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다인은 손 내밀어 그의 말을 툭 잘랐다.“됐어요. 여기 남으셔도 돼요.”그녀는 결코 속 좁은 여자가 아니다. 이런 사소한 일로 직업에 애정 품은 사람을 밥그릇을 잃게 할 생각은 없다.정호는 희열에 넘쳐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고맙습니다, 사모님.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너그러운 분이시네요.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분부만 하세요. 사모님을 위해서라면 두 발 벗고 나서겠습니다.”서다인은 내내 가슴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워 무심코 손목시계를 정호에게 건넸다.“두 발 벗고 나설 필요는 없고, 일단 이 시계를 하준 씨한테 돌려주세요.”“네.”정호는 손목시계를 건네받았다.이때 서다인이 또 물었다.“이 근처에 기차역이나 공항 있어요?”정호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사모님 여길 떠나시게요?”서다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제 남편이 딴 여자랑 알콩달콩한 모습을 한시라도 쳐다보고 싶지 않으니까.이런 식으로 저 자신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해 경향이 전혀 없다.돌아가서 할머니께 잘 설명해 드리고 이 죽일 놈의 결혼생활에 얼른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정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사모님, 제가 내일 휴가 신청하고 바래다 드릴게요. 안성시까지 차로 가려면 6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그래요, 고마워요.”서다인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몸에 기운이 쫙 빠진 채 나긋하게 대답했다. 이건 아마도 남하준을 향한 마음을 다 내려놓아서 그런 듯싶다.그녀는 흐리멍덩하게 훈련장을 떠났다.저녁 무렵 드리워진 따뜻한 노을빛은 아늑한 분위기를 한껏 자아냈다.서다인은 방에 숨어 책을 보며 시간을 때웠다. 점심도 안 먹었는데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됐다.그녀는 방에서 나와 곧게 주방으로 향했다.가는 길에서 남하준과 마주쳤고 그의 뒤엔 류청과 정호 두 명의 비서실장도 있었다.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인사를 올렸다.“사모님.”서다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응했다.“네.”남하준은
5번 과학 연구소 건물.사람들이 줄지어 코를 막고 안에서 도망쳐 나왔다.중독당한 대부분 사람들은 구토 증상을 일으키고 또 일부는 머리가 어지러워 바닥에 누워 있었다.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캠프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 전부 환자를 구하러 달려왔다.서다인은 숨을 헐떡이며 현장으로 달려와 남하준의 안위가 걱정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이때 남하준이 백하린을 안고 5번 건물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오더니 의료 침대에 눕혔다.서다인은 문득 저 자신이 우스워졌다.그녀의 신경은 온통 이 남자인데 정작 이 남자의 눈엔 백하린밖에 없다.남하준은 백하린을 의사에게 넘긴 후 또다시 안에 들어가 사람을 구하려 했다.이때 백하린이 그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애교 섞인 목소리로 울며 애원했다.“오빠, 가지 말아요. 나 너무 아파. 토하고 싶어요...”“착하지.”남하준이 다정하게 타일렀다.“괜찮아. 의사 선생님이 옆에 있어.”백하린은 머리를 내저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울먹이며 계속 중얼거렸다.“가지 말아요. 나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아요. 오빠, 나 진짜 죽으면 어떡해요?”이때 류청이 달려와 보고했다.“도련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대피했고 총 35명이 중독되었습니다.”남하준은 옆에 있는 연구원에게 물었다.“유 교수님, 대체 무슨 액체가 누출된 거죠? 생명의 위험은 있나요?”유주헌이 사색이 되어 바짝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청유액이라고 해외에서 들여온 신제품이라 저희도 아직 연구 단계에 있습니다. 이 제품에 대해 아예 익숙하지 않습니다.”남하준은 차가운 시선으로 의사를 쳐다봤다.의사는 흠칫 놀라더니 긴장감이 더 조여왔다.“도련님, 제가 오랫동안 의학을 공부해왔지만 청유액이란 화학 물질은 들어본 적이 없어 그 독성도 잘 모릅니다. 각 환자의 화학 실험 보고서가 나와야 증상에 따라 약을 처방할 수 있습니다.”“이렇게 중요한 물건을 왜 제대로 보관하지 못하고 누출하게 된 거죠?”남하준은 분노 조로 쏘아붙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포스에
