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하준이 몇 초간 뜸을 들이더니 심드렁하게 대답했다.“응.”정안은 고개를 푹 숙이고 품에 안고 있는 곰인형 털을 문지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계좌로 1억 2천만 원 보냈어요.”“응.”그가 너무 조용하고 담담해서 정안은 가슴이 턱턱 막혔다. 분명 연락도 안 하고 얼굴도 보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속으로는 모순되어 미칠 지경이었다.그가 너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안은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이만 끊을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상대방은 이미 전화를 끊었고 정안은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정안의 반대편에 앉은 지윤은 감자 칩을 먹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언니한테 뭐래요? 왜 갑자기 울어요?”정안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뺨의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안 울었어. 눈물샘이 예민해서 자꾸 눈물이 나오는 거 어떡해. 나도 통제가 안 돼.”“그럼 그 남자가 뭐라 했기에 눈물샘을 자극했는데요?”정안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억울한 듯 말했다.“아무 말도 안 했어. 그냥 응 두 마디밖에.”지윤은 어이가 없어 소리 내어 웃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참... 대단하네요. 악몽을 꿔도 울고, 너무 힘들어도 울고, 실험에 실패해도 울고, 운전 배우면서 코치에게 욕먹어도 울고, 배달음식이 너무 맛없어서 울고.”“그런데 이젠 상대방이 응 두 번 했다고 울기까지 해요? 언니 눈물샘 가서 수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정안은 심호흡하고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눈물을 흘리지 못하게 한 뒤 쓴웃음을 지었다.“그거 알아? 나 어릴 때 더 많이 울었어. 그리고 애교도 엄청 많고.”지윤은 감자 칩을 먹으며 대답했다.“그런 것 같았어요. 부잣집에서 태어나 응석받이로 자라며 어떤 좌절도 겪어보지 않았겠죠. 그러니 조금만 상처받아도 울기나 하지.”정안은 생각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나 어릴 때 하준 오빠한테 엄청나게 애교부렸어. 내가 애교만 부리면 오빤 내가 무슨 요구를 하든 다 들어줬
“그럼 어떡해요?”정안은 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지윤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백씨 저택에 가서 살자.”지윤은 황당했다.“네? 백씨 저택에 묵어요? 미쳤어요?”“그래야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가까이서 보호할 수 있어. 이 방법밖엔 없어.”지윤은 말없이 방으로 돌아가 짐을 꾸렸다.1시간 뒤.으리으리한 백씨 저택에서, 정안과 지윤은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고, 두 사람의 옆에는 캐리어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백씨네 도우미는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낯선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여은수는 두 사람의 캐리어를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조금 우습기도 했다.“우리 집이 뭔 수용소인 줄 아나? 감히 우리 집에서 살겠다고? 정말 웃기지도 않지. 대체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정안은 느릿느릿 설명했다.“할머니, 저 지금 이혼해서 갈 데가 없어요. 그래서 여기서 며칠만 묵고 싶어요.”여은수는 코웃음을 치며 가소롭기 짝이 없었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손님 내보내게.”정안은 지윤과 몸을 돌려 떠나려 하면서 중얼거렸다.“알겠어요. 그럼 할 수 없이 하준 씨 집에 다시 돌아가야죠 뭐.”여은수가 긴장하며 소리쳤다.“잠깐.”정안과 지우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웃음을 머금고 돌아서서 여은수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몇 초 동안 망설이더니 말했다.“우리 가문에는 다른 별장도 많으니 아무거나 고르게. 가문 소유의 호텔에 묵어도 되고.”정안은 입술을 오므리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전 금원과 여기에만 묵고 싶어요. 할머니께서 여기 못 묵게 하시니 어쩔 수 없이 금원으로 가야겠네요.”여은수는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어이없는 표정으로 정안을 노려보았다.“자네 정말 뻔뻔하군!”정안은 못 들은 척 하고 지윤에게 말했다.“지윤아, 하준 씨가 뭐라고 했었지?”지윤은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도련님께서는 언니와 재혼하고 싶다고 하셨죠.”“그래, 사실 불가능할 것도 없지.
