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건이 그렇게도 추하게 끝나버렸으니 지금 윤하경과 주미나 사이에 남아 있는 건 어색함 뿐이었다.그런 그녀가 느닷없이 연락을 해오자 윤하경은 직감적으로 느꼈다.‘좋은 일일 리 없겠네.’윤하경이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주미나는 그런 말에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결국 그녀는 직접 회사를 찾아왔다.퇴근길, 회사 정문을 나서던 윤하경은 검은색 차량 옆에 서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주미나였다.예전엔 단정하고 세련됐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피곤함에 절은 얼굴, 짙게 내려앉은 다크서클, 불과 몇 달 사이에 그녀는 확연히 늙어 있었다.윤하경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미 그녀의 눈에 들고 말았다.“하경아.”주미나가 서둘러 다가왔고 윤하경은 돌아보며 담담하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과거엔 ‘어머님’이라 부르던 아이가 이제는 이름 석 자조차 입 밖에 내지 않자 주미나의 눈가가 붉어졌다.“그동안 잘 지냈니...?”윤하경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잘 지냈어요.”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 윤하경이 직설적으로 물었다.“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 거예요?”주미나는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그냥... 네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오랜만이잖니.”손목시계를 흘끗 확인한 그녀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한 시간만. 너랑 얘기하고 싶어.”윤하경은 주저 없이 고개를 저었다.“저희 사이에, 더 이상 나눌 이야긴 없을 것 같은데요.”냉정한 말투에 주미나의 얼굴엔 실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하경아... 난 언제나 네가 지호랑 어떻게 되든, 내 딸처럼 생각했어...”진심 어린 말투.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는지 윤하경도 알고 있었다.사실, 그녀는 생전에 엄마가 가장 아끼던 친구였고 그리고 지난 시간 동안, 딱히 나쁘게 대한 적도 없었다.잠시 침묵이 흘렀고 결국 윤하경은 고개를 들었다.“좋아요. 어디서 이야기하실 건데요?”주미나는 안도한 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레스토랑 하나 예약해 놓았어. 우리 차 타고 가자.”그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긴 아쉽잖니.”주미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 미소는 따뜻하지 않았다.입꼬리만 올라가 있을 뿐, 그 안엔 냉기와 뒤틀린 집착이 섞여 있었다.윤하경은 눈살을 찌푸린 채 움직이지도 않았다.“여기 어디예요? 왜 절 이런 데로 데리고 온 거죠?”“누구 좀 보여주려고.”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느꼈다.‘이건, 단순한 만남이 아니다.’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기어올랐다.윤하경은 조용히 가방 속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눈을 떼지 않고 주미나를 응시했다.“말로 하세요.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잖아요.”“우리 사이, 약혼 문제 외엔 특별한 감정도 없었잖아요. 제가 아줌마한테 뭘 잘못했다고 이러세요?”입으론 말을 이어가면서도, 윤하경의 시선은 차창 밖을 바쁘게 훑었다.‘진작에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야 했는데... 내가 멍청했지.’그 순간, 주미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야. 넌 나한텐 잘못한 게 없어.”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점점 서늘하게 식어갔다.“그런데 말이지... 내 아들이 지금 반쯤 죽어가고 있어. 침대에 누워서 눈도 못 뜨고 있는데 그걸 보면서 내가 가만히 있어야겠니?”윤하경의 얼굴이 굳어졌다.“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죠?”“아직도 그런 소리가 나와?!”주미나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솟구쳤다. 붉어진 눈시울이 더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지금이야.’윤하경은 순간적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나와 문 옆에 서 있던 주미나를 힘껏 밀쳐버렸다.“꺄악!”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구는 주미나를 넘어, 윤하경은 맨발로 달리기 시작했다.굽 높은 힐은 도망치는 데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이곳은 주미나가 일부러 고른 장소였다.외진 들판, 사람 하나 지나가지 않는 황량한 도심 외곽에, 게다가 해까지 뉘엿뉘엿 저물고 있어 주위는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뒤에서 주미나가 이를 갈며 고함쳤다.“뭘 멍하니 서 있어! 당장 쫓아가!”대기 중이던 사내들이 비로소 움
