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상대가 전화를 받자 심국도는 엄숙하게 명령을 내렸다.“지금 바로 봉천시와 가장 가까운 군부 병력을 동원해. 이 햇살 호텔을 물 샐 틈 없이 완전히 포위해.”“알겠습니다!”군인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의무였다.따라서 전화를 받은 병사는 이유를 묻지 않고 그냥 명령을 이행했다.그리고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모든 책임은 심국도의 몫이었다.전화를 끊은 심국도는 격하게 거친 숨을 내쉬며 진서준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심국도가 진서준과 싸워 이길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목숨을 걸고 진서준과 이곳에서 한판 벌일 기세였다.“진서준, 소정태에게 전화 좀 해볼래?”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허사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이 정도 하찮은 일로 소정태를 귀찮게 하지 말자.”진서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그래도...”“내가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진서준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허사연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진서준 일행이 심국도가 부른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 방의 문이 다시 열렸다.“이게 무슨 냄새야? 왜 이렇게 비린내가 심해?”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강정숙이었고 뒤를 이어 허순재와 그 일행이 들어왔다.“이게 뭐야!”심도준의 시체를 본 강정숙은 기절초풍하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강정숙도 생전 처음으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시체를 보게 되었다.허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도 이 상황에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당신들은...”심국강을 유심히 살펴보던 허순재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하더니 결국 아첨이 가득한 미소로 고정되었다.“심 가주님, 어떻게 여기 오신 겁니까?”“꺼져!”심국강은 지금 허순재와 한가하게 대화할 기분이 아니었다.어제 딸을 잃고 오늘 아들을 또 잃었으니 심국강의 분노는 지금 어디서 터뜨려야 할지 몰랐다.의도치 않게 불똥의 튄 허순재는 똥 씹은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당신은 누구십니까?”심국도를 보고 허순재가 다시 물었다.하지만 심국도는 질문
허윤진의 말에 허순재 일행은 기겁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심국강은 일반 사람이 아닌 당당한 심씨 가문의 가주였다.그런데 진서준 일행이 심씨 가문 가주의 아들을 죽이다니, 이 사람들은 정말 무법천지로 날뛰는 무모한 사람들 같았다.이제 허순재는 더욱더 허사연 일행과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심 가주님, 우리 허씨 가문은 정말 이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이 두 여자애는 제 동생의 손녀들이고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연을 끊었습니다. 게다가 제 손자의 다리는 진짜 이 사람들이 부러뜨린 겁니다. 그래서 제가 더욱 이 사람들을 증오하게 되었고요.”허순재의 시뻘겋게 충혈된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오해가 풀리지 않으면 오늘 허씨 가문은 정말 이대로 끝장날 것이다.진서준은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는 허순재를 빤히 보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사연 자매와 친척인 걸 고려해서 한 번만 기회를 줄게. 지금이라도 네가 내 편에 서면 난 너희를 도와줄 수 있어.”“꺼져! 네가 무슨 능력으로 우리를 도와줘? 주제 파악이나 좀 해!”허준서는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쌍욕을 날렸다.“그만 입 닥쳐! 우리 더 이상 우리 허씨 가문에 엮이지 않는 게 우리를 진짜 도와주는 거야!”허순재도 옆에서 허준서를 거들었다.허씨 가문이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던 진서준은 전혀 놀라지 않았고 여유로운 자태로 미소를 지었다.허씨 가문의 태도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던 진서준은 일부러 허씨 가문을 떠봤던 것이다.굳이 이렇게 한 이유는 잠시 후 허씨 가문 사람들의 후회막급의 표정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다들 조용히 해! 내 명령 없이는 누구도 입을 열지 마. 다들 조용히 여기서 내 군대를 기다리기나 해.”심국도가 차가운 목소리로 상황을 정리했다.부장급 장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허씨 가문 사람들은 바로 입을 닫고 우두커니 서서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병원에서 정신을 잃었던 장서안이 드디어 깨어났다.“서안아, 일어났어? 몸은 괜찮아?”병원에 남아서