백하린은 어리둥절했다.“내가 네 남편을 빼앗았다고?”정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울먹이는 척했다.“그래, 네가 내 남편 뺏어갔잖아. 하준 씨 나랑 이혼할 때 계속 너 사랑한다고 했어.”백하린은 깜짝 놀라며 눈살을 찌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눈빛으로 백인호를 바라보았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애써 미소를 짓더니 안경을 고쳐잡았다.“여기 얼마나 있을 생각이야?”“내가 이혼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그래, 그럼 마음 편히 있어.”백하린은 불쾌해서 물었다.“삼촌, 미쳤어요? 분명 여기 들어온 목적이 따로 있다고요!”백인호는 냉랭한 눈빛으로 백하린을 노려보았는데, 그 살기 가득 찬 눈빛에 그녀는 머리를 움츠리고 감히 끽소리도 못했다.백인호는 지윤을 가리키며 물었다.“이쪽은 누구?”정안은 지윤의 손을 잡고 소개했다.“내 친구 지윤이에요. 백수에 집도 없는 불쌍한 가난뱅이죠.”지윤은 정안의 단어 표현에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소개를 마친 정안은 지윤을 데리고 거실을 나갔다.백하린 옆을 지날 때 정안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와 어깨를 등진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백하린, 앞으로 잘 부탁해.”백하린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독설을 내뱉었다. “서다인, 너 이거 지금 양이 호랑이 굴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어. 왜 굳이 자기 발로 지옥문에 들어서는 거지?”정안은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누가 양이고 누가 호랑이인지는 지켜보면 알겠지.”말을 마친 그녀는 여유롭게 위층으로 올라갔다.백하린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몸을 돌려 정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크게 당황했다.분명 눈앞의 여자는 서다인이었다. 생김새도 목소리도 여전히 그녀인데 뭔가 달라진 것 같았다.눈빛이나 분위기에서 나오는 아주 미묘한 차이였다. 지금의 그녀는 자신만만하고 여유롭게 또 세상만사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대처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정안과 지윤이 위층으로 올라가 방으로 돌아갔고 백하린이 백인호 앞에 다가가 쏘아붙였다.“왜 허락했어? 저
정안이 베개 밑에 놓아둔 자체 제작 펜타총으로 그림자를 겨누려 했을 때 갑자기 남하준의 목소리가 들렸고, 순간 그녀는 급하게 총을 숨겼다.그리고 불안했던 마음도 순식간에 가라앉았다.남하준의 목소리가 맞았다.그런데 그의 몸이 왜 이렇게 뜨거울까?그의 숨결조차 피부를 데일 것 같았다.“음!”정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그의 큰 손이 입을 가려서 소리를 낼 수 없었다.남하준은 방금 무언가가 그의 허리에 닿은 것이 느껴졌지만 그가 말을 한 후 그 물건은 다시 사라졌다.그는 정안의 손목을 잡고 위로 끌어내렸고, 휘영청 밝은 달빛의 희미한 빛 속에서 그녀의 손에 초호형 펜이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이깟 펜으로 널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아?”정안은 긴장해서 무기를 감추려고 손을 뺐다.이것은 펜이 아니라, 그녀가 3년 전에 직접 설계한 특수 제작 마이크로 권총으로, 위력이 강하고 은폐성도 높았다.“음음!”정안이 또 몸부림쳤고 남자는 그녀의 입을 천천히 풀었다.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화를 냈다. “오빠야말로 미친 거 아니에요? 왜 갑자기 쳐들어와요? 하마터면...”‘내 손에 죽을 뻔했다고요.’정안은 뒷말을 꾹 참고 그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불 밑에 총을 숨겼다.남자는 차갑게 웃었다.“하마터면 뭐?”“여긴 왜 왔어요?”정안이 말머리를 돌렸고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어보았다.“몸은 왜 이렇게 뜨거워요?”그는 급히 머리를 돌리더니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 내리고는 엄숙하게 말했다.“당장 여기 떠나.”“어디로 들어왔어요?”정안은 남자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베란다 유리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나 분명 창문 잠갔는데 저게 어떻게 열렸지?”“저런 간단한 자물쇠가 네 안전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네.”정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으로는 누군가 그녀를 해치려 한다면 아무리 잠가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가자.”남하준이 그녀를 끌고 베란다로 향하자 정안이 그 손을 뿌리쳤다.“나