설마 이 여자의 조사에 대한 조사에 착오가 있었단 말인가?하지만 유주헌은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 미소를 활짝 지어 보이고는 가슴이 벅찼는데도 예의를 지키며 물었다.“사모님, 혹시 화학을 전공하셨어요?”강물처럼 맑은 눈을 가진 서다인은 순간 머리가 하얘져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모르겠어요, 기억이 없거든요.”“기억이 없다고요?”유주헌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보였다.“그럼 청유액이랑 레늄 원소는 어떻게 알고 있어요? 해독할 줄도 아시잖아요.”서다인이 한참 고민을 하다가 여유롭게 대답했다.“요리할 때는 소금을 넣어야 하듯이, 낚시할 때는 미끼를 던져야 하듯이, 이건 상식 아닌가요?”그녀의 말에 유주헌은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숭배의 눈빛으로 서다인을 바라봤다.멀지 않은 곳에서 정호와 류청은 부하들과 함께 중독된 사람들에게 식용 알칼리수를 마시게 했다.얼마 있지 않아 사람들의 구토 증상과 복통이 사라졌다.머리가 아직 어지러웠지만 그래도 해독약의 효과는 대단했다.류청은 남하준 앞에 다가오고는 예의를 갖추며 그에게 알칼리수를 건넸다.“도련님, 효과가 좋으니 하린 씨께 드리세요.”백하린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녀는 주목받는 서다인이 싫어 고집을 부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안 마셔요.”남하준이 미간을 구기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안 마셔?”백하린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하준 오빠, 나 이런 거 안 마실래요. 서다인 언니는 중학교도 졸업 못했잖아요, 지식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믿고 마시겠어요.”중학교도 졸업 못했다니, 그럼 초졸이란 말인가?놀라움을 금치 못한 사람들이 경멸이 깃든 눈빛으로 서다인을 훑어보기 시작했다.서다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속상하고 억울했지만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었기에 일부러 괜찮은 척하며 입을 열었다.“하린 씨, 차래지식을 먹지 않으려는 그 패기, 대단하시네요. 어떤 상황에서도 원칙을 지켜나가시길 바랄게요, 화이팅!”말을 마친 서다인이
깊은 밤.서다인은 샤워를 마친 후 햇살이 가득한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잃어버린 휴대폰을 들고 뉴스를 확인했다.그녀를 납치한 김호영은 현장에서 사살되고 사기 센터의 피해자들도 모두 구출되었다. 그리고 범행에 가담한 사람들은 남하준의 부하들에게 잡혀 경찰에 인계되었다.그녀의 가방도 휴대폰도 모두 되찾았지만 아쉽게도 3년 동안 모은 돈은 모두 그녀의 친오빠가 빼돌렸다.지금의 그녀에게는 이 휴대폰 말고는 무일푼이다.기억을 잃은 후로 그녀는 은경애를 만났는데 은경애는 마치 원래 그녀를 알고 있던 것처럼 예뻐했고, 꼭 그녀를 곁에 두려고 했다.그렇게 서다인은 은경애 옆에서 3년 동안 간병인을 해 왔다.친구도 없고 불운과 재앙만 안겨주는 가족을 찾아갈 수도 없으니 생활고에 쪼들리는 지금 누구에게 돈을 빌려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서다인이 생각을 거두고는 문 쪽을 바라봤는데 남하준의 튼실하고 넓은 어깨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남자는 지금 문을 닫고 있었다.그런 그의 모습을 본 서다인은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그녀는 긴장된 마음에 시선을 거두고는 고개를 푹 숙여 휴대폰으로 디지털책 아무거나 하나 열어 읽기 시작했다.남자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는데 그가 내디딘 걸음마다 서다인의 심장을 강타하고 있었고 긴장감은 갈수록 커졌다.남하준이 그녀의 앞을 지나갔다.그녀가 고개를 들자 남하준은 베란다 난간을 등진 채 정면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압감을 풍기는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의심스러운 듯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그와 눈을 마주치자 서다인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지만 겨우 침착을 유지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왜 나를 그렇게 봐요?”남하준이 대답했다.“정말 3년 전에 있었던 일을 잊었어?”“네.”서다인이 고개를 끄덕였다.남하준이 입술을 감쳐물고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킨 뒤 또 물었다.“청유액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서다인의 머릿속에는 이 물질
