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혜가 말했다.“어제 백유진 씨를 대표님 사무실로 오게 만든 사람이 월영 씨였죠? 하마터면 저나 대표님이 곤란해질 뻔했어요.”유월영은 담담한 얼굴로 창가 가림막을 내렸다.소은혜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사실 좀 놀랐어요. 소문에 월영 씨는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아직도 연 대표님에 대한 소유욕이 그토록 강할 줄은 몰랐네요. 난 그냥 오랜만에 만난 대표님이 반가워서 얘기가 좀 길어진 것뿐인데 그것마저 월영 씨는 마음에 안 들었나 보네요.”과연 둘이 안에서 얘기만 했을까?유월영은 백유진이 갔을 때쯤이면 현장이 거의 정리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그 장면을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스튜어디스가 다가와서 음료수 주문 여부를 물었다.“레몬에이드 한 병 주세요.”유월영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스튜어디스가 레몬에이드를 건네자 그녀는 단숨에 마셔버렸다.소은혜가 작은 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유월영 씨는 내가 대표님과 가깝게 지내는 게 별로 마음에 안 드나 봐요. 혹시 질투인가요?”유월영은 안대를 꺼내며 그녀에게 말했다.“죄송한데 제가 너무 졸려서요.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해요.”소은혜가 당황한 사이, 유월영은 안대를 착용하고 좌석 등받이 각도를 조절한 뒤에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대놓고 무시당한 소은혜는 헛웃음만 나왔다.그렇게 많은 말을 걸었는데 머리 묶는 거 가르쳐 준 것 말고는 제대로 대답도 하지 않았다.정말 여러모로 대단한 여자였다.대략 세 시간 뒤, 비행기가 영안 공항에 착륙했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는 이미 공항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유월영과 신연우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차를 향해 걸어갔다.신연우가 핸드폰을 꺼내더니 사진첩을 열고 그녀에게 말했다.“이거 좀 봐볼래요?”그들의 뒤에서 2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걷고 있던 연재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둘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유월영은 가까이 다가가서 신연우가 내민 핸드폰을 바라봤다.풍성하게 잘 자란 허브를 담은
해변 도시인 영안은 신주시보다 기온이 찼다. 유월영은 가져온 옷이 너무 얇아서 패딩이나 사려고 밖으로 나왔다.로비로 내려오는데 마침 신연우와 마주쳤다. 그 역시 두터운 옷을 안 가져와서 백화점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웃고는 함께 백화점으로 향했다.유월영은 베이지톤의 패딩을 골랐고 신연우는 같은 디자인의 검은색을 골랐다.유월영은 신연우가 괜히 사준다고 나설까 봐 그가 다른 옷을 보러 온 사이, 패딩을 계산해 버렸다.“월영 씨.”신연우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는 목도리 하나를 그녀의 목에 걸어주며 말했다.“이거 엄청 따뜻해 보여요.”그가 손수 목도리를 매주자 유월영은 느슨해진 머리를 다시 묶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그들의 모습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이때, 연재준과 소은혜가 백화점으로 들어오다가 그 모습을 보았다.소은혜가 웃으며 말했다.“돌아가서 대표님한테 할 얘기가 더 늘었네요. 우리 대표님은 분발 좀 하셔야겠어요. 동생이 저리도 앞서 나가는데 우리 대표님은 여태 솔로이시니.”유월영과 신연우도 고개를 돌렸다가 그들을 발견했다.와인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정장을 입은 남자가 팔짱일 끼며 들어오고 있었다.신연우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여기서 두 분을 뵐 줄은 몰랐네요. 두 분도 쇼핑을 나왔나 봐요?”유월영은 더 이상 연재준과 엮이기 싫었기에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희는 살 거 다 샀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같이 가요. 사실 저희도 다 샀거든요.”그렇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넷은 함께 카운터로 향했다.소은혜는 아까 마트에서 고른 간식과 일용품을 카운터에 내놓았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연재준이 여자와 같이 쇼핑을 나오다니, 둘의 관계가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다.소은혜는 카운터에 진열된 콘돔을 가리키며 연재준에게 애교를 부렸다.“오빠, 이거도 살까요?”연재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갑작스럽게 바뀐 호칭으로 인해 둘의 사이가 더 이상해 보였다.소은혜는 고
