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한담이 오가던 그때, 진서준의 휴대폰이 울렸다.진서준이 휴대폰을 꺼내 보니 소정태가 걸어온 전화인 걸 확인했다.“진 교관님, 신청이 통과했습니다. 이제 진 교관님은 우리 설표 특전대 전속 교관으고요, 소장 계급도 정식으로 부여되었습니다.”소정태가 들뜬 마음으로 희소식을 전했다.“아직 봉천시에 계시죠? 저는 지금 봉천시로 가는 중인데, 마침 그쪽으로 가서 진 교관님께 증서랑 군복을 전해드리겠습니다.”진서준은 그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는 햇살 호텔에 있습니다. 여기 오세요, 마침 사령관님 식구도 여기 있습니다.”“그런가요? 알겠습니다, 30분 내로 도착하겠습니다.”진서준이 전화를 끊자 심국도는 진서준을 빤히 노려보았다.“당장 죽게 될 사람이 아직도 이렇게 방자하게 굴어?”심국도의 말에는 분노한 담겨 있었다.심국도 앞에서 전화를 마음대로 받는 건 자기를 아예 무시하는 태도였다.심국도의 말에 장서안은 멈칫하며 물었다.“장관님,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이 녀석이 어제 내 조카딸을 죽였고 오늘은 내 앞에서 우리 조카를 당당하게 죽였어. 난 이미 군구에 부대를 파견하라고 지시했어.”심국도는 차가운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네?”장서안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진 교관이 왜 이렇게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허준서 일행은 심국도의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이내 진서준을 보며 빈정댔다.“심씨 가문을 건드린 것도 모자라 심 장관까지 건드려? 살아서 여길 나가지 못하겠네.”“부대 하나가 와서 네 장례를 치러준다면, 그 정도로 죽는 것도 폼나긴 하겠어.”장서안은 멍하니 있다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장관님, 이분이 바로 우리 설표 특전대의 그 신비한 교관, 진 교관입니다.”순식간에 방 안은 숨 막히는 정적에 휩싸였다.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장서안을 바라봤고 눈이 튀어나올 듯한 충격에 휩싸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심씨 가문과 허씨 가문 두 가문과 원한이 있
허순재 일행은 그 말을 듣고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왜냐하면 다들 아직 허준서가 성약당에서 제명당한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다들 허준서를 허씨 가문의 자랑으로 여겼지만 이제 허씨 가문에 남은 자랑마저 사라졌다.우르릉!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허순재와 강정숙 일가가 모두 바닥에 주저앉아 넋을 놓았다.“그렇구나, 설표 특전대 새 교관이니까 이렇게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거구나.”심국도의 얼굴에는 분노와 억울함이 가득했다.진서준의 국안부 상경이라는 신분 하나만으로도 심국도를 짓눌러 숨쉬기 어려울 정도였다.그런데 이제 특별한 신분이 하나 더 늘었으니 진서준을 잡는 건 거의 불가능해졌다.“이제 알아도 늦지 않았어.”진서준의 차분한 말에 심국도는 더욱 분노했지만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자기가 너무나도 한심했다.“형님, 저 녀석이 누구든 오늘은 반드시 우리 도준과 민경이 복수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분노에 찬 얼굴을 한 심국강이 일어서며 일침을 날렸다.심국강의 당장 튀어나올 듯한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너 설마...”심국도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맞아요. 죽더라도 저 녀석을 끌고 지옥에 갈 겁니다!”심국강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이를 갈았다.심국강은 진서준이 어떤 신분이든 개의치 않았다. 이따가 군부 병사들이 도착하는 대로 즉시 진서준을 노려 총을 쏴서 그를 여지없이 처치할 작정이었다.군부 하나에는 최소 수천 명 병사가 있고 최신형 무기로 장비되어 있었다.군부 앞에서는 팔급 대종사라고 해도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물러설 수밖에 없다.미쳐 발광하는 심국강을 본 심국도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좋아, 이따가 병사들이 오면 우리 형제 함께 목숨을 걸고 저 녀석을 해치우자.”자식이 없는 심국도에게 있어서 심도준과 심민경은 친아들, 친딸과 다름없었다.이제 진서준이 그 금쪽같은 자식들을 죽였으니 심국도도 굳이 살아있을 이유가 없었다.심국도 형제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자 허사연과 허윤진 자매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
