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준은 이곳에서 유정을 다시 만날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유정도 반가운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진서준에게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서준 씨는 오늘 집 보러 온 거예요?”“맞아요. 인터넷에서 유정 씨네 부동산이 인테리어가 되어있는 작은 별장을 팔고 있길래 보러 왔죠.”진서준이 인테리어가 되어있는 별장을 찾고 있다는 말에 유정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구역 안에는 두 군데 밖에 남지 않았는데 앞뒤 정원까지 포함해서 120평 정도 될 것 같아요. 그런데 가격이 조금 비싸요.”유정이 진서준을 바라보며 설명해주자 진서준도 싱긋 웃으며 답했다.“가격은 상관없어요.”유정과 진서준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다른 여사원들은 모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유정 씨, 우수한 판매원으로서 고객을 가리는 뛰어난 안목이 있어야죠.”사원 중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여사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유정을 나무랐다.“어떤 사람들은 고객이 이곳에 집을 사러 온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여자 꼬시러 온 것인지 의도를 한눈에 알아낼 수 있다니까요.”산성 부동산에 여사원들이 모두 비교적 예쁘게 생겼기에 적지 않은 남자들이 부자인 척 가오를 부리며 조금 어리숙한 여자 꼬시러 왔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진서준은 그 말에 숨겨진 가시를 알아냈기에 상당히 불쾌했다.“지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당연히 말 그대로죠.”여사원이 경멸 어린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지금까지 사기 치러 온 남자들은 적어도 연기라도 할 줄 알았지 당신은? 연기도 할 줄 모르면서 장애까지 있는 가족을 데리고 와 불쌍한 흉내나 내다니.”이 말을 듣자 진서라와 조희선의 안색도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러자 상황파악을 한 유정이 다급하게 그 여사원한테 해명해주었다.“한영 씨, 서준 씨는 저와 아는 사이에요. 우리를 속이러 온 사람이 아니에요.”“됐어. 저런 사기꾼들은 항상 너같이 착하고 어리숙한 여자애들만 골라서 사기 치잖아.”“그만!”진서준이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그러자 현장
다른 별장이라니? 설마 별장을 두 개나 사려고?“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남은 두 별장은 가장 비싼 거라고요! 한 채에 16억이라고요! 선금만 낸다고 해도 6억을 내야 해요!”고한영은 놀라서 굳었다가 웃으면서 얘기했다.진서준은 담담하게 얘기했다.“아까 한 말, 지킬 수 있습니까?”“당연하죠!”고한영은 팔짱을 끼더니 얘기했다.“만약 정말 별장 두 채를 살 수 있다면 한 달이 아니라 평생 가정부를 할 수 있어요.”유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한영은 정말 잘못 걸린 셈이다.“유정 씨, 계약서에 사인하고 돈을 내러 가죠.”진서준이 유정을 보면서 얘기했다.“알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진서준 씨.”유정이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고한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약간의 불안함이 마음속에서 생겨났다.계약서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남은 것은 사인과 돈이었다.진서준은 은행카드 두 장을 꺼냈다.이 두 카드는 하규천과 황보식이 진서준에게 준 카드로 한도가 없었다.언제 어디서나 마음껏 쓸 수 있었다.진서준은 계약서에 사인했고, 유정은 바로 카드를 들고 재무부로 갔다.고한영은 더욱 초조해져서 물컵을 들고 있는 손이 바르르 떨렸다.설마 눈앞의 남자가 정말 그렇게 돈이 많은 부자란 말인가?얼마 지나지 않아 유정이 환한 표정으로 사무실에 돌아왔다.“진서준 씨, 두 별장은 이제 다 진서준 씨의 것입니다. 오후에 집문서가 나오면 바로 가져다드릴게요.”진서준은 담담하게 웃었다.“수고해 줘요.”“수고는 무슨. 진서준 씨 덕분에 돈을 많이 벌었는데 제가 더 고마워해야죠.”별장 두 채, 모두 32억이다.유정은 거기서 1억 8천의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었다.그것 뿐만이 아니라 각종 성과금까지 합하면 이번 달의 월급은 거의 2억에 달한다.2억은 일반인이 편히 남은 생을 살 수 있게 한다.고한영은 그걸 보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닫히지 않았다.그녀는 이 남자가 정말 32억을 내놓을 줄은 몰랐다.진서준은 집 열쇠를 건네받고 고한영을 쳐다보았다.
