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바깥으로 쏠린 가운데 소은혜가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그녀를 본 순간 유월영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소은혜는 유월영에게 다가가 진솔한 표정으로 사과했다.“월영 씨, 미안해요. 오늘 내가 장난이 지나쳤던 거 같아요. 대표님한테 이미 한소리 들었어요. 그래도 월영 씨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유월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되물었다.“무사해서 다행이라고 했나요?”무사했던 게 아니라 사고가 생기기 전에 연재준이 나타나 주었기에 안전하게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유월영이 마을 주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고 해서 단순히 장난으로 치부할 수 있는 일은 절대 아니었다.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은혜가 갑자기 자신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그녀의 돌발 행동에 유월영도 놀라서 연재준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소은혜를 바라보고 있었다.소은혜의 얼굴은 금세 빨갛게 부어 올랐다.“정말 미안해요, 월영 씨. 내가 가끔 경솔한 행동을 할 때가 있어요. 내가 어떻게 해야 용서해 주실 건가요?”“사과는 받을게요. 하지만 용서는 별개의 문제예요.”유월영이 말했다.“변호사한테 자문을 구했고 이 일을 가볍게 넘길 생각도 없어요. 난 소은혜 씨에게 형사책임을 물을 생각이에요.”당사자가 아닌 이상 아무도 유월영의 처사가 과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소은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잘못을 인정할게요. 그리고 사적으로 합의를 봤으면 해요. 손해배상을 원한다면 액수만 말해줘요.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협조할게요. 바쁜 사람들끼리 법적 싸움으로 시간 낭비하지 않았으면 해요. 월영 씨는 어떻게 생각하나요?”유월영도 질질 끌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합의서 써주는 조건으로 천만 원에 끝내요.”소은혜는 흔쾌히 동의했다.“알겠어요.”“이 일은 SK상부에 전달할 거예요. 앞으로 난 소은혜 씨와 더 이상 같이 일할 수 없으니 회사의 결정에 맡겨야죠. 이제 얘기 끝났으니 이만 나가보세요.”소은혜
그 말에 서지욱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마침 엘리베이터가 아래층에 도착하여 문이 열렸다.서지욱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그런데 1층은 왜 오자고 한 거야?”연재준은 엘리베이터를 나서며 담담히 대꾸했다.“카운터에 뭐 좀 가지러 가는 길이야.”서지욱은 곧 돌아올 줄 알고 엘리베이터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후 돌아온 연재준의 손에는 의약품 박스가 들려 있었다.“너 다쳤어?”연재준은 말없이 17층 버튼을 꾹 눌렀다. 서지욱이 웃으며 물었다.“유 비서가 다친 거야? 그래서 상처 소독해 주려고?”연재준은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서지욱이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유 비서 방에는 신연우 씨가 있잖아. 아마 네가 가면 안 반겨줄 것 같은데?”“그러니까 네가 걔 좀 다른데로 유인해 봐.”서지욱은 황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17층에 도착하자 서지욱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충고했다.“사람의 마음을 되돌리고 싶으면 네 태도부터 바꿔야 해.”연재준이 담담히 대꾸했다.“난 너처럼 한 여자랑 일편단심 평생 함께할 인내심이 없어.”서지욱은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그러고 보면 연재준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처음에는 백유진에게 진심인가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연재준은 백유진을 총애하지만 뭔가 억지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오히려 총애라면 과거 유월영을 데려왔을 때 더 애정을 쏟았던 것 같았다.유월영이 밥 한 그릇을 다 비운 뒤에야 신연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소은혜 씨한테 형사책임을 묻고 싶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아무리 그래도 SK의 경영사업팀 팀장이에요.”이 일이 밖에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는 얘기였다.신연우는 그녀에게 티슈를 챙겨주며 말했다.“그건 월영 씨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나도 그런 걸 따지고 싶지 않고요.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한 거죠.”유월영은 진지하게 고민하고 고개를 저었다.“됐어요. 이미 사과도 받았고 스스로