하지만 변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진서준이 정말 눈 깜빡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라면 국안부가 진서준을 살려둘 리가 없었을 것이다.장서안은 진서준의 해명을 듣고 즉시 심국도를 말렸다.“장관님, 진 교관님 말을 들으셨죠? 이 모든 일은 장관님 조카와 조카딸이 자초한 일입니다. 너무 고집부리지 마세요.”“너도 적당히 해. 오늘 네가 뭐라고 떠들어도 난 절대 저 녀석을 살아서 이곳에서 내보내지 않을 거야.”심국도는 잔인무도한 표정을 지으며 위협했다.그때, 호텔 아래에서 빠르게 돌아가는 요란한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심국도는 허순재를 끌고 창문 앞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검은 차들이 호텔 앞에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고 수천 명의 병사들이 호텔을 완전히 둘러싸며 출입을 막고 있었다.본래 이곳에서 식사하려던 돈 많은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 기겁하며 어쩔 바를 몰랐다.“이건... 이건 무슨 상황이야? 혹시 간첩 잡으러 온 거 아니야?”“얼른 도망쳐. 군대가 나왔다는 건 이 호텔에 뭐가 큰일 났다는 거야.”“국내에서 군대가 사람 잡으러 출동하는 건 정말 오랜만에 보는걸...”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100미터 이상 떨어져서 휴대폰을 꺼내 몰래 촬영하고 있었다.“우리 사람들 드디어 왔네.”심국도는 흥분된 표정으로 말했다.“진 교관, 먼저 가세요. 제가 저 병사들을 막아두겠습니다.”장서안이 급히 진서준에게 제안했다.“가긴 뭐 가?”진서준은 태연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넌 여기서 네 사모님을 잘 돌보고 있어. 난 잠깐 내려가 볼게.”진서준이 스스로 내려가겠다고 하자 심국도는 움찔하더니 이내 비아냥거렸다.“진서준, 네 실력이 대단하다는 걸 나도 알아. 하지만 네가 아무리 하늘을 나는 실력이 있다고 해도 군대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을 거야.”“너 참 조잘대기 좋아하는구나. 성격이 원래 그래?”진서준은 심국도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심국도는 코웃음을 치며 조카 심도준의 시신을 들고 먼저
이 소동은 결국 심국도 형제가 군사 기지로 이송되며 끝을 맺었다.심씨 가문의 다른 직계들도 자연스레 전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수년 동안 동북에서 위세를 떨쳤던 심씨 가문은 이렇게 단 몇 시간 만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일부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더욱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다.군대의 부장급 고위 인사도 상대할 수 없다니, 용존의 실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다.진서준은 허사연 자매를 먼저 조씨 가문에 보내고 동북 군구의 일인자와 또 다른 조용한 곳으로 가서 대화를 나누었다.“아직 이렇게 새파란 나이에 벌써 영웅급 실력이구먼.”최해준이 진서준을 보는 눈빛에는 칭찬과 감탄이 가득했다.스무 살 남짓한 아이에 벌써 이렇게 대단한 성과를 올리다니, 대한민국 전역에서도 이런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최 수장님, 과찬입니다.”진서준은 미소를 지으며 겸손하게 말했다.탁자 위에 반짝이는 소장 계급 훈장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났다.진서준은 그 훈장을 흘끗 보고 나서 물었다.“최 수장님이 직접 오신 걸 보니 제게 단지 군대 계급 증서를 전해주시려는 것만은 아니죠?”“똑똑한 사람은 눈치가 빨라 참 좋아.”최해준은 웃으며 진서준을 칭찬했고 이어서 진지하게 말했다.“이번에 널 찾은 건 사실 네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야.”“설표 특전대 훈련을 맡으라는 겁니까?”“그것도 부탁 중의 하나긴 해. 네가 참 잘 훈련했던 것 같아. 설표 특전대 그 애들이 정말 눈에 띌 정도로 엄청난 변화가 생겼어.”설표 특전대의 변화는 최해준도 유심히 눈여겨보았기에 진서준에게 소장 계급 훈장이 내려진 것이다.“최 수장님, 이전에 소 사령관과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전 요즘 급히 해야 할 일이 었어서...”“네가 바쁜 건 나도 알아. 근데 이 일은 대한민국 전역에서도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최해준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우리는 최근에 정보를 하나 받았어. 며칠 후, 우리 내부에 숨어 있는 간첩이 명주시에서 유람선을 타는데 그 배에서 초아국 사람
“진서준 씨, 정말 그렇게 무정하신 건가요?”허순재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진서준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그 말을 들은 진서준은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무정하다고? 아까 호텔에서 내가 너희에게 기회를 안 줬어?”진서준은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기회를 놓친 건 너희잖아. 지금 와서 날 탓한다고? 웃기지 마. 너희 집안이 이렇게 망한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진서준이 감옥에서 막 나왔을 때, 허성태는 진서준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모든 걸 진서준에게 걸었다.허성태가 부유해진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진서준을 제대로 알아본 덕분이었다.사람 보는 눈이 예리하지 않다면 결국 눈앞의 허씨 가문처럼 가난과 몰락의 길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허씨 가문 사람들을 밀쳐내고 진서준은 냉랭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조씨 가문 저택으로 걸어갔다.“할아버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뭘 어떻게 하겠어? 당연히 집에 돌아가야지.”허순재가 이를 악물고 핀잔을 줬다.“쳇, 자기가 뭐 대단한 인물이라고 저렇게 싸가지 없게 굴어? 저 녀석 없어도 우리 허씨 가문은 무조건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야.”