“대체 넌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연재준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서 문자 좀 보내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어?”그의 말에는 모순이 있었다.서지욱은 20층을 사용하고 있었고 연재준과 그의 비서 하정은, 그리고 소은혜는 19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17층이었다.17층에는 어쩐 일로 왔을까?신연우나 그녀를 찾아왔다고 하기엔 좀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었다.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둘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남자의 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백화점에서 돌아온 뒤로 술 마시러 나갔던 걸까?유월영이 말했다.“연 대표님, 이거 좀 놓고 얘기해요.”연재준은 신연우가 걸어주었던 목도리를 빤히 바라보았다.이렇게 보고 있자니 최근 둘이 부쩍 붙어 다니는 모습을 많이 본 것 같았다.바닥을 내려다보니 그녀의 가방에서 내용물이 쏟아져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맨 위에는 그녀의 분홍색 레이스 브래지어도 있었다.그의 시선을 눈치챈 유월영이 이를 갈며 말했다.“이거 좀 놓으시라고요!”연재준은 시선을 다시 그녀의 얼굴로 돌리고 말했다.“나이도 적지 않은데 취향은 여전히 소녀 같네.”유월영은 치미는 분노를 꾹 참으며 싸늘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연 대표님 그거 성희롱에 해당하는 발언이에요. 자중하세요!”“내가 뭘 했다고 성희롱이야? 난 그냥 네 취향이 괜찮다고 칭찬한 것뿐인데?”그가 비아냥거리듯 말을 이었다.“다른 사람이 하는 건 칭찬이고 내가 하면 성희롱이야?”유월영이 바둥거리자 그는 손에 힘을 꽉 주며 계속해서 말했다.“신연우랑 둘이 백화점에 가서 커플 패딩을 맞추더니 속옷까지 세트로 맞췄어?”그러고 신연우의 방에서 세 시간을 같이 보낸 걸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었다.유월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기온 때문에 속옷이 부족할 것 같아서 몇 벌 더 구매한 것인데 왜 이걸 연재준에게 설명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생각을 굴리다가 갑자기 그의 등 뒤를 바라보
연재준은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몸을 옆으로 비틀어 유월영의 손길을 피했다.유월영은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연재준은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고 벽에 밀쳤다.두 손을 그에게 제압당한 유월영이 거친 숨을 몰아 쉬며 협박하듯이 말했다.“당장 내 방에서 나가요! 그러지 않으면….”“그러지 않으면?”이미 취기에 이성이 약간 나가버린 연재준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여기서 진짜 뭘 한다고 해도 넌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어.”유월영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신현우가 너희한테 뭘 약속했는지 맞춰볼까? 신연우 연구팀이 프로젝트에 가담하면서 SK는 이 사업에서 주도권을 챙겼어. 그리고 그 대가로 프로젝트가 끝난 뒤에 너를 SK에 취직시켜 준다고 했겠지. 내 말이 틀려?”“그건 생각해 봤어? 지금이라도 내 말 한 마디면 SK는 이 프로젝트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걸? 다 된 밥을 빼앗기게 생겼는데 SK가 널 받아줄 것 같아? 그러면 넌 또 직장 잃은 백수가 되겠지.”공공연한 협박이었다.“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요?”유월영이 헛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협박인가요? 내가 대표님의 잠자리 요구를 거부하면 SK를 이 사업에서 물러나게 하겠다고요?”연재준은 잔뜩 실망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넌 꼭 나를 그렇게 치졸한 인간으로 말해야겠어?”유월영은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이 치졸한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요!”연재준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솔직히 치졸한 거로 치면 신 교수가 나보다 더할걸?”“여기서 신 교수님이 왜 나와요! 당신이 더러운 생각이 가득하니까 다른 사람도 더럽게 보이는 거죠!”“넌 신 교수를 그렇게 믿어? 걔 약혼녀가 있으면서 너랑 만나고 있는 거야. 처음부터 널 가지고 놀 생각이었다고. 이래도 그 놈 편만 들 거야?”연재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걔는 처음부터 네 몸뚱아리 노리고 접근했어. 신연우가 그렇게 좋은 사람 같았어?”“나와 신 교수 사이를 함부로 평가하지 마세요. 해운의 대표라는 사람이