연재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고는 소독약을 솜에 묻혀 손바닥에 발라주었다.알싸한 느낌에 유월영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연재준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보고는 연고를 발라주었다.아까 나무를 타다가 떨어지면서 생긴 상처였다.심하지 않은 찰과상이라 그녀 본인도 모르고 있었는데 이건 또 언제 본 걸까?신연우도 방에 오래 머물렀지만 전혀 그녀가 다친 것을 모르고 있었다.“다쳤으면 밴드라도 붙였어야지.”“심각하지도 않고 그냥 둬도 나을 상처예요.”연재준은 연고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싸늘하게 대꾸했다.“그러다 파상풍 걸려서 죽을 때가 되어서야 후회하겠지.”저주에 가까운 말에 유월영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한쪽 손을 마무리한 그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유월영은 소독약을 솜에 묻히며 담담히 말했다.“이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연재준도 덤덤히 손을 닦으며 말했다.“얌전히 구조를 기다렸으면 얼마나 좋아.”“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그러니까 친구가 없는 거야.”고까운 소리에 유월영이 인상을 찌푸렸다.“굳이 누구한테 기대지 않아도 되니까요.”그 말에 연재준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유월영은 약을 바르는데 집중하느라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상처 소독을 마친 그녀는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신경 써 주셔서 감사했어요. 이제 괜찮으니 이만 돌아가 보세요.”연재준이 셔츠 단추를 풀며 말했다.“넌 치료 끝났는데 난 아직 안 끝났어.”그녀는 싸늘한 얼굴로 거절했다.“아까 차 안에서 병원에 가자고 했을 때 거절한 건 대표님이세요. 이제 와서 이런 일을 저한테 시키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요? 차라리 서 대표님이나 신 교수님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하세요.”연재준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내가 서지욱이나 신 교수 구하다가 다쳤어?”“정확히 말하면 저 때문에 다쳤다고 할 수는 없죠.”유월영이 싸늘하게 말했다.“그 사람이 저를 겨냥하고 몽둥이 휘두른 것도 아니고 대표님이 제때 피하지 못해서 맞은 거잖아요. 제가 그때
유월영은 긴 한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사건이 있은지 고작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고 기억에 문제가 생겼을 리는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바로 그는 그녀를 SK에 넘기는 조건으로 이번 사업의 주도권을 가져오려는 의도가 분명히 있었다. 이제 와서 왜 아니라고 하는 걸까?‘아니야! 끌려 다니지 말자.’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의약품 상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간단한 정리를 마친 뒤, 그녀는 이 비서가 챙겨준 가습기에 물을 채워 넣은 뒤, 침대에 누었다.소은혜의 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2천만 원이나 되는 돈을 흔쾌히 내놓은 걸 봐서 그는 주변의 모든 여자들에게 친절하다고 생각했다.유독 자신만 그의 옆에서 온갖 이용만 당했다고 생각하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유월영은 시간을 확인하고 큰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평소라면 이 시간에 전화를 받았을 언니인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받자마자 끊어버렸다.유월영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 시각, 신주병원.조용했던 병실에 바이탈 기계의 급박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소식을 들은 의료진들이 병실로 달려왔다.이영화의 상태를 확인한 진 박사가 다급히 전기 충격기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간호사가 무거운 기기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비켜주세요!”유은영은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옆으로 비켜섰다.간호사는 전기 충격기에 전원을 연결하고 의사가 그것을 받아들고 이영화의 가슴 부위에 충격을 가했다.이영화의 야윈 몸이 위로 갑자기 솟구쳤다가 다시 원래대로 주저앉기를 반복했지만 바이탈 기계의 수치는 올라갈 줄을 몰랐다.“다시!”의사가 다급히 소리쳤다.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영화의 몸이 다시 허공으로 솟구쳤고 그때에야 비로소 바이탈 기계에 파장이 돌아왔다.의료진도 안도의 숨을 내쉬며 땀을 닦았다.진 박사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유은영에게 다가가서 말했다.“지금은 고비를 넘겼지만 수술을 더 이상 지체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인공심장 이식에 대해 고민은 해보셨나요?”유은영은 정신 없이 고개만 저었다.