강정숙은 비굴하게 아첨하던 표정을 지우고 대신 경멸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허씨 가문이 진짜 돈 많은 명문대가로 부상해 동북 지방 가문의 정점에 오르는 것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수준이었다.“진서준 오빠, 오늘 바로 떠나려는 건가요?”진서준이 오늘 오후에 떠난다는 말을 들은 조민영은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사실 조민영만 아쉬운 게 아니라 조태희도 진서준이 떠나는 게 아쉬운 듯했다.진서준이 여기에 있으면 조민영은 진서준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고 자연스레 조민영이 진서준과 감정을 발전시킬 기회가 생길 터였다.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오늘 떠나야죠. 제가 동북에 있은 시간이 꽤 길었어요.”“그렇군요, 그럼 다음엔 언제 또 오시나요?”조민영이 또 질문을 던졌다.“그건 저도 잘 모르
늦은 밤에 진서준 일행은 비행기를 타고 서울시에 도착했다.오랫동안 진서준을 보지 못한 조희선 일행은 진서준이 갑자기 돌아온 것에 놀라며 기뻐했다.“서준아, 오기 전에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어?”조희선은 무척 기뻐하며 진서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혔다.“어머님, 서준이 어머님을 깜짝 놀라게 하려고 일부러 말하지 않고 온 거예요.”허사연이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사연아, 그동안 우리 아들 서준이를 잘 돌봐주느라 수고했어.”조희선은 허사연을 보며 환하게 웃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아니에요, 저는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요.”허사연은 미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 진서라도 허사연을 거들었다.“엄마, 그렇게 말하면 사연 언니가 너무 부담스러울 거잖아요.”“맞아, 그 말이 맞아. 엄마가 선 그은 것 같구나.”조희선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아참, 어머님, 이번에 동북에서 돌아오면서 작은 선물을 몇 개 준비했어요.”허윤진은 급히 가방에서 작은 상자 몇 개를 꺼냈다.상자 안에는 얼음 조각상이 들어 있었다.이 얼음 조각들은 조희선 일행의 모습을 본떠 만든 귀여운 캐릭터였다.얼음 조각은 고온에 노출되면 녹지만 진서준이 영기를 얼음 조각에 부여해 영기가 유지되는 한, 이 얼음 조각들이 녹을 일은 없었다.선물은 비싸고 싸고를 떠나 그 선물에 깃든 정성이 가장 중요한 법이다.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을 보자 조희선 일행은 신나서 어쩔 바를 몰랐다.“어머님, 저랑 윤진은 먼저 집에 가볼게요. 내일 다시 뵐게요.”잠시 한담을 나눈 후, 허사연과 허윤진이 일어나 집에 돌아가려고 했다.“서준아, 사연 자매를 배웅해 줘야지.”조희선의 말에 진서준도 벌떡 일어났다.“알았어요.”진서준은 차를 몰고 허사연 자매를 허씨 가문 별장까지 데려다준 뒤, 다시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서준아, 이번엔 집에 얼마나 있을 거야?”조심스레 묻는 조희선의 눈빛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조희선도 아들 진서준이 더
두 사람이 올라가자 김연아는 그제야 진서준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눈빛 하나로 천 마디 말을 대신하는 듯했다.진서준도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진서준은 앞으로 다가가 김연아를 품에 안고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기를 탐욕스럽게 들이켰다.“요 며칠 다치거나 아픈 데는 없었어?”김연아는 눈을 반쯤 감고 진서준의 따뜻한 품에 몸을 맡긴 채 물었다.잠시 후, 진서준이 입을 열었다.“다치긴 했어.”“응? 어디 다쳤어?”김연아는 깜짝 놀라며 진서준을 쳐다보았다.“네가 직접 확인해 볼래?”진서준은 김연아가 자기 말에 속았다는 걸 눈치채고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김연아는 말없이 진서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윗옷을 벗기고 나서 온몸을 훑어봤지만 이상하게도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위가 아니고 아래를 다친 거야?”김연아는 얼굴이 붉어졌다.“응, 아니면 방으로 가서 좀 더 자세히 확인해 볼래?”진서준의 숨결이 거칠어졌고 그의 손은 김연아의 부드러운 허리선 위를 가볍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그제야 김연아는 진서준의 의도를 파악했다.진서준은 사실 다치지 않았고 그저 김연아와 장난치려고 한 수작이었다.김연아가 고개를 숙이던 순간, 갑자기 그녀의 발밑에 하얀 작은 원숭이가 나타났다.“어머, 여기서 원숭이가 왜 나와?”김연아는 깜짝 놀라며 진서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하얀아, 밖에 나가 누렁이랑 놀아.”진서준은 하얀이를 발로 가볍게 툭툭 쳤다.주인에게 발로 차인 하얀이는 화내지 않고 머리로 진서준의 바지를 비비더니 거실을 나갔다.“이제 괜찮지? 하얀이는 나갔어... 네가 걷기 불편하면 내가 안고 올라갈게.”진서준은 품속에 안긴 김연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김연아의 하얀 목덜미는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그녀가 이 상황이 얼마나 쑥스러운지 고스란히 드러났다.“대답하지 않으면 인정한 걸로 할게.”진서준은 김연아를 안고 자기 방으로 갔다.방문을 잠그고 진서준은 재빨리 남은 옷을 벗어 던졌다.
