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을 찾아야 해.’윤하경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그 속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안과 공포로 휘몰아치고 있었다.‘이번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하지…’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주미나였다.겉으로 보기엔 상류층 여사답게 우아하고 고상했지만 그 손에 묻은 피를 윤하경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몇 년 전, 구정수의 내연녀가 아이를 가졌을 때 주미나는 그 여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 바로 윤하경이었다.잔혹하고 독하고 절대 물러서지 않는 여자. 그게 주미나의 진짜 얼굴이었다.‘그 수법이 언젠가 나한테 향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생각만으로도 온몸이 떨렸다.무의식중에 손톱을 뜯고 있던 윤하경의 손동작에 강현우가 힐끔 그녀를 바라봤다.“기분 안 좋아?”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는 슬쩍 웃었다.“혹시 내가 흥을 깨서 그래? 미안한데.”“...네?”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 윤하경은 고개를 들었고 몇 초 후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 나서야 얼굴이 벌게졌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강현우는 키득 웃었다.“말도 안 된다고? 나는 네가 날로 부족해서 다른 남자들 불러서 야외에서 색다르게 즐기려는 줄 알았는데?”그 잘생긴 얼굴로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지, 윤하경은 황당함을 넘어 아연실색했다.그녀의 반응이 흥미로웠는지 강현우는 몸을 살짝 기울이며 중얼거렸다.“근데 지금 너, 좀 유혹하는 거 같거든.”익숙한 향기가 스쳤고 그의 눈빛은 장난기와 위협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이 인간은 정말 사람 놀리는 데 재능이라도 있나.’“그만 멍때리고 내려.”강현우가 먼저 차 문을 열었다.공기 속에 긴장이 조금 가셨지만 윤하경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그러자 그가 몸을 숙여 그녀의 눈높이에 맞췄다.“뭐야, 내가 안아줘야 내릴 거야?”“됐거든요!”윤하경이 얼굴을 붉히며 차에서 펄쩍 내렸다.주위를 둘러본 그녀
그녀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방 안은 조용했다. 강현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이미 한밤중. 머리를 말린 후 침대 가장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려볼까 싶었지만 결국 이불을 들추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오늘 하루는 예상치 못한 일들로 가득했다. 몸에 남아 있던 긴장이 서서히 풀리자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침대가 미세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 묵직한 온기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넓은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따뜻한 손길이 가슴 위에 가만히 얹혔다.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눈을 뜨려 했지만 마치 깊은 꿈결 속에 갇힌 듯 쉽게 떠지지 않았다. 그 순간, 악몽이 그녀를 덮쳤다. 작은 집 안에서 벌어진 끔찍한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뒤에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분갈할 수 없었고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몸이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움직이지 마.” “계속 이러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 이 목소리...‘현우 씨?’ 윤하경은 잠결에 익숙한 목소리임을 깨닫자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그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순간 깊은 곳에서 묵직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마치 따뜻한 무언가가 온몸을 감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비록 눈을 뜨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옥죄던 압박감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느꼈다. 윤하경은 몸을 돌려 얼굴을 강현우의 품 속으로 기울였다. 그녀의 두 손은 자연스레 그의 단단한 허리를 감쌌다. 강현우는 순간 얼어붙은 듯했다. 그동안 모든 상황을 주도하던 그였지만 윤하경이 갑자기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모습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손은 공중에서 잠시 멈췄고 예리한 눈빛이 어두운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어젯밤 일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강현우가 그에 대해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가볼게요.” 