아로마오일을 함유한 가습기가 돌아가고 있어서 방 안에서는 상쾌한 라벤더향이 풍겼다.여자는 이미 침대에 잠들어 있었는데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는 모습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현시우는 침대로 다가가서 그녀의 얼굴을 가린 이불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그는 마치 이 방의 주인인 것처럼 모든 게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했다.그는 이불을 걷고 그녀의 몸에 상처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리고 대왕 밴드가 붙여진 그녀의 손바닥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한참이 지난 뒤, 그는 손을 내려놓고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월영아.”현시우는 그녀의 방에서 오래 머무르지는 않고 10분 정도 더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엘리베이터를 탈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연재준과 현시우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다음 날, 유월영은 간만에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가습기 전원을 끈 그녀는 나중에 이 비서한테 어디서 샀는지 알아봐야겠고 생각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벌써 열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계좌에는 어제 연재준이 약속했던 2천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다.소은혜에게 처벌 대신 돈을 요구했던 건 달리 처벌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가장 실질적인 배상을 요구한 건데 연재준은 그것에 돈을 더 얹어서 소은혜 대신 지불했다.물론 그가 원해서 한 일이니 굳이 따질 생각은 없었다.신연우에게서 아침 아홉 시쯤에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소은혜 팀장은 몸이 안 좋다고 먼저 돌아갔어요. 회사 측에서 아마 소 팀장의 작업을 대신할 사람을 올려 보낼 것 같아요.]문자를 확인한 그녀는 그냥 알리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굳이 이 일을 크게 벌려봐야 그녀에게 득이 돌 것도 없었다.서지욱은 그녀에게 하루 휴가를 주었지만 유월영은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해서 신연우에게 문자를 보냈다.[지금 어디예요?][강북로 기지에 있어요. 이쪽으로 오려고요?][지금 가면 점심 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겠네요. 일도 안 하고 밥을 얻어먹는
뭔가 일을 칠 것 같은 눈빛이었다.“대표님.”연재준은 싸늘하게 그녀를 지나쳐 나가버렸고 하필이면 이때 배달기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배달 시키신 분?”유월영은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서 음식을 받았다.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아침까지 상쾌하던 기분이 완전히 사라졌다.연재준이 현시우에게 굉장한 적대감을 품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한때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둘의 사이가 왜 이렇게 최악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선박 파티에서 연재준은 현 회장에게 굉장히 우호적으로 보였다. 오히려 연 회장보다 현 회장과 사이가 더 좋아보였는데 왜 하필 그 아들인 현시우를 이토록 고깝게 생각하는 걸까?물론 유월영은 자신 때문에 연재준이 한때 친구였던 현시우를 적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정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비중이 차지하는 바는 아주 적다고 생각했다.간단히 식사를 마친 그녀는 북강로 기지로 가서 신연우와 합류했다.오늘은 그들이 영안에 출장 온지 7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필요한 데이터는 다 수집하였고 이 속도대로라면 3일 정도만 더 진행하면 돌아갈 수 있었다.유월영은 온 오후 뛰어다니다 보니 더워서 목도리를 벗었다.신연우가 다가와서 그녀에게 생수 한 병을 건넸다. 그들이 잠깐 휴식을 취하려던 순간, 갑자기 두 명의 제복을 입은 형사들이 다가왔다.“유월영 씨 맞죠?”유월영은 형사들을 보고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습니다.”“영안 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유월영 씨한테 알아보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신연우가 물었다.“무슨 일인데 그러시나요?”형사가 물었다.“유월영 씨와는 무슨 관계죠?”“상사입니다.”형사는 유월영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유월영 씨, 어젯밤에 동부로에 있는 수림에 가셨죠?”유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습니다.”“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유월영은 고개를 돌려 신연우에게 말했다.“형사님들이랑 얘기 좀 나누고 올게요.”하지만 신연우는 무조건 동행하겠다고