서다인이 방 안의 책장을 가리키며 말했다.“요 며칠 하준 씨 책장에 있는 책은 전부 다 읽었어요.”남하준이 한 번 더 물었다.“정말 한 번 더 생각해 보지 않겠어?”서다인이 고개를 숙였다.“네, 나 내일 아침 바로 갈 거예요. 앞으로 이곳에 올 기회는 더 없겠죠.”남하준은 더는 그녀를 설득하지 않았다.그녀의 곁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면서 외투 단추를 풀며 당부했다.“집으로 돌아가면 할머니에게 이혼 얘기를 꺼내지 마. 할머니께서 자극받으실까 봐 걱정돼.”휴대폰을 쥐고 있던 서다인의 손에는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그녀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괴로운 감정이 북받쳐왔다.“미안한데 하준 씨 책에서 어떤 여자애 사진을 봤어요. 그 뒤에 ‘내가 사랑하는 여자 백하린’이라고 쓰여 있더군요.”외투 단추를 풀던 남하준이 멈칫하더니 온몸이 굳어진 듯 제자리에서 꼼작도 하지 않았다.그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서다인은 가슴이 비수에 꽂힌 듯이 아팠다.말 못 할 고통에도 애써 괜찮은 척하며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당신이 가장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하린 씨겠죠?”한참 뒤에야 남하준이 정신을 차리고는 계속 외투를 벗으면서 무심하게 말했다.“어렸을 때 하린이를 많이 좋아했던 건 맞아. 하지만 하린이가 14살 때 외국 명문 학교에 합격했거든. 하린이가 출국한 뒤로 우리는 연락이 끊겼어. 10년 동안 한 번도 못 만났지. 심지어 하린이가 돌아온 첫해에도 두 사람 사이는 어색했어.”말을 마친 후 남하준은 곧장 욕실로 향하고는 문을 닫아 샤워하기 시작했다.그의 설명에도 서다인은 괴로운 마음이 조금도 덜해지지 않았다.그녀는 심지어 자기가 내연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남하준과 백예린은 어려서부터 서로를 좋아했으니까 말이다.만약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남하준은 분명 백하린과 결혼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사랑도 감정도 없는 이 결혼에서 고통스럽게 버티지 않았을 것이다.찬 봄바람이 불어 들어오면서 서다인의
남하준이 방을 떠난 후 긴 복도를 지나 서재에 도착하고는 불을 켰다. 그리고 백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애교 섞인 백하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준 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몸도 마음도 피곤한 남하준이 나지막이 물었다.“뭐가 두려워?”백하린이 애교를 부렸다.“그냥 너무 무서워요, 그냥 와서 같이 있어주면 안 돼요?”남하준이 시간을 확인하자 어느덧 밤 11시가 되어 단호하게 거절했다.“시간이 너무 늦었어. 내가 너희 집 앞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을 보낼게. 두려워할 필요 없고 일찍 쉬어. 나 내일 아침 일찍이 다인이를 안성에 데려다줘야 해.”백하린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투덜거렸다.“정호 씨가 데려다주는 거 아니었어요? 왜 하준 오빠가 데려다줘요?”남하준이 테이블 앞에 앉고는 이마를 짚은 채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다인이는 지금 내 아내잖아. 당연히 책임을 져야지.”백하린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서다인 언니는 몸이 더러우니까 절대 같이 자면 안 돼요.”남하준의 얼굴색이 어두워지더니 그는 미간을 구기고는 엄숙한 말투로 말했다.“하린아, 그런 뒷담화를 하면 되겠어? 모든 사람에게는 존경받을 만한 과거가 있어.”백하린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엉엉... 하준 오빠, 정말 서다인 언니랑 잔 거예요? 전에 서다인 언니가 성병에 걸렸었다던데. 오빠도 감염되면 어떻게 해요?”다른 사람이었다면 남하준은 진작 화를 냈을 것이다.하지만 상대는 백하린, 그가 10년 넘게 짝사랑한 여자였다.남하준은 안타까운 마음에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하린아, 내가 다인이랑 자는지 안 자는지는 다인이를 향한 내 마음에 달렸겠지. 다인이를 사랑하지 않으면 당연히 다인이의 몸에 손을 대지 않을 거야. 딴생각은 그만하고, 다른 사람 뒷담화도 이제 더는 하지 마.”“그럼 하준 오빠는 나 그렇게 사랑하면서 왜 나랑 안 자려는 거예요?”백하린이 장난기가 가득한 말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눈빛이 어두