강현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윤하경은 발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 문을 조용히 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어젯밤 일이 어떻게 처리됐는지가 아니었다. 강현우라면 주미나가 그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바로 자신의 안전이었다. 윤수철은 결코 자신을 위해 구씨 가문과 맞설 일이 없다는 걸 뼛속까지 알고 있었다. 만약 주미나가 정말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겨냥한다면...‘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며 윤하경은 불안감이 점점 커져갔다. 윤하경은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게 발걸음을 내디디며 별장 밖으로 나갔다. 생각에 잠겨 걷던 그녀는 어느새 도로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빠르게 다가오는 차에 의해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급히 사과하며 인도로 돌아가려던 순간 차에서 창문이 내려가며 한 마디가 들려왔다. “형수님, 태워 드릴게요.” ‘형수님?’ ‘이게 무슨... 왜 이렇게 불러?’윤하경은 당황한 얼굴로 차를 바라봤다. 사람을 잘못 봤다고 말하려던 찰나, 운전석에서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우지원의 얼굴을 보고서야 멈칫했다. 윤하경은 살짝 표정을 굳히고 차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우지원은 피식 웃으며 차에서 내려 그녀의 쪽으로 다가와 차문을 열어줬다. “타세요. 현우 형이 데려다주라고 보냈어요.” 윤하경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거절하지 않았다. 주변 환경이 꽤 괜찮아 보였고 도심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별장이었기에 거절하면
주미나는 경성에서 꽤 높은 지위와 명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윤하경은 강현우가 이렇게 대담하게 행동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우지원은 후사경을 통해 윤하경의 놀란 표정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의 얼굴엔 미세한 만족감이 떠올랐다. “몰랐죠? 그때 형이 얼마나 멋졌는지...” 우지원은 마치 강현우의 열혈 팬처럼 열정적으로 자랑하며 말했다.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물었다. “그 후에는요?” “주미나 씨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어요. 결국 형이 구지호 씨의 목숨을 위협하며 겨우 주소를 말하게 했죠.” 우지원은 그 말을 마치자 웃음을 터뜨렸다. “한 시간 거리였는데 형은 30분 만에 도착했어요. 차 바퀴가 연기 날 정도였죠.” 우지원은 고개를 흔들며 감탄했다. “제가 여자였다면 진짜 우리 형한테 시집갔을 거예요.” 그는 갑자기 윤하경을 돌아보며 웃었다. “그쵸? 윤하경 씨.” 윤하경은 그의 말 속에 숨은 의도를 금세 알아챘다. 우지원은 계속해서 강현우를 옹호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윤하경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은 기술이 발전해서 원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죠.” 우지원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후,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가 여자가 된다고 해도 형수님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윤하경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우지원이 왜 자꾸 자신과 강현우의 미래를 얘기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결혼은 그녀의 선택이 아니라 강현우가 원해야만 이루어지는 일이었다.차가 시내에 도착하자 윤하경은 조용히 말했다. “여기서 내려 주세요.” 우지원은 브레이크를 밟고 돌아서서 윤하경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형수님, 잘 가세요.” 말을 마친 그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 윤하경은 바람이 휘날리는 거리 한복판에 홀로 남았다. 바람이 그녀의 치마를 날리며 길가에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외로운 그림 같았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알겠어요.” 윤하경은 짧게 대답한 뒤 지친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지금 모든 게 엉망이었다. 임수연, 윤하연 그리고 주미나까지. 그녀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려 했지만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지금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주미나였다. 윤하연은 어제 이후로 감감무소식이었다. 아마도 겁에 질려 당분간은 숨어 지낼 가능성이 컸다. 윤하경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머릿속에서 이름 몇 개를 되뇌었다. ‘주미나.’‘구정수.’ ‘구지호...’