이른 아침, 첫 번째 햇살이 얇은 커튼을 통과해 진서준의 얼굴에 비쳤다.새로 떠오른 태양의 온도를 느끼며 진서준이 천천히 눈을 떴다.“연아아...”눈을 뜬 첫 번째 일이 바로 김연아를 찾는 거였지만 그녀가 옆에 없다는 걸 진서준은 이내 깨달았다.진서준이 깨어나기 전에 김연아는 이미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비록 조희선과 진서라가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었지만 김연아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진서준의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는 걸 원치 않았다.진서준은 찬물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1층으로 내려갔다.“엄마, 서라야, 벌써 일어났네?”엄마와 여동생이 벌써 일어나서 주방에서 요리하는 모습을 본 진서준은 깜짝 놀랐다.“일찍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됐어. 누워 있으면 오히려 불편해지더라.”조희선은 웃으며 대답하더니 이내 진서준에게 눈짓을 보냈다.“연아는 일어났어?”다른 사람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진서준도 그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이미 자기 방으로 갔어요.”진서준은 말을 끝내고 바로 거실을 허겁지겁 빠져나갔다.“어머, 서준이 쑥스러워할 줄은 몰랐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조희선은 빙그레 웃었다.“엄마, 오빠가 저렇게 하면 사연 언니가 뭐라고 안 할까요?”진서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그럴 리 없어, 사연은 똑똑한 아이야. 조금이라도 불만이 있었다면 연아가 집에 있을 수 없었을 거야. 대신 진서준이 이 여자애들에게 좀 미안한 게 많겠지.” 조희선은 한숨을 쉬며 자기 속내를 털어놨다.앞마당에 도착한 진서준은 그곳의 상황을 보고 깜짝 놀랐다.본래 거울처럼 깔끔하고 평평했던 잔디밭은 지금 구덩이들로 가득했고 흰색과 노란색 털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그 털들을 보자 진서준은 곧바로 누가 이곳에서 소란을 피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누렁이야, 하얀이야! 너희 둘, 얼른 이리 와!”진서준은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진서준의 목소리를 듣자 바닥에 엎드려 자던 둘은 즉시 일어나 벌벌 떨며 진서준에게 다가갔다.“이 구덩이들은 너희가
“무슨 일 있어, 서준아?”서지은이 진서준이 빙그레 웃는 모습을 보고 궁금해 물었다.“아니야, 그냥 즐거운 일이 생각 나 이러는 거야.”진서준은 여전히 웃으며 답하고는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벌써 이 시간이야. 얼른 밥 먹자.”“좋아, 내가 밥할게.”서지은이 벌떡 일어서자 진서준은 조금 놀랐다.“너 요리 할 줄도 아는 거야?”“당연하지.”서지은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예전에 5성급 셰프한테 배운 적이 있어. 내 요리 맛보게 할 테니 기다려 봐.”“좋아, 기다릴게.”진서준은 기대에 찬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서지은이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며 요리하는 동안, 진서준은 국안부 류재훈에게 박씨 가문과 황씨 가문의 정보를 요청했다.그러자 잠시 후 류재훈은 이내 두 가문에 관한 정보를 보내왔다.[최고 부자 황경영이 명주시에 없다고 하네요. 작년부터 황경영은 해외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고 황씨 가문의 일은 황현호의 누나 황예은이 전적으로 맡고 있답니다.]이 문자를 본 진서준은 충격을 받았다.황씨 가문의 사업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었고 전국 어디든지 황씨 가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게다가 황경영의 나이는 아직 그렇게 많지 않아 가문에서 은퇴할 시기가 아니었다.그런데 이런 시점에 황경영이 모든 걸 내팽개치고 황씨 가문의 모든 업무를 황예은에게 맡겼다니,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황경영도 아마 돌아오고 싶겠지만 초아국에서 출국하지 못하게 막고 있을지도 몰라.”진서준은 속으로 대충 그럴싸한 가능성을 추측했다.황씨 가문의 기업이 갑자기 망하면 국내 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다.다행히 황예은은 기업 운영에 능력이 있어 혼란에 빠뜨린 기업을 물려받아 제대로 수습했다.지난번 신농산의 선발 현장에 갔을 때 진서준은 황예은을 만난 적이 있었다.황예은은 예쁘기도 했고 일 처리 스타일도 아주 강단 있어 여장부 같은 느낌이 물씬 났다.황씨 가문의 대종사에 대한 기록도 있었다.“팔급 대종사가 한 명 있네.”진서준은