진서준은 차를 옆까지 몰고 와 창문을 내려 유정을 차에 타게 하려고 했다. “유정 씨, 이번 달 판매왕은 유정 씨겠네요? 그럼 좋은 식당으로 가죠!”한 여직원이 질투심 가득한 말투로 유정과 얘기했다.유정은 온 지 한 달만에 가장 비싼 별장 두 개를 팔았다. 그러니 동료들이 질투할만했다.“오션 호텔로 갈까요?”유정이 떠보며 넌지시 물었다.오션 호텔은 5성급 호텔이다. 이지성 아들의 돌잔치 때도 오션 호텔에서 했었다.사람들 사이에서 매니저가 얘기했다.“그럼 오션 호텔로 가죠. 내가 거기 회원 카드가 있어서 계산할 때 할인을 받을 수 있어요.”그 말을 들은 유정은 감격의 시선으로 도영광을 쳐다보았다.유정을 아니꼽게 보던 여직원 나지혜는 얼른 옆에서 아부했다.“도 매니저님은 정말 대단해요! 오션 호텔의 회원 카드가 있다니요!”도영광은 으쓱해서 얘기했다.“5성급 호텔의 회원 카드일 뿐이에요. 비싸지도 않고.”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부러워서 도영광을 보면서 존경의 시선을 보냈다.도영광이 유정을 보면서 얘기했다.“유정 씨, 내 차에 앉아요.”유정은 살짝 어색해했다.“괜찮아요, 매니저님. 저는 별장을 산 진서준 씨의 차에 앉아서 가면 돼요.”도영광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얼굴에서 불쾌함이 엿보였다.“그 사람을 왜 불러요.”“그분께도 감사하니까요.”유정이 얘기했다.도영광이 뭐라고 하려던 찰나, 진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정 씨, 차에 타요.”진서준을 본 유정은 웃으면서 걸어갔다.고한영도 그 뒤를 따랐다. 진서준의 조수석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바로 그 자리에 앉아버렸다.도영광은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했다.세일즈 팀의 가장 예쁜 두 여자가 다른 사람의 차를 탔으니, 세일즈 팀 매니저인 그는 체면이 깎였다.그 모습을 본 나지혜는 도영광의 팔을 껴안고 얘기했다.“도 매니저님, 우리도 얼른 같이 가요.”도영광은 차갑게 진서준의 차를 보더니 예쁘게 생긴 여직원들을 차에 태워 따라갔다.호텔로 가는 길에 유
호텔에 들어선 도영광은 프런트로 가 패밀리 스위트룸을 잡았다.진서준이 없다면 도영광은 이렇게까지 돈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지금의 행동은 다 질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유정은 처음 호화로운 호텔에 와서 화려한 내부를 보며 깜짝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이게 부자들의 세상인가?’“가요. 룸을 잡았으니까.”도영광이 유정에게 얘기했다.사람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룸에 들어간 유정은 또 한 번 놀랐다.룸은 거의 100평이 되었다. 긴 식탁 테이블 외에도 노래방 기계와 당구대 등이 있었다.“진서준 씨, 이런 곳은 돈이 많이 들겠죠?”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렇긴 하죠.”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진서준은 눈치챘다. 이들이 유정을 호구 잡았다는 것을.“당신이 유정 씨네 팀 매니저입니까?”진서준이 걸어가 도영광에게 물었다.“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도영광은 짜증 섞인 시선으로 진서준을 쳐다보았다.‘돈만 있으면 다인 줄 알아? 난 네가 두렵지 않아!’“이곳이 얼마나 비싼 곳인지는 알죠?”진서준이 물었다.“당연하죠. 하지만 이 호텔은 유정 씨가 고른 곳이에요.”도영광이 눈썹을 까딱였다.“우리는 유정 씨한테 5성급 호텔을 고르라고 강요한 적 없어요.”“그러게 말이에요. 밥 얻어먹으러 온 주제에 무슨 말이 저렇게 많대.”한 여직원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진서준을 보며 눈을 흘겼다.그 여직원은 바로 아까 도영광의 팔짱을 낀 나지혜였다. 세일즈 팀의 사람들은 나지혜와 도영광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알았다.“진서준 씨, 괜찮아요. 그저 한 끼 식사일 뿐이잖아요.”유정은 진서준의 팔을 끌며 도영광과 진서준이 싸우지 않기를 빌었다.“들었어요? 유정 씨가 괜찮다는데요.”도영광이 차갑게 웃었다.진서준은 나대는 도영광의 모습을 보면서 화가 치밀었다.“진서준 씨, 됐어요. 몇백만 원쯤은 감당할 수 있어요.”유정이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진서준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이 방의 규모를 봤을 때 몇백만으로는 모자
나지혜의 눈빛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매번 도영광과 할 때마다 그는 파란 캡슐 약 두 알을 먹곤 했었다.그런데 진서준은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진서준이 정말 보기라도 한 걸까? 그럴 리가 없다.“헛소리 그만해요. 도 매니저님 몸은 아무 문제 없어요!”나지혜는 마음속 충격을 억누르고 진서준을 노려보았다.나지혜가 말하는 것을 듣고 다른 여성 판매원들도 진서준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당신들 내 말 안 믿어요?”진서준은 놀리는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그가 원한 것은 도영광이 믿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 있다가 도영광을 놀려줄 수 없다.“애초에 당신이 한 말은 헛소리야!”도영광은 테이블을 치며 화를 냈다.