두 사람의 한담이 오가던 그때, 진서준의 휴대폰이 울렸다.진서준이 휴대폰을 꺼내 보니 소정태가 걸어온 전화인 걸 확인했다.“진 교관님, 신청이 통과했습니다. 이제 진 교관님은 우리 설표 특전대 전속 교관으고요, 소장 계급도 정식으로 부여되었습니다.”소정태가 들뜬 마음으로 희소식을 전했다.“아직 봉천시에 계시죠? 저는 지금 봉천시로 가는 중인데, 마침 그쪽으로 가서 진 교관님께 증서랑 군복을 전해드리겠습니다.”진서준은 그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는 햇살 호텔에 있습니다. 여기 오세요, 마침 사령관님 식구도 여기 있습니다.”“그런가요? 알겠습니다, 30분 내로 도착하겠습니다.”진서준이 전화를 끊자 심국도는 진서준을 빤히 노려보았다.“당장 죽게 될 사람이 아직도 이렇게 방자하게 굴어?”심국도의 말에는 분노한 담겨 있었다.심국도 앞에서 전화를 마음대로 받는 건 자기를 아예 무시하는 태도였다.심국도의 말에 장서안은 멈칫하며 물었다.“장관님,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이 녀석이 어제 내 조카딸을 죽였고 오늘은 내 앞에서 우리 조카를 당당하게 죽였어. 난 이미 군구에 부대를 파견하라고 지시했어.”심국도는 차가운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네?”장서안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진 교관이 왜 이렇게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허준서 일행은 심국도의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이내 진서준을 보며 빈정댔다.“심씨 가문을 건드린 것도 모자라 심 장관까지 건드려? 살아서 여길 나가지 못하겠네.”“부대 하나가 와서 네 장례를 치러준다면, 그 정도로 죽는 것도 폼나긴 하겠어.”장서안은 멍하니 있다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장관님, 이분이 바로 우리 설표 특전대의 그 신비한 교관, 진 교관입니다.”순식간에 방 안은 숨 막히는 정적에 휩싸였다.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장서안을 바라봤고 눈이 튀어나올 듯한 충격에 휩싸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심씨 가문과 허씨 가문 두 가문과 원한이 있
허순재 일행은 그 말을 듣고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왜냐하면 다들 아직 허준서가 성약당에서 제명당한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다들 허준서를 허씨 가문의 자랑으로 여겼지만 이제 허씨 가문에 남은 자랑마저 사라졌다.우르릉!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허순재와 강정숙 일가가 모두 바닥에 주저앉아 넋을 놓았다.“그렇구나, 설표 특전대 새 교관이니까 이렇게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거구나.”심국도의 얼굴에는 분노와 억울함이 가득했다.진서준의 국안부 상경이라는 신분 하나만으로도 심국도를 짓눌러 숨쉬기 어려울 정도였다.그런데 이제 특별한 신분이 하나 더 늘었으니 진서준을 잡는 건 거의 불가능해졌다.“이제 알아도 늦지 않았어.”진서준의 차분한 말에 심국도는 더욱 분노했지만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자기가 너무나도 한심했다.“형님, 저 녀석이 누구든 오늘은 반드시 우리 도준과 민경이 복수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분노에 찬 얼굴을 한 심국강이 일어서며 일침을 날렸다.심국강의 당장 튀어나올 듯한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너 설마...”심국도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맞아요. 죽더라도 저 녀석을 끌고 지옥에 갈 겁니다!”심국강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이를 갈았다.심국강은 진서준이 어떤 신분이든 개의치 않았다. 이따가 군부 병사들이 도착하는 대로 즉시 진서준을 노려 총을 쏴서 그를 여지없이 처치할 작정이었다.군부 하나에는 최소 수천 명 병사가 있고 최신형 무기로 장비되어 있었다.군부 앞에서는 팔급 대종사라고 해도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물러설 수밖에 없다.미쳐 발광하는 심국강을 본 심국도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좋아, 이따가 병사들이 오면 우리 형제 함께 목숨을 걸고 저 녀석을 해치우자.”자식이 없는 심국도에게 있어서 심도준과 심민경은 친아들, 친딸과 다름없었다.이제 진서준이 그 금쪽같은 자식들을 죽였으니 심국도도 굳이 살아있을 이유가 없었다.심국도 형제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자 허사연과 허윤진 자매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