서다인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억울한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백하린 씨 곁에 있어줘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여자의 부드럽고도 조심스러운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불쾌함이 묻어났다.그 어떤 남자라고 하더라도 서다인의 말에 마음이 살살 녹을 것이다. 남하준도 예외는 아니었다.하지만 그는 이런 느낌이 싫어서 일부러 차가운 척하며 대답했다.“괜찮아.”서다인이 한숨을 푹 쉬고는 더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하준 씨가 데려다준다면 받아들이지, 뭐. 마침 돌아가서 이혼하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말이야.”서다인이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유일하게 남은 휴대폰과 가방을 챙기고는 남하준을 따라 방을 나서 식당에 아침 먹으러 갔다.이른 아침 식당에는 오가는 직원들이 끊이질 않았다.그들을 본 사람들은 모두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도련님, 사모님, 좋은 아침입니다.”남하준은 그들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았다.인사를 건넨 사람이 워낙 많기도 했기에 다 대꾸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서다인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 사람에게 모두 미소를 지어 보이며 똑같이 인사를 건넸다.“좋은 아침이에요.”서다인은 캠프에 있는 며칠 동안 예의 바르고 겸손하며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풀었다. 게다가 중독 사건에서 그녀의 도움을 받았기에 사람들은 서다인을 매우 좋아했다.서다인은 식탁 앞에서 음식을 기다렸다.남하준이 아침 두 세트를 챙기고는 하나를 서다인에게 건넨 후 식사를 시작했다.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만두피는 그대로 두고 그 안의 고기만 쏙 골라 먹는 서다인을 발견했다.삶은 달걀도 흰자만 먹고 노른자는 건들지도 않았다. 심지어 소고기죽도 파를 전부 골라냈다.남하준은 가슴이 왠지 모르게 움찔하다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나쁜 습관은 걔랑 정말 닮았네.”서다인이 죽을 먹으면서 나지막이 물었다.“누구랑요?”“하린이 말이야.”남하준이 담담하게 웃으며 눈치 없이 또 물었다.“여자들은 다 이렇나 봐?”서다인은 원래도 기분이
차가 멈춰 서자마자 서다인이 남하준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데려다줘서 고마워요.”이 한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물건을 안아 든 채 문을 닫고는 허름한 단층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단층집 앞에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두 건달이 앉아 있었다.남하준이 힐끗 쳐다보더니 곧바로 서다인이 향하고 있는 곳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다. 두 건달은 주위를 경계하며 망을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남하준은 운전기사더러 전화해 사람을 불러오라는 지시를 내리고는 차에서 내려 그녀의 뒤를 따랐다.두 건달은 서다인과 아는 사이인지 그녀를 쉽게 들여보냈지만 남하준은 아니었다.남하준이 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방금 들어간 여자가 내 아내예요. 나 들어가게 해줘요.”건달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서지석의 동생이 그쪽 아내라고요? 그럼 내가 당신 아버지라고 해도 사람들이 믿겠어요.”남하준은 상대와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선을 먼저 넘은 건 그들이었다.그의 눈에 살기가 어리더니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고는 그들을 향해 매섭게 날렸다.그의 힘센 주먹이 상대의 뒷머리를 내려쳐 순식간에 건달 한 명을 기절시켰다.다른 건달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고는 바로 몸에 지닌 칼을 꺼내려고 했는데 그가 칼에 손이 닿기도 전에 남하준의 주먹을 맞아 바닥에 쓰러졌고 이어서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남하준이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고는 무심하게 손을 닦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긴 복도를 지나니 어두운 불빛의 도박장이 보였다.사람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고 매서운 연기가 자욱했다.구석에서 일어난 소동이 그의 주의를 일으켰다.남하준이 인파 속을 헤집고 들어가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서다인은 사 온 큰 포대를 어떤 남자의 머리에 씌우고는 야구 방망이를 움켜쥔 채 남자의 팔다리를 세게 내리쳤다.남자는 맞아 바닥에 쓰러졌고 당황한 나머지 머리에 씐 포대를 찢었다. 그리고 극심한 고통 때문인지 비명을 금치 못했다.서다인은 어금니를 깨물며 온 힘을 다해