중년 남자는 덤덤한 표정을 지은 채 최승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스승님은 외출하셨어.”“곽 선생님!”최승준은 먼저 깍듯하게 인사하고 나서 물었다.“손 선생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언제 돌아오시죠?”곽윤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또 새 업주가 너희 별장 단지에 입주한 거야?”“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또 손 선생님에게 부탁하려고 온 겁니다.”최승준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는 없어.”곽윤상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우리 스승님은 며칠 후에 돌아올 거야. 오늘은 내가 너와 함께 가 주지.”곽윤상이 손원순 대신 간다고 하자 최승준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그동안은 항상 손원순 대가와 함께 다니며 굿을 치렀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이 대신하자 최승준은 마음속으로 확신이 서지 않았다.“왜? 내 실력을 믿지 못하겠어?”최승준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본 곽윤상은 날이 선 말투로 물었다.곽윤상은 손원순이 직접 가르친 문하생으로 이미 상당한 수준의 굿을 익혔고 이제는 시간과 능숙한 정도 문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동호 별장 단지의 괴물 문제를 처리하는 건 곽윤상에게는 그저 간단한 일일 뿐이었다.“아니요, 그럴 리가요? 저는 곽 선생님을 굳게 믿습니다.”최승준은 급히 태도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그럼 오늘 밤 곽 선생님과 함께 호수에 가겠습니다.”“뭐라고? 밤에 간다고? 지금 바로 갈 수는 없어?”곽윤상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최승준은 이내 조금 전 진서준과 나눈 대화를 다시 털어놨다.최승준의 말을 들은 곽윤상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어이없네. 그놈은 아마 어디서 주워들은 기술로 여자 앞에서 자기 실력을 과시하려고 하는 걸 거야. 그런 놈은 죽어도 싸!”최승준도 한숨을 쉬며 맞장구쳤다.“그렇죠, 죽어도 싸죠. 근데 그 사람 이름이 진서준입니다.”최승준은 진서준이 이름을 밝힐 때 뭔가 큰 일이 터질 것을 직감했다.대한민국 전역에서 진씨 성을 가진 가문은 연경의
하지만 뜻밖에도 진서준은 이미 이곳에 뭔가 이상한 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선생님, 전 선생님을 절대 속이지 않았다고 보장할 수 있습니다. 손원순 풍수사의 굿은 효과가 뚜렷합니다. 그 풍수사가 굿을 하고 나면 귀신이나 괴물 같은 불미스러운 것들은 절대로 선생님 앞에 나타나지 않으실 겁니다.”최승준은 마지막까지 설득하려고 애썼다.이 청년이 아직도 요청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아마도 손원순 풍수사의 실력을 믿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히지만 진서준은 여전히 고개를 흔들며 거절했다.“그런 사람이 와서 굿을 할 필요는 없어. 난 충분히 내 힘으로 이걸 처리할 수 있어.”“네? 선생님 스스로 해결한다고요?”최승준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진서준을 놀라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왜? 믿지 않아?”진서준은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최승준은 불신이라는 두 글자를 얼굴에 적어 놓은 것만 같았다.아무래도 진서준은 일부러 허세를 부리며 최승준을 놀리는 것 같았다.손원순 풍수사는 거의 백 년 동안 굿을 연구해 왔던 터라 지금처럼 강력한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그런데 겨우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애송이 진서준은 감히 손원순 풍수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 리 없었다.“선생님, 존함이 어떻게 되세요?”최승준이 뒤늦게 진서준의 이름을 물었다.“진서준.”그 이름을 들은 최승준은 살짝 놀랐고 목소리도 한층 더 진지해졌다.“진 선생님, 저는 절대 농담하는 게 아닙니다...”“됐어, 알았으니까 얼른 가 봐.”진서준은 손을 내저으며 대화를 끊으려 했다.“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오늘 밤 8시에 동호 호숫가로 와서 직접 확인해.”최승준은 그 말에 답답해 울분이 터질 것 같았다.이건 그냥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었다.굿을 하지 않았는데 감히 밤에 동호에 간다니,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좋아요, 진 선생님. 오늘 밤 동호에 꼭 가겠습니다.”설득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오늘 밤 손원순 대가를 직접 모셔야 할 것 같았다.최승준