그리고 순간 번쩍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에서 하나의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주미나의 가장 큰 약점, 구성 그룹과 구지호. 그 부분을 제대로 찔러넣기만 하면 그녀가 아무리 증오심을 품고 있어도 함부로 움직이진 못할 것이다. 윤하경은 주저 없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깐 만나죠.”그녀는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스토랑 안.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비위를 맞추듯 싱글거리며 말했다. “윤하경 씨는 저희한테 정말 귀한 고객이세요.” 하지만 윤하경은 불필요한 말장난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남자 앞에 내밀었다. “여기 적힌 내용 조사해 주세요. 3일 안에 결과가 필요해요.” 남자는 종이를 받아 들여 대충 훑어보더니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믿고 기다리시면 됩니다.” 윤하경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한 뒤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레스토랑을 나섰다. 그런데 막 문을 나서려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인물과 눈이 마주쳤다.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피하려 했지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하경, 너 맞지?” 윤하경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발을 떼었다. 하지
“그날 밤, 당신이 차로 현우를 데려간 거 맞죠?” 그 말에 윤하경은 잠시 할 말을 잃고 곧이어 침착하게 정정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는 강 대표님의 기사입니다. 그분이 가자고 하시면 저는 당연히 따를 수밖에 없죠.” “기사?” 안현주는 비웃으며 말했다. “웃기고 있네. 침대에서의 기사일 거 아냐.”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냥 그 얼굴 하나 믿고 강 대표님을 유혹한 거잖아.” 윤하경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네 얼굴로는 강 대표님을 유혹하지 못해 아쉽다는 거야?” 안현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너!” “그만해.” 그때 옆에 있던 박소희가 안현주를 가로막으며 윤하경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윤하경 씨, 제 친구는 성격이 급해서 화를 자주 내요.”그리고는 살짝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윤하경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밤, 강현우 앞에서의 박소희는 전혀 지금의 모습과 달랐다. 그때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혀 없는 차갑고 냉정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현주가 옆에서 아무리 신경을 건드려도 이렇게 얌전하게 말을 하는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박소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윤하경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저는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윤하경은 짧게 말을 남기고는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 순간, 박소희가 한 발짝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윤하경 씨, 이렇게 마주쳤으니 조금 더 얘기하지 않겠어요? 커피 한잔 어때요?”박소희의 손목에 묵직한 힘이 들어갔고 윤하경은 그 압박감에 잠시 불편함을 느꼈다. 그녀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거절하려던 찰나 박소희의 뒤에서 경호원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박소희는 여전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윤하경 씨, 혼자 가시겠어요? 아니면 제 사람들이 도와드릴까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협박이 담
윤하경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그녀의 대답은 너무나 담담하고 자연스러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안현주와 박소희는 잠시 눈을 마주치며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안현주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윤하경을 응시했다. “정말이에요?” 윤하경은 잠시도 흔들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윤하경, 또 무슨 속셈이야?” 안현주는 윤하경을 의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윤하경이 강현우와의 관계를 이렇게 쉽게 끊을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듯했다. 그 남자는 강현우였다. 모든 여자가 꿈꾸는 이상형, 놓칠 수 없는 남자. ‘어떤 여자가 강현우와의 관계를 이렇게 쉽게 끝낼 수 있겠어?’ ‘윤하경이 겨우 강현우와 가까워졌는데 그렇게 쉽게 포기한다고?’‘말도 안 돼.’ 그때 커피가 테이블에 놓였다. 