하지만 변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진서준이 정말 눈 깜빡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라면 국안부가 진서준을 살려둘 리가 없었을 것이다.장서안은 진서준의 해명을 듣고 즉시 심국도를 말렸다.“장관님, 진 교관님 말을 들으셨죠? 이 모든 일은 장관님 조카와 조카딸이 자초한 일입니다. 너무 고집부리지 마세요.”“너도 적당히 해. 오늘 네가 뭐라고 떠들어도 난 절대 저 녀석을 살아서 이곳에서 내보내지 않을 거야.”심국도는 잔인무도한 표정을 지으며 위협했다.그때, 호텔 아래에서 빠르게 돌아가는 요란한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심국도는 허순재를 끌고 창문 앞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검은 차들이 호텔 앞에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고 수천 명의 병사들이 호텔을 완전히 둘러싸며 출입을 막고 있었다.본래 이곳에서 식사하려던 돈 많은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 기겁하며 어쩔 바를 몰랐다.“이건... 이건 무슨 상황이야? 혹시 간첩 잡으러 온 거 아니야?”“얼른 도망쳐. 군대가 나왔다는 건 이 호텔에 뭐가 큰일 났다는 거야.”“국내에서 군대가 사람 잡으러 출동하는 건 정말 오랜만에 보는걸...”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100미터 이상 떨어져서 휴대폰을 꺼내 몰래 촬영하고 있었다.“우리 사람들 드디어 왔네.”심국도는 흥분된 표정으로 말했다.“진 교관, 먼저 가세요. 제가 저 병사들을 막아두겠습니다.”장서안이 급히 진서준에게 제안했다.“가긴 뭐 가?”진서준은 태연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넌 여기서 네 사모님을 잘 돌보고 있어. 난 잠깐 내려가 볼게.”진서준이 스스로 내려가겠다고 하자 심국도는 움찔하더니 이내 비아냥거렸다.“진서준, 네 실력이 대단하다는 걸 나도 알아. 하지만 네가 아무리 하늘을 나는 실력이 있다고 해도 군대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을 거야.”“너 참 조잘대기 좋아하는구나. 성격이 원래 그래?”진서준은 심국도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심국도는 코웃음을 치며 조카 심도준의 시신을 들고 먼저
이 소동은 결국 심국도 형제가 군사 기지로 이송되며 끝을 맺었다.심씨 가문의 다른 직계들도 자연스레 전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수년 동안 동북에서 위세를 떨쳤던 심씨 가문은 이렇게 단 몇 시간 만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일부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더욱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다.군대의 부장급 고위 인사도 상대할 수 없다니, 용존의 실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다.진서준은 허사연 자매를 먼저 조씨 가문에 보내고 동북 군구의 일인자와 또 다른 조용한 곳으로 가서 대화를 나누었다.“아직 이렇게 새파란 나이에 벌써 영웅급 실력이구먼.”최해준이 진서준을 보는 눈빛에는 칭찬과 감탄이 가득했다.스무 살 남짓한 아이에 벌써 이렇게 대단한 성과를 올리다니, 대한민국 전역에서도 이런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최 수장님, 과찬입니다.”진서준은 미소를 지으며 겸손하게 말했다.탁자 위에 반짝이는 소장 계급 훈장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났다.진서준은 그 훈장을 흘끗 보고 나서 물었다.“최 수장님이 직접 오신 걸 보니 제게 단지 군대 계급 증서를 전해주시려는 것만은 아니죠?”“똑똑한 사람은 눈치가 빨라 참 좋아.”최해준은 웃으며 진서준을 칭찬했고 이어서 진지하게 말했다.“이번에 널 찾은 건 사실 네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야.”“설표 특전대 훈련을 맡으라는 겁니까?”“그것도 부탁 중의 하나긴 해. 네가 참 잘 훈련했던 것 같아. 설표 특전대 그 애들이 정말 눈에 띌 정도로 엄청난 변화가 생겼어.”설표 특전대의 변화는 최해준도 유심히 눈여겨보았기에 진서준에게 소장 계급 훈장이 내려진 것이다.“최 수장님, 이전에 소 사령관과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전 요즘 급히 해야 할 일이 었어서...”“네가 바쁜 건 나도 알아. 근데 이 일은 대한민국 전역에서도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최해준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우리는 최근에 정보를 하나 받았어. 며칠 후, 우리 내부에 숨어 있는 간첩이 명주시에서 유람선을 타는데 그 배에서 초아국 사람