하지만 진서준은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웃었다.“당신의 신장이 괜찮다고 생각하면 나랑 주량을 대결해 보죠. 신장이 좋은 사람은 대사 노폐물 배출에도 문제가 없어서 보통 알코올 중독에 걸리지 않아요.”도영광은 진서준이 자신과 주량을 대결하고 싶다는 말을 듣고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을 뻔했다.도영광은 영업 관리자가 되기 위해 가족에게만 의지한 것이 아니라 말주변도 좋은 데다가 술도 잘 마셨다. 그에게 소주 한 근은 시작에 불과했다.“진심이에요?”도영광은 최서준을 바보 보듯 바라보았다.“물론이죠.”진서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유정을 해치려 했으니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지.진서라는 당황한 얼굴로 진서준을 바라보며 속삭였다.“오빠, 무리하지 마!”진서라의 기억에 진서준은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유정도 걱정이 되어 진서준에게 말했다.“서준 씨, 도 매니저의 주량은 아주 강해요. 대결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저도 주량이 나쁘지 않아서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아요.”진서준은 웃으며 말했다.아무리 많이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고?이 말을 들은 주위의 사람들은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진서준은 웨이터를 바라보며 당장 몇천 원짜리 소주 두 상자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진서준 씨
룸에는 소파가 하나 있었다.두 웨이터는 기절해 쓰러진 도영광을 소파로 옮겼다.모두의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지만 진서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사람들은 소주 두 병을 꿀꺽꿀꺽 삼키고도 멀쩡한 진서준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었다.인터넷에서 라이브 방송으로 술을 마시는 스트리머들도 진서준만큼 용감하지 못했다.“나 쳐다보지 말고 빨리 먹어.”진서준은 웃으며 진서라에게 큰 랍스터를 건넸다.도영광이 없으니 식사자리는 훨씬 더 조용해졌고 사람들이 먹는 소리만 들렸다.나지혜는 어두운 표정을 한 채 외투를 손에 들고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방금 전 화장실에서 몸에 묻은 토사물을 닦고 나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진서준은 일부러 도영광의 신장이 좋지 않다고 말하면서 도영광을 도발해 그와 주량 대결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이런 꼼수를 피우다니!나지혜가 자리에 앉자 진서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채 당부했다.“좋은 마음으로 말하는 건데, 앞으로 다시는 아이를 지우면 안 돼요. 그렇지 않으면 다시 임신하기 바쁘거든요.”그 말에 룸 전체가 조용해졌다.나지혜는 깜짝 놀라 진서준을 노려보며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그쪽이 임신한 거 몰랐어요?”진서준은 웃으며 물었다.“당연히 알죠!”나지혜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여러 번 아이를 지우면 앞으로 다시 임신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알겠네요.”진서준은 솔직하게 말했다.“헛소리 지껄이지 마요. 난 처음 임신했어요!”나지혜가 화를 내며 말했다.“처음이라고요?”진서준은 경멸하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요. 그쪽이 처음이라면 처음인 걸로 하죠.”어차피 이제 말을 밖으로 내뱉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그와 상관없었다.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멍청하지 않았고 나지혜가 어떤 여자인지 알고 있었다.도영광이 매니저가 되기 전에 나지혜가 40대 중년 남성과 호텔을 드나드는 것을 본 사람이
식사를 끝낸 뒤 진서준은 진서라를 데리고 떠날 준비를 했고 내친김에 결제까지 할 생각이었다.고한영과 유정은 진서준이 떠나려고 하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뒤쫓았다.“서준 씨,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유정이 감격에 겨워 말했다.“계속 그렇게 감사 인사를 한다면 화낼 거예요.”진서준이 일부러 화난 척하며 말하자 유정은 깜짝 놀랐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당황스러움이 보였다.그녀는 자기가 정말로 진서준을 화나게 할까 봐 두려웠다.“오빠, 왜 유정 언니에게 겁을 줘?”진서라가 진서준의 팔뚝을 때리며 질책했다.“유정 언니, 오빠 농담한 거예요. 믿지 말아요.”“하하, 농담이었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요.”진서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제가 유정 씨에게 도움받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유정은 서둘러 가슴팍을 두드리며 말했다.“서준 씨, 앞으로 제가 필요하다면 그게 무슨 일이든, 물불 가리지 않고 도와드릴게요.”