윤하경은 가늘고 하얀 손끝으로 커피를 천천히 저으며 마주 앉은 두 여자의 질문을 받는 내내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녀는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박소희 씨가 저를 찾아온 걸 강 대표님은 알고 계신가요?” 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박소희를 바라보며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 있었다. “강현우를 이용해 나를 압박하려는 건가요?” 박소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쏘아봤다. 윤하경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박소희 씨, 오해하셨네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만약 박소희 씨가 강 대표님이 저를 만나시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면 저를 찾아오시는 대신 강 대표님에게 직접 가셔야 한다는 거죠.”“그렇지 않나요?” 박소희는 미간을 더욱 깊게 찌푸리며 생각했다. ‘강현우가 내 말을 들으면 내가 여기서 너랑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겠어?’‘내 말을 들었으면 벌써 너를 내쫓으라고 했어.’ 그때 윤하경은 안현주에게 고개를 돌리며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를 띠었다. “안현주, 다른 사람 신경 쓰는 전에 네 일이나 잘 챙기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윤하경은 차에 앉아 머리가 점점 더 아파오는 걸 느꼈다. 하나하나의 일이 하나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머리가 점점 더 아파지며 마치 누군가 안에서 찢어놓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녀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힘겹게 머리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통증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고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머리를 짚었다. “열이 나나?”그녀는 그제야 몸이 이상하다는 걸 실감했다. 바이러스는 빠르게 퍼지고 있었고 이제는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였다. “기사님, 약국으로 가 주세요.” 택시 기사님은 룸미러로 윤하경을 흘깃 바라보더니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아가씨, 약국보다는 병원에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윤하경은 흐릿한 정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병원으로 가 주세요. 감사합니다.” 차는 곧바로 속도를 높였고 10분 만에 병원 앞에 도착했다. 윤하경은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기사에게 건넨 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굽 높은 힐이 아스팔트를 밟을 때마다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이를 악물고 병원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결국 균형을 잃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 순간, 강력한 손길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 덕분에 바닥에 그대로 넘어지는 건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요.”희미해진 의식 속에서 그녀는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힘겹게 눈을 뜨지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얼굴. “배경빈 씨?” “왜... 당신이죠?” 윤하경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힘이 빠져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자주 아프지 않는 사람은 한 번 병이 나면 더 심하게 앓는다고 했다. 그 순간, 몸이 휘청이고 머릿속이 흐려졌다. 배경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부축했다. 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나 보기 싫다는 뜻인가요?”“지난번 이후로 연락해도 답장 한 통 없더니.”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윤하경 씨? 저 우지원이에요.”윤하경은 약간 의외라는 듯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우지원이 웃음을 섞어 말했다.“별건 아니고요. 대표님께서 윤하경 씨가 사람 필요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사람 필요한지 조건이랑 인원수 알려달라고 하셔서요.”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설마 했는데, 강현우가 정말 신경 쓰고 있었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꽤 큰 짐이 덜어진 느낌이었다.“수고 좀 해주세요. 좀 몸 쓰는 일에 능한 사람들로 열 명쯤? 딱 봐도 위압감 느껴지는 사람들로요.”우지원은 작게 탄성을 뱉었다.“오, 꽤 큰일인가 보네요? 사람은 언제쯤 필요하세요?”윤하경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한 시간 안에요.”“한 시간이요?”“네. 