작은 오두막 안.윤하경은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손발이 꽁꽁 묶인 채 내던져졌다.팔은 쓸리고 옷은 너덜너덜해졌으며 머리카락은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있었다.‘이 정도 외진 곳이면, 소리친다고 누가 와주겠어.’윤하경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비명은 무기 아닌 소음일 뿐이었다.‘지금은 소리칠 때가 아니야. 도망칠 틈을 봐야 해.’그 순간,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싸늘한 공기를 베며 다가왔다.문이 벌컥 열리며 주미나가 들어섰다.그녀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아직도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말 좀 해봐. 구지호한테 뭐가 그렇게 원한이 깊어서 애를 그 지경으로 만든 거야?”주미나의 표정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눈빛은 번들거렸고 억눌린 분노는 거의 광기에 가까웠다.“지금 그 애가 어떤 상태인지 알긴 하니?”입엔 여전히 역겨운 수건이 틀어막혀 있어 윤하경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주미나는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지금 그 애... 병상에 누워 반쯤 죽은 상태야. 의사는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댔어.”윤하경은 눈으로만 대답했다.말하지 않아도 그 눈빛이 말해줬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그 반응에 분노가 치민 주미나는 결국 수건을 잡아당겼다.“말해봐. 왜 그랬어. 왜 구지호한테 그런 짓을 했어?!”입이 너무 오래 막혀있었던 탓에, 윤하경은 입을 조금 움직이고 나서야 겨우 말했다.“몇 번이나 말했죠.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거짓말!”짝!주미나의 손이 윤하경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윤하경의 얼굴이 옆으로 꺾였고 하얀 살결 위로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번졌다.그러나 윤하경은 끝내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노려봤고 그 태도에 주미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아직도 거짓말할래? 증인도 있다고!”“증인이요?”윤하경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주미나를 바라보았다.“누가 그런 소릴 했는지 정말 궁금하네요.”“들어와.”주미나는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곧,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누군
“언니가 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에요!”윤하연은 다급히 외쳤고 목소리엔 분노보단 불안이 실려 있었다.“얘는 지호 오빠랑 약혼했을 때부터 강현우랑 이미 그런 사이였어요. 강현우가 그런 짓을 한 것도, 전부 언니 말 듣고 지호 오빠한테 복수하려던 거라고요!”“복수?”윤하경은 비웃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윤하연을 바라보았다.“그럼 말해봐. 내가 뭘 복수하려고 했는데?”윤하연의 입이 덜컥 멈췄다.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떼던 그녀는 결국 스스로 무덤을 팠다.“그, 그거야 내가 지호 오빠한테 사람 시켜서 언니를 강간하라고...”순간, 본인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은 윤하연은 입을 틀어막은 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주미나를 바라보았다.“계속 말해보지 그래.”윤하경은 차갑게 웃으며 나지막이 말했다.“그럼 지난번에 날 노렸던 게 실패해서, 이번엔 아예 어머님을 이용해 날 무너뜨릴 생각이었던 거야?”“하연아. 너 사람이 할 짓을 해야지. 나한테 누명 씌우기 전에 증거라도 들고 오지 그랬니?”“예를 들면 네 엄마가 바람피웠다는 증거, 나 그거 갖고 있거든. 지호 씨가 저렇게 된 게 내 탓이라면 그에 맞는 증거는 있어?”윤하경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그녀는 지금 도박을 걸고 있었다.주미나가 아직 자신에게 남은 믿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가능성에 전부를 건 것이다.“어머님.”윤하경이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말했다.“저를 오랫동안 봐오셨잖아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정말 윤하연 말 하나만 믿고 저를 이렇게까지 대하신다면 저도 더는 드릴 말씀이 없네요.”그녀는 눈을 감고 벽에 몸을 기대었고 지친 숨결과 조용한 체념이 그 공간에 퍼졌다.윤하연은 그 태도에 질투와 분노가 폭발했다.“뭐야, 지금 연기하는 거야? 네가 한 짓이잖아! 왜 인정 안 해!”화를 주체하지 못한 윤하연은 그대로 발을 들어 하경을 걷어차려 했다.그 순간, 윤하경의 눈이 번쩍하며 살기 띤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윤하연은 본능적으로 움찔했고