짝!어두운 방안에서 아찔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연재준은 살면서 여자에게 귀뺨을 맞은 것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리고 두 번 다 유월영에게 맞았다.처음에 그녀가 귀뺨을 때렸을 때는 그가 그녀를 두고 쓰다 버린 도구라고 말했을 때였다.그리고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더 힘이 많이 들어갔다.유월영은 소파에 누워 씩씩거리며 어둠 속에서 그를 노려보았다.광선이 어두워서 그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그들은 마치 폭발 직전의 야수처럼 아무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군가가 카드로 문을 열었다.유월영은 급기야 연재준을 밀쳐내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옷깃을 여몄다.이 방은 그녀가 혼자 쓰는 방이었다.전등이 켜지고 광선이 쏟아지면서 유월영은 본능적으로 눈을 찌푸리며 문밖을 바라보았다.호텔 직원 두 명이 문 앞에 서 있었다.직원은 두 사람을 보고 당황한 표정으로 급기야 사과했다.“죄송합니다! 방에 두 분이 계신 줄은 몰랐어요! 조… 조금 전에 1702호 방 문이 안 열린다는 신고를 받고 알아보려 온 참이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두 분 볼 일 보세요!”유월영은 직원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여기 나 혼자 쓰는 방인데 누가 신고를 했다는 거예요?”“그게… 전화 거신 분은 남성분이었는데 1702방에 투숙하신다고 했어요. 성이 유씨라고 했는데….”직원이 더듬더듬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사이, 연재준은 일어나서 옷매무시를 정돈했다.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유월영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없이 직원을 지나쳐 밖으로 나가버렸다.그가 방을 나가자마자 모퉁이에서 누군가 핸드폰으로 떠나는 그의 모습을 사진 찍어 어딘가로 전송했다.[방해 작업 성공입니다.]갑작스러운 전화 신고는 누군가의 짖꿎은 장난으로 결론이 났다. 유월영 본인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다고 했고 직원은 거듭 감사하다고 인사한 뒤에 문을 닫고 나갔다.유월영은 누군지는 모르나 신고자에
그나마 분풀이라도 하니 솟구치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어느 정도는 갈무리할 수 있었다.그녀는 긴 한숨을 쉬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조급해 하지 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해결하자. 할 수 있어.그녀는 이렇게 스스로를 위안했다.연재준은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에 서지욱이 서 있었다.서지욱은 친구의 얼굴이 뻘겋게 부은 것을 보고 층수를 확인하고는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유 비서 찾아왔었어?”해운에서 사직한지 몇 달이나 지났는데도 서지욱은 여전히 습관처럼 유 비서라고 불렀다.3년이나 불렀던 호칭이었기에 바꾸려니 쉽지 않았다.연재준은 싸늘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서지욱이 다 안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둘이 또 싸웠어? 얼굴은 유 비서한테 맞은 거야?”연재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자기가 뭐 대단한 놈 만난 줄 알고 아주 기고만장하더라고.”서지욱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재준아, 너 요즘 부쩍….”“내가 뭐?”“유 지서가 신연우랑 가깝게 지낸 뒤로 네가 요즘 부쩍 유 비서한테 관심이 많아진 것 같아서 말이야.”연재준은 시큰둥한 얼굴로 답했다.“거슬려서 그래. 거슬려서.”서재욱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연재준은 그런 친구를 불쾌한 눈으로 쳐다보았다.‘자기가 여자 하나에 목 매다니까 나도 그런 줄 아나 보네.’그는 유월영을 굳이 정의하자면 그녀가 자신에게 많은 걸 빚졌고 자신은 지금 빚 독촉을 하는 중이라고 단정지었다.“정말 거슬려.”서재욱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누구? 신연우? 함부로 걔 건들지 마. 걔 별로 대단한 것 같지 않아도 SK회장이 애지중지하는 막내아들이라고.”연재준은 피식 비웃음을 머금었다.다음 날 아침, 신연우는 신주 실험실에 문제가 생겨 돌아가야 할 일이 생겼다.하지만 오늘은 고찰이 시작되는 첫날이고 기술팀은 남아서 데이터를 수집해야 했기에 유월영은 여기 계속 남아 있어야 할 상황이었다.유월영은 처음