이번 일은 빨리 끝내야 해요. 하루라도 늦어지면 제 입장이 위험해지거든요.”우지원은 작게 중얼거리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준비해 둘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그렇게 통화가 끝났고 윤하경은 강현우 쪽 사람들은 믿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주미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주미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미 지난번 일을 겪은 뒤로 주미나와의 관계는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락을 피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결국 윤하경은 더는 연락하지 않기로 했고 대신 우지원에게 문자를 보내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는 카페를 나섰다.한 시간 뒤, 윤하경은 구지호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 들어섰다.그리고 놀랍게도 구지호는 이미 깨어나 있었다.하지만 여전히 온몸에 의료기기를 단 채 침대에 누워 있었고 움직일 수 있는 건 손뿐인 듯했다.예전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였던 만큼 그 몰락한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그래서였을까.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진 않았다.구지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윤하경을 가리켰다. 표정엔 놀라움과 분노가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놀란 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체격 좋은 남자들 때문이었고 분노는 아마
윤하경은 찌푸린 이마로 휴대폰을 들어 백정연의 전화를 확인했다.“여보세요?”그 순간 본인의 목소리가 심하게 쉬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어젯밤 강현우가 너무 거칠게 굴었고 그녀는 분명 울면서 몇 번이나 그만하라고 애원했었다.결국 이 목소리도 전부 강현우 탓이었다.사정을 모르는 백정연은 깜짝 놀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윤하경은 민망하게 코끝을 만졌다. 전화라서 다행이지 대면이었다면 얼굴이 벌게진 걸 들킬 뻔했다.헛기침을 한 번 하곤 자연스럽게 둘러댔다.“어젯밤에 좀 쌀쌀했나 봐요.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요.”“병원은 다녀오셔야죠. 괜히 더 심해지기 전에요.”“오늘 회의 있잖아요. 그거 끝나고 갈게요. 대신 단체 채팅방에 공지 올려줘요. 오늘도 늦는 사람은 전부 사직서 각오하라고.”그녀는 전화를 받으며 욕실로 향했다. 그런데 막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백정연의 말투가 어딘가 머뭇거렸다.“대표님... 그게... 오늘 회의는 아마 못 열 것 같아요.”“왜요?”윤하경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윤 이사님께서 오늘 회의 참석자 전원에게 휴가를 내렸어요. 회사에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고요.”순간 윤하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설마 했는데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이 사람이... 진짜 제정신이야?”회사 일에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 짓을 오로지 자신의 분노를 누르기 위해서 하는 짓이었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궁금하네. 도대체 머릿속엔 뭐가 들었는지.”백정연도 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도 답답하죠. 하지만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다들 난처해요. 아직 이사회 의장은 윤 이사님이니까요.”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게 웃었다.“그래. 아주 잘들 하시네.”그녀가 쉽게 물러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았기에 곧바로 말했다.“지금 당장 회의 참석자 전원에게 알려줘요. 오늘 회의 회사 앞 카페에서 진행할 거라고. 난 한 시간 후에 갈게요.”백정
“사과할 거면 최소한 진심은 보여야지. 안 그래?”윤하경은 강현우가 이번엔 정말 화가 났다는 걸 알았고 그는 일부러 저러는 거였다. 그가 이렇게까지 집요할 땐 뭔가로 분풀이해야만 풀리는 성격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그게... 다른 방법은... 안 될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현우의 비웃음이 돌아왔다.“안 되진 않아. 내 앞에서 입든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입든가.”윤하경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고 전에 있었던 안 좋은 기억이 뇌리를 스치며 본능적으로 판단이 섰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종이봉투를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샤워를 마치고 그가 건넨 옷을 입고 나서 거울 앞에 선 윤하경은 얼굴이 금세 토마토처럼 빨개졌다.워낙 체격이 좋았던 터라 뭘 입어도 잘 어울렸지만 이런 종류의 옷은 평생 처음이었다. 