“진서준 씨, 정말 그렇게 무정하신 건가요?”허순재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진서준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그 말을 들은 진서준은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무정하다고? 아까 호텔에서 내가 너희에게 기회를 안 줬어?”진서준은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기회를 놓친 건 너희잖아. 지금 와서 날 탓한다고? 웃기지 마. 너희 집안이 이렇게 망한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진서준이 감옥에서 막 나왔을 때, 허성태는 진서준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모든 걸 진서준에게 걸었다.허성태가 부유해진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진서준을 제대로 알아본 덕분이었다.사람 보는 눈이 예리하지 않다면 결국 눈앞의 허씨 가문처럼 가난과 몰락의 길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허씨 가문 사람들을 밀쳐내고 진서준은 냉랭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조씨 가문 저택으로 걸어갔다.“할아버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뭘 어떻게 하겠어? 당연히 집에 돌아가야지.”허순재가 이를 악물고 핀잔을 줬다.“쳇, 자기가 뭐 대단한 인물이라고 저렇게 싸가지 없게 굴어? 저 녀석 없어도 우리 허씨 가문은 무조건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야.”강정숙은 비굴하게 아첨하던 표정을 지우고 대신 경멸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허씨 가문이 진짜 돈 많은 명문대가로 부상해 동북 지방 가문의 정점에 오르는 것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수준이었다.“진서준 오빠, 오늘 바로 떠나려는 건가요?”진서준이 오늘 오후에 떠난다는 말을 들은 조민영은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사실 조민영만 아쉬운 게 아니라 조태희도 진서준이 떠나는 게 아쉬운 듯했다.진서준이 여기에 있으면 조민영은 진서준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고 자연스레 조민영이 진서준과 감정을 발전시킬 기회가 생길 터였다.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오늘 떠나야죠. 제가 동북에 있은 시간이 꽤 길었어요.”“그렇군요, 그럼 다음엔 언제 또 오시나요?”조민영이 또 질문을 던졌다.“그건 저도 잘 모르
늦은 밤에 진서준 일행은 비행기를 타고 서울시에 도착했다.오랫동안 진서준을 보지 못한 조희선 일행은 진서준이 갑자기 돌아온 것에 놀라며 기뻐했다.“서준아, 오기 전에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어?”조희선은 무척 기뻐하며 진서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혔다.“어머님, 서준이 어머님을 깜짝 놀라게 하려고 일부러 말하지 않고 온 거예요.”허사연이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사연아, 그동안 우리 아들 서준이를 잘 돌봐주느라 수고했어.”조희선은 허사연을 보며 환하게 웃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아니에요, 저는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요.”허사연은 미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 진서라도 허사연을 거들었다.“엄마, 그렇게 말하면 사연 언니가 너무 부담스러울 거잖아요.”“맞아, 그 말이 맞아. 엄마가 선 그은 것 같구나.”조희선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아참, 어머님, 이번에 동북에서 돌아오면서 작은 선물을 몇 개 준비했어요.”허윤진은 급히 가방에서 작은 상자 몇 개를 꺼냈다.상자 안에는 얼음 조각상이 들어 있었다.이 얼음 조각들은 조희선 일행의 모습을 본떠 만든 귀여운 캐릭터였다.얼음 조각은 고온에 노출되면 녹지만 진서준이 영기를 얼음 조각에 부여해 영기가 유지되는 한, 이 얼음 조각들이 녹을 일은 없었다.선물은 비싸고 싸고를 떠나 그 선물에 깃든 정성이 가장 중요한 법이다.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을 보자 조희선 일행은 신나서 어쩔 바를 몰랐다.“어머님, 저랑 윤진은 먼저 집에 가볼게요. 내일 다시 뵐게요.”잠시 한담을 나눈 후, 허사연과 허윤진이 일어나 집에 돌아가려고 했다.“서준아, 사연 자매를 배웅해 줘야지.”조희선의 말에 진서준도 벌떡 일어났다.“알았어요.”진서준은 차를 몰고 허사연 자매를 허씨 가문 별장까지 데려다준 뒤, 다시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서준아, 이번엔 집에 얼마나 있을 거야?”조심스레 묻는 조희선의 눈빛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조희선도 아들 진서준이 더