이다은은 지금의 정하늘이 낯설게 느껴졌다.그녀는 자신이 한때 좋아했던 남자가 이렇게 짜증 나는 인간이길 바라지 않았다.“다은아, 난 술에 취해 실수한 거야.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좋아하는 사람은 오직 너였어. 나...”이다은이 엄한 말투로 끊었다.“그만해. 정하늘. 나 이미 결혼했고 이현이도 임신했어. 이현에게 잘 해주고 곧 태어날 너희 둘 아이에게나 잘 해줘. 이런 쓸데없는 말로 고민만 늘어놓지 말고.”말을 마친 이다은은 그의 곁을 지나갔다.그러자 정하늘은 돌아서서 이다은의 팔을 덥석 잡아당기더니 표정이 싸늘해졌다.“이다은, 너 설마 내게 복수하려고 아무 남자나 찾아서 결혼한 거야?”“아니야! 이거 놔.”이다은이 차갑게 말했지만 정하늘은 손을 놓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앞으로 끌어당기고 다른 한 손도 그녀의 팔을 잡아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거리가 좀 가까워지자 이다은은 거부감을 느끼며 몸부림쳤다.“이거 놓으라고!”정하늘은 마치 이성을 잃은 듯 나지막이 외쳤다.“내게 복수하려고 결혼한 게 분명해. 넌 아직도 날 좋아하고 잊지 못했는데 왜 너 자신을 괴롭히는 거야?”“그런 거 아니라고!”이다은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내 말 맞아!”정하늘은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아니면 네가 처음 본 남자랑 결혼할 리가 없잖아? 그 남자 가정 형편도 열약하고 직장도 별로고 인품도 별로 좋지 않아 보여. 생김새는 재벌가 사모님의 스폰을 받는 오리처럼 생겨서 말이야. 어디 술집의 에이스가 아닌지 몰라.”이다은은 화가 치밀어 가슴이 아팠다.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삼키더니 또박또박 말했다.“정하늘, 대체 무슨 근거로 내 남편을 비하해? 네가 뭐라도 되는 것 같아?”“근거? 신혼집도 없이 너희 집에서 얹혀살면서 밥 얻어먹고 있잖아?”“그게 너랑 뭔 상관이야?”“이다은. 정신 차려! 얼굴 번지르르한 것 빼고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인간이야. 내게 복수하려고 네 행복까지 버리는 건 아니지.”이다은은 힘껏 발버둥 쳤다.“이 손 놔!”그러나 그
이다은은 온몸에 힘이 빠졌다. 남자의 따뜻한 품에 안겨 몸이 나른해졌고 긴장되고 무서워서 눈을 감고 조용히 그의 다음 동작을 기다렸다.그녀의 마음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그녀는 한참을 기다렸다.그러나 남우영의 몸은 화로처럼 뜨거웠지만 그저 그녀를 안고만 있었다. 잠시 후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좀 더 자요. 이렇게 일찍 일어날 필요 없어요.”이다은은 할 말을 잃었다.따뜻하던 품이 갑자기 텅 비었다.남우영은 그녀의 뒤에서 떠나 그녀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고는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이다은이 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돌아보니 그는 잠옷을 벗고 셔츠로 갈아입고 있었다.그의 탄탄한 등 근육을 보자 이다은은 얼굴이 살짝 뜨거워져서 다시 침대에 누웠는데, 저도 모르게 시트를 움켜쥐고 마음이 싱숭생숭했다.‘대체 뭐가 문제야?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이 남자는 왜 내 몸에 손도 안 대는 거야? 설마 지각할까 봐?’남우영은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에 가서 씻었다.이다은은 눈을 감고 계속 자려 했지만 이미 잠을 이룰 수 없었다.대략 30분 정도 지난 후, 남우영은 거실에서 아침을 먹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의 핸드폰과 슈트 코트를 집어 들고 나가려고 할 때, 그는 자는 이다은을 보았다.걸음을 멈추고 몇 초간 망설였다.이다은은 잠이 들지 않았다.그녀는 남우영의 발소리를 들었지만 문을 닫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막 이상하게 여기던 차에 갑자기 남자의 향긋한 체향이 코끝을 통해 물씬 풍겨 오더니 이내 얇은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갑작스러운 남자의 스킨십에 이다은은 놀라서 멍해졌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가슴에는 천둥번개가 치는 것처럼 두근거렸다.남우영이... 그녀에게 키스했다.아니, 그녀에게 몰래 키스를 했다.남자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조용히 방을 나가 문을 닫았다.순간 이다은은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홱 일어나 벌렁거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문의 위치를 보고 또 자신의 이마를 만졌다.