진서준의 친근한 모습에 고한영은 자신이 내렸던 결정이 절대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래층으로 내려가서 결제하려는데 호텔 매니저가 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진서준은 강요하지 않았고 진서라를 데리고 차로 돌아갔다.차에 오르자마자 유정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유정입니다.”“네? 저희 엄마 상태가 악화했다고요?”“네,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갈게요.”유정은 눈시울이 빨개진 채로 전화를 끊었다.“서준 씨, 절 정운 병원까지 데려다줄 수 있나요?”“조금 전에 의사 선생님께서 저희 엄마 상태가 악화했다고 연락이 와서요. 언제든 돌아가실 수 있다고 해요.”진서준은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진서라에게 말했다.“서라야, 넌 고한영 씨와 함께 따로 차를 타고 돌아가.”진서라와 고한영이 차에서 내리자 진서준은 곧바로 액셀을 밟고 부리나케 정운 병원으로 향했다.2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지만 진서준은 약 10분 만에 도착했다.차를 세운 뒤 두 사람은 곧바로 차에서 내려 유정의 어머니가 계
조금 전 진서준이 밖으로 끌어낸 중년 의사가 병원 경비원을 불러와서 문을 박차고 들어오려고 한 것이다.“요즘 사람들은 정말 경우가 없다니까요!”“제가 그 여자 분명 죽을 거라고 했는데도 그놈이 글쎄 자기가 구할 수 있다는 게 아니겠어요?”중년 의사가 밖에서 큰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유정은 어머니에게 옷을 입혀주었고 진서준은 문가로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경비원은 곧바로 안으로 쳐들어와서 진서준을 제압하려 했다.진서준의 눈빛은 서늘했다.“뭐 하시는 거죠?”“뭐 하는 거냐고요? 제가 묻고 싶네요! 제 환자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중년 의사가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당연히 사람을 구했죠.”진서준이 불쾌한 표정으로 대꾸했다.“당신이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면 다른 사람이 구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나 봐요?”경비원은 진서준의 말을 듣고 냉소했다.“이보세요, 황 선생님은 서울시에서 가장 뛰어난 내과 전문의예요!”“황 선생님도 환자가 틀림없이 죽을 거라고 했는데 당신이 어떻게 살린단 말입니까?”진기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살렸는지 살리지 못했는지 직접 보면 알겠죠.”황지욱은 진기준의 말을 듣고 코웃음쳤다.“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무슨 의술을 안다고?”“황 선생님, 진기준 씨는 정말 제 어머니를 치료해 주셨어요. 믿기지 않는다면 직접 와서 보세요.”유정이 다급히 말했다.황지욱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면서 불쾌한 듯 말했다.“제가 말했죠. 환자분 어머니는 살릴 수 없다고요!”“하지만 제 어머니는 살았는걸요.”유정이 말했다.“우습네요. 이 청년이 환자분을 살렸다면 전 앞으로 의사를 하지 않겠어요!”황지욱은 차갑게 코웃음치면서 유정의 어머니가 누워있는 병상으로 향했다.환자의 안색이 좋아진 걸 본 황지욱은 깜짝 놀랐다.“이... 이럴 리가 없는데?”황지욱은 믿기지 않아서 곧바로 침대 옆에 놓인 기계로 유정의 어머니를 진찰했다.전면적인 검사가 끝난 뒤 황지욱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유정의 어머니는 신체 기능이 일반인보
“저기 있어...”진서준은 박신준을 바닥에 내던지고 빠르게 건물로 달려갔다.“경비 연대 좀 보내.”박신준은 숨을 두어 번 가까스로 몰아쉬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오늘 박신준은 무슨 일이 있어도 황예은이 떠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하문천 어르신, 보셨죠? 저는 어르신의 체면을 봐서 얌전하게 있는데 저 녀석은 제 체면 따윈 신경도 안 씁니다.”박신준이 이를 악물고 바로 고자질하자 하문천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만둬, 방금 일어난 일은 못 본 걸로 할게.”박신준은 하문천이 자기를 위로하려고 하는 말인 줄 알고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 말은 사실 진서준에게 하는 말이었다.지선도 죽일 수 있는 진서준이 굳이 박신준을 두려워할 리 없다.진서준은 속도를 내서 뛰어가 작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진서준은 진한 피비린내를 맡고 당황한 표정을 지은 채 빠르게 피비린내가 나는 쪽을 따라갔다.우르릉!갑자기 진서준은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눈앞의 황예은은 도살장에 끌려간 죽은 돼지처럼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황예은의 몸은 피투성이였고 피부가 찢겨나갔으며 살점이 거의 다 떨어져 나갔다.지금 황예은의 몸에는 거의 온전한 상태의 피부가 보이지 않았다.피는 황예은의 발끝에서부터 조금씩 떨어져 바닥에 흘러내리고 있었다.쿵!진서준은 발로 감옥 문을 열어젖히고 참선검을 꺼내 밧줄을 끊어냈다.그러자 황예은이 이내 진서준의 품에 떨어졌다.“이 개자식!”진서준은 황예은의 처참한 몰골을 보며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박신준이 여자에게 이렇게 가혹한 대우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박신준의 아들 박진강은 황예은이 죽인 게 아니었다.참선검도 주인의 살기를 감지한 듯 미세한 빛을 발산했다.진서준은 황예은를 안고 천천히 건물을 빠져나갔고 참선검은 그의 뒤를 떠다녔다.작은 건물 밖에는 수백 명이 총을 장전하고 출구를 겨누고 있었다.진서준이 황예은를 안고 나오는 것을 보자 군인들은 총알을