그는 여전히 준수하고 잘생겼지만 안색이 나빠 보이고 입술이 약간 하얗고 건조했다.“잠깐 기다려봐요. 나 옷 갈아입고 올게요.”정안은 부랴부랴 옷장으로 가서 옷을 꺼내 화장실로 들어갔다.남하준은 그녀가 뭘 하려는 지 알 수 없었고 그저 그녀가 자신과 여기를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잠시 후 정안은 옷을 갈아입고 나와 작은 가방을 들고 개인 소지품을 챙겨 남하준 곁으로 다가갔다. “가요.”남하준은 좀 놀라웠다.“나랑 같이 떠나려고?”“아니요, 난 떠나지 않아요. 오빠 데리고 병원에 가려고요.”정안은 그의 팔을 잡고 문으로 끌고 갔다. “이 시간에 모두 잠들었을 테니 조용히 대문으로 나가요.”남하준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 천천히 손을 빼며 냉담하게 말했다.“필요 없어. 나 괜찮아.”“지금 열이 펄펄 나요!”정안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넌 신경 쓰지 마.”남자는 거리감 느껴지는 얼굴로 덤덤하게 말했다.정안은 초췌한 그의 얼굴을 보며 안쓰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고 심장이 아려왔다.그녀에게 신경 쓰지 말라니?이렇게 아픈데도 병원에 가지 않고 달려와 그녀의 일에 참견하다니. 신경 쓰지 말라는 남자의 말이 단번에 그녀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그녀는 그렁그렁한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나더러 신경 쓰지 말라면서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내 일에 참견하는 건데요?”그에게 무슨 자격이 있을까?이 말은 남하준의 가슴을 칼로 이리저리 긁어대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이 아프고 쓰라렸다.그는 두 손으로 주먹을 쥐고 천천히 천장을 올려다보며 숨을 몰아쉬고 눈시울을 붉혔다.그는 심호흡을 하며 나지막하고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완아, 말 좀 들어.”정안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입술을 오므리고 어색한 미소를 짓고 촉촉한 눈동자로 말했다.“오빠, 기억을 되찾은 나에 대해 정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남하준은 붉게 물든 그윽한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했다.정안의 눈빛은 강인하고 자신만만했으며 보이지 않는 힘이 묻어났다.“우리 10년 만에 만났어요. 오빤
지윤에게 말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그녀는 번호를 바꿔 류청의 번호를 눌렀다.벨이 울리고 그녀는 스피커폰으로 돌린 다음 전화를 책상 위에 올려 놓고 휴지를 가져다 남하준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줬다.“여보세요?”류청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고 잠에서 덜 깬 듯 흐리멍덩한 말투였다.정안이 긴장하며 말했다.“류청 씨, 나 다인이에요.”“발신자 표시 떠요. 말씀하세요. 새벽 3시에 무슨 일이시죠?”“하준 오빠 혹시 요즘 아파요?”“네. 이미 며칠 동안 몸이 안 좋으셨는데 병원에도 안 가고 약도 안 드시고 그저 버티면서 일에만 매진하고 계세요. 저랑 정호가 오랫동안 설득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어요.”“이 사람 지금 나랑 있는데 기절했어요.”정안은 남하준 옆에 다급하게 무릎을 꿇고 손을 뻗어 그의 뜨거운 이마를 만졌다.“이제 어떡하죠?”긴장한 류청은 목소리가 대뜸 우렁차졌다.“도련님께서 백씨 저택에 가셨다고요?”“네.”정안은 기절해 자는 남자의 잘생긴 얼굴이 초췌해진 것을 보고 가슴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류청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도련님은 이렇게 충동적인 분이 아니신데 왜 다인 씨 일에만 이성을 잃으시는지 모르겠네요.”정안은 자괴감이 들었다.“미안해요. 이제 어떡하면 좋죠? 제가 집으로 의사를 부를까요? 아니면 와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어요?”“안돼요. 절대 백씨 가문 사람들이 다인 씨를 찾으러 갔다는 걸 알면 안 돼요. 만약 알게 되면 우리가 그 집안에 심은 스파이가 드러날 거예요.”“네, 알겠어요.”정안이 시간을 보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었다. 지금 정신을 잃은 남하준을 끌고 밖으로 나가는 건 확실히 어려웠다.“집에 약 있어요?”류청이 물었다.“네.”“일단 해열제랑 감기약 같이 먹이고 푹 쉬게 하세요. 그럼 도련님께서 깨어나면 그 집에서 쉽게 나올 수 있을 거예요.”“알겠어요.”정안은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방을 나와 거실로 살금살금 내려가서 기억을 더듬어 약상자가 놓인 캐비닛에서 감
“제발... 제발 꼭 나아야 해요.”정안은 울먹이며 중얼거렸고 아랫입술을 깨물자 짭짤한 눈물이 그녀의 입가로 흘러내려 턱에 떨어졌다.그녀는 숨을 돌리고 두 손으로 눈물을 닦고 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로 달려가 젖은 수건을 꺼내 그의 땀을 닦아 주었다.약을 먹어서인지, 열이 있어서인지 남하준은 끊임없이 땀을 흘렸고 정안은 몇 분 간격으로 그의 이마를 짚어보고 땀을 닦아주었다.30분 후, 그의 옷은 흠뻑 젖었고 체온도 점차 내려갔다.정안은 휴대폰을 들고 방안을 서성거리며 류청의 번호를 보고 또 벽시계를 확인했다.이미 아침 5시였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지만 집안 도우미는 이미 깨어나 일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니 지금 류청을 부르면 들키기 쉬웠다.고심 끝에 정안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큰 침대로 올라가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이불을 들추고는 긴장한 듯 손을 뻗어 그의 옷을 풀었다.