지난번 헤븐 클럽에서 입었던 의상이 순진한 교복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이건 뭐라 말할 수 없는 수위였다. 딱히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도 않았고 머릿속에는 부끄러워서 사람 앞에 못 나가겠다는 딱 하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그래서 윤하경은 욕실 안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문 쪽 거울에 비친 강현우의 모습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고 깜짝 놀란 윤하경은 뒤돌아보다가 머뭇거렸다.“그... 그냥 이거 벗을게요...”그녀가 욕실 문을 닫으려던 찰나 강현우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겨 벽에 몰리게 된 윤하경은 당황해 두 팔로 본능적으로 앞을 가리려 했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손을 제압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모르는 척하긴. 네가 내 침대로 기어들어 왔을 땐 이러지 않았잖아.”그의 말엔 조롱이 묻어 있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감미로웠지만 그 내용은 귀에 거슬렸다.아무리 자신을 낮춰야 한다고 되뇌었지만 그 말에 윤하경은 도저히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 눈을 들고 강현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뭐라고 반박하려는 순간 그가 그녀의 턱을 틀어잡았다.“그러니까 우리
여전히 어젯밤과 같은 방이었다. 윤하경이 들어섰을 때 방 안은 천장의 메인 조명이 꺼져 있었고 침대 옆에 놓인 노란빛 스탠드 두 개만 은은하게 켜져 있었다. 덕분에 넓은 방 안은 흐릿하고도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침대가 정갈하게 정리된 걸 본 순간 윤하경은 무의식적으로 어젯밤 강현우의 광기를 떠올렸다.‘이 남자는 도대체 어디까지가 끝인지...’허리를 슬쩍 짚는 그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생각은 좀 정리됐어?”놀라 돌아본 그녀의 눈앞엔 막 샤워를 마친 강현우가 서 있었다. 머리카락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허리엔 흰색 타월 하나만 간신히 두른 채였다. 그 모습은 어딘가 일부러 유혹하려는 듯했다.윤하경은 시선을 피하며 조심스레 말했다.“그게... 어제는 제가 좀 예민했던 것 같아요. 괜한 말한 거였어요. 화내지 마세요.”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하...”그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윤하경의 턱을 집고 낮게 쏘아붙였다.“네가 거짓말할 땐 너무 티 나거든? 적어도 내 앞에선 제대로 연기라도 해.”윤하경은 억지로 웃으며 그의 허리에 팔을 살며시 감았다.“그래도 현우 씨 눈은 못 속이죠. 제가 뭘 꾸미겠어요.”강현우는 그녀의 아양에도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 눈빛에 마음이 불안해진 윤하경은 결국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그게... 오건우 씨가 그러는데 어젯밤에 다른 여자랑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현우 씨가 부정도 안 하시길래 저도 그냥 그렇게 믿었고...”끝까지 말을 잇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올려 강현우를 똑바로 보며 덧붙였다.“그런데 진짜로 질투한 건 아니에요. 그냥... 좀 껄끄럽고 기분이 그랬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강현우의 표정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껄끄러워?”차가운 말투에 윤하경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아, 아니에요. 이제 안 그래요.”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수습하려 했지만 강현우는 말도 없이 그녀를 들어 침대 위에 던졌고 몸을
윤하경은 잠시 말이 막혔으나 곧이어 살짝 웃으며 강현우를 바라보는 눈빛에 조심스러운 애교가 섞였다.“강 대표님, 혹시 저... 당분간만 여기서 지내도 될까요?”강현우는 그녀를 한번 훑어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컵라면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말해. 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 여기까지 온 거야?”그의 말은 까칠했지만 이미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넥타이를 느슨히 푸는 모습은 어지간히 피곤해 보였다.윤하경은 손에 든 컵라면을 들고 주방으로 가 남은 것들을 정리했고 다시 돌아왔을 때 강현우는 이미 와인 한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는 조심스레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단지 머물 자리를 구하러 온 건 아니었고 지금 그녀에게는 강현우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의 사람 중 몇 명만 빌릴 수 있다면 해야 할 일을 훨씬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윤하경은 조용히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어설프게 마사지를 시작했다. 손에 힘은 별로 없었지만 강현우는 뜻밖에 그걸 즐기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봐선 일이 꽤 복잡하겠네.”