박신준은 흑석영에서 이미 수년을 지냈고 여기 있는 모든 군인은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그래서 박신준은 하문천에게 공개적으로 대들 수 있었던 것이다.박신준은 하문천이 고작 여자 하나를 위해 장군 계급인 자기와 공개적으로 싸울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내가 손을 대야 정신을 차릴 거야?”하문천이 평온하게 물었다.흑석영에는 군단 하나 정도의 전력이 있었고 설령 지선이라고 해도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었다.하지만 진서준을 위해서라면 하문천은 기꺼이 흑석영을 상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왜냐하면 그들 호국부가 진서준에게 진 빚이 있기 때문이었다.보해 전투에서 진서준이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진서훈과 그 일행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하문천 어르신, 그 여자는 도대체 어르신에게 어떤 사람입니까?”박신준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여자라고?”하문천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네가 잡은 건 남자야, 여자야?”박신준도 의외의 질문에 멍하니 서 있다가 답했다.“어르신이 구하려는 사람은 황씨 가문 그 여자가 아니었습니까?”“당연히 아니야.”박신준은 비로소 자기가 하문천의 말을 오해한 사실을 깨달았다.하문천이 구하려는 사람은 진서준이지 황씨 가문의 여자가 아니었다.“너 도대체 몇 명 잡은 거야?”하문천이 냉랭하게 물었다.“두 명입니다. 그중 하나는 남자입니다. 지금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오해가 풀리자 박신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박신준이 만약 호국장군과 싸운다면 나중에 군부에서 그를 해임할 가능성이 컸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신준과 하문천은 진서준이 갇혀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유리창 너머로 방 안에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자 하문천은 박신준이 진서준에게 형벌을 가했음을 눈치챘다.다행히 진서준은 추위를 타지 않는 편이었고 그렇지 않았다면 얼어 죽었을지도 모른다.“얼른 문 열어. 왜 이렇게 멍하니 서 있어?”박신준이 언성을 높여 부하에게 소리쳤다.문이 열리자 뼈까지 파고드는 차가운 공기가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다.박신준은 저도 몰래
말을 마친 박신준은 손에 든 긴 채찍을 휘둘러 황예은의 옆구리를 강하게 내리쳤다.팍!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황예은의 옷이 찢어져 나가고 그녀의 하얗고 부드러운 복부에는 깊은 핏자국이 남았다.채찍이 박신준의 손에 돌아올 때 길고 날카로운 가시들에 피와 살이 묻어 있었다.극심한 고통이 밀물처럼 밀려와 황예은은 기절할 뻔했다.그 후, 채찍은 폭우가 쏟아지듯 미친 듯이 황예은에게 내리쳤다.팍팍!결국 황예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뼈저린 고통에 황예은의 몸은 계속해서 경련을 일으켰다.본래 완벽했던 황예은의 몸매는 이 가혹한 형벌을 겪은 후, 살점과 피가 튀어나오고 끔찍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채찍의 가시에는 피와 살점이 가득했다.자세히 보면 황예은의 뼈마저 아슬하게 드러나 있었다.연약한 여자가 아니라 강철처럼 단련된 군인도 이 고문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옆에서 지켜보던 군인들도 이 광경이 너무 참혹해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장관님, 이 여자 기절했습니다.”“물을 부어 깨워.”박신준은 황예은이 하나도 불쌍하지 않았다.박진강은 박신준의 유일한 아들이었다.그런데 그 유일한 아들이 죽은 마당에 박신준은 절대 황예은을 가볍게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대한민국 최고 부자의 딸이라 해도 상관없었다.박신준의 아들을 죽인 자는 반드시 그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이내 군인이 커다란 통에 담긴 고추 물을 들고 왔다.이 고추 물을 피범벅이 된 몸에 부으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견딜 수 없었다.촤락!고추 물이 황예은의 몸을 타고 흐르면서 상처투성이인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극심한 고통에 기절해 있던 황예은은 다시 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과 자극을 받고 눈을 떴다.지금 황예은의 머릿속은 온통 고통과 아픔으로 꽉 차서 터질 것만 같았다.“그만해, 얼른 날 죽여...”황예은의 목소리를 듣자 박신준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죽고 싶어? 내가 네 말을 들을 것 같아?”팍팍