“이 자식들 정말 손이 많이 가네.”동호 별장 단지의 관리팀장 최승준이 한숨을 쉬며 중얼댔다.최승준의 이 일은 사실 괜찮은 보수를 받고 있어 매달 수입은 거의 2천만 원에 달했다.다른 별장 단지보다 훨씬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동호에서 귀신과 괴물이 떠돌고 있기 때문이었다.이곳에서 사람이 괴물 때문에 목숨을 잃었을 때 유가족들이 와서 크게 소란을 피우곤 했다.이곳 별장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지위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다.그래서 매번 소란이 일어날 때마다 최승준은 머리가 아파 터질 지경이었다.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최승준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그는 유가족들의 욕받이 역할이나 하고 억지로 웃으며 목숨을 잃은 업주의 별장을 대신 팔아주곤 했다.진서준과 서지은 같은 젊은 청년은 최승준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진서준이 어느 명문대가의 외동자식인데 여기서 재수 없게 죽게 된다면 유가족들이 찾아와 최승준을 때리고 욕하는 걸로 쉽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진짜 세력이 어마어마한 가문이라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최승준도 목숨을 잃은 청년과 함께 생매장할 수도 있었다.그러니 보안 팀장의 전화를 받은 최승준이 이곳으로 급히 달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별장 단지 입구에 도착하자 보안 팀장이 최승준을 기다리고 있었다.“팀장님, 그 젊은 커플은 13번 별장에 있습니다.”“알았어요.”“근데 팀장님, 그 남자는 말이 잘 안 통하네요. 아까 제가 좋게 좋게 설득하니 이내 화를 버럭 내더라고요.”보안 팀장이 진서준에 대해 불평했다.보안 팀장은 분명 그 청년을 생각해 주는 차원에서 한 말이었지만 뜻밖에도 청년은 말을 듣기는커녕 보안 팀장에게 찬물을 끼얹어 버렸다.“요즘 청년은 본래 다들 다혈질이에요.”최승준은 이내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아참, 방금 그 두 사람과 말다툼한 건 아니죠?”“물론 싸우진 않았죠. 여기 사는 사람들과 제가 어떻게 감히 시비를 걸겠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인간관계를 잘 다루는 편인
보통 사람은 필요할 수 있지만 진서준은 손원순 풍수사의 굿이 필요하지 않았다.진서준은 오늘 밤 동호에 가서 그 호수 안에 전설속의 물괴가 있는지 확인할 계획이었다.“우리는 필요 없어요.”진서준은 다시 한번 보안 팀장의 말을 끊었다.진서준이 자기 말을 믿지 않자 보안 팀장은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만, 나중에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기면 제가 미리 경고하지 않았다고 원망하지 마세요.”보안 팀장은 이 두 사람이 수백억짜리 별장도 통 크게 사면서 왜 돈을 조금만 들여 자기 생명을 보호하려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동호의 괴담은 명주시 상류층 사람들 대다수가 알고 있었다.심지어 외지 사람들도 이곳에서 별장을 살 때 이 괴담에 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손원순은 오래전에 이미 동호에 와서 자세히 살펴본 적이 있었다. 유심히 살펴보고 난 손원순은 이 호수 안에 살기가 강하게 응집되어 있고 원혼들이 자주 나타나서 온갖 잡귀신이 이 호수에서 자라기 쉽다고 말했다.양기가 약한 사람이라면 호수 주변에 왔다가 쉽게 피해를 볼 수 있다고도 했었다.이곳 업주들 대다수가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매일 거듭되는 악몽과 몽유병 같은 이상한 현상이 반복되자 손원순 풍수사에게 굿을 요청했다.보안 팀장의 말을 들은 진서준의 표정이 순간 차가워졌다.“혹시 지금 날 위협하는 건가요?”“아닙니다, 오해입니다.”보안 팀장은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그냥 선의의 귀띔을 한 것뿐입니다. 오늘 밤을 여기서 보내면서 뭔가 이상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괜찮고요, 뭔가 이상이 있으면 내일이라도 저한테 연락하세요. 제가 우리 회사 관리팀장에게 부탁해 손원순 풍수사를 연락할 수 있도록 할게요.”이 남자는 단지 보안 팀장일 뿐, 손원순 풍수사와 같은 최상층 유명 인사와 연락할 수단이 없었다.오직 별장 단지를 관리하는 회사 관리팀장만이 손원순 풍수사와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진서준도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서지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택시 기사와 진서준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택시는 벌써 명주시 동호 별장 구역 입구에 도착했다.