“너희 중 누구라도 날 속인 게 밝혀지면 그 대가, 반드시 치르게 될 거야.”주미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부잣집 사모님으로 살아오며 익힌 우아함 뒤에는 결코 적지 않은 더러운 수단들이 감춰져 있었다.그 위압감에 윤하연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푹 숙였다.잠시 후, 주미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오두막을 나섰고 멀리서 자동차 시동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윤하경, 넌 진짜 사람 인생 망치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어.”발을 쾅 내디딘 윤하연이 돌아서며 이를 갈았다.“왜! 왜 지호 오빠가 너 때문에 다쳤다는 걸 인정 안 해?”윤하경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좀 꺼져줄래? 네 목소리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리니까.”쌓인 감정이 고개를 들었고 윤하경은 더 이상 받아줄 여유조차 없었다.“지금 네가 처한 상황, 진짜 모르고 그러는 거야?”윤하연이 몸을 숙여 윤하경의 턱을 잡아 올렸다.“넌 지금 납치된 거라고.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하지만 윤하경은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서? 쓸데없는 말 다 했으면 좀 꺼져. 나, 자야 되니까.”그 무심한 말투에 윤하연의 분노가 폭발했다. 손을 들어 그대로 뺨을 내려치려던 순간, 윤하경의 눈빛이 칼처럼 날카로워졌다.“쳐. 마음껏 쳐보라고. 네가 나한테 어떻게 하든, 그 대가는 네 엄마한테 열 배로 돌아갈 거니까.”“뭐?”윤하연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눈동자가 흔들렸고 그녀는 낮게 으르렁댔다.“우리 엄마한테 무슨 짓 한 거야?”윤하경은 희미하게 웃었다.“다 말해줄게. 대신 이거 풀어줘. 그럼 너희 엄마가 지금 어딨는지 알려줄게.”윤하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또 날 속이려는 거지? 이젠 안 속아, 윤하경.”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그래. 그럼 말든가. 어차피 난 피곤하니까, 말 걸지 마.”그 말에 윤하연은 치를 떨며 돌아섰고 쾅 소리를 내며 문을 세게 닫았다.오두막 안.정적 속에 홀로 남겨진 윤하경은 천천히 눈을 떴다.‘강현우 씨
윤하연이 다시 돌아온 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윤하경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무슨 짓 하려고.”윤하연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예쁘지도 상냥하지도 않았고 그저 뒤틀린 증오로 일그러져 있을 뿐이었다.“무슨 짓이냐고?”윤하연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강현우가 남자들을 시켜 날 그렇게 망가뜨렸을 땐, 자기 여자가 내 손에 들어올 거란 건 상상도 못 했겠지?”“뭐?”“날 무시하고 조롱하고, 깔봤지? 넌 뭐가 잘났다고, 이젠 너도 나랑 똑같이 만들어줄게.”윤하연이 뒤를 돌아 외쳤다.“들어와.”문이 열리자, 덩치 큰 남자들이 하나둘 방 안으로 들어섰고 그중 두 명은 아까 윤하경을 쫓던 자들이었다.“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윤하경.”“윤하연, 미쳤어? 지금 그만둬도 늦지 않았어. 이건 범죄라고.”“그만둬?”윤하연이 속삭이듯 말했다.“난 혼자 죽지 않아. 내가 겪은 지옥, 어디 너도 한번 겪어봐.”윤하경은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는 걸 알아채고 침착하게 남자들 중 가장 리더처럼 보이는 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지금이라도 멈춰. 너희가 한 일, 지금은 그냥 납치일지 몰라도, 이 선 넘으면 인생 끝장이야. 평생 감옥에서 썩는다고.”그 말에도, 남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윤하경 씨 걱정 마세요.”“우린 일 깨끗하게 처리합니다. 증거? 절대 안 남죠.”“그리고...”그중 하나가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비열하게 웃었다.“이렇게 예쁜 여자면 몇 년 감옥에서 썩어도 충분히 가치 있지.”윤하경이 속으로 욕지거리했다.‘이거 완전 미친놈들이네.’윤하연이 그런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걱정 마. 오늘 여기서 벌어진 일 아무도 모를 거야.”그녀는 돌아서며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내 언니, 잘 부탁해.”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멀어질수록 윤하경의 심장은 더 거세게 뛰었다.“윤하연… 내가 살아 나가면 널 반드시 가만 안 둬.”“살아서 나가고 나서 그런 말 해. 지금은 아
어두운 방.희미한 불빛 아래, 남자들의 눈빛이 들짐승처럼 번뜩였다.윤하경은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그때, 왜 윤하연까지 같이 끝장내지 않았을까. 임수연 그 여자랑 같이 잡아들였어야 했는데.’하지만 이 세상에 후회 약 따윈 없었다.“윤하경 씨, 그럼 재미를 좀 보자고.”비릿한 웃음과 함께 누군가의 더러운 손길이 그녀의 몸 위를 더듬었고,피부에 닿는 그 촉감은 마치 수천 마리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 소름 끼쳤다.탕!그 순간, 묵직한 총성이 바깥에서 울려 퍼졌다.윤하경 위로 올라타려던 남자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누구야?”쿵, 쿵, 쿵.답 대신, 문이 거칠게 열리며 몇몇 남자들이 쏜살같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그들 앞에는 짧고 검은 권총을 들고 선 사내가 있었다. 강현우의 오른팔, 우지원이었다.건달들은 아직도 욕망에 취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었고 순간, 우지원이 쏜 총알이 한 건달의 허벅지를 정통으로 꿰뚫었다.“악!”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당신들 누구야!”