신수란도 주해준이 가리키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김평안 외에는 은청준이 싫어할 만한 사람이 여기에 없었다.조슬기와 배수정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김평안은 그냥 방치되었다.“김평안, 경고하는데 넌 4대 종문 대회에 끼어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주해준이 김평안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4대 종문 대회에 외부인이 참가할 수 있는 건 맞지만 우승을 따내려면 각 종문에서 5번의 승리를 거둬야 해. 네가 혼자서 다섯 번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그냥 망상일 뿐이야.”진서준은 승리 조건에 대해서 이미 장로 세 명의 대황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5번의 승리를 거두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왜냐하면 이번에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전부 다 고수였기 때문이다.하지만 김평안은 반드시 천년병제련을 손에 넣어야 했다.진서라의 체내 독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약초는 이제 이 천년병제련 하나만 남았다.그러니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약초를 손에 넣어야 했다.진서라의 병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유지수도 전에 자기가 이번 4대 종문 대회에 등장할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진서준은 천년병제련을 손에 넣을 뿐만 아니라 허사연의 복수도 해야 했다.진서준은 유지수에게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생지옥에 떨어뜨리겠다고 결심했다.“그래서 뭐 어쩌라고?”주해준의 경멸이 가득한 말투에 김평안은 차분하게 되물었다.“내가 너라면 염치없이 여기 눌러앉아 있지 않고 조용히 밖으로 나갈 거야. 네가 슬기 후배를 구했다고 해서 우리 곤륜 사람이 되었다는 착각은 집어치워.”주해준이 차갑게 말했다.“그래서 뭐 어쩌라고?”진서준은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주제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야. 다음에 곤륜에서 제자를 모집할 때 너도 한번 지원해 봐. 아마 네가 슬기 후배를 구해 준 덕에 우리 곤륜에서 널 조금 봐줄 수도 있을 거야.”주해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그래서 뭐 어쩌라고?”진서준은
“이 제안 좋네요. 사실은 곤륜에 오기 전 난 경성에서 마이크를 한번 잡으면 놓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했어요.”은청준이 겸손함 없이 당당하게 말하자 조슬기는 입을 삐죽이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평온 씨 앞에서도 감히 노래를 잘한다고 말할 수 있나요?”“내 목소리는 평온 씨와 비교할 순 없지만 평온 씨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압도할 수 있다고 장담해.”은청준은 여전히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그럼 다들 동의했으니까 노래하러 가죠.”조슬기가 김평안을 바라보며 물었다.“김평안 씨, 이 제안 괜찮은가요?”“저는 괜찮습니다.”김평안이 고개를 끄덕였다.“40대 중반 아저씨가 우리 같은 젊은 청년과 어울려 놀 수 있어?”은청준이 슬슬 비꼬자 조슬기가 은청준을 쏘아보며 받아쳤다.“누굴 아저씨라고 하는 건가요?”“됐어, 나도 그만할게. 얼른 가자.”은청준은 조슬기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은청준은 도대체 왜 조슬기가 이 중년 아저씨를 이토록 챙겨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설마 새파란 20대인 자기가 이 40대 아저씨보다도 매력이 더 없단 말인가?조슬기 일행은 택시 몇 대를 잡아타고 얼른 시내로 향했다.송산 소림이라는 관광지 덕분에 시내 경제는 급성장해 고층 빌딩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현대적인 도시 느낌이 물씬 났다.배수정은 산에서 내려온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고 매번 산에서 내려올 때마다 여성용품을 사곤 했다.조슬기 일행은 인테리어가 화려해 보이는 유흥업소로 들어가 가장 큰 방을 예약하고 모두 방으로 들어갔다.그 뒤를 따르던 제자들은 대부분 은청준 후배였고 곤륜 시험을 통과해 들어온 사람들이었다.그러니 노래 같은 건 이들에게 낯선 존재가 아니어서 굳이 한 명씩 따로 가르쳐줄 필요가 없었다.잠시 후, 모두가 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신나게 놀기 시작했다.반면, 진서준을 비롯한 몇몇은 소파에 앉아 지켜보기만 할 뿐, 이들과 함께 즐기지 않았다.“김평안 씨, 혹시 평온 씨와 아는 사이인가요?”조슬기가 의심스럽게 묻자 진서
조슬기는 바로 김평안을 잡으며 대꾸했다.“아니요, 이번엔 김평안 씨랑 함께 있으니까 절대 문제가 없을 거예요.”“이장로님, 저희도 슬기 후배와 함께 가겠습니다.”이때, 은청준이 갑자기 나섰다.은청준이 함께 가겠다고 하자 조슬기는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틀 후면 대회가 시작할 건데 너희는 아직도 내려가서 놀려고 해?”“우리 후배 신변을 보호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은청준이 진지하게 나오자 조슬기는 입술을 비쭉이며 말했다.“김평안 씨 하나만 있어도 안전은 문제없어요.”“그 사람은 실력이 부족해 널 보호할 수 없어.”은청준은 김평안의 체면도 고려하지 않고 전혀 거리낌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만해, 그만 떠들어.”주자청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내려가고 싶으면 은청준 일행과 함께 내려가.”