그녀는 어제 차에서 연재준과 하정은이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설 의원은 이미 사고가 난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어쩌면 어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연재준은 피해자가 죽임을 당했을 것을 염두에 두고 경찰에 신고했을 수도 있었다.신연우의 표정도 어둡게 가라앉았다.“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나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유월영은 다시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담담히 말했다.“실질적인 피해도 없었어요. 놈들이 저한테 달려들기 전에 제가 도망쳤거든요.”신연우가 물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소은혜를 용서한다고요?”만약 단순한 장난이었으면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 장난 때문에 유월영은 하마터면 큰 사고를 당할 뻔했다. 유월영 본인이 더 이상 추궁하지 않기로 했더라도 신연우는 그럴 수 없었다.유월영은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합의금도 이미 받았어요. 이 일은 여기서 마무리해요.”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매화 마을은 어떤 곳인가요?”“우리가 데이터를 수집해야 할 마지막 포인트가 있는 곳이에요. 매화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매화 마을이라고 불리는데 마을 주민들이 외부인을 극도로 경계해요. 재개발 들어갈 거라고 거액의 보상금을 약속했는데도 절대 마을을 안 떠난다고 버티고 있어요.”말을 마친 신연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이건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죠.”“알아요.”그날 저녁 회의 때, 연재준과 서지욱은 비서만 따로 보내고 나타나지 않았다. 유월영은 그들이 매화 마을 사건을 해결하러 갔다고 생각했다.SK에서 소은혜 대타로 보낸 인원도 오후에 도착했다. 경영사업팀 부장이었다.그리고 부장과 함께 온 인물이 신연아였다.해운을 떠난 뒤로 다시는 신연아를 만나지 못했는데 그 사이 신연아는 SK로 돌아가서 경험을 쌓고 있다고 했다. 오늘 신연아는 부장의 비서로 같이 출장에 동행했다.하지만 일에 집중하기는커녕 연재준에게만 신경 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회의가 끝난 뒤, 신연우는 신연
유월영은 순간 당황했고 신연우도 인상을 찌푸렸다.“신연아.”신연아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말했다.“왜? 술상에서 이런 질문 지극히 정상적인 거잖아? 형식적인 질문만 하면 그게 무슨 재미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고 놀아.”유월영은 담담한 어투로 답했다.“내가 게임 룰을 몰라서 그랬네요. 그럼 벌칙을 선택하면 뭘 하면 되나요?”신연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벌칙은 오른편에 앉은 남성분이랑 10초 동안 키스하는 거예요.”유월영의 오른편에는 오늘 같이 기지에 갔던 연구원이 앉아 있었다.그는 현지인이었는데 오늘 이 술집을 추천한 장본인이기도 했다.문제는 신연우도 유월영의 왼쪽에 앉아 있는데 신연아가 굳이 친하지도 않은 연구원을 지목했다는 것이었다.고의성이 다분한 도발이었다.신연우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이게 무슨 짓이야? 너 공부하라고 대학까지 보냈더니 어디서 이런 못된 짓만 배워왔어?”신연아는 피식 냉소를 지었다. 어제 출장을 와서 유월영을 봤을 때부터 그녀를 어떻게 엿 먹일지 계획했던 그녀였다.“내가 뭐 어쨌다고? 저 여자 회사에서 비서로 일할 때도 상사랑 붙어먹었던 여자야. 대학교 조교로 들어간 뒤로는 담당 교수랑 붙어먹고. 저런 헤픈 여자를 내가 왜 존중해 줘야 하는데?”신연우는 동생의 무례한 발언에 화가 치밀었다.“넌 우리 SK가문의 얼굴이야. 난 내 동생이 이렇게 기본적인 소양도 못 갖춘 사람인 줄은 몰랐어. 어떻게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어? 당장 안 일어나?”신연아는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언성을 높여 말했다.“내가 뭐 틀린 말했어? 전부 사실이잖아! CCTV영상에서 저 여자가 재준 오빠랑 같이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단 말이야! 저 여자가 재준 오빠 앞에서 꼬리친 거라고!”“그러면서도 그때 내가 해운에 있을 때는 나랑 재준 오빠 사이를 잘되게 도와준다고 하던 가증스러운 여자야. 날 아주 멍청이로 알고 온갖 거짓말을 했다고. 난 저런 여자를 절대 새언니로 인정할 수 없어! 오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