지배인이 난감한 기색으로 말했다.“그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그 층에 다른 손님들도 있고 다른 분들이 사생활 침해라고 문제 삼을 수도 있는 부분이라서요. 상부에 한번 요청은 드려보겠습니다.”“그건 지배인님이 알아서 하세요. 다만 제가 언제든 이 일을 경찰에 신고할 수 있다는 것만 명심해요. 어쨌든 저는 스토킹으로 피해를 입었으니까요. 형사들이 수사에 착수하면 당연히 CCTV를 조사하려 하겠죠?”지배인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실질적으로 피해를 본 건 없잖아요. 그리고 미행도 고객님 추측일 뿐이지 증거도 없고요. 경찰에 신고해도 사건 접수가 힘들 수 있어요.”“그래요? 하지만 어제 그 시간에 19층에 투숙 중이신 연 대표님이 17층에 오셨다가 스토커로 오해 받고 하마터면 피해를 당할 뻔했는데 이래도 상관 없나요?”연재준 이름이 나오자 지배인의 표정이 바뀌더니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눈짓했다.직원이 다가와서 그의 귓가에 대고 뭐라 하자, 지배인은 유월영에게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간 지배인은 노현재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재준이까지 거기 엮였단 말이지?”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급하게 연락을 드린 거지요. 영상을 보여줘야 할까요?”“그 여자 이름이 뭐야?”“유씨 성을 가진 손님이라고 들었는데 지금이라도 가서 성함을 물어볼까요?”곧이어 남자의 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유씨? 유월영? 그 여자였네.”지배인은 갑자기 미묘하게 바뀐 그의 말투에 고개를 갸웃했다.“그 여자라면 보여줘도 돼.”“알겠습니다.”통화를 마친 노현재는 기분 좋게 노천 수영장에 뛰어들어 신나게 수영을 즐겼다.한편, 로비로 돌아간 지배인은 유월영에게 소식을 전했다.“저희 대표님께 여쭤봤는데 손님의 요구는 무조건 들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저랑 함께 보안실로 가시죠.”유월영은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지배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현재가 대답했다.“아직.”“그럼 그 인터넷전화 위치는 추적해 봤어?”“그건 시간이 좀 오래 걸릴 것 같아.”아무것도 진행된 게 없다는 얘기에 연재준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CCTV 영상 쳐다보고 있을 시간에 조사를 했으면 벌써 끝났겠다.”수화기 너머로 노현재의 억울한 고함소리가 들려왔지만 연재준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한편, 유월영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전화를 받았다.“언니, 무슨 일이야?”“월영아, 지금 시간 괜찮아?”그래도 큰언니의 목소리가 편안해 보여서 그녀는 한시름을 놓았다.“시간 괜찮아. 무슨 일이야?”“엄마가 너 줄 목도리 다 완성하셨어. 모자도 만들어 주신다고 굳이 지금 너한테 좋아하는 색상 물어보라느니 거야.”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엄마는 옆에 계시지?”“응. 엄마 바꿔줄게. 둘이 얘기해. 우리 엄마 요즘 따라 성격이 급해지셨어. 저녁 때 물어본다니까 굳이 지금 물어보라잖아.”큰언니는 투덜거리며 엄마를 바꿔주었다.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인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시간이 얼마 남았는지도 모르는데 컨디션 괜찮을 때 뭐라도 더 해주고 싶어서 그러지.”유월영은 그 말을 듣고 있자니 가슴이 쓰렸다.“엄마.”이영화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월영아.”“엄마, 얘기해. 듣고 있어.”“목도리 완성했어. 모자도 떠주고 싶은데 넌 어떤 색상이 좋아?”“다 좋아. 목도리랑 같은 색상이면 돼.”유월영이 말했다.“엄마, 앞으로 시간은 많아. 급할 거 없어. 뜨개질한다고 밤 새고 그러면 안 돼.”“아니야. 오후에 좀 하고 지금은 쉬고 있어. 모자 하나 뜨는 건 빨라.”이영화가 말했다.“이웃집 혜민이 아빠가 올해 메밀 수확이 괜찮다고 메밀가루를 보내왔더라고. 그거로 나중에 냉면 만들어서 먹자.”여름에 먹는 냉면을 겨울에 얘기하시는 걸 보면 엄마는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유월영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냉면탕은 좀 달게 해줘. 나 신맛보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