“미안해요. 오빠 옷이 다 젖어서 내가 벗겨줄게요. 아니면 이러다 추위 타요.”“나 다른 뜻은 전혀 없으니까 오해하진 말고요.”정안은 혼잣말로 긴장을 풀고 침을 삼키고는 입술을 오므리며 수줍음을 억제하려 했다.단추가 풀리자 남자의 다부진 가슴이 드러났다.건강하고 매끄러운 피부, 가슴 근육과 복근의 완벽한 라인, 한 치의 근육까지 매혹적인 몸매는 그야말로 여성들의 로망이었다.정안은 자신이 변태적인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본능적으로 그의 몸매에 끌렸다.예전에도 그의 가슴 근육을 본 적 있지만 늘 볼 때마다 부끄러워했다.그녀는 많은 힘을 들여서야 남하준의 상의를 벗겼고 너무 힘든 나머지 숨을 헐떡이고 땀을 뻘뻘 흘렸다.정안은 잠시 숨을 돌린 후 그의 바지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고, 왠지 모르게 뜨거운 눈빛과 함께 뺨과 귀밑까지 뜨거워지며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바지도 젖었는데 벗기는 게 좋지 않을까?“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 사람은 환자야. 합방도 아니고 그저 아픈 사람 돌보고 있으면서 왜 이상한 생각 하냐고?”정안은 자신의 뜨거운 얼굴을 들고
“나...”정안은 너무 무안해서 얼어버렸고 목구멍에서 소리가 났지만 부끄러워서 말을 하지 못했다.그러나 남하준은 얼떨떨한 채 제대로 정신이 들지 못했고 무거운 눈꺼풀을 몇 초 만에 다시 닫았다.그는 허리에 살짝 힘을 주고 엉덩이를 들었고 바지는 순조롭게 정안의 허벅지로 당겨졌다.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위로 내밀었다. “오빠... 깼어요?”남자는 움직이지 않고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정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긴 바지를 벗기고 급히 물수건을 가져다 그의 몸을 닦아 주었다.그녀는 온도가 완전히 내려갈 때까지 남자를 서너 번 닦아주었다.한 시간쯤 지났을 때 정안은 또 입으로 그에게 감기약을 먹였다.그렇게 밤새 남하준을 돌보느라 한숨도 자지 못하다가 날이 밝자 그녀도 피곤해서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우르릉!천둥소리에 남하준이 깨어났다.그는 무거운 눈을 천천히 뜨고 어두운 방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베란다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밖에는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벽시계는 지금 10시 30분을 나타내고 있었고, 그가 방을 한 번 훑어보고는 기절하기 전의 기억이 떠올라서야 지금 백씨 저택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막 일어나 앉으려는데 복부가 유난히 무겁고 물건에 눌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어깨를 치켜들고 고개를 숙여 복부를 바라보니 작고 가냘픈 몸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폭포수처럼 까만 긴 머리가 풀어져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완자?그는 온몸에 힘이 없고, 목이 아프고, 입이 마르고, 침을 삼키는 것조차 따끔거렸다.실외에는 폭우가 쏟아져 어두컴컴했다.남하준은 몸이 이상해서 손을 뻗어 이불 속을 더듬어 보았다.그는 긴장해서 위아래를 더듬어 보고 나서야, 자신이 발가벗겨져 있고 정확히는 팬티 한 장만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어쩔 수 없이 눈살을 찌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고 귀는 자신도 모르게 붉어졌다.똑똑!“언니, 깼어요?”지윤의 목소리가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왔고
이다은은 컴퓨터를 켜고 쇼핑몰 관리자 페이지에 로그인했지만, 거래 완료된 주문은 하나도 없고 답장하지 못한 문의 메시지만 가득한 화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답답한 마음으로 하나씩 정성껏 답장을 보냈지만, 새로운 손님은커녕 추가 메시지도 오지 않는 적막한 화면에 멍하니 시선을 두다가 결국 다른 화면으로 넘어갔다.새로 띄운 화면에는 빽빽한 코드와 무인 로켓의 데이터 구조가 가득 떠 있었다.이다은은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이마를 짚으며 깊은 고민에 빠진 끝에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두 시간 동안 코드를 작성하고 저녁을 먹은 뒤에도 세 시간이나 작업에 매달렸다.밤늦게 작업을 마치고 파일을 보냈지만, 그녀가 손에 쥔 돈은 고작 60만 원에 불과했다.‘학력이 없으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값싼 노동자로만 보이는구나...’그녀는 가끔 이 모든 걸 버리고 싶을 만큼 깊은 절망에 빠지곤 했다. 컴퓨터를 끄고 스트레칭을 하며 욕실로 들어가면서도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한때 그녀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운명이 바뀔 거라 믿었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M국 항공우주대학교 합격 통지서가 도용되면서 그녀는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그 일은 그녀의 꿈과 미래를 부숴버렸고 지금까지 체념하며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다음 날 아침, 약속대로 남우영과 두 번째 만남을 가진 이다은은 드디어 손에 혼인관계증명서를 쥐게 되었다.