절대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일자리 구하는 일을 생각하고 있었어요.”“그거라면 너무 서두르지 말아요.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내게 말하고요. 내가 친구가 많아서 도움이 될 거예요.”이다은은 자존심 때문에 얼른 거절했다.“신세 지고 싶지 않아요. 나 혼자 해결할 수 있어요.”“내가 당신 남편인데 신세라니요?”“그 뜻이 아니라, 나 곧 취직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그래요.”“그럼 당신은 왜 안 잤는데요?”“회사 일 생각하고 있었어요.”“그만 생각하고 얼른 자요.”이다은은 눈을 깜빡이며 어두운 빛 속에 그녀와 함께 누워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조명 없이 그림자만 보였지만 여전히 너무 멋있었다.“그래요. 잘 자요.”“잘 자요.”남우영은 눈을 감았고 호흡이 점차 균일해졌지만 이다은은 여전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녀는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또 생각했다.두 사람은 이미 결혼한 지 며칠이 지났고 잠자리를 같이했는데 남우영은 그녀에게 일말의 충동도 없을까?매일 서로를 손님 대하듯 존경하며 예의를 갖추니 이 결혼이 진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남자들은 여자를 사랑하지 않아도, 잘 모르는 여자를 만나도 몸매와 얼굴만 예쁘면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했는데 왜 그녀의 남편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걸까?‘설마 그쪽으로 문제가 있나?’이다은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잠에 빠졌다.이튿날 아침.남우영이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뭔가가 그의 아랫배를 눌렀다. 그곳은 아침의 생리적인 반응으로 인해 팽창되어 있었는데 무게를 받으니 고통이 엄습해왔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음!”그는 무거운 소리를 내며 재빨리 자신의 아랫배를 누르고 있는 무게를 잡았다.그러나 이다은이 손을 뻗어 자신의 몸을 만지려 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어리둥절했다.이다은은 아주 난처해하며 급히 그의 몸에 일어나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사과했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내 휴대폰을 가지려다가 실수로 당신을 짓눌렀어요.”
“혹시 그 여자를 만난 적 있으세요?”“본인은 만난 적이 없고 모두 부모님이 나서서 일을 해결했네.”남우영은 순간 깨달았다.“괜찮아요 아버님, 일찍 쉬세요.”“그래. 자네도 어서 쉬게.”이적은 방으로 돌아갔고 남우영은 소파에 쓰러져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욕실에서 나온 이다은은 남우영이 소파에 기대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그가 잠이 든 줄 알고 걸어가서 허리를 굽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남우 씨, 여기서 자면 안 돼요. 당신...”남우영은 눈을 번쩍 떴다.남자의 그윽하고 예쁜 눈을 본 이다은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그윽한 시선에는 뜨거운 빛을 띠고 있었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이다은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여기서 자면 감기 걸려요. 얼른 씻고 방에 들어가서 자요.”“다은 씨.”“네?”“후회해요?”“뭘요?”“나와 초고속으로 결혼한 거.”이다은은 씁쓸하게 웃더니 자책감에 말했다.“그 말은 내가 당신에게 물어야죠. 당신처럼 좋은 남편을 얻었는데 내가 왜 후회해요? 그러는 당신은요? 우리 가족 형편도 봤고 나도 이렇게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걸 알고 후회해요?”남우영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문질렀다.“아니요.”이다은은 남자가 손을 잡자 심장이 벌렁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고 감히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가서 씻어요. 내가 잠옷 가져다줄까요?”남우영은 움찔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는 이다은의 손을 놓았다.이다은이 침실로 들어가자 그는 욕실로 들어갔다.방에 돌아온 이다은은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고 심호흡을 하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이다은, 너 참 못났다. 그냥 손잡은 것뿐인데 이렇게 긴장해? 정말 창피하네.”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남우영의 잠옷을 챙기려고 옷장을 열었다.서랍을 열어 팬티를 가지려고 할 때, 또 참지 못하고 자세히 보았다.‘뚱뚱하지 않은데 팬티 사이즈가 왜 이렇게 크지?’이다은은