절박한 외침에, 문 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되받아쳤다.“누구냐고? 네 주제에 감히, 나한테 그 질문을 해도 된다고 생각했냐?”목소리는 낮고 서늘했으며 단어 하나하나에 살기가 서려 있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다.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눈을 뜨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문가에 선 그 사람을 보자마자 참고 있던 눈물이 제멋대로 흘러내렸다.강현우였다.그는 조용히, 그러나 모든 것을 압도하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묵직한 존재감이 공기를 흔들었다. 그의 시선이 윤하경을 스치고 그 뒤로 웅크린 남자들을 향했다.“이거 재밌네?”건달들도 강현우를 알아보고 혼비백산해 땅에 머리를 박았다.“아닙니다! 저희는 대표님의 사람인 줄 모르고...”눈앞의 남자가 누군지, 그 세력이 어떤지 건달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한 번만,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강현우는 아무 말 없이 윤하경을 내려다봤다.
어두운 방.윤하경은 원래 겁 없는 편이었지만 이런 상황은 태어나 처음이었다.“기절한 건가?”강현우가 다가와 그녀를 발끝으로 툭 찼다.윤하경은 천천히 눈을 떴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그를 바라봤다.“아직이요.”그가 코웃음을 쳤다.“내 침대에 기어들 땐 겁이 없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쫄았어?”그 말에 윤하경은 할 말을 잃었다.‘지금 그 소리 할 타이밍인가?’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 쌓였던 공포가 스르르 내려갔다.강현우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공간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었다.뒤에서 우지원이 조용히 물었다.“이놈들은 어떻게 할까요?”강현우는 대답 없이 자신의 재킷을 벗어 윤하경의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걸쳐 주었다.그리고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정리해.”그리고 몇 걸음 옮기던 그가 덧붙였다.“깨끗하게 끝내.”그 말이 끝나자, 방 안의 남자들이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강현우의 품에 안긴 윤하경은 문득 깨달았다.이 남자의 품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걸.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윤하연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현우 씨가 오자마자 도망친 건가...’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는 어느새 차 뒷좌석에 앉혀졌고 강현우가 조수석 쪽에서 타려던 순간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 혹시 구해준 은인이라고 감동이라도 한 거야?”원래는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하려던 참이었지만 그의 짓궂은 말투에 윤하경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묶인 거, 좀 풀어줄 수 있어요? 움직이기도 힘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손발을 내려다보다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허, 이런 것도 가능하네? 다음엔 이렇게 놀아볼까?”‘진짜, 이 남자 도무지 모르겠어. 지금 같은 상황에 그런 농담이 나와?’윤하경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다행히도 강현우는 장난처럼 웃다가 결국 묶인 끈을 풀어주었다.자유의 몸이 되자 그녀는 급히
윤하경은 강현우 품에 꼭 안긴 채 병원으로 들어갔다.얼굴은 끝까지 그의 가슴팍에 파묻은 채 혹시라도 누가 알아볼까 하는 듯 잔뜩 움츠러든 모습이었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한 번 훑어보더니 살짝 비웃듯 말했다.“왜, 내가 안고 있는 게 그렇게 창피해?”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작게 중얼거렸다.“그런 건 아니고... 혹시 폐 끼칠까 봐. 누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내일 당장 기사 나겠죠. 이런 모습 찍히면 나중에 여동생이라고 해명이라도 하셔야 할지도 몰라서요.”나름 배려심 가득한 말투였지만 강현우의 반응은 딱히 호의적이지 않았다.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현우의 턱선이 딱 굳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이런 말 하는 걸 보니 입은 아직 덜 다친 모양이지.”말투는 가볍지만 묘하게 날카로웠다.윤하경은 그제야 입을 닫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이 순간 굳이 그와 말싸움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몇 분 뒤 강현우는 그녀를 진료실 앞에 조심히 내려놓았고 의사가 간단히 살펴본 후 말했다.“다른 데는 문제 없고 발목이 삐었네요. 며칠은 푹 쉬셔야겠습니다.”그리고 곁에 있던 강현우를 돌아보며 웃었다.“여자 친구분 잘 챙기셔야겠어요.”