여기는 고급 주택 단지라 택시가 들어갈 수는 없었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서지은은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진서준의 팔을 다시 한번 꼭 끼며 두려운 표정으로 물었다.“서준아, 아까 그 택시 기사 말이 사실일까? 동호 안에 물괴가 정말 있을까?”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귀신이나 괴물 같은 것을 더 두려워하는 성향이 있었다.아까 택시 기사가 물괴가 있다고 하자 서지은은 본능적으로 이사를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 별장을 사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고 싶었던 것이다.진서준이 서지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면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고급 별장이란 사치품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대한민국 전체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너도 꽤 많은 일을 겪었잖아. 아직도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감이 잡히지 않아?” 진서준이 웃으며 되물었다.서지은은 그 말을 듣고 이내 금운 운대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순간 서지은은 섬뜩한 기운이 솟구치며 몸을 부르르 떨었고 진서준의 팔을 더욱 꽉 잡았다.이 순간 서지은은 진서준과 하나가 되어버리고 싶었다.서지은의 탱탱하고 풍만한 가슴이 진서준의 몸을 단단하게 누르자 진서준은 이내 몸에서 반응이 일어났다.“걱정 마, 물괴가 진짜 있다고 해도 내가 널 꼭 지켜줄게.”진서준은 다른 손으로 서지은의 어깨를 톡톡 치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그럼 밤에 잘 때는 어쩌지? 아까 택시 기사가 밤에 사건 사고가 더 자주 일어난다고 했잖아.”서지은은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진서준을 마주 보기 부끄러워했다.“서지은은 지금 말을 빙빙 에둘러 하며 명확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물괴에 대한 두려움도 진짜였고 진서준과 한방에서 밤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진짜였다.서지은의 의도를 파악한 진서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 밤에도 널 지켜줄 수 있
“넌 물론 자제할 수 있겠지. 근데 우리는 여우 같은 여자가 널 유혹할까 봐 걱정인 거야.”서지은이 서둘러 해명했다.“어느 여우가 나 같은 한 푼도 없는 거지를 유혹하겠어?”진서준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요즘 여자들은 다들 현실적이거든. 특히 이런 대도시에서는 더욱 그래.”명주시에 와서 분투하는 사람들 대다수는 젊고 예쁜 여성이었다.아마 막 졸업한 여대생들은 남자들 외모에 관심이 많을 수 있지만 이 대도시에서 혹독한 반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돈이 최고라는 생각이 그들 뇌리에 깊이 박힐 것이다.서지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의했다.“네 말도 일리가 있어.”서지은의 아버지는 서지은에게 회사를 하나 맡겼었고 그 회사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서지은은 돈에 목매어 딴 데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을 꽤 많이 봤었다.“어차피 여기 온 이상 나도 널 막무가내로 돌려보낼 순 없지.”진서준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서지은이 웃으며 답했다.“네가 날 쫓아내려고 해도 난 안 가.”“호텔은 예약했어?”진서준의 질문에 서지은이 뜻밖의 대답을 들려줬다.“아니야. 근데 우리 서씨 가문은 이전에 명주시에 별장을 하나 샀거든. 크지는 않지만 우리 둘이 살기엔 충분할 거야.”진서준은 그 말에 순간 움찔했다.역시 강남에서 가장 잘나가는 가문은 스케일이 달랐다. 자산이 많은 건 알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두 사람은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명주 동호로 가 주세요.”택시 기사는 마흔 중반의 중년 남자였고 명주 지역 사투리로 물었다.“명주 동호요? 두 분은 잘사는 집 귀한 도련님과 아가씨인가 보군요.”택시 기사의 말에는 부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명주 동호의 별장이 명주 시내에서 가장 비싼 곳은 아니지만 가격이 결코 싸지 않았고 그 가격은 무려 최저 평당 1억 2천만 원이었다.인테리어 비용까지 포함해서 별장 한 채를 사려면 최소 100억은 들어가야 했다.물론 이건 이 구역에서 가장 낮은 가격이었고 보통 사람은 평생을 분투해도 화장실 하나 못 살 가격