“강 대표님한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일이잖아요.”윤하경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혹시 사람 몇 명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강현우는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사람?”윤하경은 소파 뒤로 돌아가 강현우 앞에 앉았다.“요즘 좀 복잡한 일들이 있어서요. 위험한 건 아니고 그냥 좀 분위기 잡아줄 사람이 필요해요.”강현우는 와인을 천천히 마시며 말을 아꼈고 표정만으로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윤하경은 점점 불안해졌다. 사실 외부에서 사람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강현우 쪽이 훨씬 믿을 수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부탁하고 있는 거였다.“뭔 일인지 말해봐. 들어보고 결정할게.”윤하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강의 상황을 말해주었다.“지난번 구씨 가문의 일은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에요. 이번엔 주미나 씨랑 얘기를 좀 해보려고요.”“주미나랑 얘기하겠다고 이사까지 오냐?”강현우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놓고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고 윤하경은 딱히
30분쯤 뒤에 윤하경은 회사 근처 카페에 앉아 있었고 기분이 좋지 않아 달콤한 카푸치노를 시켰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자 마음이 조금은 진정됐다.잠시 후, 한 남자가 맞은편에 앉았다.“하경 씨는 여전히 시간 잘 지키시네요.”“이번엔 뭘 찾으셨어요?”윤하경은 바로 본론부터 꺼냈고 사설탐정인 노강훈은 모자를 벗으며 자리에 앉았다.“이번 의뢰는 정말 죽는 줄 알았네요. 그래도 원하셨던 자료를 찾았습니다.”그는 그녀 앞으로 서류봉투 하나를 던졌고 윤하경은 조용히 받아들여 펼쳐보았다. 예상한 만큼 특별히 놀랄 건 없었고 구씨 일가를 조사했더니 역시 쉽게 드러날 만한 허점은 거의 없었다. 구정수라는 인물은 겉으로는 점잖지만 뒤에서는 수단이 꽤 거칠었다.만약 구지호가 무심코 흘린 말이 아니었다면 이 정도 정보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이건 지금 자신의 유일한 방패였기에 그녀는 서류를 잘 챙겨 가방에 넣었다.“잔금은 오늘 저녁 여섯 시 전에 송금할게요.”“감사합니다.”노강훈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 말끝을 망설이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세요.”“우린 오래 협력했잖아요. 돈은 충분히 받았고 그래서 한 가지 정보를 더 드리려고요. 공짜로요.”그가 말을 마치고는 몸을 살짝 숙여 윤하경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주변을 살피듯 낮은 목소리로 꽤 오랫동안 무언가를 속삭였다.윤하경의 눈빛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말이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 아무 반응이 없었다.노강훈은 그녀의 안색이 점점 나빠지는 걸 보고 마침내 한숨을 내쉬었다.“하경 씨, 마음 이해합니다. 이게 가족 얘기다 보니 원래는 말씀드릴 생각도 없었어요. 하지만... 못 믿겠다면 그냥 제가 괜한 말 했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그 말만 남기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커피숍을 떠났다.남겨진 윤하경은 긴 시간 동안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딱히 어떤 행동도 없이, 말없이 앉아만 있던 그녀는 한참 후에야 커피잔을 들었지만 그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윤수철이
하지만 그 표정은 기쁨이 아닌 놀람이었다.정확히 말하자면 믿기지 않는다는 놀람 그 자체였다.“이게 한빛 그룹이랑 오건우 씨의 계약서라고?”“네가 이걸 따냈다고?”윤하경은 그를 스윽 쳐다봤다.“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제 나가도 되겠네요.”윤수철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고 기쁨은커녕 흐린 눈동자엔 의심이 가득했다.한참 말없이 그녀를 뚫어지게 보던 윤수철은 낮게 물었다.“그래서 이게 네가 밤새 안 들어온 이유라는 거냐?”윤하경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윤수철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악의적으로 몰아붙일 줄은 몰랐다.계약을 따낸 딸에게 던진 첫마디가 딸이 잠자리를 해서 따온 거냐는 식의 비아냥이라니...이미 실망은 여러 번 해봤지만 이번엔 아예 달랐고 심장이 꽉 막힌 듯 아팠다.이를 악물고 떨리는 목소리를 삼킨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천천히 일어나 윤수철 앞으로 걸어가면서 비웃듯 말했다.“제가 어떻게 따냈는지 그건 상관없잖아요. 중요한 건 계약서가 제 손에 있다는 거고요. 필요하면 제가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윤 회장님, 저한테 괜히 성질내지 마세요. 저도 성질내면 다 같이 골치 아플 수 있거든요.”그 말에 담긴 조소와 경고는 너무도 분명했기에 자기 딸에게 그런 말을 들은 윤수철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윤수철은 눈가를 떨며 손을 치켜 올렸지만 이번엔 윤하경이 먼저 손을 들어 그의 손목을 막았다.“회장님, 제발 현실을 좀 직시하세요. 제가 계약서를 따낸 방식이 궁금해하는 것보다 그 시간에 임수연 씨가 지금 어디 있는지나 생각해 보시죠.”말을 마친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무실을 나섰다.그가 들여온 신임 부대표 앞에서 잠시 멈춰 선 그녀는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한 시간 안에 아직도 여기에 있으면 제가 직접 내던질 겁니다.”그러자 남자는 움찔하며 얼굴이 굳었다.“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잖아요.”윤하경은 냉소를 터뜨리며 그 말은 무시하고 유유히 자리를 떴다.등이 곧게 펴진 그녀