윤하경은 순간 손을 들어 해명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강현우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주의할 점은요?”의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둘을 한 번씩 보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며칠 간은 격한 활동은 삼가셔야 해요. 잠자리도 포함해서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해요.”윤하경은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으나 강현우는 여전히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근데... 못 참으면?”“...”그 순간 윤하경은 진심으로 땅속에 숨고 싶었다.‘이 사람이 이런 식으로 말할 줄이야.’의사 역시 말을 잃고 안경을 고쳐 썼다.“참으셔야죠. 반드시요.”강현우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윤하경을 돌아보았다.“들었지? 못 참아도 참으래.”의사의 이상한 시선이 곧장 윤하경에게로 향
윤하경은 마치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 겨우 떠오른 사람처럼 붙잡은 나무토막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강현우를 꼭 껴안았다.강현우는 잔뜩 찌푸린 눈썹 아래로 날카로운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이를 꽉 깨물고는 윤하경을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뒤쪽을 돌아보니 민진혁이 그녀를 덮치려 했던 남자의 목을 발로 밟고 있었다.“사장님, 놈은 제압했습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남자를 노려봤다.그 눈빛에 담긴 살기는 말없이도 민진혁이 단번에 이해할 정도로 깊었다.“숨은 붙여놔. 그리고 경찰서로 넘겨.”“예. 일단 헤븐으로 데려가죠.”헤븐에 한 번 끌려간 자 중 멀쩡히 돌아온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구지호 같은 인물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이따위 놈이 무사히 나올 리가 없었다.민진혁은 어이없다는 듯 남자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고 바로 우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한 건 들어왔어. 바로 처리해.”한편 강현우는 더 이상의 말도 없이 윤하경을 조심스레 차량 뒷좌석에 앉혔다.몸은 이미 안정을 되찾은 듯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떨고 있었고 그의 손끝에도 그녀의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강현우도 따라 뒷좌석으로 올라탔고 갑자기 윤하경의 옷을 풀기 시작했다.“뭐 하는 거예요?”놀란 윤하경이 가슴을 감싸안으며 뒤로 물러났다. 강현우는 짧게 숨을 내쉬었으나 불쾌한 눈빛은 없었다.“다친 데 없나 보려고.”그제야 윤하경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손을 내렸고 긴장이 풀리자 금방 여기저기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강현우는 그녀의 몸을 살폈고 무심코 발목을 건드렸다.“으악!”윤하경은 날카로운 통증에 숨을 들이켰고 강현우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녀의 오른쪽 발목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하얗고 곱던 발이 그만큼 부어오른 걸 보자 그의 이마에 또 주름이 졌다.강현우는 조심스레 샌들을 벗기고 손끝으로 부은 부위를 살짝 눌렀다.그러자 윤하경이 움찔하며 물러났다.“아파요.”그녀의 여린 목소리가 귀에 닿자 강현우는 순간 다
이런 부류의 인간한테는 말로 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윤하경은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아예 대꾸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저열한 욕망에 눈이 먼 남자가 그렇게 쉽게 보내줄 리 없었다.그녀가 무시하자 남자는 바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꺼져. 지금이라도 안 놔주면 바로 경찰 부를 거야!”윤하경이 단호하게 소리쳤지만 상대에게는 아무 효과도 없었고 남자는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 비죽 웃으며 말했다.“에이, 왜 그래. 다 처음엔 부끄럽지. 좀 놀아보면 괜찮아진다니까.”그 말을 듣자마자 윤하경은 더는 참지 않고 소리쳤다.“사람 살려요. 도와주세요!”제발 누군가라도 듣기를 바라며 그녀는 있는 힘껏 외쳤다.‘차라리 아까 강현우 차에서 버티고 안 내리는 건데...’윤하경은 후회가 밀려왔다.“닥쳐. 소리 지르지 마!”남자가 당황해하며 목소리를 낮췄고 순식간에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골목 한쪽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갔다.윤하경은 죽을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상대는 덩치도 크고 힘도 셌기에 그녀의 발버둥은 그저 허공에 흩날리는 먼지 같았다.벽에 밀쳐진 채 벗어날 수 없게 된 그녀 앞에서 남자는 잔인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돈 안 주는 것도 아니고 네 옷차림 보면 딱 답이 나오잖아. 화장 떡칠에 저렇게 짧은 치마를 입고 나와선 뭐... 그냥 산책하는 거야?”