남우영이라는 잘생긴 남편이 생겼지만 그녀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녀에게 결혼은 그저 누구와 하든 큰 차이가 없는 일이었다.‘결혼이란 건 결국 평생 팀플할 팀원을 고르는 거지. 게다가 부모님 잔소리에서도 해방될 수 있게 됐으니, 이보다 완벽한 일거양득이 어딨어?’구청을 나서며 혼인관계증명서를 내려다보던 이다은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남우 씨, 근데 왜 이름이 남우영으로 되어있어요? 남우 아니었어요?”남우영은 순간 표정이 굳더니 억지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주민등록증엔 남우영으로 되어있어요. 어릴 때부터 가족들이 남우라고 불
이다은은 남우영이 타고 온 차를 보더니 그 자리에 멍하니 얼어붙었다. 그렇게 조수석 문 앞에서 한참 머뭇거리는 그녀를 본 남우영이 다가와 차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다은 씨, 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이다은은 차를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몇억은 하는 차 아닌가요? 잘못 긁거나 고장 내면 저희 둘 다 감당 못 해요.”남우영은 잠시 그녀를 보며 생각하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고 타요. 제가 조심해서 안전운전 할게요.”이다은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차에 올랐다.차가 도로를 달리자, 이다은은 자기 집 주소를 알려주었고, 한 시간이 지나 낡고 오래된 구도심의 허름한 건물 앞에 차가 멈췄다.이다은은 차에서 내린 뒤 남우영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구청에서 봬요.”남우영도 창문을 내려 손을 흔들었지만, 그녀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낡고 허름한 건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며 답답한 마음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이다은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의 계단을 헉헉거리며 올라갔다. 8층 꼭대기 층에 있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캐릭터 탈을 구석에 내려놓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크게 숨을 내쉬었다.“하아... 오늘도 정말 너무 많이 뛰어다녔네.”그때 옥상에서 세탁물을 한가득 담은 빨래 바구니를 들고 다리를 저는 그녀의 아버지, 이적이 내려왔다.“다은아, 이제 퇴근해서 온 거야?”이다은은 아버지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달려가 빨래 바구니를 받아들며 말했다.“아빠, 제가 할게요.”이적은 바구니를 건네고 천천히 거실로 내려와 자리에 앉았다.이다은이 빨래를 하나씩 꺼내 정성스럽게 개기 시작하자, 이적도 옆에 앉아 빨래를 개며 무심히 물었다.“다은아, 요즘엔 선 봤던 남자 안 만났어?”이다은은 빨래를 개던 손을 멈추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빠, 저 결혼하려고요.”이적은
이다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기쁨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그동안 선을 보면서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집안 형편이 가난하다느니, 학력이 부족하다느니, 성격이 유치하다느니 하며 그녀의 단점을 들춰내기 바빴다.하지만 이번엔 달랐다.‘그것도 이렇게 잘생기고 멋진 남자가 인정해 주다니... 집이 가난한 건 서로 똑같으니까 오히려 잘된 거야. 적어도 누가 누구를 나무랄 일은 없으니까.’더군다나 이다은의 이모는 이미 그의 고향으로 시집가 그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까탈스러운 이모가 그를 성실하고 착하며 남편감으로 손색이 없는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니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이다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목소리가 낮아졌다.“저도 남우 씨가 맘에 들어요. 우리 그냥 내일 혼인 신고하러 가요.”남우영은 눈이 동그래지며 놀라 되물었다.“혼인 신고요? 오늘 선보고 내일 바로 혼인 신고요? 그래도 시간을 두고 서로 좀 더 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이다은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차피 부부로 살아가는 건 현실적인 문제잖아요. 적당히 맞춰 가면서 살다 보면 되는 거 아닌가요?”남우영은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하다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살짝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그건 그렇지만...”이다은은 남우영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고 싱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물론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고 싶으시다면 저도 받아들일게요. 