이다은은 자신이 ‘남우’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손을 잡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어딘가 모르게 어색했다. 결국,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듯 빼버렸다.그녀의 반응은 남우영에게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남우영은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손을 거두어 자기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시선을 돌렸다.이다은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고 머릿속에서 복잡한 감정을 정리하려 애썼지만,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집에 도착하자, 이다은이 먼저 앞장서서 계단을 올랐다. 두 사람은 말없이 8층까지 발걸음을 옮겼다.집에 들어서자마자 이다은은 부모님께 간단히 인사를 드린 뒤, 와인을 한쪽 구석에 두고 방으로 들어갔다.남우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멍하니 그녀의 움직임을 바라봤다.이다은은 방과 거실을 들락날락하다가 이내 욕실로 들어갔다....잠시 후, 이적이 잠옷 차림으로 방에서 나왔다.“아버님.”남우영이 몸을 바로 세우며 공손히 인사하자, 이적이 그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오늘 늦게 들어왔네?”“네. 고객 접대가 있어서요. 다은 씨도 동창 모임이 있어서 조금 늦었습니다.”이적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밥은 먹었겠지만, 그래도 남은 반찬에 밥이라도 좀 먹을래?”남우영은 서둘러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괜찮습니다. 아버님, 저희 이미 다 먹고 왔습니다.”이적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럼 씻고 얼른 쉬어. 나도 자러 들어갈게.”이적이 막 일어서려는 순간, 남우영이 그를 붙잡았다.“아버님, 잠시만요. 물어볼 게 있습니다.”이적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지? 말해봐.”남우영은 욕실 쪽을 한번 쳐다보며 이다은이 아직 나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다은 씨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왜 일반대학교에 가지 못하고 전문대로 갔는지 여쭤봐도 될까요?”이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말을 멈췄다.“다은이가 그 얘길 했구나.”남
“남우 씨, 어느 부동산에서 일하세요?”한 동창이 궁금한 듯 묻자, 남우영은 미소를 지으며 단호히 대답했다.“퇴근 후엔 업무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어색해졌다.‘중개사가 연락처를 안 준다고?’‘퇴근 후엔 공적인 얘기를 안 한다고?’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이다은조차 남우영의 태도가 평소와 달라 살짝 의아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남편 지금 자존심 세우는 건가? 이런 사람들한테 굳이 잘 보이려고 굽신댈 필요 없지... 역시 대단해!’남우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다은의 손을 잡고 말했다.“집이 좀 멀어서요. 다은 씨를 먼저 집에 데려다줘야 할 것 같네요.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그는 말을 마치고 이다은의 가방을 들어 어깨에 걸치고 그녀의 손을 이끌며 방을 나섰고, 나가면서 호텔 매니저가 준비한 와인도 잊지 않고 챙겼다.남우영과 이다은이 방을 나가자, 몇몇 동창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몰래 따라 나갔다.‘진짜 저 와인 가져가나 보자.’그들은 남우영이 1억 4천만 원짜리 와인을 들고 호텔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안진호는 남우영이 말한 반값 세일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어 계산서를 받아서 들었다. 예상대로 호텔 측은 남우영의 말 한마디로 정확히 50% 할인된 금액을 청구했다.안진호는 충격을 금치 못하며 중얼거렸다.“대체 저 사람 뭐 하는 사람이야? 이 호텔이 그 사람 말 한마디에 반값을 해주다니... 말도 안 돼!”다른 동창들도 궁금한 얼굴로 소이현에게 물었다.“이현아, 너랑 다은이는 제일 친했잖아? 남편이 뭐 하는 사람인지 알아?”소이현은 난감한 표정으로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내가 뭘 알겠어... 그냥 시골 출신에 차도 없고 집도 없고... 아버지는 희귀 난치암 말기라고 들었어.”그 말을 들은 동창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침묵했다.호텔을 나와 대로변으로 걸어가던 두 사람 앞에 검은색 고급 세단이 멈췄다. 운전기사가 내려 차 문을 열며 공손히 말했다.
“전에 고객이랑 마시다 남은 건데 다 못 마셔서 호텔 셀러에 맡겼었어요.”남우영은 앞에 놓인 와인을 들어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죄송하지만 이런 와인은 입에 댈 수조차 없어서요...”안진호가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400만 원짜리 와인이 입맛에 안 맞는다고? 막걸리만 마셔서 그런 거 아니야?”그의 비웃음에 몇몇 사람들이 몰래 웃었다. 모두가 남우영이 곧 창피를 당할 거라 기대하며 분위기를 지켜보았다.그때 호텔 매니저가 작은 카트를 끌고 들어왔고 모두의 시선이 매니저와 그가 들고 있는 와인으로 쏠렸다.매니저는 와인을 조심스럽게 꺼내 남우영 앞에 놓으며 공손히 물었다.“대표님, 지금 오픈할까요?”남우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매니저는 숙련된 손길로 와인 오프너를 집어 들었다. 코르크가 완전히 빠지는 순간, 특유의 깊은 소리가 방 안에 은은하게 울렸다.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와인이 완벽히 디캔팅 된 순간, 매니저는 잔에 한 모금 따라 살짝 스월링하며 와인의 향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잔을 내려놓았다.와인을 여는 매니저의 움직임이 마치 의식처럼 느껴졌고 방 안의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인 채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이다은은 술을 마시지 않아 와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방 안 사람들의 과장된 표정을 보며 무언가 대단히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꼈다.