남자는 그러면서 바지를 내리려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그 입에서는 숨 막히는 악취가 풍겼고 윤하경은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손을 세게 물었다.“악!”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빼는 동시에 뺨을 올려 그녀를 세게 후려쳤다.그 순간 윤하경은 머릿속이 울릴 정도로 강한 타격에 정신이 멍해졌다.간신히 고개를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남자는 곧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챘고 쓰러진 그녀 앞에 이미 바지를 내린 채 서 있었다.속옷까지 드러난 그의 모습에 윤하경은 치를 떨며 이를 악물었다.“건드리지 마. 넌 진짜 죽게 될 거야.”하지만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죽는다고? 너 같은 여자랑 한
윤하경은 잠시 머뭇이다가 조용히 강현우의 차에 올라탔다.차 안에 앉자마자 그 특유의 짙은 담배 냄새와 강현우 몸에서 나는 차가운 향이 뒤섞여 코를 찔렀다.고개를 살짝 돌려 강현우를 바라보려던 찰나 그의 비아냥 섞인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어휴. 내 앞에서는 그렇게 잘도 날뛰더니 조금 전엔 주미나 앞에서 말 한마디 못 하더라?”윤하경은 입을 열려다 그대로 멈췄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등장에 조금이나마 감동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는데 그 감정은 그의 말 한마디에 금세 사라졌다.강현우는 그녀를 흘겨보다가 억지로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얼굴을 붙잡아 억지로 자기 쪽을 보게 만들었다.“다음부터 누가 건드리면 그냥 받아 쳐. 내가 책임질게.”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고 눈빛도 말투도 진심이었다.하지만 윤하경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었다.누군가에게 의지하면 안 된다는 걸 이미 너무 많이 배웠다.‘친아버지도 믿을 수 없는데 강현우가 다 뭐겠어.’그녀는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입술을 거의 다문 채 조심스레 말했다.“아까는... 고마웠어요. 도와주시려고 그랬던 거 알겠어요. 괜히 제가 착각하지 않게 말해주셔서 감사하고요.”이 말을 전하며 오히려 강현우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는 속내였으나 그런데도 강현우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다가 비웃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참...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네.”그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내려.”“네?”윤하경은 순간 어리둥절했고 강현우가 이렇게 갑자기 차가워지는 순간들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던 그가 이제는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그러자 민진혁이 말없이 차를 세웠고 백미러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엔 어딘가 연민 같은 감정이 깔려 있었다.이게 처음도 아닌지라 윤하경은 잠시 입술을 깨물고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강현우는 차창 너머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차가운 한숨을 내쉬고
“남모르게 하려면 애초에 그런 짓도 말았어야죠.”윤하경의 말에 주미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처음에는 분노로 가득하던 그 시선이 점점 두려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주미나는 솔직히 무서웠다.윤하경 혼자라면 어찌 해보겠지만 지금 그녀 뒤엔 강현우가 있었다.그 강현우가 대놓고 윤하경을 감싸고 있다는 것도 분명했고 이 상황에서 정면으로 맞붙을 자신이 없었다.그렇다고 그냥 물러나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니 주미나는 이를 악물고 결국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확 찢어버렸다.그러자 윤하경의 눈에 가벼운 비웃음이 스쳤다.“찢으셔도 돼요. 어차피 이런 자료 제가 마음만 먹으면 수백 장도 다시 뽑아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오늘 우리가 말이 안 통하고 끝까지 싸우시겠다면 이 자료들이 어디로 갈지 한번 맞혀보시죠?”윤하경은 천천히 주미나에게 다가가서는 맑고도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분명 얼굴만 보면 예쁘장하고 순한 인상이었는데도 지금 이 순간 주미나는 괜히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예를 들면... 당신들 집안과 적대적인 기업 손에 들어갈 수도 있고요. 아니면 법원, 경찰서에 제출될 수도 있고요.”그 말은 단순한 위협처럼 들리지 않았다.주미나는 윤하경이 한번 마음먹으면 정말 그럴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순간 병실 안이 숨 막히는 침묵에 잠겼고 그때 침대 위에 누워 있던 구지호가 신음처럼 이상한 소리를 냈고 그제야 주미나는 움직였다.윤하경은 주미나를 지나쳐 구지호를 내려다보았다.“적어도... 지호 오빠 생각은 좀 하셔야죠.”주미나는 씹어 삼킬 듯 어금니를 꽉 물었다.정말 지금 당장이라도 윤하경을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결국 그녀는 낮고 거친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좋아. 알겠어. 네 말대로 하자.”윤하경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해주세요. 윤 회장님한테 더 이상 어리석은 짓 하지 말라고. 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 자료
