왔다는 걸 알아챘다.“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서정희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예전에 제가 철이 없었어요. 이제야 깨달았는데 정말 많은 어리석은 짓을 했더라고요. 그래서 사과드리고 싶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인사드렸어요.”유월영은 어떤 사람들은 깨닫는 데 시간이 걸린다지만, 서정희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서정희를 마음에서 지운 지 오래였기에 담담
유월영은 임신 8개월 차에 연재준과 함께 마르세유에서 신주시로 돌아와 출산 준비를 하려 했다.두 사람은 아이가 국내에서 태어나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랐다.유월영의 몸 상태를 고려해 연재준은 전용기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항로 신청을 시도하는 도중 마르세유에서 항공 통제가 이뤄져 신청이 어려워졌다.다행히 유월영은 입덧도 심하지 않아 두 사람은 일반 항공편을 이용하기로 했다.그러던 중, 항공기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났다.바로 서정희였다.서정희가 낯설게 느껴졌던 이유는 최근 몇 년 동안 그녀와 만난 적도 그녀에 대한 소식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유월영은 그녀를 거의 잊고 있었지만 그녀가 한때 유월영과 연재준의 애매한 관계를 부추겼던 기억은 있었다.두 사람은 기내에서 우연히 마주쳤다.서정희는 유월영의 배를 보고 잠시 멍해지더니 급히 고개를 숙여 눈을 피했다.마치 자신이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듯했다.유월영은 굳이 그녀와 인사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에 그냥 못 본 척하며 연재준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연재준은 메뉴를 주문하고 있었고 유월영은 레몬수를 마시며 무언가를 떠올리다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졌다.연재준은 젖은 물티슈로 그녀의 젓가락과 숟가락을 닦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월영아, 그렇게 쳐다보지 마. 나 무서워.”그는 지금 대부분의 신경을 유월영에게 집중하고 있었다.그녀의 기분을 잘 아는 연재준은 그녀가 보내는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연재준은 부드럽게 말했다.“나랑 서정희 씨는 진짜 아무 관계도 없어.”유월영이 천천히 말했다.“내가 당신이 그 여자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생각났어요. 그때 서정희 씨가 자작극으로 나를 납치하려다 사건을 일으켜서 사이버 폭력에 시달렸던 거요. 심지어 피 묻은 택배까지 받았었죠.”연재준은 잠시 멍해지더니 곧바로 부정하며 말했다.“그 택배, 과연 극성팬이 보낸 걸까요? 아니면 누군가 내가 당신 품에 빨리 안기도록 만든 계략일까요?”연재준은
유월영은 스스로를 되돌아보았다.‘내가 뭘 잘못했을까?’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을 괴롭히며 생각에 빠져들었고 결국 정신적으로 지쳐 3일간 결석했다.이 모든 것을 알게 된 연재준은 현시우를 찾아갔다.연재준은 유월영이 현시우와의 관계에서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생각했다.이를테면, 부모님이 평범한 가정 출신인 그녀와의 관계를 반대해 둘을 억지로 떼어놓았을 것이라고 여겼다.하지만 현시우를 찾은 그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쇼핑하고 있었다.연재준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현시우의 옷깃을 움켜잡았다.“너, 월영이한테 진심이 아니었다면서 왜 계속 나한테 그녀와 멀리하라고 경고한 거야?”현시우는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월영이와 헤어지더라도 네가 그녀에게 손끝 하나라도 닿게 두지 않을 거야.”연재준은 싸늘하게 웃으며 도로 건너편 복싱장을 가리켰다.“그럼 한번 내기할래?”“뭐?”연재준이 그의 옷깃을 놓으며 말했다.“네가 지면 신주시를 떠나고 다시는 유월영 앞에 나타나지 마.”현시우는 그 말에 분노를 느꼈고,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들이 폭발할 기회를 찾은 듯했다.“좋아.”두 사람은 전력으로 싸웠고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하지만 결국 현시우가 지고 말았다.그는 최선을 다했지만 유월영과 자신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현시우가 출국하던 날, 유월영은 그의 차를 따라 한참을 달렸다.백미러로 그 모습을 본 현시우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차 세워요!”연회 부인이 그의 손을 잡고 멈추려 했다.“시우야, 마지막 순간에 모든 걸 망치지 마. 네 외할머니가 마르세유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네가 정말 레온 가문을 이어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고씨 가문에 복수할 희망이 생겨. 월영이는 우리가 성공한 후 다시 만나면 되잖아.”하지만 현시우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차에서 뛰쳐나갔다.유월영은 울며 물었다.“대체 어디 가는 거야? 정말 나를 버릴 셈이야?”현시우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 유
현시우는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그런 거 아니야.”“그럼 뭐야?”유월영이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현시우, 무슨 일이 있든 나한테 말해줘. 너도 그랬잖아 여자친구는 이런 순간에 필요한 존재라고. 내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들어줄 수는 있어. 고민은 혼자 끌어안고 있는 것보다 말로 털어놓는 게 훨씬 나아.”“물론, 네가 정말 혼자 있고 싶다면 내가 시간을 줄게. 하지만 연락을 끊으면 안 돼. 그러면 나도 걱정이 되고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말이야. 정말 힘들어.”그녀의 말에 현시우는 마치 심장에 바늘이 꽂힌 것 같았다.그 바늘은 그의 숨소리를 따라 점점 더 깊이 찔러 들어갔다.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월영아, 그냥 여기까지 하자. 내가 사람을 불러 너를 집에 데려다줄게.”