그제야 은청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은청준은 절대 조슬기와 김평안이 단둘이 있는 꼴을 지켜볼 수 없었다.“함께 가면 가죠.”조슬기는 은청준을 노려보며 불쾌하게 말했다.곤륜 사람들까지 산에서 내려가 놀려고 하자 장백과 남사에서 온 제자들도 가만히 있지 않고 하나둘씩 장로에게 휴식을 요청했다.“그럼 오늘 하루만 허락할게.”장로의 한마디에 모두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감사합니다, 장로님!”그중 몇몇 제자들은 처음으로 숭산에서 내려가게 되었다.숭산에 오늘 길에 목격한 길가의 세속적인 풍경이 그들에게 잊지 못할 깊은 인상을 남겼다.이번에 어렵게 산에서 내려오게 될 기회가 생기자 다들 당연히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김평안 씨, 우리 가요.”조슬기는 김평안의 팔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그때 지현민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평온아, 너도 함께 내려가.”“네?”배수정은 스승님이 산에서 내려가라고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해 흠칫 놀랐다.“우리 숭산에 특별히 대접할 만한 게 없잖아. 산에서 내려가면 네가 알아서 손님들을 잘 대접해 줘.”지현민이 이유를 밝혔다.“네, 스승님.”“저놈들이 산에서 내려가서
“신농 사람들 뭐 하는 거야? 이틀 후면 시작인데 왜 아직도 안 오지?”남사 사장로 문추원이 참지 못하고 불평을 터뜨렸다.남사와 곤륜, 그리고 장백은 이미 숭산에 온 지 15일이 넘었는데 신농 사람들만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신농 사람들은 항상 잘난 척하며 온갖 허세를 다 부리잖아. 너희도 잘 알잖아.”“맞아, 매번 뭐 할 때마다 가장 늦게 온다니까.”“내가 듣기로는 작년 신농에서 제자 모집할 때 조건을 크게 낮췄다고 하더라. 그러니 이번에 모집된 제자들도 별로일 거야.”그 말을 듣자 은청준이 즉시 입을 열었다.“저 사람은 본래 신농 제자였습니다.”“뭐라고요? 이 사람이 신농 제자였다고요?”현장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고 장백과 남사에서 온 장로들도 전부 김평안을 의아하게 쳐다봤다.“그런데 왜 혼자 왔어? 신농 사람들은 어디 갔어?”그러자 은청준이 나서서 해명했다.“저 사람이 말하길 신농에 들어갔다가 스스로 신농에서 나왔다고 하던데요.”그 말에 현장은 한순간 술렁였다.“그건 무슨 헛소리야? 신농이 뭐 동네 화장실이야?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고 나가고 싶으면 마음대로 나가는 곳이야?”“신농은 비록 온갖 잘난 척은 다 하지만 실력은 있잖아. 절대 네가 쉽게 나갈 수 있을 리 없어.”“누구는 헛소리 칠 줄 몰라 안 치는 줄 알아? 헛소리도 정도껏 해야지.”사람들이 김평안을 비웃기 시작하자 은청준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김평안을 도발하기 시작했다.“김평안, 너 해명 안 할 거야?”“무슨 해명?”김평안이 의아해하며 되묻자 은청준이 차갑게 말했다.“무슨 해명이겠어? 난 네가 아예 신농 시험도 통과 못 했을 거라고 의심하는 거야. 신농은 4대 종문 중 하나잖아. 시험이 엄격하기로 소문난 신농에 어렵게 들어갔는데 네 마음대로 나온다고? 증거가 있기나 해?”그러자 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왜 내가 너한테 그걸 증명해야 하지?”사실 은청준이 증거를 내놓으라고 명령할 자격은 없었다.“이유는 없어. 단지 네가 증명할 용기가 없어서
“이장로님, 그만하세요. 굳이 그분과 입만 아프게 해명할 필요는 없잖아요.”조슬기가 나서서 이장로를 설득했다.조슬기는 예전에 아버지한테서 들은 적이 있어 주자청과 문추원 사이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이 두 사람이 서로를 이렇게 못마땅해하는 이유는 한 여자로 인해 시작되었다.아버지의 말로는 두 사람이 젊었을 때 공교롭게도 한 여자를 좋아했는데 그 여자 때문에 둘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싸웠었다.직접적인 충돌은 열 번이 넘었고 승패는 반반이었다.하지만 나중에 그 여자는 두 사람이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깊은 상처를 받았다.두 사람은 서로가 없었으면 그 여자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하며 그 원한을 지금까지 이어 온 것이었다.둘이 실랑이를 벌리는 사이, 김평안이 스님 한 명을 따라 들어왔고 모두의 시선이 즉시 그쪽으로 끌렸다.“이 사람이 바로 김평안인가? 별로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데?”“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마. 동북 검선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사람이 평범한 사람일 수 있겠어?”“저 곤륜 중주 따님이 이 중년 아저씨에게 관심 있는 건 아니겠지?”조슬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활짝 웃으며 김평안에게 다가갔다.“김평안 씨, 드디어 오셨네요.”조슬기는 이미 숭산에서 10일 정도 있었고 지루한 나날을 힘들게 보내고 있었다.그러니 오매불망 그리던 김평안을 보니 신날 수밖에 없었다.“조슬기 씨, 안녕하세요.”진서준은 매우 공손하게 조슬기에게 인사했다.진서준이 갑자기 이렇게 격식을 차리자 조슬기는 순간 당황했고 이내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조슬기는 애써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며 물었다.“김평안 씨,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서남 지역에서 볼 일이 좀 있었어요, 그래서 늦었죠.”진서준은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요 며칠 사이 진서준은 한가할 시간이 없었다.허사연의 다리가 빨리 나을 수 있도록 성약당에 부탁해 여러 가지 약재를 보냈고 매일 마사지와 침술을 해주었다.그