다만... 이모에게서 남우 씨 아버님이 암 투병 중이셨다가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남우 씨의 결혼 문제로 걱정을 많이 하신다면서요? 그래서 저는 남우 씨가 저보다 더 급하신 줄 알았거든요.”남우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우리 혼인 신고합시다.”이다은은 엄청나게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오래된 숙제를 끝낸 것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필요한 서류 챙겨서 내일 아침 일찍 구청 앞에서 만나요.”남우영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이다은은 여전히 개구리 캐릭터 탈을 품에 안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남자를 발견했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남우영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다은은 그를 단순히 맞선남 ‘남우 씨’로만 알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을 애타게 찾는 듯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눈이 마주친 순간 성큼성큼 다가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물었다.“작은 개구리 탈 하나 제작하는 데 도대체 얼마나 드는데요?”“만... 만원이요.”이다은이 대답하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그러면 고작 만원 때문에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거예요?”다소 황당하다는 어투가 담긴 질문에 이다은의 표정이 굳어졌고 목소리에는 살짝 짜증이 묻어났다.“마치 고작 몇 푼 때문에 생고생이라도 했다는 식으로 얘기하시네요?”“돈 문제가 아니라면... 그럼 뭐때문에 이렇게 고생하셨단 거죠?”남자가 당황한 듯 다시 묻자, 이다은은 코웃음치며 속으로 생각했다.‘역시 잘생긴 얼굴이 다는 아니라니까!’조금 언짢았지만 이다은은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고작 만원이 아니에요. 오천 원은 저에게 이틀 치 밥값이기도 하고요. 새벽부터 일어나 두 시간 걸려 도매시장까지 가서 어렵게 가져온 개구리 캐릭터들이에요. 제가 하나하나 기대를 담아 준비한 거라고요. 심지어 단속 공무원들 피해 가며 골목에서 한 시간이나 도망쳤는데 그걸 훔쳐 간 사람이 결국 ‘할머니의 모습’을 한 도둑이었다는 거죠. 제가 그걸 되찾으려고 한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세요?”남우영은 이다은의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개구리 캐릭터 탈을 내려놓고 자기 지갑에서 현금을 몽땅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 정도면 오늘 손해 본 건 다 메꿀 수 있겠죠?”그는 이다은이 더 이상 속상해하지 않길 바랐다. 이런 일로 괜히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피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오늘 소개팅을 잘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이다은은 그의 손에 들린 현금다발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남우영을
안성의 6월은 날씨가 무더웠다.뜨거운 태양 아래, 거리에 행인이 거의 없었다.왕개구리 인형 옷을 입은 한 여자가 커피숍 앞으로 다급하게 다가왔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수십 개의 개구리 ‘자식’들을 구석에 놓고 무거운 개구리‘머리'를 벗고는 땀에 젖은 예쁜 얼굴을 드러냈다. 간판을 올려다보고 큰 눈을 깜빡이며 다급하게 말했다.“아마 여기가 맞을 거야!”개구리 머리를 안고 카페에 들어가 두리번거렸는데 젊은 남자는 한 명뿐이었다.멀리서 보니 얼굴도 아주 잘생겼고 분위기도 우아했다.‘오늘 남자는 좀 괜찮은데? 어쩐지 엄마가 이번에 결혼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고 경고하더라니.’여자는 헐레벌떡 걸어 들어가 남자 앞에 앉은 후 매우 예의 바르게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제가 일 때문에 방금 도시 관리인에게 쫓기다가 길을 잃었어요. 반 시간이나 늦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소리를 들은 남우영은 고개를 들어 반대편에 앉아 있는 반인 반개구리를 보는 순간 멍해졌고 눈 밑에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놀라움이 언뜻 스쳤다.정장 차림의 남자는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며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약간의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그녀는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애써 웃으며 설명했다.“아.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저는...”남자가 덤덤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다은.”이다은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반응하고 말했다.“맞아요. 전 이다은이에요. 저희 이모가 말해줬나 보네요. 그래도 예의상 자기 소개를 더 자세히 해야겠어요.”남우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이다은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제 이모가 당신을 소개해줬어요. 저는 전문대 졸업에 올해 26살이고 프리랜서 창업자예요. 연애 경험 제로, 적금 제로, 나쁜 습관도 없고 취미도 없지만 꿈은 있어요.”남우영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물었다.“꿈이 뭐죠?”이다은은 개구리 손을 덥석 움켜쥐며 흥분해서 말했다.“제 꿈은 달을 여행하는 우주비행사가 되는