유월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지금 나랑 헤어지자는 거야?”현시우의 목젖이 떨렸다.그는 “그래”라고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차마 “아니야”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그가 침묵하는 동안 유월영의 눈이 파르르 떨려왔다.그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두 줄기의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렸다.유월영의 눈물에 현시우는 한 걸음 다가가 그녀를 달래려 했다.하지만 유월영은 한 걸음 물러서더니 이내 뒤돌아 뛰어갔다.현시우가 본능적으로 뒤따라 가려 했지만 연회 부인이 제때 나타나 그를 막았다.“시우야! 지금은 내버려둬.”어머니의 충고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현씨 가문은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고 유월영은 산길을 따라 뛰면서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계속 흘렀다.가을은 좋은 계절이 아니었다.가을은 모든 것이 시들어가는 계절이었다.유월영은 눈앞이 흐릿해졌고 너무 빨리 뛰다가 발이 엉켜 땅에 넘어졌다.흙투성이가 된 채로 집에 돌아온 그녀는 책상 밑에 몸을 숨겼다.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아래층의 부모님이 들을까 봐 소리를 내지 못한 채 손등에
유월영의 망연자실한 모습은 연재준조차 알아차릴 수 있었다.쉬는 시간, 그는 일부러 유월영이 있는 반을 지나가며 텀블러에 물을 담고 있던 유월영을 보고 이름을 불렀다.하지만 그녀는 마치 듣지 못한 듯 돌아보지 않았다.“...”연재준은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생각했다.‘현시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봐야 하나? 설령 죽었다고 해도 최소한 죽었다는 소식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그러나 현씨 가문의 입단속은 철저했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더구나 현시우와 연회 부인의 대화는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다만 현시우는 최근 병원에 드나들고 시골로 내려가는 등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분주하다는 소문만 들렸다.연재준은 손에 동전을 굴리며 고민했다.‘이 틈을 타서 슬쩍 끼어들어 볼까?’보름이 지나도 현시우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결국 유월영은 참지 못하고 생애 가장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그녀는 직접 현씨 가문을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유월영은 경비원에게 자신이 현시우의 학교 친구이며 그가 너무 오래 학교에 나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러 왔다고 말했다.경비원은 그녀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고하겠다고 했다.10분 후, 유월영은 등 뒤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월영아.”그녀가 돌아보자, 나온 사람은 바로 현시우였다.처음에는 기뻤지만 이내 화가 치밀어 올라 유월영은 달려가며 따졌다.“너 요즘 왜 그래? 왜 내 전화를 받지 않는 거야?”그녀는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휴대폰 부모님이 뺏어갔어? 아니면 벌이라도 받은 거야? 혹시 맞기라도 한 거야? 아픈 건 아니지? 얼굴빛이 안 좋아 보이는데 병원은 갔어?”“월영아.”현시우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깊게 꺼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그의 모습은 지치고 초췌해 보였다.불과 보름 만에 그는 한층 더 야위었고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듯 보였
현시우는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는 차분하면서도 냉정한 태도로 어머니를 추궁했다.“단순히 유용우를 봤다는 이유로 유월영이 그의 친여동생이라고 단정 짓는 건 말이 안 돼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러시는데요?”그가 아는 바로는 유월영의 집에는 세 자매가 있었다. 왜 꼭 유월영이어야 하는 걸까?“나이대가 맞지 않아서요?”그는 계속해서 반박했다.“다른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 유월영의 집은 부유한 가정이 아니에요. 자식을 여러 명 키우는 건 부담스럽고, 게다가 고씨 가문의 딸을 키우는 건 위험 부담도 크잖아요. 여동생이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 않나요?”이 모든 시간 동안 그들은 늘 긴장 속에서 살아왔다.연회 부인은 외출조차 하지 못했고, 유용우네 가까이 지내는 것도 두려워했다.그래서 유용우네 부부가 시내로 이사한 것도 몰랐고, 그들의 세부 사항도 알 수 없었다.현시우는 어머니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이유를 수십 가지나 가지고 있었다.연회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그러면 유전자 검사를 직접 해보렴.”“...”만약 그녀가 확신이 없다면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현시우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거미줄처럼 얽힌 핏줄은 그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연회 부인은 그가 이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그를 위로하려고 애썼다.“아마 너는 처음부터 네 감정을 잘못 알았던 것 같아. 너의 마음속에서 유월영에 대한 감정은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 어쩌면 혈연관계가 작용해서 너를 혼란스럽게 만든 걸지도 몰라.”“그렇지 않다면 너의 성격으로 그렇게 쉽게 누군가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네 주변에 훌륭하고 예쁜 여자애들이 많았잖아? 그런데 너는 그들에게 아무 감정도 없었잖아. 그런데 유월영을 알게 된 지 몇 달 만에 이렇게 깊이 좋아하게 된다니, 말이 안 되지 않니?”“그래서 내 생각엔 이건 사랑이 아니라 운명이 장난을 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