다른 심문실에서 황예은은 의자에 단단히 결박된 채 앉아 있었다.황예은의 맞은편에는 박신준이 앉아 있었다.박신준이 황예은을 쳐다보는 눈빛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증오가 담겨 있었고 황예은은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두 사람은 분명 처음 만난 사이인데 왜 상대방이 이렇게 자기를 증오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국가를 배반한 반역죄를 저질렀다니, 황예은은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었다.“황예은 씨, 박진강과 당신 사이에 어떤 원한이 있었습니까?”박신준이 다짜고짜 물었다.“네?”황예은은 그제야 왜 자기가 이곳에 끌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당신은 그 사람 삼촌인가요?”황예은의 질문에 박신준이 퉁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난 박진강 아버지입니다!”이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고 황예은은 순간 얼음처럼 얼어붙었다.박서명이 자기 친형제에게 오쟁이를 지게 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박신준을 쳐다보는 황예은의 의아한 눈빛을 본 박신준은 한마디 덧붙였다.“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자강은 우리 형이 나한테서 직접 입양한 아들입니다.”황예은은 더 이상 그 이유에 관해 묻지 않았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박신준이라는 장군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였다.흑석영에서 박신준은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황예은과 진서준은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없을 것이다.“당신 아들은 내가 다른 사람을 시켜 때린 거예요.”황예은의 말에 박신준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그냥 때리기만 했습니까?”“그래요.”“근데 우리 아들이 죽었네요!”박신준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의 눈빛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죽었다고요?”황예은도 순간 당황했다.진서준이 그 당시에는 꽤 과격하게 행동했지만 박진강을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분명 누군가가 박진강을 죽였을 것이다.“내가 한 일이 아니에요...”황예은은 본래 우리라고 하려다가 곰곰이 생각하고는 혼자서 모든 걸 떠안기로 결심했다.황예은은 진서준에게 진 빚이
“군부에 잡혔어.”진서준의 말에 진서훈의 목소리가 다소 불쾌해졌다.“어느 군구야?”“너희는 어느 군구 소속이야?”진서준이 군관을 보며 물었다.“동부 임해 전구야.”“동부 임해 전구라고? 알았어. 지금 바로 사람을 보낼게.”진서훈은 여전히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전화를 끊은 후, 군관은 진서준의 휴대폰을 강제로 빼앗았다.하지만 진서준은 미소를 지으며 침묵만 지키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군부 사람들과 함께 차를 타고 두 시간 이상 간 후, 진서준 일행은 깊은 산속에 도착했다.마침내 차는 흑석영이라는 군사 기지에 도달했다.흑석영 군사 기지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죄수만이 갇히는 곳이다.일단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는 사람은 없다고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했다.차에서 내리자 진서준은 주변 환경을 천천히 살폈다.은은한 달빛과 반짝이는 별이 먹구름에 가려져 있었고 주변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있었다.딱 봐도 곧 폭우가 쏟아질 것 같았다.그때 두 사람이 진서준과 황예은을 향해 다가왔다.“황예은 씨, 제 이름은 박신준입니다. 흑석영 군사 기지 총책임자입니다.”장군 훈장을 단 중년 남자가 차갑게 말했다.박씨 성을 듣자 진서준과 황예은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혹시 이 사람이 박씨 가문의 사람인가?하지만 황예은은 박씨 가문에 군부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왜 날 잡아들였죠?”황예은이 차가운 목소리로 따졌다.황예은은 장군급 군관을 상대하면서도 여전히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황예은 씨는 반역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박신준이 차갑게 말하자 진서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간첩이냐 아니냐는 네가 잘 알지 않아?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까놓고 다 말하는 게 낫지 않겠어?”박신준의 얼굴을 보니 이전에 만났던 박진강과 조금 닮아있는 듯했다.이 사람은 박진강의 삼촌이나 큰아버지일 가능성도 있었다.박신준이 진서준을 힐끗 보더니 이내 부하들에게 지시했다.“이 두 사람 분리해서 구속해.”박신준이 두 사람을 따로 구속하려는