“뭐라고요? 김평안 씨가 오셨다고요?”김평안의 이름을 들은 조슬기는 눈을 반짝이며 바로 일어섰다.조금 전의 우울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은청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서남 지역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은청준은 진서준을 싫어했고 심지어는 거의 손을 대며 싸울 뻔했을 정도였다.그렇게 불편한 진서준이 오자 조슬기가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은청준은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지현민 지주, 김평안 씨는 우리 조슬기 씨 생명의 은인이십니다.”곤륜 이장로가 일어나서 말했다.“그 김평안 씨를 들여보내.”지현민이 말했다.다른 사람들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김평안의 정체에 대해 수군대고 있었다.대기실 안에는 세 종문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종문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이들은 대부분 4대 종문 천재들 간의 싸움을 관전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4대 종문에 입문할 수 있는 청년들은 전부 절세 천재였는데 이들의 전투를 볼 수 있는 건 정말 운이 좋은 일이다.하지만 숭산 소림에 들어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들어온 사람은 반드시 명성이 자자하거나 지의방에 이름을 올린 유명 인사여야 했다.이외에도 4대 종문이나 숭산과 일정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저 사람에 대해 들은 적이 있어. 듣기로는 검술을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해. 검도만 따지고 보면 동북 검성 조기강과 견줄 만하다고.”“그 사람의 실력도 상당하다고 하더라고. 이번에 온 이유는 관전하러 온 건지, 아니면 직접 참가하러 온 건지 모르겠네.”“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4대 종문 천재들 앞에서는 찍소리도 내지 못할 거야.”사람들이 수다를 떨며 김평안을 토론하는 걸 보니 대다수가 김평안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던 배수정은 그 이름을 듣자 동공이 살짝 흔들렸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배수정은 김평안이 바로 진서준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진서준이 왜 여기 온 건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소림에서
배수정이라는 이름을 들은 양지천은 입술이 살짝 떨렸다.옛날 양지천이 구애하려고 애썼던 여자가 이제는 지선의 자질을 가졌다니, 놀랍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양지천, 넌 지현민 지주님의 그 제자랑 아는 사이인 거야?”백운성의 질문에 양지천이 솔직하게 대답했다.“네, 배수정이 불문에 입문하기 전 우리는 친구 사이였습니다.”“지현민 지주님, 그 제자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평온은 아직 수련 중입니다.”지현민이 차분하게 대답했다.“그 제자의 지금 실력은 어떤가요?”백운성이 궁금해하며 다시 물었다.“평온의 천부적인 재능은 저보다 훨씬 뛰어납니다.”이 말에 백운성을 비롯한 사람들은 전부 할 말을 잃었다.현재 소림 지주인 지현민보다도 더 뛰어난 재능이라니,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불법은 너무나 깊고 어려워 대다수 사람은 불법의 의미조차 이해하기 힘들었다.그런데 지현민이 말하는 20대의 여자가 불법에 대한 깨달음이 자기보다 뛰어나다니, 이건 단순하게 자기 제자를 칭찬하려는 의도가 아닐까?“승려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지현민이 한마디 덧붙였다.백운성은 그 말에 심호흡을 크게 하며 말했다.“그렇다면 그 제자가 정말 궁금하군요.”“평안은 불문에 입문했으니 평온에 대한 다른 생각은 접어두세요.”지현민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자기가 살짝 드러낸 작은 욕심을 이내 지현민이 눈치채자 백운성은 살짝 당황했다.각 종문은 천재를 놓치지 않고 앞다투어 모셔 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이 젊은 천재들이 바로 종문 미래의 희망이기 때문이었다.배수정이 불법에 이렇게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면 무도도 틀림없이 강할 것이다.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중, 갑자기 문밖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스승님, 평온이 스승님께 인사드리고자 합니다.”그 말을 들은 모두가 급히 고개를 돌리자 한 아름다운 여인이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걸 확인했다.여자의 두 눈은 깊은 호수처럼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표정도 차분했다.여자의 시선은 오직 앉아 있는 지현민에게만 향해 있었고