강현우는 느긋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윤하경의 콧날을 가볍게 건드렸고 그 눈길은 여전히 장난기 섞인 다정함으로 가득했다.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침대에 누운 구지호를 바라봤다.지금의 구지호 상태가 누구 덕분인지는 말 안 해도 명확했다.그런데도 강현우는 전혀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여유롭게 웃으며 구지호를 향해 손까지 흔들었다.그 모습은 구지호 눈엔 그야말로 저승사자를 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구지호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강현우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고 침대 위에서 그가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주미나는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한 걸음 다가서서 강현우의 시야를 막아섰다.그제야 강현우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구 여사님, 하나만 정정하죠. 저랑 윤하경 씨는 결혼한 적도 없고 애인이라 하기엔 좀... 억울하네요.”주미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가 올 줄은 정말 예상 못 한 일이었다.“그럼 무슨 사이죠?”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평소보다 조금은 부드러워진 눈매가 인상적이었다.“좋아하는 사이라면 충분하지 않나요?”주미나의 눈이 가늘어졌고 잠시 시선을 세운 채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설마 지금 하경이가 현우 씨 여자 친구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죠?”그녀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사실 강현우가 그렇게 말할 리 없다고 단정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사가에서는 이미 강현우가 박씨 집안과의 정략결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입꼬리를 올렸다.“적어도 구 여사님 눈은 아직 멀진 않은 것 같네요.”“너!”주미나가 소리치려다 문득 멈칫했다.‘이 말인즉 설마 진짜 윤하경이 여자 친구라는 걸 인정한 거야?’애인과 여자 친구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전자는 숨겨야 하는 존재고 후자는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자리다.그제야 윤하경도 눈을 크게 뜨며 강현우를 올려다봤다.‘설마 정말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여자 친구라고? 심지어 주미나 앞에서?’이건 사실상 강현우가
구지호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윤하경을 붉어진 눈으로 노려봤고 그 눈빛 속 분노는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았다.그런 시선에도 윤하경의 얼굴엔 단 한 줄기 미동도 없었다.‘봐봐. 결국 인간이란 게 이렇지 뭐.’구지호가 지금 저리도 분노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이 저지른 일에 스스로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실패한 자가 원망을 엉뚱한 데 쏟는 셈이었다.애초에 윤하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구지호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걸 확인한 주미나는 뒤돌아서며 윤하경을 노려봤다.“너 대체 왜 온 거야? 지호를 그렇게 만들어놓고도 모자라니?”윤하경은 조용히 웃었다.“그 말은 좀 틀린 것 같은데요. 지호 스스로가 만든 결과예요. 남 잘못되게 하려다 본인이 당한 거잖아요? 어머니, 귀도 밝고 판단도 빠르신 분이 어쩌다 그 말만 믿고 절 원망하세요.”주미나는 콧방귀를 뀌듯 웃었다.“어머니? 웃기지 마. 난 그런 말 들을 자격 없어.”흥분해서 날을 세우는 주미나와 달리 윤하경은 줄곧 담담한 표정이었다.“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저야 거의 죽을 뻔하긴 했지만 그래도 수년의 정이 있잖아요.”“정?”주미나가 이를 갈며 그녀를 바라봤다.“난 네가 죽는 것만 바라는데?”“하... 지금도 후회해. 그날 밤 널 확 죽여버릴걸. 괜히 한 번 마음 약해져선... 너 같은 게 지호를 이렇게 만들고도 네 죽은 엄마한테 미안하지도 않아?”그 말에 윤하경의 얼굴이 갑자기 싸늘하게 식었다.조용히 있었던 그녀가 그 말을 들은 순간 확연하게 달라졌다.“닥치세요. 우리 엄마 입에 올리지 마세요.”화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마음이 무너진 건 그 순간이었고 목소리가 높아지자 주미나도 살짝 당황한 듯 움찔했다.그러고는 윤하경 뒤에 서 있는 건장한 남자들을 훑어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그래서 오늘 여기 온 이유가 뭐야? 강현우한테 기대기 시작했단 소리 하러?”주미나는 비웃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윤하경, 네 엄마가 무덤 속에서 네가 남자한테 몸 팔며 사는 꼴 보면 뭐라 할까? 