너무 비정상이었다.그때 남서연과 백건이 다가왔다.세 사람은 사사로운 일을 제쳐두고 백건과 남서연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그들은 덕담도 나누고 즐겁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흐름이 남우영에게 흘러갔다.“그러고 보니 우리 집안 애들은 전부 결혼했네. 이제 서연이까지 결혼했으니 우영이만 혼자야. 아내는 고사하고 여자친구도 없어.”“엄마, 내 위에 있는 사촌 형들 전부 서른이 넘었어요. 결혼하는 게 정상 아니에요?”“서연이는 너보다 어린 데도 이미 결혼했어!”남하준이 나서서 말렸다.“조금만 더 기다려. 서두르지 말고 서른이 넘으면 다시 말해. 안 되면 마흔에 해도 되고. 혹시 알아? 오십에 할 수도 있잖아. 아직 몇십 년 더 남았어.”남우영은 어두워진 얼굴로 덤덤하게 웃었다.“아빠는 위로를 참 잘해요.”백건은 정안과 남하준의 걱정을 이해하고 위로했다.“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우영이는 확실히 여자를 좋아해요. 얘가 어릴 때...”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우영이 갑자기 달려들어 한 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 어깨동무를 한 채 옆으로 질질 끌고 갔다.“삼촌, 내가 할 말이 있어요.”정안은 긴장하더니 흥분해서 앞으로 다가갔다.“어릴 때 뭐? 야! 가지 마. 똑바로 말하고 가!”남우영은 백건을 꼭 감싸고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엄마. 삼촌이 헛소리하는 거예요.”“분명 뭔가 있네.”남하준이 엷게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우영에게 비밀이 있네요.”남서연이 목소리를 낮추고 장난스레 중얼거렸다.“작은 아빠, 작은 엄마, 집에 가서 제가 우영 오빠의 비밀을 알아낼게요.”정안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좋아. 서연이 네가 돌아가서 꼭 물어봐.”남서연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성대한 결혼식은 이틀 동안 거행되었다.첫째 날의 주제는 결혼식이었고 둘째 날의 주제는 여행이었다.그리고 이 섬은 백건이 사들여 남서연에게 선물했고 스위트 아일랜드라
“그래. 더 이상 의미가 없지.”“두 사람 지금 무슨 얘기하는 거야? 난 왜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백건은 부드럽게 웃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넌 알 필요 없어. 가자. 부모님이랑 한잔해.”“그래요.”남서연은 주스를 챙기고 진우석을 향해 손을 흔들고는 서윤아와 백정우를 향해 걸어갔다.진우석은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참지 못하고 고개를 젖혀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서윤아는 휠체어에 앉아 적당한 우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백건과 남서연이 다가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아버님, 어머님, 저희가 한잔 올릴게요.”서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남서연을 보았다.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눈빛이지만 그런 사랑은 단순한 사랑이지 그녀를 향한 인정은 아니었다.그녀는 마음속 깊이 여전히 남서연의 능력이 그의 아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다만 그녀의 편견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그들 부부의 애정 전선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백정우는 크게 기뻐하며 격앙되어 잔을 들며 끊임없이 축하 메시지를 전달했다.요점은 아이를 빨리 낳으라는 것이었다.남서연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백건은 이미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입술을 오므리고 몰래 남서연을 바라보며 꿀을 먹은 듯 달콤했다.비밀을 지키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하지만, 그의 어린 아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했다.3개월 후, 태아가 안정되면 모두에게 공개하려 했다.그리고 그녀의 체질도 대단해서 임신 증상이 전혀 없었다. 평소처럼 먹고 자고 출근하고, 어지럽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고, 입덧도 하지 않았다.멀지 않은 곳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남하준, 정안 그리고 그들의 아들 남우영.언뜻 보면 그들은 또래처럼 생겼는데 절대 남우영이 성숙하게 생긴 것이 아니라 그의 부모가 선천적으로 미모를 타고났고 또 관리가 너무 잘 되어 젊어 보이는 것이었다.한 명은 늠름한 국방 장군이고, 한 명은 꽃 같은 미모의 화학자이고, 남우영