송산은 소림의 발원지, 불교 선종의 조종, 천하제일의 명찰이기도 했다.20여 년 전, 대한민국이 대재앙을 겪을 때, 소림의 주지가 열여덟 나한을 이끌고 국경으로 달려가 해외 강자들과 목숨을 걸고 싸웠다.그 전투에서 주지가 입적했고 열여덟 나한 중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소림은 그 전투 이후 급속도로 몰락했고 한때의 자자한 명성을 잃어버렸다.옛날의 소림은 다섯 번째 은세 종문이 될 수 있을 정도의 기세를 보였지만 대한민국 대재앙으로 소림은 큰 피해를 보고 말았다.국안부는 그 은혜를 늘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최근 서북 전투에서 부주지 지현진도 거기서 사망하자 소림의 상황은 더더욱 급격하게 악화했다.배수정은 서북에서 돌아온 후 주지 지현민에게 정식 제자로 받아들였다.그 후, 배수정은 매일 방 안에서 경을 외우고 도를 닦았다.송산 소림은 이번 4대 종문 대회의 개최 장소로 지정된 후 그 어떤 방심도 할 수 없어 한 달 전부터 이미 대외적으로 문을 닫고 손님을 받지 않았다.그 후로 더 이상 어떤 관광객도 숭산에 오를 수 없게 되었다.절은 한 점 먼지 없이 깨끗하게 청소되었다.소림이 모집한 제자들 대부분은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갔고 무도 세계를 잘 아는 제자들만 남아 있었다.며칠 전, 장백에서 사람들이 왔다.곤륜처럼 장백도 장로 한 명이 젊은 제자들을 이끌고 왔었다.하지만 그중 한 명은 장백의 제자가 아니었다.그 사람은 예전에 배수정의 사랑을 얻으려고 애썼던 양지천이었다.양지천은 배수정이 송산 불문에 입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에 그 진위를 확인하려고 왔다.응접실에 장백 일행이 앉아 있었다.삼장로 백운성이 먼저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지현민 지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풍채가 여전하군요.”백운성과 지현민은 나이가 비슷했는데 두 사람 모두 100세에 가까웠다.젊었을 때는 한 번 승부를 겨뤘던 사이로 두 사람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저는 나이가 들 대로 들었으니 장백의 삼장로인 백 장로님처럼 될 수는 없지요.”
허윤진의 부러진 팔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그녀가 이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상처에 영향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맞아요, 윤진 언니, 앉아서 좀 쉬어요.”진서라가 허윤진을 앉히며 말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달려왔다.“진서준 씨와 저희 아가씨가 돌아오셨습니다.”그 말을 듣자 허윤진은 벌떡 일어나며 허사연의 휠체어를 밀고 밖으로 달려갔다.“서준아! 유정아! 괜찮아?”“우린 괜찮아, 이분들을 소개해 줄게.”진서준은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이 분은 샛터 소하비 왕자님이고 이 분은 샛터 예린 공주님이야.”허윤진은 이 두 사람을 본 적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오늘이 초면이었다.샛터 왕실이라는 말에 진서라와 허사연은 깜짝 놀랐다.진서준이 이렇게 대단한 인물들을 이 자리에 초대할 수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진서준 일행은 응접실로 향했다.“진서준 씨, 사업 얘기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소하비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유정아, 국색천향 몇 알 가져와.”진서준의 말에 유정이 바로 사람을 보냈다.잠시 후, 하인들이 국색천향을 들고 다가왔다.그 약을 보자 소하비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이건 무슨 약이죠? 어떤 효능이 있죠?”진서준이 느긋하게 설명했다.“국색천향이라고 불리는 이 약은 피부를 보호하고 미용에도 좋으며 수명을 연장하는 효능까지 있습니다.”“뭐라고요? 수명 연장이요? 정말인가요?”소하비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다시 확인하려고 했다.“믿기지 않으면 일단 하나 먹어봐요.”진서준이 담담하게 웃으며 약을 건넸다.“좋아요.”소하비는 약이 독약이 아닐지 걱정할 새도 없이 바로 한 알 삼켰다.약은 소하비 입안에서 바로 사르르 녹았다.소하비가 제대로 맛보기도 전에 차가운 기운이 그의 온몸을 타고 흘렀다.그 편안한 느낌에 소하비의 표정은 계속 바뀌었다.“이거, 이거 너무 신기하네요.”소하비는 감탄을 연발했다.소하비는 밤새 비행기를 타고 와 지금 굉장히 피곤한 상태였지만 국색천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