“저기... 어제 말했던 그... 누가 현우 씨를 암살하려 했다는 건 어떻게 됐어요?”민진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주위를 둘러본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윤하경 씨, 그 일은... 안 묻는 게 좋습니다.”“네...”윤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머릿속이 복잡해서였을까. 회사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아홉 시 반이나 되었다.입구에서 우지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왔다.“윤 대표님, 지금 오세요? 회장님께서 찾고 계세요.”“아버지가요?”윤하경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고 이유도 모른 채 짜증부터 치밀었다.“왜요?”우지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윤하경의 시야에 윤수철이 들어왔다.멀지 않은 곳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고 얼굴에는 마치 온 세상을 빚졌다는 듯한 불만이 가득했다.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가 입을 열었다.“무슨 얘기든 사무실에서 하시죠. 여긴 일하는 곳이에요.”윤하경은 윤수철에게 겁이 나서가 아니라 이런 모습을 직원들 앞에서 보이고 싶지 않았다.가정사로 사람들 뒷얘기거리 되는 건 질색이었다.그렇게 말하고 윤하경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윤수철도 뒤따라 회장실로 들어왔고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윤하경은 소파에 털썩 앉아 무표정하게 물었다.“뭐 때문에 부르셨어요?”“뭐 때문에 부른 것 같아?”윤수철은 쏘아붙이듯 말했다.“내가 기억하기론 네가 한빛 그룹에 들어온 건 회사를 살려보겠다고 했기 때문이잖아. 그런데 지금까지 한 걸 보면 회사에 해가 되는 짓밖에 안 했어. 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고.”윤하경은 아무런 표정 없이 소파 팔걸이에 손가락을 콩콩 두드리며 말했다.“그래서요?”눈썹을 살짝 치켜올린 그녀의 얼굴엔 전투태세를 갖춘 고슴도치 같은 기운이 번졌다.“그래서 말인데...”윤수철은 말끝을 흐리며 손짓했다.그러자 한 남자가 들어왔다.브랜드 슈트에 번듯한 외모를 가진 멀쩡해 보이는 남자였다.하지만 사내에서 강현우를 오래 마주친 윤하경 입장에선 그 남자는 마치 양가죽을 뒤집어쓴 늑대가 아닌 그냥 하이에나처럼
욕망의 전장이 욕실에서 침대로 옮겨졌을 때 윤하경은 이미 기운이 다 빠져 있었다.처음에는 그럭저럭 응해주던 그녀였지만 나중엔 완전히 힘이 풀려버려서 강현우가 어떻게 하든 그냥 이불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았다.사실 언제 끝났는지도 잘 몰랐다.다만 기억나는 건 뜨겁고 묵직한 몸이 밤새도록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렇게 지독하게 휘둘린 밤이었지만 오히려 그날 밤 윤하경은 유난히 편안하게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강현우보다 먼저 눈을 떴다.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그를 돌아보려는 순간 조금만 움직였을 뿐인데 남자의 팔이 다시 허리를 감아 그녀를 끌어당겼다.강현우의 몸은 여전히 뜨겁고 묵직했다.딱히 움직인 것도 아닌데 그녀는 허리 뒤쪽에서 단단하게 눌려오는 감촉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곧이어, 강현우의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움직이지 마.”그러자 윤하경은 그대로 얼어붙었다.지금 이 상태에서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어젯밤의 2차전이 벌어질지도 몰랐다.그럴 기력은커녕 이미 온몸이 뻐근해서 제 몸 하나 가누기도 벅찼다.결국 그녀는 얌전히 강현우 품 안으로 몸을 더 말아 넣었다.꼼짝도 하지 않고 얌전히 안기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하지만 속으로는 살짝 불안했다.‘진짜 화가 풀린 걸까?’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강현우가 드디어 깨어났다.몸을 움직이진 않았지만 윤하경은 그가 눈을 떴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걸 느끼자 윤하경도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윤하경의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하게 빛났다.그런 그녀를 본 강현우는 비웃듯이 코웃음을 쳤다.“또 무슨 꿍꿍이야?”윤하경은 얌전한 고양이처럼 그의 가슴에 머리를 비비며 말했다.“대표님, 이제는... 화 안 나신 거죠?”그러자 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윤하경의 턱을 잡았다. 거칠고 단단한 손끝이 턱선을 따라 닿았고 그녀는 조금 아픈 듯 눈을 찌푸렸다.“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