명주시는 지난 세기 외국에 개방된 주요 도시 중 하나로, 바다와 가까운 위치 덕분에 발전 속도가 매우 빠른 도시였다.불과 30년도 채 되지 않아 명주시는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도시로 성장했다.수많은 국내 기업 순위 500위 내의 대기업이 명주시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심지어 경성도 명주시 앞에서는 다소 뒤처지는 느낌이었다.허성태의 재산은 서울시에서 으뜸으로 손꼽혔지만 명주시에 오면 아예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명주시에는 허성태보다 더 부유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명주시 무도계 무인들도 실력이나 수량이 절대 경성에 뒤지지 않았다.그리고 가문들의 관계도 매우 복잡해서 경성처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지 않았다.얼핏 보기에는 박씨 가문과 황씨 가문이 명주시 명문대가의 정점에 서 있지만 사실 그 뒤에는 음모와 갈등이 얽혀 있어 수많은 가문이 이 두 가문을 넘어설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진서준은 국안부가 명주시의 질서와 사회 안정을 위해 특별히 구급 대종사를 파견해 이곳을 지키고 있다고 예전에 진서훈한테서 들은 적이 있었다.그 목적은 명주시 악당들의 폭동을 방지하고 해외의 강자들 공격을 막기 위해서였다.비행기는 공중에서 두 시간을 돌고 난 뒤, 명주시 북쪽 외곽 공항에 착륙했다.진서준은 비행기 창문을 통해 도시 외곽에 우뚝 솟은 고층 빌딩들을 주시했다.이 화려한 도시를 보며 진서준은 본인이 시골에서 막 도시로 온 촌뜨기 같은 느낌을 받았다.진서준이 이런 느낌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서울시와 명주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었다.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 홀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그중에는 형광봉을 든 연예인 팬들도 있었다.진서준은 혼자 군중 속을 걸어갔다. 진서준이 오가는 모습은 다른 사람들과 별 다를 바 없었지만 자세히 보면 진서준에게는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이 물씬 났다.이번에 명주시에 온 진서준은 인피면구를 쓰지 않고 자기 진짜 얼굴을 그대로 드러냈다.김평안이라는 가명은
그러니 박운기의 협박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그럼 박씨 가문 사람들이 서울시로 올 때까지 기다려보자.”서정훈은 쌀쌀하게 한마디 한 후, 휴대폰을 꺼내 시청에 전화를 걸었다.잠시 후, 정장을 입은 일행이 호텔에 도착했고 서정훈이 명령을 내리자마자 바로 박운기를 체포했다.돌아오는 길에 서정훈은 진서준의 손을 잡고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서준아, 오늘 정말 고마워. 우리 아들 병을 치료해 줘서 우리 서씨 가문에 후손이 없을 가능성은 사라졌어. 게다가 지금은 또 이렇게 악당을 잡아줘서 서울시를 구해줬잖아. 진짜 이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서정훈를 보며 진서준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서 시장님, 그렇게까지 고마워하실 건 없어요. 저는 단지 우리나라와 고향을 위해 힘을 쓴 것뿐이에요.”“사실 나중에 네가 서울에서 머리 아픈 일이라도 생기면 내가 배후에서 널 후원할 생각이었어...”서정훈은 이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벌써 날 훌쩍 뛰어넘어 국안부 사람이 된 건 생각지도 못했구나... 정말 먼저 난 머리보다 후에 난 뿔이 무섭다는 말이 하나도 틀린 것 같지 않구나.”서정훈의 점심 식사 초대를 거절한 후, 진서준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드디어 돌아왔구나.”진서준이 나타나자 허사연은 즉시 일어나 반갑게 맞이하며 물었다.“다친 데는 없어?”“아무 일도 없어, 섬나라에서 온 벌레가 날 다치게 할 일은 없어.”진서준이 덤덤하게 말하자 허사연은 멈칫하며 물었다.“섬나라 사람이라고? 그 노인 말이야?”“응, 공교롭게도 전에 그 사람 형도 내가 죽였거든. 지금쯤 둘이 저승에서 재회했을 거야.”진서준이 웃으며 말하자 허사연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넌 뭐 스스로 좋은 일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응, 당연히 좋은 일이지.”진서준은 호텔에서 일어난 일을 천천히 털어놨고 다 듣고 난 허윤진은 주먹을 꽉 쥐며 이를 악물었다.“내가 그때 거기 있었으면 그놈에게 주먹 두 방 날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