반년 후.남하준은 국경에서 안성으로 돌아왔다.정안과 반년 동안 떨어져 살면서 그는 그녀에게 언제 국경으로 돌아가냐고, 언제 실험실로 돌아가냐고 수없이 물었다. 비록 결혼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정안의 옆에 붙어 있으려 했다.그때마다 정안은 이렇게 대답했다.“난 안성에 남아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요.”무슨 중요한 일인지 정안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남하준은 마침내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정안은 묵은 원한과 새로운 원한을 함께 복수하고 있었다.유미의 남편은 횡령으로 고발돼 조사를 받다가 낙마했다.유미는 해외에서 남서연의 납치를 지시한 혐의와 직책 뇌물수수 혐의도 함께 추가되어 체포됐다.부부가 나란히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들어갔다.반년 동안 걷지도 못한 서윤아도 이 일을 알고 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승아를 집에 데려오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사건은 그들 가족의 기업에 누를 끼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또 한 가지 큰일이 있었다.바로 백건과 남서연의 성대한 결혼식이었다.갑부의 결혼식은 M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에서 진행되었다. 십여 대의 비행기가 몇 번이고 낭만적인 섬으로 향했다.하늘과 바다가 일색이 되어 단조롭던 해변이 낭만적인 꽃바다로 변하고, 땅에 꽃잎이 깔리고, 수천만 개의 현장 장식이 있고, 가장 호화로운 음식과 술이 있었다.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서연도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장을 보게 되었다. 공기조차 꽃향기로 변했고 시선이 닿는 곳마다 로맨틱함이 가득했다.남서연은 수억 원짜리 웨딩드레스에 수십억 원짜리 주얼리를 착용한 채 멋지게 차려입은 백건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카펫을 밟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결혼식 무대 중앙으로 다가갔다.하객석은 꽉 찼고 모두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남서연은 행복한 눈물을 흘리며 달콤한 미소로 하객석의 부모님과 큰아버지들, 큰어머니들, 그리고 그녀를 20년 넘게 애지중지한 사촌 형제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자신이 너무 행복하다고 느꼈다
“백정우, 방금 뭐라 그랬어? 내가 소란을 피워?”서윤아가 울부짖자 핸드폰 저쪽에서 통화를 뚝 끊어버렸다.서윤아는 자기 화를 이기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냅다 던져 박살 냈다.그래도 그녀의 마음은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아들과 남편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 같고, 심지어 자기 딸과 외손자까지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것에 크게 실망했다.백건과 남서연을 이어주려고 주변의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녀와 점점 멀어진다고 느꼈다.유승아는 바닥에 부서진 휴대전화 두 대를 주워들고 그녀 곁에 다가와 앉으며 부드럽게 달랬다.“너무 화내지 마세요. 그러다 몸 상해요. 건이 결혼 문제는 천천히 해결하세요.”“승아야,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서윤아가 긴장하며 묻자 유승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때 정안이 성큼성큼 병실로 들어오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했다.“이제 아무 방법도 쓸모 없어요.”병실 안의 두 사람은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정안은 우아하게 걸어 들어와 보온 상자를 손에 들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마세요. 건이는 이미 재산의 절반을 서연에게 주겠다고 공증을 끝냈어요. 이혼하면 가족 기업 전체가 흔들릴 거예요.”권력과 재산을 중시하는 서윤아는 고함을 질렀다.“누가 허락했어? 이 자식이 감히 반역을 저질러!”서윤아는 일어나지 못했지만 포악한 기세가 너무 강렬해 침대에서 벌벌 떨 정도였다.정안은 이제 그녀의 어머니를 걱정하지 않았다. 유일한 걱정은 유승아가 계속 파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도시락을 내려놓은 정안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유승아를 마주 보며 비꼬듯 말했다.“승아는 참 끈질긴 애구나. 건이는 이미 서연이와 결혼했으니 너도 이제 정신 차리고 적당한 선을 지켜. 더 이상 건이에게 환상을 품지 마.”유승아가 황급히 설명했다.“오해하신 것 같은데 저와 건이는...”정안이 차갑게 웃었다.“오해인지 아닌지는 네가 누구보다 잘 알겠지. 거짓 해명은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