군부 사람들이 자기를 찾으러 온 것을 본 황예은은 눈꺼풀이 저절로 뛰기 시작했다.그동안 박씨 가문 회사를 전적으로 맡고 있는 동안, 황예은은 군부 사람들과는 전혀 교류가 없었다.국민은 절대 공무원과 싸우지 말고 공무원은 절대 군부 사람과 싸우지 말라는 말이 있다.역사적으로 군부는 언제나 국가의 최고 권력이었다.군부의 고위층을 건드리면 그 후엔 끔찍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진서준도 바로 그 군부 군관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알아보고 설표 특전대에서 교관직을 맡기로 했다.“제가 바로 황예은이에요. 무슨 일이죠?”군부가 무서운 존재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황예은의 말투는 여전히 그 여느 때와 다름없이 냉랭하고 자존심 강했다.그 군관은 황예은의 말을 듣고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우리의 조사에 따르면 넌 반역죄를 지질렀어. 넌 해외에서 우리나라에 침투한 간첩이야.”군관이 거친 목소리로 꾸짖었다.반역죄를 저지른 간첩이라고?황예은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황씨 가문은 대대로 대한민국에 충성한 가문인데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죄를 지을 수 있을까?이건 명백히 누군가 고의로 자기를 음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심지어 상대방은 자기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군부까지 동원했다.황씨 가문은 군부에 아무런 인맥도 없었다.지금 이 상태로 군부로 끌려가면 그 처참한 결말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에요. 저는 절대로 간첩이 아닙니다.”황예은은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간첩인지 아닌지는 네 주장 하나로 해결할 수 없어. 우리와 함께 가서 조사받자.”군관도 똑같이 차가운 말투로 대응했다.그때, 진서준이 앞으로 나서서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누가 너희를 보냈어?”황씨 가문에 부귀전승이 존재하는 마당에 반역죄를 저지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황예은과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 진서준은 황예은이란 사람에 대해 자세하게 잘 알게 되었다.황예은은 극도로 자존심 강한 여자였
비밀 문 안으로 들어가니 아래는 온통 까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10여 미터를 걸어 내려가니 대략 10평 정도 되는 지하실이 나타났다.지하실은 매우 간소했고 고작 탁자 하나, 의자 하나, 침대 하나만이 놓여 있었다.그 탁자 위에는 오래되어 누렇게 바랜 고서가 놓여 있었고 첫 장에는 큼지막하게 ‘부귀전승’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누님, 이거 우리 아빠가 남긴 거예요?”황현호는 탁자로 뛰어가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5년 전, 아빠가 신비스러운 태도로 날 불러 여기로 데려왔었어.”황예은의 눈빛은 추억에 젖은 듯했다.“그땐 아빠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이건 널 위해 준비해 둔 것 같아.”그때 황경영은 황예은에게 이렇게 말했다.“황씨 가문에 큰 위기가 닥치면 현호 혼자 이 비밀 공간으로 내려와 책에 적힌 전승을 배우게 해.”황예은은 이미 이 책을 읽고 따라 연습해 본 적이 있었는데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당시 황예은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자기처럼 똑똑한 사람도 장악하지 못한 걸 머리가 둔한 황현호가 배울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황현호는 부귀전승을 집어 들고 몇 장 넘겨보더니 곧 그 책에 푹 빠져들었다.“보아하니 이 책은 우리 동생을 위해 준비된 게 맞는 듯하군.”황현호의 몰입한 모습을 보며 황예은은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너 아까 왕권부귀라고 했잖아. 그럼 혹시 왕권전승 같은 것도 있는 거야?”황예은의 질문에 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당연하지. 다만, 왕권전승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나도 몰라.”국가급 지도자는 몇몇밖에 없었지만 진서준은 쉽게 추측할 수 없었다.과거 왕권과 부귀는 막상막하의 힘을 자랑했지만 과학 기술이 급속히 발전한 현대에 이르러서는 부귀의 세력은 왕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처졌다.황예은은 진서준을 향해 고개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진서준, 정말 고마워.”“내가 너희를 도운 건 단순히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들으려고 한 게 아니야.”진서준이