그녀는 남우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이 와인, 얼마짜린데요?”남우영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비싸진 않아요. 하지만 돈 있다고 아무나 살 수 있는 건 아니라서 사람들이 놀라는 거예요.”이다은은 그의 말을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매니저는 와인 잔에 소량의 와인을 따라 남우영에게 건넸다. 남우영은 잔을 받아 들고 이다은에게 건넸다.“마셔볼래요?”이다은은 급하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저는 술을 못 마셔서요.”남우영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방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마시고 싶은 사람 있으면 매니저님께 한 잔씩 부탁드리세요.”안진호
남우영의 선천적인 우아함과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그를 평범한 영업사원으로 연상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방 안의 사람들은 그를 신기하게 쳐다보았고 이다은은 남우영의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그냥 가요.”그녀는 남우영이 이 무례한 동창들 앞에서 조롱당하고 웃음거리가 되는 모습을 도저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남우영은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듯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의자 하나를 당겼다.“앉아요.”이다은이 앉자 남우영도 자연스럽게 그녀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방 안의 모든 시선이 다시 남우영에게 고정되었다.이때, 한 여동창이 농담을 던졌다.“다은아, 네 남편 진짜 멋있다! 너 정말 복 받았네!”이다은은 어색하게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동창이 거들었다.“그러니까 네 남편이 정하늘보다 훨씬 잘생겼잖아.”소이현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얼굴이 잘생기면 뭐 해. 겨우 부동산에서 원룸이나 보여주는 영업사원이라는데. 우리 남편이랑 비교하는 건 좀 그렇지...”그 말을 듣고 남자 동창들이 한껏 들떠 맞장구쳤다.“맞아, 남자는 잘생긴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능력, 재력, 그리고... 전투력이 있어야지.”‘전투력’이라는 말에 남자 동창 몇몇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무아지경에 빠졌고, 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그 유치한 농담의 속뜻을 이해하자 연이어 웃음소리가 퍼졌다.그러나 이다은과 남우영은 미동도 없이 웃지 않았다.분위기가 점점 과열되자, 이다은에게 호감을 보였던 한 남자 동창이 남우영을 향해 말을 건넸다.“남우 씨, 농담이에요.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우리가 당신 전투력이 없다는 소린 아니었으니까요. 뭐, 재력은 ‘충분히’ 보여주셨고... 전투력은... 그건 우리 다은이가 잘 알겠죠?”그의 말끝에 방 안의 웃음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그녀는 남우영의 손을 꽉 붙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남우영은 그녀의 손을 반대
“십만 원? 나도 십만 원 낼게!”누군가의 말이 시작점이 되어 동창들은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고 이다은에게 송금하려는 제스처를 취했다.이다은은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냥 다들 송금하지 마. 여기 음식값은 너희들의 축의금으로 퉁 칠게. 부족한 건 이 모임 주최한 사람이 알아서 채우고... 난 너무 가난해서 단돈 천 원도 못 내겠어.”그 말을 남긴 이다은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모임장을 걸어 나갔다.남아 있던 동창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고, 그중 두 명의 여학생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이다은을 따라나섰다.그들은 긴 호텔 로비를 지나 끝까지 걸어가는 이다은을 붙잡으며 다급히 말했다.“다은아, 아직 모임 안 끝났는데 이렇게 나가는 건 좀 그렇잖아.”다른 한 명은 억울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소이현이 일부러 그런 거잖아. 오늘 모임 처음부터 끝까지 널 곤란하게 만들고 말로 계속 찔렀잖아. 그냥 참지 말고 맞서야지. 이렇게 화내고 나가면 네가 지는 거 아니야?”“맞아. 걔네가 널 웃음거리로 만들게 두면 안 돼.”이다은은 그들을 돌아보며 씁쓸하게 웃었다.“너희 걱정 고마워. 그런데 내가 이런 자리,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사실은 나...”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은 씨?”이다은과 두 여동창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이다은은 숨이 멎을 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걸음을 멈췄다.그녀를 불러세운 사람은 바로 남우영이었다.그는 세련된 정장을 입고 우아하고 당당한 걸음으로 다른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같은 정장을 입은 남성들이 뒤따르고 있었고, 그중에는 TV에서 종종 보던 유명 재계 인사들의 얼굴도 눈에 띄었다.이다은은 속으로 생각했다.‘접대 자리인가? 고객 접대 때문에 온 건가? 그런데 이런 5성급 호텔까지 오는 건 좀 과하지 않나?’남우영은 뒤를 돌아 동행한 사람들에게 말했다.“여러분은 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