기절할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윤하경 씨? 저 우지원이에요.”윤하경은 약간 의외라는 듯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우지원이 웃음을 섞어 말했다.“별건 아니고요. 대표님께서 윤하경 씨가 사람 필요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사람 필요한지 조건이랑 인원수 알려달라고 하셔서요.”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설마 했는데, 강현우가 정말 신경 쓰고 있었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꽤 큰 짐이 덜어진 느낌이었다.“수고 좀 해주세요. 좀 몸 쓰는 일에 능한 사람들로 열 명쯤? 딱 봐도 위압감 느껴지는 사람들로요.”우지원은 작게 탄성을 뱉었다.“오, 꽤 큰일인가 보네요? 사람은 언제쯤 필요하세요?”윤하경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한 시간 안에요.”“한 시간이요?”“네. 이번 일은 빨리 끝내야 해요. 하루라도 늦어지면 제 입장이 위험해지거든요.”우지원은 작게 중얼거리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준비해 둘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그렇게 통화가 끝났고 윤하경은 강현우 쪽 사람들은 믿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주미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주미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미 지난번 일을 겪은 뒤로 주미나와의 관계는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락을 피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결국 윤하경은 더는 연락하지 않기로 했고 대신 우지원에게 문자를 보내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는 카페를 나섰다.한 시간 뒤, 윤하경은 구지호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 들어섰다.그리고 놀랍게도 구지호는 이미 깨어나 있었다.하지만 여전히 온몸에 의료기기를 단 채 침대에 누워 있었고 움직일 수 있는 건 손뿐인 듯했다.예전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였던 만큼 그 몰락한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그래서였을까.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진 않았다.구지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윤하경을 가리켰다. 표정엔 놀라움과 분노가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놀란 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체격 좋은 남자들 때문이었고 분노는 아마
윤하경은 찌푸린 이마로 휴대폰을 들어 백정연의 전화를 확인했다.“여보세요?”그 순간 본인의 목소리가 심하게 쉬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어젯밤 강현우가 너무 거칠게 굴었고 그녀는 분명 울면서 몇 번이나 그만하라고 애원했었다.결국 이 목소리도 전부 강현우 탓이었다.사정을 모르는 백정연은 깜짝 놀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윤하경은 민망하게 코끝을 만졌다. 전화라서 다행이지 대면이었다면 얼굴이 벌게진 걸 들킬 뻔했다.헛기침을 한 번 하곤 자연스럽게 둘러댔다.“어젯밤에 좀 쌀쌀했나 봐요.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요.”“병원은 다녀오셔야죠. 괜히 더 심해지기 전에요.”“오늘 회의 있잖아요. 그거 끝나고 갈게요. 대신 단체 채팅방에 공지 올려줘요. 오늘도 늦는 사람은 전부 사직서 각오하라고.”그녀는 전화를 받으며 욕실로 향했다. 그런데 막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백정연의 말투가 어딘가 머뭇거렸다.“대표님... 그게... 오늘 회의는 아마 못 열 것 같아요.”“왜요?”윤하경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윤 이사님께서 오늘 회의 참석자 전원에게 휴가를 내렸어요. 회사에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고요.”순간 윤하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설마 했는데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이 사람이... 진짜 제정신이야?”회사 일에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 짓을 오로지 자신의 분노를 누르기 위해서 하는 짓이었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궁금하네. 도대체 머릿속엔 뭐가 들었는지.”백정연도 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도 답답하죠. 하지만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다들 난처해요. 아직 이사회 의장은 윤 이사님이니까요.”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게 웃었다.“그래. 아주 잘들 하시네.”그녀가 쉽게 물러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았기에 곧바로 말했다.“지금 당장 회의 참석자 전원에게 알려줘요. 오늘 회의 회사 앞 카페에서 진행할 거라고. 난 한 시간 후에 갈게요.”백정