왕권부귀!이건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무도 수련의 체질이었다.예전에 감옥에 있을 때, 창욱 어르신이 진서준에게 이 체질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부귀의 체질은 그 자체로 부귀의 기운을 지니고 있어 무도를 수련하지 않더라도 가문을 번영하게 할 수 있었다.반면, 왕권의 체질은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이 체질은 가문을 승승장구하게 하고 국가급 지도자 한 명은 반드시 배출해 낼 정도의 체질이었다.약 10분 뒤, 진서준은 황현호의 복부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끝났어.”황현호는 몸이 한결 가벼워졌음을 느꼈다.가장 놀라운 건, 황현호의 체내 에너지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황현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손발을 움직여보더니 진서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네가 날 살리면 내 단전이 없어질 거라고 했잖아. 근데 왜 멀쩡하지?”황예은 또한 의아한 표정으로 진서준을 바라봤다.황예은은 특히 진서준이 언급했던 ‘부귀의 체질’이라는 말에 더 신경이 쓰였다.진서준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힐끔 바라보며 눈짓을 보냈고 황예은은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말했다.“다들 일단 여기서 나가.”방에 진서준과 황예은, 황현호 세 사람만 남자 진서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왕권부귀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어?”“그게 뭔데?”황현호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황현호는 예전부터 먹고 놀고 즐기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다.반면 황예은은 어딘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내가 기억하기론 아빠가 그런 말을 언급한 적이 있어. 근데 그땐 나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어.”진서준은 잠시 고민하더니 물었다.“황경영 씨가 너희에게 뭔가 남겨준 게 없냐?”대한민국의 최고 갑부 황경영이 장악한 정보는 적지 않을 게 분명했다.그러니 아마 황현호가 부귀의 체질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다만 황현호가 무도를 배울 생각이 없어 보이자 굳이 말하지 않았을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황현호의 태어난 부귀의 체질을 활용하지 않는 것은 진정
“어떻게 낮춰야 할지 모르겠어.”황예은은 솔직히 털어놓았다.“제발, 이 두 글자만 붙이면 돼요.”서지은의 조언을 들은 황예은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내 동생을 구해줘.”“거 참 말투가 딱딱하네.”황예은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우리 동생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네가 동생을 살려준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뭐든 할게.”하지만 진서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이봐...”황예은은 두 주먹을 꽉 쥐었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었다.“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도 모르잖아. 그냥 돌아가.”진서준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존중을 원한다 이거지?”황예은은 이를 악물더니 다리를 굽혀 무릎을 꿇었다.이 장면에 서지은과 허윤진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심지어 진서준조차도 순간 표정이 굳었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여자가 지금 이 순간 동생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이 사실이 소문으로 퍼지기라도 하면 명주시 상류층 사회는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제발 우리 동생을 살려줘.”황예은은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투는 조금도 나약하지 않았다.“일어나.”“네가 허락하지 않는 한, 일어나지 않을 거야.”황예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내가 구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 없어.”진서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길 안내해.”황예은은 그 말에 눈빛을 반짝이며 곧장 일어나 진서준을 데리고 차에 올랐다.황씨 가문으로 가는 내내 진서준은 아무런 말이 없었고 황예은 역시 침묵을 지켰다.30분 남짓이 지나 병실에 도착했을 때, 황현호는 얼굴이 창백해 종잇장 같았고 근육은 다 풀어져 완전히 말라비틀어진 상태였다.그 모습은 꼭 열흘은 굶은 떠돌이와도 같았다.진서준은 황현호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았다.“조금만 더 늦었으면 진짜 죽었을 거야.”진서준이 의아해하며 말했다.다시 말해 지금은 아직 살릴 기회가 있다는 뜻이었다.황예은은 그 말을 듣고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진서준은 황현호를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했다.“내가 널 살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